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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DIRECTOR] 그들의 몸짓에 세계 패션계가 술렁인다

[POWER DIRECTOR] 그들의 몸짓에 세계 패션계가 술렁인다


이너가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보는가. 뒤떨어진 생각이다. 과거의 디자이너는 무대 뒤에서 가위와 바늘을 들고 옷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요즘은 옷뿐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와 환경까지 조정하는 파워맨이다. 명품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은 명사들과 파티에서 어울리고, 예술가들과 교류한다. 그들의 작은 손짓 발짓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기도 한다.

지난 17년간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천재 디자이너’로 추앙 받던 존 갈리아노가 퇴출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인 ‘존 갈리아노’에서도 나와야 했다. 갈리아노는 파리에 있는 라 펠레 바에서 유태인을 모독하고, 히틀러를 존경한다는 발언을 했다. 당시 그는 만취 상태였지만 그 모습을 찍은 동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갔다.

갈리아노는 이후 두 차례 재판에서 집행유예 5년, 6000유로(약 9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공판에 참석한 증인은 그가 최소 1000번 이상 ‘더러운 유태인 얼굴’이라는 말과 함께 45분 동안 눈썹과 싸구려 부츠에 대해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날짜, 다른 장소에서 갈리아노를 목격한 증인은 그가 ‘못생긴 유태인’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폭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크리스찬 디올 향수 모델이었던 나탈리 포트만은 공식적으로 그를 비난하며 존 갈리아노가 만든 의상을 다시는 입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 또한 “화가 난다. 패션에 대한 추악한 이미지가 전 세계로 퍼져버렸다. 자신을 발굴하고 지원해준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내가 정말 좋아하는 브랜드인 크리스챤 디올에 누를 끼친 것이 정말 화가 난다”고 성토했다.

존 갈리아노는 첫 번째 공판에서 “아무것도 기억 나지 않는다”며 “패션계에서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고 수면제· 알코올·신경 안정제 중독에 빠져 있었으며, 2달은 요양원에서 보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최고의 모델인 케이트 모스, 헬레나 크리스텐센, 나오미 캠벨, 린다 에반젤리스트가 초창기 쇼에 무료로 출연하고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재정적 지원을 할 후원자를 직접 찾아줄 정도로 천재성이 빛났던 한 디자이너는 이렇게 패션계를 쓸쓸히 떠났다.

이 뉴스가 꽤 오랫동안 회자된 것은 후임자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사라 버튼이 언급됐다. 그녀는 존 갈리아노와 천재로 추앙 받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이 우울증으로 자살한 후,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이어받은 인물이다. 이 소문이 잠잠해지자 현재 루이비통을 맡고 있는 마크 제이콥스가 디올로 갈 수도 있다는 말이 퍼졌다. 그리고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는 현재 셀린을 맡고 있는 포비 필로가 낙점돼 있다는 꽤 구체적인 소문도 꼬리를 이었다. 한동안 이는 패션계의 빅 이슈였다. 결국 지난 23년간 디올에서 일했던 빌 게이튼이 오트 쿠튀르와 프레타 포르테, 그리고 존 갈리아노 컬렉션까지 모두 맡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하지만 빌 게이튼의 자리는 불안해 보인다. LVMH의 아르노 회장이 영 탐탁해하지 않는다는 소문 때문이다.

또 하나 패션계의 빅 이슈는 발맹의 수석 디자이너인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의 사임이다. 사실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이 오기 전, 발맹은 과거의 영광을 먹고 사는 오래된 브랜드에 불과했다. 여러 명의 수석 디자이너들이 거쳐갔지만 결과는 사업 부진으로 인한 파산 신청이었다. 이는 불과 2004년의 일이다.

하지만 2005년 파코라반 출신의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데카르넹이 발맹에 오자 분위기는 바뀌었다. 새롭게 해석한 록 시크 풍의 발맹 컬렉션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매출은 50% 성장했고, 1000 만원에 달하는 재킷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이렇듯 신드롬에 가까운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은 2011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앞두고 돌연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사임에 패션계는 술렁였다. 극도의 스트레스, 우울증, 신경쇠약 등 온갖 설이 난무했다. 발맹 회장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충격을 뒤로한 채 크리스토프 데카르넹 밑에서 일하던 올리비에 루스테잉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제 겨우 26세. 그는 깊은 우려를 씻고 꽤 성공적인 첫 컬렉션을 마쳤다.

이렇듯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움직임은 언제나 패션계의 빅 이슈다. 브랜드의 흥망성쇠가 이들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새로운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어떤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인지 주목한다.

심지어 그가 어렸을 때 재미있게 본 영화, 지난 주말에 집에서 혼자 빈둥거리며 한 일,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먹는 음식, 그의 아이팟에 담긴 음악과 영상 리스트까지 주도 면밀하게 파헤친다. 하지만 그 관심이 친절한 것만은 아니다. 마치 연예인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비난 하듯, 대중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취향과 그 결과물에 언제라도 돌을 던질 준비가 돼 있다.

20대 초반에 디올을 맡으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이브 생 로랑 역시 이런 함정에 빠졌다. 디올의 새로운 수장이 됐을 때 그는 디올 하우스의 발코니에서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가 실망스러운 컬렉션을 선보였을 때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디올 하우스는 입영 통지서가 나온 이브 생 로랑을 가차없이 해고했다. 훗날 이브 생 로랑은 우울증, 신경쇠약과 약물중독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고백했다.

오늘날 거의 모든 패션 브랜드가 거대 럭셔리 그룹에 편입되며, 매해 실적 증대를 기대한다. CEO들이 경영 수치를 들이미는 통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화려한 패션계의 조류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들며 전 세계 패션계를 주무른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창조자들이다.



■ 세계의 파워 디렉터■




Gucci 그룹 디렉터




구찌
1994년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로 온 톰 포드는 진정한 의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파슨스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한 그는 의상 디자인뿐 아니라 광고·홍보·디스플레이까지 관여하면서 ‘명품이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워야 한다’는 새로운 덕목을 만들어냈다. 2004년 계약기간이 만료돼 사임했지만 이면에는 CEO와의 불화설도 있었다. 이후 몇 명의 디자이너 교체를 거쳐 현재는 프리다 지아니니가 구찌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발렌시아가 1997년 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발렌시아가를 맡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 불리는 수많은 유명 디자이너들이 니콜라스 게스키에르의 아이디어를 은근히 베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앞서가는 크리에이터이다. 천재적이면서도 꾸준한 크리에이터다.



보테가 베네타 로고를 드러내지 않는 전략으로 오히려 청담동 사모님들에게 어필했다. 이는 2001년부터 보테가 베네타의 수석 디자이너로 요란하지 않으면서 우아한 컬렉션을 선보인 토마스 마이어의 힘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점잖은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줬다.



YSL 디올과 함께 프랑스의 자존심과 같은 브랜드다. 1998년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알버 엘바즈(현 랑방 디자이너)에게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물려줬다. 하지만 99년 구찌 그룹이 이브 생 로랑을 인수한 이후 알버 앨바즈는 세 시즌 만에 물러나야 했다. 그 자리를 당시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가 차지했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반감은 대단했다. 2004년부터는 프라다, 미우 미우 출신의 디자이너 스테파노 필라티가 맡았다. 영리하게도 그는 가장 먼저 노년의 이브 생 로랑을 찾아가 조언을 얻는 방식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호감 가는 멋진 외모와 능수능란한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현재까지도 이브 생 로랑을 무난하게 이끌고 있다.



알렉산더 맥퀸
런던 택시 운전사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알렉산더 맥퀸은 존 갈리아노와 더불어 패션 천재로 불렸다. 96년부터 2001년까지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2001년 구찌 그룹이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의 지분 51%를 인수하면서 구찌 그룹 소속이 됐다. 2007년 그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스타일리스트 이자벨 블로가 자살한 이후 우울증을 앓았다. 결국 자신의 어머니가 숨진 지 10일 뒤 그 역시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1996년부터 맥퀸과 함께 일해온 사라 버튼이 브랜드를 맡았는데, 최근에 교체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가장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스텔라 매카트니
비틀즈의 멤버인 폴 매카트니의 딸. 세인트 마틴 패션스쿨을 졸업한 뒤 클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았다. 2001년부터는 자신의 라벨로 파리 컬렉션을 진행 중이다. 유명한 아버지 덕분에 그녀도 스타들과 매우 친하며, 그런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컬렉션으로 많은 여성의 지지를 얻고 있다. 동물애호가로 모피, 가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LVMH 그룹 디렉터




디올 옴므
2000년 론칭과 함께 수석 디자이너 에디 슬리만이 등장했다. 디자이너로 데뷔하기 전에는 그저 ‘동네에서 옷 잘 입는 사람’이었다. 디자이너가 된 후 거리에서 발탁한 마르고 키 큰 친구들을 데려다 모델로 썼다. 그 결과 남성복 역사를 새로 썼다. 칼 라거펠트가 슬림한 핏의 디올 옴므 슈트를 입기 위해 42㎏이나 살을 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7년간 디올 옴므를 최고로 만들어놓은 에디 슬리만. 돌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관뒀다. 오랜 꿈이었던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2008년부터는 에디 슬리만의 수제자였던 크리스반아쉐가 수장을 맡고 있다.



로에베
스페인 왕실에 납품하던 전통의 가죽 브랜드. 1996년 LVMH 그룹에 편입됐다. 젊은 피 수혈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2008년부터 영국 출신의 스튜어트 베버가 맡아 클래식한 분위기의 브랜드에 흥미로운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푸치
현란한 프린트로 유명한 이탈리아 브랜드. 창립자인 에밀리오 푸치는 이탈리아 로열 패밀리 출신으로 디자이너이자 정치가였다. 2000년 루이비통 그룹에 통합됐고, 이후 크리스찬 라크르와 매튜 윌리암슨 등이 수석 자리를 거쳐갔다. 2008년 10월부터는 웅가로에 몸담고 있던 노르웨이 출신의 디자이너 피터 던다스가 브랜드를 이끌고 있다.



펜디
로마에서 시작, 고급스러운 모피와 가죽으로 유명해졌다. 창립자의 다섯 자매가 사업을 이어받았고 그 중 막내였던 실비아 벤추리니는 여전히 브랜드에 남아있다. 1984년부터 칼 라거펠트가 그녀와 함께 수석 디자이너를 맡고 있다. 다행이 둘의 역할 분담은 성공적이었다. 2주에 한번씩 로마 본사에 있는 디자인실에 와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파리로 떠난다는 칼 라거펠트. 그가 펜디에서 이슈를 만들어낸다면 실비아 벤추리니는 묵묵히 수많은 ‘잇백’을 만들어낸다.



마크 제이콥스·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온갖 상을 휩쓸던 뉴욕의 유망한 신인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1984년 동업자인 로버트 듀피와 함께 제이콥스 듀피 디자인을 설립해 운영했다. 이후 미국 카시야마사 후원으로 마크 제이콥스 컬렉션을 론칭하고, 1989년에는 패리 앨리스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았다. 하지만 92년 실험적이었던 봄·여름 컬렉션이 혹평을 받으며 93년 패리 앨리스에서 해고됐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마크 제이콥스 인터내셔널 컴퍼니를 설립해 재기했고, 2000년에는 자신의 세컨 라인인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를 론칭했다.



루이비통
1954년 파리에서 론칭. 트렁크 및 여행 액세서리 브랜드로 시작했다. 97년 마크 제이콥스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하며 의상 컬렉션까지 진행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톰 포드가 구찌를 떠나고, 존 갈리아노가 디올을 떠난 지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브랜드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가장 오랫동안 계약을 맺고 있는 사례로 꼽힌다. 아티스트들과 친한 마크 제이콥스가 그들을 루이비통의 온갖 프로젝트에 투입하며 만들어낸 부가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디올
16년간 존 갈리아노가 수석 디자이너를 맡으며 LVMH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존 갈리아노가 유태인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해임됐다. 이후 마크 제이콥스, 알렉산더 왕 등이 수석 디자이너로 올 것이라는 설이 분분했다. 결국 존 갈리아노의 오른팔이자 무려 23년 동안 디올에서 일했던 빌 게이튼이 남아 오트 쿠튀르부터 디올, 존 갈리아노까지 책임지고 있다. 빌 게이튼은 존 갈리아노의 약점을 파고 들었다. 즉 상업적이고 안전한 컬렉션을 선보인 것. 하지만 존 갈리아노의 묵직한 스타성에 빌 게이튼의 무게감은 떨어진다.



도나 카란
패션스쿨 파슨스 재학 중 앤 클라인에서 어시스턴트 디자이너가 됐다. 74년 앤 클라인의 죽음과 함께 헤드 디자이너로 발탁됐다. 84년엔 남편과 함께 도나 카란 뉴욕을 설립했다. 이후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충실하며 DKNY, 남성복, 키즈 등 새로운 라인을 차례로 발표했다. 도나 카란은 미국 커리어 우먼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디자이너로 꼽힌다. 하지만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다. 2001년 LVMH로 통합됐다.



겐조
론칭 41주년을 맞았다. 겐조가 직접 간택해 2003년부터 브랜드를 맡아온 안토니오 마라스와 2011년 헤어졌다. 안토니오 마라스는 예술적 감성을 지녔지만 모던하지 못한 약점을 가졌다. 때문에 올해부터는 뉴욕의 멀티숍, 오프닝 세리머니의 바이어 출신인 캐롤림과 움베르토 레온에게 브랜드를 맡겼다. 디자이너 출신이 아닌 발랄한 듀오는 브랜드에 젊은 감각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이다.



지방시
런던의 패션스쿨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한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가 2005년부터 여성복을, 2008년부터 남성복과 액세서리 디자인까지 맡고 있다. 요지 야마모토가 직접 그의 쇼를 보러 오고, 마돈나가 열광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고딕적 색채가 지나치다는 최근의 평을 의식해서인지 2012년 봄·여름에는 핑크 빛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셀린
최근 수석 디자이너 교체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브랜드다.

그 견인차 역할은 바로 피비 필로가 했다. 스텔라 맥카트니의 오른팔이었던 그녀는 스텔라 맥카트니 이후 클로에의 수석 디자이너를 맡으며 재능을 알렸다. 하지만 육아를 이유로 미련 없이 떠나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2010년 셀린 컬렉션으로 컴백했다. 최근의 패션계 판도를 미니멀리즘으로 바꿔놓은 화제의 주인공이다.



Richmont 그룹 디렉터




아제딘
알라이아 튀니지 출신의 아제딘 알라이아는 디자이너들이 스승으로 꼽는 ‘진짜 디자이너’다. 80년대 보디 컨셔스 룩의 대부로 여전히 활동 중이다. 이 브랜드는 프라다 그룹의 소유였다가 아제딘 알라이아 본인이 거둬들인 후 럭셔리 업계 순위 2위인 리치몬트에 되팔았다. 마돈나, 티나 터너, 나오미 캠벨, 스테파니 세이무어, 빅토리아 베컴 등 수많은 스타들이 예나 지금이나 그의 옷에 열광한다.



클로에
칼 라거팰트가 클로에의 수석 디자이너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신인이었던 스텔라 매카트니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 드물다. 스텔라 매카트니 이후에는 현 셀린 디자이너로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피비 필로, 그 이후에는 파울로 멜림 앤더슨과 한나 맥기본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래도 매출이 신통치 않자 최근에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를 기용했다. 캘빈 클라인, 랄프 로렌, 구찌에서 일했고 가장 최근에는 프링글 디자이너였던 그녀는 클로에의 첫 컬렉션으로 합격점을 받았다.



기타 브랜드 디렉터




프라다
1988년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이고 93년에는 미우 미우를 론칭했다.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였던 미우치아 프라다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옷보다는 여성 자신이 만족하는 옷을 만드는 철학을 갖고 있다. 남편과 함께 사업을 키워 질 샌더와 헬무트 랭까지 보유했다. 한때 루이비통, 구찌 그룹에 비견될 정도로 사업을 키웠지만 거의 모두를 매각했다. 현재는 자신의 브랜드와 슈즈 브랜드인 처치스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샤넬
1983년부터 샤넬을 진두 지휘한 칼 라거펠트. 아제딘 알라이아는 그가 ‘가위나 한번 들어봤는지 모르겠다’며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파리와 로마를 오가며 샤넬, 펜디와 자신의 레이블을 운영하고 H&M과 같은 브랜드와의 협업도 활발하다. 포토그래퍼에 서점까지 운영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칠순의 디자이너이다.



에르메스
LVMH 그룹에서 시도 때도 없이 경영권 사냥을 노리는 탓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수석 디자이너들의 활약도 탐탁지 않다. 마틴 마르지엘라, 장 폴 고티에 등 패션 천재들을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했지만 이상하게 에르메스에만 오면 실력 발휘가 신통치 않다. 라코스테르 수석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토프 르메르를 모셔오는 파격을 감행했지만 두 시즌이 지난 요즘의 평은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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