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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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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택시기사 구합니다”…서울시 첫 택시 취업박람회

정책이슈

서울시가 오늘(8일)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30% 넘게 줄어든 법인택시 운수종사자를 확충하기 위한 대규모 취업박람회를 연다. 단계적 일상회복(위드코로나)과 연말연시가 맞물린 심야시간대 택시 승차난을 해소하는 동시에, 택시기사 부족으로 영업난을 호소하는 법인택시업계의 숨통을 튼다는 목표다. 서울시와 서울택시운송사업조합은 8~10일 3일 간 잠실 교통회관 1층 컨벤션홀에서 ‘2021 서울법인택시 취업박람회’를 개최한다. 택시 운수종사자 구인구직을 위한 취업박람회는 처음이다. 운전면허증이 있고 법인택시 취업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코로나19 영향으로 승객이 줄고 수입이 급감하자 법인택시 운수종사자는 코로나19 확산 이전 대비 1만 명 가까이 감소했다. 법인택시 운수종사자는 올해 10월 2만955명으로 2019년(3만527명)과 비교해 31.4% 감소했다. 이로 인해 법인택시 가동률은 올해 1~9월 평균 34.47%에 불과하며, 특히 택시회사는 심야시간대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다. 택시업계는 이번 취업박람회를 통해 취업하는 운수종사자에 1인당 총 60만 원의 취업정착수당을 지급한다. 취업정착수당은 법인택시회사에서 운수종사자에게 지급하며, 월급 외에 월 20만 원씩 3개월 간 지급한다. 이 수당은 신규취업자를 비롯해 박람회를 한 재입사(올해 7월 1일 이전 퇴직자)하는 운수종사자에게도 지급한다. 택시운전자격이 없는 신규취업자에게는 택시조합에서 운전적성 정밀검사, 자격시험, 자격증 발급 수수료, 연수교육비 등 자격증 취득과 관련된 비용 전액을 지원한다. 강필수 기자 kang.pilsoo@joongang.co.kr

2021.12.08 07:00

1분 소요

정책이슈

"손님이요? 저녁에 사람이 없어요. 한 달에 150만원 겨우 법니다. 최저시급도 한참 밑도는데 택시 일을 그만둬야 하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하자 택시기사 월급도 반토막이 났다. 정부가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를 4단계로 높이면서 저녁 승객이 사라진 영향이 컸다. 하루 벌이가 2만~3만원인 날도 많다 보니 아예 '잠정휴업'한 기사도 늘었다. 서울에서 법인택시 기사로 3년째 일하고 있는 김모씨는 와 인터뷰에서 "이번 달이 택시기사가 된 이후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택시를 이용하는 승객이 줄자 수입도 따라 내렸기 때문이다. 김씨는 "오후 6시가 지나면 홍대고 강남이고 거리에 사람이 없다"며 "하루 2~3만원을 벌고 교대하는 날도 있다"고 토로했다. 김씨는이번 달 정부가 수도권 거리두기 단계를 상향 조정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방역수칙을 발표한 지난 9일 방역당국이 "오후 6시 이후 택시 탑승은 2명으로 제한된다"며 택시를 직접 언급해서다. 4단계에서는 오후 6시 이후 원칙적으로 3인 이상 모임이 금지된다. 일각에서 너무 과도하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는 12일 "3인 이상 '사적 모임'을 목적으로 택시에 탑승하면 위반"이라고 정정했다. 앞서 택시기사들은 코로나19가 재확산할 때마다 수입에 타격을 입어왔다. 지난해 1~3차 감염병 확산기에는 법인택시 매출이 10~20%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실이 서울시내 법인택시 매출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전국 법인택시 1대의 하루 평균 매출액은 확진자가 큰 폭으로 늘었던 3월 12만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4%, 9월 14만원으로 같은 기간 대비 10.3% 떨어졌다. 지난해 12월 매출은 13만5000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24.9%나 줄었다. ━ 사납금 부담돼 '잠정휴업'…수입 줄어도 하루 14만원 내야 사납금이 부담돼 '잠정휴업'에 돌입한 택시기사도 속출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택시 운행 수입이 줄어들자 사비로 사납금을 채워 넣으면서까지 운전대를 잡게 됐기 때문이다. 사납금은 법인택시 기사가 매달 회사에 내야 하는 고정금액으로 하루 14만원 수준이다. 이보다 낮은 매출을 낸 날에는 기사가 개인 지갑을 열어야 한다. 법인택시 기사로 2년째 일하고 있는 오모씨는 "하루에 10만원도 못 버는 날이 늘어도 사납금은 내야 한다"며 "하루 12시간을 일하는데 내 돈까지 낼 바에야 8월까지 쉬겠다는 동료도 많다"고 털어놨다. 이어 "특히 저녁 근무는 야간할증이 (수입이) 큰데 저녁이면 식당이 다 문을 닫으니 할당량을 못 채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사납금제가 지난해부터 전액관리제(월급제)로 바뀌면서 불법이 됐다는 점이다. 사납급제를 폐지하고 택시기사의 수입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2019년 8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과 택시운송사업법 개정안이 공포됐지만 일부 업체들은 아직 사납금과 비슷한 형태로 임금을 줄이고 있다. 기본금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을 낮추는 식이다. 수도권 외 택시기사의 영업환경은 더 열악하다. 민주노총 산하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는 "택시월급제가 시행된 지 2년이 가까워져 오지만 수도권 외 택시기사는 한 달 90만~150만원을 받고 있다"며 "택시사업주가 간주근로시간(사업주와 근로자가 정한 근로시간)을 하루 3~5시간으로 축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택시업계는 통상 노조와 사업자가 간주근로시간을 협상해 월급을 정하는데, 사업자가 이 근로시간을 주 20시간으로 낮춘 것이다. 이 때문에 운전대를 놓는 택시기사가 늘고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택시기사 수는 지속해서 감소했다. 2019년 10만명을 넘어선 택시기사 수가 올해 5월 8만명으로 급감했다. 지난해 택시업(業)을 그만둔 기사만 1만명이다.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전국 일반택시 기사의 수는 8만666명으로 지난해 5월 대비 10.9% 감소했다. 코로나19 영향이 없었던 2019년 5월과 비교하면 22.3% 줄어든 수치다. 이에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법인택시를 비롯해 마을·시외·고속버스, 전세버스 기사에게 1376억원을 민생 지원 자금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개인택시 기사는 매출 10~20% 감소 업종에 해당돼 소상공인 피해지원금(희망회복자금) 50만원을 받을 예정이다. 정부가 택시기사에게 지원금을 지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택시기사에게 소득안정자금을 지원한 바 있다. 지난 4월에는 4차 재난지원금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반택시기사 8만명에게 560억원 규모의 지원금을 지급했다. 선모은 인턴기자 seon.moeun@joongang.co.kr

2021.07.31 12:55

3분 소요
[‘생태계 파괴자’ 카카오T] 플랫폼에 빨려 들어가는 택시산업

산업 일반

유사사납금 여전, 월급제도입 유명무실… 카카오 자사택시 콜 몰아주기 논란도 잠잠했던 법인택시 기사들의 불만이 다시 커지고 있다. 올해부터 법인택시회사의 사납금 제도가 폐지됐지만, 기사들에게 실익은 없어서다. 특히 산업의 무게추가 카카오모빌리티로 기울어 업무 환경은 더욱 악화했다는 지적도 나온다.정부는 올해부터 사납금 폐지를 골자로 한 ‘택시운송사업의 발전에 관한 법률(택시발전법)’의 시행에 나섰다. 법인택시 기사들에게 부담을 주는 사납금을 없애고, 월급제로 운영하는 ‘전액 관리제’를 도입하는 내용이다. 그동안 기사들은 근로시간 내에 사납금을 채우면 120만~140만원의 기본급에 추가 수익을 가져갈 수 있지만, 일정 수준 이상 소득을 보장하기 어렵고 높은 업무 강도를 초래하는 문제를 낳았다.이에 정부는 모빌리티 혁신을 위한 패키지 법안으로 사납금을 폐지하고 전액관리제를 도입하는 택시발전법을 통과시켰다. 전액관리제는 기사가 수입금 전부를 회사에 납부하고, 회사가 이에 상응하는 월급과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구조다. ━ 사납금 올라 급여 줄고 영업부담은 커져 그러나 택시회사들은 우회적으로 사납금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최저 영업 기준을 정해놓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성과급에서 제외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기존 주·야간 각각 13만5000원~14만원(서울 기준) 수준이던 사납금을 주간 15만5000원, 야간 17만8000원으로 대폭 인상했다.기사가 내야 할 월 사납금이 1개월(26일 출근 기준)간 351만~364만원에서 주간 403만원, 야간 462만8000원으로 대폭 늘었다. 지난해 서울지역 법인택시 기사의 월 평균 매출이 약 480만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부담이 증가했다.예컨대 주간 근로자가 ‘월 기준 운송 수입금’에 30만원 미달한 373만원밖에 승객을 유치하지 못하면, 성과급에서 미달한 금액만큼 제외한 급여를 받게 된다. 월 기본급에서 공제하는 것은 불법이라 성과급·승무수당 등 보조수당에서 지급액을 줄이게 된다.서울지역 한 법인택시 기사는 “택시 사업이 인건비·운영비 싸움이기 때문에 회사가 최소 수익 기준을 만드는 것은 이해한다. 애초에 고정급제가 정착될 것이라고 기대도 안 했다”며 “다만 사납금이 올라 부담이 커졌으며 업무 강도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카카오모빌리티 역시 ‘카카오T블루’ 직영택시기사 월 급여를 월 260만원 보장에 인센티브를 지급이던 것을 기본급 180만원대에 인센티브 지급으로 조정했다. 인센티브 비중을 높여 기사의 최소 매출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인센티브 비중이 커지면 사납금 제도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지며, 인센티브를 챙기기 위한 택시기사의 불친절 및 승차거부 병폐가 사라지기 어려울 거란 지적도 나온다.법인택시 기사들이 이처럼 자신들에게 불리한 안을 받아들인 것은 모빌리티 혁신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 때문이었다. 2018년 카카오가 모빌리티 분야에 본격 진출하자 택시기사들이 분신하는 등 혼란이 커졌다. 정부가 중재자로 나서 ‘택시-카풀 사회적 대타협기구’를 구성했다. 모빌리티 사업자 중에선 카카오모빌리티가 유일하게 참여했다.대타협기구는 카카오택시의 오전 7∼9시와 오후 6∼8시 운행, 주말 운행 금지, 택시산업 육성을 위한 규제 완화 등의 합의를 끌어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택시업계가 인정한 사실상 유일한 모빌리티 사업자가 된 셈이다. 택시업계는 전액관리제를 대가로 기사들의 협조를 구했다. 대타협기구에서 협상력을 강화하기 반대 목소리를 높여달라는 것이다.실제 대타협기구 합의가 이뤄지자 지난해 7월 택시발전법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더불어 렌터카를 빌려 승객을 나르는 라이드 헤일링 서비스 타다를 금지하는 내용의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이 올 3월 국회를 통과했다. 더 이상의 사회적 혼란을 피하고 싶은 정부·여당과 택시업계, 카카오모빌리티 등이 손잡고 모빌리티 분야의 신규 사업자 진출을 차단했다. 모빌리티업계 관계자는 “정부와 택시 업계는 모빌리티 사업자가 더 늘어나는 것은 피하고 싶어 했으며, 대화에 협조적인 카카오모빌리티까지는 인정하자는 기류가 있었다”고 설명했다.문제는 전쟁을 마치고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애먼 기사들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법인택시들은 유사 사납금 제도를 운용하며 기사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택시 회사들은 카카오모빌리티의 카카오T가 수수료를 떼어가기 때문에 수익성을 보전하기 위해서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월급제를 시행해 기사들의 안정적 소득을 보장하겠다는 정부의 정책도 현장에선 왜곡돼 나타나고 있다.이러자 택시업계의 총구는 다시 카카오모빌리티를 겨냥하는 모양새다. 독점적 시장 지배력을 가진 카카오T의 가맹수수료 때문에 택시업계에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카카오T는 사용자 2400만명과 가맹택시 5200여대, 직영 택시 900여대, 기사 24만 여명이 가입한 국내 최대 택시 애플리케이션이다. 카카오모빌리티는 그간 호출 중개만 했으나, 가맹사업에 뛰어들면서 법인택시로부터 운행 요금의 20%를 수수료로 받고 있다.안기정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5월 20일 열린 ‘플랫폼 택시 발전 및 독점적 지배시장 개선을 위한 세미나’에서 카카오모빌리티를 겨냥해 “손해를 감수하고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더니 이제는 수익을 올리겠다며 시장지배력을 남용해 불공정 가맹계약을 맺고 있다”고 비판했다. ━ ‘T맵’ ‘온다’는 경쟁 안 돼 시장독점 심화 택시업계는 또 카카오T가 수수료율이 높고, 카카오T블루 등 카카오모빌리티 소속 택시에만 좋은 호출을 몰아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사들의 최소 납입금액 하한이 올라 택시업계의 경쟁이 날로 심화하는 가운데, 플랫폼을 쥐고 있는 카카오모빌리티가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이에 카카오모빌리티는 인공지능(AI)이 택시가 호출 승객에게 도착하는 시간과 기사 평가, 기사 배차 수락률, 기사 운행 패턴, 택시 수요와 공급 비율, 실시간 교통상황, 최근 운행 분포 등을 고려해 배차하기 때문에 특정 차량에 콜을 우선 배정할 수 없다고 항변한다.택시업계는 카카오모빌리티에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가 알고리즘의 구성과 항목별 중요도 등을 공개하지 않아서다. 카카오와 택시업계 간 맺은 운송 약관에 카카오가 임의로 콜을 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택시업계도 여기에 서명했다. 카카오가 콜 규정이나 알고리즘 방식을 변경해도 택시업계는 현실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이 때문에 택시 기사들은 카카오T의 독점 구조를 깨겠다며 SK텔레콤의 ‘T맵택시’나 모빌리티 스타트업 ‘온다택시’ 등의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지만 이들 서비스를 사용하는 승객이 많지 않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서울 지역의 법인택시 기사는 “여러 플랫폼을 사용하자는 취지로 T맵택시 단말기를 설치했지만, 카카오T와 비교해 콜이 들어오는 횟수는 극히 적다”며 “사실상 카카오T에 종속돼 움직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2020.06.20 15:55

4분 소요
[‘서비스 종료’ 타다가 남긴 4가지 과제] 극한 대립 속,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았다

산업 일반

이동선택권 빼앗긴 시민이 피해자… 모빌리티 플랫폼 서비스 규정 논의 시작해야 2020년 4월 10일, 모빌리티 플랫폼 업체 타다가 베이직 서비스를 종료했다. 타다가 첫 운행을 시작한 2018년 9월 이후 1년6개월 만이다. 베이직 서비스는 11인승 승합차 카니발로 승객을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다. 타다 운영사인 VCNC는 차량 공유업체 쏘카에서 차량을 렌트해 기사와 함께 승객에게 제공했다. VCNC 측은 “적법한 기사 알선, 렌터카 서비스”라고 주장했지만 국토부와 택시업계는 “유사 콜택시 서비스에 불과하다”며 대립했다.지난 2월 1심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며 문제가 해결되는 듯했으나, 한 달 뒤 국회가 이른바 ‘타다 금지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관광 목적으로 11∼15인승 승합차를 빌릴 수 있지만, 6시간 이상 사용하거나 대여·반납 장소가 공항이나 항만일 때만 사업자가 운전자를 알선할 수 있도록 했다. 타다 베이직 서비스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 셈이다. 모빌리티 서비스 혁신을 몰고 온 사업이냐, 아니냐 하는 공방 끝에 VCNC는 결국 베이직 서비스 종료를 결정했다.갈등과 대립의 마침표가 찍혔다. 보통은 승자, 패자가 나뉘지만 이번 논란에선 승자가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관되지 않은 행보로 혼란을 초래하고 불신을 자초한 정부, 이 때문에 서비스를 포기한 VCNC 모두 얻은 게 없었다. 운수업 시장은 지켜냈지만, 시민들의 거센 비판을 받게 된 택시업계도 명분 없는 승리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VCNC의 일방적인 서비스 포기 선언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타다 드라이버와 이동선택권 하나를 빼앗긴 시민들은 가장 큰 피해자다. ━ 정부 | 일관성 없는 행보로 혼란·불신 초래 타다 문제를 만든 건 사실상 정부라는 지적이다. 타다의 운영 방식은 처음부터 논란이었다. 서울개인택시조합은 타다가 불법 유사 택시라며 지난해 2월 타다 경영진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정부가 한 일은 없었다. 검찰이 타다를 기소하기 전 관련 부서와의 협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았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자 법무부가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검찰에 관련 보고를 받은 것은 맞지만, 그 내용을 국토부에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토부는 “관련 업계의 이해관계 등을 고려해 공식 답변을 내지 않았으며, 단순 의견조회와 기소 관련 협의는 다르다”고 밝힌 바 있다.이 과정에서 택시기사가 분신해 목숨을 잃는 등 택시업계와 타다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1년을 허비하고도 판단은 법원의 몫으로 미뤘다. 정부가 한 일은 ‘사회적 타협기구’를 만든 게 전부였다. 지난 1월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 간담회에서 타다와 택시의 갈등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신구 산업간 사회적 갈등을 아직 풀지 못하고 있다. 일종의 사회적 타협 기구들이 건별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회적 타협기구가 갈등을 해결하지는 못했다.정부 고위인사들의 오락가락 입장도 문제가 됐다. 타다에 대한 입장이 저마다 달랐다. 2019년 5월엔 최종구 당시 금융위원장이 기자간담회에서 타다를 비판했다. 최 위원장은 “최근 타다 대표자 언행을 보면 피해를 보는 계층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아직 못했다고 해서 경제정책 책임자를 향해 ‘혁신의지 부족’ 운운하는 비난을 멈추지 않고 있다”며 “택시업계에 대해서도 거친 언사를 내뱉고 있는데, 이런 것은 이기적이고 무례한 언사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했다.그런데 같은 해 10월 검찰이 타다 임원진을 기소하자 타다를 편드는 목소리가 커졌다. 김상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은 “당혹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신산업 창출 불씨가 줄어들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라며 검찰의 기소를 비판했다.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박 장관은 “시대를 못 좇아간다는 비판을 보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후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견해는 달라졌다. 한 달 뒤 국회에서 타다 금지법을 통과시키자 김 장관은 “타다 ‘금지법’ 아니라 법적 근거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국회 편을 들었다. 이후 국토부는 타다 금지법을 설명하며 홈페이지에 “‘타다가 더 많아지고 더 다양해집니다”라는 내용을 담은 배너를 띄우기도 했다. 이재웅 대표를 비롯해 스타트업계에서 ‘정부가 조롱한다’고 반발하자 국토부는 “제도의 취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국회는 타다 금지법을 통과시키며 택시업계의 표만 의식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20대 국회는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받은 바 있다.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지난해 12월 조사한 20대 국회의원 평가에서 의정활동에 대해 ‘잘못했다’고 답한 응답자가 77.8%에 달했다. ‘잘했다’는 평가는 12.7%에 불과했다. 이런 국회의원들도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안은 81건이나 발의했다. 이 가운데 차량공유와 관련해 발의된 9건 모두 규제법안이었다. ━ 혁신 | 소비자는 기술보다 ‘친절’을 평가했다 타다는 정말 없어져야 할 서비스였을까. 타다를 두고 벌어진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혁신이냐, 아니냐’였다. 법이나 규정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시민들은 ‘혁신’으로 본다는 의견이 많았다. 지난해 11월 CBS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500명을 조사한 결과 타다를 ‘공유경제 개념에 기반한 혁신적인 신사업으로 육성할 가치가 있는 서비스’라고 응답한 비율이 49.1%였다. ‘정당한 자격 없이 택시업계에 뛰어들어 공정 경쟁을 해치는 불법적 서비스’라고 답한 비율은 25.7%였다. 모름과 무응답은 25.2% 수준이었다. 혁신으로 보는 긍정적 대답이 부정적 평가보다 2배 많았던 셈이다.타다가 운영하는 사업 방식이 특별히 뛰어나다거나 기술력이 인정 받은 것은 아니다. 모바일 앱으로 택시를 호출하고, 정해진 목적지까지 타고 가는 모빌리티 수단은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서비스 중 하나가 우버다. 카카오택시나 콜택시도 이런 방식의 서비스를 한다. 표면적으로 타다가 달랐던 점은 11인승 승합차를 이용한다는 것뿐이었다. 검찰이 타다 서비스를 ‘유사 콜택시’로 본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타다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은 친절한 서비스에 있었다. 일부 택시기사들의 불친절한 서비스와 난폭운전, 승차거부에 질린 시민들은 타다 기사들의 친절한 서비스를 혁신적이라고 판단했다.지난 1월 발표된 오픈서베이 모빌리티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이용자들이 타다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은 것은 ‘운전기사가 친절하다’(44.7%)는 것이었다. ‘차량 실내가 깨끗하고 잘 관리됐다’(38.7%)는 응답과 ‘불필요한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29.1%)는 점을 장점이라고 답한 사람도 많았다. 타다 기사들은 손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안전운전을 교육받았다. 이용자들은 이런 서비스에 열광한 것이다. 택시보다 20~30% 비싼 요금에도 타다 이용자는 1년 만에 170만명을 넘어섰다. 법원도 이재웅 쏘카 대표와 박재욱 VCNC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택시보다 비싼 요금을 지출하면서도 타다를 호출하는 이용자가 증가한 것은 시장의 선택”이라고 한 바 있다.이에 대해 강경우 한양대 교수(교통물류학)는 “기술적인 측면을 넘어 문화나 서비스의 개혁도 혁신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타다로 인해 시민들이 택시 서비스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게 됐다”며 “택시 이외에도 얼마든지 새로운 사업 모델이 나올 수 있다는 충격을 줬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 타다 | 하루아침에 9000명 실직, 무책임 논란 정작 이런 가치에 무관심했던 건 이재웅 전 쏘카 대표와 박재욱 VCNC 대표였다. 개정안이 법사위를 통과한 3월 4일, 타다 운영사인 VCNC는 베이직 서비스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재욱 VCNC 대표는 입장문을 통해 “타다는 입법기관의 판단에 따라 조만간 베이직 서비스를 중단한다”며 “서비스를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타다 드라이버 앱을 통해 “타다 베이직 서비스는 한 달 후인 2020년 4월 10일까지 운영하고 이후 무기한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공지했다. 이틀 뒤에는 이재웅 쏘카 대표가 쏘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날 이사회는 쏘카에서 타다를 분할해 독립기업으로 출범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쏘카와 타다에는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볼 수 있는 이런 굵직한 일이 열흘 남짓한 사이에 벌어졌다. 사전에 논의가 되지 않았다면 시행되기 어려운 일이다. 재계 관계자는 “개정안 통과 시나리오를 예상해 쏘카와 VCNC에서 여러가지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타다 기사들은 철저히 소외됐다. 약 9000명에 달하는 타다 기사들은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이번 결정은 지난해 10월 타다가 운행차량을 1만대로 확대하고 기사를 5만명까지 늘리겠다고 밝힌 계획을 5개월 만에 뒤집은 것이었다. 결국 이재웅 대표에게는 이용자들이 원했던 ‘친절한 서비스’를 이어 갈 혁신이 아니라, 택시 면허를 사들이지 않고 사업할 수 있는 조건이 ‘혁신’이었던 셈이다.타다 기사들은 지난 4월 9일 이재웅 전 쏘카 대표와 박재욱 VCNC 대표를 근로기준법과 파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타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프리랜서가 아닌 근로자로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지만 주휴수당,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 등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 타다가 파견법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타다 드라이버는 ‘여객 자동차 운송사업의 운전 업무’를 하는 것으로 파견법상 근로자 파견 금지 업무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타다 측이 용역업체 소속 드라이버의 노동력을 파견 방식으로 활용한 것은 불법 파견이라는 것이다.다음날 박재욱 대표는 드라이버 전용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타다 기사에게 “이유를 막론하고 드라이버 일자리를 지키지 못했다”며 “오랫동안 같이 일하고 싶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익명을 요구한 타다 드라이버는 “이재웅 대표와 박재욱 대표가 우리를 혁신의 동반자나 동료로 본 게 아니라 사업을 확장하는 도구로 본 것”이라고 말했다. ━ 택시 | 실리 챙겼지만 결국 소비자만 피해 택시는 표면적으로 이번 싸움에서 승자다. 택시의 경쟁 상대로 꼽혔던 타다가 베이직 서비스를 접었고 법인택시 기사들은 사납금 부담을 덜게 됐다. 2021년부터 기사 월급제(기본급 170만원)가 도입된다. 택시 감차도 만 75세 이상 초고령 개인택시 기사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타다 등 플랫폼 운수사업도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기여금’을 내야 한다. 사실상 진입장벽이 생긴 것이다. 이는 대부분 택시업계의 요구가 반영된 내용이다.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타다 서비스 종료로 택시업계의 횡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택시업계가 지적받았던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포스트 타다’에 대한 요구가 늘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카카오모빌리티 같은 대기업이 택시사업으로 덩치를 키우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택시면허제와 연계하는 정부 방침에 따르면서 지난해부터 택시업체를 인수하고 있다. 자회사 KM솔루션을 통해 전국 10개 지역에서 5200대 규모로 ‘카카오T 블루’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강경우 교수는 “이번 싸움에서 택시가 이긴 것으로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공고해 보였던 택시보호법에 균열이 생겼다”며 “정부도 이런 목소리를 계속 무시할 수 없는 만큼 향후 택시에 대한 개혁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결국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았다. 특히 시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봤다. 이동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사라졌다. 타다처럼 강제 배차서비스를 하는 카카오모빌리티 택시 ‘웨이고’를 이용하려면 기본료에 3000원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데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택시요금만 비싸졌다는 문제도 지적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안을 찾기도 어렵다. 관련법 개정 이후 다양한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유정훈 아주대 교수(교통시스템공학)는 “택시 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확인된 만큼 모빌리티 플랫폼 서비스와 관련한 규정을 개선하는 논의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며 “규정이 바뀌면 택시기사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에 금전적인 지원이나 플랫폼 서비스에 동참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지원책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병희 기자 yi.byeonghee@joongang.co.kr

2020.04.19 11:01

8분 소요
[택시 판정승 거둔 상생안 그 후] 모빌리티와 격전지 플랫폼에서 서비스로

IT 일반

택시시장 빠르게 ‘브랜드’화 전망… 택시요금 인상 가능성도 커져 국토교통부가 7월 17일 모빌리티 플랫폼 사업자와 택시업계 간 상생 발전을 위한 ‘택시제도 개편 방안’(이하 상생안)을 내놨다. 상생안은 택시월급제 도입과 출근시간 카풀 허용 등 3월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도출된 합의 내용을 정부 정책과 입법 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마련했다. 상생안은 플랫폼 기술을 자가용이나 렌터카가 아닌 택시와 결합하고 규제혁신형 플랫폼 택시를 출시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모빌리티 업체가 일정한 기여금을 내면 제도권 안에서 영업을 허가하기로 한 것이다. 우버·그랩 등 외국의 모빌리티 플랫폼 사업자는 자가용 차량 등 유휴 자원을 이용하지만 상생안대로라면 국내 업체는 차량을 직접 소유해야 한다. 타다처럼 렌터카를 이용하는 건 안 된다. 카카오택시나 티맵택시로 대표되는 플랫폼 중개사업은 신고제를 통해 제도권으로 편입시킬 계획이다.국토교통부는 상생안을 발표하면서 “플랫폼과 택시의 혁신적인 결합을 통해 국민에게 안전하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업계와 전문가들은 모빌리티 플랫폼이 택시 제도로 흡수됐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번 개편방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건 타다 같은 플랫폼 운송사업 부분이다. 타다 등 모빌리티 플랫폼 사업자는 수익의 일부를 사회적 기여금으로 납부하는 방식으로 운송사업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기여금은 정부와 지자체가 기존 택시 면허권(2월 기준 대당 약 8000만원)을 매입하는 식으로 감차하는 데 일부 쓰인다. 운행대수를 늘리려면 기여금을 더 내서 감차 비용을 추가로 대야한다. 정부와 지자체 등이 부담하던 택시 감차비용 일부를 모빌리티 플랫폼 사업자가 떠안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택시면허를 사도록 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볼멘소리가 업계에서 나온다. 상생안에 대한 궁금증을 Q&A로 풀어봤다. ━ 모빌리티로선 진입 장벽 높아져 정부가 택시 편을 들어줬다는 평가가 많다.“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제도권 안에서 플랫폼 운송사업을 하도록 틀을 만들어준 거라 볼 수 있지만, 택시사업자의 의견이 많이 상당부분 반영된 것은 사실이다. 상생안 발표 직전까지만 해도 사실 국토부는 렌터카를 허용할 예정이었다. 국회에 개편안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자료를 보면 ‘타다도 수용이 가능한 형태’라고 명확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상생안 발표 직전에 이 부분이 삭제된 것이다. 택시 업계의 눈치를 과도하게 본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대부분의 전문가도 “택시 업계의 의견을 수용했다”고 평가한다.”플랫폼 사업자가 내야 할 기여금이라는 건 뭔가.“기여금은 사실상 택시 면허 임대료다. 일정 요건을 갖춘 뒤 택시 면허 임대료를 사야(기여금을 내야) 영업을 할 수 있다. 영업 절차는 플랫폼 사업자가 안전·보험·개인정보 관리 등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면 정부가 허가를 내주고 운영가능대수를 정해준다. 플랫폼 사업자는 차종·외관·요금 등을 자유롭게 정해 운송사업을 할 수 있다. 운영대수 또는 운행횟수 등에 따라 별도 관리기구에 기여금을 납부해야 하는데, 기여금은 기존 택시 면허 매입과 택시운수종사자의 복지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 국토부는 일시납, 대당 정액, 매출액 연동 등 다양한 지급 방식을 검토 중이다.”대기업에 유리한 게 아닌가.“결과적으로는 그렇다. 기여금을 어떻게 내느냐는 아직 확정하지 않았지만 기여금 자체가 자금 상황이 넉넉하지 않은 스타트업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여유가 없는 스타트업은 기존 택시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사업 전략을 새로 짤 것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기여금도 문제지만, 차량을 직접 소유해야 하는 게 더 큰 부담이다. 예컨대 현재 타다는 약 1000대의 카니발 ‘렌터카’를 이용하고 있는데, 이번 상생안에 따라 영업을 계속하려면 기여금뿐 아니라 렌터한 차량을 모두 구입해야 한다. 1000대라면 차량 구입에만 300억원이 들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정부는 “돈다발을 싸들고 온다고 제약 없이 허가를 내주진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기업이 시장에 진입하는 걸 어느 정도 견제하겠다는 의도다.”택시 면허 총량 안에서만 플랫폼 택시를 허용된다는 건가.“그렇다. 영업이 허가되는 모빌리티 플랫폼 차량(사실상 택시)은 이용자 및 택시 감차 추이에 따라 관리된다. 정부는 택시 감차사업의 일환으로 연간 900대를 감차하고 있다. 기존의 감차사업은 계속 진행하고, 플랫폼 사업자에게 기여금을 받는 등 재원을 마련하면 면허권을 따로 매입할 예정이다. 사실상 택시 면허 총량 안에서만 플랫폼 택시를 운영하게 되는 셈이다. 국토부도 “당분간 택시 면허 총량 안에서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물량이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오는데, 국토부는 스타트업이 앞으로 사업하는 데 필요한 물량은 충분하다고 설명한다. 매년 감차되는 면허 대수가 있고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면허가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기여금이 많이 모인다면 그만큼 많은 물량을 매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새로 공급하는 면허 수에 대한 설명일 뿐 실제로는 택시 면허 총량 안에서만 플랫폼 택시가 허용된다.” ━ 상생안으로 운행 택시 줄어들 수도 플랫폼 택시가 운행을 못하면 사실상 택시 수가 줄게 된다. 택시 잡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지금은 택시 면허 총량 외에서 플랫폼 업체들이 사업을 벌여 왔지만, 앞으로는 총량제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수요자가 잡아 탈 수 있는 택시 자체가 줄게 된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국토부는 택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특정 시간대, 특정 시기에는 지자체별로 택시 부제를 자율화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택시 부제가 자율화하면 출퇴근 시간과 금요일 밤 등 택시 수요가 많은 시간대에 더 많은 택시가 영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택시 잡기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전망이다.”일반 수요자가 얻는 다른 실익은 없나.“전문가들은 택시 시장이 결국 ‘브랜드 택시’ 경쟁으로 재편될 것으로 보고 있다. 택시 업계 내부나, 합법적으로 시장에 들어오게 될 모빌리티 업계가 각각 브랜드 택시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출시된 타다 베이직의 ‘강제배차’ ‘친절 매뉴얼’ 등이 이미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다. 현재 시장엔 택시운송가맹사업자가 내놓은 ‘웨이고 블루’와 ‘마카롱택시’가 운행 중이다. 빠르게 브랜드화로 가게 된다면 서비스 품질이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또 하나 택시기사의 자격이 강화돼 안전운행이나 성범죄 등을 다소 나마 예방할 수 있을 전망이다. 상생안에는 플랫폼 택시도 택시기사 자격증 소지자만 운전할 수 있도록 했다. 택시기사 자격증은 어렵지 않게 딸 수 있지만, 핵심은 범죄경력 조회다. 국토부는 성범죄, 절도, 음주운전 등 280개 특정범죄 경력 조회를 주기적으로 할 예정이다. 자격취득 제한 범죄에 불법 촬영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기존보다 요건이 강화되는 셈이다.” ━ 다양한 요금제 출시될 듯 택시 요금은 오르나.“일단 길에서 택시를 잡아타는 배회영업은 기존 운임체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차량 유형별, 지역별 기준요금 범위를 설정하고 범위 내에서는 신고제, 그 이상은 인가제로 운영할 계획이다. 여성안심, 자녀통학, 실버케어 등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면, 그만큼 돈을 더 받을 수 있다. 업체들이 비싼 요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 자연히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 요금제와 요금 지불방법은 다양해질 전망이다. 국토부는 시간제 대여, 구독형, 월정액제를 비롯해 이용에 따른 마일리지 적립, 할인쿠폰, 통신사 결제 등 요금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논란의 중심에 있던 타다는 어떻게 되나.“상생안이 시행되면 영업을 할 수 없다. 영업을 하려면 일단 차량을 사들여야 한다. 국토부가 이번에 렌터카 사용은 허용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현재 운영 중인 1000여 대를 모두 구입했다고 해도 이 차량을 다 운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여금을 낸 만큼만 운행할 수 있다. 차량을 모두 구입하고 기여금도 준비해 뒀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정부로부터 운영대수를 따와야 하는데, 현재 타타 이외의 모빌리티 플랫폼 업체가 적지 않기 때문에 당장 1000대를 모두 운행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상생안은 언제부터 시행되나.“국토부는 7월 17일 발표한 대책들과 관련해 실무협의체를 통해 세부안을 가다듬은 뒤 법률 개정안을 오는 9월 또는 연말에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 시행은 연말이나 내년 상반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2019.07.20 07:21

6분 소요
[카카오 카풀 서비스 논란 2라운드] ‘월급 250만원 이상 보장’ 택시 업계에 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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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 분신 사망으로 상황 악화… 중재안 제시에도 정식 서비스 출시 연기 카카오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승차공유(카풀) 서비스 정식 출시를 앞두고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택시 업계 반발이 예상보다도 거세다. 지난 12월 11일 택시 기사 최모(57)씨가 카카오 카풀 서비스에 반대하면서 국회 앞에서 분신을 시도하다 숨졌다. 최씨는 “카카오 카풀은 불법이며, 서비스 도입을 당장 철회해야 한다”는 요지의 유서를 남겼다. 택시 업계는 12월 20일 10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항의 집회 개최를 예고했다. 김성환 전국민주택시노조연맹 사무처장은 “법인택시 기사들이 한 달 200만원 안팎의 수입으로 법정 최저임금 수준에 시달리면서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정부와 여당은 당혹해 하면서도 카풀 서비스 허용을 전제로 한 택시 지원 방안을 사실상 확정하고 택시 업계 설득에 나섰다. 현 ‘사납금제’를 폐지하고 ‘완전월급제’로 전환한다는 게 골자다. 법인택시 기사를 사납금 없이 월급을 주는 식으로 고용, 이들에게 월 250만원 이상의 소득을 보장해줄 수 있을 것으로 당정은 보고 있다. 현재 법인택시 기사들은 하루 14만원가량의 사납금을 내야 하는 구조에 묶여 있어 업계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돼왔다. 이 할당액을 채우기도 버겁다는 게 기사들의 항변이다. 당정은 또 개인택시 면허를 반납할 때 지방자치단체가 지급하는 감차 보상금을 시장 가격 수준인 1억원 이상으로 올리되, 10년 간 연금 형식으로 나눠 지급할 계획을 세웠다. ━ 당정, 사납금제에서 완전월급제로 전환 추진 앞서 카카오의 자회사 카카오모빌리티는 지난 2월 카풀 분야 스타트업 ‘럭시’를 인수하면서 카풀 서비스 정식 출시를 준비했다. 이어 “참여할 ‘크루(운전자)’를 모집한다”고 지난 10월 16일 발표했다. 카카오 카풀은 이름 그대로 기존에 있던 카풀 문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앱으로 목적지가 같거나 방향이 비슷한 이용자끼리 함께 이동할 수 있도록 운전자와 탑승자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카카오택시’ ‘카카오드라이버’ 등의 서비스를 시장에 안착시키며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았던 카카오 측은 새 서비스 또한 전국적인 승차난 완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출시 준비에 힘썼다.그러나 택시 업계가 이를 생존권 위협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이면서 논란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각종 단체에 속한 전국의 택시 종사자는 약 26만 명. 이들은 “지금껏 택시 업계와 카카오는 (카카오택시 등으로) 상생적인 관계였는데 카카오가 이를 무너뜨리고 골목상권에 비수를 꽂았다”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서울개인택시조합 관계자는 “카풀 서비스로 소비자가 몰릴 경우 개인택시 면허 가격이 대폭 하락하면서 국내 택시산업 자체가 몰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카카오모빌리티에서 승인한 카풀 운전자가 5만 명을 넘어서면서 서울시내 택시 등록 대수(7만대)에 이미 가까워진 만큼, 서비스 정식 출시로 택시산업 붕괴와 구조조정이 진행될까 우려하고 있다.그간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카카오 카풀은 뜨거운 감자였다. 사회적으로 정보통신기술(ICT) 기반의 다양한 교통 서비스 필요성이 커진 상황임에도 이에 대한 규제가 선진국 대비 국내에서 유독 엄격하며, 이 때문에 산업적으로는 물론 국민들 입장에서도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서다. 그렇다고 택시 업계라는 또 다른 민심의 이반을 조심스러워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통령 직속 4차 산업혁명특별위원회와 국토교통부는 중재안 준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관련 태스크포스 구성으로 카카오 측과 택시 업계 양쪽을 조율하는 데 나섰다. 이번 택시 지원 방안도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택시 업계는 현행법상 자가용 유상운송 금지 조항이 있으므로 카풀 서비스에 불법성이 있다고 강조하지만, 정부는 법적 근거가 있다고 보고 있다. 여객 및 자동차 운수사업법 81조 1항에 있는 ‘출퇴근의 경우 동승 허용’이 그것이다. 따라서 국토부는 하루 2회 제한적인 운행으로 카풀 서비스를 승인하는 식으로 산업과 소비자 측면에서 힘을 실어주되, 택시 업계 피해는 최소화하기 위한 절충안을 제시해 카카오도 이를 따랐다(서비스 운영정책에 명시). 다만 이런 여러 중재안에도 택시 업계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타협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양덕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상무는 “업(業)을 삼아 카풀을 한다는 것 자체에 우리 모두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신사업 추진에 강한 의지를 가진 카카오로서는 난감한 상황이다. 특히 당정이 제시한 중재안에 더해 ‘상생안’까지 자체적으로 마련하고 택시 업계를 설득하려 했지만, 택시기사의 분신 사망으로 업계 분노가 거세지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 때문에 카카오는 애초 12월 7일 일부 이용자를 대상으로 카카오 카풀 베타(시범)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12월 17일에는 정식 서비스를 선보일 계획이었지만, 이를 뒤로 미루게 됐다. 카카오모빌리티는 택시기사 최씨의 사망 직후 입장 자료를 내고 “정식 서비스 개시 일정 등 카풀 현안에 대해서 정부와 국회, 택시 업계와 적극 논의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 택시 서비스 개선 원하는 시민들 “도입 찬성” 이어 당초 “서비스가 출시되면 택시 업계 오해도 풀릴 것”이라던 이 회사 정주환 대표가 12월 13일 국회 방문에서 여당에 “정식 서비스 출시를 내년으로 연기하겠다”고 전했다. 카카오 카풀은 기본료가 2㎞당 3000원으로 책정됐으며, 총 요금은 거리와 시간을 기준으로 동시 정산돼 통상의 택시 요금 대비 20~30% 저렴할 것으로 예상된다(내년 택시 기본료는 3800원). 정식 서비스가 시작되면 많은 이용자가 몰릴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이자, 당정의 중재안과 완전월급제 같은 지원 방안 제시에도 택시업계가 좀처럼 입장을 선회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다.실제로 대중교통 이용이 잦은 시민들은 카카오 카풀 서비스 출시에 기대감을 나타내면서 택시 업계와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한 누리꾼은 포털 네이버에 게재된 관련 기사 하단에 “택시기사님 분신자살은 안타깝지만, 시대 흐름에 변해가고 살아남기 위해선 택시 업계도 발전을 해야 한다. 난폭 운전, 불친절, (탑승객) 골라 받기 등으로 소비자들은 지금까지 큰 불편을 겪었기에 카카오 카풀을 찬성할 수밖에 없다”는 댓글을 남겨 580명 이상이 찬성을 뜻하는 ‘좋아요’ 엄지 그림을 눌렀다. “다른 나라 시민들은 우버(글로벌 차량 공유 서비스)로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데 우리만 뒤처져 있다” “택시들이 고품질 서비스와 친절로 대응하면서 일반 운전자보다 더 안전하게 운전한다는 인식만 심어줘도 카카오 카풀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다” 등의 댓글도 적잖은 호응을 얻었다.택시 업계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세계적 대세인 ICT 기반의 공유경제 모델에서 더는 뒤처질 수 없으며, 택시들도 차제에 서비스 개선에 힘쓸 때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택시 업계는 일부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우려감을 표하고 있다. 법인택시를 운행하는 장모(64)씨는 “완전월급제라고 해서 바로 도입이 가능한 게 아니라 법 개정이 필요할 텐데, 국회에서 시간만 끌다가 외면하면 우리는 그 사이 고객을 다 빼앗기고 길거리로 나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택시 업계와 야당 일각에서는 또 카카오 카풀 운전자의 안전성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김경진 민주평화당 의원은 “카카오는 카풀 운전자 직업을 따지지 않고 모집 중이고, 이용자도 이를 따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첨예하게 존재하는 입장 차이에 해를 넘기게 된 카카오 카풀 서비스 논란 2라운드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2018.12.16 14:00

5분 소요
해외 석학 유발 하라리 교수에게 물었다

산업 일반

알고리즘이 우리네 일상 언어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알고리즘을 활용한 알파고의 충격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새 책 『호모 데우스』에서 데이터이즘(Dataism)이 기존의 종교와 이념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메일로 그를 만나 21세기 인간의 진로를 물었다. 알고리즘은 “어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원하는 출력을 유도하여 내는 규칙의 집합”이다. 지난해 이 알쏭달쏭한 말이 우리네 일상 언어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알고리즘을 활용한 알파고의 충격 때문이다. 『사피엔스』로 일약 세계적인 공공지식인으로 부상한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교수에 따르면 인간 또한 일종의 알고리즘이다. 최근 ‘인간 신(神)’(human god)이라는 뜻의 『호모 데우스』가 우리말로 출간됐다. 『사피엔스』가 인류 과거의 핵심을 설파했다면, 『호모 데우스』는 인류의 미래를 미리 가본다. 새 책에서 그는 데이터이즘(Dataism)이 기존의 종교와 이념을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를 대체한 휴머니즘을, 데이터주의·데이터 교(敎)가 대체한다는 것이다.데이터주의자들은 기술을 통한 인간 영생을 꿈꾼다. 신들을 숭배해온 인간이 ‘가까운’ 미래에 스스로 신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 인류는 전쟁·기아·전염병을 거의 극복했다. 앞으로 의학의 문제는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더 건강하게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게 하라리 교수의 전망이다. 하지만 하라리 교수가 그리는 미래가 마냥 밝은 것은 아니다. 지구를 지배하게 된 인간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취약성에 노출 됐기 때문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마크 저커버그, 빌 게이츠, 버락 오바마 등이 하라리 교수의 열렬한 후원자·애독자·추종자다. ━ 『호모 데우스』는 ‘사람이 신처럼 된다’는 뜻 한국 독자들을 위해 새 책 『호모 데우스』의 내용을 요약한다면.전작 『사피엔스』는 석기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인간의 역사를 요약했다. 『사피엔스』는 우리가 어떻게 의미 없는 유인원에서 행성 지구의 지배자로 스스로를 탈바꿈시켰는지 설명했다. 또한 ‘왜 대부분의 인류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했는가’, ‘자본주의는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갔는가’, ‘사람들은 오늘날 석기시대 때보다 더 행복한가’와 같은 핵심적인 질문에 답을 주려고 시도했다.새 책 『호모 데우스』는 21세기 사람들에게 벌어질 일들을 추측해봤다. 포커스는 기술·정치·사회·종교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다음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이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욕망과 생각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 정치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점점 더 많은 작업 분야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능가하고 인공지능(AI)이 택시기사·의사·교사·경찰관을 대체하면 고용시장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제적으로 쓸모없게 된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유전자 엔지니어링이나 수퍼휴먼의 탄생, 노화나 죽음의 극복에 대해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실리콘밸리는 결국 신기한 IT기기보다는 새로운 종교들을 생산하게 될 것인가’ 등이다.자유주의·보수주의·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세속 ‘이즘(ism)’은 아마 틀림없이 ‘호모 데우스의 시대’의 도래에 반응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다. 이들 이념의 노력은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이즘이 필요한가.기술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가 20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여러 정치 체제와 이데올로기는 연관성을 상실하게 될 수 있다. 기술 혁명이 정치 과정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은 세상사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했다. 인터넷의 부상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우리가 미리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사이버 공간은 이제 우리의 일상생활·경제·안보를 위해 결정적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기본적인 모습이나 특질에 대한 지극히 중요한 선택을 결정한 것은 통상적인 정치 과정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관한 중차대한 여러 선택은 주권·일자리·프라이버시·안보와 같은 전통적인 정치 사안들과 직결됐다. 하지만 여러분이 사이버 공간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대해 투표한 적이 있는가. 공중의 이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결정을 웹의 설계자들이 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인터넷은 국가의 주권을 약화시키고, 국경을 무시하고, 고용시장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프라이버시를 폐기시키며, 어쩌면 글로벌 안보에 대한 최대의 위협을 제기하는 자유로운 무법지대가 됐다.우리는 앞으로 기술이 정치에 앞서 달려가는 인터넷 같은 혁명을 여러 번 접하게 될 것이다. AI와 바이오기술은 조만간 우리 사회와 경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재편성할 것이다. 많은 일자리가 자동화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용시장에서 밀려나 ‘쓸모없는 계급(useless class)’으로 전락할 것이다. 새로운 직업이 생길 수도 있지만, 2050년의 고용시장이 어떤 모습일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오늘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의 대부분은 아이들이 40세가 될 무렵 전혀 쓸모 없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다가올 혁명에 대한 정치적인 토론이 거의 없다. 전통적인 민주주의 정치는 여러 사안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미래를 위한 의미 있는 비젼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평범한 유권자들은 민주주의 메커니즘이 그들에게 더 이상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주변 세상이 바뀌고 있지만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그리고 왜 변화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권력을 빼앗겼지만 그들은 권력이 어디로 갔는지 확신할 수 없다.영국 유권자들은 권력이 유럽연합(EU)으로 떠났다고 상상했다. 그래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찬성했다. 미국 유권자들은 기득권층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고 상상했다. 그래서 반기득권층으로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후보들을 지지했다. 슬픈 진실은 권력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국이 EU를 탈퇴하거나 트럼프가 백악관을 차지한다고 해서 권력이 보통 유권자들에게 되돌아갈 일은 없다.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20세기 스타일의 독재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 정권들 또한 기술발전과 정보의 속도와 양에 압도당하고 있다. 20세기 독재자들은 미래를 위한 거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은 구세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 자리에 신세계를 건설하려고 했다. 우리가 레닌·히틀러·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건, 우리는 그들이 비전이 없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오늘날 독재자들은 민주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미래 비전이 없다. 독재정권이나 민주정부나 퇴행적인 비전을 제시할 뿐이다. 트럼프는 1980년대나 1950년대처럼 미국이 다시 위대하게 되기를 바란다. 푸틴은 19세기 제정 러시아를 다시 건설하려고 한다. 이슬람국가(IS)는 7세기 칼리프 국가를 복원하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어떤 이들은 성경 시대의 유대 왕국을 재건하려고 한다.정치는 행정에 불과한 것이 됐다. 정부는 나라를 운영하지만 더 이상 나라를 이끌지 않는다. 정부는 선생님들이 제때에 월급을 받게 하고 하수구가 넘치지 않게 한다. 하지만 나라가 30년 후에 어떻게 될지 아이디어가 없다. 우리는 새로운 이념적 비전이 필요하다. ━ 실리콘밸리가 ‘테크노종교’로 기성 종교 대체해 사람이 신처럼 된다는 ‘호모 데우스’ 개념은 과격한 종교 분파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는 온건한 분파들까지 과격하게 만들지 않을까.근본주의적이건 온건주의적이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교는 연관성(relevance)을 상실할 것이다. 종교는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목표를 위해 인간이 발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어떤 특정한 기술적·경제적 맥락에서 매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기술과 경제가 변화하면 종교 또한 바뀌고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세상과 무관한 것이 된다.그리스도교는 농업사회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산업사회가 생성시킨 새로운 문제들에 별다른 솔루션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새로운 이념에 밀려났다. 이제 AI와 생명공학의 부상으로 산업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한물갔다. 21세기의 전례 없는 문제들에 대해 답을 주지 못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21세기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종교나 이념을 창출할 것이다.종교적 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중동이 아니라 실리콘밸리다. 구글·페이스북·애플·마이크로소프트의 엔지니어들은 IT기기나 알고리즘을 훨씬 뛰어넘는 것을 창조하고 있다. 그들은 차세대 물결이 될 새로운 보편적 종교를 창조하고 있다. ‘테크노종교(technoreligions)’다. 테크노종교는 기성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정의·풍요·영생을 약속한다. 게다가 테크노종교는 기술의 도움으로 약속을 지상에서 실현하려고 한다. 약속이 사후에나 실현되는 것도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호모 데우스』는 결정론의 함정으로부터 자유로운가.『호모 데우스』는 미래를 예측하려는 게 아니다. 미래 예측은 불가능하다. 30년이나 50년 내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대신 『호모 데우스』는 여러가지 다른 시나리오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일부 시나리오가 두렵다면 독자들은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뭔가 할 수 있다.기술은 결정론과 항상 무관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동일한 기술적 돌파구로 매우 다른 사회나 상황을 창조할 수 있다. 예컨대 20세기 사람들은 기차·전기·라디오·전화와 같은 산업혁명의 기술을 사용해 공산주의 사회, 파시스트 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한국과 북한을 보라. 한국과 북한은 동일한 기술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기술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다.‘AI와 생명공학을 인류가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사용할 것인가’가 인류가 오늘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인류뿐만 아니라 아마도 생명 자체의 미래가 걸려있다. 글로벌 경제 위기나 중동 전쟁이나, 유럽의 난민 위기보다 훨씬 중요하다.예를 들어보자. 생명공학은 가축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생명공학으로 더 빨리 자라고 고기를 더 많이 생산하는 소·돼지·닭을 설계할 수 있다. 가축이 겪을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생명공학으로 ‘청정 고기(clean meat)’를 만들 수도 있다. 동물 세포를 배양해 고기를 생산하면 가축을 기르고 도살할 필요가 없다. 사이언스 픽션(SF)이 아니다. 최초의 실험실 배양 햄버거가 2013년에 생산됐다. 생산비가 33만 달러였다. 지금은 11달러다. 수년 내로 일반 햄버거보다 낮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비용·환경·윤리 측면에서 훨씬 낫다.우리는 생명공학·AI·나노기술을 활용해 낙원을 만들 수도 있고 지옥을 만들 수도 있다. 인류 자체가 멸망할 수도 있다. 현명한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구글에 의존할 수도 알고리즘이 중심이 되는 사회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예시한다면.매년 수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매우 중요하고 매우 어려운 결정이다. 부모·친구·선생님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는데 그들은 각기 관심이나 의견이 다르다. 여러분 또한 바라는 게 따로 있다. 현명한 결정이 특히 힘든 이유는 사실 여러분이 어떤 직업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는 점이다.많은 학생들이 법률가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법대에 진학한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 중 일부는 과대평가하고 또 다른 능력은 과소평가한다. 한편 어떤 학생들은 어릴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예컨대 무용가가 되려고 한다. 무용가가 되는 데 필요한 재능이나 자제력이 없는 데도 말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끔찍한 실수를 한다. 이를 막기 위해 수십년 내로 구글에 의존해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알고리즘에는 큰 위험성도 있다. 독재 정부들은 알고리즘을 통해 나치 독일보다 더한 통제를 시민에게 강요할 수 있다. 알고리즘 독재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사람들은 새로운 유형의 압제와 차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이미 점점 더 많은 은행·회사·기관이 알고리즘을 사용해 우리들과 관련된 데이터를 분석하고 결정을 내린다. 은행에 대출을 신청하면 사람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심사할 가능성이 크다. 알고리즘은 당신에 대한 데이터와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통계를 바탕으로 당신을 믿을 수 있는지 결정한다. 종종 알고리즘이 인간 은행원보다 판단력이 더 뛰어나다. 문제는 특정의 사람들을 부당한 이유로 차별해도 그 이유를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은행이 대출을 거절하면 당신은 “왜요?”라고 물을 것이다. 은행의 대답은 “알고리즘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이다. “왜 알고리즘이 안된다고 했나요”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모릅니다. 누구도 이 알고리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첨단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는 알고리즘을 신뢰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대출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과거에 사람들은 여성·게이·흑인 같은 집단 전체를 차별했다. 그래서 여성·게이·흑인들은 조직을 결성해 그들에 대한 집단적 차별에 항의할 수 있었다. 알고리즘이 당신을 차별한다면 당신은 이유를 알 수 없다. 어쩌면 알고리즘은 당신의 DNA나 과거의 특정 부분을 싫어할 수 있다. 당신은 이유를 알 수 없고 이유를 알아도 조직화된 항의를 할 수 없다. 21세기에는 어떤 개인에 대한 차별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 인류는 글로벌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홉스·로크·루소 같은 사상가들은 사회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계약론’을 제시했다. ‘호모 데우스 사회’의 도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요구하는가.21세기 사회계약은 홉스·로크·루소가 말한 사회계약과 다를 것이다. 그들이 말한 사회계약은 특정 국가에 한정된 것이었다. 21세기 사회계약은 글로벌 사회계약이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 직면한 모든 주요 문제들은 그 본질이 전세계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효과적인 글로벌 협력이 필요하다.명백한 사례는 인류 문명의 번영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변화다. AI와 생명공학과 같은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특정 국가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과학기술은 국가 차원이 아니라 글로벌 프로젝트다. 단 한 나라라도 고위험 고수익 정책을 채택하면 다른 나라들 또한 뒤쳐지지 않기 위해 같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우리는 또한 AI가 야기시킬 경제 충격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글로벌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자동화는 엄청난 부를 실리콘밸리와 같은 첨단기술 허브에 안겨줄 것이지만, 온두라스나 방글라데시 같은 개발도상국은 최악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캘리포니아에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일자리들이 생겨나겠지만 온두라스·방글라데시의 의류산업 노동자나 트럭 운전사의 일자리는 줄어든다. 미국 정부는 실직한 방글라데시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실리콘밸리 기업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할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 속에 살고 있지만 정치는 아직도 지극히 ‘내셔널(national)’하다. AI가 야기시킬 급변 사태를 글로벌 차원에서 해결할 방안을 찾아내지 못하면 나라 전체가 붕괴하는 사례들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질서와 폭력과 이민의 물결이 세계 전체를 불안정한 상황으로 몰고 갈 것이다.- 김환영 중앙일보 심의실장 whanyung@joongang.co.kr

2017.06.2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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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한국인의 삶을 바꾼 히트상품 | 카카오택시] 택시업 지형 흔든 ‘모바일 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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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늘 불만의 대상이다. 늦은 밤 택시를 잡으려면 차도까지 나가 무작정 손을 흔들어야 한다. 간신히 택시를 세워 빠끔히 열린 창문에 목적지를 말하면 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일쑤다. 전화로 택시를 부를 수는 있지만 업체마다 배차의 차이가 많다. 어떤 택시기사가 어디서부터 언제쯤 와줄지도 알 수 없다. 힘든 건 택시기사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어떤 승객을 태울지 알 수 없어 소모적인 배회를 해야만 한다. 어쩌다 태운 승객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말도 못하고 속앓이 하는 일이 잦다. 콜 등록을 하면 수수료를 내야 해 부담이다. 취객을 태우면 “OO동 가주세요”라는 말만 던지고 잠이 든 채 깨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 승객·기사 호응 업고 택시앱 전성시대 이런 택시 업계에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진원지는 카카오의 택시 호출 애플리케이션(앱) ‘카카오택시’다. 카카오택시는 택시 이용 방식을 바꾸고 있다. 승객은 카카오택시를 이용할 때 구구절절 목적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택시기사가 이미 목적지를 알고 콜을 받았으니 ‘가네, 안 가네’ 하던 실랑이도 사라졌다. 택시 잡는 절차도 간단하다. 카카오택시 앱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호출 버튼을 누르면 끝이다. 언제 올지 모를 택시를 길가에서 무작정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전화 콜택시 시절처럼 허탕 칠 일이 적고 수수료도 없어 기사들도 반기는 분위기다.지난 3월 말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카카오택시는 콜택시 중심의 택시 호출 서비스 시장을 단숨에 점령해가고 있다. 카카오 택시의 12월 1일 기준 누적 호출 건수는 4600만건이다. 출시 4개월 만에 1000만건, 6개월 만에 2000만건을 돌파하는 등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했다. 하루 호출 건수도 60만건으로 늘었다. 규모는 이미 전화 콜택시 시장을 넘어섰다. 현재 전화로 부르는 콜택시는 약 6만3000대다. 이에 비해 카카오택시에 가입한 택시 기사는 18만명으로, 전체의 64%에 달한다. 카카오택시를 부르면 주변에 있는 택시 10대 중 6대 이상이 사용자의 호출을 확인한다는 얘기다.카카오택시의 성공 기반은 카카오가 보유한 모바일 플랫폼의 지배력과 막대한 회원수다. 여기에 각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불편을 최소화한 서비스가 승객과 기사 양쪽으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특히 스마트폰 앱으로 승객과 기사를 간편하게 연결해 주고 카카오톡을 통한 안심메시지, 내비게이션과 연동된 목적지 안내 등 촘촘한 서비스 설계가 카카오택시의 강력한 경쟁력으로 평가 받는다. 또 기사와 승객에게 별도의 비용을 받지 않는 정책도 카카오택시가 업계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었던 배경이다.카카오택시의 성공은 택시앱 전성시대를 열었다. 최근엔 T맵택시·티머니택시·이지택시·리모택시에 각 지역마다 별도의 앱을 만드는 등 경쟁적으로 택시앱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빠른 속도로 카카오택시를 추격하는 T맵택시는 기존 콜택시 업체들과의 업무 제휴를 통해 폭넓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앱 실행에 어려움을 겪는 택시기사들도 기존의 방식으로 T맵택시와 업무 연계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밖에 통신사들 역시 자사 서비스 이용자 대상 특별 프로모션을 벌이거나 택시앱을 선 탑재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금요일 밤처럼 택시를 잡기 힘든 시간에는 택시앱 역시 연결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기사들이 장거리 고객을 잡기위해 가까운 거리에서 요청이 오면 응답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점이다. 수수료를 받지 않아 수익을 내기도 어렵다. 갑자기 수수료 정책을 쓰기에는 택시기사나 승객의 적지 않은 반발이 예상된다. 실제로 지난 5월 택시기사들에게 임의로 콜비를 받으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카카오택시가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골목상권 침해 논란이다. 전국에는 모두 585개의 택시 콜센터가 있다. 택시 기사들은 콜 업체에 매달 통신비 5500원을 내고, 콜 한 건 당 35~50% 정도를 수수료로 낸다. 반면, 카카오택시는 이용료와 수수료가 없다. 기사와 승객에게는 유리하지만 콜 업체 입장에서는 밥그릇을 뺏기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카카오택시는 올해 국정감사에서 중소 콜택시 업체들의 수익성 악화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당시 수십억원대 예산이 들어가는 정부의 콜택시 사업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천정배 의원실 보도자료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2013년 6월부터 2016년 8월까지 3단계에 걸쳐 전국 택시 통합콜센터 사업을 시행하기로 했다. 예산 80억원 중 현재 60억원이 집행됐다. 하지만 ‘전국 택시콜 서비스 1333’과 관련 앱 이용자 수는 13개월 간 31만건에 그친 상황이다. 카카오택시의 하루 이용 건에도 못 미친다. ━ 프리미엄 버전 ‘카카오택시블랙’ 출시 카카오는 최근 대안으로 카카오택시의 프리미엄 버전인 ‘카카오택시블랙’을 내놨다. 메르세데스-벤츠 등 고급 외제 차량과 특별 교육을 받은 전문 운전사를 앞세운 고급 리무진 서비스다. 요금 미터기나 결제기기, 차량 외부 택시 표시 설비 없이 호출과 예약제로만 운영한다. 결제는 카카오 페이로만 가능하다. 기본료는 약 8000원. 요금은 일반 택시의 2.5배, 모범 택시 요금의 1.5배 수준이다. 운전기사의 서비스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완전 월급제를 도입했다.카카오 측은 카카오택시블랙이 모범택시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용 출퇴근 서비스 외에 비즈니스 의전, 호텔과 공항의 픽업 서비스, 노인과 환자 등 교통 약자의 택시 이용, 학원과 어린이집 픽업 서비스, 각종 이벤트 등에서 이용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차별화된 프리미엄 서비스로 논란을 피하고 수익화를 꾀하겠다는 전략이다. 카카오 관계자는 “고급 택시 관련 개정안이 모든 지자체에 적용되는 내년부터 운행 지역, 차종, 대수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함승민 기자 ham.seugnmin@joins.com

2015.12.06 18:41

4분 소요
쿠바의 빛과 그림자

산업 일반

미국 마이애미에서 쿠바 아바나로 가는 비행기 여행은 결코 깔끔하지 않다. 인내심, 잔꾀, 유머, 그리고 새치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모함이 필요하다. 다행히도 나는 알베르토 마냥(53)과 동행했다. 그가 ‘힘깨나 쓰는 사람’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공항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마냥은 쿠바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그곳을 떠났다. 이후 스페인에 잠시 체류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뉴욕에 살았다. 그와 아내 다라 메츠는 맨해튼 남서부 첼시에서 마냥메츠 화랑을 운영한다. 주로 해외 화가, 특히 쿠바 화가가 전문이다.비행기 이륙 90분 전 우리는 2시간 전부터 줄을 늘어선 승객들을 느긋하게 지나쳐 탑승권 발행 카운터로 직행했다. 거기서 마냥은 직급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 한 여성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 여성은 내 여권을 받아 들고 사라졌다. 마냥은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기다리는 동안 마냥은 나를 아바나 항공의 마크 엘리아스 사장을 소개했다. 엘리아스 사장은 마이애미-쿠바 전세기의 경우 수년 전부터 긴 줄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경우 탑승권을 받으려면 체크인 포인트를 서너 차례나 거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한 시간 반 안에 탑승을 완료할 수 있다.”다행히 내 여권을 가져간 여성은 약 20분 뒤 다시 나타나 내게 직사각형 폴더를 건넸다. 탑승권, 돌아오는 비행기표, 여권, 쿠바 안내 책자가 들어 있었다. 맨 뒤에 휴지처럼 보이는 빛 바랜 청색 종이가 끼어 있었다. “그걸 잃어버리지 마세요.” 그 여성이 말했다.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 여성과 마냥이 거의 한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니까요.”이륙 후 1시간도 채 안 돼 아바나에 도착했다. 활주로에 비행기 바퀴가 닿자마자 조종사가 기내 방송을 했다. “아바나에 도착해서 기쁘다면 박수를 치세요!” 객실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호텔에 짐을 풀자 저녁이었다. 우리는 간단히 식사를 하고 야윈 택시기사 라파엘(50)을 고용했다. 원래 의사였지만 4년 만에 그만두고 택시를 몬다고 했다. 그는 우리를 아바나 구시가의 산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광장 입구에 내려줬다. 서너 발짝을 걷자 택시기사 대여섯 명이 우리를 에워쌌다. 택시 필요해요? 미국인이세요? 어디 가세요? 나는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고는 밝은 조명 아래 사람들로 가득한 넓은 조약돌 광장으로 향했다.유적지와 건축을 구경하려고 관광객이 밤낮으로 찾는 곳이다. 길 건너 아바나의 해변도로 말레콘이 보였다. 그곳 역시 밤낮으로 젊은이들이 바글거린다. 한 달 월급으로 팔라다르(paladar, 자영업 식당으로 정부가 보조하고 영업과 임금을 결정하는 수많은 관영 식당과 구분된다)에서 한끼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인 나라 쿠바에서 말레콘은 주민에게 뭔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광장을 가로질러 한 건물의 아담한 로비에 들어섰다. 문 옆의 경비원을 지나 안쪽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마냥은 스페인어로 그 여성과 이야기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설득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여성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마냥, 그의 친구 몇 명과 함께 작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누군가 마냥에게 무슨 사건에 관해 물었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천장을 가리켰다. 누군가 엿들을지 모른다는 제스처였다. 우리 모두 입을 다물고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문이 열리자 2층짜리 고급 아파트의 옥상이 나타났다. 아바나 구시가가 내려다보였다. 마치 마이애미 일류호텔인 듯했다. 세련된 하얀 의자와 소파, 우아한 꽃꽂이, 모든 술과 음료가 완비된 바. 한쪽에선 인근 건물 벽면을 스크린 삼아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30분 뒤 손님들이 안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갔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자 넓고 호화로운 거실이 나타났다. 두꺼운 벨벳으로 만든 대형 해먹, 공들여 장식한 바닥 카펫. 돌출 촛대와 미술품으로 장식된 벽면 앞엔 거대한 화초가 서 있었다. 옆 방에는 당구 테이블이 놓여 있고 뷔페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복도 아래에는 자연 그대로인 듯한 목욕탕이 마련돼 있었다. 샤워기 옆의 선반에 놓인 뭉툭한 조각상은 영락없는 남근의 형태였다. 손님들은 모두 옷을 잘 차려 입었다. 나이 지긋한 여성은 가운, 젊은 모델은 몸에 딱 붙는 드레스, 남성은 각 세운 정장과 모자, 반짝이는 구두 차림. 이곳엔 나이도 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나이 든 손님들이 젊은 무리와 어울렸고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이 바로 쿠바의 지식인과 문화 엘리트였다.쿠쿠 디아만테스(유명한 쿠바계 미국인 가수 겸 배우)와 남편 안드레스 레빈(베네수엘라 태생으로 줄리아드 음대를 나온 미국인 음반 제작자이자 영화감독)을 만났다. 레빈은 지난해 11월 TEDxHavana(아바나에서 열린 기술, 오락, 디자인 강연회)를 처음 개최했다. 그는 디아만테스와 함께 퓨전 밴드 예르바 부에나를 만들어 2003년 데뷔 앨범으로 그래미상 후보작에 올랐다. 레빈은 유명한 쿠바 배우와 음악가들을 소개해줬다. 심지어 카스트로 가문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담배와 시가 연기가 가득했다.1960년대 초 시작된 미국의 금수 조치로 미국인의 쿠바 투자가 금지됐다. 그러나 미술품, 책, 음악은 금수 조치에서 면제돼 예술가들은 정부의 감시 아래서 약간의 돈을 벌고 해외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부동산 재벌도 헤지펀드 큰손도 없는 쿠바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1%’ 부유층을 형성했다.사실 그건 대다수 관광객이 보는 아바나가 아니다. 대다수 쿠바인이 아는 아바나도 아니다. 그런 사교모임에 관해 글을 쓰는 것조차 쿠바 정부가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 정신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쿠바에서 보낸 나머지 시간에 대다수 외국인이 마음 속에 그리는 아바나를 직접 볼 수 있었다. 테일핀(날개 모양의 자동차 꼬리 부분)이 녹슨 고색창연한 쉐보레 컨버터블, 건물 벽에 빛 바랜 붉은 색 글자로 ‘혁명은 무적’이라고 적은 선전 포스터, 허물어져 가는 저택과 부서질 듯한 자전거 택시, 피한객(겨울철 추위를 피해 쿠바에 온 노인 관광객)들이 가득한 시가 상점, 관광객을 졸졸 따라다니며 어디서 왔는지 묻고 뉴욕에서 왔다고 하면 “뉴욕 양키!”라고 외치는 아이들.그처럼 수 세대 동안 거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한 쿠바지만 확실히 달라진 면도 눈에 띄었다. 아바나 곳곳에 있는 건설공사 현장의 기중기들. 거의 매주 생겨나는 새로운 팔라다르 식당과 작은 피자 가게. 관광객으로 가득한 호텔. 내가 묵은 멜리아 코히바에선 뉴욕시 거리를 걸으며 듣는 것보다 더 많은 미국식 영어가 들렸다.쿠바가 50여 년 만에 처음 문호를 개방하면서 희망과 투지, 돈이 공중에 떠다니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가 될 수 있다. 부동산, 건설, 통신, 관광 등. 자전거·자동차 수리점부터 배관공사, 식당, 택시까지 소규모 비즈니스가 전부 성장할 태세다. 2012년 프리덤하우스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쿠바인이 인구의 5%에 불과한데도 (쿠바인 중 23%는 정부가 허가한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있다) 세계 최대의 온라인 유료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가 최근 쿠바 진출을 발표했다. 지난 2월 코넌 오브라이언은 1962년 이래 쿠바에서 심야 TV토크쇼를 찍은 첫 미국 연예인이 됐다. 그 다음은 어떤 대형 미국 브랜드가 진출할까? 홈데포? 베스트바이? 맥도널드? 로열 캐리비언 인터내셔널? 도널드 트럼프?잠들어 있던 쿠바에 갑자기 잠재력이 넘치는 듯하다. 과도 정부가 억누르곤 있지만 쿠바인은 근면하며 희망에 차 있다. 그 상황에서 과연 누가 수혜자가 되고 누가 뒤처질까? 쿠바의 미래는 새로운 자메이카일까? 체게바라 T셔츠와 카스트로식 군모 차림의 봄철 휴가객과 미혼 남녀가 가득한 곳 말이다. 그게 최상의 시나리오일까 최악의 시나리오일까? ━ 미술이 불러온 변화 마냥은 이렇게 말했다. “일곱 살 때 방과 후 어머니가 날 데리러 와서는 ‘24시간 안에 떠나야 해. 여행가방을 꾸려. 해외로 나갈 거야’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겁이 더럭 났다.”46년 전 마냥의 어머니(미술 교수)와 아버지(담배공장 회계사)는 자동차, 가구, 보석 등 아바나에서 소유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당시에도 마냥은 수집가였다. 야구 카드, 우표, 동전, 스티커를 모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미술을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쿠바 어머니는 아들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마냥은 결국 미술품 거래상이 됐다.마냥은 쿠바 화가들의 작품 전시로 유명하다. 인종, 종교, 아프리카계 쿠바인의 뿌리를 탐구하는 화가 로베르토 디아고, 쿠바 출신의 전시 작가로 구성된 현대미술 그룹 로스 카르핀테로스의 창립 회원인 알렉산드레 아레체아, 201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쿠바 대표 화가 글렌다 레온 등.1997년 마냥은 쿠바를 다시 찾았다. 1991년 소련 붕괴로 시작된 초유의 경제위기(쿠바인은 ‘특별한 시기’라고 부른다)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교통, 식량, 전기, 자동차, 교체 부품, 치약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호화롭던 주택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화가들에게 빠진 것은 그 어려운 시기에 그들이 아주 특별한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제대로 된 물감도 없었다. 금속, 천, 자루걸레 등 닥치는 대로 캔버스로 사용했다. 그들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다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세상에! 미국 수집가들이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반드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요즘 마냥은 쿠바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논란 많은 미술 행사를 주최한다. 2009년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아바나를 방문한 첼시’ 전시회가 대표적이다. 혁명 이래 쿠바에서 열린 미국 화가들의 첫 전시회였다. 제10회 아바나 비엔날레의 일환이었다. ‘비엔날레’라고 하지만 2000년부터 3년에 한 번씩 열린다. 마냥은 “그 행사가 쿠바-미국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미술이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지난 몇 십 년 동안 쿠바인과 쿠바계 미국인 몇 명이 드러내지 않고 문화대사로 활동했다. 미술에 초점을 맞춰 양국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중 한 명이 마냥이다. “아바나는 건재하다”고 그는 말했다. “화가들이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다. 그들은 쿠바에 남아서 계속 활동한다. 미술과 문화를 통해 일어난 변화가 다른 분야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아바나에서 이틀째 우리는 쿠바인 큐레이터 후아니토 델가도를 찾아갔다. 그의 아파트에서 말레콘이 내려다 보였다. 그는 “좋은 작품을 만들면 정치적인 문제가 숱하게 제기된다”고 말했다. “정치를 미술로 만들지 말고 미술을 정치화해야 한다. 그러면 대화가 이뤄진다.”2012년 델가도는 말레콘을 11회 아바나 비엔날레의 전시회장으로 활용했다. 아를레스 델 리오의 ‘날아가다’라는 작품은 방파제 끝자락에 쳐진 대형 직사각형 철책선에서 비행기 그림자 모양을 잘라낸 것이었다. 라첼 발데스 카메요는 강물을 마주보는 대형 거울을 설치하고는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다 1번’이라는 제목을 붙였다.“미술이 사회를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인다”고 델가도가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 문화계를 도와주면 좋겠다. 책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고 화가들이 작품을 알릴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해주기 바란다. 또 아바나의 극장이 관객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쿠바와 미국 사이의 거리는 약 145㎞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게릴라 부대를 이끈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타도한 1959년 이래 쿠바에선 사실상 시곗바늘이 멈춰섰다.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통치 아래 교육과 의료는 무료였지만 경제가 무너지고 빈곤이 확산됐으며, 쿠바인은 해외 여행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카스트로는 오랫동안 비판자들을 처벌하고 탄압했다. 쿠바 인권재단에 따르면 2013년 임의구금된 인권운동가가 6000명을 넘었다. 표현의 자유는 아예 없었고, 국가가 모든 공식 미디어를 소유했다. 정부는 블로거를 위협했고 언론인을 구금했다.1982년 이래 쿠바는 미국 정부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 2013년 미 국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쿠바는 스페인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대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미국이 수배한 탈주자들을 숨겨줬다.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면서 쿠바인은 미국과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쿠바 지위를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공화당은 그런 조치에 완강히 반대한다.2008년 쿠바 정권은 피델 카스트로에게서 동생 라울로 넘어갔다. 지난 몇 년 동안 라울은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다. 쿠바인이 해외 여행을 더 쉽게 더 오래 할 수 있도록 하고, 자동차와 주택 매매를 허용하고, 100여 가지 자영업을 합법화하고, 쿠바인의 국제호텔 숙박을 허용했다. 그동안 쿠바인의 고급 호텔 숙박이 불허된 것은 호텔에서 외국인용 화폐(CUC)만 받았고, 호텔이 정부가 마약과 매춘의 온상이 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라울의 개혁이 칭찬을 받긴 했지만 대다수 쿠바인의 경제적 현실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대다수는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 미진한 개혁과 지하경제 2000~2004년 미국 정부의 라틴아메리카 정보 관리를 지냈고 현재 아메리칸대학 라틴아메리카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인 풀턴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개혁이라고 하지만 열의가 없었고 걸핏하면 중단됐으며 국소적으로 이뤄졌을 뿐이다. 새로운 자본의 유입과 무역이 없으면 기회가 있다고 해도 그런 기회를 활용하는데 필요한 자원이 없다.”쿠바인의 월 평균 소득은 20달러(약 2만2000원)도 채 안 된다. 지난해 몇몇 의사의 경우 월급이 26달러에서 67달러로 올랐다고 알려졌다. 내가 들어가본 가전제품 상점에선 전자레인지 한 대가 72.60달러, 커피메이커가 30달러에 팔렸다. 내가 먹은 식사는 대부분 1인당 약 30달러였다.이제 미국에서 쿠바로 연간 8000달러를 송금할 수 있게 됐다(지난해 12월 오바마 대통령의 관계 정상화 발표 전에는 2000달러가 송금 상한선이었다). 그러면서 흑백 인종 사이의 격차가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쿠바의 백인이 해외 친척의 재정지원을 받을 가능성은 흑인의 2.5배다. 그만큼 백인이 사업을 시작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반면 시골에 사는 쿠바의 백인은 흑인처럼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암스트롱은 설명했다.쿠바 인구는 1100만 명이다. 그중 다수는 미국-쿠바 관계의 해빙으로 혜택을 볼 듯하다. 상인, 농민, 해외 거주 친척의 송금을 받아 자영업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했다. “쿠바의 비공식 경제는 그 규모가 거대하다. 사회의 많은 부문이 거기서 기업가 정신을 연마할 수 있다. 화가 등 일부는 수십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수완이 아주 좋다. 그러나 성격 때문이든 당과 기관의 엄격한 감시 때문이든 바른 길만 걸어온 사람은 암시장을 잘 모른다. 그런 사람은 출발이 약간 늦을 수 있다.”패자는 언제 어디서나 잘 패하는 사람들이라고 암스트롱은 말했다. 학력이 낮고 나이가 많으며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 향수를 일으키는 바다 내음 쿠바의 관영 여행사 산크리스토발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메일린 베르날(32)은 “변화는 언제나 어떤 사람에겐 좋고 어떤 사람에겐 나쁘다”고 말했다. “일자리를 갖고 그 소득에 따라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누가 기뻐하지 않겠나. 고생하지 않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택시기사 라파엘은 아바나 시내를 통과하면서 지나가는 자동차의 이름을 외쳤다. “저건 러시아제! 저 검은색 차는 쉐보레 1953년도 모델. 나도 과거 저런 차를 몇 대 몰았지요. 저기 녹색 차는 쉐보레 52년 모델이고 저건 머큐리 51년 모델이네요. 저건 네덜란드제 58년 모델이고… 저곳은 혁명 전엔 셸 주요소였죠.”우리는 교외에 있는 달동네 파라가로 향했다. 차로 약 30분 거리였다. 시간을 떼우려고 라페엘에게 왜 의사를 그만뒀느냐고 물었다. “벌이가 좋지 않아서요”라고 그가 대답했다. 라파엘은 의사로 월급 12~15달러를 받았다고 말했다(요즘 의사는 그 4배를 번다고 그는 강조했다). 하지만 택시를 몰면서 한 달에 약 200달러를 번다. “처음엔 의사 일이 그리웠지만 오랫동안 택시기사를 하다 보니…”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후안 카를로스가 지난해 7월에 치대를 졸업했어요.” 라파엘이 배다른 동생(24)을 두고 한 말이다. “후안은 날 위해 일주일에 이틀씩 일하고 하루 30달러를 벌었죠. 치과의사 월급보다 많아요. 후안은 미국에 가고 싶어 영어를 배우고 있어요. 그가 미국에 가면 돈을 좀 부쳐 주려고 해요. 여기선 미래가 없거든요.”우리는 조용한 거리에 차를 대고 나를 안내해주기로 한 아바나대학 심리학 교수인 산드라 소카 로자노(28)를 태웠다. 로자노는 역시 심리학자인 어머니, 은퇴한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 한 번도 쿠바를 떠난 적이 없다고 로자노는 말했다. “조국을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내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떠나고 싶지 않아요.”로자노는 대학에서 수업이 없으면 어린이와 청소년 암환자를 돕는 자원봉사활동을 한다. 하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일자리를 지키는 쿠바인처럼 월급은 쥐꼬리만하다(30달러). (암스트롱은 “모든 쿠바인은 암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아 돈을 번다. 월급 30달러가 유일한 소득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로자노는 차를 사고 친구들과 살사춤을 추러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두 가지 다 그에겐 사치다. 동료들이 해외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해진다. “해외에 간 친구가 많은데 그들은 4개월만 지나면 차를 사요. 집도 있죠.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여행을 가요. 우리 부모는 뼈 빠지게 일하느라 그런 여행은 꿈도 못 꿔요. 어머니는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를 구경할 수 없어요.”우리는 드라이브를 계속했다. 버려진 주유소, 사람들이 바글대는 버스 정류장, 배도 없는 옛 항만을 지나쳤다. 로자노에게 가족을 제외하고 쿠바의 어떤 측면 때문에 떠나지 않는지 물었다. “사람과 장소죠. 물론 거리는 형편없고 거물은 낡아빠졌어요. 하지만 바다 내음이 너무 좋아요. 난 언제나 바다 근처에 살았어요.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냄새죠. 이곳은 태양도 달라요. 또 도움을 주고 무엇이든 함께 나눌 사람을 언제든 찾을 수 있어요.” “저건 올즈모빌 1955년 모델!” 라파엘이 다시 자동차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루야노 동네를 통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관 계단에 앉아 있거나 보도에 서서 공동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리 위에는 ‘고마워요 피델!’이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갈수록 길이 험해졌다. 몇 차례 더 우회전 좌회전을 한 뒤 움푹 패인 곳이 많은 넓은 거리에 도착했다. 차는 다니지 않았고 군데군데 쓰레기가 가득했다.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고 개들이 보도를 어슬렁거렸다. 서로 겹쳐진 작은 집 주변에 알루미늄판 담이 쳐졌다. 달동네 파라가였다. 관광객도 이곳은 찾지 않는다. 수돗물도 가끔씩 공급된다. 한 친구가 아바나 빈민촌 삶의 단면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줬다.후스티나 코르데로 메사(90)가 현관에서 주름진 야윈 손을 내게 내밀며 볼에 입을 맞췄다. 날염된 흰색 원피스, 짙은 녹색 양말, 검은 샌들 차림이었다. 흰머리를 아무렇게나 말아 올렸고 솜털 같은 하얀 눈썹이 눈꺼풀 위에 걸려 있었다.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한 메사가 소파와 의자를 가리켰다. 로자노, 마냥, 내가 앉았다. 좁은 거실이었다. 밝은 갈색 벽과 타일 바닥은 금이 가고 얼룩이 져 있었다. 한쪽 구석의 작은 테이블 위엔 조그만 크리스마스 트리와 대형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다른 테이블엔 피델 카스트로의 액자가 있었다.메사는 쉰 목소리로 얼마 전 창문 넘어 들어온 도둑이 TV를 가져갔다고 말했다. 도둑을 잡았는지 묻자 메사는 그냥 씩 웃었다.메사의 집은 작고 어둡고 파리가 들끓었다. 거실 뒤에는 나무 식탁과 냉장고를 갖춘 작은 주방이 있었다. 더 작은 부엌엔 임시 조리대 위에 우그러진 양동이, 컵, 사발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조리용 철판 부근에 닭뼈를 담은 접시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조리기구 몇 개가 걸려 있었다. 천장은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낮았다. 부엌의 작은 문은 뒷골목으로 연결됐다. 메사는 그곳에서 빨래를 널고 설거지를 한다.“손자가 나와 함께 살려고 자기 집과 이 집을 합쳐 더 큰 집과 바꾸고 싶어하지만 잘 될지 모르겠다.” 60년 이상 이곳에서 산 메사가 말했다. 경찰이었던 남편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은 쿠바에 살고, 동생과 조카는 미국에 산다. “동생이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족 때문이었다.”이제 미국의 쿠바 금수 조치가 해제됐기 때문에 파라가의 생활이 더 나아지리라 생각하는지 메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바뀐 건 없다. 매일 더 나빠진다. 물가가 계속 오르기 때문이다. 난 귀도 눈도 어둡다. 난 진짜 아주 늙었다. 이미 볼 건 다 봤다.”뉴욕으로 돌아간 뒤 로자노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로자노는 메사의 삶을 보는 게 힘들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메사는 쿠바인의 전형이다. 어려운 조건에서 살면서도 쿠바를 떠나려 하지 않고, 조국을 사랑하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가진 것이 없고 늙어도 독립적이며 가족을 끔찍이 생각한다. 난 그게 쿠바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늘 다른 사람을 걱정하며 언제나 굴하지 않고 잘 모르는 사람도 도우려고 애쓴다.”아바나의 도심 베다도는 파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쿠바계 미국인 사업가 우고 칸시오(50)는 베다도에서 서서히 미디어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상업, 미디어, 통신, 부동산, 여행 사업을 하는 푸에고 엔터프라이즈의 설립자 겸 CEO다. 몇 년 전 그와 아내는 미국인 약 40명과 함께 마이애미에서 아바나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미국인 탑승객들이 쿠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쿠바는 군국주의 국가인가?” “거리에 기관총을 든 군인이 있을까?” “그들이 피델 카스트로를 헐뜯는 사람을 구타할까?”칸시오 CEO는 이렇게 돌이켰다. “아내는 ‘쿠바가 어떤 나라인지 그들에게 가서 말해주라’고 했다. 나도 화가 났다. 쿠바가 카스트로와 반체제 인사만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아름다운 나라다. 그들에게 다가가 쿠바에 관해 자세히 알려줬다.” 20분 뒤 그가 좌석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쿠바 안내책자를 만들어 아바나행 비행기 탑승객에게 나눠주자는 것이었다. “뭐라도 해보자”고 아내가 말했다고 칸시오 CEO가 돌이켰다.칸시오 CEO는 안내책자 대신 쿠바에 관한 최초의 이중언어 잡지 ‘온 쿠바(On Cuba)’를 창간해 미국과 쿠바에서 팔기 시작했다. 그 웹사이트 방문자는 한 달에 60만~120만 명이다. 그와 함께 지난해 6월엔 자매지 ‘쿠바의 미술(Art On Cuba)’도 창간했다.칸시오는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모니카 레티시아는 유명한 가수였고 아버지 미겔 칸시오는 1960년대 쿠바의 비틀스로 알려진 4인조 밴드 ‘로스 자피로스’를 공동 조직했다. 1980년 카스트로가 미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떠나라고 선언한 그 유명한 ‘마리엘 난민탈출 사건’으로 쿠바인 12만5000명이 작은 배 1700척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16세였던 칸시오는 어머니, 13세 여동생과 함께 쿠바를 떠났다. 그 얼마 전 그는 일류 고등학교에서 카스트로에 관한 농담을 하다가 퇴학당했다. 칸시오 CEO는 이렇게 돌이켰다. “어머니는 ‘이곳에선 네 미래가 없어. 우린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마이애미에 도착했지만 친척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그들은 오렌지볼 스타디움에 마련된 임시 수용소에서 3주를 지낸 뒤 사우스비치의 작은 단칸방으로 옮겼다. “3년 동안 어머니는 소파에서 주무셨고 나는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어머니는 수년 동안 쿠바를 떠난 걸 후회했다.”쿠바에서 칸시오의 아버지는 문화부 산하 기관에서 일했지만 가족을 떠나보냈다는 이유로 실직당했다. 그 후 거리 청소부로 일하다가 공사판에서 일했다. “나는 정장을 입은 유일한 공사장 일꾼”이라고 아버지가 편지에 썼다고 칸시오는 돌이켰다. 몇 년 뒤 아버지도 쿠바를 떠났다.지금 칸시오 CEO는 미국, 특히 마이애미에서 쿠바 음악과 미술을 전파하는 문화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는 콘서트 약 140건, 뮤직 투어 30건을 기획했다. 그의 이력서는 쿠바-미국 문화전쟁의 입문서처럼 보인다. 1999년 칸시오는 유명한 쿠바 밴드 로스반반의 마이애미 콘서트를 기획했다. “우익 쿠바인들이 밖에서 달걀과 깡통을 던지는 동안 그들의 아들 딸은 안에서 춤을 췄다”고 칸시오는 돌이켰다.칸시오는 영화 ‘자피로스, 푸른 광기’도 제작했다. 아버지가 만든 밴드 로스 자피로스의 부상을 소재로 한 영화로 쿠바계 미국인이 쿠바에서 찍은 사상 최초의 작품이었다. 그 영화는 1997년 아바나 영화제에 출품돼 호평을 받아 6개월 동안 아바나의 극장에서 상영됐다. 그 영화를 마이애미로 가져오자 수천 명이 극장 밖에서 상영 반대 시위를 벌였다. “어머니는 내가 더 자유롭고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나를 미국으로 데려왔다”고 칸시오 CEO는 말했다. “쿠바에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미국으로 데려다줬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민주국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진 일을 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막을 수 있나?”미국-쿠바 관계가 변하면서 칸시오 CEO는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쿠바 건축과 지역 정보에 초점을 맞춘 부동산 잡지가 곧 발간될 예정이다. 그 외 여행 잡지와 웹사이트, 송금 서비스 사업도 시작할 생각이다. 미국의 대형 통신회사 두 곳과 제휴해 쿠바인에게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보급할 계획도 있다.칸시오 CEO는 “쿠바계로서 미국의 쿠바 정책을 변화시키려고 오랫동안 투쟁해왔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말했듯이 미국의 쿠바 정책은 비인도적이며 효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가 하는 모든 사업으로 과연 누가 혜택을 볼 수 있을까? 나는 그에게 심리학 교수 로자노와 메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들의 미래가 어떨지 물었다.“물론 연줄이 좋은 사람이 가장 먼저 혜택을 볼 것이다. 아주 긴 여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기가 달라졌다. 우리 잡지를 만드는 직원들에게서 그런 점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처음 우리 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와 지금은 아주 다르다. 더 행복해졌다. 그들은 살 집도 다시 짓고 멕시코나 온두라스로 여행 가려고 돈 모을 생각도 한다.”토요일 아바나에 있는 잡지사 사무실을 찾았을 때 편집장 타히미 아르볼레야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르볼레야는 컴퓨터 몇 대가 둘러싼 책상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에선 G메일과 페이스북이 펼쳐져 있었다. 쿠바를 여행하는 동안 그런 웹사이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작동되는 컴퓨터도 거의 보지 못했다.아르볼레야는 이렇게 말했다. “쿠바인과 미국인에게 쿠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주는 것이 우리에겐 매우 중요하다. 쿠바인의 현실이 어떤지 정확한 정보를 줘야 한다. 미국에서 접하는 쿠바 정보는 양극화를 초래하지 않는가?”아바나에서 보낸 마지막 밤 우리는 저녁식사에 로자노를 초대했다. 처음엔 내키지 않은 듯했다. 친구들과 살사춤을 추러 가기로 돼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살사 클럽에 도착해서 만원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우리 식사에 합류하기로 했다. 택시기사 라파엘이 우리를 아바나 미라마르 구역의 강가에 내려줬다. 웅장한 흰색 건물로 들어가는 통로 끝에 기도가 서 있었다. 마냥이 그와 이야기를 했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곧 우리는 알멘다레스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산물 식당 리오 마르로 들어갔다.짙은 푸른색 차양이 쳐진 테라스의 긴 테이블에 앉았다. 주변 테이블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미국인, 프랑스인,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발코니의 밝은 조명이 맑은 잔과 아콰 파나 생수병을 비췄다. 로자노는 생수 맛이 너무 깨끗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블루치즈를 먹어본 적이 없다며 블루치즈 소스를 얹은 닭가슴살 요리를 주문했다. 디저트가 나오기 전 로자노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 웨이터 한 명과 사진을 찍었다.로자노는 나중에 내게 보낸 이메일에 이렇게 적었다. “그 식당은 마치 마법의 세계 같았다. 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로 옮겨 간 듯했다. 내 미래, 부모님, 가족, 조국이 생각났다. 하지만 보건과 교육 같은 공공시스템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우리 나라 경제의 현 상황에선 교육 분야에서 일하면 나 혼자선 그런 식당에 갈 수 없다. 다른 누군가 초대해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로자노는 “쿠바에선 어디를 가나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덧붙였다. “빛과 그림자 중 어느 것을 보여줄지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 둘 다를 보여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번역 이원기

2015.03.1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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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엔지니어 협력업체에 재취업 단순 생산직은 막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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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젊지만 고령화 속도 가장 빨라…노조 강한 대기업 정년연장 나섰지만 중소기업 고용 여력 작아 “춥지요? 우리야 이골이 나서 괜찮지만 기자 양반이 춥겠구만. 장갑이라도 줄까요?” 갑판 위에 올라선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단단해 보인다. 남부지방인데도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한파에다 바다의 칼바람까지 불어 닥치지만 그의 귀밑머리엔 땀방울이 식을 새가 없다.울산 울주군 온산공단 내 이영산업기계 공장에서 건조 중인 벌크선 위. 윤옥성(63) 기장은 올해로 38년째 배를 만들어온 베테랑이다. 1년 동안 그가 제작 공정에 참여하는 배는 대략 70여 척. 단순히 계산해도 그동안 2000척이 넘는 배가 그의 손을 거쳐 바다에 띄워졌다. 일반적으로 배는 6~7개의 총조(블록)를 조립해 완성품이 만들어 진다. 하나의 총조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부품 조립부터 용접까지 전과정을 책임지는 게 윤 기장의 일이다.이제는 무슨 일이 급한지, 문제점은 없는지 대충 눈으로 둘러 보고 지시만 해도 될 법하지만 여전히 그는 직접 몸을 움직여야 직성이 풀린다. 누구보다 자신의 직업과 현장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2008년 윤 기장은 일을 놓을 뻔 했다. 정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1976년 현대중공업 기술연수생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8년 정년 퇴직을 맞았다. 회사 차원에서 계약직으로 1년 더 일할 수 있도록 해줬지만 그게 전부였다. 윤 기장은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2010년 한 중소 조선업체에 자리가 생겼는데 경영난으로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그는 또 다시 일자리를 잃었다.“한 넉 달 정도 쉬었을 겁니다. 여기저기 일할 수 있는 데가 없나 찾아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근 40년을 아침밥 먹고 나가서 바닷바람 맞으면서 일했는데 집에 있으려고 하니 미칠 노릇이지요. 아직 충분히 일할 수 있는데 불러주는 데가 없으니 진짜 답답했지요.”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은 이영산업기계였다. 현대중공업은 협력업체인 이영산업기계에 정년 퇴직자 중 우수한 기술인력 명단을 제공했고 이영산업기계는 윤 기장의 전문성을 높이 사 정년과 무관하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2011년 4월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윤기장도 회사도 서로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총무팀 주해진 차장은 “풍부한 노하우를 가졌기 때문에 회사에게도 큰 이익”이라며 “자리가 생길 때마다 수시로 퇴직 인력을 고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 기장 역시 “보수는 조금 줄었지만 일을 하면서 차분히 노후 준비를 할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윤 기장은 울산 외곽지역에 전원주택을 짓기로 하고 토지 구입까지 마쳤다. 퇴직 후 거주지를 옮길 예정이다. 65살 정도까지만 일하면 노후 대비는 충분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100만원 초반의 국민연금, 퇴직금과 저축 등을 합해 일을 그만둔 뒤에도 매달 250만원 가량의 생활비를 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며 “이 정도면 아내와 둘이 부족하지는 않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년의 위기를 잘 헤쳐나간 사례다.2012년은 울산이 산업도시로 첫 걸음을 내디딘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2012년에 공업센터 지정 50주년을 맞았는데 그 사이 울산은 석유화학과 자동차, 조선 등 국가 경제를 견인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세계적인 규모의 대기업들이 자리 잡은 덕에 울산은 전국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가 됐다.2012년 1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1년 지역소득’에 따르면 울산의 2011년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는 6253만원에 달했다. 2위인 충남(4036만원)과 3위 전남(3532만원) 등을 월등히 앞섰고 전국 평균에 비해 2.5배 이상 많았다. 1인당 개인소득 역시 1854만원으로 1위다. 2010년과 비교해 지역내총생산은 8.4% 늘었고 개인소득도 14.4% 늘었다.이러한 성장 뒤에는 공업화 1세대(베이비부머)의 노고가 숨어 있다. 하지만 최근 이들이 울산의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2013년부터 베이비부머의 정년퇴직이 본격 시작되기 때문이다. 울산이 정년퇴직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울산은 가장 젊은 도시인 동시에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도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울산지역의 65세 이상 고령자 수는 8만3059명으로 전체의 7.4% 수준이다.전국 16개 시도 중 고령인구 비중이 가장 낮다. 하지만 2030년에는 고령인구 비중이 전국 평균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울산의 베이비부머 비중은 전체 인구 중 15.9%(22만7000명)로 부산(16.4%)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공업화 초기 베이비부머가 일자리를 찾아 대거 울산으로 몰려온 탓이다. 제조업 비중이 75%를 넘는 공업도시답게 다른 시도에 비해 임금근로자 비중도 크다. 정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얘기다. 울산발전연구원 이윤형 박사는 “베이비부머를 포함한 퇴직 예정자(45~64세)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27.8%를 차지한다”며 “울산의 인적, 경제적 자산인 이들이 퇴직 이후에도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퇴직 예정자 비중 전체 인구의 27.8%일단 울산 내 주요 대기업들은 정년 연장 카드를 꺼냈다. 2011년 788명이 정년퇴직으로 회사를 떠난 현대중공업은 조선업계 최초로 정년을 60세까지로 연장했다. 회사측과 노조는 지난해 59세부터는 본인이 원할 경우 정년을 연장하고 개인별 등급에 따라 일정부분 임금 수준을 조정하는 선‘ 택 정년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덕분에 2012년에 정년 퇴직을 앞뒀던 1000여 명의 직원들이 최소 2014년까지 더 일할 수 있게 됐다. 현대자동차 역시 정년을 앞둔 만 59세 직원들 중 건강상 결격사유가 없는 경우 1년간 계약직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사실상 만 60세까지 정년을 확대한 셈이다.그 밖에 SK케미칼 등 석유화학업계도 이미 정년 연장을 도입했거나 노조와 정년 연장 관련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윤형 박사는 “복지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평균 정년시점과 연급 수급시점 사이에 공백기가 큰 편”이라며 “기업이 비용부담에 연장을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고령인구가 경제활동을 지속하게 되면 국가 전체적으로 노인부양비를 줄이는 효과가 더 크다”고 지적했다.정년을 연장하면 퇴직자로서는 벌이를 유지할 수 있고 기업 입장에서도 대량 퇴직으로 빚어질 숙련기술 인력의 공동화를 막을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연장일 뿐 본질적인 대안은 아니다. 정년을 늘리면 그만큼 청년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지적도 나온다.지역 산업계 관계자는 “울산의 경우 제조업 비중이 큰 만큼 산업 현장에서의 생산성을 놓고 볼 때 미숙련자의 신규 채용보다 정년 연장이 효과가 크다”면서도 “정년 연장에 따라 기업의 고용 여력은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청년층 고용이 더욱 위축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이경훈 전 현대차 노조지회장 역시 “베이비부머와 그 자녀 세대가 일자리를 놓고 경합을 하는 것에 대한 기업과 지역사회 차원의 면밀한 논의와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정년 연장을 청년 일자리 문제와 연결하는 것은 정년 연장을 꺼리는 기업 측의 논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아버지 세대의 자식 세대는 일의 내용에서 차이가 커 일자리를 다툴 만큼 중복 영역이 넓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책임자나 관리직인 아버지 세대와 신입직원은 하는 일 자체가 다르다는 얘기다. 임금근로자 많아 정년에 민감퇴직 이후 이들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안이지만 수요와 공급 사이의 불균형은 울산도 예외가 아니다. 일을 더 하고 싶어도 재취업은 말처럼 쉽지 않다. 퇴직 인력을 활용하려는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의 유기적인 협조도 있었지만 위에서 소개한 윤 기장이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본인이 특정 분야에서 기술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실제로 현대중공업에서 그와 같은 파트에서 일하다 함께 퇴직한 동기 14명 중 11명은 지금도 인근 협력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재취업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같은 해 현대중공업에서 퇴직한 570여 명(1950년생)으로 범위를 넓히면 다르다. 단순 생산직이나 관리직(화이트칼라)의 경우 재취업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에쓰오일에서 퇴직을 앞두고 있는 김모 이사는 “중소기업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리직의 경우 임원급이 갈 자리도 없다”며 “부장급 이하는 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단순 조립 업무가 많은 현대자동차의 경우 생산직 근로자들조차 재취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공업도시지만 대기업 의존도가 큰 탓에 중소기업의 기반은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재취업을 하더라도 고령자들이 저임금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직원 15명 규모의 부품 회사를 경영하는 이재명(59·가명)씨는 “우리도 숙련된 인력이 필요하지만 여유가 없으니 고용 여력이 거의 없다”며 “퇴직자들이 만족할만한 임금이나 복지를 제공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기업 퇴직자들은 경제적 여건이라도 좋은 편이지만 진짜 문제는 영세 중소기업에서 퇴직하는 사람들”이라며 “고용이 불안정하고 연금 환경도 취약하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퇴직자가 늘고 저임금 근로자가 많아지면서 울산 또한 자영업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 자녀의 독립이 늦어진 탓에 은퇴를 하더라도 수입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데 취업으로는 이 수준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남유홍(63)씨는 퇴직 후 울산 동구에 있는 횟집 하나를 인수해 운영하다 2012년 가을 문을 닫았다.그는 “아이들 나이가 어려 아직 한 달에 400만원 정도가 필요한데 퇴직하고 나니 취업으로는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가게를 열었다”며 “장사에 실패한 뒤 두 달 전부터 지인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그가 받는 월급은 150만원 정도다. 가게를 열면서 퇴직금까지 다 써버린 탓에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이처럼 지역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온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 퇴직이 갖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실업률 증가, 사회적 비용 부담 확대 등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히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의 노후 준비는 낙제점 수준이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퇴직 예정인 조합원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보니 ‘퇴직 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응답은 5.1%에 불과했다. 67.4%는 퇴직 후 아무런 계획이 없거나 막연한 생각뿐인 것으로 조사됐다.일단 대기업 노조들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노동문화정책연구소를 중심으로 정년퇴직자 지원 프로그램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대학 및 노동기구 전문가와 노조 집행부가 참여한 추진위는 퇴직자 지원에 관한 각종 사례를 공유하고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현대차노조 역시 퇴직 예정자 욕구조사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한국노총 울산본부는 올해부터 사업장마다 노사공동전직지원센터를 설치해 퇴직 지원에 나설 계획이다.취업 대신 전혀 다른 인생을 꿈꾸는 이들도 있다. 울산발전연구원 황진호 박사는 “실제로 현장의 얘기를 들어보면 당분간 일을 쉬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정신적인 안정, 삶의 질, 새로운 삶을 걱정하는 퇴직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들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년 연장이나 재취업 외에 다양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퇴직자들이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인생 2막’을 열 수 있도록 여러 경로로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윤형 박사는 “베이비붐 세대가 기존 직업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다행히 최근 들어 각 자치단체가 마련한 퇴직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울산 북구청이 2008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제3 대학’이 대표적이다. 올해 6기를 모집하는데 자산관리과와 친환경원예학과, 친환경조경학과 등 3개 학과로 운영되고 있다. 1년 과정으로 지금까지 500여명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갔다.황순기(63)씨는 현대중공업에서 30년 넘게 설계를 담당한 기계 전문가다. 2010년 퇴직한 후에도 특허 관련 로열티를 받을 정도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지만 그는 이전과 다른 인생을 살겠다는 각오로 배움을 선택했다. 제3 대학에서 원예와 조경 교육을 받은 황씨는 10년 전 경주 모량 지역에 사둔 농장을 가꾸고 있다. 아직은 달랑 집 한 채와 과수 몇 그루가 전부지만 2015년까지 이 농장을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만드는 게 그의 목표다.현재 그가 가진 자산은 농장 땅과 아파트 한 채, 국민연금 등이다. 그렇게 여유 있는 노후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그는 삶의 태도를 바꿨다. 황씨는 “돈은 아껴 쓰면 얼마든지 만족하면서 살 수 있다”면서 “30년은 부모의 도움을 받았고, 또 30년은 사회의 도움을 받았으니 남은 30년은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농장에서 나오는 각종 채소와 과수 등을 무료로 나눠준다. 지인들이 놀러 오면 방도 그냥 내어준다. 입소문이 나면서 친분이 없는 사람도 문의를 해오지만 돈은 받지 않는다. 찾아오는 이들에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려고 약용 관련 자격증도 땄다. 황씨는 “일주일에 4~5일 정도 농장에 머물면서 밭을 가꾸고 작물을 키우는 지금이 나에게는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시간”이라며 “정년퇴직자들이 늘어난다고 하는데 제도나 사회기반에만 기대지 말고 퇴직 이후의 삶을 능동적으로 고민하는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울산 떠나겠다는 퇴직자 늘어“울산이 잘 산다고요? 확실히 예전만 못합니다. 원래 지금 이 도로는 밤에도 차가 꽉 막혔습니다. 보이소, 낮에도 이리 텅텅 비어 있다 아닙니까.” 24번 국도를 두고 택시기사 김동영(57)씨가 한 말이다. 울산에서 출발하는 24번 국도는 경부고속도로와 만나기 때문에 화물차 운행이 많은 곳이다. 경기가 좋을 때만 해도 상습 정체 구간으로 꼽힐 만큼 차량의 몰리는 도로였다. 불황을 체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곳곳에서 들렸다.태화강역 인근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공도훈(44)씨는 “현대자동차 공장과 가까워 직원들의 발걸음이 잦았지만 최근에는 눈에 띄게 손님이 줄었다”고 말했다. 기업체 임원들은 “일거리가 줄어 걱정”이라며 입을 모았고 울산의 상징인 현대중공업의 희망 퇴직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민도 많았다.경기도 안 좋은데 정년퇴직 문제까지 불거지니 울산시는 걱정이 많다. 퇴직 이후 울산을 떠나려는 퇴직자들이 많아 더 고민이다. 자산이 많은 퇴직세대가 한꺼번에 울산을 떠날 경우 현금자산의 역외유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울산 인구 중에서 타 지역에서 출생한 비율은 전체의 약 60%를 차지한다.퇴직자의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 울산을 찾은 타지 출신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들 중 52.6%는 퇴직 후 울산을 떠나고 싶다는 뜻을 나타냈다. 마음은 급한데 대책은 희미하다. 울산시가 서민생활 안정 등에 역점을 두고 수립했다는 2013년 시정 7대 전략, 38개 과제 어디에도 정년퇴직 관련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울산의 겨울이 더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다.

2013.01.0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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