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37

‘중공업 고도성장’ 대신 ‘물가 안정’…공권력으로 물가 잡은 전두환

정책이슈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정부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군부독재, 노동운동 탄압 등으로 정권을 이어가는 동안 국내 경제는 3저(저금리·저유가·저환율) 호황을 바탕으로 성장세를 그렸다. 이 시기 국내 경제는 성장과 함께 물가안정이 이뤄졌다. 전두환 집권 초기였던 1980년대 초에는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 2차 국제석유파동(오일쇼크) 충격이 겹쳐 경제적 불안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1980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로 역성장 했으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실업률도 5.2%였다. 이에 전두환 정부가 박정희 정부에서 이어받아 추진한 정책이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이 계획은 무리한 고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경제·사회기반을 만들어 경제도약의 기반을 구축한다는 취지였다. 고도성장을 대신해 물가안정을 추구한 것은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제정책의 기조전환을 추진한데 따른 것이다. 먼저 전두환 정권은 조세제도를 바꿔 기업·산업의 경쟁력을 위축시킬 수 있는 제도적 금융지원이나 세제혜택을 없앴다. 당시 국내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수출 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하기 위해 시행하던 주요 공산품 가격과 서비스 요금 통제, 수입 억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낮은 금리의 수출 지원 금융과 같은 정책자금과 관치 금융제도, 각종 보조금 지급 등 지원 제도도 남아 있었다. 이들 제도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불러왔다. 한 예로 저금리 특혜를 적용한 수출 자금을 부동산 투기자금으로 활용하며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농촌 주택 건설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자 시멘트 수급 사정이 악화했으며, 이렇게 지은 주택은 이촌향도 현상에 장기적으로 빈집이 되기도 했다. 전두환 정부는 성장 지원 대신 기업이 경쟁력을 갖춰 물가안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정책을 폈다. 이 밖에도 수입자유화 정책를 시행, 수입규제를 풀어 공급비용이 상승할 여지를 줄였다. 전두환 정권은 1984년 5월 약사법·마약법 등 특별법에 의해 수입이 금지된 344개 품목의 수입자유화 조치를 시작으로 1985년 7월에는 국제경쟁력을 보유한 품목, 국내 생산이 불가능한 비경쟁 품목 등 총 235개 품목을 수입자동승인 품목군에 포함했다. 이에 국내에서 수입산 농산물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도 했으며, 1986년 기준 수입자율화율은 약 92%에 달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정부는 물가상승률을 낮추기 위해 세출 예산을 동결하고 공산품 가격 인상을 억제하는 한편, 추곡수매가를 인상하지 않았으며 근로자 임금도 동결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극심한 반대에도 전두환은 공권력을 활용해 이들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 같은 조치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1년 21.4%, 1982년 7.2%, 1983년 3.4%로 안정화하는 흐름을 보였다. 물가가 안정되자 수출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무역수지는 적자를 줄여 나갔고, 1986년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42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흑자 규모는 1988년에 114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강력한 물가안정책에 오일쇼크 뒤 3저 호황기에 들어서며 경제성장률(국내총생산 성장률)도 높아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 경제성장률은 1980년 -1.6%에서 1981년 7.2%, 1982년 8.3%, 1983년 13.4%로 올랐다. 전두환 집권기(1981~1987년)에 한국의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10.2%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의 물가안정책을 두고 공권력을 동원한 노동 탄압으로 임금 상승을 억제, 물가를 관리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거세다. 거시경제 안정화를 바탕으로 기업은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근로자의 삶은 나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물가안정책이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4 09:00

3분 소요
전두환, 강소기업 육성했지만…목숨줄 쥐락펴락에 정치자금도 뜯어

정책이슈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향년 90세로 23일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굴곡지게 만든 장본인이어서 각계 평가가 엇갈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남긴 명암을 짚어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중소기업 육성에 힘을 쏟기도 했지만, 자신의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존폐를 좌우하고 계열사를 빼앗기도 했다. 앞서 박정희 정부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한 고도성장의 지속에는 이바지했지만 각종 부작용도 드러냈다. 1970년대 후반들어 한국 경제에 물가상승, 국제수지 악화, 중복·과잉시설 심화 등의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목표지향적 계획에서 유도적 계획 체제로 바꾸었고, 중소기업 육성을 지원했다. 전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뒤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웠는데, 대·중소기업 격차 해소도 그가 내세운 ‘정의’ 중 하나였다. 이에 그가 재임하던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2~1986년) 기간 중엔 각종 중소기업 육성정책이 등장했다. 특히 1차년도인 1982년 4월초에 수립한 중소기업 진흥 10년 계획(1982~1991)을 기반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며 중소기업의 전문화를 유도했다. 대기업들과 상호보완적 분업체제를 형성할 수 있도록 육성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중소기업의 성장기여율(고용과 생산 등 전체 산업 성장에 기여한 비율) 증가로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1963~1979년 사이 중소기업의 수는 전체 기업의 80~90%를 차지했지만 성장 기여율은 20%(제3공화국, 1963~1971년), 33%(제4공화국, 1972~1979년)에 불과했다. 전두환 정부 시기 중소기업 진흥 정책 실시 결과, 생산부문에서 중소기업의 성장 기여율은 41%까지 높아져 대기업(59%)과의 격차를 줄였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경제성장 등을 들어 전 전 대통령의 당시 경제정책에 후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사례도 많다. 전두환 본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제그룹을 해체한 것이 대표적이다. 1949년 왕자표 고무신을 시작으로 1981년 국산 신발 브랜드 ‘프로스펙스’을 만들며 당시 21개 계열사를 거느리던 재계 7위 국제그룹이 ‘부실기업 정리 및 산업 합리화’를 명분으로 해체됐다.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공업의 구조재편을 단행하며 재벌 산하의 기업을 빼앗기도 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창원중공업을 빼앗겼다. 아울러 정 회장에게는 1977년부터 맡고 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 사퇴 압력을 넣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은 현대양행 창원공장(현 두산중공업)을 넘겨야했다. 동명그룹의 사례도 있다. 동명그룹은 목재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1965년 국내 재계서열 1위의 재벌이었고, 해체 전까지 해운·중공업·식품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룹은 1979년 원목 가격 상승과 사업 다각화에 따른 자금난을 겪고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강석진 회장 등을 악덕 기업주로 지목하고 빼돌린 은닉재산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동명목재를 수사했다. 이에 동명그룹은 자구노력을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부도를 냈다. 이 밖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계에 손을 뻗친 사례로는 일해재단이 있다. 당시 그는 여러 재단을 설립해 국내 주요 대기업 회장을 한자리에 불러 자금 출연을 요청했다. 일해재단은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희생자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으로, 전 전 대통령은 운영비 명분으로 정치자금을 모집했다. 재단은 1984년 3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재벌로부터 약 598억5000만원의 기금을 모았다. ☞ 전두환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 출생으로 1955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대장까지 지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순자(82)씨를 비롯해 아들 재국·재용·재만씨와 딸 효선씨가 있다.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의 5·16 군사구데타 때 육사생도 지지시위를 주도하고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했다. 1979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건을 조사하면서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신군부 정권을 출범시켰다. 1980년 신군부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던 전남도민들을 유혈진압했다. 간선제로 1980년 11대 대통령, 1981년 12대 대통령에 취임해 1988년 2월까지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대통령직 퇴임 후엔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반란·내란죄, 광주시민 학살, 비자금 조성 등의 죄목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1.24 08:00

3분 소요
[22주기 주목 받는 최종현의 경영 철학] 최종현 25년(CEO 재임 기간) 뿌린 씨앗, 글로벌 SK 열었다

산업 일반

‘총신이 길면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뚝심으로 밀어붙인 중장기 사업 결실 맺어 수론(數論)에서 6은 완전수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6일에 걸쳐 세상을 창조했고, 눈의 결정은 정육각형이며, 벌집과 광물은 연속된 정육각기둥의 집합체다. 28 역시 완전수다. 남·녀가 결혼을 많이 하는 나이는 28세, 신생아의 생후 한 달은 28일이다. 완전수는 수학적 가설과 여러 물리·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쓰인다.이에 비해 독립된 개체로서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수는 수리·물리 현상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개인의 감성·경험·철학·통찰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최태원 SK 회장의 완전수는 22다. 최 회장은 2005년부터 대면 결재나 외부 행사 등 사인을 해야 할 때 숫자 22를 함께 쓴다. 2009년 대한핸드볼협회장에 선출돼 태릉선수촌을 방문했을 때는 등번호 22를 달고 시구하기도 했다.최 회장이 22를 아끼는 이유는 ‘행복(幸福)’ 두 글자의 한자 획수를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의 행복과 사회적 가치 창출이란 자신의 뜻과 경영 목표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최 회장의 메시지는 항상 수수께끼 같고 우회적이며 남들이 곱씹게 한다.올해는 최 회장의 부친 고(故) 최종현 SK 회장이 22주기되는 해다. SK를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키운 최 전 회장은 1998년 8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전 회장은 생전 장묘문화를 개선을 주장했고, 실제 자신이 세상을 떠나며 “내 시신은 매장하지 말고, 화장(火葬)하라”고 남겼다. SK그룹은 최 전 회장의 유지에 따라 500억원을 기부해 충청남도 세종시에 종합추모시설 은하수공원을 짓기도 했다.최 전 회장이 죽음의 현세적 의미를 찾은 것과 최 회장의 행복 경영은 의미론적으로 통한다. 부전자전이다. 두 사람 모두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행복(行福)을 추구하는 행동은 일견 불자(佛子)스럽다.22는 최 회장의 현세와 최 전 회장의 사후가 교차하는 숫자지만, 이를 매개로 최 전 회장의 업적과 발자취, 경영 철학 등을 되짚어 봤다. 최 전 회장이 생전 뿌린 사업적 씨앗을 추도(追道)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다.SK가 애플이라면 고 최종건 회장은 스티브 잡스에, 그의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은 팀 쿡에 빗댈 수 있다. 최종건 전 회장이 잡스처럼 창업자로서 기업의 초석을 다지고 비전을 제시했다면, 최종현 전 회장은 쿡처럼 기업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혁신가 잡스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2011년 애플의 주가는 50달러, 연 매출은 1080억 달러(2011 회계연도)였다. 관리형 CEO인 쿡이 이끌고 있는 애플의 주가는 500달러까지 치솟아 시가총액은 2조 달러로 불어났으며, 연 매출은 2602억 달러(2019 회계연도)에 달한다.경영성과는 거시경제 여건과 시장상황 등 복합 변수가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숫자만 놓고 CEO의 역량을 재단하거나 우열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애플의 경우처럼 기업의 성장 경로마다 적합한 CEO가 중요하며, 시의적절한 리더십이 기업의 성쇠를 가른다. ━ “유학 안 가도 돼” 부친 함께 설득한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은 1960~7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에 SK를 체계적으로 성장시킨 관리형 CEO다. 그러면서 남다른 통찰력으로 2020년 SK의 미래 먹거리의 초석을 닦기도 했다. 1세대 창업자 중 흔치 않은 해외 유학파다. 위스콘신대에서 화학(학사),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석사)을 전공했다.최 전 회장이 선경의 경영 일선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0월이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최 전 회장은 아버지 최학배 대성상회 대표의 사망으로 10년 만에 급거 귀국했다. 늦은 귀국으로 부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최 전 회장은 한국에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부사장 직함을 달고 선경직물에 출근을 시작했다.경영에 참여하게 된 최 전 회장은 회사 경영 현대화 등 시스템 개혁부터 나섰다. 당시 선경직물은 여느 국내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며 임직원 급여가 밀리기도 했다. 최 전 회장은 인사관리와 급여체계·구매·판매 등 경영관리 부문을 전면 개편하며 시스템으로 일하는 회사를 만들었다.1965년에는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손길승 명예회장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는 등 직접 인재 관리까지 나섰다. 손 명예회장은 최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6년간 SK그룹의 총수를 맡은 샐러리맨의 신화다. 정유화학·이동통신 등 SK의 핵심 사업을 현재 반열까지 올려놓으며, 최 전 회장이 유일하게 파트너로 인정하는 인물이다.최종건 전 회장은 최 전 회장의 혁신 행보를 전폭 지원했다. 자신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진지하고 과묵하며 배려심 깊은 동생을 유독 아꼈다. 최종건 전 회장의 창업자금 마련 일화는 두 형제의 우애를 잘 보여준다.최종건 전 회장은 6.25 전쟁이 끝나자 사업에 반대하는 부친으로부터 선경직물 불하자금 200만원 빌리려 온갖 애를 썼다. 최종건 전 회장은 6.25 여파로 망가진 선경의 직물기계를 모두 자기 손으로 수리하며 회사에 공을 들였다. 이 고비만 넘으면 사업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그러나 부친은 “가산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완강히 맞섰다. 이 모습을 본 최종현 전 회장은 “저는 유학을 가지 않아도 좋으니 형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부친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종현 전 회장은 학업 성적이 뛰어나 별도로 과외를 받았고,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 형님의 유언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 그런 최종현 전 회장이 학업까지 포기하겠다고 하자 부친도 결국 손을 들고 최종건 전 회장에게 200만원을 빌려주게 됐다. 선경직물의 마중물이 된 돈이다. 이후 최종건 전 회장은 사업을 하며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아우의 유학 경비에는 일절 손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격동의 1960~70년대, 선경직물도 수차례 위기와 기회를 맞이한다. 최종현 전 회장이 부사장에 취임한 1962년부터 1971년은 제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되던 때다. 1950년대 물세탁 없이 재단이 가능한 ‘닭표’ 인조견으로 시장을 휩쓴 선경직물은 1960년대 들어 원자재부터 완제품까지 섬유의 수직 계열화에 나섰다. 이를 위해 1966년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수립해 원사사업 진출 계획을 밝히고,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의 교두보로써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세우기로 했다.1962년 4월 8일에는 최초로 수출 실적을 올렸는데, 해외 바이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선경’의 영문 이니셜을 따 브랜드로 사용했다. ‘SK’란 이름의 첫 등장이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 해외섬유의 인수·확장, 울산직물·선산섬유 설립, 스카이론(SKYRON) 브랜드의 탄생, 아세테이트·폴리에스터 생산, 선경화섬·선경합섬 설립 등 혁명적 변화를 맞았다.그러던 중 선경직물은 1973년 변곡점을 맞는다. 1972년 정부가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을 발표하면서 섬유가 지원 산업에서 빠진 것이다. 최종건 전 회장은 이전부터 정유·화학 분야에 뛰어들어 원유조달부터 정제, 추출, 섬유 제작까지 수직계열화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임종철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의 저서 를 보면 한국의 화학섬유공업은 1959년 미진화학이 하루 2t 규모의 폴리비닐알코올(PVA) 공장을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수요가 급증하며, 1969년에는 하루 128.5t 규모로 커졌다.이에 최종건 전 회장도 정유공장을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973년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읍 일대에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미국에서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이 터지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최 전 회장도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월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유언은 간명했다.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최종현 전 회장은 바로 선경합섬의 대표로 취임했다. 최 전 회장은 회사가 자유롭게 수출입을 할 수 있어야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정유·화학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종합상사 역량의 향상은 불가피했다.최 전 회장은 1975년 신년사를 통해 “선경이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하기 위해 두 가지를 당부한다”며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 확립을 위해 석유화학공업 진출, 석유정제사업 성취가 그것이다. 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에 더불어 국제적 기업으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마침 정부는 1975년 종합 무역상사 육성 방안을 발표하고 원자재 수입 요건 완화, 수출금융 지원, 외국환은행 다수 거래 허용, 외환자금 보유 허용 등의 지원책을 내놨다. 다만 자본금 10억원, 수출 연 5000만 달러 이상, 해외지사 10개 이상 등 선정 요건이 까다로웠다. 삼성물산·대우실업·한일합섬·국제화학·쌍용 등 5개 회사만이 이 조건에 부합했다.최 전 회장은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1976년 사명을 선경직물에서 선경으로 바꾸는 한편 선경기계·크로바상사를 인수하고, 선경식품·선경금속·선경반도체·선경건설 등을 설립했다. 이런 확장은 선경이 70~80년대 그룹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됐지만, 단기적으로 재무상황이 나빠졌다. 선경의 부채비율은 1979년 938%, 1980년 1507%로 불어났다. ━ 소재·섬유 수직계열화 노리고 석유사업 진출 그럼에도 최 전 회장은 정유·화학 회사로의 비전을 놓지 않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에 연구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일본이 한국의 정유·화학 산업 발전을 경계하며 기술 이전에 미온적이었고, 최 전 회장은 빚을 내서라도 자체 기술을 개발한다는 뜻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폴리에스터필름 개발에 성공했고, 곧바로 공장을 지어 상용화에 나섰다.정부와 여론도 선경의 독자기술 개발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우호적 환경 조성은 선경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는 자양분이 됐다.미국 걸프는 1980년 석유공사 보유 지분 50%를 전량 양도하고 철수키로 했고, 정부는 곧바로 석유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정부가 밝힌 석유공사 최대주주의 조건은 원유확보 능력, 자금조달 능력, 산유국 투자유치 및 교섭 능력, 경영관리 능력, 성실성 등이다.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었던 정부가 산유국과의 관계를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당시 국내엔 강대한 석유패권국과 협상자리를 만들기는커녕 친분을 가진 회사조차 드물었다. 그럼에도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석유공사는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인 매물이었다.신뢰는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좌우하며, 쌓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사업의 중장기적 안정성이 요구되는 장치 산업은 더더욱 그렇다. 정부가 내놓은 산유국 투자 및 원유 조달 능력은 벼락치기로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산유국과 깊은 신뢰 관계를 쌓은 회사는 선경이 거의 유일했다.최종현 전 회장은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남다른 친분을 맺었다. 최 전 회장과 사우디의 친분이 빛을 발한 것은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1973년이다. 당시 사우디가 주축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한국을 석유 금수국으로 분류해 10개월 안에 모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이에 정부는 최 전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최 전 회장은 비공식 정부사절로 사우디를 방문해 석유공급 재개의 물꼬를 텄다. 또 1975년에는 사우디 국영화학공사(NCI)가 추진하는 플라스틱 공장 건설계획에 10%를 투자키로 했고, 무역상사 출범 뒤에는 수출대금 일부를 사우디 왕가 대리인에 수수료로 지급했다.1976년에는 사우디 왕족을 국내에 초청하는 등 친분을 이어갔다. OPEC의 ‘황제’ 격인 야마니 사우디 석유상은 1977년 최 전 회장을 초청해 “한국이 필요한 만큼 원유를 증량 공급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선경과 사우디 국영석유광물공사는 장기 원유공급 계약을 맺고, 1980년 하루 5만배럴, 1981년 하루 7만 배럴, 1982년 하루 10만 배럴을 공급하기로 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 정유·화학사업 진출로 제약·반도체 교두보 마련 당시 석유 조달에 불안감을 느낀 정부로서는 선경이 석유공사 인수의 최고 후보였던 셈이다. 석유사업 진출의 꿈을 품고 있던 최 전 회장은 석유공사 인수를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알 사우디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왔다. 결과적으로 당시 재계 10위권이었던 선경은 1980년 11월 29일 석유공사 인수에 성공했고, 순식간에 재계 순위 5위로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석유에서 섬유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의 꿈을 이룬 순간이다.석유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며, 대부분 소재·부품의 어머니다. 석유공사를 인수한 선경은 사업을 폭넓게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바이오·반도체 등 첨단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SK의 현재 모습은 최 전 회장이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 전 회장은 에너지·화학의 뒤를 이을 사업으로 제약·바이오를 꼽고 1993년 대덕연구단지에 연구팀을 꾸려 제약사업에 첫 발을 내밀었다. 또 미국 뉴저지에 연구소를 세우며 바이오 역량 강화에 나섰다. 뉴저지는 푸르덴셜 등 대형 보험사, 존슨앤드존슨과 같은 화학회사, 아마린 같은 대형 제약사가 밀집한 지역이다.신소재·정밀화학 회사인 SK케미칼이 헬스케어·의약품 등 생명과학 부문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도 최 전 회장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최 전 회장이 끈기 있게 폴리에스터필름개발에 성공했듯, 바통을 이어받은 최태원 회장도 독자기술 확보를 위해 매년 제약·바이오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SK바이오팜이 지난해 1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독자개발 뇌전증 치료제 신약 승인을 받아 5월부터 미국 시판에 나서는 등 꾸준한 투자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투자를 받은 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나서며 글로벌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현재 SK그룹 매출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역시 최종현 전 회장이 밑그림을 갖고 추진한 분야다. 그는 반도체가 폴리에스테르처럼 산업의 쌀로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판단했다. 반도체 사업을 육성함으로써 글로벌 기업의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1978년 선경의 자사회로 선경반도체를 설립했다. 당시 상공부가 중점지원 전자업체로 지정할 만큼 성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일쇼크 등으로 회사의 경영 악화가 가중되며 2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선대 회장이 놓친 반도체 사업을 최태원 회장이 2011년 하이닉스를 인수하며 31년 만에 다시 일으켰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면 막대한 투자 때문에 ‘승자의 저주’ 우려가 컸지만 최 회장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25조3000억원(2019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SK그룹의 캐시카우로 성장했다. ━ ‘밀어주기 논란’에 제2이동통신 울분 삼키며 포기 최 전 회장이 일으킨 사업의 또 다른 축은 이동통신 사업이다. 1990년 정부가 통신산업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며 제2이동통신사 선정에 나섰다. 1992년 사업 공고를 냈고 선경과 포항제철·코오롱·동양·쌍용·동부 등이 참가했다. 당시 전화기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겸하지 못하게 한 전기통신사업법 때문에 삼성전자·LG전자·현대전자 등 대기업들은 배제됐다.선경은 미주 경영기획실 내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마련해 1984년부터 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재무·기술 등을 기준으로 한 1차 심사 결과 선경(대한텔레콤)이 8388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7496점을 얻은 코오롱, 3위는 7099점의 포항제철이었다. 사업계획 및 이행 평가 등을 중심으로 한 2차 심사 결과에서도 선경이 1위를 차지했다.그러나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돈 관계인 최 전 회장의 선경을 밀어준 것 아니냐는 특혜 논란이 일었다. 이에 강력한 대선주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세게 압박했고, 결국 최 전 회장은 사업권을 정부에 반납했다.특혜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코오롱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겹사돈, 포스코는 민정당 총재를 맡았던 박태준 전 회장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느 회사가 사업권을 받았든 특혜 논란이 일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제2이동통신 선정 당시 실무 책임자였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전 KT 부회장)은 “어떤 외압도 없었다. 여러 불공정 논란이 발생할 수 있어 객관적 평가에 신중을 기했다”며 “건전하고 규모가 큰 기업들을 주요주주로 참여시킨 선경이 사업 전개 방향·재무상황 등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그러나 1992년 8월 27일 당시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은 “합법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해 사업자로 선정됐으나,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사업권 반납한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문제를 다음 정부로 이양한다”고 발표했다.다음 정부에서 실력으로 객관적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실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는 제1이동통신사인 한국이동통신을 매물로 내놨고, 선경은 입찰에 참여했다. 선경이 한국이동통신 인수전에 뛰어들자 8만원대이던 주가가 30만원대까지 치솟았다. 결국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주식 23%를 4271억원에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했다. 제2이동통신 사업권 600억원보다 7배 비싼 비용을 치르고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이다.선경 내부적으로 고가 인수 논란이 일자 최 전 회장은 “통신사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회사 가치는 앞으로 더 키우면 된다”고 일축했다. 이후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사명을 SK텔레콤으로 바꾸는 한편 ‘스피드 011’을 슬로건을 내건 CDMA 사업에 성공해 국내 1위 통신사로 자리잡았다. 2002년에는 신세기이동통신을 인수했다.당시 SK텔레콤은 가입료와 보증금이 비싼 데 비해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들은 저렴한 요금제로 가입자를 빠르게 확보했다. 이에 SK텔레콤은 TTL 등 마케팅과 다양한 할인 요금제 등을 내세워 시장지배력을 지켰다. SK텔레콤은 현재 이동통신 사업을 근간에 두고 모빌리티·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등 첨단사업으로 확장하고 있다.최 전 회장은 양복 안감을 만들던 선경직물을 SK를 국내 시가총액 2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1975년 연 매출 751억원, 종업원 8200명인 회사는 그가 세상을 떠난 1998년엔 연 매출 37조원, 종업원 2만1300명으로 성장했다. 이를 최태원 회장이 취임해 SK 매출규모를 4.4배 많은 161조원 수준으로 키웠다. SK의 그룹 전체 시가총액은 133조원(8월 21일 기준)에 달한다. ━ 최태원 회장 취임 후 매출 500배 증가 1980년 석유공사 인수와 1994년 한국이동통신 진출 등 최종현 전 회장이 뿌린 씨앗은 SK가 현재 바이오·헬스케어·반도체·정보통신기술(ICT) 기업으로 거듭나는 발판 역할을 했다. 그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폐암 투병 중에 산소호흡기를 꽂은 상태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한국경제는 비상사태를 선포할 만큼 심각하다”고 고언할 정도로 국가 경제에도 애정이 깊었다.SK 관계자는 “최종현 전 회장은 기업 경영은 물론 국가적 인재육성에 열정을 바쳤다”며 “그의 경영철학과 유산은 SK의 핵심 경영화두인 사회적가치 경영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최 전 회장은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SK의 탑을 쌓았다. 최 전 회장의 족적은 국제 정세의 격변과 거대한 산업 전환 등 커다란 숙제를 받든 경영자들에게 중장기 가치를 두고 사업에 임할 것을 당부한다. 총신이 길면 총알은 흔들리지 않고,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대내외 환경과 기술의 변화, 시민들의 가치 변동 등 경영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며 체계적 접근과 과감한 경영 판단이 필요한 때다. ━ SK의 이통사업 진출 특혜논란 관련 입 연 당시 실무총괄 석호익 회장 “한 치도 문제없어, 선경이 대부분 평가항목서 압도적 1위” SK텔레콤과 관련해 늘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최종현 전 SK 회장이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특혜를 받아 1992년 제2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실제 SK텔레콤이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은 그 다음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 때다. 1994년 제1이동통신 사업자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면서다.그럼에도 SK가 노 전 대통령의 호혜를 입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는 믿음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결혼이 만든 ‘맥락적 해석’이다. 한국은 고맥락 사회라 서로 탁하면 척하고 알아차리는 게 미덕이지만, 때로는 맥락을 잘못 파악해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이에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의 실무 총괄이었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을 만나 당시 상황을 상세히 들었다. 석 회장은 행정고시 21회로 1977년부터 체신부·정보통신부 요직을 거친 관료 출신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원장·KT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당시 선경(대한텔레콤)을 선정한 이유는 뭔가.처음 서류를 받았을 때부터 선경이 될 거라 생각했다. 돈을 많이 들였고, 준비도 철저히 잘했다. 당시 대주주·주요주주를 나눠 재무건전성 평가를 했는데, 은행과 해외 기업들이 주요주주로 참여해 점수가 크게 올랐다.정치적 고려나 청와대의 압력은 없었나.당시 송언종 체신부장관이 노 전 대통령에게 ‘사돈 관계인데 문제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제2이동통신 신청 사업자 모두 청와대·민주자유당과 관계가 깊어 어느 곳이 되더라도 말이 많을 것’이라 했다. 청와대의 별도 지시나 압력은 없었다.심사 평가 기준은 어떻게 정했나.내가 실무 총괄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원, 안진회계법인 대표 등 총 7명이 만들었다. 재무·투자·안전성·기술력 등을 고루 따졌다. 사전에 사업자 선정과 허가신청 요령을 공개했는데, 선경은 모든 항목에서 뭐든 들어맞았다.김영삼 정부 때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었나.취임 첫 해 체신의 날 대통령 말씀자료에 ‘전 정부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는 엉터리며 왜곡됐으니 앞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추진하겠다’는 메시지가 쓰였다. 체신부 상관과 청와대 수석을 찾아가 이 문장을 삭제해 줄 것을 직접 요구했다. 정치적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법률·행정적으로 한 치의 문제도 없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2020.08.26 16:04

14분 소요
[오동윤 교수의 ‘중소기업 강국으로 가는 길’(7)] 우물 안 중소기업 뼛속까지 글로벌화해야

Check Report

대기업 의존적인 성장전략은 한계... 실패한 ‘히든 챔피언’ 정책 반면교사 삼아야 한국의 전체 사업체 중 중소기업 비중은 99%다. 그러나 중소기업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7%(2015년)로 낮은 편이다. 이는 한국의 성장 전략과 관련이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주요 수출 품목은 중화학공업 제품이었다. 중화학공업 제품은 여러 개 부품(중간재)이 모여 하나의 최종재가 된다. 정부는 전략을 세웠다. 대기업이 최종재를 만들고, 중소기업이 중간재를 대기업에 납품하는 전략이다. 이를 수직적 계열화라고 한다. 1975년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까지 제정했다. ‘수출 증가 → 대기업 매출 증가 → 중소기업 매출 증가 → 중소기업 종사자 임금 증가’가 발생하는 구조다. 이를 흔히 경제의 ‘낙수효과’라 한다.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효과다. ━ 혁신보다 대기업과 인연에 목 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수출이 막히면’이라는 가정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 경쟁은 치열하다. 그럴수록 대기업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중간재를 공급하는 중소기업을 압박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매출이 거기서 나오므로 응하지 않을 수 없다.문제점은 또 있다. 바로 기업의 존재 가치인 혁신을 더디게 한다는 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CED)에 따르면 제조 중소기업의 제품·공정·마케팅·조직 ‘4대 혁신율’은 14.8%다. 전체 32개국 중 28위다. 부문별로 공정과 마케팅은 이보다 더 낮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정해준 규격에 근거해 납품한다. 가격도 정해져 있다. 따라서 납품계약을 맺었다면 굳이 혁신할 필요가 없다. 공정 혁신을 통해 원가를 절감한다 해도 납품가격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케팅은 무의미하다. 대기업의 ‘김 이사님’과 맺어온 인연이 더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공정 혁신과 마케팅 혁신은 뒷전이다.중소기업의 글로벌 경쟁력도 그리 높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을 100으로 가정했을 때 중소기업은 75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매년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설문조사에 기초한 통계다. 주장하건대, 한국 중소기업의 경쟁력은 분명히 높다. 삼성의 갤럭시, 현대의 소나타에 들어간 중소기업의 부품이 경쟁력이 없다면 스마트폰과 자동차가 글로벌 시장을 주름잡고 있을까 싶다. 경쟁력은 충분하다. 다만 글로벌 시장에서 직접 경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경쟁력을 잘 모른다.그래서 중소기업은 글로벌 시장을 두려워한다. 도전적인 기업가정신이 없다고 탓할 수만 없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바이어를 만나고, 신뢰를 쌓고, 협상하고, 제품을 선적하고, 대금을 받기까지 적어도 몇 년이 걸린다. 여기에 환율, 현지 시장 등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다. 선뜻 글로벌 시장으로 달려가기 어려운 이유다.결국, 사람이 답이다. 자유무역협정(FTA)만 봐도 그렇다. 정부는 FTA로 관세가 없어졌으니 수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홍보했다. 기존 수출기업은 그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려 하는 기업은 다르다. 관세 3% 철폐가 수출 증가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시장조사, 거래처 발굴, 통관, 홍보 및 판매, 사후관리 등 손이 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은 사람이 해야 한다. 정부가 해줄 수 없는 노릇이다. 거시경제 현황이야 정보로 줄 수 있다. 시장조사는 기업이 직접 해야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이를 전담할 인력이 절대 부족하다. 사장님 혼자 납품만 해왔기 때문이다.지금 한국의 청년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췄다. 글로벌 역량도 예외가 아니다. 어학, 여행, 인턴 등 방법도 다양하다. 그러나 글로벌 역량을 갖춘 청년은 중소기업 취업을 기피한다. 그런 역량을 갖추기까지 더 큰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유력 후보들은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청년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이를 하나로 묶으면 쉽다. 글로벌 인재의 중소기업 취업을 유도하고, 이들을 지원을 하는 것이다. ━ ‘히든 챔피언’ 전략의 두 가지 실수 2008년에 ‘히든 챔피언’이 한국에 소개됐다. 광풍에 가까웠다. ‘히든 챔피언’은 인지도는 낮지만, 세계시장 점유율 3위 이내(또는 대륙 점유율 1위), 매출액이 40억 달러 이하(대부분 10억 달러 이하)인 기업을 일컫는다. 전세계에서 모두 2700여 개 ‘히든 챔피언’이 나왔다. 개 목줄, 병원 침대 바퀴, 스키 헬멧 등 제품은 다양하다. ‘히든 챔피언’의 절반이 독일 기업이다. 한국은 서른 개 남짓이다. 관련 기관이 일제히 ‘히든 챔피언’ 만들기에 나섰다. 중앙정부는 물론 한국수출입은행, 한국거래소까지 지원을 시작했다.우리는 두 가지 실수를 범했다. 첫째, 독일 기업은 태생적 글로벌(Born Global)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프로스포츠에 저니맨(journey man)이라는 용어가 있다. 팀을 자주 옮겨 다니는 선수를 말한다. 주전급 실력은 아니지만, 긴요한 전력으로 쓸만한 선수들이다. 독일은 마이스터(Meister)가 유명하다. 역사가 꽤 오래됐다. 당시 사람들은 마이스터 집에서 허드렛일까지 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더 배울 기술이 없을 때 마이스터는 떠나는 것을 허락한다. 그렇다고 그 기술을 마이스터가 사는 동네(당시 영주)에서 써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봇짐을 지고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그런 사람을 저니맨이라고 한다. 요약하면, 독일의 ‘히든 챔피언’은 태어나면서부터 글로벌화를 해야 했다는 점이다. 한국처럼 정책에 의해 납품으로 성장한 실정에는 맞지 않는다.둘째, ‘히든 챔피언’을 만들고자 돈만 잔뜩 퍼부었다. 정부의 중소기업 수출 관련 사업은 66개다. 마케팅(해외 전시회 파견 등)과 금융 관련 사업이 50개나 된다. 정작 중요한 인력 육성 사업은 7개뿐이다. 이마저도 교육 중심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사업과 예산을 늘렸다. 기존의 마케팅 지원 기관의 인식도 바뀌지 않았다. 아프리카에 뻥튀기 기계를 수출하려는 기업은 푸대접하고 번듯한 반도체나 자동차만 팔려고 한다. 마케팅 지원은 서비스의 개념인 금융 지원과 다르다. 복수의 기관이 경쟁하면서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한다.다음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은 재벌 개혁과 ‘중소기업부’로 정리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 나온 누구도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공약이 없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는 중소기업 수출 및 판로예산을 5%까지 올리겠다고 공약을 제시했다. 불행히도 잘 실행되지 않았다. 재벌을 개혁해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중소기업부’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장의 전략으로 수출과 글로벌화가 필요한 시점이다.필자는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다.

2017.05.14 08:26

5분 소요
[오동윤 교수의 ‘중소기업 강국으로 가는 길’(1)] 오락가락 정책에도 중소기업 60년 새 150배 증가

정책이슈

1980년대 ‘보호와 육성’으로 정책 전환... 대·중소 격차 벌어지며 경제민주화의 중심에 경제민주화. 경제와 정치의 이질적인 조합이다. 경제와 정치의 관점은 다르다. 경제는 합리성에, 정치는 권력에 바탕을 둔다. 경제는 효용을 위한 최적 전략이, 정치는 선거를 위한 필승 전략이 필요하다. 경제민주화가 풀리지 않는 이유다. 경제민주화의 주요 대상은 한국 경제의 절대 다수인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 하면 보호, 지원, 열악한 환경, 낮은 임금 등이 떠오른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중소기업은 돌봐야 하는 ‘덤’ 신세가 된다. 한국경제는 성장의 돌파구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중소기업 강국이다. 중소기업이 성장의 돌파구인 이유다. ‘중소기업 강국으로 가는 길’은 ‘왜 중소기업인가’를 찾는 과정이다. 중소기업의 어제를 훑어보며 어떻게 커왔는지를 볼 것이다. 그래야 오늘날 중소기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내일을 그려보며 어떻게 커가야 하는지를 볼 것이다. 이를 통해 그릇된 관점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한국의 근대화 시작은 강화도조약(1876년)이다. 외국 문물이 유입돼 거래 품목이 다양해졌다. 시장은 커졌고 상사(商社)가 상인(商人)을 대신했다. 상사가 이 땅에 등장한 최초의 중소기업이다. 이후 가내 수공업을 벗어난 공장과 기업이 등장했다. 일제 강점기였지만, 1938년 기업 수는 2273개에 달했다. 아쉽게도 중소기업의 성장은 여기까지였다. 일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위해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기업을 흡수했다. 한국기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 기간 의미 있는 결실은 삼성, 현대, LG가 닻을 내렸다는 점이다.한국전쟁 이후 경제는 딜레마에 빠진다. 부흥과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다. 피해복구는 절실했지만, 예산은 부족했다. 세율 인상과 통화량 확대가 불가피했다. 물자가 부족한 데 통화량이 증가하니 물가는 치솟았다. 때문에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심각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중소기업 육성을 천명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육성 대책 요강’을 발표한다. 이 ‘요강’은 가치가 있다. 정부가 처음 만든 중소기업 정책이라는 점, 중소기업 육성을 경제 정책으로 인정한 점, 성장보다 보호의 관점으로 접근한 점이다.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등장한다. 산업화의 시작이다. 당시 재정은 전체 기업을 대상으로 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정부는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경제의 관점, ‘선택과 집중’으로 접근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기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당시 대기업은 음식품, 피혁, 고무 등 중소기업 시장에 침투했고, 독과점을 형성했다. 이를 바로잡고자 정부는 ‘중소기업사업조정법’을 제정한다. 이후 13년 동안 사업조정은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관심만 있었던 시대상이 보인다.마침내 66년 ‘중소기업기본법’이 제정됐다. 이전만 해도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을 의미했다. 이제 중소기업은 처음으로 법적인 이름을 갖게 됐다. 이 결과 2만4112개 중소기업과 152개 대기업이 탄생한다. 73년 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다. 당시 재정기금의 50% 이상, 제조업 대출자금의 80% 이상을 중화학공업에 집중했다.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심해졌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는 중소기업에 기회였다. 대기업과 납품 관계가 구축됐기 때문이다. 중화학공업은 여러 부품이 모여 하나의 최종재가 된다. 이에 정부는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계열화로 분업체계를 만든다. 즉, 중소기업이 부품(중간재)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고 대기업은 제품(최종재)을 만들어 수출하는 그런 체계다. 산업화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그러나 계열화 구축은 더뎠다. 오히려 대기업이 스스로 계열사를 세우거나 중소기업을 인수했다. 1974~78년 4년 동안 현대는 22개, 삼성은 9개, 대우는 25개, 럭키금성은 26개 계열사가 늘어났다. 여기에 석유파동이 겹쳤다. 대기업은 휘청거렸지만, 중소기업은 곤두박질쳤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 ━ 산업화의 밑단을 책임진 중소기업 이즈음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운다. 대·중소기업 격차를 해소하는 것도 전두환 정부가 내세운 정의 중 하나였다. 중소기업 정책이 쏟아졌다. 그리고 중소기업 정책의 패러다임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바로 보호와 육성이다. 그동안 중소기업 정책은 미미했지만 경제의 관점이었다. 비로소 중소기업 정책에 정치의 관점이 깊숙이 개입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중소기업을 언급한 것은 다섯 번에 불과했다.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했다는 평을 받지만) 정의를 내세운 대통령이 산업화를 시작한 대통령보다 중소기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어찌 됐던 산업화를 시작한 후 한국 경제는 고도 성장을 이뤘다. 대기업, 중화학공업, 수출이라는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여기에 중소기업은 납품하며 분업체계에서 보완 역할에 충실했다. 성장의 몫은 적절히 분배됐다. 대기업의 수출이 증가하면 납품 중소기업의 매출도 늘었다. 중소기업 근로자의 소득도 나아졌다. 이를 소위 ‘낙수효과’라 한다. 이런 구조와 효과는 별 탈 없이 지속한다. 적어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말이다.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소기업은 양적 팽창을 거듭한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떠난 대기업 근로자들이 너도나도 창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기술(IT) 산업이 성장하면서 많이 늘어난 벤처기업도 한몫했다. 1999~2003년 중소기업은 32만 개나 증가했다. 이후 중소기업 수는 지속해서 증가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중소기업은 처음으로 300만 개를 돌파한다. 1966년 2만4112개였던 중소기업이 오늘날 354만 5473개가 됐다. 60여 년 사이에 150배가량 증가한 수치이다.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는 다른 문제를 낳았다. 단순히 경제 문제는 아니었다. 위기를 자초한 이들은 ‘1%의 가진 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망하지 않았다. 손해를 본 사람은 ‘99%의 덜 가진 자’였다. 1%를 위한 공적자금은 99%의 세금에서 나왔다. 경제적으로 부당했고, 불평등했다. 99%는 폭발했다. 부당함과 불평등은 사회의 분절로 이어졌다.한국은 다소 양상이 달랐다. 이런 분절이 대기업(1%)과 중소기업(99%)의 갈등으로 불거졌다. 당시 정부가 동반성장을 추진한 배경이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동반성장은 경제민주화로 옮겨갔다. 중소기업 정책에 정치의 관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불행히도 경제민주화는 선거용에 그쳤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조만간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다. 경제민주화는 선거의 중심이 될 듯하다. 그래서 중소기업이 아직도 중심에 있다.필자는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다.

2017.02.05 09:28

4분 소요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4)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회장

CEO

포브스코리아가 한국경영사학회(회장 차동옥)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네 번째는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회장이다. 7월 20일은 운곡 정인영 회장 추모 10주기이기도 하다. 한라그룹은 정인영 창업주의 기업가정신과 관련한 자료를 제공하며 이번 기획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업을 다시 세우고 성장시켰던 운곡(雲谷) 정인영(1920~2006)을 흔히 ‘한국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운곡은 부와 성공에 집착했던 단순한 경제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곡은 올곧은 경영철학을 실천한 한국의 프런티어 기업가였다. 최고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외국어 구사능력, 리더십과 자질 등 탁월한 창업가의 조건을 갖춘 진실한 기업가였다. 늘 책을 가까이하며 지행합일을 추구했던 인문주의자였고, 신 앞에서 겸손하게 살고자 했던 신앙인이기도 했다. 세월을 뛰어넘어 한국 재계의 거물이 살았던 다이내믹한 인생을 한 번 따라가 보자.정인영(鄭仁永)은 1920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마을에서 6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바로 위 친형이다. 불세출의 기업가를 형으로 두었으니 태생적 환경이 이미 기업가의 삶이었다. 소년시절에는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웠고, 14세에 그의 형 정주영처럼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운곡은 YMCA에서 영어를 공부하며 셰익스피어에 심취했다. ━ 주경야독하던 책벌레의 경영수업 1938년, 운곡은 19세에 뱃삯만 겨우 챙겨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낮에는 신문팔이와 트럭조수로 일했기에 밤늦게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틈만 나면 고서점에 들렀고 휴일이면 서점에서 거의 시간을 보냈다. 한 서점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주인의 시선이 따가워 슬그머니 옆 서점으로 옮겨 읽던 책을 찾아 그 다음 페이지를 읽어나가는 징검다리 독서를 했다”고 한다. 사람의 인성은 성장기에 기틀이 잡힌다. 당시 학비를 모으기 위해 우동으로 끼니를 때웠던 경험은 평생의 근검절약과 독서습관으로 이어진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과 협상하며 공사를 수주하고, 세계 각지를 돌며 비즈니스 활동을 펼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운곡의 영어 실력도 사실상 이 시절에 연마한 기초로부터 시작되었다. 운곡은 아오야마 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영어과에서 2년 간 공부하다 태평양전쟁 발발의 소용돌이에서 중퇴하고 귀국한다.인생은 계획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운곡은 자서전에서 “전쟁이 나를 사업가로 바꿔놓았다”라고 썼다. 1948~1951년 운곡은 동아일보와 대한일보에서 기자로 활약한다. 6.25전쟁 중에는 갈고 닦은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미군통역관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현대건설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을 도와 미군이 필요로 하는 사업, 예컨대 건설공사는 현대건설에, 물자보관 사업은 현대상운에 연결시켜주면서 기업경영활동에 참여하게 된다.운곡은 형 정주영 회장의 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1·4후퇴 후 부산 피난시절 때는 현대상운 전무를 맡아 일하게 된다. 1953년에는 현대건설의 전후 복구사업에 차질이 생겨 회사가 어려워지자 정주영 회장의 요청으로 현대건설 부사장을 맡게 된다. 현대건설은 그 후 미군이 발주한 인천 항만공사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하면서 회생의 기틀을 마련했다. 1960년에는 건설업계 순위 1위로 성장하게 된다. ━ 5대양 6대주 넘어 세계로, 현대양행 창업 현장에서 경영수업을 받았으니 독립해서 사업을 벌이겠다는 도전정신이 꿈틀댈 것은 당연하다. 현대건설의 기자재 수출입을 담당할 회사 설립을 구상한 운곡은 1962년 10월 1일 (주)현대양행을 창립한다. 그의 나이 43세 때다. 당시 운곡이 직접 지은 현대양행 사명(社名)은 “5대양 6대주를 넘어 세계로 나아간다”는 진취적인 뜻을 담고 있다.운곡이 창업한 현대양행은 이후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고, 건설 중장비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며, 해외 플랜트설비 턴키 건설 등 중공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경영학자들은 창업이후 운곡의 경영전략의 특징을 중공업 중심 전략에서 찾는다. 기계장비 산업을 비롯한 중공업을 일으켜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는 산업보국주의는 운곡의 경영철학에서 두드러지는 기업가정신이다.운곡의 중공업 전략은 이후 국가경제개발 제 2차 5개년 계획과 맞물려, 경제발전과 중화학 수출산업 강국으로 가는 선봉장으로서 대한민국 국가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현재 세계 1위의 담수화 플랜트 수주를 하고 있는 두산 중공업의 창원기계종합공장은 본래 운곡이 계획하고 구상했던 대규모 종합기계단지였다. 당시 운곡의 인재양성의지로 다양한 해외 연수를 받은 엔지니어들이 현재 창원기계공장의 각 기술 분야별 전문가로 성장해 한국 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운곡이 대한민국 중공업의 개척자로 불리는 이유다.하지만 인생에는 평탄한 신작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운곡은 1980년 신군부의 ‘중화학공업투자조정 조치’로 ‘현대양행과 계열사’를 남에게 넘겨주는 큰 아픔을 겪게 된다. 피땀을 쏟아온 현대양행 창원기계공장을 빼앗겨 사업기반이 통째로 허물어지는 위기를 맞았다.그러나 운곡은 담대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1980년 현대양행 안양공장 상호를 만도기계로 바꾸고 꿈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운곡은 ‘전 세계 1만여 도시로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아 ‘만도(萬都)’라고 했다. 재기의 꿈을 담은 ‘인간은 할 수 있다’는 뜻의 ‘Man do’의 의미도 담았다. 운곡은 평생 희망을 붙들고 살았던 휴머니스트다. 이라는 논문을 썼던 최종태 서울대학교 경영대 명예교수는 특히 이 대목에서 “뜻을 세우면 길이 열린다고 보았던 운곡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의 신봉자이고 인간적인 낙관주의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1980년대 들어 국내외 자동차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더불어 자동차 부품기업인 만도기계와 한라공조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운곡도 그 기회를 타고 재기한다. 80년 그날로부터 11년이 지난 1991년, 한라는 매출액 1조원이 넘는 한국 27위의 그룹으로 성장했다. 제2창업에 가까운 성공이었다. 사람들이 운곡을 ‘재계의 오뚝이’라고 부르게 된 사연이다. 운곡의 기업가정신을 계승한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운곡을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지는 진정한 리더셨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따랐던 것은 아버지가 굳은 신념과 수많은 시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 철학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얄궂다. 오뚝이처럼 재기한 운곡에게 또 한 번 큰 시련이 찾아온다. 1989년 7월, 운곡이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정인영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운곡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운곡은 아내 김월계 여사의 헌신적인 간호와 초인적인 재활노력에 힘입어 건강을 회복한다. 쓰러진 지 1년도 안돼 경영일선에 복귀하고야 만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운곡은 이제 ‘재계의 부도옹’으로 통하게 된다. 운곡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뇌졸중이 나의 반신을 마비시킬 수는 있어도 나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다. 꿈과 의식이 살아 있는 한, 육체적인 시련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그 후로 10년간 나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세계를 누비며 쓰러지기 전보다 더 정력적으로 일했다.” 운곡은 1990년대 들어 경제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한라그룹을 글로벌기업으로 도약시켜 나간다. 한라그룹은 1992년 창립 30주년을 ‘국제경쟁력 강화의 해’로 설정, 경영체질의 국제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7월 1일, 운곡은 둘째아들인 정몽원 당시 만도기계 사장을 한라그룹 부회장으로 승진시키고 조선, 중장비 플랜트, 해외건설 등 해외영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그룹 차원의 통합 해외영업본부를 발족한다. 운곡은 당시 휠체어에 의지해 밤낮으로 해외출장을 다녔다. 1994년 205일, 1995년 217일, 1996년 203일을 해외에서 일을 했다. 특히 해외 투자자들, 금융가들과의 협상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국제금융기관들은 운곡의 열정에 반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보고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정인영이란 사업가를 보고 빌려 준다”고 할 만큼 운곡을 신뢰했다. 한라그룹을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킨 운곡은 1996년 12월 24일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이 된다. 창업 35년 동안 운곡 정인영이 이룬 성과는 대단했다. 한라그룹은 자산 6조 2000억 원, 21개 계열사를 둔 재계 12위로 성장해있었다. 한라그룹 성장사를 연구해온 남명수 인하대학교 교수는 “운곡은 경영자로서 성공적인 기업 활동을 하기 위해 정도경영을 확립했고, 그 위에 속도를 중시하고, 기초를 다지며, 규모를 확장시키는 경영활동을 실행했다”며 “운곡의 이 같은 성공적 기업 활동은 한라그룹의 재무성과로 이어졌고 매출, 자산, 자본 모두 성장하는 결과를 이루었다”고 한라그룹의 성공요인을 분석했다. 운곡은 이처럼 도전정신으로 한국 중공업의 씨앗을 심었고(1962~1979), 오뚝이 정신으로 한라그룹을 일으켜(1980~1996) 정도경영으로 한라의 성장발전 (1996-2006)을 도모했다. 운곡은 한국 중공업 발전의 견인차 역할, 산업보국의 사회적 책임경영을 다한 뒤 일선에서 물러났고 2세 경영의 정몽원 회장 체제가 들어선다. ━ 낙관주의자 운곡의 희망경영 철학 하지만 하늘은 운곡이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운곡과 한라그룹은 뜻하지 않은 세 번째 시련을 겪게 된다. 1997년 12월 IMF 사태로 한라그룹은 부도를 내고 그룹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한라건설(주)은 1999년 경영이 정상화되면서 4000억원 규모의 화의 채무를 모두 갚았지만 알짜기업인 만도기계를 외국계 투자회사에 완전히 넘겨주어야 했다. 한라그룹 재기의 모태가 된 만도기계에 대한 운곡의 애정은 각별했다. 하지만 힘이 부쳤다. 운곡은 2006년 노환으로 영면하고 만다. 7월 20 일이다. 한국경영사학회는 “운곡은 투명한 정도경영, 열정적 도전과 개척정신, 창의적 혁신 등에 기반을 둔 기업가정신과 탁월한 변혁적 리더십으로 한라그룹을 형성하고 성장시켰다.”며 “운곡의 기업가정신은 한라그룹이 걸어온 모든 과정에서 한라의 창업과 성장과정의 뿌리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운곡의 대표적인 기업가정신이 바로 투명한 정도경영이다. 운곡은 정도경영(正道經營)을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자 철학으로 지켰다. 운곡은 모든 면에서 투명한 생활태도를 항상 주장했다. 사업을 하면서 일체의 뇌물, 향응 등을 제공하지 않았고, 공정한 경쟁과 윤리적 경영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1981년 3월 28일 외환관리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운곡 정인영 창업회장이 검찰에 연행되었다가 연행 14일 만에 무혐의로 석방된 사실은 유명하다. 비자금 사건으로 다른 그룹의 총수나 임원들이 수없이 정치자금이나 배임횡령 등의 구설수에 오르고 검찰에 소환될 때조차 그의 이름은 오르내리지 않았다. 기업인으로서 그는 이익창출과 납세의무를 지켰고, 인재육성과 고용창출을 확대하여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는 산업보국의 사회적 책임경영에 충실했다. 운곡을 특징짓는 또다른 기업가정신은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도전정신이다. 운곡은 “낙관과 긍정이야말로 내 삶의 버팀목이다”라고 말했다. “나도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을 뿐이다”는 그의 발언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운곡의 도전정신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다. 운곡은 또한 창의적 혁신정신을 보여준 기업가였다. 운곡은 미국 롱아일랜드 대학에 인재양성을 위한 과정을 개설하는 등 한국경영자로서 창의성 개발의 모범을 보였다. 운곡은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데도 앞장섰다. 지금은 일반화된 조선소의 ‘플로팅 도크(Floating Dock)도 운곡의 머리에서 나왔다. 인천조선에서 부지의 한계로 정상적 도크시설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자 운곡은 ‘야드에 레일을 깔고 배를 옆으로 밀어서 바다에 진수시키는’ 플로팅 도크방식을 제안했다. 당시 국내 조선 전문가들까지 모두 불가능하다고 반대했지만 지금은 일반화됐다. 글로벌 경영을 선도한 것 역시 운곡에게서 두드러지는 혁신정신의 사례다. “한라의 고객은 세계다”는 그의 발언은 너무나 유명하다. 운곡은 ‘21세기는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보았다. 그래서 항상 글로벌 문화에 대한 가치관과 규범을 공유하고자 했다. 그의 글로벌 경영과 혁신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쉼 없이 계속되었다. 인생의 황혼기, 평생 일궈온 한라그룹이 산산조각났지만 그래도 운곡은 꿈을 버리지 않았다. 운곡은 늘 “사업하는 사람은 꿈을 갖고 불굴의 신념으로 모든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만도기계를 되찾는 꿈을 꾸다 87세에 영면했다. 다행히도 운곡이 믿는 신은 그의 꿈과 기도를 잊지 않았다. 늦었지만 그 꿈은 실현되었다. ━ (주)만도 되찾은 정몽원 회장의 눈물 “드디어 잃어버린 만도를 되찾았습니다. 아버님 이제 편히 잠드세요.” 정몽원 회장이 만도를 되찾은 바로 그 장면이다. 정 회장이 2008년 1월 22일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경기도 양평군 용담리 선친의 묘소를 찾았다. 한라그룹의 주요 임원 20여 명도 동행했다. 정몽원 회장은 2005년부터 만도의 권토중래를 밤낮으로 생각했다. 만도를 한 번도 남의 회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절실함과 간절함으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결국 정 회장은 KCC, 산업은행, 국민연금관리공단(H&Q 사모펀드) 등과 함께 한라건설컨소시엄을 형성해 지분 72.4%를 사들이며 모기업이었던 만도를 다시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만도를 한라의 계열사로 편입했다. 정 회장은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묘소 앞에 조용히 하얀 국화 한 송이를 헌화했다. “(돌아가신 뒤에)‘저희 형편에 맞게 일단은 건설업을 했다가 만도를 되찾아서 그룹을 키워나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보호해 주세요. 힘이 돼 주세요. 그렇게 보고를 했었는데, 이제 만도를 되찾았다는 보고를 드립니다’ 그렇게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났더니 제 눈에 눈물이 글썽했죠… 사실 만도를 되찾기까지는 무엇보다 아버님의 음덕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잠깐 하는 말씀이래도 ‘뭐 도와줄 거 없느냐?’ 면서 지원해주는 우군들이 참 많았어요.” 정몽원 회장이 지난 6월 7일 남명수 교수에게 털어놓은 당시의 감회다. 정몽원 회장이 운곡의 못다 한 꿈을 뒤늦게 이뤘다고 보고하는 그 자리는 아마도 하늘에 있던 운곡이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서정주의 시 )처럼 아들을 다독이고 눈물을 덮어준 포근한 서설(瑞雪)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룬 한라그룹의 영광을 반드시 재현하겠다고 다짐한 정몽원 회장은 그 약속을 지켰다. 만도는 상장 폐지 10년 만인 2010년 5월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다시 상장했다. 2013년 6월에는 세계 100대 자동차 부품업체 가운데 45위에 선정되었다. 한라그룹은 현재 재계 40위권대로 그룹의 중심인 (주)한라홀딩스를 포함해 25개의 계열사를 두고 내실있게 순항하고 있다. 경영 구루 피터 드러커는 “미래는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는 운곡의 철학인 “꿈을 꾸고, 꿈을 믿고, 그 꿈을 실행하라”와 일맥상통한다. 경영사학자들은 운곡이 경영인생을 통해 피터 드러커와 같은 철학을 실행하고 구체화하는 삶을 살았고 이는 한국이 세계 경제를 이끌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남명수 인하대 명예교수는 “운곡의 기업가정신을 연구하는 것은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공업계를 비롯해 향후 한국 기업의 지향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운곡 추모 10주기를 맞아 재조명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 한라그룹 경영진과 임직원의 신뢰경영 결실 맺어 한라그룹은 매년 운곡 정인영 창업회장의 추모일이 다가오면 검소하고 내실 있는 행사를 통해 창업주의 정신을 되새기곤 한다. 2011년 7월 5주기 때는 추모 사진전을 열어 운곡의 기업가정신을 기렸다. 올해 역시 재계의 본보기가 될 만한 인상적인 사례를 남겼다. ㈜한라(구 한라건설)는 지난 6월 9일 이사회를 열고 임직원을 대상으로 보통주 300만주(약 15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호응해(주)한라의 대주주인 정몽원 회장도 임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신뢰에 공감하고 화답하는 의미에서 개인 보유주식 중 100만 주를 임직원들에게 무상증여하기로 약속했다. 정몽원 회장 임직원에 무상 주식증여한라그룹 박종철 상무는 “글로벌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선제적 차원에서 유상증자를 결정하고 임원들이 사업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올해 말이면 재무구조가 개선돼 어느 정도 수치를 보일 것이다’, ‘우리 조직은 앞으로 이런 모습이 될 것이다’ 라고 설명하며 직원들에게 증자 참여 의사를 물었더니 다 하겠다고 나서더라”며 “이에 정몽원 회장께서 보답하는 차원에서 보유하고 있던 주식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상무는 그러면서 “한라그룹은 앞으로도 내실 있는 알찬 경영을 통해 수익성 극대화에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한라그룹의 이 같은 발표는 조선과 철강 등 구조조정 위기를 겪고 있는 중공업계에 귀감이 될 만하다. 운곡이 늘 강조했던 사회책임 경영과 정도경영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경영사학계의 평가다.

2016.06.23 15:37

10분 소요
[대규모 투자 유치한 포스코건설] 사우디 건설 시장 교두보 확보

건설

1조2400억원. 포스코가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인 퍼블릭인베스트먼트펀드(PIF)에서 유치한 자금이다. 6월 15일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압둘라만 알 모파디 PIF총재와 포스코 건설 인천 송도 사옥에서 만나 포스코건설 지분 38% 양수도 계약을 했다. 이 중에는 포스코가 보유하고 있는 포스코건설 주식 1080만2850주와 포스코건설의 신규 발행 주식 508만 3694주가 포함돼 있다. 권 회장은 “한국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 계기는 고려시대에 이곳 송도에서 불과 50km 떨어진 벽란도에 온 아랍상인들을 통해서였다”며 “이번에 한국과 사우디가 함께 미래를 열 수 있게 된 것도 양국간 1000년이 넘는 역사적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이번 계약은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에 나선 사우디 정부와 새로운 투자자를 확보해 미래 성장동력을 준비하려는 포스코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성사됐다. 사우디 정부도 급변하는 에너지 시장의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PIF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사회간접자본 투자, 자동차산업 등 산업 인프라 및 제조업 육성 계획을 세웠다. 한국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성공적인 변화를 이뤄낸 나라다. 포스코는 한국 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경험과 경쟁력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PIF가 포스코를 파트너로 선택한 이유다.PIF는 2008년 설립된 국부펀드다. 자산 규모는 3000억 달러(약 330조원)로 사우디의 제조기업과 산업 인프라 분야에 투자해왔다. 원래 재무부 산하 국부펀드였으나 올해 새로 취임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이 정부 조직 개편을 단행하면서 경제개발위원회(CED) 산하로 옮겼다. CED는 국왕 직속기관으로 석유부와 재무부 등 사우디 핵심 경제부처가 모여 경제개발을 총괄하는 기관이다.포스코건설은 지난 3년간 지속적으로 부채비율을 줄여왔다. 이번 PIF 투자 유치 덕에 재무구조 개선과 신용등급 상향의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 PIF는 2명의 이사를 선임한다. 이를 통해 포스코건설은 비상장사로선 드물게 국제 표준에 맞는 경영의 투명성과 운영시스템의 효율성을 꾀할 수 있게 됐다. 100조원 규모의 사우디 건설 시장 진출에서 유리한 고지도 확보했다. 포스코건설은 사우디 정부와 합자 국영 건설사를 설립한다. 이를 앞세워 사우디 정부가 발주하는 철도·호텔·건축 등 주요 건설산업 수주에 나설 계획이다. 포스코건설은 수익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고, PIF는 앞선 기술을 이전받아 건설 역량을 확보할 수 있다. 포스코는 향후 PIF와의 신규 협력 사업을 지속적으로 발굴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양사간 운영위원회를 열어 자동차·정보통신기술·민자발전사업인 IPP(Independent Power Plant) 사업 등으로 협력분야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2015.06.21 11:36

2분 소요
한국 유화산업 이끄는 3인방

산업 일반

“허수영 롯데케미칼 사장, 박진수(62) LG화학 부회장, 손석원(61) 삼성토탈 사장은 한국 석유화학산업을 대표하는 3인방이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많다.”한국석유화학협회 김평중 연구조사본부장의 말처럼 한국의 석유화학 업계를 이끌어가는 3명의 CEO에겐 3가지 공통점이 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이고 석유화학산업 한우물만 팠으며 평사원으로 입사해 CEO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석유화학 분야의 리더가 서울대 화공과에 몰린 이유는 시대적 산물이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한국의 경제 틀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춰 변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 ~1966년)은 전력·석탄의 에너지원과 기간산업 확충, 농업생산력 확대에 맞춰졌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점을 뒀다. 다음은 중화학공업 개발이다. 김 본부장은 “한국 정부는 의식주를 해결 한 후에 원자재 자급과 수출을 위해 중화학 공업을 육성했다. 철강과 석유화학 분야가 그 중심”이라고 설명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 ~1976년)으로 이어졌다. 인재들도 화공과로 몰렸다.샐러리맨의 꿈은 CEO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실적과 리더십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리더 3인방도 굵직한 성과를 내면서 CEO에 올랐다.‘석유화학업계 맹장’으로 꼽히는 허수영 사장은 1976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에 입사한 이후 40년 가까이 석유화학업계에 몸담고 있다. 롯데그룹의 석유화학 부문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2008년 케이피케미칼 대표를 맡은 후 2조 9000억 원이었던 연매출을 4년 만에 2배 이상 끌어올리는 능력을 보여줬다. 허 사장은 “업계에서 해야 할 말은 좀 하는 편이고, 과거 몇 년간 회사의 대형 인수 합병, 신규 사업에 직접 관여했다”며 CEO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허 사장은 ‘허계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일처리를 꼼꼼하게 하는 리더로 정평이 나있다.한국 석유화학 업계 1위 LG화학을 이끌고 있는 박진수 부회장은 15년 이상 생산 공장을 누볐던 현장 엔지니어 출신이다. LG화학 관계자는 “박 부회장은 현장을 가장 중요시 하는 경영자”라고 했다.1980년대 초 여수공장에서 생산과장으로 일할 당시 폴리스티렌 생산 라인을 난이도가 높은 연속공정 방식으로 건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시운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의 기술고문이 ‘재가동까지 6개월 이상 걸린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박 부회장은 야전침대를 현장에 갖다 놓고 일하면서 생산라인을 3주 만에 재가동시켰다.손석원 사장도 삼성토탈에서 첫 엔지니어 출신 CEO다. 1979년 삼성석유화학에 입사했고, 2003년 삼성토탈 대산공장 공장장으로 승진한 후 8년 동안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다.삼성토탈 관계자는 “공장장을 오랫동안 지냈던 손 사장의 존재는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큰 희망”이라고 설명했다. 손 사장은 1977년 TPM(Total Productive Maintenance, 전사적 생산보전 활동) 운동으로 업계에 이름을 알렸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 이어져온 성공적인 내부 혁신 사례로 꼽힌다.

2014.10.03 08:33

2분 소요
문화강국 건설로 기수를 돌리다

건설

10월 15일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 회의(이하 중전회)가 개막됐다. 후진타오 주석을 수반으로 하는 4세대 지도부가 가진 마지막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였다. 당 중앙위원회 회의는 사실상 중국 최고 정책결정 기구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언제나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다. 지난해 5중전회에서는 앞으로 5년 간 중국 경제의 비전과 발전 계획을 제시한 12차 5개년 발전 계획을 입안해 중국 안팎의 관심을 모았다. 이번 6중전회에서는 ‘문화체제 개혁의 심화 및 사회주의 문화 대발전과 번영 촉진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켰다.현재 중국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 물가, 지속적인 긴축정책에 따른 중소기업 도산, 위안화 절상에 따른 수출 감소 등 각종 경제 현안이 산적해 있다. 이들 문제의 해결이 시급함에도 당 지도부는 문화체제의 개혁과 문화산업의 육성을 이번 회의의 핵심 의제로 삼았다. 일부 국민들은 경제현안 해결이 우선이며, 문화는 그 다음이라며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하지만 중국 사회의 안정과 장기 발전을 위해서는 더 이상 문화라는 주제를 외면할 수 없음을 중국 지도부는 잘 알고 있다. 지난해 세계 2위의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선 데 이어 이제는 문화강국 건설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도 중국의 문화역량과 시민의식을 비롯한 소프트파워의 육성 방안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다. 중앙위원들은 세계가 대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국력에서 차지하는 문화의 비중 역시 커지고 있다며 국가의 문화 소프트파워를 강화하고 국제사회에서 중화 문화의 영향력을 키우는 게 당면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중국 문화산업의 최근 5년 간 성장률은 16~20% 정도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중국 정부가 문화 쪽으로 눈을 돌리기로 한 만큼 영화, 애니메이션, TV 드라마, 출판, 광고 등 문화산업 전반에 대해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전망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10년은 중국 문화산업 발전의 황금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흘러나온다. 중국의 궈진증권은 2015년 중국 문화산업 시장규모는 2조8500억 위안으로 2009년의 3.4배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문화산업 규모 2015년 2조8500억 위안중국은 2009년 ‘문화산업 진흥계획’을 마련해 문화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에 포함시킨 데 이어 12차 5개년 발전 계획에서도 국민경제 지주산업으로 문화산업의 전체적인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문화산업이 국가가 지정한 지주산업에 포함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중점 육성 대상에는 문화 창작, 영상물 제작, 출판, 인쇄, 오락 연출, 디지털 콘텐트, 애니메이션 등 7개가 선정됐다. 정부는 각 분야별 대표기업 육성과 중소기업 지원을 통해 산업 영역과 분야를 초월해 전체 산업 규모와 기술 수준을 향상시킨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현재 문화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2.5%)를 5년 안에 5~6%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자금 융자, 증시 상장, 세제 우대, 신용대출, 수출 지원 등 각 분야 별로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자금 지원을 위해 대규모 문화산업 발전기금을 마련하는 한편, 각종 세금감면 혜택도 마련하기로 했다. 각종 복권 판매로 거둬들이는 수익금을 문화산업에 지원하는 비중도 대폭 높이기로 했다. 해외시장 공연과 해외 문화콘텐트 기업 인수 등 해외시장 진출에는 정부가 나서서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는 방침이다.베이징에서 6중전회가 개최된 10월 15일 항저우에서는 ‘중국-대만 문화산업협력 포럼’이 열렸다. 포럼에 참석한 칭화대학 국가문화산업연구센터 슝청위 주임은 ‘항저우가 중국 문화산업의 메카’라며 항저우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항저우시 당 부서기 예밍 역시 “다른 대도시에는 반드시 있는 중화학공업 단지가 항저우에는 없다. 대신 문화산업 발전이 가장 빠른 도시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말했다.실제 항저우는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다.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쑤저우와 항저우를 가장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친다. 특히 항저우에 대한 애정은 절대적이다. 은퇴 후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은 지역으로 너나없이 항저우를 꼽을 정도다.항저우의 대표적인 명소가 바로 서호다. 서호는 중국 4대 미인 중 하나인 월나라 미인 서시가 태어난 지역이자, 시성(詩聖) 이태백이 달을 노래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한 곳이다. 올 6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항저우에는 서호만 유명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 ‘인상서호’라는 공연을 빼놓을 수 없다. 항저우에 가서 서호를 보지 않으면 항저우에 다녀갔다고 할 수 없고, 서호에 가서 ‘인상서호’를 보지 않으면 서호에 다녀왔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장이모우 연출의 인상서호 유명‘인상서호’는 서호의 산수화 같은 풍경과 고도 항저우에 전해지는 전설을 가미한 블록버스터급 공연이다. 메인 테마는 서호에 전설로 내려오는 백사(白蛇)와 총각의 사랑 이야기이다. 연출자는 중국 영화계의 거장 장이모우 감독이다. 계림 양삭에서 공연되는 ‘인상 유삼저’의 성공에 힘입어 그가 두 번째로 연출한 작품이 ‘인상서호’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도 그랬듯 장이모우 특유의 스토리를 풀어내는 상상력과 그것을 자연 속에 체화하는 능력은 경이로울 따름이다. 넓은 호수가 무대가 되고, 호수 뒤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산이 배경이 된다.배경으로 보면 한 폭의 잘 그린 수채화가 따로 없다. 자연과 인간, 빛과 소리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조화를 이루는 공연도 환상적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발함과 웅장한 스케일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인상서호’는 2007년 첫 선을 보인 이후 연간 50만 명 이상이 찾는 메가 히트작이다. ‘인상 유삼저’와 함께 연간 300억원이 넘는 이익을 낸다. 항저우는 ‘인상서호’ 공연 덕에 그저그런 관광지를 벗어났다. ‘인상서호’의 의미는 단순히 관광명소 하나가 추가된 데 그치지 않는다. 기나긴 역사와 전설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에 현대적인 테크놀로지를 결합해 새로운 문화콘텐트 작품으로 탈바꿈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한국 역시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인상서호’ 같은 작품이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장소야 경주 보문단지도 좋고, 서울대공원 저수지나 일산 호수공원도 가능하다. 게다가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도 있고, ‘견우와 직녀’, ‘호동왕자와 평강공주’와 같은 설화, 전설도 많다. 갖춰야 할 요소는 모두 갖췄다. 필요한 건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기술과 결합해 미래의 고부가가치 문화 콘텐트 작품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이다. ‘인상서호’가 볼거리와 흥행 요소를 모두 갖춘 상품으로 승화한 데는 장이모우 감독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소프트파워의 육성과 발전에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에도 하루 빨리 ‘장이모우’와 ‘스티브 잡스’같은 인물이 나타날 수 있도록 정책적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한다.

2011.11.15 10:29

5분 소요
수퍼 코끼리 인도, 중국 제칠까

산업 일반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G2 국가로 세계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중국과 함께 친디아(Chindia)로 불리며 경제대국을 꿈꾸는 인도는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다. 금융위기 이후 인도 경제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현지에서 바라본 현재 경제상황과 앞으로 전망을 알아봤다. ▎이명박 대통령과 만모한 싱 인도 총리. 인도는 현재 전반적으로 양호한 경제지표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궁금한 것은 앞으로 인도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다. 필자는 3년 전 인도에 왔다. 그 전에는 5년 동안 중국과 관련한 연구를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나라 경제성장 방식의 차이점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인도 경제와 관련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인도가 언제 고도성장기에 접어들 것인지다. 일본, 한국, 중국 세 나라 모두 일정 기간 10%가 넘는 고도성장을 지속해 왔다. 인도 역시 이런 고도성장세가 나타날 것이고 그 시기가 언제일 것인가는 기업의 투자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과 중국·인도에서 경제상황을 지켜 본 결과 인도가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10년 이상 유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그 이유와 관련해 여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필자는 인도의 독특한 신분제도와 지나치게 다원화된 사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도성장은 곧 압축성장을 의미한다. 경제발전의 속도가 중요하고 이를 위해 특정 부문에서 희생이 뒤따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원의 절약과 집중이 중시된다. 또 필요한 자원, 즉 자금과 노동력의 대량동원 체제가 가동된다. 하지만 인도는 이런 조건과 180도 다른 곳이다.상류층은 현재 상태 유지 원해먼저 압축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인도의 신분제도를 살펴보자. 한국, 일본, 중국 등 압축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의 특성 중 눈길을 끄는 부분이 평등의식으로 무장한 일반 대중이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남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회변화와 경제발전의 주역을 담당했다.하지만 인도는 다르다. 애초에 사람은 신분에 따라 다르게 태어났고, 신분에 맞는 역할과 책임이 부여된다고 생각한다. 부와 권력이 편중된 채 수천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잘사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은 겉보기부터 다르다. 북인도는 특히 이런 현상이 심해 상류층과 일반 서민의 인종이 달라 보일 정도다. 현재의 인도는 양반과 상민, 천민이 분명한 조선시대와 비슷하다.신분제도의 가장 큰 폐해가 바로 교육이다. 독립 인도의 초대 총리인 네루는 사회주의식 경제발전을 이룬 소련의 모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중화학공업 위주의 경제발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의 성공 모델을 뒷받침한 의무교육은 애써 무시했고 오히려 고등교육기관 육성에만 힘을 기울였다. 네루는 카스트에서 최고 계급인 브라만 출신이기 때문이다. 네루는 천민이 글을 배워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천민은 천민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데 이들이 글을 배우면 그일을 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생각에서다. 또 유식해진 천민이 브라만에게 대드는 상황을 네루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극단적 추측이기는 하지만 인도 상류층은 일반 서민, 하층민이 교육으로 유식해지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도의 문맹률은 공식 통계로만 30% 정도다. 하지만 어떤 분석에 따르면 문맹이 아니라는 기준이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인도에 풍부한 노동력이 있다 해도 교육받지 못한 인력은 산업화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다원화된 사회도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인도는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한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리스 시대 특정 시민 계층이 투표로 의사결정을 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교육수준이 높고, 정책을 이해할 정도의 역량이 돼야 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아직도 제대로 실현하는 나라가 적은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알려졌고 독립 이후 군사 쿠데타 없이 민주적으로 정부를 구성해 이끌어 오긴 했지만 경제의 압축성장에는 불리하다. 의견을 조율하고 방향을 제시해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압축성장한 나라들을 보면 정치적 응집력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냈다. 일본은 자민당의 장기집권, 한국은 공화당의 장기집권, 중국은 공산당 체제에서 압축성장이 이뤄졌다.사회 다원화로 고도성장 어려워인도에서 장기집권한 정권이 고도 압축성장을 이룰 수는 없을까. 과거 몇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사회가 다원화돼 한 가지 사고와 사상으로 다양한 사람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가 너무 다원화된 것이 문제다. 다원화된 사회 구성원을 모두 이해시키고 공감대를 이끌어내려면 민주주의가 요구되고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인도의 압축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2003년 골드먼삭스는 2050년까지 경제성장 전망을 통해 앞으로 BRIC(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국가들이 세계를 주도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인도 열풍이 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분석에 따르면 인도는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골드먼삭스의 분석에서 인도의 경제성장률은 5~6%에 머무를 뿐이다. 어느 시점에 고도성장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은 없었다.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5~6%에서 꾸준히 성장해도 인도는 2050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된다.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인도의 고도성장이 어렵다면 현재 일어나는 고성장은 어떻게 봐야 할까. 좀 다르게 볼 수 있다. 외부 자금 유입에 의한 단기적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세계적으로 돈이 갈 곳이 없어 인도로 몰렸고, 이 유동성이 걷는 코끼리를 달리게 만들었다고 판단한다. 코끼리는 숨이 차 걸음을 잠시 멈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달리지는 않겠지만 원래 보폭대로 성큼성큼 꾸준히 걸어갈 것이다.여기서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등장한다. 코끼리가 잠시 멈춘다는 점이다. 외부에서 돈이 몰려 부동산, 소비재 산업 등 일부에 투자가 집중됐지만 인프라 건설이 지체돼 병목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코끼리는 잠시 멈추고 숨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점이 외국 기업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인도가 숨을 고르는 동안 각종 개혁, 개방 조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위험 역시 이때 발생한다. 인도 같은 큰 나라가 숨을 고르는 시간은 한국에도 힘든 시간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힘든 시기에도 과감히 실행할 수 있는 결단력이다. 인도는 결코 만만한 시장이 아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코끼리에 올라타려면 숨을 고를 때를 노려야 한다. 인도가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장기적 전략을 마련할 때다. ▎인도 델리의 쇼핑타운인 코넛 플레이스. ■ 인도의 현 경제상황고성장 지속 … 투자·무역에서는 중국에 밀려요즘 인도는 높은 경제성장세에 고무된 모습이다. 인도는 2010년 1분기 경제성장률이 8.9%를 기록했고 2분기에도 8.9%라는 높은 성장세를 보였다. 경제성장률을 보면 인도가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설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인도 정부 역시 2011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8.5%에서 8.75%로 높이는 등 앞으로 경제를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현재까지 지표만 보면 인도의 기대가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도가 직면한 문제들 때문에 현재의 고성장이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인도는 내수가 경제를 주도한다. 지출 면에서 GDP(국내총생산)를 중국과 비교하면 양국 간 차이가 뚜렷하다. 중국은 내수가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8%지만 인도는 무려 75%에 이른다. 투자는 중국이 48%, 인도가 38% 수준이다. 하지만 2003년 인도의 GDP에서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25%였음을 생각하면 투자 역시 크게 성장했다.중국은 순수출이 4.4%지만 인도는 -5.5%를 기록했다. 대외교역 부문에서 국내총생산에 기여하는 바가 중국보다 약한 것을 알 수 있다. 인도 경제가 앞으로 순항하려면 내수가 살아나야 한다. 물론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투자 역시 더 활성화돼야 할 것이다.산업생산에서는 2009년엔 2008년의 낮은 실적으로 두 자릿수 산업생산 증가율을 보였지만 2010년 6월 들어 상승세가 급격히 떨어졌다. 2010년 1월부터 4월까지 15%대의 높은 산업생산 증가율을 보이다 상승, 하락을 반복하는 불규칙적인 모습을 보였다. 가장 최근 발표된 수치는 10월의 10.8%로 다시 두 자릿수 성장률로 복귀했지만 추세적으로 보면 성장동력이 급격히 떨어진 셈이다.물가상승률 동향을 살펴보면 과거 1년 동안 진행된 물가상승 추세로 인도 금융당국은 금리를 인상하는 등 수요 억제를 위해 노력해 왔다. 올해 농작물 작황이 비교적 좋고 금리인상의 영향으로 물가상승 추세가 진정되고 있다. 인도의 도매물가상승률은 지난해 가뭄 때문에 높은 상승세를 기록해 2010년 3월부터 7월까지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 그러자 인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수차례 올려 물가상승 압박을 차단하고자 했다. 금리인상으로 산업생산이 타격을 받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적절한 정책을 펴 물가상승 압력이 줄었다. 이는 다시 인도 중앙은행이 금리인하에 나설 수 있게 돼 부진했던 산업생산을 끌어올릴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경상수지를 살펴보자. 경기가 활성화할수록 적자 폭이 더 커지는 구조다. 2010년 1분기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무려 137억 달러에 달한다.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2010년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500억 달러를 넘을 전망이다. 경상수지가 이렇게 악화되는 것은 무역수지에서 큰 폭의 적자를 보기 때문이다.인도가 IT(정보기술) 아웃소싱 서비스나 소프트웨어 판매 등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적지 않지만 늘어나는 무역수지 적자 폭을 메우기엔 부족하다. 특히 중국과 무역 상황을 살펴보면 무역수지 적자 상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도는 중국과 무역에서 2007년 163억 달러 적자, 2008년 231억 달러 적자, 지난해 192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인도가 중국에 수출하는 물품은 철광석 등 기초원자재지만 인도가 중국에서 수입하는 물품은 주로 공산품이다. 인도 경제가 성장할수록 공산품의 국산화가 이뤄져야 하는데 오히려 중국 공산품에 더욱 의존하는 상황이다. 중국이 인도와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서두르고 있는 상황이 인도에 썩 달갑지만 않은 이유다.

2010.12.27 14:10

7분 소요

많이 본 뉴스

많이 본 뉴스

MAGAZINE

MAGAZINE

1781호 (2025.4.7~13)

이코노북 커버 이미지

1781호

Klout

Kl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