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산업 ‘TAKE OFF’ ] T-50(초음속 고등훈련기) 항공 강국의 꿈 깨웠다
[항공산업 ‘TAKE OFF’ ] T-50(초음속 고등훈련기) 항공 강국의 꿈 깨웠다
한국 항공산업 역사에서 1990년대는 뼈아픈 시기로 기억된다. 1980년대 초 ‘F-5(제공호)’를 조립 생산하며 항공 강국의 꿈을 키웠던 우리나라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중형 항공기와 전투기 개발을 추진했다. 외국에 돈을 주고 라이선스를 얻어 조립 생산하는 ‘면허생산’ 단계를 넘어 독자적인 기술을 확보해 우리가 만든 비행기를 갖겠다는 꿈이었다.
꿈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1990년대 중반 F-5 생산이 종료되면서 생산 공백이 발생했다. 후속 프로젝트가 없었던 탓이다. 장기간 연구개발과 지속성이 필수인 항공산업에서 이 공백은 치명타였다. 한국 항공산업은 ‘TAKE OFF(이륙)’에 실패했다. 자동차와 반도체, 조선, IT(정보기술) 산업이 선진국을 맹렬히 쫓을 때 항공산업은 엔진을 꺼놨다. 선진국과 격차는 더 벌어져 갔다.
항공산업 세계시장 점유율 0.5% 불과세계 항공산업 규모는 약 4000억 달러(항공운송 서비스 제외). 시장은 북미지역과 유럽이 양분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프랑스, 영국, 독일, 캐나다가 뒤를 잇는다. 매출액 기준으로 상위 10개 나라가 시장의 92%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의 항공산업 생산 규모는 20억 달러. 세계시장 점유율은 0.5%에 그친다. 국내시장 규모는 2조4000억원으로 자동차의 60분의 1, 조선산업의 20분의 1 수준이다.
기업별로 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보잉과 EADS(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 록히드마틴 3개 기업이 세계시장의 40%를 장악한다. 상위 10대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5%. 우리나라 유일의 완제기 회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매출액 기준 세계 63위다. 10년 전보다 열다섯 계단 내려간 수치다. KAI가 못했다기보다는 다른 나라 기업이 훨씬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은 중형 항공기 제작사인 캐나다의 봄바디어와 브라질의 엥브라에르다. 두 회사는 100석 안팎의 중형 비행기 시장을 양분하는 강자다. 봄바디어의 지난해 매출은 94억 달러, 엥브라에르는 54억 달러다. 항공 분야 종사자들은 이 두 회사를 보며 한숨을 내쉬곤 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1990년 대 중반 우리가 중형 항공기 개발을 밀고 나갔어도 지금쯤 엥브라에르 지위까지 올라갔을지 모른다”며 “당시 엥브라에르와 봄바디어는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브라질 엥브라에르는 1969년 세워진 회사지만 실적 부진으로 1994년 말 민영화됐다. 이후에도 적자가 지속됐지만 1998년 중형기인 ‘ERJ-145’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중형기 시장 강자로 떠올랐다. 2000년 초 8000여 명이던 직원은 2008년 2만5000여 명으로 늘었다. 엥브라에르는 브라질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미국 및 스페인 항공사의 프로그램 파트너로 참여해 기술력을 키웠다.
반면 우리나라는 뼈아픈 실책이 있었다. 1993년 정부는 ‘신경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중형 항공기 개발에 나섰다. 중형 항공기 개발로 한국 항공산업을 세계 10위권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로 추진된 국책사업이었다. 파트너는 중국이었다. 당시 양국은 12억 달러를 투자해 공동개발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잦은 계획 변경, 중국과의 지분 문제, 내부의 주도권 다툼 등으로 지지부진하다 1996년 무산됐다. 이후 네덜란드, 이스라엘, 브라질, 캐나다 등을 새 파트너로 삼기 위해 접촉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결국 정부는 1999년 “사업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투자비 수백억원만 날린 채 중형 항공기 개발을 전면 중단했다. 당시 중형 항공기 개발 사업에 참여했던 한 대학 교수는 “한·중 간 정치적 문제가 개입되지 않고 한국 주도로 타깃을 명확히 해 개발에 성공했더라면 우리 항공산업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정부 역시 지난해 ‘2010~2019 항공산업 발전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국내 항공산업의 실기를 최대한 빨리 만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당시 정부와 항공업계는 중형 민항기 개발과 별개로 고등훈련기·경공격기 개발을 추진했다. 현재 우리 공군의 주력 전투기인 KF-15 도입을 추진하면서 기술이전을 받고, 한편에서는 선진국과의 협력을 통해 고등훈련기·경공격기를 공동 개발한다는 구상이었다. 지난 5월 인도네시아에 첫 수출된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은 그렇게 탄생했다.
‘중형 민항기 개발’ 뼈아픈 실책반대는 극심했다. 공군과 학계·일부 국책연구기관은 “훈련기를 직구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논리를 폈다. 2억 달러 넘게 투자해 얻는 효과보다 비행기를 해외에서 수입하는 게 경제적 이익이라는 주장이었다. 포항에 제철소를 지을 때, 자동차·반도체 투자를 시작했을 때 제기됐던 반대 논리와 다를 게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추진된 고등훈련기 개발 사업(당시 프로젝트명은 KTX-2)은 시작부터 삐걱댔다. ‘훈련기인가, 공격기인가’ ‘초음속인가 아닌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결국 경공격기로 개조 가능한 초음속 고등훈련기로 기종이 결정됐다. T-50의 개발 과정을 담은 『T-50의 꿈과 도전』에 따르면 당시 연구진은 “향후 초음속 항공기의 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느냐 여부가 우리나라 항공산업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수 있는가를 가르는 핵심요소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한 초음속 훈련기·경공격기의 수요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결과적으로 예상은 적중했다. 올 5월 26일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T-50 16대를 공급하는 본계약을 맺었다. 수출액 4억 달러, 자동차 1만6000대를 수출한 금액과 맞먹는다. 정부는 6억5000만 달러의 생산유발 효과, 7700여 명의 신규 고용창출 효과가 있다고 발표했다. 수출액 4억 달러 중 38%는 중소협력업체가 담당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T-50은 현재 UAE(아랍에미리트), 폴란드, 이스라엘, 미국에 수출을 추진 중이다. 관련업계에서는 향후 20년간 고등훈련기 수요가 1000여 대 정도 될 것으로 예측한다. 특히 미국시장에 대한 기대가 크다. 미 공군의 고등훈련기 교체 수요는 350여 대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군수시장 1위인 미국 록히드마틴과 공동 마케팅을 펼치는 KAI가 미국 수출에 성공할 경우 인도네시아에 납품한 가격(대당 250억원)으로 따지면 9조원어치 정도를 수출하는 셈이다. 9조원은 자동차(쏘나타 수출가 2000만원 기준) 45만 대를 파는 돈이다.
물론 T-50이 갖는 의미가 단순히 몇 대를 수출하느냐에 있는 것은 아니다. T-50을 생산하는 KAI의 김홍경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T-50 수출은 한국 항공산업의 이륙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T-50 수출은 초음속 항공기를 세계에서 여섯째로 수출한 항공 선진국으로의 성장을 의미한다”며 “자체 설계부터 생산, 시험평가에 이르기까지 항공기 종합 기술력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항공산업은 첨단기술의 총화T-50 1대에는 부품 30만 개가 들어간다. 현재 국산화율은 60% 정도다. 부품은 완제기 생산 없이는 발전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 역사를 돌이켜보면 분명해진다. 더욱이 항공기는 광범위한 고도기술의 집합체이자 다른 산업의 기술 수준을 견인하는 기술선도형 산업이다.
항공산업은 늦었지만 우리가 한번 베팅해 볼 만한 시장이다. 항공산업은 ‘국가 기술 역량의 총화’라고 일컫는다. 항공기는 무선통신, 전자제어, 인공센서, 경량소재 등 첨단기술이 항공기술과 융합돼 만들어진 작품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강점인 IT(정보기술), 반도체, 자동차, 기계 기반 기술이 접목된다면 항공산업의 발전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KT-1(기본훈련기)·T-50 등 완제기 개발에 성공하면서 상당한 기술을 확보했고 국내 항공업체들이 국제공동개발사업에 RSP(위험분담파트너) 참여를 늘려가면서 부품 경쟁력도 개선됐다. KAI, 대한항공, 삼성테크윈 등은 에어버스A350, 보잉B787, GE의 차세대 항공엔진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항공산업은 제품 개발 기간이 길고 진입장벽이 높지만 일단 진입에만 성공하면 장기간 안정적으로 ‘순항’할 수 있다. 또한 생산유발 효과가 크고 부가가치가 높은 대표적 산업이다. 다른 산업과의 연관성도 크다. 가령 드럼세탁기에 쓰이는 무소음 엔진은 개조해 무인 비행기에 활용할 수 있다. 스마트무인기의 경우 첨단·미래·항공 기술이 모두 포함된 프로그램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산·학·연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항공통신장비는 IT산업과, 항공용 전지는 2차전지와, 여객기 공조 시스템은 자동차산업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항공업계는 “지금은 항공산업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시기”라며 “후발국인 우리나라로서는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호기”라고 말한다. 국가별로 전문 영역이 특화되면서 선진국과 후발국 간 주력시장이 차별화되고 있다는 것이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이다. 전문가들은 “후발국이 진입 가능한 훈련기, 경공격기, 중소형 민항기, 무인기, 민간용 헬기 등 틈새시장을 공략하면 항공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이 좋은 예다. 2000년 초 60억 위안을 투자해 90석 규모의 중형 항공기 생산에 성공한 중국은 최근 2016년 150~170석 규모의 민항기 C919 양산에 들어간다고 발표하면서 보잉과 에어버스를 긴장시키고 있다.
많은 항공 전문가는 우리나라가 해외 파트너와 협력을 통해 중급 기종(중형 민항기, 고등훈련기, 고도 무인기, 중형 헬기)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설계, 생산, 시험평가 등 항공기 제작의 핵심 과정과 관련된 기술력은 선진국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완제기 개발을 주도해 온 KAI의 경우 록히드마틴 항공전문팀으로부터 10점 만점에 8.8점을 받았다.
항공산업 글로벌7 도약발진김홍경 대표는 “전투기 개발 시 공동개발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T-50 개발을 통해 축적된 기술이 바탕이 된 것이다. KAI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T-50 개발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구매하는 정책을 택했다면 현재의 기술력을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홍경 대표는 “정부는 T-50 개발 종료 후 기술획득심의회를 통해 KAI가 초음속 항공기 개발에 필요한 650개 핵심 요소기술 대부분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했다”고 말했다.
한국 항공산업은 다시 이륙하는 중이다. 정부는 지난해 ‘2020년 항공산업 글로벌7 도약’을 목표로 발전 청사진을 내놨다. 현재 20억 달러 수준인 생산 규모를 2020년 200억 달러로 끌어올리고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정부 계획을 보면, 초급~고급 기종의 완제기 개발과 핵심 부품 기반 마련, 정비 서비스 산업화, 항공 핵심기술 확보, 선진국 수준의 항공 인프라 구축 등이 망라돼 있다. 이미 무인기, 중형기, 차세대 헬기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다.
앞으로 10년은 우리나라가 항공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기다. 무엇보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진·후발국을 막론하고 항공산업은 정부의 육성 의지와 정책 일관성이 성패를 갈랐다.
항공금융 지원 확대, R&D(연구개발) 지원, 민간의 투자 유도, 항공 인프라 구축, 인력 양성, 국제 경제협력 확대 등 할 일이 많다. 예전처럼 또 ‘실기’하면 한국 항공산업은 기회를 영영 잃고 다시는 이륙하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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