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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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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래 명예회장 별세…기술 효성 이끈 ‘미스터 글로벌’

산업 일반

창업주인 고(故) 조홍제 회장과 함께 효성그룹을 일궈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재계의 큰 별’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29일 숙환으로 영면했다. 향년 89세(1935년생).1935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조 명예회장은 고(故)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일본 와세다대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하고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원에서 화공학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당초 대학교수를 꿈꿨으나 1966년 박사 과정을 준비하던 중 부친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귀국, 효성물산에 입사하며 기업인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동양나일론 울산공장 건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는 향후 효성그룹 성장의 기틀이 됐다는 평가다.1973년 동양폴리에스터를 설립하면서 화섬사업 기반을 다졌고, 1975년 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을 인수해 중화학공업에도 진출했다. 이후 1982년 효성중공업 회장직을 물려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섰다.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은 장남인 조석래 명예회장에게 효성을 물려줬고, 차남 조양래 한국타이어 명예회장과 삼남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에게는 각각 한국타이어와 대전피혁의 경영을 맡겼다.조 명예회장은 회장 취임 이후 경영 혁신과 주력 사업 부문의 글로벌화를 이끌며 효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특히 기술을 중시해 1971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06년에는 이를 효성기술원으로 개편했다. 이는 효성의 대표 제품인 스판덱스와 타이어코드 등이 탄생하는 원동력이 됐다. 효성은 1997년 자력으로 스판덱스 상업화에 성공했고, 2011년에는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고성능 탄소섬유를 세계 3번째,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을 적극 개척하며 효성은 전 세계 50여개 제조·판매 법인과 30여개 무역법인·사무소를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조 명예회장은 국제관계에도 밝아 민간외교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풍부한 국제 인맥을 바탕으로 미국, 일본, 중국 등 주요국 경제인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미재계회의, 한일경제협회,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한중재계회의 등 재계의 국제 교류단체를 이끌며 주요 교역 상대국과의 가교 역할도 적극 펼쳤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당시에는 양국의 반대 여론을 무마하고자 양국 재계 인사들과 미국 행정부·의회의 유력 인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등 민간외교의 중심에 섰다.국내 대표 경제단체인 전경련에서 1987년부터 2007년까지 20년간 부회장을 지낸 데 이어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회장을 맡아 국내 재계의 ‘얼굴’ 역할도 자처했다. 2017년 발간된 조 명예회장의 팔순 기념 기고문집에는 재계의 지인들이 기억하는 그의 일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은 정부에 적극 의견을 밝히는 조 명예회장을 두고 ‘재계 지도자’라 칭했고,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미스터 글로벌’이라고 불렀다.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송광자 여사, 장남인 조현준 회장과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 삼남 조현상 부회장 등이 있다.

2024.03.29 19:32

2분 소요
[경제 인사이트] 오랜 공업기지에서 친환경 발전을 도모하는 中 동북 3성

차이나 포커스

(중국 선양=신화통신) 랴오닝(遼寧)성 40만㎾(킬로와트) 풍력 프로젝트가 최근 진저우(錦州)시 헤이산(黑山)현에서 계통연계형 발전을 시작했다. 이는 중국 동북 지역이 '14차 5개년(2021∼2025년) 계획' 기간 동안 추진하는 주요 청정에너지 프로젝트다. 풍력발전기지에 설치된 80대의 5㎿(메가와트) 풍력발전 유닛은 연간 11억3천만㎾h(킬로와트시)의 친환경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이는 약 60만 가구의 한 해 전기 사용량을 충족하는 양으로 연간 100만t에 가까운 이산화탄소를 감축하는 효과가 있다.헤이룽장(黑龍江)·지린(吉林)·랴오닝성을 일컫는 동북 3성(省)은 중국에서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에 속한다. 최근 몇 년간 3성은 자원적 이점을 가지고 청정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육상 및 해상풍력단지, 그리고 태양광 및 바이오매스 발전소에서 제공하는 친환경 전력은 중국 동북 지역의 에너지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랴오닝성 좡허(莊河)시 해안선에서 20㎞ 이상 떨어진 바다 깊은 곳, 높이 약 100m의 '풍차' 300여 기가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다. 이 거대한 풍력발전 유닛은 날개를 끊임없이 회전하며 전기를 만들어 낸다. 중국화넝(華能)그룹이 건설한 이 해상풍력발전소의 누적 발전량은 이미 28억㎾h를 넘어섰다.한 달여 전 중국 국가전력투자그룹 둥베이(東北)회사는 랴오닝성 타이안(台安)현에 300㎿ 풍력발전 프로젝트를 착공했다. 이는 총 19억 위안(약 3천480억8천만원)이 투입된 대형 풍력발전 프로젝트로 2023년 말까지 단일 기계 용량 5㎿의 풍력발전 유닛 60대를 건설해 계통연계형 발전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다.석탄·철광·석유·목재 등 자원이 풍부한 동북 3성은 중국의 오랜 공업기지로서 한때 중국의 산업화 진행 과정에서 에너지와 원자재를 공급했다. 새로운 진흥 전략이 진행되면서 국가 에너지 안보와 생태 안전 수호를 위한 청정에너지 산업 발전이 추진되기 시작했다.'14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접어든 이후 동북 3성은 청정에너지 개발 계획을 잇따라 제정했다. 특히 랴오닝성은 48개의 주요 청정에너지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총 8천억 위안(146조5천600억원) 이상을 투자했다.지린성은 2025년까지 800만㎾의 태양광 발전 설비 건설과 3개의 1천만㎾급 신에너지 기지 구축을 목표로 잡았다.헤이룽장성은 혹한 지역에 적합하도록 다양한 에너지를 결합 이용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25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를 3천만㎾까지 끌어올려 전체 설비의 50% 이상을 차지하도록 할 계획이다.2016~2020년 동안 헤이룽장성은 단위 지역총생산당 에너지 소모량 연평균 3.2% 감소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지난해 1~11월 랴오닝성의 초미세먼지 평균 농도는 전년 동기 대비 14.3% 개선됐고 대기질이 우수한 날의 비중도 89.7%를 차지했다. 이는 2014년 새로운 표준이 시행된 이후 역대 동기 최고 수준을 기록이다.철강·석탄·시멘트·화학공업 등 중화학공업이 대거 포진해 에너지 소모량이 높고 오염이 심했던 랴오닝성 번시(本溪)시는 한때 '위성에서는 볼 수 없는 도시'라는 오명을 썼다. 그러나 현재 번시시의 삼림 피복률은 75%를 넘어섰다. 과거 70%도 되지 않았던 대기질이 우수한 날 달성률은 90% 이상으로 증가했다.저탄소 발전은 동북 지역 제조업에도 새로운 기회를 가져왔다. 지린성 바이청(白城)시 퉁위(通榆)현에 위치한 약 5.2㎞ 길이의 대로 양변에는 위안징(遠景)·싼이(三一)·둥팡(東方)전기 등 수십 개의 풍력발전 설비제조 기업이 모여 있다. 이 기업들이 취급하는 제품은 본체부터 날개, 타워 배럴에서 플랜지, 콤팩트 변전소 등으로 다양하다.퉁위경제개발구 관계자는 "퉁위현에 건설되고 있는 위안징 스마트풍력발전설비 산업단지, 500㎿ 에너지 저장 바나듐레독스배터리(VRB) 시스템 통합 프로젝트, 싼이 제로탄소 스마트제조산업단지 등 8개 프로젝트로 1만1천8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며 지역적 위치가 외지고 산업구조가 단일했던 퉁위현이 친환경 발전으로 새로운 성장점을 열었다고 말했다.

2023.01.0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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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인사이트] 中 신장(新疆), 실크로드 경제벨트에 활력 불어넣어

차이나 포커스

(중국 우루무치=신화통신) 중국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가 대외 개방의 첨병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아시아의 오지에 위치한 신장(新疆)은 운행 거리 8천768㎞에 달하는 신장(新疆)철도와 총길이 21만7천300㎞에 이르는 도로가 생기면서 조밀해진 입체형 교통망을 구축했다. 이와 함께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서부 대개발 ▷'일대일로' 공동 건설 등의 대외 개방 정책을 바탕으로 실크로드 경제벨트 핵심구역 건설에 주력하고 있다.◇질적 발전으로 수익증대 및 지역 번영 추구타커라마간(塔克拉瑪幹·타클라마칸)사막 서부에 위치한 신장(新疆) 자스(伽師)현의 주민들은 토양 염류화와 경작지 부족으로 빈곤에 시달렸다. 하지만 지금은 과실 산업을 키워 탈빈곤에 성공했고 지역 발전을 이끌었다. 한 관계자는 자스현의 올해 매실 수확량이 15만t을 웃돌고 매실 농사만으로 이 지역 40만 농민의 1인당 평균 소득이 5천 위안(약 100만9천850원)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신장(新疆)은 최근 10년간 주민의 수익증대를 돕고 지역 번영을 이끌자는 목표 하에 민생과 밀접하며 지역의 장기적 발전을 이끌 인프라 건설 및 산업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식량∙목화∙과일∙축산을 대표로 하는 현대농업의 생산성이 크게 향상됐고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투자와 산업 발전의 핫플레이스 조성중국은 최근 몇 년간 우루무치(烏魯木齊) 국제 육로항구구역, 카스(喀什)경제개발구, 훠얼궈쓰(霍爾果斯)경제개발구 등 신장(新疆) 지역에 55개 국가급 중점 개방 플랫폼을 설립했다. 이를 발판 삼아 신장(新疆)은 투자와 산업 발전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우루무치 국제 육로항구구역에 자리 잡은 싼이시베이(三一西北)중화학공업유한공사의 류전중(劉振中) 사장은 '일대일로' 이니셔티브가 계속 추진되면서 싼이그룹이 실크로드 경제벨트 내 중국 중서부와 중앙아시아, 유럽을 잇는 공작기계의 판매∙서비스∙물류 루트를 구축했다고 밝혔다.위청중(于成忠) 신장(新疆)훠얼궈쓰진이(金億)국제무역(그룹)유한공사 회장은 1990년대에 훠얼궈쓰 통상구에서 과채 수출입 무역을 하던 작은 회사를 오늘날 전자상거래∙요식업∙영화관∙관광농업 등을 운영하는 그룹으로 키워 냈다. 위 회장은 "2010년 정부가 훠얼궈쓰 경제개발구를 설립한 후 국가와 자치구가 기업 소득세 감면 등의 우대정책을 실시해 투자유치와 산업 클러스터 구축에 좋은 환경을 마련해 줬다"고 밝혔다.카스 경제개발구의 성장도 인상적이다. 2010년 카스 경제개발구가 설립된 뒤 올 7월까지 4천559개의 시장 주체가 활동 중이며 ▷전자 조립 및 가공 ▷방직∙의류 ▷현대 물류 ▷상업∙무역 물류 등의 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4만2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것으로 파악됐다.◇지역 간 협력으로 새로운 발전 기회 모색마오후이(毛輝)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발전과개혁위원회 부주임은 신장(新疆)이 최근 몇 년간 실크로드 경제벨트 핵심구역 건설을 동력 삼아 대외교류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러한 협력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유럽-아시아 간 협력 파트너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그 결과 신장(新疆)은 지금까지 25개 국가 및 국제기구와 21개 협력을 체결했고 176개 국가 및 지역과 경제무역 관계를 구축했다. 또한 신장(新疆)과 결연한 국제 우호 도시 역시 45쌍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2.10.0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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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국가부도 위기…최대 투자 한국 협력사업 먹구름

국제 경제

한국이 최대 투자국인 스리랑카가 극심한 경제난으로 국가 부도 위기에 몰렸다. 스리랑카에 진출한 한국기업들과 한국과의 협력사업에도 난항이 예상된다. 스리랑카는 현재 보유 외화 부족, 전력난과 단전, 물가 급등, 주유 공급난 등을 겪고 있다. 심지어 식품·의약품·종이 등 생활 필수품 공급난까지 발생해 민심을 성나게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학교에선 학생들이 종이가 없어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병원에선 마취약이 없어 수술을 미룰 정도다. ━ 에너지·생필품 공급난에 마취약 없어 수술 보류 외신에 따르면 스리랑카는 일부 화력·수력 발전소 가동을 일부 중단해 전력 생산이 급감했다. 하루 순환단전 시간을 1~5시간에서 최근엔 13시간까지 늘렸다. 발전소 가동이 끊기면 각 가정에 물 공급도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보유 외화가 부족해 석유·석탄 등 에너지 구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주유소마다 기름을 사려는 사람들이 장시간 줄을 서고 있다. 도심엔 민간업체가 운영하는 버스의 약 25%만 운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로등도 꺼진 지 오래다. 의료계도 마비됐다. 기본 상비약은 차치하고 마취약조차 없어 병원에선 수술을 미루고 있을 정도다. 종이 공급난으로 학교에선 시험을 연기했으며 현지 신문 매체인 아일랜드와 디바이나는 토요일자 발생을 중단했다. 용지뿐만 아니라 잉크 등 인쇄 관련 소모제품도 부족해 다른 매체들도 발행 간격을 늘리고 있다. ━ 곳곳서 시위 격화, 내각 총사퇴로 성난 민심 달래기 대통령 퇴진 시위가 연일 이어지는 등 민심이 폭발하고 치안이 불안해지자 스리랑카 정부는 시위가 빈발하는 주요 도심에 군인들을 배치하고, 비상사태 선포, 통행금지 강화, 소셜미디어(SNS) 접속 차단 등으로 억압하고 있다. 최근엔 내각 총사퇴로 사태 수습과 민심 달래기에도 나섰다. 스리랑카 내각의 장관 26명 전원이 3일(현지 시간) 밤 사임 의사를 밝혔다. 디네시 구나와르데나 교육부 장관은 “경제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논의한 뒤 대통령이 새로운 내각을 구성할 수 있도록 모든 장관들이 사직하기로 결정했다”며 밝혔다. 아지트 카브랄 중앙은행 총재도 다음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일부 야권 정치인들과 성난 수천 명의 시민들이 대통령 관저 앞으로 몰려가고 시위하고 군경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스리랑카 정부는 내각 사퇴라는 카드로 민심 수습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고타바야 스리랑카 대통령은 야권 인사들을 포함한 연립 내각 구성 등의 방안을 제안한 상황이다. ━ 신용평가등급 하락, 국가 부도 위기에 내몰려 스리랑카는 대외적으로 현재 국제 채무불이행(디폴트)이 불가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리랑카의 올해 총부채 상환 예정액은 70억 달러(약 8조5000억원)이지만, 외화보유액은 20억 달러(2조4000억원)에 불과해 부도 위기에 처했다. 주요 신용평가사는 지난해 말부터 이미 스리랑카의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한 상태다. JP모건체이스 분석에 따르면 미국과 스리랑카 간의 국채 수익률 격차는 28.36%포인트까지 벌어졌다. 간격이 통상 10%포인트만 초과해도 부실채권으로 간주되는데, 이미 2배 이상 초과한 것이다. 스리랑카의 국채 7월 만기는 10억 달러(약 1조2143억원)에 이른다. 국제신용평가업체 피치 분석 결과 스리랑카가 갚아야 할 대외 부채는 올해 70억달러(약 8조5001억원)에 달한다. 스리랑카의 무역적자는 지난해 12월 11억 달러(약 1조30357억원)로 2배 증가했으나, 외화보유액은 2월 기준 23억 달러(약 2조7928억원)에 불과하다. 스리랑카 정부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해 인도·중국 등에 지원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다. 인도는 스리랑카에 여신 한도를 늘려 10억 달러(약 1조2000억원)를 긴급 지원하고 있다. 중국도 25억 달러(약 3조원) 규모의 지원안을 검토 중이다. ━ 기반시설·도시건설 등 한국 협력 사업 난항 전망 한국은 스리랑카에서 최대 투자국으로 꼽힌다. 스리랑카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 중 20% 정도가 한국 기업들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투자·고용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연간 수출액 중 약 10% 전후는 스리랑카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에게서 나온다. 한국이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밟으며 2차산업-경공업-중화학공업으로 변화를 꾀할 때 스리랑카는 여전히 전형적인 농수산업 중심 국가로 머물러 있었다. 1990년대에 국내 인건비가 가파르게 치솟자 인력 중심의 제조 기업들은 중국·인도 등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 때 경남기업·한진해운·오션뮤직·삼양랑카 같은 일부 한국 기업들은 스리랑카로 진출했다. 한국 제조기업들의 진출과 생산에 힘입어 스리랑카의 경제구조는 제조업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농수산 국가이자 사회주의 국가였던 스리랑카 정부도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세금 면제, 외환 송금 자유 등 외국인 투자제도를 정비하고 한국기업들의 안착을 지원했다. 한국의 대 스리랑카 수출은 지난해엔 플러스로 전환하면서 큰 폭으로 증가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대 스리랑카 수출은 2021년 2분기 193.4%로 급증했으며 전년 같은 기간 대비 67% 넘는 무역수지 흑자도 기록했다. 한국산 합성고무·정밀화학제품·농약·의약품 등의 수출이 수출 증가를 이끌었다. 대 스리랑카 수입도 크게 늘어 지난해엔 1억4000만 달러(약 1699억원)를 기록했다. 특히 건설광산기계의 증가폭이 크게 증가했다. 한국기업들은 최근엔 스리랑카 정부의 스마트시티 구축 사업 진행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KT는 스리랑카 스마트시티 구축 사업협력을 맺고 스리랑카 콜롬보 인근에 과학기술신도시를 개발하는 사업에 인공지능·사물인터넷·빅데이터 등 KT 기술을 접목한다. 국토부도 스리랑카의 수도권 9개 신도시 개발에 참여, 과학기술신도시와 공항배후도시 조성에 교통·스마트홈 등 스마트시티 건설 노하우를 전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국무역협회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 장기화로 스리랑카 역시 온라인 상거래와 소셜미디어 사용이 급증하고 있는데다 최근엔 온라인 학습 사이트, 스마트폰 생중계 시청, 스마트폰으로 세금 납부 등 새로운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어 소비 성향도 변화가 일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국가 개발의 상당부분을 국제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스리랑카가 2025년까지 거액의 외채 상환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기반시설·신도시 개발 등 한국 기업들과 맺은 다양한 협력사업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2022.04.05 19:00

4분 소요
‘중공업 고도성장’ 대신 ‘물가 안정’…공권력으로 물가 잡은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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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군부독재, 노동운동 탄압 등으로 정권을 이어가는 동안 국내 경제는 3저(저금리·저유가·저환율) 호황을 바탕으로 성장세를 그렸다. 이 시기 국내 경제는 성장과 함께 물가안정이 이뤄졌다. 전두환 집권 초기였던 1980년대 초에는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 2차 국제석유파동(오일쇼크) 충격이 겹쳐 경제적 불안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1980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로 역성장 했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실업률도 5.2%였다. 이에 전두환 정부가 박정희 정부에서 이어받아 추진한 정책이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이 계획은 무리한 고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경제·사회기반을 만들어 경제도약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취지였다. 고도성장을 대신해 물가안정을 추구한 것은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제정책의 기조전환을 추진한데 따른 것이다. 먼저 전두환 정권은 조세제도를 바꿔 기업·산업의 경쟁력을 위축시킬 수 있는 제도적 금융지원이나 세제혜택을 없앴다. 당시 국내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수출 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하기 위해 시행하던 주요 공산품 가격과 서비스 요금 통제, 수입 억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낮은 금리의 수출 지원 금융과 같은 정책자금과 관치 금융제도, 각종 보조금 지급 등 지원 제도도 남아 있었다. 이들 제도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불러왔다. 한 예로 저금리 특혜를 적용한 수출 자금을 부동산 투기자금으로 활용하며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농촌 주택 건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자 시멘트 수급 사정이 악화했으며, 이렇게 지은 주택은 이촌향도 현상에 장기적으로 빈집이 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는 성장 지원 대신 기업이 경쟁력을 갖춰 물가안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이 밖에도 수입자유화 정책를 시행, 수입규제를 풀어 공급비용이 상승할 여지를 줄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4년 5월 약사법·마약법 등 특별법에 의해 수입이 금지된 344개 품목의 수입자유화 조치를 시작으로 1985년 7월에는 국제경쟁력을 보유한 품목, 국내 생산이 불가능한 비경쟁 품목 등 총 235개 품목을 수입자동승인 품목군에 포함했다. 이에 국내에서 수입산 농산물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도 했으며, 1986년 기준 수입자율화율은 약 92%에 달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정부는 물가상승률을 낮추기 위해 세출 예산을 동결하고 공산품 가격 인상을 억제하는 한편, 추곡수매가를 인상하지 않았으며 근로자 임금도 동결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극심한 반대에도 전두환은 공권력을 활용해 이들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 같은 조치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1년 21.4%, 1982년 7.2%, 1983년 3.4%로 안정화하는 흐름을 보였다. 물가가 안정되자 수출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무역수지는 적자를 줄여 나갔고, 1986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42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흑자 규모는 1988년에 114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강력한 물가안정책에 오일쇼크 뒤 3저 호황기에 들어서며 경제성장률(국내총생산 성장률)도 높아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 경제성장률은 1980년 -1.6%에서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올랐다. 전두환 집권기(1981~1987년)에 한국의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10.2%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의 물가안정책을 두고 공권력을 동원한 노동 탄압으로 임금 상승을 억제, 물가를 관리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거세다. 거시경제 안정화를 바탕으로 기업은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근로자의 삶은 나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물가안정책이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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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강소기업 육성했지만…목숨줄 쥐락펴락에 정치자금도 뜯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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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중소기업 육성에 힘을 쏟기도 했지만, 자신의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존폐를 좌우하고 계열사를 빼앗기도 했다. 앞서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한 고도성장의 지속에는 이바지했지만 각종 부작용도 드러냈다. 1970년대 후반들어 한국 경제에 물가상승, 국제수지 악화, 중복·과잉시설 심화 등의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목표지향적 계획에서 유도적 계획 체제로 바꾸었고, 중소기업 육성을 지원했다. 전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뒤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웠는데, 대·중소기업 격차 해소도 그가 내세운 ‘정의’ 중 하나였다. 이에 그가 재임하던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년) 기간 중엔 각종 중소기업 육성정책이 등장했다. 특히 1차년도인 1982년 4월초에 수립한 중소기업 진흥 10년 계획(1982~1991)을 기반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며 중소기업의 전문화를 유도했다. 대기업들과 상호보완적 분업체제를 형성할 수 있도록 육성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중소기업의 성장기여율(고용과 생산 등 전체 산업 성장에 기여한 비율) 증가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1963~1979년 사이 중소기업의 수는 전체 기업의 80~90%를 차지했지만 성장 기여율은 20%(제3공화국, 1963~1971년), 33%(제4공화국, 1972~1979년)에 불과했다. 전두환 정부 시기 중소기업 진흥 정책 실시 결과, 생산부문에서 중소기업의 성장 기여율은 41%까지 높아져 대기업(59%)과의 격차를 줄였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경제성장 등을 들어 전 전 대통령의 당시 경제정책에 후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사례도 많다. 전두환 본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제그룹을 해체한 것이 대표적이다. 1949년 왕자표 고무신을 시작으로 1981년 국산 신발 브랜드 ‘프로스펙스’을 만들며 당시 21개 계열사를 거느리던 재계 7위 국제그룹이 ‘부실기업 정리 및 산업 합리화’를 명분으로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공업의 구조재편을 단행하며 재벌 산하의 기업을 빼앗기도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창원중공업을 빼앗겼다. 아울러 정 회장에게는 1977년부터 맡고 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 사퇴 압력을 넣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은 현대양행 창원공장(현 두산중공업)을 넘겨야했다. 동명그룹의 사례도 있다. 동명그룹은 목재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1965년 국내 재계서열 1위의 재벌이었고, 해체 전까지 해운·중공업·식품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룹은 1979년 원목 가격 상승과 사업 다각화에 따른 자금난을 겪고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강석진 회장 등을 악덕 기업주로 지목하고 빼돌린 은닉재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동명목재를 수사했다. 이에 동명그룹은 자구노력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부도를 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계에 손을 뻗친 사례로는 일해재단이 있다. 당시 그는 여러 재단을 설립해 국내 주요 대기업 회장을 한자리에 불러 자금 출연을 요청했다. 일해재단은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으로, 전 전 대통령은 운영비 명분으로 정치자금을 모집했다. 재단은 1984년 3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재벌로부터 약 598억5000만원의 기금을 모았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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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쇼크에서 시작한 석유비축기지 건설 41년만에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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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자원 전쟁이 다시 불거지고 있는 요즘, 정부가 추진해온 석유비축기지 건설 사업이 41년 만에 마무리됐다. 2016년 착공한 울산 비축기지 건설이 완료되면서 우리나라의 석유비축 계획 추진이 41년여 만에 실현된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석유공사는 19일 석유공사 울산지사에서 울산 석유비축기지 준공식 열고 석유비축기지 시설의 일부를 공개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울산 석유비축기지(저장능력 약 1030만배럴) 준공을 포함, 전국 비축기지 9곳(구리·거제·곡성·동해·서산·여수·용인·울산·평택)에서 총 1억4600만배럴의 저장 능력을 확보하게 됐다. 정부가 현재 비축 중인 석유는 총 9700만배럴에 이른다. 이 비축양은 국제에너지기구(IEA) 국제기준을 적용해 추산하면 외국에서 석유 추가 수입이 없다는 가정 하에 우리나라 국민이 106일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여기에 민간 보유량(약 1억배럴 추산)까지 합산하면 약 200일 버틸 수 있는 양이다. 정부는 1980년부터 석유비축기지 건설을 추진해왔다. 1970년대에 세계 석유 파동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전략을 수립하게 됐다. 1차 석유파동은 1973년에 발생했다. 제4차 중동전쟁 발발 후 페르시아만 연안의 6개 산유국들이 가격 인상과 생산 감축으로 석유를 무기로 사용하는 전략을 썼다. 이로 인해 선진국들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제불황과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상태)이 발생했으며 우리나라도 물가 급등과 무역 적자 급증을 겪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는 시기여서 석유 파동의 충격이 컸다. 5년 뒤인 1978년 이후 2차 석유 파동이 발생했다. 1978년 이슬람 혁명을 일으킨 이란의 석유 수출 중단 선언,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무기화 선포 등 일련의 사태로 석유 값이 천정부지로 급등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는 당시 정치적 혼란에 경제적 오일 쇼크까지 겹치면서 경제성장률 마이너스, 실업률과 물가 상승, 환율 급등 등을 겪어야 했다 이에 우리나라는 1980년부터 석유비축계획을 세우고 석유비축사업을 추진해왔다. 그 일환으로 2016년 울산 비축기지 지하공동 건설에 착수한 것이다. 정부는 이날 준공식에서 비축기지 건설에 기여한 손준택 석유공사 차장 등 총 8명에게 산업부 장관과 석유공사사장 표창을 수여했다. 이와 함께 시공사인 SK 에코플랜트, 설계·감리를 맡은 삼안과 벽산엔지니어링, 터널굴착공사·기계설비공사 협력사 동아지질과 유벡에 감사패를 전달했다. 박기영 산업부 제2차관은 “3년 만에 국제유가가 최고에 이르고, 최근엔 요소수 등 원자재에 대한 수급 불안정 사태가 나타나는 등 에너지와 주요 원자재의 수급 불안정성이 갈수록 증가하는 시기에 에너지 자원을 비축하는 석유저장시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고 축사했다. 이날 준공식엔 박기영 산업부 제2차관을 비롯해 이채익 의원, 권명호 의원, 울산광역시 부시장, 석유공사 사장 및 비축건설 관련 기업 임직원들이 참석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gang.co.kr

2021.11.2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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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경제 大예측 | 중후장대 침체 벗어날까?] 자동차·조선·철강 수요회복 전망… 정유는 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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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 수요하락 국면… 환경 규제, 유가가 변수 자동차·조선·철강·중화학공업 등 중후장대(重厚長大·무겁고 두껍고 길고 큰) 산업은 한국 경제의 핵심 축이었지만 산업의 구조적 변화로 수년간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0년엔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경영상 어려움이 심화했고,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에 속도가 더해지며 산업에 대한 주목도도 크게 낮아졌다.2021년에도 코로나19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2020년의 기저효과에 의해 세계 수요는 모든 산업에서 증가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산업연구원은 수요 하락이 장기적 추세인 철강이나 항운 등의 정상화가 늦어져 수요에 영향을 받는 정유 등의 회복세는 다소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친환경 관련 이슈에 따른 환경 규제로 친환경 선박 등 조선 발주는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제 자동차 시장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한국 시장은 개별소비세 인하 등 소비 진작 정책으로 성장했지만,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동차 판매가 감소했다. 이에 따라 한국 자동차 기업들은 내수 시장에서 선전했지만 해외 시장에선 어려움을 겪었다.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2020년 1~10월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해 한국GM·르노삼성·쌍용자동차 등 국내 자동차 회사들의 생산 대수는 288만5481대로, 전년 동기(326만6698대) 대비 11.7%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의 내수 판매는 같은 기간 133만4105대로 6.2% 증가했지만, 해외시장 침체로 수출이 23.2% 감소한 152만4045대에 그쳤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현대·기아차의 해외생산(245만6151대)도 전년 대비 24% 감소했다.2021년의 자동차 시장은 정반대의 양상이 펼쳐질 전망이다. 해외 시장에선 이연됐던 수요가 늘어나고 2020년의 기저효과로 수출·해외 생산이 성장세로 전환하지만, 국내 시장에선 개별소비세 인하 정책 종료로 인한 판매 감소가 예상된다. 수출과 해외생산 규모가 국내시장보다 커서 종합적으론 판매량 증대가 일어날 것이란 분석이다.특히 기대는 친환경차 시장에 집중된다. 2021년부터 유럽연합(EU)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며 기존의 내연기관차는 유럽시장 수출에는 제한이 걸릴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다만 전기차 등 친환경차의 수요는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마냥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간 어려움을 겪던 쌍용자동차는 모회사인 인도 마힌드라의 지원이 끊기며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고 자율구조조정 제도를 이용한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3개월 안에 매각협상이 원활히 이뤄지면 회생의 길이 열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청산될 가능성도 있다.조선업은 당초 2020년 일감 확보 기대가 컸지만 실상은 달랐다. 수주한 물량을 2년여에 걸쳐 건조하는 조선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대형 3사들의 재무상태는 전년보다 나아졌지만 수주가 줄어 수주잔고가 크게 줄었다. 2020년 10월 기준 한국 조선업 전체 수주잔량은 1842만CGT로 연초 대비 21.1%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다만 2021년에는 전세계에서 선박 발주가 많이 늘어날 거란 전망이 나온다. 특히 한국 선사들은 중국 선사 대비 경쟁력이 높은 액화천연가스(LNG) 선박을 중심으로 수주가 많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진다.수주 기대감은 2020년 연말부터 현실화하고 있다. 최근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글로벌 수주를 연일 공시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선박 계약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2020년 진행된 카타르의 대규모 LNG선 슬롯(slot) 예약도 2021년 정식 발주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정부 발주물량은 2020년에 비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전세계에서 선박 발주가 2021년부터 4년에 걸쳐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한편, 한국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의 합병은 유럽의 결합심사가 늦어지면서 지연되고 있으며 주요 중형 조선사의 매각도 진행이 더디다. ━ 수요 회복 철강, 예측 불가 정유 조선과 자동차 업황의 침체에 따라 철강업도 2020년 침체기를 보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2020년 1~3분기 국내 철강업체의 조강 생산량은 4960만t에 그쳤다. 연간을 기준으로 4년 만에 7000만t을 밑돌 전망이다. 2021년엔 세계 경제 회복세와 맞물려 철강 수요가 회복될 것으로 기대한다. 각국이 경기부양을 위한 인프라 투자를 확대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세계철강협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2021년 철강 수요가 2020년 대비 4.1% 증가한 17억9500만t이 될 것으로 추산한 바 있다. 코로나19 확산 추세가 심각하던 2020년 6월 내놓은 전망치인 17억1700만t보다 상향 조정됐다.다만 중국 등과의 경쟁으로 증가 폭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2020년 생산량이 4.5% 늘어 주요 생산국 가운데 유일하게 증가했다. 이에 맞춰 한국 철강사들은 제품 포트폴리오의 고부가제품 위주 전환, 생산원가 절감 등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설비 합리화, 유럽의 철강 탄소 중립 추진 등 선진국은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철강산업의 자발적 구조조정 추진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정유업의 업황은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다. 기록적인 저유가로 인해 국내 정유 4사는 2020년 5조원 규모의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추산된다. 정유업계의 원유 정제설비 가동률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결국 2021년 전망은 코로나19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지느냐에 달렸는데, 수요가 얼마나 회복될지는 미지수다.수요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국내외 조세 강화 움직임이란 변수가 남아있다. 최근 발의된 지방세법 개정안에는 유류 정제제품이나 유해 화학물질 취급량에 세금을 부과하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에서도 바이든 당선인의 선거 공약인 ‘탄소 국경 조정세’가 도입될 수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재생 에너지 사용 비중이 낮아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분석한다.- 최윤신 기자 choi.yoonshin@joongang.co.kr

2020.12.2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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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한가위’ 11인의 시선 | 이종우-투자] 30년간 국내 주식 투자 수익률은 채권·부동산에 뒤쳐져

부동산 일반

중후장대 산업 대체할 곳을 찾지 못한다면 박스권 맴돌 수 있어 코로나19 확산 이후 주가가 상승하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여러 일들이 일어났다. 우선 주식관련 책이 잘 팔린다. 1년전에는 주식은 고사하고 경제관련 서적 조차 베스트셀러 10위내에 들어가는 일이 드물었는데 지금은 투자 관련 책이 20위중 8개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졌다. 유튜브도 케이블 TV도 사정이 비슷하다. 모두 주가가 오르면서 생긴 현상들이다. 외환위기 직후 8개월 사이에 주가가 350% 상승했을 때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만큼 과연 주식 투자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90년에 1000만원을 갖고 주식, 채권, 서울지역 아파트에 투자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주식에 투자한 돈은 지금 2640만원이 돼 있을 것이다. 종목에 따라 다르지만 코스피를 가지고 계산하면 그렇다. 서울지역 아파트에 투자했다면 이제 4170만원이 됐다. 채권을 샀다면 8261만원이다.결과적으로 주식은 다른 어떤 자산보다 지지부진한 성과를 기록했다. 주식의 연 평균 수익률(CAGR)은 2%를 조금 넘을 정도여서 채권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건 뜻밖에도 채권이다. 1990년대 금리가 두 자리였던 영향이 크지만 금리가 낮았던 지난 10년사이에도 성적이 나쁘지 않다. 채권과 비슷한 수익을 올린 곳은 강남 아파트 밖에 없다. 금리가 낮아 저축에서 투자로 돈이 넘어왔을 거란 생각과 달리 돈은 주식에서 빠져 채권으로 움직였다. 2011년 88조원이었던 주식형 수익증권 잔고가 최근 40조로 줄어든 반면 채권형은 8조3000억원에서 30조원으로 4배 가까이 늘어난 게 대표적인 예다. ━ 높은 금리와 산업구조 때문에 주가 부진 과거의 투자 실적이 미래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망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주식 시장은 지난 30년처럼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월등히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지도 못할 것이다. 5년단위로 볼 때 연평균 주식투자 수익률은 금리에 약간의 추가 수익이 더해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전망된다. 현재 회사채 수익률이 2%대 후반이니까 주식수익률은 3%대 중반에서 4%대 정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5년으로 환산하면 누적 수익률이 20%에 해당한다.3월에 코로나19가 발생한 후 주가가 저점에서 70% 넘게 올랐기 때문에 ‘5년동안 겨우 20% 밖에 안 돼?’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전 상황을 고려하면 이 숫자가 터무니 없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 5년전인 2015년 9월 코스피는 1960이었다. 지금이 2400정도니까 5년 간 누적 상승률은 22%다. 10년전으로 돌아가면 결과가 더 옹색하다. 2010년 9월 코스피는 1880이었다. 10년간 누적수익률은 28%에 그친다. 코로나19로 주가가 단기에 급등했기 때문에 주식과 부동산이 한없이 큰 이익을 낼 것 같지만 상황이 바뀌면 또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다.긴 투자 기간을 고려하면 주식시장 수익률은 저조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1975년이후 45년동안 코스피가 73에서 2400까지 올랐지만 실제 상승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코스피는 100을 넘는데 7년 6개월, 1000을 넘는데 16년 5개월이 걸렸고, 2000에서도 현재까지 12년동안 붙잡혀 있는 상태다. 반면 주가가 고점을 뚫고 오르는 이른바 대세 상승 기간은 9년 밖에 되지 않는다.우리 시장이 이렇게 장기간 지지부진했던 건 금리가 높아서다. 과거에는 은행에 예금을 해도 1년에 15% 이상 수익을 얻을 수 있는데 굳이 주식에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자산에서 주식보다 큰 수익이 난 것도 주식투자를 꺼리게 된 이유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이다. 강남지역 땅값은 개발이 시작된 후 10만배 가까이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주식에 투자할 필요가 없었다.산업구조도 주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업의 채산성이 낮다 보니 주가가 특정 지수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종합주가지수 100이 경공업이 우리 경제의 중심일 때 주가가 오를 수 있는 최대치였고, 중화학공업이 중심일 때는 1000을 넘지 못했던 게 대표적인 예이다. 다행히 2007년에 IT산업 발전과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덕분에 중화학공업의 수익성이 높아지면서 코스피가 2000을 넘었지만 그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 향후 주식이 높은 수익을 낼지는 미지수 지금도 우리 경제의 중심 축을 이루고 있는 중후장대산업을 대체할 곳을 찾지 못해 주가가 크게 오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나스닥 시장이 25년 사이 30배 가까이 오른 건 하이테크 산업에서 세계적인 기업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10년째 박스권만을 맴돌고 있다.코로나19 확산 이후 종목별 흐름에서 나타난 특징은 배터리, 바이오 등 성장 산업에 대한 기대가 어떤 때보다 커졌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애플, 테슬라, 아마존 등을 모델로 삼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미국 시장을 끌고 온 건 소프트웨어가 강한 플랫폼 회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마존이다. 만일 과거 유통회사가 아마존만큼의 시장 지배력을 가지려 했다면 세계 곳곳에 수없이 많은 백화점을 내야 했을 것이다. 아마존은 이를 서버 증설을 통해 해결했는데 그만큼 한 기업의 세계 시장 지배력이 커진 것이다.우리 기업은 이런 변화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소프트웨어를 통한 지배는 하드웨어를 통한 지배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선두주자가 구축해 놓은 생태계를 넘는 게 하드웨어보다 더 어렵다. 이런 한계 때문에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의 성공모델은 네이버처럼 자국 시장을 확실히 지배하는 형태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는 국내 제조업체가 세계 시장에서 행사했던 영향력이 과거보다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주가는 경제 상황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할 뿐 지속적인 상승을 기대하기 힘들다.코로나19 이후 주가가 오르면서 주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합당한 이익을 얻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투자 성향이 공격적인지 방어적인지 파악해 본인에게 가장 맞는 투자법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투자는 이성으로 시작하지만 탐욕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시장은 특히 더하다. 즐거움보다 고통을 줬던 기간이 더 긴 곳이다. 많은 사람이 주식에 몰입해 있을 때 멈춰서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경제 및 주식시장 전문 칼럼니스트로, 오랜 기간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해당 분석 업무를 담당했다. 자본시장이 모두에게 유익한 곳이 될 수 있도록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등 주식분석 기본서를 썼다.

2020.09.2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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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주기 주목 받는 최종현의 경영 철학] 최종현 25년(CEO 재임 기간) 뿌린 씨앗, 글로벌 SK 열었다

산업 일반

‘총신이 길면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뚝심으로 밀어붙인 중장기 사업 결실 맺어 수론(數論)에서 6은 완전수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6일에 걸쳐 세상을 창조했고, 눈의 결정은 정육각형이며, 벌집과 광물은 연속된 정육각기둥의 집합체다. 28 역시 완전수다. 남·녀가 결혼을 많이 하는 나이는 28세, 신생아의 생후 한 달은 28일이다. 완전수는 수학적 가설과 여러 물리·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쓰인다.이에 비해 독립된 개체로서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수는 수리·물리 현상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개인의 감성·경험·철학·통찰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최태원 SK 회장의 완전수는 22다. 최 회장은 2005년부터 대면 결재나 외부 행사 등 사인을 해야 할 때 숫자 22를 함께 쓴다. 2009년 대한핸드볼협회장에 선출돼 태릉선수촌을 방문했을 때는 등번호 22를 달고 시구하기도 했다.최 회장이 22를 아끼는 이유는 ‘행복(幸福)’ 두 글자의 한자 획수를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의 행복과 사회적 가치 창출이란 자신의 뜻과 경영 목표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최 회장의 메시지는 항상 수수께끼 같고 우회적이며 남들이 곱씹게 한다.올해는 최 회장의 부친 고(故) 최종현 SK 회장이 22주기되는 해다. SK를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키운 최 전 회장은 1998년 8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전 회장은 생전 장묘문화를 개선을 주장했고, 실제 자신이 세상을 떠나며 “내 시신은 매장하지 말고, 화장(火葬)하라”고 남겼다. SK그룹은 최 전 회장의 유지에 따라 500억원을 기부해 충청남도 세종시에 종합추모시설 은하수공원을 짓기도 했다.최 전 회장이 죽음의 현세적 의미를 찾은 것과 최 회장의 행복 경영은 의미론적으로 통한다. 부전자전이다. 두 사람 모두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행복(行福)을 추구하는 행동은 일견 불자(佛子)스럽다.22는 최 회장의 현세와 최 전 회장의 사후가 교차하는 숫자지만, 이를 매개로 최 전 회장의 업적과 발자취, 경영 철학 등을 되짚어 봤다. 최 전 회장이 생전 뿌린 사업적 씨앗을 추도(追道)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다.SK가 애플이라면 고 최종건 회장은 스티브 잡스에, 그의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은 팀 쿡에 빗댈 수 있다. 최종건 전 회장이 잡스처럼 창업자로서 기업의 초석을 다지고 비전을 제시했다면, 최종현 전 회장은 쿡처럼 기업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혁신가 잡스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2011년 애플의 주가는 50달러, 연 매출은 1080억 달러(2011 회계연도)였다. 관리형 CEO인 쿡이 이끌고 있는 애플의 주가는 500달러까지 치솟아 시가총액은 2조 달러로 불어났으며, 연 매출은 2602억 달러(2019 회계연도)에 달한다.경영성과는 거시경제 여건과 시장상황 등 복합 변수가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숫자만 놓고 CEO의 역량을 재단하거나 우열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애플의 경우처럼 기업의 성장 경로마다 적합한 CEO가 중요하며, 시의적절한 리더십이 기업의 성쇠를 가른다. ━ “유학 안 가도 돼” 부친 함께 설득한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은 1960~7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에 SK를 체계적으로 성장시킨 관리형 CEO다. 그러면서 남다른 통찰력으로 2020년 SK의 미래 먹거리의 초석을 닦기도 했다. 1세대 창업자 중 흔치 않은 해외 유학파다. 위스콘신대에서 화학(학사),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석사)을 전공했다.최 전 회장이 선경의 경영 일선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0월이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최 전 회장은 아버지 최학배 대성상회 대표의 사망으로 10년 만에 급거 귀국했다. 늦은 귀국으로 부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최 전 회장은 한국에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부사장 직함을 달고 선경직물에 출근을 시작했다.경영에 참여하게 된 최 전 회장은 회사 경영 현대화 등 시스템 개혁부터 나섰다. 당시 선경직물은 여느 국내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며 임직원 급여가 밀리기도 했다. 최 전 회장은 인사관리와 급여체계·구매·판매 등 경영관리 부문을 전면 개편하며 시스템으로 일하는 회사를 만들었다.1965년에는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손길승 명예회장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는 등 직접 인재 관리까지 나섰다. 손 명예회장은 최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6년간 SK그룹의 총수를 맡은 샐러리맨의 신화다. 정유화학·이동통신 등 SK의 핵심 사업을 현재 반열까지 올려놓으며, 최 전 회장이 유일하게 파트너로 인정하는 인물이다.최종건 전 회장은 최 전 회장의 혁신 행보를 전폭 지원했다. 자신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진지하고 과묵하며 배려심 깊은 동생을 유독 아꼈다. 최종건 전 회장의 창업자금 마련 일화는 두 형제의 우애를 잘 보여준다.최종건 전 회장은 6.25 전쟁이 끝나자 사업에 반대하는 부친으로부터 선경직물 불하자금 200만원 빌리려 온갖 애를 썼다. 최종건 전 회장은 6.25 여파로 망가진 선경의 직물기계를 모두 자기 손으로 수리하며 회사에 공을 들였다. 이 고비만 넘으면 사업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그러나 부친은 “가산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완강히 맞섰다. 이 모습을 본 최종현 전 회장은 “저는 유학을 가지 않아도 좋으니 형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부친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종현 전 회장은 학업 성적이 뛰어나 별도로 과외를 받았고,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 형님의 유언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 그런 최종현 전 회장이 학업까지 포기하겠다고 하자 부친도 결국 손을 들고 최종건 전 회장에게 200만원을 빌려주게 됐다. 선경직물의 마중물이 된 돈이다. 이후 최종건 전 회장은 사업을 하며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아우의 유학 경비에는 일절 손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격동의 1960~70년대, 선경직물도 수차례 위기와 기회를 맞이한다. 최종현 전 회장이 부사장에 취임한 1962년부터 1971년은 제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되던 때다. 1950년대 물세탁 없이 재단이 가능한 ‘닭표’ 인조견으로 시장을 휩쓴 선경직물은 1960년대 들어 원자재부터 완제품까지 섬유의 수직 계열화에 나섰다. 이를 위해 1966년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수립해 원사사업 진출 계획을 밝히고,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의 교두보로써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세우기로 했다.1962년 4월 8일에는 최초로 수출 실적을 올렸는데, 해외 바이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선경’의 영문 이니셜을 따 브랜드로 사용했다. ‘SK’란 이름의 첫 등장이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 해외섬유의 인수·확장, 울산직물·선산섬유 설립, 스카이론(SKYRON) 브랜드의 탄생, 아세테이트·폴리에스터 생산, 선경화섬·선경합섬 설립 등 혁명적 변화를 맞았다.그러던 중 선경직물은 1973년 변곡점을 맞는다. 1972년 정부가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을 발표하면서 섬유가 지원 산업에서 빠진 것이다. 최종건 전 회장은 이전부터 정유·화학 분야에 뛰어들어 원유조달부터 정제, 추출, 섬유 제작까지 수직계열화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임종철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의 저서 를 보면 한국의 화학섬유공업은 1959년 미진화학이 하루 2t 규모의 폴리비닐알코올(PVA) 공장을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수요가 급증하며, 1969년에는 하루 128.5t 규모로 커졌다.이에 최종건 전 회장도 정유공장을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973년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읍 일대에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미국에서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이 터지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최 전 회장도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월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유언은 간명했다.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최종현 전 회장은 바로 선경합섬의 대표로 취임했다. 최 전 회장은 회사가 자유롭게 수출입을 할 수 있어야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정유·화학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종합상사 역량의 향상은 불가피했다.최 전 회장은 1975년 신년사를 통해 “선경이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하기 위해 두 가지를 당부한다”며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 확립을 위해 석유화학공업 진출, 석유정제사업 성취가 그것이다. 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에 더불어 국제적 기업으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마침 정부는 1975년 종합 무역상사 육성 방안을 발표하고 원자재 수입 요건 완화, 수출금융 지원, 외국환은행 다수 거래 허용, 외환자금 보유 허용 등의 지원책을 내놨다. 다만 자본금 10억원, 수출 연 5000만 달러 이상, 해외지사 10개 이상 등 선정 요건이 까다로웠다. 삼성물산·대우실업·한일합섬·국제화학·쌍용 등 5개 회사만이 이 조건에 부합했다.최 전 회장은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1976년 사명을 선경직물에서 선경으로 바꾸는 한편 선경기계·크로바상사를 인수하고, 선경식품·선경금속·선경반도체·선경건설 등을 설립했다. 이런 확장은 선경이 70~80년대 그룹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됐지만, 단기적으로 재무상황이 나빠졌다. 선경의 부채비율은 1979년 938%, 1980년 1507%로 불어났다. ━ 소재·섬유 수직계열화 노리고 석유사업 진출 그럼에도 최 전 회장은 정유·화학 회사로의 비전을 놓지 않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에 연구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일본이 한국의 정유·화학 산업 발전을 경계하며 기술 이전에 미온적이었고, 최 전 회장은 빚을 내서라도 자체 기술을 개발한다는 뜻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폴리에스터필름 개발에 성공했고, 곧바로 공장을 지어 상용화에 나섰다.정부와 여론도 선경의 독자기술 개발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우호적 환경 조성은 선경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는 자양분이 됐다.미국 걸프는 1980년 석유공사 보유 지분 50%를 전량 양도하고 철수키로 했고, 정부는 곧바로 석유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정부가 밝힌 석유공사 최대주주의 조건은 원유확보 능력, 자금조달 능력, 산유국 투자유치 및 교섭 능력, 경영관리 능력, 성실성 등이다.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었던 정부가 산유국과의 관계를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당시 국내엔 강대한 석유패권국과 협상자리를 만들기는커녕 친분을 가진 회사조차 드물었다. 그럼에도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석유공사는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인 매물이었다.신뢰는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좌우하며, 쌓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사업의 중장기적 안정성이 요구되는 장치 산업은 더더욱 그렇다. 정부가 내놓은 산유국 투자 및 원유 조달 능력은 벼락치기로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산유국과 깊은 신뢰 관계를 쌓은 회사는 선경이 거의 유일했다.최종현 전 회장은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남다른 친분을 맺었다. 최 전 회장과 사우디의 친분이 빛을 발한 것은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1973년이다. 당시 사우디가 주축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한국을 석유 금수국으로 분류해 10개월 안에 모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이에 정부는 최 전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최 전 회장은 비공식 정부사절로 사우디를 방문해 석유공급 재개의 물꼬를 텄다. 또 1975년에는 사우디 국영화학공사(NCI)가 추진하는 플라스틱 공장 건설계획에 10%를 투자키로 했고, 무역상사 출범 뒤에는 수출대금 일부를 사우디 왕가 대리인에 수수료로 지급했다.1976년에는 사우디 왕족을 국내에 초청하는 등 친분을 이어갔다. OPEC의 ‘황제’ 격인 야마니 사우디 석유상은 1977년 최 전 회장을 초청해 “한국이 필요한 만큼 원유를 증량 공급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선경과 사우디 국영석유광물공사는 장기 원유공급 계약을 맺고, 1980년 하루 5만배럴, 1981년 하루 7만 배럴, 1982년 하루 10만 배럴을 공급하기로 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 정유·화학사업 진출로 제약·반도체 교두보 마련 당시 석유 조달에 불안감을 느낀 정부로서는 선경이 석유공사 인수의 최고 후보였던 셈이다. 석유사업 진출의 꿈을 품고 있던 최 전 회장은 석유공사 인수를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알 사우디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왔다. 결과적으로 당시 재계 10위권이었던 선경은 1980년 11월 29일 석유공사 인수에 성공했고, 순식간에 재계 순위 5위로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석유에서 섬유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의 꿈을 이룬 순간이다.석유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며, 대부분 소재·부품의 어머니다. 석유공사를 인수한 선경은 사업을 폭넓게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바이오·반도체 등 첨단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SK의 현재 모습은 최 전 회장이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 전 회장은 에너지·화학의 뒤를 이을 사업으로 제약·바이오를 꼽고 1993년 대덕연구단지에 연구팀을 꾸려 제약사업에 첫 발을 내밀었다. 또 미국 뉴저지에 연구소를 세우며 바이오 역량 강화에 나섰다. 뉴저지는 푸르덴셜 등 대형 보험사, 존슨앤드존슨과 같은 화학회사, 아마린 같은 대형 제약사가 밀집한 지역이다.신소재·정밀화학 회사인 SK케미칼이 헬스케어·의약품 등 생명과학 부문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도 최 전 회장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최 전 회장이 끈기 있게 폴리에스터필름개발에 성공했듯, 바통을 이어받은 최태원 회장도 독자기술 확보를 위해 매년 제약·바이오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SK바이오팜이 지난해 1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독자개발 뇌전증 치료제 신약 승인을 받아 5월부터 미국 시판에 나서는 등 꾸준한 투자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투자를 받은 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나서며 글로벌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현재 SK그룹 매출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역시 최종현 전 회장이 밑그림을 갖고 추진한 분야다. 그는 반도체가 폴리에스테르처럼 산업의 쌀로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판단했다. 반도체 사업을 육성함으로써 글로벌 기업의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1978년 선경의 자사회로 선경반도체를 설립했다. 당시 상공부가 중점지원 전자업체로 지정할 만큼 성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일쇼크 등으로 회사의 경영 악화가 가중되며 2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선대 회장이 놓친 반도체 사업을 최태원 회장이 2011년 하이닉스를 인수하며 31년 만에 다시 일으켰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면 막대한 투자 때문에 ‘승자의 저주’ 우려가 컸지만 최 회장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25조3000억원(2019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SK그룹의 캐시카우로 성장했다. ━ ‘밀어주기 논란’에 제2이동통신 울분 삼키며 포기 최 전 회장이 일으킨 사업의 또 다른 축은 이동통신 사업이다. 1990년 정부가 통신산업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며 제2이동통신사 선정에 나섰다. 1992년 사업 공고를 냈고 선경과 포항제철·코오롱·동양·쌍용·동부 등이 참가했다. 당시 전화기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겸하지 못하게 한 전기통신사업법 때문에 삼성전자·LG전자·현대전자 등 대기업들은 배제됐다.선경은 미주 경영기획실 내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마련해 1984년부터 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재무·기술 등을 기준으로 한 1차 심사 결과 선경(대한텔레콤)이 8388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7496점을 얻은 코오롱, 3위는 7099점의 포항제철이었다. 사업계획 및 이행 평가 등을 중심으로 한 2차 심사 결과에서도 선경이 1위를 차지했다.그러나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돈 관계인 최 전 회장의 선경을 밀어준 것 아니냐는 특혜 논란이 일었다. 이에 강력한 대선주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세게 압박했고, 결국 최 전 회장은 사업권을 정부에 반납했다.특혜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코오롱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겹사돈, 포스코는 민정당 총재를 맡았던 박태준 전 회장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느 회사가 사업권을 받았든 특혜 논란이 일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제2이동통신 선정 당시 실무 책임자였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전 KT 부회장)은 “어떤 외압도 없었다. 여러 불공정 논란이 발생할 수 있어 객관적 평가에 신중을 기했다”며 “건전하고 규모가 큰 기업들을 주요주주로 참여시킨 선경이 사업 전개 방향·재무상황 등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그러나 1992년 8월 27일 당시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은 “합법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해 사업자로 선정됐으나,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사업권 반납한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문제를 다음 정부로 이양한다”고 발표했다.다음 정부에서 실력으로 객관적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실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는 제1이동통신사인 한국이동통신을 매물로 내놨고, 선경은 입찰에 참여했다. 선경이 한국이동통신 인수전에 뛰어들자 8만원대이던 주가가 30만원대까지 치솟았다. 결국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주식 23%를 4271억원에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했다. 제2이동통신 사업권 600억원보다 7배 비싼 비용을 치르고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이다.선경 내부적으로 고가 인수 논란이 일자 최 전 회장은 “통신사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회사 가치는 앞으로 더 키우면 된다”고 일축했다. 이후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사명을 SK텔레콤으로 바꾸는 한편 ‘스피드 011’을 슬로건을 내건 CDMA 사업에 성공해 국내 1위 통신사로 자리잡았다. 2002년에는 신세기이동통신을 인수했다.당시 SK텔레콤은 가입료와 보증금이 비싼 데 비해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들은 저렴한 요금제로 가입자를 빠르게 확보했다. 이에 SK텔레콤은 TTL 등 마케팅과 다양한 할인 요금제 등을 내세워 시장지배력을 지켰다. SK텔레콤은 현재 이동통신 사업을 근간에 두고 모빌리티·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등 첨단사업으로 확장하고 있다.최 전 회장은 양복 안감을 만들던 선경직물을 SK를 국내 시가총액 2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1975년 연 매출 751억원, 종업원 8200명인 회사는 그가 세상을 떠난 1998년엔 연 매출 37조원, 종업원 2만1300명으로 성장했다. 이를 최태원 회장이 취임해 SK 매출규모를 4.4배 많은 161조원 수준으로 키웠다. SK의 그룹 전체 시가총액은 133조원(8월 21일 기준)에 달한다. ━ 최태원 회장 취임 후 매출 500배 증가 1980년 석유공사 인수와 1994년 한국이동통신 진출 등 최종현 전 회장이 뿌린 씨앗은 SK가 현재 바이오·헬스케어·반도체·정보통신기술(ICT) 기업으로 거듭나는 발판 역할을 했다. 그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폐암 투병 중에 산소호흡기를 꽂은 상태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한국경제는 비상사태를 선포할 만큼 심각하다”고 고언할 정도로 국가 경제에도 애정이 깊었다.SK 관계자는 “최종현 전 회장은 기업 경영은 물론 국가적 인재육성에 열정을 바쳤다”며 “그의 경영철학과 유산은 SK의 핵심 경영화두인 사회적가치 경영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최 전 회장은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SK의 탑을 쌓았다. 최 전 회장의 족적은 국제 정세의 격변과 거대한 산업 전환 등 커다란 숙제를 받든 경영자들에게 중장기 가치를 두고 사업에 임할 것을 당부한다. 총신이 길면 총알은 흔들리지 않고,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대내외 환경과 기술의 변화, 시민들의 가치 변동 등 경영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며 체계적 접근과 과감한 경영 판단이 필요한 때다. ━ SK의 이통사업 진출 특혜논란 관련 입 연 당시 실무총괄 석호익 회장 “한 치도 문제없어, 선경이 대부분 평가항목서 압도적 1위” SK텔레콤과 관련해 늘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최종현 전 SK 회장이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특혜를 받아 1992년 제2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실제 SK텔레콤이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은 그 다음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 때다. 1994년 제1이동통신 사업자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면서다.그럼에도 SK가 노 전 대통령의 호혜를 입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는 믿음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결혼이 만든 ‘맥락적 해석’이다. 한국은 고맥락 사회라 서로 탁하면 척하고 알아차리는 게 미덕이지만, 때로는 맥락을 잘못 파악해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이에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의 실무 총괄이었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을 만나 당시 상황을 상세히 들었다. 석 회장은 행정고시 21회로 1977년부터 체신부·정보통신부 요직을 거친 관료 출신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원장·KT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당시 선경(대한텔레콤)을 선정한 이유는 뭔가.처음 서류를 받았을 때부터 선경이 될 거라 생각했다. 돈을 많이 들였고, 준비도 철저히 잘했다. 당시 대주주·주요주주를 나눠 재무건전성 평가를 했는데, 은행과 해외 기업들이 주요주주로 참여해 점수가 크게 올랐다.정치적 고려나 청와대의 압력은 없었나.당시 송언종 체신부장관이 노 전 대통령에게 ‘사돈 관계인데 문제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제2이동통신 신청 사업자 모두 청와대·민주자유당과 관계가 깊어 어느 곳이 되더라도 말이 많을 것’이라 했다. 청와대의 별도 지시나 압력은 없었다.심사 평가 기준은 어떻게 정했나.내가 실무 총괄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원, 안진회계법인 대표 등 총 7명이 만들었다. 재무·투자·안전성·기술력 등을 고루 따졌다. 사전에 사업자 선정과 허가신청 요령을 공개했는데, 선경은 모든 항목에서 뭐든 들어맞았다.김영삼 정부 때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었나.취임 첫 해 체신의 날 대통령 말씀자료에 ‘전 정부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는 엉터리며 왜곡됐으니 앞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추진하겠다’는 메시지가 쓰였다. 체신부 상관과 청와대 수석을 찾아가 이 문장을 삭제해 줄 것을 직접 요구했다. 정치적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법률·행정적으로 한 치의 문제도 없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2020.08.2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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