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본받아 사법제도 대대적 개혁
![]() ![]() 보빙사 미국 파견 직전 일본에서 촬영한 사진(앞줄 오른쪽 둘째 앨범을 들고 있는 인물이 서광범). |
서광범은 1859년 이조참판 서상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서용보가 순조 때 영의정에 오르는 등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쳐 당상관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서광범은 어려서부터 태서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박규수의 사랑에 드나들며 김옥균, 유기준 등 개화파 청년들과 어울렸다.
1880년 22세에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5년에 걸친 관직생활을 통해 서광범은 풍부한 해외 경험을 쌓았다. 1882년 김옥균을 수행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차관 교섭 협상을 벌였다. 임오군란 발발 후 일시 귀국했다가 군란이 종식된 후에는 일본 정부에 ‘사죄’하기 위해 파견된 수신사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또다시 일본에 파견되었다.
서광범이 귀국한 것은 1883년 3월이었고, 보빙사 민영익의 종사관에 임명돼 미국 파견이 결정된 것은 그해 6월이었다. 서광범은 민영익을 수행해 워싱턴에서 외교 활동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미국 군함 트렌턴(Trenton)호를 타고 유럽 일주 여행을 마친 후 이듬해 6월 귀국했다.
한 살 어린 민영익을 1년 가까이 수행하면서 서광범은 그의 정치적 견해에 심한 불만을 품었다.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해군무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트렌턴호에 동승한 포크(George C. Foulk)는 6개월간의 항해 기간 동안 민영익은 늘 유교 경전만 끼고 다니며 읽었지만, 서광범은 세계 각국의 정치와 문화에 대해 캐물었다고 기록했다.
귀국한 지 6개월 후 서광범은 갑신정변에 가담해 좌우영사(수도동서경비사령관) 겸 대리 외무독판(외교부 장관)에 올랐다. 단 사흘뿐이긴 하나 25세에 이미 장관 자리에 올랐던 셈이었다.
고단한 미국 망명생활
서광범의 일본 망명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일본 정부는 정변을 부추기고 암암리에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변 실패 후 조선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9인의 ‘갑신망명객’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서광범은 신분을 감추고 숨어 지냈지만, 늘 암살 위협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결국 서광범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일본 망명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885년 5월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미국으로 재차 망명했다. 서광범과 박영효가 글씨를 써서 일본인 집을 찾아다니며 팔고, 서재필이 조선 선교를 준비하던 미국인 선교사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여비 90원을 마련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광범 일행은 빈민가에 숙소를 얻었다. 일본에서 마련한 여비는 이미 바닥나 사실상 무일푼이었다. 영어도 모르고, 직업도 없고, 도움을 받을 친구도 없었다. 처음에는 버클리대학에서 공부할 계획도 있었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언감생심이었다.
세 사람은 함께 굶어 죽느니 헤어져 각자도생하기로 결정했다. 서광범은 서재필의 13촌 아저씨뻘이었지만 두 사람은 성격과 취향이 너무 달랐다. 서재필은 성격이 날카롭고 이기적이며 조선을 경멸했음에 반해 서광범은 다정다감하고 너그럽고 자신에게 30번 이상 척살 명령을 내린 조선을 여전히 사랑했다.
서광범은 요코하마에서 알게 된 언더우드 목사의 소개로 뉴욕에 살고 있는 그의 형에게 구원을 청했고, 여비가 오자 뉴욕으로 떠났다. 서재필은 샌프란시스코에 남아 막노동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철종의 부마 박영효는 한동안 서재필에게 얹혀살다가 “미국인은 양반을 몰라본다.
양반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노동을 할 수는 없다. 일본은 내가 양반인 것을 알아주므로 설마 천한 일을 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며 다섯 달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서광범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뉴저지 럿거스(Rutgers)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성격이 소극적이고 비사교적이어서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고, 생활 형편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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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광범은 미국 망명 4년 만인 1889년 5월 ‘범광서’(Bom Kwang Soh)란 이름으로 미국시민권을 신청했다.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던 서재필은 그보다 한 해 앞서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한 상태였다.
성과 이름 순서뿐만 아니라, 이름 자체의 순서까지 뒤바꿔놓은 이유는 미국의 중간이름(middle name) 자리에 돌림자를 넣은 때문이었다. 서광범은 그로부터 3년 후 미국시민권을 발급받았다.
“범광서는 엄숙한 선서에서 미국 헌법을 준수하고, 어떠한 외국의 군주, 주권자, 국가 그리고 어떠한 주권국, 특히 그가 지금까지 신민으로 섬겨왔던 조선 국왕에 대한 모든 충성을 완전히 포기·철회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범광서는 지금부터 미국시민이 되었음을 인정한다.”(‘범광서 귀화기록’ 1892. 11. 18)
서광범이 미국시민권을 신청한 이유는 단 하나, 지긋지긋한 막노동을 그만두고 좀 더 좋은 생계수단을 얻기 위해서였다. 기대대로 서광범은 시민권 획득 직후 미국 교육국 인종과에 번역관으로 취직했다. 한문 자료를 영어로 번역하는 역할이었다. 사흘이나마 조선 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 미국 정부 말단공무원이 된 셈이었다.
교육국에서 근무한 2년이 10년 동안의 미국 망명생활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은 유일한 시기였다. 하지만 1894년 교육국 인사개편 과정에서 해고된 이후, 월급 30달러의 사환(messenger)으로 돌아갔다. 당시 주미 조선공사관의 경비원 월급이 45달러였다. 서광범은 미국에 망명한 이후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의 신자가 되었다.
신지학회는 모든 종교의 융합과 통합을 목표로 설립된 신비주의 종교단체였다. 서광범은 사환을 그만두고, 신지학회 관리인으로 취직해 도서관에 딸린 작고 누추한 방에 기거했다. 영양실조와 불결한 환경 탓에 서광범은 폐결핵에 걸렸다.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그대로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잇따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 정부의 주도권은 청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10년에 걸친 청국의 내정간섭으로 조선 정부 내에 친일 세력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 미국에 흩어져 있는 갑신정변 주도 세력을 불러모으기로 결정하고, 조선 정부에 갑신정변 관련자에게 사면령을 내릴 것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서광범과 서재필도 사면되었고, 귀국을 종용 받았다. 서재필은 이미 미국에 귀화했고, 미국 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귀국을 거부했지만, 서광범은 귀국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에겐 귀국 여비조차 없었기 때문에 주미 일본공사관이 여비를 제공했다. 일본 정부는 서광범이 입각한 후 여비를 돌려받았다.
10년 동안의 힘겨운 망명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금의환향하는 서광범의 성공담을 미국 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귀국 후 서광범은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 묄렌도르프, 데니 등 외국인이 조선 정부의 차관급에 임용된 예는 적지 않았지만, 장관에 임용된 것은 서광범이 유일했다.
서광범은 미국시민권을 받으면서 더 이상 조선 국왕을 섬기지 않겠다고 서약했지만, 귀국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뗐다. 서광범은 미국 사법제도를 본받아 대대적인 사법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살인을 제외한 모든 범죄에서 사형을 금지하고, 참수와 능지처참을 교수형으로 대체했다. 서광범은 고등재판소를 신설해 고등재판소장을 겸직했다. 법무부 장관과 대법원장을 겸직한 막강한 권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법부대신으로 화려한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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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2월 서광범은 주미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돼 이듬해 2월 워싱턴으로 떠났다. 미국인이 미국 주재 외국공사로 임명돼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을미개혁으로 단발령이 시행됨에 따라 서광범은 최초로 양복에 단발 차림으로 미국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조선공사로 기록되었다. 서광범이 워싱턴에 도착하기 직전 아관파천이 발발했다. 조선 정부의 주도권은 서광범이 포함된 친일파에서 친러파로 넘어갔다.
서광범은 미국공사로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친러파 이범진으로 대체되었다. 서광범은 중추원 일등의관에 임명되었지만,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눌러앉았다. 미국 시민권자였기에 조선으로 귀국하지 않는다고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서광범은 워싱턴에 저택을 구입하고 미국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이듬해 지병인 폐결핵이 재발해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신지학회의 의식에 따라 진행된 장례식에는 신지학회 신도들과 전권공사 시절 그의 도움을 받았던 미국 유학생이 다수 참석했다. 그의 관은 성조기로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조선 관복이 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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