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정상들'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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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9일(현지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가 열리는 가운데 28일 튀르키예(Turkiye 옛 터키)와 스웨덴·핀란드 정상들이 NATO 가입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스웨덴(마그달레나 안데르손 총리)과 핀란드(산나 마린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계기로 국가 안보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우크라이나와 함께 NATO 가입을 서두르고 있다. 양국은 그동안 오랫동안 유지해온 중립국 원칙을 깨고 지난달 18일 NATO에 가입 신청서를 공식 제출했다. NATO 가입하려면 30개 NATO 회원국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NATO 회원국인 터키(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가 강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터키는 “터키의 안보를 위협하는 쿠르드노동자당(PKK) 세력을 옹호하고 있는 스웨덴·핀란드와 NATO 동맹을 맺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PKK는 미국·영국·유럽연합(EU) 등 서방세계가 테러 조직으로 지정한 무장 단체로, 터키로부터 쿠르드족(이란·이라크·시리아·터키 접경지역에 거주하며 언어·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의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무장단체다. 스웨덴과 핀란드가 이런 PKK 세력을 비호하고 있다는 것이 터키의 시각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지난달 25일(현지시각) NATO의 중재로 양국의 협상 대표단을 터키로 보냈으나 의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달 20일(현지시각)에도 벨기에 브뤼셀에서 터키 측과 협상을 벌였으나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 마드리드 NATO 정상회의 때 또다시 회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번 회담에는 옌스 스톨텐베르그 NATO 사무총장의 중재로 터키 대통령, 스웨덴 총리, 핀란드 총리가 참석할 예정이다. 러시아에 대항하고 있는 미국이 터키를 설득하고 있지만 터키는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중재에 나서고 있는 NATO 지도부도 “자국의 안보 위협을 걱정하는 터키의 입장은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한편,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NATO 지도부는 터키가 그동안 NATO에서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십분 이해한다는 입장이다. 터키는 1952년 NATO에 가입한 이래 NATO의 문호 개방을 지지해왔다. 러시아와의 충돌이 우려되는 NATO의 동유럽 진출 전략에도 지금까지 반대 입장을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스웨덴과 핀란드가 PKK 등 테러리스트 세력에 대해 구체적인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터키를 위협하는 세력에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스웨덴과 핀란드에게 터키의 요구를 받아들일 해법을 제시할 것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식 기자 tango@edaily.co.kr
2022.06.28 06:00
2분 소요![[코로나19가 보여준 속살] 우리가 알던 시스템의 대변혁 위기](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1/02/24/ecn3698936108_XjQPLY5J_1.353x220.0.jpg)
코로나로 무너지는 글로벌화·공급체인·식량공급·항공·유통 붕괴 어디까지인가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는 5만2000명에 이르렀다. 통계정보 제공 사이트인 월드오메터스가 집계한 결과로, 시간은 한국시간 4월 3일 오전 8시 기준이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전 세계 204개 국가나 속령에서 코로나19가 발견됐으며 여기에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와 MS 잔담 등 2척의 크루즈선이 추가된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국가와 속령의 숫자는 유엔 사이트가 밝힌 회원국 숫자 193개보다 많다. 홍콩 등 주권국가가 아닌 속령이 포함됐기 때문이다.누적 확진자의 경우 미국이 이날 24만 명을 넘어 전 세계 확진자 4명 중 한 명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11만 명을 넘었으며 독일과 중국의 8만명대, 프랑스와 이란이 5만명 대다. 영국이 3만 명 이상이며 스위스·터키·벨기에·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리아가 1만명대다.신규 확진자 숫자도 속도가 빠르다. 미국이 이날 하루에만 2만5000명이 넘는 추가 확진자가 나왔다. 스페인이 하루에 7900명을, 독일이 6809명, 이탈리아와 영국이 4000명이 넘는 추가 확진자가 발견됐다.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과 대량 검사가 결합한 결과로 보인다. 이란과 터키, 프랑스에서 하루 2000명 이상의 추가 확진가가 나온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캐나다·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브라질에서 하루 확진자가 1000명을 넘었다.늘어나는 확진자 만큼이나 우려되는 것은 사망자의 급속한 증가다. 이탈리아에선 1만3000명 이상이고 스페인은 1만명을 넘었다. 미국과 프랑스가 각각 5000명 이상이고, 이란과 영국이 3000명 안팎이다. 네덜란드·독일·벨기에도 1000명을 넘어섰다. 주목할 점은 뛰어난 의료 인프라 등의 영향으로 초기에 사망자가 비교적 적었던 독일도 이날 사망자가 176명이 늘어 1107명에 이르렀다. 확진자 대비 사망자의 비율인 치명률은 1.3%로 다른 나라에 비해 여전히 낮다.통계가 말해주듯이 코로나19가 가히 세계를 흔들고 있다.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만으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한 분야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 팬데믹(전 세계적인 범유행)이란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영향이 강력하고 분야와 범위도 넓다. 보건의료를 넘어 경제와 정치와 사회 체제에도 심각한 변화가 불가피하다. 바이러스와 대항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세계는 어디까지, 어떻게 변할 것인가. ━ 미국·유럽 수퍼파워도 전염병 대응 부실 드러내 경제를 살펴보면 세계경제의 중심인 미국과 유럽의 사정이 말이 아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셧다운(일시정지) 경제’ ‘록다운(제재·폐쇄) 경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코로나19로 인한 이동 제한과 소비 위축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맞고 있다. 실질적으로 경제 자체가 셧다운이나 록다운 된 상황이다. 2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나란히 참석한 백악관 회견에서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은 자국민 90%가 자가격리를 명령 받고 있다고 밝혔다. 약국·수퍼·주유소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이동할 수 없도록 한다.이동이 막히면서 소비는 꽁꽁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서비스업은 그야말로 ‘진공동결’ 상태다. 월가는 대공황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요동치고 있다. 공장도 멈추거나 가동을 줄일 수밖에 없다. 므누신은 재무장관은 부양자금을 2주 안에 풀겠다며 660만 명에 이르는 실업 인구에 대한 대책도 곧 내놓겠다고 밝혔다. 프랑스2 방송은 자국에서 샴페인 소비가 84%, 향수 소비가 60% 줄어 생산·유통업계가 고통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장례 수요는 83%가 늘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의료 요원들은 물론 장례업계 종사자도 감염의 위험에 시달리는 가운데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미국에서도 가장 상황이 심각한 뉴욕주는 이날 9만20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왔으며 사망자도 2373명에 이르렀다. 인구2000만의 뉴욕주는 국가로 치면 확진자가 미국·이탈리아·스페인 다음으로 독일·중국·프랑스·이란보다 많다. 사망자도 이탈리아·스페인·미국·프랑스·중국·이란·영국 다음이다. 네덜란드·독일·벨기에보다 많다. 특히 미국의 번영을 상징하며 전 세계 이민 희망자에게 꿈의 도시로 통했던 뉴욕시는 병원들로 몰려드는 코로나19 환자를 감당하지 못해 아수라장을 연출하고 있다. 센트럴 파크에 자원봉사단체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한 야전 텐트를 설치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뉴욕시나 뉴욕주를 넘어 냉전 이후 글로벌 유일 강국으로 군림해왔던 미국이 처한 심각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CNN은 미국이 심각한 의료장비와 물자 부족에 시달린다며 수 천 개의 고장 난 인공호흡기를 수리해 수요에 맞추려고 한다고 보도했다.미국의 국제적인 위상은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그야말로 흔들리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한 가장 가시적인 국제 권력지형의 변화다. 미국은 코로나 위기를 맞아 전 세계에 지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 뾰족한 대응 방법을 보여주지도 못하는 것은 물론 자국 상황도 제대로 통제하기나 위기에 대응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줬다. 코로나19 방역과 대응에 관한 한 미국은 글로벌 지도국과 거리가 멀다. 트럼프 대통령의 상황판단 미숙, 보건의료 전문가의 조언이 아닌 정치(재선을 노린 11월의 대선)를 고려한 판단, 리더십 부족을 큰 이유로 지적할 수 있다.트럼프 대통령의 엉성한 인식과 미숙한 대응은 2월 27일 코로나19와 관련해서 연 백악관의 첫 브리핑에서 바로 드러났다. 이날 트럼프는 미국에서만 한해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2만5000명에서 6만9000명에 이른다며 코로나19가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평소 주장을 반복했다. 심지어 2019년 존스홉킨스 대학이 작성해 코로나19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떨어지는 ‘미국 유행병 대비 세계 1위’ 보고서를 들고 나와 흔들며 코로나19가 별 게 아니며 미국은 문제가 없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유행병에 대비가 잘 된 나라 1위로 미국을 꼽았으며 뒤이어 영국·네덜란드·호주·캐나다·태국·스웨덴·덴마크·한국·핀란드의 순이었다.이들 나라의 대부분은 현재 코로나19가 확산돼 있다. 중국 등에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독감 수준”이라며 코로나19를 오판하는 발언을 한 것은 트럼프의 오판과 미숙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수퍼파워일지 몰라도 보건의료와 전염병 대응에선 다른 나라와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 의지하거나 조언이나 정보를 얻으려는 나라가 나오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 中 해외 방역지도로 책임 회피 이미지 쇄신 나서 그 기회를 틈타 중국은 글로벌 방역 및 보건의료 지도국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외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국의 신화망·중국망·인민망과 외교부 발표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3월 이후 이틀에 하루 꼴로 코로나19가 휩쓴 외국 정상들에게 전화하거나 전문을 보내 비대면 정상 외교에 집중하고 있다. 위기에 처한 해당국의 피해를 위로하고 물자와 의료진 지원을 약속하며 접근하고 있다. 82개국 이상에 의료용품·의료진을 보내 연대를 과시하고 있다.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을 중심으로 확산한 코로나19 초기 대응에 실패해 8000명이 넘는 확진자와 33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실패 사례를 오히려 성공 사례라고 감싸며 그 경험을 공유하겠다고 나서고 있다.중국 당국은 2019년 연말에 나타난 코로나19에 대한 초기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으로 지적 받아왔는데 이를 덮고 선전과 해외 지원을 앞세워 코로나19 글로벌 위기를 국가 이미지 개선과 책임 회피에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중국은 2019년 연말에 나타난 코로나19를 무시하다 12월 31일에서야 비로소 첫 확진자를 인정했으며 그 이후에도 적극적인 조치를 하지 않고 춘제(春節·설·올해 1월25일)를 앞두고 연휴가 시작될 때까지 미루다 초대형 유행으로 이어졌다. 중국 당국은 1월23일에야 인구 1108만의 우한을 봉쇄했으며, 이어 인구 5850만의 후베이성의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전염병이 돌면서 우한 등에서 약 500만 명이 봉쇄 전에 외부로 이동하면서 봉쇄의 효과가 줄었다는 평가다. 중국 당국의 조치가 늦었다는 이야기다. 후베이성 당국은 두 달이 지난 3월 24일 후베이성 봉쇄는 3월 25일을, 우한은 4월 8일 봉쇄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중국은 이런 초기 대응 실패를 덮기 위해 코로나19에 대응하면서 얻은 정보와 노하우를 전 세계에 대대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이미 113개국 이상에 비디오 회의로 노하우를 전수했다. 3월 24일에는 중남미 25개국과 3시간 동안 영상으로 접촉하며 방역지도를 했다. 당장 데이터도 대처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도 없는 나라로서는 중국의 정보 전달과 지도에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다. 전염병 발생 진상 규명과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묻히고 중국이 방역 지도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이다.포린폴리시는 중국이 이를 계기로 기존의 일대일로 전략에 더해 ‘보건의료 실크로드’를 건설하려고 시도한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중국이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위기를 틈타 소프트파워 국가로 올라서려고 시도한다고 평가했다. 코로나 19로 인한 미국의 신뢰 추락은 글로벌 사회에서 미국와 중국이 더욱 격렬하게 경쟁하는 상황을 부르고 있다. 다만 중국도 코로나19 확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만큼 코로나19 위기를 얼마나 활용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미국과 함께 196개국의 회원국을 거느린 유엔과 세계보건기구(WHO)·국제금융기구(IMF)·세계은행(WB) 같은 국제기구의 역할과 위상도 코로나19를 계기로 재평가되고 있다. 코로나19에 대한 사전 경고는 물론 초기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해 엄청난 예산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어서다. 거대한 관료기구를 유지하는 유엔은 사실상 사무총장의 발언 외에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WHO는 위기를 자처하고 있다.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의 노골적인 중국 편들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권위와 신뢰가 떨어진 상황이다. 3월 11일의 팬데믹 선언도 너무 늦어 시기를 놓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코로나19로 인해 예상되는 국가·글로벌의 경제 위기로 개별 국가별로 대책이 나오고 있을 뿐, IMF 차원에선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가난 없는 세상 건설’을 구호로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WB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개도국 보건·경제 위기를 앞두고 선제적인 대응을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상황이다. 거대한 예산과 기금에 대한 혹독한 조치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이와 함께 26개국이 가입한 유럽연합(EU), 22개국으로 이뤄진 아랍연맹(AL), 10개국의 회원국이 있는 아세안(ASEAN), 55개국의 회원국을 거느린 아프리카연합(AU), 12개국이 가입한 남미국가연합(USAN) 같은 지역기구의 효용도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지역의 정치·경제·문화 공동체를 표방했지만 정작 코로나19 같은 보건위기가 오자 지역기구 단위의 협의나 합의, 대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 서로 문을 걸어 잠그고 국가 단위의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기존 시스템 무용지물 논란 재평가·변화 목소리 그나마 EU는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한 솅겐(Schengen) 조약에 따라 코로나 위기 초반에도 국경을 열어뒀지만 상황이 심각해지자 국경을 제한적으로 닫을 수밖에 없게 됐다. EU 차원의 대책과 지원도 초기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개별 국가가 자국에서 벌어지는 코로나19확산에 대응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다만 보건의료 강국인 독일의 병원들이 병상 부족에 시달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환자를 비행기로 이송해 받고 있는 정도다.코로나 위기는 그동안 전 세계로 확산하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위협 받고 권위주의와 감시사회로 옮아갈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중국은 코로나19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철저한 주민 통제와 도시 봉쇄, 드론 등을 이용한 주민 감시를 벌였다. 효용은 별개로, 인권 침해 소지가 다분한 방식이다. 하지만 중국은 이제 이런 ‘중국식 방역모델’을 전 세계에 자랑하며 이를 퍼뜨릴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중국의 방역방식이라는 미명 아래 중국식 권위주의와 감시사회를 개발도상국에 수출해 중국 체제를 인정받고 인권과 소수민족 문제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이와 함께 중국을 비롯한 저임금 국가와 지역을 ‘세계의 공장’으로 운영하면서 전 세계가 혜택을 누려온 ‘글로벌 공급체인’도 재평가 받을 위기에 처했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던 초기에 부품 이동이 중단되거나 연기되면서 전 세계 수많은 기업이 위기에 처했다. 중국의 생산기지가 가동을 중단하면서 중국에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던 전 세계 기업들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됐다. 공급망의 글로벌 의존도를 줄이는 방안이 각국에서 나올 가능성이 커진다. 소비자상품의 물가가 높아지고 기업 이익이 줄어드는 대신에 개별 국가에서 고용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마스크와 방호복,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코로나19 대응 의료·방역 물자가 새롭게 ‘전략물자’가 되는 상황도 나타났다. 중국산 등에 의존하다가 중국에서도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세계 각국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이를 계기고 세계 각국이 보건의료와 방역 관련 물품을 자급하려는 노력이 확산될 전망이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월 200만 개이던 마스크 생산 능력을 4월부터 1000만개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사태가 물러가더라도 보건의료 관련 물자의 자급 기조는 바뀌지 않을 조짐이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달린 물자를 이국에 의존할 수 없다는 여론 속에서 각국 정부는 경제논리가 아닌 안보논리와 정치논리로 이 사안에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식량 문제도 같은 차원에서 안보와 직결된 전략물자로 취급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글로벌화와 글로벌 공급체인에 의존하던 경제체제가 한바탕 재편되는 홍역을 겪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세계화의 수혜자였던 항공·여행 산업은 상당 기간 침체를 겪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파산 사태를 피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국정 항공사를 국영화하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다. 각국 정부가 기업과 가계에 직접적인 지원금을 지급하는 상황도 이젠 전 세계에서 일반화할 조짐이다. 자본주의를 받쳐왔던 여러 기준들이 경제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어떤 상황으로 갈지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글로벌화도, 민주주의도, 자본주의도 변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적응하느냐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4.05 11:03
9분 소요![[트럼프가 뒤흔드는 21세기 국제질서] 美 제일주의 외치며 협약·합의 헌신짝 취급](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1/02/24/ecn3731660748_epVoUa3d_1.353x220.0.jpg)
나토 회원국에 안보 무임승차론 주장…동맹국과도 무역마찰 일으키며 불협화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세기 국제질서를 온통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초부터 지적돼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국제질서 뒤흔들기는 올해 7월 절정에 이르렀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담에 이어 영국을 방문하고 핀란드 헬싱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미·러 정상회담을 열었다. 그 과정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7월 11~12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 본부에서 29개 회원국 정상이 모인 가운데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트럼프는 나토 체제를 뒤흔들었다. 이번 회의는 혼란스러웠다. 유럽과 북미 지역 안보를 책임지는 나토를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미국의 군통수권자인 트럼프는 나토 동맹국 정상 앞에서 안보공약 준수를 거론하는 대신 ‘돈’을 강조했다. 회원국 정상들에게 2014년 국방비 지출을 각국 국내총생산(GDP)의 2%까지 증액하기로 합의했던 사실을 강조하며 국방비를 즉각 늘리라고 압박했다. 이 때문에 미국을 제외한 다른 회원국 정상들은 비상회의를 열고 국방비를 늘리는 노력을 가속화하기로 선언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트럼프는 정상회의를 마치고 연 회견에서 “나는 의회 승인 없이 미국을 나토로부터 탈퇴시킬 수 있다”는 말을 했다. 트럼프가 나토 정상회의에서 다른 회원국들이 국방비를 즉각 늘리지 않으면 미국이 나토를 탈퇴할 수 있다고 압박했음을 본인의 입으로 시인한 것이나 진배없다. 그는 이어 “이제 그런 조치는 더는 필요 없게 됐으며 나토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은 매우 굳건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69년 전 나토를 결성해 ‘서구 세계’를 안보적으로 결속시켰던 미국의 지도자가 할 말은 아니라는 평가를 주를 이룬다. 미국 대통령이 동맹국 정상들 앞에서 ‘안보 무임승차론’을 주장하고 나토 탈퇴까지 언급하며 ‘돈을 더 내라’고 압박했으니 나토 동맹 체제가 흔들린다는 지적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사실 나토는 실질적으로 미국이 주도해왔다. 나토의 자료를 살펴보면 상황이 명확해진다. 통계를 보면 나토 회원국 29개의 2018년 국방비는 1조134억 달러에 이른다. 이 가운데 미국이 7060억 달러로 가장 많다. 다른 유럽 나토 회원국들이 지출하는 국방비는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다. 영국이 615억 달러, 프랑스 520억 달러, 독일 510억 달러, 이탈리아 257억 달러, 스페인 138억 달러, 그리스 50억 달러를 각각 지출했다. 미국이 나토 전체 군사비의 69.67%를 차지한다. 나머지 회원국을 모두 합쳐도 나토 전체 지출이 30%정도다. ━ 트럼프 “방위비 더 내라”며 나토 회원국 압박 각국 GDP 중 국방비 비중을 봐도 미국과 유럽 국가들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미국이 GDP의 3.50%를, 그리스가 2.27%를, 영국이 2.10%를 각각 국방비로 지출해 나토가 권장하는 2%를 넘었을 뿐이다. 프랑스(1.81%)·독일(1.24%)·이탈리아(1.15%) 등 나머지 주요 회원국은 2% 이하이며 심지어 스페인(0.93%)과 벨기에(0.85%)는 긴축재정으로 1%에도 미치지 않는다. 전력도 떨어진다. 영국의 글로벌 외교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IISS)에서 발행하는 ‘밀러터리 밸런스 2017’에 따르면 서유럽 나토 회원국들은 전차를 대거 감축해왔다. 특히 나토 회원국인데 주요 7개국(G7) 회원국인 서유럽 국가를 살펴보면 독일 306대, 영국 227대, 프랑스 200대, 이탈리아 160대 등 893대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이 운용 중인 2418대보다 적다. 서로 으르렁대는 터키와 그리스, 그리고 폴란드와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소련이 주도했던 옛 바르샤바 동맹국 회원이었다가 공산체제 몰락 이후 나토에 가입한 국가만 전차 전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영국은 핵 전력을 강화하려다 의회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을 정도로 국내 정치상 국방비 증액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미 국방비를 심각하게 줄여 전투기 조종사들을 대거 전역시키고 퇴역 예정이던 토네이도 전투기 다시 쓰는 등 무기체계의 업그레이드도 더딘 상황이다. 프랑스는 과거 과도한 핵무기를 운용하다 재래식 전력 증강에 차질을 빚어왔다. 무기 체계도 낙후된 데다 국방과학 분야 연구개발과 전력화도 늦어져 전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일은 경제 여건상은 국방비를 늘릴 수 있다. 하지만 2차대전의 상처를 기억하는 주변국들의 시선과 견제가 문제다. 이 때문에 독일이 자랑하는 레오파르트 전차의 후속 모델을 개발하는 대신 지속적으로 개량해서 쓰는 등 구두쇠 전략을 펼치고 있다.가장 눈에 띄는 나라는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아예 주요 전력을 해체하고 있다. 특히 전차 18대와 전차병 100명만 남기고 전차부대를 아예 폐지했다. 네덜란드의 한 관계자는 “네덜란드에서 기갑전이 벌어질 정도면 이미 전쟁이 가망 없는 상황”이라는 말까지 하며 기갑 전력 가축을 옹호했다. 네덜란드는 기존 보유 레오파르트 전차 가운데 100대는 핀란드에 중고품으로 수출하는 등 모두 해외에 매각했다. 네덜란드 육군은 기본 3개 여단 중 2개를 독일군에 통합해 유럽 통합군으로만 활동 중이다. 네덜란드는 파트타임 군인까지 포함 병력이 2만1000명에 불과하다. 네덜란드는 군함과 전투기까지 팔아 복지비에 투입해왔다. 하지만 트럼프의 압박에 앞으로 어떠한 묘수를 찾을지 주목된다. ━ 네덜란드는 전차부대 폐지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선 전체 29개 회원국이 국방비를 2024년까지 자국 GDP의 2% 목표를 달성하기로 재확약했다. 정상들은 이를 정상선언에 포함해 규제력을 갖도록 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에 의한 ‘억지춘향’격 국방비 증액 약속이어서 뒷맛이 씁씁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뭔가를 이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각국이 이 시기보다 목표를 앞당겨 달성하고 GDP 비율도 2% 이상으로 높이기로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기자회견에서 “회원국 전체가 충분한 증액을 약속했다. 우리들은 만족했으며 나토는 2일 전보다 단결력이 더욱 강해졌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트럼프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나토 회원국들은 여기에 찬성하는 목소리를 명확하게 내지는 않았다.돈만 강조하는 트럼프의 언행은 나토의 창립 정신에도 위배된다. 나토는 1949년 북미의 미국과 캐나다, 유럽의 영국·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노르웨이·덴마크·아이슬란드·포르투갈 등 12개국으로 창설됐다. 미국이 마샬 플랜으로 전후 서유럽 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선 지 1년 뒤 이뤄진 동맹이다. 나토는 단순한 안보동맹에 그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공유하는 서구의 가치동맹 성격이 강했다. 이는 나토의 확장 역사가 잘 말해준다. 터키의 가입이 그 하나다. 터키는 아직 유럽연합(EU) 회원국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나토 회원국으로서 서방 연합군의 핵심을 맡아왔다. 터키는 1952년 앙숙인 이웃 그리스와 동시에 나토 회원국이 됐다. 터키는 나토의 첫 확대 대상이었으며 55년 가입한 서독이나 82년 회원국이 된 스페인보다 앞선다.그 연유를 살펴보면 나토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나토 창설 논의에 참석할 수조차 없었다. 서방 점령지(서베를린 포함)는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들어서고 소련군 점령지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들어서면서 각각 주권 국가가 됐다. 서독은 민주주의 헌법과 삼권분립의 국가체계를 갖춘 민주주의 국가로 재출발했다. 그럼에도 2차대전의 기억은 미국과 유럽으로 하여금 서독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아무리 냉전이 시작됐지만 미국과 나토는 서독을 즉각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서독 지역의 연합군 점령은 1952년 체결된 본-파리 협정이 1955년 관계국 모두에서 비준되면서 비로소 끝났다. 비준에 시간이 걸린 이유는 독일의 재기를 두려워한 프랑스에서 이를 한 차례 거부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로 재출발한 서독도 이런 갈등을 봉합한 다음인 1952년에야 나토에 가입할 수 있었다. 서독은 1990년 10월 동독과 통일을 이룬 후 동독 지역까지 포함한 통일 독일로서 새롭게 나토 회원국이 됐다.스페인의 가입 과정은 나토가 민주주의 동맹임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의 파시스트 독재 정권의 집권시기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서방세계 가치를 공유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토와 유럽 경제공동체에 초대받지 못했다. 프랑코가 세상을 떠나고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시작되고 1978년 민주적인 새 헌법을 마련했지만 즉각 나토 회원국이 될 수 없었다. 1981년 불발 군사 쿠데타가 터지는 등 정치적인 위기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1982년 10월 총선에서 좌파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집권하면서 겨우 혼란이 가라앉으면서 민주주의 체제를 이훴다. 스페인은 1982년 5월 비로소 나토 회원국이 됐다. 그 뒤 국내에서 일부 반대 움직임이 있자 1986년 3월 12일 국민투표를 실시해 56.9%의 찬성으로 나토 잔류를 확정했다. 민주주의 가치 공유가 기입 조건임은 물론 가입 과정에도 민주주의가 적용됨을 보여준 사례다. ━ 가치동맹을 헌신짝처럼 버려? 나토는 회원국 중 한 나라가 외부의 공격을 받으면 집단으로 대응하는 집단안보 체제다. 그렇다고 단순히 군사적인 역할만 중시하는 건 아니다. 독일의 경우를 보면 민주주의 체제 운용은 물론 유럽 지역에서 국가간 갈등 소지도 없애야 했다. 스페인의 경우엔 민주주의와 인권의 서방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나토 회원국이 되는 조건이었다. 사실상 옛 소련의 서진을 저지하기 위해 1949년 발족했던 나토는 냉전종식 후 대테러전쟁 등을 위한 집단 안보동맹으로 새롭게 유지돼왔다. 미국이 공짜 안보를 제공해왔다기보다 미국이 세계를 이끌고 상호 안전과 이익을 추구하는 동맹 체제로 유지돼왔다. 이런 배경이 있는 나토의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는 나토의 역사와 가치를 대놓고 부정한 셈이다. 트럼프는 비용 문제를 들어 오랜 가치동맹을 헌신짝처럼 버린 ‘수전노’ 같은 인물로 기록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더구나 트럼프는 중국은 물론 상당수가 나토 회원국이기도 한 유럽연합(EU)과도 철강에 25%, 알루미늄 제품에 10%의 관세 부과를 강행하면서 무역전쟁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는 EU를 경제적인 ‘적’이라고 지칭해 유럽의 분노를 샀다. 유럽산 자동차에 대해선 고율의 관세를 일단 유예했지만 트럼프의 ‘미국 제일주의’의 불똥이 언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트럼프는 나토 정상회의를 앞두고 유럽을 경제·안보적으로 이끌고 있는 독일을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직도입을 위해 추진 중인 ‘노르트 스트림 2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를 들어 독일을 “러시아의 포로”라고 비난하며 “러시아에 의해 총체적으로 통제받고 있다”고 발언했다. 이 사업은 러시아에서 유럽 북부 발트해를 거쳐 독일로 이어지는 총길이 1220㎞, 직경 1220㎜의 가스관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내년 완공 예정인 이 가스관의 건설이 이뤄지면 러시아산 가스가 우크라이나 등 정세가 불안한 동유럽 지역을 거치지 않고 독일로 안정적으로 공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이 프로젝트 회사는 러시아 국영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이 지분의 51%를 차지하며 전 독일 총리인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독일은 민주주의 모범국가일 뿐 아니라 유럽 최대 경제대국이다. 국제통화기금(IMF) 2017년 명목금액 기준 통계로 세계 GDP 순위에서 미국(19조3906억 달러)·중국(12조146억 달러)·일본(4조8721억 달러)에 이어 세계 4위(3조6848억 달러)를 차지한 나라가 독일이다. EU 전체 GDP(17조3086억 달러)의 21.29%를 차지할 정도다. 트럼프는 이런 강력한 국가의 가스관 사업을 내놓고 비난해 수많은 독일인의 분노와 비웃음을 동시에 샀다.트럼프는 독일이 사실상 주도했던 2015년 이란 핵합의에서 지난 5월 8일 탈퇴를 선언했다. 이란 핵합의는 2015년 7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Permanent 5)인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에 독일을 더한 6개국(P5+1)이 이란과 합의해 2016년 1월 발효된 것으로 공식명칭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이다. 트럼프는 2017년 10월 13일 기존의 이란핵 합의에 3가지를 더 요구했다. 이란에 대한 모든 제제를 2025년 10월 18일 이후 해제한다는 조항의 삭제, 기존 합의에 없었던 탄도미사일 규제 신설, 기존에 미국이 지목한 핵 의혹 시설만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사찰하는 대신 이란 전역을 즉각 사찰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내용이다. 전임 버락 오바마 정권이 합의를 할 때부터 반발했던 트럼프는 취임하자 새로운 조건을 내걸고 어렵사리 이뤘던 국제합의를 부정하다 자국만 탈퇴하는 무리수를 뒀다. ━ 국제 협약이나 합의 일방적으로 파기 트럼프의 국제 협약이나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을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올해 6월 19일에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탈퇴했다. 트럼프는 유엔인권이사회가 이스라엘의 반인권적인 행동을 비난하자 여기에 반발해왔다. 지난해 10월 12일에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 탈퇴를 선언했다.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거나 주도했던 파리기후협약에서 지난해 6월 2일 탈퇴했으며 올해 1월 23일에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도 선언했다. 인권 외교, 민주주의 외교, 도덕 외교, 자유무역 외교를 펼쳐왔던 미국의 지향점을 일시에 바꾸는 행동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12월 6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모두 수도로 주장하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고 올해 5월 14일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이 도시로 옮겼다. 그러면서 중동평화와 관련해 “팔레스타인은 평화협상 의사 없다” “팔레스타인은 미국에 감사와 존경심이 전혀 없다”고 비난해왔다. 트럼프는 심지어 유엔에 대해서도 “유엔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으킨다” “대화를 즐기는 시간이 지나친 집단”이라고 말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대해선 “WTO는 미국에 상처를 주기 위해 설립됐다” “WTO는 경제대국인 중국을 개발도상국으로 취급한다”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해왔다.트럼프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기존의 국제질서를 뒤흔들며 ‘미국 제일주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미국이 이익을 얻고 있다는 근거는 아직 없어 보인다. 오히려 미국의 이미지만 훼손하고 있다는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 BBC방송은 트럼프가 미국 주류 언론의 이런 비난에 대해 7월 23일 한 재향군인회 모임에서 “여러분이 보고, 읽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과 거짓, 진실과 허상을 제대로 구분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는 트럼프가 주도하는 무역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2018.07.2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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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정상들은 2월 20일 그리스에 1300억 유로에 이르는 2차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차 구제금융의 미집행분 340억 유로까지 더하면 지원 규모는 총 1640억 유로에 이른다. 하지만 EU-국제통화기금(IMF)은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을 6월 이후 3개월째 중단했다. 경제상황 악화와 긴축에 대한 반발로 그리스정부가 재정건전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그리스 정부는 은행 구제기금 자금과 초단기 정부채(T-bill) 발행,정부자산 매각 등으로 소요자금을 간신히 융통하고 있는 실정이다.EU-IMF로부터 구제금융 지원이 중단되거나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리스 은행들의 유동성 지원을 위한 담보물로 그리스 국채를 더이상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는 10월 이후 재정 고갈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가 국가부도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EU-IMF와의 긴축 이행계획을 약속하고 315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조기에 지원받아야 한다.구제금융 없으면 부도 위기 몰려현재 EU-IMF-ECB의 트로이카 실사단은 7월 이래 긴축 이행 평가작업을 벌이고 있다. 트로이카 실사단은 그리스 정부에 앞으로 2년간 총 115억 유로의 긴축방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리스 정부는 연금 지급을 최대 35% 줄이고 공기업 임금도30~35% 삭감하고, 4만5000명의 공공부문 인력을 축소한다는 긴축방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러한 긴축조치는 국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1,2차 총선을 치르면서 어렵사리 집권에 성공한 사마라스 총리로서는 반(反) 긴축을 외치는 급진 좌파정당인 시리자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사마라스 총리는 지난 총선 과정에서 집권 때 ‘긴축 이행 시한의 2년 연장’을 관철할 것을 선거공약으로 내놓았다. 사마라스 총리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총리 취임 이후 처음으로 8월 23일부터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유럽 순방길에 나섰다. 독일·프랑스 정상들과 만나 위기 타개책을 논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에 따라 융커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회의) 의장과 사마라스 그리스 총리(8월 22일), 메르켈 독일 총리-올랑드 프랑스 대통령(8월 23일), 메르켈 총리-사마라스 총리(8월 24일), 올랑드 대통령-사마라스 총리(8월 25일)로 이어지는 셔틀외교가 잇따라 이뤄졌다.사마라스 총리는 주요국 정상들을 만나 경기침체 심화와 신(新)정부 출범 지연 등을 이유로 긴축에 차질이 생겼다며 긴축 시한의 2년 연장(2014년→2016년)을 요청했다. 사마라스 총리는 ‘돈이 아니라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셔틀외교 노력에도 사마리스 총리의 기대와 달리 긴축 시한 연장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실패했다. 메르켈 총리와 올랑드 대통령은 이구동성으로 그리스의 긴축 시한 연장 요청에 대해 트로이카 실사단의 최종보고서가 나온 이후 결정하겠다는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사마라스 총리입장에선 메르켈 총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올랑드 대통령마저 자신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독일과 프랑스 정상은 트로이카 실사단의 평가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상황에서 정치적 결정을 미리 내리면 국내외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의식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셔틀외교에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마라스 총리는 그리 실망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메르켈 총리는 긴축 시한의 연장에 대한 확답은 피한 채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를 강력히 희망한다”는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다. 추가 지원에 대한 국내의 반대여론을 의식해야 하는 메르켈 총리로서는 충분한 명분을축적해야 하므로 트로이카의 공식 입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트로이카 실사단은 9월 초 아테네를 다시 방문해 실사작업을 재개할 예정이다. 9월 중순 경에 최종보고서를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구제금융 지원여부는 10월 8~9일 룩셈부르크에서 개최되는 유로존 재무장관회의에서 최종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현재 예상되는 그리스 위기의 시나리오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낙관적 시나리오는 긴축 이행 시한을 2016년까지 2년 연장해 주면서 315억 유로의 구제금융 자금을 조기 집행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 정부가 가장 원하는 시나리오다. 하지만 ‘긴축 시한 2년 연장’은 독일, 네덜란드, 핀란드 등 주요 채권국이 반대하고 있고,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 다른 국가와의 형평성에도 맞지 않아 실현 가능성이 작아보인다. 독일 정치권에서는 그리스에 긴축 시한을 2년 연장해 준다는 것은 약 200억 유로의 추가 재정지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두 번째 시나리오는 현재의 긴축프로그램 아래에서 구제금융 자금을 지원하되, 긴축 시한 연장보다 구제금융 자금의 적용금리 인하,상환시점 연기 등을 통해 그리스 정부의 재정적 부담을 줄여주는 시나리오다. 이는 아일랜드에 대해 적용금리를 인하해 주었던 과거 사례를 비춰봤을 때 채권국들이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카드라 할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페인 사례 때처럼 긴축시한을 1년 연장해 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 번째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그리스 정부가 긴축 이행 약속을 현저히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제금융 지원을 보류하거나 무기한 연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리스는 디폴트 선언과 유로존 탈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다.일각에서는 그리스의 디폴트 선언과 유로존 탈퇴가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S&P는 수개월 내 탈퇴 확률을 30% 이상으로 보고 있으며, 시티그룹은 18개월 내 유로존 탈퇴 확률을 50% 이상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그리스의 디폴트 선언과 유로존 탈퇴 때 그리스경제는 물론 유로존 경제도 1조 유로 이상의 막대한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 국제금융협회(IIF)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때 2400억 유로의 직접손실은 물론 위기 전이에 따른 자본조달 비용 상승과 신용경색 악화로 유로존 전체적으로 약 9000억 유로의 간접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디폴트 선언과 유로존 탈퇴 시간문제란 관측도이는 그리스의 디폴트 선언과 유로존 탈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것과 같아 경제적 파장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유로존 차원에서 그리스 위기가 전이되는 것을 확실히 차단할 수있는 방화벽을 구축하고 있느냐가 그리스의 운명과도 직결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확실한 방화벽이란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유럽안정화기구(ESM)의 자본금 규모를 적어도 1조 유로 이상으로 대폭 확충하는 것을 의미한다.하지만 EFSF·ESM의 자본금을 확충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독일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들이 재정악화로 고심하고 있어 더 이상의 재정적 부담을 원치 않고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ESM에 은행면허를 부여해 유럽중앙은행으로부터 무제한으로 유동성을 공급받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채무의 공동화에 반대하는 회원국들이 많기 때문에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운 아이디어다.따라서 그리스의 디폴트 선언과 유로존 탈퇴가 지닌 파괴력을 감안한다면, 이번에도 트로이카는 그리스를 디폴트 위기로 내몰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를 내치기에는 대응체제가 아직 덜 갖추어져 있어서다. 따라서 세 번째 시나리오는 현실성이 낮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최종 결정이 내려질 10월 초까지는 그리스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시장의 불안요인으로 계속 작용할 전망이다.
2012.09.03 15:15
5분 소요밀착취재: G8 정상회담 막후에서 지켜본 위기 대처 과정의 긴박한 순간들 미 대통령 전용기 맨앞에 위치한 스위트룸은 조용하고 조명이 어두운 공간이다. 대통령이 잠자고, 운동하고, 3만피트(약 9km) 상공에서 자유세계를 이끄는 개인적 성역이다. 독일을 경유해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이 열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8시간의 비행이 시작될 무렵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서재에서 회의실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오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날 밤 워싱턴이 잠든 사이 중동의 또 다른 한구석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레바논 내 무장세력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 순찰대에 치명적인 매복공격을 가하면서 일어난 사태다. 그와 함께 애초 이란 핵과 러시아 민주주의가 주요 의제였던 정상회담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초점을 옮기게 됐다. 기내에서 부시는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 보좌관에게 새로운 상황보고를 계속 요구했다. 해들리는 보좌관실에 틀어박힌 채 상황을 더 잘 파악하려고 전 세계 관리들에게 단축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이스라엘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더 정확히 파악하라”고 부시는 해들리에게 지시했다. 부시는 보좌관들에게 자신이 G8 정상회담 참석차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지난해 이맘때도 런던 지하철에서 자살폭탄 테러공격이 발생했음을 상기시켰다. G8 정상회담이 열릴 때마다 위기가 발생한다는 말은 농담치고는 섬뜩했다. 부시의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됐지만 그가 민주주의 구축을 목표로 그토록 애써 온 중동은 전면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테러와 유혈사태가 잇따르면서 위기는 부시에게 일상사가 됐다. 고국에서라면 바로 곁에 있는 참모들, 그리고 전화만 걸면 연결되는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비공개적으로 사태에 대응해도 되는 여유가 있다. 그러나 이번엔 정반대다. 부시는 완전히 공개된 세계적인 정상회담 와중에 폭력사태에 대응해야 했다. 그런 회담에선 정상들이 서로 카메라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싶어 한다. 그뒤 며칠간 부시는 각국 대통령과 총리들을 만나 9·11 사태 이후 자신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지 보여주었다. 부시는 이 새로운 전쟁은 이 지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초기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선과 악, 문명과 테러리즘, 그리고 자유와 이슬람 파시즘 간의 투쟁 말이다. 아직도 부시는 전쟁과 테러에 관한 한 세계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라크전 이후 그런 지도자 중 다수는 선뜻 부시 편을 들기 힘들다고 느끼게 됐다. 그 때문에 부시는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애써 왔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지난 3년간 부시는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따라서 그로서도 외교적 수사를 더 유창하게 하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여전히 무엇이 올바른지 알려주는 자신의 본능을 믿으며 아직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기 기대한다. 부시에게 외교는 협상을 통해 타협을 도출하는 기술이 아니라,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보다 부드러운 방식일 뿐이다. 특히 이란과 북핵 문제에서 보듯 모든 다른 선택이 고갈되면 더욱 그렇다. 지난주 레바논 사태가 악화되자 여러 우방은 부시가 유엔을 통한 해결보다 특사를 파견하는 방안을 내놓길 바랐다. 절차에 소요되는 시간 낭비를 없애고 평화 도모에 더욱 힘쓰는 방식이다. 그러나 부시의 목표는 휴전 중재가 아니라 헤즈볼라를 무장 해제시키고, 이 테러단체를 지원하는 세력들이 야심을 단념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레바논 사태 발발을 계기로 뉴스위크는 언론사로는 드물게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에게 가까이 접근할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공중이나 지상에서 부시를 겹겹이 에워싼 보안 장벽 뒤에서 그들과 함께 여러 시간을 보냈다. 세계 지도자들과의 회담 중간중간 부시는 기탄없는 인터뷰 네 차례와 수백 장의 가식 없는 사진촬영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특유의 외교 스타일, 간단히 말해 자신이 통제 가능한 1대 1의 만남에선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공식행사와 지도자 간 집단토론에선 인내심을 보여주지 못했다(그런 집단토론에선 부시의 목소리도 여러 참석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부시는 이례적으로 편안한 기분으로 뉴스위크의 인터뷰에 응했다. 집권 2기 최대의 외교적 위기를 맞아 때론 장난기 있고, 때론 심사숙고했으며, 때론 완고하고, 때론 수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7월 14일 금요일:전용기에서 중동정상과 전화 외교 백악관을 떠난 지 이틀 뒤 부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친분을 쌓으며 멧돼지 요리를 즐겼다. 그 사이 부시의 측근들은 위기 대처에 분주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이 지역을 오가며,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지상에선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 공항 활주로를 파괴하고, 베이루트의 헤즈볼라 본부를 초토화했다. 그 보복으로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3대 도시인 하이파에 로켓을 발사했으며 레바논 근해의 이스라엘 군함에도 공격을 가했다. 이제 부시가 나설 때였다. 독일을 거쳐 러시아의 G8 정상회담장으로 향하는 전용기에 다시 탑승한 부시는 해들리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함께 나무 패널로 만든 긴 회의실에 앉았다. 두 측근은 정보 관리와 군 당국에 적군의 향후 행동을 예측하도록 요구하는 등 이번 사태의 추이를 논의해 왔다. 하지만 초기부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과연 부시가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사실 올메르트는 부시의 친한 우방이자 친구다. 그러나 중동의 미묘한 외교에서 직접적 대화는 역효과를 거두기 십상이다. 만일 부시가 올메르트에게 직접 전화한다면 십중팔구 언론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고 싶어 한다. 부시는 폭격 목표를 승인하거나 불허한 듯한 인상을 주기 싫어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선 부시는 아랍 우방 지도자들의 지지 확보에 역점을 뒀다. 도청 안 되는 전화기를 앞에 두고 부시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그리고 푸아드 시니오라 레바논 총리에게 할 말을 예행연습 했다. 부시는 그들에게 자신은 이스라엘 측에 베이루트의 신생 정부를 전복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까지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위험 요소로 간주하는 점도 함께 알려줬다. 예컨대 이란은 이 지역을 장악하려 노력 중이고,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새 정부를 무너뜨릴지 모르며, 시리아는 레바논을 되찾으려 할지 모른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부시의 주요 목표는 헤즈볼라가 문제라는 합의를 그들로부터 이끌어 내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들 모두가 이 극단주의 단체를 지지하는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의 실제 원흉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군사 조직”이라고 부시는 강조했다. 전화외교는 성공적이었다. 전화 연락을 받은 아랍 지도자들은 부시의 말에 동의했다. 정상 간 통화 내용을 함께 듣던 해들리는 부시에게 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고, 라이스도 싱긋 웃었다. 부시는 인명 희생을 안타까워하면서 동시에 이번 위기를 엄청난 기회로 여겼다. 전화외교를 한 지 얼마 뒤 부시는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사태를 불안 조장 세력들이 약점을 탐지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들은 우리의 결의를 여러 방식으로 시험 중이다. ” 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에어포스 원’ 재킷을 착용한 부시는 가죽의자를 뒤로 젖힌 채 앉아 있었다. 부시는 이번 폭력사태가 자신의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무력을 언급하면 세계가 이를 경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나라가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게 하려면 때로는 내가 말로 할 때보다 더 설득력 있는 상황이 지상에서 발생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늘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라크의 경우 지상에서 벌어진 상황은 오랫동안 부시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우방들이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G8 정상회담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먼저 약간의 사교 시간이 주어졌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부부와의 만찬이었다. 부시와 푸틴의 관계는 그간 기복이 심했다가 최근엔 매우 냉랭해졌다. 부시는 앞으로 며칠간 푸틴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사이좋게 지내기를 희망했다. “대개는 어머니로부터 배웠지만 내가 우리 부모에게서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라고 부시는 말했다. 그 말은 부시가 다른 나라 지도자의 ‘개인적 영역’을 침범한다는 뜻도 된다(실제로 그는 러시아에서 아무 예고 없이 메르켈 독일 총리의 어깨를 주물러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푸틴에게 그런 마사지가 통하긴 어렵다. 푸틴이 받는 압박감은 언론의 집중적 관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언론이 그를 취재하러 러시아로 달려왔다”고 부시는 말했다. 푸틴은 반짝이는 갈색 정장 차림으로 자신의 오래된 러시아산 자동차를 자랑하며 부시와 로라 여사를 맞았다. 그러자 부시도 이에 질세라 푸틴에게 자녀들의 안부를 물었다. “아버지에게 딸들에 관해 말하게 하는 일은 언제나 좋은 일”이라고 부시는 나중에 말했다. 부시와 푸틴 부부는 음료수를 든 채 사진촬영을 위해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시는 술 대신 물을 마시면서 아래에 진을 친 기자들에게 소리쳤다. “어디 가서 러시아 보드카나 한잔 하고 좀 쉬도록 하시오. ” 7월 15일 토요일: 푸틴과의 신경전 이튿날 콘스탄티노프스키 궁전의 땅 위에 마련된 부시 진영의 분위기는 훨씬 더 삭막해졌다. 냉전이 끝난 지 한참 지났지만 경호원들은 대통령과 측근들이 항상 감시받는다고 믿었다. 경호팀은 러시아 첩자가 엿듣지 못하도록 백악관 사람들에게 ‘블랙베리’ 단말기와 휴대전화기를 반납하도록 했다. 러시아 측 보안당국은 수영장과 헬스장을 완벽히 갖춘, 판에 박은 양식의 별장에 도청장치가 설치돼 있는지 사전에 조사하지 못하게 했다. 인근의 상공에는 흰색 통신용 풍선이 떠 있다. 부시 측은 그 풍선이 옥외에서 이뤄지는 자신들의 대화를 모두 기록한다고 믿었다. 유일하게 안전한 곳은 장갑에 방음 장치까지 설치된 부시의 리무진이었다(백악관이 러시아로 공수해 왔다). 부시의 보좌관들은 푸틴에 관한 전략을 짤 때마다 드라이브 웨이에 주차된 그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별장의 방 중 한 곳에는 대통령 경호팀이 검은 텐트를 설치해 측근들이 벽이나 가구에 숨겨진 카메라에 전혀 잡히지 않고 비밀문서를 다룰 수 있도록 조치했다. 부시는 양국 정상회담장인 그 별장으로 이동하려 밖에서 푸틴을 기다리는 동안엔 특히 신중했다. 정상회담 주최자인 푸틴은 부시를 골프 카트에 태우고 회담장으로 가기로 했다. 푸틴은 카트를 직접 몰기를 고집했다. 뉴스위크는 푸틴이 사적인 자리에서도 KGB 출신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계속 지었는지, 또 문 닫힌 회담장 안에선 보다 느긋한 태도를 보였는지 물었다. 그러자 부시는 첩보용 풍선을 쳐다보며 똑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험악한 표현은 당신이나 쓰지, 나는 안 써요. ” 푸틴은 흰색 골프 카트를 타고 도착했다. 부시는 카트에 올라탄 뒤 라이스와 해들리에게도 함께 타자고 불렀다. 라이스는 아침 내내 중동으로 전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곤해서인지 카트에 오르면서 운전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푸틴이 고개를 돌려 라이스에게 미소를 짓자 그녀도 운전자가 러시아 대통령임을 깨달았다. 푸틴이 라이스를 포옹하려 몸을 기울이자 라이스는 “아니, 안녕하세요? 대통령 각하”라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과 하루 동안 빡빡한 일정을 앞뒀다. 그러나 보좌관들은 부시와 함께 사전에 논의해야 할 안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회담 전 브리핑에서 보좌진은 폭넓은 사안에 걸쳐 부시에게 논지를 주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세세한 문제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부시는 들을 만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대체 안건 목록이 얼마나 길어야 하나”라고 쏘아붙였다. 적어도 부시로선 의례적인 인사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인사말은 어젯밤 만찬에서 이미 충분히 나눈 터였다. 부시는 “미리 그렇게 해두면 회담장에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가 더 쉽다. 딱딱한 분위기를 깨려 애쓸 필요도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두 정상의 가장 시급한 의제는 중동 위기였다. 러시아가 시리아·이란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아는 부시는 푸틴에게 개입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테러리즘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체첸 반군과의 갈등 탓에 푸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표현이었다. 그후 부시는 “시리아 측에 그들도 이 자들을 통제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키면 큰 도움이 된다. 이는 이란 측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두 정상의 회담은 늦게까지 진행돼 ‘큰 행사’에 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큰 행사란 기자들에게 쓸 거리를 제공하려 의무적으로 갖는 기자회견이다. 전 세계 언론이 기다리는 대규모 기자회견장으로 가기 전 부시와 푸틴은 별장에서 각각 측근들과 상의했다. 보좌관들은 부시에게 예상 질문과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그들은 부시에게 요점을 적은 카드 두 장을 건넸다. 그러나 부시는 평소대로 원고를 무시하고 카드 한 장을 뒤집은 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몇 분 내로 두 정상은 복잡한 복도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푸틴이 메모지 몇 장을 쥐고 있는 것을 보고 부시는 몸을 푸틴 쪽으로 기울이며 농담으로 “정말 거기 적힌대로 말할 거요”라고 물었다. 푸틴은 고개를 들어 부시를 노려보다 이내 농담임을 알아챘다. 부시는 자신의 빨간 넥타이를 추스르며 푸틴의 등을 슬쩍 두드렸다. 푸틴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 회견장에 들어서며 부시가 말했다. “잘해 보시오. ” 부시는 푸틴도 나름대로 농담을 준비한 사실을 몰랐다. 러시아의 민주화 상황에 관한 뻔한 질문이 나오자 푸틴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솔직히 말하지만 우리는 분명 이라크와 똑같은 민주주의는 원치 않습니다. ” 그러자 러시아 기자단에선 파안대소가, 미국 기자단에선 너무 심한 얘기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통역을 통해 그 말뜻을 알아들으려 애쓰던 부시는 무심코 따라웃었지만 이내 웃음을 멈췄다. 부시는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라고 맞받았지만 입가에선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기자들이 기자회견장에서 드러난 긴장의 의미를 분석하느라 바쁜 와중 속에도 회견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두 정상은 보다 즐거운 농담을 나눴다. 부시는 나중 “그는 농담을 잘한다. 그 농담은 꽤 괜찮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과의 회담이 삐끗했다는 언론 분석을 무시하며 “이런 걸 보면 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기사를 써두는 듯하단 말야”라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이 러시아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농담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러시아는 동등한 파트너가 되고싶어 한다. 이번 회담의 목표도 바로 그 점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부시는 강조했다. 푸틴도 부시와 마찬가지로 분위기를 주도하기 좋아한다. 나중 오찬에서 푸틴은 다른 정상까지 끌어들여 또 한 차례 농담을 했다. “앞으로 이틀간 우리의 과제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음식에 관해 불평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지요. ” 그날 저녁이 되자 다른 정상들도 도착했다. 공식적인 정상회담은 호화로운 축하연과 함께 시작됐다. 페테르 대제가 지은 페테르호프 궁전에서의 만찬은 환상적이고 서사시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역사적 위대성, 정치적 권력, 그리고 세속적인 유행을 함께 결합시킨 러시아 특유의 분위기였다. 러시아 측은 캐비아와 러시아 일반인이 즐기는 쇠고기 요리(푸틴이 시라크의 불평을 예상한 것도 이해가 간다) 등으로 구성된 일곱 가지 코스의 식사를 제공했다. 시중은 은발 가발을 착용한 웨이터들이 들었다. 만찬장 밖에선 핑크빛 물방울 무늬가 박힌 녹색 발레복을 입은 곰 한 마리가 묘기를 부렸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만찬장 안에서 희귀 야생 곰 한 마리가 최근 독일에서 날뛰다 사살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갑자기 자신이 아는 영어단어 중 곰(bear)과 관련된 단어를 쏟아냈다. “테디 베어, 우리는 비판을 감내해야 한다. 참기 어렵다(Teddy bear, We must bear criticism. Unbearable).” 고이즈미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 말을 들먹였지만 정상들은 모두 킬킬대며 웃었다. 나중 푸틴은 러시아의 민주주의에 관한 진지한 견해를 나눴다. 부시가 그에게 러시아에서 판사가 어떻게 임용되며 그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푸틴은 “옛 소련 시절엔 그리 독립적이지 못했다”며 “사법부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7월 16일 일요일: 정상들의 대화 중동 사태가 심화되는 동안 카메라가 미치지 않는 정상회담 한 켠에선 분주한 움직임이 있었다. 레바논 국경 너머로 로켓탄과 포탄이 교차하고 있었다. 부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국가안보 보좌관들이 조찬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위기 해결을 모색하는 정상회담 성명서 작성에 착수했다. “시라크와 부시 대통령이 모두 본국에 있었다면 전화통화를 주선하는 데 한나절 기다려야 했을지 모른다”고 조슈아 볼턴 백악관 비서실장은 말했다. “하지만 여기선 의사소통이 즉각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위기가 한창일 때는 그것이 유리하다. ” 앞으로 부시의 측근들은 그 성명을 평화 로드맵으로 고수할 듯하다. 반면 비판자들은 폭력사태의 조기 종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16일의 첫 번째 정상회담 전 부시는 차례로 블레어, 그리고 시라크와 무릎을 맞댔다.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에 압박을 가하면서 헤즈볼라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금세 의견 일치를 보았다. “시라크는 헤즈볼라,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이 중동의 시아파 세력을 이룬다는 인식을 매우 강력히 지지했다”고 부시는 나중에 밝혔다(몇몇 수니파 아랍 지도자는 이란에서 이라크·시리아·레바논에 이르는 ‘시아파 초승달’의 부상에 관해서도 우려했지만 대부분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의 부상 때문이다). 부시는 정상회담이 비공개로 업무를 처리하기가 쉬운 자리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개석상에서 실수할 기회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 정상회담 중 부시 대통령은 하루에 서너 차례 기자회견을 한다. 그는 즉흥발언을 하며 자주 말을 바꾼다. 하지만 중동위기 동안엔 위험한 습관이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철저히 분석되기 때문이다. 부시는 지난 6년간 아랍-이스라엘 갈등에 직접적 개입을 피했다. 따라서 표현의 미세한 차이가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부시는 첫 번째 기자회견에선 시리아와 이란이 헤즈볼라의 후원자라는 말을 깜빡 빠뜨렸다. 백악관은 이미 성명서에서 양국을 언급했다. 이틀 뒤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섰을 때는 아예 이란을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 측엔 레바논 정부를 전복시켜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일도 잊었다. 정책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생각한 기자들은 부시 측에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다음에는 블레어 영국 총리와 함께 기자회견 할 차례였다. 부시의 측근들은 이번에는 말을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부시는 자신의 실수에 화를 내며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데 불만을 드러냈다. 전체 설명문이 190단어에 달했다. “사안을 총체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줬다”고 댄 바틀릿 백악관 고문은 말했다. “한 가지 분석만 제기해서는 안 된다. 모든 측면을 골고루 언급해야 한다. ” 기자들의 질문도 까다로웠겠지만 부시에겐 장시간의 정상회담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 협상은 오래전에 마무리됐고, 이제 남은 일은 공허한 성명서 작성뿐이었다. 다른 정상들은 부시보다 더 잘 견뎌냈다. 오찬을 곁들인 장시간의 회의 뒤 부시는 숙소로 돌아가면서 마치 녹초가 된 듯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섰다. 정상회담의 빡빡한 첫날 일정 중 겨우 절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보통 외국에서 고작해야 하룻밤 이상 보내지 않는 부시에게 4일간의 러시아 여행은 영원과도 같았다. 부시는 오찬회의 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후 주석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이 G8의 정식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 측은 후 주석에게 육상로를 통한 이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푸대접 때문에 후 주석은 어쩔 수 없이 물 위에 뜬 채 가는 수중익선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콘스탄티노프스키 궁전 사이를 가로지르는 핀란드만을 건넜다. 그 수중익선은 고장이 자주 나고 매연까지 내뿜었다. 지난 며칠 사이에만 여러 척이 고장났다. 결과적으로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숙소 밖에서 선 채로 기다려야 했다. 그는 중국 보안요원과 잡담하며 시간을 때웠다. 부시는 그의 영어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영어 공부는 그동안 해왔소?” 잠시 후 보안요원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그 젊은이는 짧은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다.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미국 대통령과의 대화를 중단할까, 아니면 그냥 음성메시지를 남기도록 할까. 요원은 휴대전화를 열고 몇 걸음 떨어졌다. “휴대전화 반칙!” 하고 부시가 소리쳤다. 그의 보좌관들은 긴장된 웃음을 흘렸다. 부시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휴대전화 벨소리다. “이 친구는 규칙을 몰랐으니 한 번 봐주지.” 부시가 말했다. 그날 오후 중동 관련 성명서의 최종 문안이 완성된다는 보고가 지도자들에게 전달됐다. 헤즈볼라에 로켓 공격 중단을 촉구하고 이스라엘에는 무력공세의 종식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약속된 4시가 돼도 문서는 도착하지 않았다. 5시에도 소식이 없었다. 부시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소”하고 방안을 가득 메운 대통령과 총리들에게 말했다. “샤워나 해야겠소. 회의라면 이제 물렸소. ” 일부 정상은 다함께 이견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시는 더 이상 점잖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한심한 발상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고 부시는 나중에 말했다. “초점을 잃고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려 했을 게 분명하다. ” 블레어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해 보겠소”라고 부시에게 장담한 뒤 푸틴과 함께 옆방으로 사라졌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합석했다. 알고 보니 샤워하러 가려는 부시의 발목을 잡은 변수는 마지막 한 가지 흥정이었다.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무리들’을 모두 언급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부시는 이란과 시리아를 명시하려 했지만 그 때문에 합의가 안 되는 일은 원치 않았다. 부시는 뻔한 문제를 두고 그렇게 오랜 시간 왈가왈부한 데 발끈했다. “누가 헤즈볼라를 후원하는지는 모두가 다 안다”고 그는 나중에 말했다. 7월 17일 월요일: 회견없이 귀국길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날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단지 싸늘하고 습한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오찬 석상에서 정상들은 외부 초청인사들과 마주 앉았다. 그중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끼어 있었다. 사실 G8 정상들은 방금 합의에 도달했다. 납치한 이스라엘군 병사들을 되돌려 보내고 로켓 발사를 중단하라고 헤즈볼라 측에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난은 그 이전에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시리아에 압력을 가해 헤즈볼라가 이런 ‘빌어먹을 짓’을 못하게 하면 그만인데 말이오.” 부시가 블레어에게 말했다. 그 발언은 사적인 대화였지만 마이크를 통해 회담장 밖 기자들에게도 새나갔다. 라이스가 한 달 전 모스크바를 방문해 라브로프와 날카로운 설전을 벌일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라이스는 “우리가 러시아에 갈 때마다 대화가 새나간다”고 말했다. 부시는 오찬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공항으로 달려갔다. 다른 정상들이 으레 하는 기자회견도 외면했다. 러시아의 정상회담 공식 웹사이트엔 ‘미국 대통령, G8 정상회담 뒤 언론을 기피하다’란 제목이 올랐다. 대통령 전용기에서 샤워하고 휴식을 취한 부시가 회의실에 앉았다. 분명 귀국길에 오르게 돼 들뜬 표정이었다. 앞에는 큰 그릇 가득 팝콘이 놓였고, 부시는 계속 한움큼씩 입에 집어넣었다. 가끔씩 다이어트 코크를 마실 때만 손길을 멈췄다. 부시는 러시아에서 보낸 시간을 곰곰이 돌이켰다. 그러곤 정상회담과 이번 위기에 대한 자신의 대응 방식에 만족한 듯했다. 통상문제에서 약간의 진전이 있었고, 북한과 이란 핵문제를 둘러싸고 확실한 합의를 보았으며, 중동 문제에서도 강력한 성명 발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레바논 사태가 악화하면서 부시의 우방과 비판론자들은 그의 외교적 해결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정말 유엔을 인정할까, 아니면 완만한 외교 절차를 이용해 이스라엘군에 헤즈볼라를 소탕할 시간을 벌어주려는 속셈일까. 이스라엘의 공습이 한 주 더 지속돼도 온건한 아랍 국가들이 여전히 지지할까. 정작 부시는 많은 세상 사람이 오랫동안 자신에게 요구한 연합의 구축을 이행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게 바로 친구·우방과 함께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외교 정책”이라고 부시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문제가 발생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 부시는 그런 외교적 수사를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2006.08.01 10:35
15분 소요Fiddling While the Union Burns 유럽연합(EU)이 새로운 예산안 협상에 성공할까? 토니 블레어는 영국의 EU 예산 분담금 환급을 포기하고 자크 시라크는 프랑스의 농업 보조금을 줄일까? 자랑스러운 유럽헌법은 죽었을까? 지난주 EU 본부에서 열린 유럽 정상회의에서 그 대답은 ‘아니다, 아니다, 글쎄’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유럽 정상들 앞에 놓인 진짜 문제는 유럽의 미래였다. 그리고 예산을 둘러싼 그들의 논쟁은 유럽 지도자들이 아직 문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유권자들은 유럽헌법 자체가 아닌 EU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깊은 회의 때문에 새로운 헌법을 거부했다. 특히 그들은 유럽인에게 익숙해진 경제 번영과 사회보장제도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 했다. 유럽 지도자들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유럽이 불타는 동안에도 정치인들은 두 손 놓고 논다는 유럽인의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최근 지수들을 살펴보자. 지난해 겨우 2%를 달성한 유로 존의 성장률은 유럽중앙은행이 이자율 인하를 고려할 정도로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는 EU 경제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본격적으로 불경기가 시작됐다. 프랑스에서는 청년의 22%가 실업자고 실업사무소를 방문하는 일은 새로운 통과의식이 됐다. 유럽 전체에서 실업률은 9%에 육박하며 계속 증가한다. 브뤼셀에 있는 신유럽센터의 팀 에번스 소장은 “유럽의 상황에 대한 오랜 부정, 무지, 잘못된 경제 운영 등의 여파가 이제 나타나고 있다. 지금은 유럽에 매우 중요한 시기다. 지도자들은 진짜 다뤄야 할 문제들은 무시하고 사소한 데 집착한다”고 말했다. 실제 문제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유럽이 자랑하는 사회 모델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6월 초 한 정치 모임에서 프랑스 대통령 후보 니콜라 사르코지의 고위 보좌관 파트릭 데베드지안은 프랑스 사회는 “모범이 되지 못한다. 본받고자 하는 이가 없다. 사회주의적이지도 않다. 기록적인 실업률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은 유연하고 경쟁력 있는 경제를 만들고 그 가치를 유권자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것은 경제학자들이 오랫동안 정치가들에게 해온 조언으로 집약된다. 즉 일자리를 만들려면 고용·해고에 드는 비용을 깎고, 원천징수 세금과 정부 지출을 줄이며, 재화·용역 시장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물론 문제는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강력한 로비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원인을 EU 관리들의 무능력이나 중국의 재봉사 탓으로 돌리는 쪽이 유럽 지도자들을 훨씬 편하게 해준다. 브뤼셀에 있는 개혁 추진 단체 리스본 협의회의 앤 메틀러 회장은 “분별 있는 목소리는 사라지고 토론 세력은 국민의 분노를 이용한다”고 말했다. 폴란드 배관공들이 몰려와 일자리를 빼앗아 갈까 두려워하던 일을 기억하는가? 프랑스로 온 폴란드 배관공은 겨우 150명뿐이다. 그러나 프랑스 배관공 연합은 아직도 6000명의 배관공 자리가 비어 있다고 보고했다. 이데올로기와 (실직·이민, 혹은 변화 그 자체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합쳐지면서 유럽의 의미 있는 개혁을 둘러싼 토론은 거의 막을 내렸다. 사실 요즘 새로운 생각을 가장 빠르게 봉쇄하려면 그것이 유럽의 사회 모델에 어떤 위협이 되는지 상기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위협의 형태는 독일·프랑스·영국·덴마크에서 각각 다르다. 종종 그것은 단순히 ‘미국적인 것의 반대’를 의미한다. 어떤 경우든지 남의 탓으로 돌린다는 의미다.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힘써 온 호세 마누엘 바로소 EU 집행위원장은 최근 서비스 부문 강화 계획이 지연된 이유는 유럽 사회 모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했다. 많은 연금, 보건과 교육 혜택 등을 갖춘 유럽의 현대 복지국가는 유럽이 전후 30년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독일의 ‘경제기적’과 프랑스의 ‘영광의 30년’ 시기에 탄생했다.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고 노동 인구가 은퇴자보다 훨씬 많았던 시절에는 복지국가가 잘 굴러갔다. 오늘날 시대는 변했지만 기대치는 변하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수석 경제학자 장 필립 코티는 “복지국가를 해체하려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어떻게 경제성 있게 만드느냐다”라고 말했다. 유럽 지도자들은 저항하지만 학자와 하위 정책 입안가들은 불가피한 일들을 수용하면서 대안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코티스는 유럽인이 오랫동안 결합시켜온 고용 안정과 복지 사이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한 예로 최근 파리에서 인기를 끄는 덴마크의 ‘유연 안정’ 모델이 있다. 그것에 따르면 우선 고용 안정과 일자리 안정을 구분해야 한다. 고용과 해고는 쉽게 이뤄지도록 해주는 대신 개인이 일자리를 잃었을 경우에는 국가가 그들을 재교육해 가능한 한 빨리 노동시장에 복귀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비용도 많이 들고 그 많은 사람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실력 있고 효율적인 공무원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덴마크의 제도는 노·사·정 협상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결과가 좋다. 덴마크 실업률은 10%에서 4.9%로 줄어 이제 프랑스의 절반 수준이다. 중국 섬유 수입 증가는 유럽 지도자들이 회의적인 국민에게 변화가 반드시 역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줄 만한 완벽한 기회다. 한 통계에 따르면 옷값이 5% 떨어지면 프랑스 소비자들이 15억유로를 저축하게 되면서도 위태로워질 일자리는 7000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럽은 새로운 무역 장벽을 구축하겠다고 위협했고, 중국이 자발적으로 수출을 규제하도록 설득했다. 세계화를 찬양하는 에비앙 그룹의 설립자인 정치학자 장-피에르 레만은 “중국 섬유와 리스본 어젠다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라고 물었다. 보다 현명한 전략은 유럽인에게 중국 섬유 등을 수입하면 많은 돈이 절약된다고 설득한 다음 핀란드가 섬유 제조에서 섬유기계 제조로 업종을 바꾼 뒤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졌는지 알려주는 쪽인지도 모른다. 독일·이탈리아·프랑스에서의 투표는 유럽인이 필요로 하는 솔직한 대화와 분명한 행동을 방해한다. 100일 안에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약속한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신임 총리는 국가가 지원하는 대규모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다. 구조적 경제 개혁은? 파리에 있는 과학 연구 국가센터의 엘리 코헨은 2007년 전까지는 “꿈도 꾸지 마라”고 말했다. 올 봄 독일 실업률이 12.6%까지 치솟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고용 보조금을 늘렸고 그가 이끄는 사회민주당(SPD)은 국가 실업수당 삭감 계획을 2년 연기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9월 앙겔라 메르켈 기독교민주연합당(CDU) 당수가 슈뢰더를 몰아낸다면 독일에서 희소식이 들릴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좌우파 차이가 거의 불분명했지만 동독 출신의 메르켈은 과거 독일의 어느 보수 지도자들보다 개혁과 시장 경제를 지지한다. 그녀는 세금 인하, 노조의 임금 동결 저지, 노동법 완화, 관료 절차 간소화 등을 약속했다. 알리안츠의 수석 경제학자 마이클 헤이스는 그녀가 상·하원 모두를 장악할 확률이 높아짐에 따라 앞으로 어떤 조치가 왜 취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진실을 국민에게 털어놓으면서 그런 공약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독일 기업들의 경쟁력이 올라가면 다른 유럽 국가들도 뒤를 따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탈리아가 직면한 새로운 문제들은 개혁을 무시하면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탈리아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그동안 경제도 축소되고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몫이 줄었음에도 정부 부채가 EU가 정한 상한선인 국내총생산(GDP)의 3%를 습관적으로 넘어서도록 허용했다. 이자율 인하와 평가절하만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되자 일부 정치인은 국가 간 성장률 차이가 점점 더 벌어져 유럽의 화폐 통합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면서 이탈리아가 다시 리라화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화폐 통합이 무너질 확률은 낮다. 스코틀랜드에 있는 로열은행의 전략 신용조사 담당 킷 적스는 “화폐 통합의 제1 원칙은 합의점을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승강이를 벌이지만 유럽 지도자들은 분명 곧 합의점을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더욱 큰 문제는 EU를 바로 세우는 어려운 발걸음을 떼놓는 데 언제 합의하느냐다. 정민숙 proms@joongang.co.kr
2005.06.24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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