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트는 누구인가] 부동산 재벌서 백악관 입성한 이단아
[트럼트는 누구인가] 부동산 재벌서 백악관 입성한 이단아
“인생은 경쟁” 부친의 가르침 새겨...군복무·공직 경험 없고 지지 정당 5번 바꿔
미국의 첫 ‘아웃사이더’ 대통령 탄생에 세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과정에서 내건 각종 정책이 어디로 튈지 모를 그의 발언과 행동만큼이나 변화무쌍하고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당선 직후 확 달라진 모습을 보였지만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분명히 커졌다. 충격에 휩싸였던 글로벌 금융시장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로 대변되는 트럼프노믹스의 파고는 무척 높아 보인다. 가뜩이나 갈 길이 먼 한국 경제는 최순실 게이트까지 겹쳐 시계제로 상황이다. 11월 8일(현지시간) 치른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한 도널드 트럼프(70)에 대한 우려가 대단하다. 그를 45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미국인들도 걱정할 정도다.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 미국 CNN방송이 미국인의 반응을 조사한 결과가 이를 잘 말해준다. 조사 결과 ‘신난다(excited)’ 13%, ‘낙관적이다(optimistic)’ 27% 등 긍정적인 반응은 40% 수준이다. 대신 ‘우려된다(concerned)’ 20%, ‘무섭다(scared)’ 36%로 부정적인 반응이 56%에 이르렀다. 대선 이후 미래에 대한 우려가 미국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금융 시장 등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모든 미국 시민의 대통령이 되겠다” “세계와 잘 지내겠다” 등 긍정적인 내용의 당선 연설을 하면서다. 하지만 트럼프 자체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인물이라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계속 감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과거 행적을 알아보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걸어온 길은 물론 그의 집안 내력까지 함께 알아본다. 트럼프는 부동산과 리조트 개발이 본업인 트럼프 그룹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를 맡아왔다. 캘리포니아주와 텍사스 주에 이어 미국에서 인구가 셋째로 많은 뉴욕주의 맨해튼에 있는 트럼프 타워와 넷째로 많은 플로리다주의 팜 비치에 있는 저택을 오가며 살아왔다. 트럼프 플라자와 트럼프 애틀란틱 시티의 회장도 맡고 있다. 자신이 지분을 보유한 NBC방송에서 리얼리티 인기 프로그램 [어프렌티스(견습생)]를 진행하면서 ‘너는 해고야(You are fired)’라는 도발적인 코멘트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추정 재산이 45억~87억 달러에 이르는 억만장자인데다 지금도 연 수입이 2억5000만 달러에 이른다.
독특한 것은 그의 정치 이력이다. 1987년 이전에는 민주당을 지지했다. 정치 자금도 기부했다. 1987년에는 공화당으로 돌아서서 공화당을 후원했다. 1999년부터는 공화당에 등을 돌리고 개혁당을 지지했다.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다시 민주당으로 말을 갈아타고 2009년까지 지지하고 후원했다. 이후 정치 지원을 멈췄다가 2011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독립당을 후원했다. 한마디로 지지 정당부터 정치적 성향까지 오락가락하며 시계추처럼 진폭이 컸다. 사업상 필요성이나 기분에 지지 정당이 왔다갔다 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가 다시 공화당원이 된 것은 2012년부터다. 그 4년 만에 공화당 대선후보가 된 데 이어 당선까지 했다. 트럼프는 평생 한 번도 공직을 맡거나 군복무를 해본 적이 없는 정치적인 무경험자인 것은 물론 기존 질서를 모욕해온 사회적 이단아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트럼프가 오랫동안 대통령이 되기 위한 조사와 ‘정치적 간보기’를 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트럼프는 지지 정당만큼 부인을 자주 바꾼 것으로도 유명하다. 3차례 결혼했다. 1977년 이바나 젤니치코바와 결혼했다가 92년 이혼했으며, 이듬해 마를라 메이플스와 재혼했다가 6년 만에 헤어졌다. 23세 연하인 지금 부인 멜라니아 크나우스와는 2005년 결혼했다. 다섯 자녀를 두고 있다. 이바나와의 사이에서 도널드 주니어, 에릭, 이방카 등 세 자녀를 뒀지만 자신의 외도 파문 끝에 1992년 헤어졌다. 마를라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 멜라니아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다. 장녀 이방카(이바나의 동유럽식 애칭)는 트럼프의 최대 정치적 자산으로 통한다. 유대인과 결혼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카는 유대인의 지지를 이끄는 고리로도 통한다. 조지타운대를 2년 간 다니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로 옮겨 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트럼프의 생애를 살펴보자. 그는 대다수 미국인이 그러하듯 이민자의 후손이다. 1946년 미국 뉴욕주 퀸스에서 독일계 이민 2세인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와 스코틀랜드 태생의 이민 1세인 어머니 매리 앤 맥러드 트럼프와의 사이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퀸스는 미국 내 한인 밀집지구 중 하나다. 어린 시절 트럼프는 문제아였다. 수시로 사고를 쳐서 교사에게 불려가는 것은 물론 부모도 학교에 불려와 자녀 교육과 관련된 훈시를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음악 교사를 때려 눈에 멍이 들게 한 적도 있었다.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격으로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공격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부모는 그런 말썽꾸러기 아들을 13살 때 뉴욕군사학교에 보냈다. 사관생도처럼 생활하며 공부하는 엄격한 기숙형 사립학교다. 엄격한 규율과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군사학교 문화가 사춘기의 트럼프를 지배했다. 이는 트럼프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고교 시절을 군사학교에서 보낸 트럼프는 뉴욕주에 있는 예수회 계열의 가톨릭 사립대학인 포덤대학에 진학했다. 예수회에서 세운 대학에 다녔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다. 장로회 소속의 개신교 신자다. 트럼프는 포덤대를 4학기 다닌 후 펜실베이니아대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미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대는 ‘유펜’이라는 약칭으로 유명한 아이비리그 대학이다(펜 스테이트로 불리는 또 다른 명문대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와는 다르다).
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대의 경영학교인 와튼스쿨에서 학부를 마쳤다. 1881년 필라델피아의 기업인 조셉 와튼의 기부로 설립된 경영학교다. 흔히 와튼스쿨은 경영대학원으로 알려졌지만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모두 다닌다. 2015년 기준으로 학부생 2543명, 대학원생 1990명, 기타 학생 429명이 다닌다. 학부생이 오히려 더 많다. 세계 153개국에 9만5000명의 동문이 있다. 여기에는 미국은 물론 글로벌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오너가 포함된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일런 머스크, 코헨그룹의 스티븐 코헨, 구글 CEO 순다이 피차이 등이 동문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비즈니스 배경의 억만장자의 90%는 와튼스쿨,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컬럼비아 비즈니스 스쿨 중 한 군데를 다녔는데 트럼프가 여기에 포함된다. 대학을 마친 트럼프는 아버지처럼 부동산 개발업에 뛰어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브루클린과 퀸즈 일대에 중산층과 서민용 임대주택을 지었지만 트럼프는 럭셔리한 부동산 개발을 추구했다. 트럼프는 뉴욕 한복판인 맨해튼에 뛰어들어 부동산 개발에 나섰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100만 달러(현재가치 680만 달러, 약 78억원)를 종잣돈으로 했으니 금수저 출신의 금수저 창업이었다. 당시 미국 경제 불황으로 뉴욕 거리엔 노숙자가 넘쳐 났다. 28세의 트럼프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맨해튼 한가운데인 그랜드 센트럴 역 인근의 코모도 호텔 재개발에 나섰다.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하얏트 호텔과 손잡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뉴욕시로부턴 40년 간 재산세 면제라는 유례없는 지원까지 이끌어냈다. 1980년 재개장한 호텔은 번창했다. 34세의 트럼프는 세계의 경제수도 뉴욕의 부동산 업계에서 촉망받는 스타가 됐다. 5번가에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58층짜리 호화 주상복합 빌딩인 트럼프 타워를 세우면서 명성을 더했다. 트럼프 타워는 그의 본거지가 됐다.
트럼프는 맨해튼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초고층 빌딩을 올리며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꾸몄다. 사업은 미국을 넘어 해외로 확대됐으며, 트럼프는 트럼프 그룹을 지배하는 글로벌 부동산 업계의 황제가 됐다. 트럼프는 한때 자신의 재산이 87억 달러(약 9조9000억원)라고 밝힌 적이 있다. 트럼프는 사업을 하면서 자기 스타일로 밀어붙여 대성공을 거뒀다. 이런 성공이 그에게 강한 확신을 심어줘서 거침없는 언변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트럼프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1990년대에 카지노 사업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낭패를 봤다.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세운 트럼프 타지마할 카지노는 파산으로 끝났다. 트럼프는 사실 사업을 하면서 4차례나 파산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파산법의 틈새를 잘 활용해 은행과의 벼랑 끝 협상으로 자금을 얻어내 재기할 수 있었다. 1995년 그가 신고한 손실만 9억1600만 달러(약 1조원)에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18년 간 소득세를 면제받았다. 이는 고스란히 그의 사업 밑천이 됐다. 대선 과정에서 세금 회피 의혹에 시달린 바로 그 사건이다. 미국 유권자는 세금 회피라는 뉴욕타임스의 보도보다 ‘절세의 기법’이라는 트럼프 측의 해명에 손을 들어줬다.
2000년대 들어 트럼프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대중의 스타로 떠올랐다. 2004년 자신이 지분을 가진 NBC방송의 리얼리티 TV쇼[어프렌티스(견습생]를 진행한 것이 계기였다. 연봉 25만 달러의 트럼프 계열사 관리자를 채용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트럼프는 마음에 들지 않는 참가자들에게 밉살스럽게 “너는 해고야(You‘re fired)”라고 말하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과정에서 오디션 참가자가 아닌 진행자인 트럼프가 대중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최근까지 미스 USA, 미스 유니버스 등 미인대회를 열며 대중의 관심을 모아왔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미디어를 통한 대중스타화라는 그의 전략은 정치적인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큰 힘이 됐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유세 과정에서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 독설, 비행 등 모든 것이 기사화되면서 별도의 광고비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는 미국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결국 그에게 대통령 당선을 안겨준 힘이 됐다.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트럼프의 집안 내력이다. 이민자에 반감이 있는 유권자를 교묘하게 선동해 인기를 모은다는 평가를 받지만, 아메리칸인디언을 제외한 모든 미국인이 그러하듯 그도 이민자의 후손이다. 트럼프는 할아버지 때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 3세다. 그의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드럼프(1869~1918)는 독일 서부 팔츠 지역에 있는 칼슈타트라는 작은 마을 출신이다. 현재 1200명 정도가 사는 이 마을은 독일 서부 와인 가도에 있는 주요 포도주 산지다. 미국의 유명 식품사인 하인즈 케첩을 창업한 헨리 하인즈의 아버지인 요한 하인리히 ‘하인츠(하인즈의 독일식 발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포도주 양조장을 겸한 고향의 포도밭에서 일하던 프리드리히 드럼프는 독일이 통일된 지 14년이 지난 1885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해 이발사로 6년 간 일했다. 그러다 모은 돈을 들고 1891년 대륙을 가로질러 ‘기회의 땅’ 서부로 옮겼다. 미국 서북부 워싱턴주의 시애틀로 이주해 ‘푸들 도그’라는 이름의 식당을 운영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당시 미 서부 식당의 상당수는 1층에서 음식과 술을 마시고 2층에선 성매매를 하는 퇴폐적인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 식당도 그중의 하나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무렵 그는 ‘프리드리히 드럼프’라는 독일 이름을 같은 어원의 영어 이름인 ‘프레더릭 트럼프’로 바꾸고 미국에 귀화했다. 1894년 프레더릭은 워싱턴주 몬테 크리스토로 옮겨 호텔을 열었다. 그러다 1896년 북극에 가까운 캐나다 서북부 유콘 지역의 클론다이크에 금이 발견돼 골드러시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유콘으로 가는 길목인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베네트로 옮겼다. 1896년부터 1899년까지 계속된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로 무려 10만 명이 몰렸다. 이들을 재우고 먹이는 온갖 가게가 호경기를 맞았다. 프레더릭은 베네트에 1897년 ‘악틱(북극)’이라는 이름의 식당을 열었다. 처음 텐트 하나로 시작했던 호텔은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잘 돼 곧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2층짜리 건물로 확장했다. 1900년 베네트에서 유콘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되자 프레더릭은 유콘의 화이트호스에 식당을 겸한 호텔을 열었다. 하지만, 골드러시의 거품이 꺼진데다 성매매 단속망이 조여오자 겁을 먹은 프레더릭은 1901년 호텔을 팔고 독일 고향마을로 돌아갔다.
독일의 고향에 돌아간 그는 이듬해 이웃집에 살던 엘리자베트(엘리자베스의 독일식 이름) 크리스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가 탈세와 병역 기피 목적으로 미국으로 일시 이민 갔다가 돌아왔다고 판단한 독일 당국은 그를 추방됐다. 임신한 부인과 함께 다시 미국에 온 그는 뉴욕주 퀸스에서 새 출발을 했다. 하지만 프레더릭은 프레드(1905~1999)와 존이라는 두 아들을 남기고 1918년 세계적으로 대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숨졌다. 숨질 무렵 그는 퀸스의 부동산 개발에 투자를 시작하고 있었다. 트럼프 가문 부동산 사업의 모태다. 그의 사후 부인은 어린 아들과 함께 ‘엘리자베스 트럼프 & 손’이라는 부동산 개발회사를 차려 남편의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13살 때 아버지를 잃은 장남 프레드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의 부친이다. 22살 때 부동산 개발과 건설업에 뛰어든 프레드는 대공황 시기였던 1930년대에 뉴욕주에 ‘혼자 물건을 고르고 돈을 아끼세요’라는 광고문구를 앞세운 수퍼마켓을 열었다. 수퍼마켓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사업이라 돈벌이가 잘 됐다. 프레드는 이익을 남기고 이를 킹컬렌이라는 경쟁 체인에 넘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군함을 건설하는 조선소 인근에서 군인과 군무원을 위한 주택건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끝나자 귀환 장병을 위한 주택 건설 붐이 일었다. 이후 뉴욕시에 아파트 붐이 일자 아파트 건설로 떼돈을 벌었다. 당시 그는 2만7000가구 이상의 아파트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 임대사업도 함께 벌였다. 트럼프 그룹은 이때 세웠다. 1968년 아들 도널드가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함께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다.
프레드는 검소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 자식들에게 공사장에 떨어진 못이 있으면 주우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사업에는 철저했다. 그는 아들인 트럼프에게 “인생은 경쟁”이라고 강조했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승부사 기질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트럼프는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로 보인다. 트럼프 자신도 과감한 부동산 개발로 화제를 모으면서 재산을 불렸다. 이민자인 트럼프 집안은 이처럼 3대에 걸쳐 기업가 정신으로 서부개척과 주택 붐이라는 기회를 활용해 재산을 모았다. 자수성가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인종차별 성향이 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아파트 임대를 해주지 않다가 1973년 민권법 위반으로 수사도 받았다. 구두쇠로 유명했던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2억5000만~3억 달러의 유산을 3남2녀의 자녀에게 남겼다. 트럼프는 3대에 걸친 집안의 노력 끝에 탄생한 공화당 대통령 당선인이다.
트럼프의 형제자매도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큰누나 메리앤은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냈으며, 작은 누나 엘리자베스는 체이스 맨해튼 은행 중역이었다. 큰형인 프레드는 알코올 문제로 40대에 세상을 떠났다. 트럼프는 술은 물론 담배도 하지 않는데 이 때의 충격이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생인 로버트는 아버지가 남긴 부동산 관리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경영인이다. 차남인 트럼프는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막대한 재산을 일궜다. 이 재산을 활용한 적극적인 유세전으로 ‘트럼프 돌풍’을 일으켜 결국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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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첫 ‘아웃사이더’ 대통령 탄생에 세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과정에서 내건 각종 정책이 어디로 튈지 모를 그의 발언과 행동만큼이나 변화무쌍하고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당선 직후 확 달라진 모습을 보였지만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분명히 커졌다. 충격에 휩싸였던 글로벌 금융시장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로 대변되는 트럼프노믹스의 파고는 무척 높아 보인다. 가뜩이나 갈 길이 먼 한국 경제는 최순실 게이트까지 겹쳐 시계제로 상황이다. 11월 8일(현지시간) 치른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한 도널드 트럼프(70)에 대한 우려가 대단하다. 그를 45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미국인들도 걱정할 정도다. 개표 결과가 나온 직후 미국 CNN방송이 미국인의 반응을 조사한 결과가 이를 잘 말해준다. 조사 결과 ‘신난다(excited)’ 13%, ‘낙관적이다(optimistic)’ 27% 등 긍정적인 반응은 40% 수준이다. 대신 ‘우려된다(concerned)’ 20%, ‘무섭다(scared)’ 36%로 부정적인 반응이 56%에 이르렀다. 대선 이후 미래에 대한 우려가 미국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금융 시장 등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모든 미국 시민의 대통령이 되겠다” “세계와 잘 지내겠다” 등 긍정적인 내용의 당선 연설을 하면서다. 하지만 트럼프 자체가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인물이라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계속 감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과거 행적을 알아보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걸어온 길은 물론 그의 집안 내력까지 함께 알아본다.
美 국민 환영보다 우려
독특한 것은 그의 정치 이력이다. 1987년 이전에는 민주당을 지지했다. 정치 자금도 기부했다. 1987년에는 공화당으로 돌아서서 공화당을 후원했다. 1999년부터는 공화당에 등을 돌리고 개혁당을 지지했다.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다시 민주당으로 말을 갈아타고 2009년까지 지지하고 후원했다. 이후 정치 지원을 멈췄다가 2011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독립당을 후원했다. 한마디로 지지 정당부터 정치적 성향까지 오락가락하며 시계추처럼 진폭이 컸다. 사업상 필요성이나 기분에 지지 정당이 왔다갔다 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가 다시 공화당원이 된 것은 2012년부터다. 그 4년 만에 공화당 대선후보가 된 데 이어 당선까지 했다. 트럼프는 평생 한 번도 공직을 맡거나 군복무를 해본 적이 없는 정치적인 무경험자인 것은 물론 기존 질서를 모욕해온 사회적 이단아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트럼프가 오랫동안 대통령이 되기 위한 조사와 ‘정치적 간보기’를 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지고 못사는 공격적 성향
트럼프의 생애를 살펴보자. 그는 대다수 미국인이 그러하듯 이민자의 후손이다. 1946년 미국 뉴욕주 퀸스에서 독일계 이민 2세인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와 스코틀랜드 태생의 이민 1세인 어머니 매리 앤 맥러드 트럼프와의 사이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퀸스는 미국 내 한인 밀집지구 중 하나다. 어린 시절 트럼프는 문제아였다. 수시로 사고를 쳐서 교사에게 불려가는 것은 물론 부모도 학교에 불려와 자녀 교육과 관련된 훈시를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음악 교사를 때려 눈에 멍이 들게 한 적도 있었다. 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격으로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공격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부모는 그런 말썽꾸러기 아들을 13살 때 뉴욕군사학교에 보냈다. 사관생도처럼 생활하며 공부하는 엄격한 기숙형 사립학교다. 엄격한 규율과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군사학교 문화가 사춘기의 트럼프를 지배했다. 이는 트럼프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고교 시절을 군사학교에서 보낸 트럼프는 뉴욕주에 있는 예수회 계열의 가톨릭 사립대학인 포덤대학에 진학했다. 예수회에서 세운 대학에 다녔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다. 장로회 소속의 개신교 신자다. 트럼프는 포덤대를 4학기 다닌 후 펜실베이니아대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미국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대는 ‘유펜’이라는 약칭으로 유명한 아이비리그 대학이다(펜 스테이트로 불리는 또 다른 명문대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와는 다르다).
트럼프는 펜실베이니아대의 경영학교인 와튼스쿨에서 학부를 마쳤다. 1881년 필라델피아의 기업인 조셉 와튼의 기부로 설립된 경영학교다. 흔히 와튼스쿨은 경영대학원으로 알려졌지만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모두 다닌다. 2015년 기준으로 학부생 2543명, 대학원생 1990명, 기타 학생 429명이 다닌다. 학부생이 오히려 더 많다. 세계 153개국에 9만5000명의 동문이 있다. 여기에는 미국은 물론 글로벌 유수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오너가 포함된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일런 머스크, 코헨그룹의 스티븐 코헨, 구글 CEO 순다이 피차이 등이 동문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비즈니스 배경의 억만장자의 90%는 와튼스쿨,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컬럼비아 비즈니스 스쿨 중 한 군데를 다녔는데 트럼프가 여기에 포함된다.
자신의 스타일로 밀어붙여 잇단 성공
트럼프는 맨해튼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초고층 빌딩을 올리며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꾸몄다. 사업은 미국을 넘어 해외로 확대됐으며, 트럼프는 트럼프 그룹을 지배하는 글로벌 부동산 업계의 황제가 됐다. 트럼프는 한때 자신의 재산이 87억 달러(약 9조9000억원)라고 밝힌 적이 있다. 트럼프는 사업을 하면서 자기 스타일로 밀어붙여 대성공을 거뒀다. 이런 성공이 그에게 강한 확신을 심어줘서 거침없는 언변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트럼프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1990년대에 카지노 사업에 무리하게 투자했다가 낭패를 봤다.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 세운 트럼프 타지마할 카지노는 파산으로 끝났다. 트럼프는 사실 사업을 하면서 4차례나 파산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파산법의 틈새를 잘 활용해 은행과의 벼랑 끝 협상으로 자금을 얻어내 재기할 수 있었다. 1995년 그가 신고한 손실만 9억1600만 달러(약 1조원)에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18년 간 소득세를 면제받았다. 이는 고스란히 그의 사업 밑천이 됐다. 대선 과정에서 세금 회피 의혹에 시달린 바로 그 사건이다. 미국 유권자는 세금 회피라는 뉴욕타임스의 보도보다 ‘절세의 기법’이라는 트럼프 측의 해명에 손을 들어줬다.
2000년대 들어 트럼프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대중의 스타로 떠올랐다. 2004년 자신이 지분을 가진 NBC방송의 리얼리티 TV쇼[어프렌티스(견습생]를 진행한 것이 계기였다. 연봉 25만 달러의 트럼프 계열사 관리자를 채용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한 트럼프는 마음에 들지 않는 참가자들에게 밉살스럽게 “너는 해고야(You‘re fired)”라고 말하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과정에서 오디션 참가자가 아닌 진행자인 트럼프가 대중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최근까지 미스 USA, 미스 유니버스 등 미인대회를 열며 대중의 관심을 모아왔다. 이 과정에서 미디어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미디어를 통한 대중스타화라는 그의 전략은 정치적인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큰 힘이 됐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유세 과정에서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 독설, 비행 등 모든 것이 기사화되면서 별도의 광고비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는 미국의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결국 그에게 대통령 당선을 안겨준 힘이 됐다.
카지노 사업에 무리하게 투자하다 쓴맛
이 무렵 그는 ‘프리드리히 드럼프’라는 독일 이름을 같은 어원의 영어 이름인 ‘프레더릭 트럼프’로 바꾸고 미국에 귀화했다. 1894년 프레더릭은 워싱턴주 몬테 크리스토로 옮겨 호텔을 열었다. 그러다 1896년 북극에 가까운 캐나다 서북부 유콘 지역의 클론다이크에 금이 발견돼 골드러시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유콘으로 가는 길목인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베네트로 옮겼다. 1896년부터 1899년까지 계속된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로 무려 10만 명이 몰렸다. 이들을 재우고 먹이는 온갖 가게가 호경기를 맞았다. 프레더릭은 베네트에 1897년 ‘악틱(북극)’이라는 이름의 식당을 열었다. 처음 텐트 하나로 시작했던 호텔은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장사가 잘 돼 곧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2층짜리 건물로 확장했다. 1900년 베네트에서 유콘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되자 프레더릭은 유콘의 화이트호스에 식당을 겸한 호텔을 열었다. 하지만, 골드러시의 거품이 꺼진데다 성매매 단속망이 조여오자 겁을 먹은 프레더릭은 1901년 호텔을 팔고 독일 고향마을로 돌아갔다.
독일의 고향에 돌아간 그는 이듬해 이웃집에 살던 엘리자베트(엘리자베스의 독일식 이름) 크리스트와 결혼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가 탈세와 병역 기피 목적으로 미국으로 일시 이민 갔다가 돌아왔다고 판단한 독일 당국은 그를 추방됐다. 임신한 부인과 함께 다시 미국에 온 그는 뉴욕주 퀸스에서 새 출발을 했다. 하지만 프레더릭은 프레드(1905~1999)와 존이라는 두 아들을 남기고 1918년 세계적으로 대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숨졌다. 숨질 무렵 그는 퀸스의 부동산 개발에 투자를 시작하고 있었다. 트럼프 가문 부동산 사업의 모태다. 그의 사후 부인은 어린 아들과 함께 ‘엘리자베스 트럼프 & 손’이라는 부동산 개발회사를 차려 남편의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13살 때 아버지를 잃은 장남 프레드가 바로 도널드 트럼프의 부친이다. 22살 때 부동산 개발과 건설업에 뛰어든 프레드는 대공황 시기였던 1930년대에 뉴욕주에 ‘혼자 물건을 고르고 돈을 아끼세요’라는 광고문구를 앞세운 수퍼마켓을 열었다. 수퍼마켓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사업이라 돈벌이가 잘 됐다. 프레드는 이익을 남기고 이를 킹컬렌이라는 경쟁 체인에 넘겼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군함을 건설하는 조선소 인근에서 군인과 군무원을 위한 주택건설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끝나자 귀환 장병을 위한 주택 건설 붐이 일었다. 이후 뉴욕시에 아파트 붐이 일자 아파트 건설로 떼돈을 벌었다. 당시 그는 2만7000가구 이상의 아파트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동산 임대사업도 함께 벌였다. 트럼프 그룹은 이때 세웠다. 1968년 아들 도널드가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함께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다.
프레드는 검소하고 소박한 인물이었다. 자식들에게 공사장에 떨어진 못이 있으면 주우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사업에는 철저했다. 그는 아들인 트럼프에게 “인생은 경쟁”이라고 강조했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승부사 기질을 아들에게 물려줬다. 트럼프는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로 보인다.
3대에 걸쳐 자수성가로 아메리칸 드림 이뤄
트럼프의 형제자매도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큰누나 메리앤은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냈으며, 작은 누나 엘리자베스는 체이스 맨해튼 은행 중역이었다. 큰형인 프레드는 알코올 문제로 40대에 세상을 떠났다. 트럼프는 술은 물론 담배도 하지 않는데 이 때의 충격이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생인 로버트는 아버지가 남긴 부동산 관리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경영인이다. 차남인 트럼프는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막대한 재산을 일궜다. 이 재산을 활용한 적극적인 유세전으로 ‘트럼프 돌풍’을 일으켜 결국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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