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 직격탄 맞은 건설업계…노무 리스크 현실화
- 원청 대상 단체교섭 시작…복잡한 현장 구조에 긴장
파업·공정 지연 땐 비용 부담 눈덩이
[이코노미스트 이승훈 기자] 노동조합의 교섭 상대를 원청으로까지 확장하는 이른바 ‘노란봉투법’이 시행되자,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고착된 건설업계가 긴장 속에 대응 전략 마련에 나서고 있다. 하청 노동조합이 원청 건설사를 상대로 직접 교섭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공사 현장을 중심으로 한 노사관계의 판도 변화와 함께 원청의 책임 범위 확대에 따른 노무 리스크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노란봉투법은 지난해 9월 9일 공포된 뒤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지난 3월 10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시행 첫날 건설산업연맹은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등 주요 원청 건설사 90여곳을 대상으로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하며 즉각적인 행동에 나섰다.
건설노조 교섭 본격화…현장 혼선 불가피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사용자’ 범위를 대폭 확대한 데 있다. 기존에는 근로계약 관계가 있는 사업주만 사용자로 인정됐지만, 개정 법은 근로조건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에도 사용자로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기업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하거나 노동쟁의를 진행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건설업은 산업 특성상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법 시행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는 업종으로 꼽힌다. 대형 건설사가 전체 공사를 총괄하고, 공정별로 전문건설업체에 도급을 주는 방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건설현장에 수십 개 협력업체가 동시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아 노사관계 역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구조를 고려할 때 원청 건설사의 노무 관리 책임이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건설사들은 하도급 노동자와 직접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노사 문제에 제한적으로 개입해 왔다. 그러나 개정 법 시행 이후에는 하청 노조가 임금, 근로조건, 산업안전 문제 등을 이유로 원청 건설사를 직접 교섭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현장에서는 법 적용 범위와 사용자 책임 기준이 아직 명확히 정립되지 않아 혼선이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건설현장은 프로젝트 단위로 운영되며 공사 기간, 계약 구조, 협력업체 구성 등이 현장마다 상이해 일률적인 교섭 구조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제도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가 원청의 실질적인 결정 권한 범위를 넘어설 가능성도 있다”며 “이 경우 하청업체의 경영 판단과 충돌할 여지도 있어 제도가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섭 요구가 접수될 경우 의제별로 사용자성 인정 여부를 면밀히 검토해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대응 역량 측면에서 건설사 간 격차가 나타날 가능성도 제기된다. 대형 건설사들은 법무법인이나 노무법인을 통해 대응 전략을 마련하고 있지만, 중견·중소 건설사의 경우 노무 대응 인력과 경험이 부족해 교섭 과정에서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부 건설 관련 단체는 회원사를 대상으로 개정 법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가이드라인을 배포하는 등 지원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건설사들도 노무 리스크 대응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물산은 최근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을 사외이사로 선임하기로 하며 노동·안전 분야 대응 역량을 보강했다. 업계에서는 중대재해 예방과 더불어 노란봉투법 시행 등 노동 규제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전직 장관 출신 인사를 통해 안전보건 관리 체계를 점검하고, 노무 리스크 대응 전략을 보다 체계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공사 지연·원가 상승…분양가 상승 압력
건설업계에서는 노사 갈등이 공사 일정과 비용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우려가 커지고 있다. 건설 프로젝트는 공정 간 연계성이 높은 구조여서 특정 공정에서 파업이나 갈등이 발생할 경우 전체 공사 일정이 연쇄적으로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인건비와 금융비용 증가뿐 아니라 지체상금 부담까지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 최근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공사비 부담이 확대된 상황에서 노임 상승과 공사 지연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사업비 증가 압력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중동 정세 불안 등으로 에너지 가격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시멘트와 철강 등 주요 자재 가격 부담이 이어지는 가운데, 늘어난 사업비가 분양가에 반영되거나 주택 공급 지연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노란봉투법 시행이 건설현장의 노사관계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고 있다. 원청의 사용자 책임 범위가 확대되면서 기존의 원·하청 중심 관리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직접적인 노무 관리 체계가 요구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제도 시행 초기에는 사용자 책임 인정 범위와 교섭 대상 등을 둘러싼 법적 해석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일정 기간 현장의 혼선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사후 대응보다 사전적인 리스크 관리 체계 구축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법무법인 화우는 최근 건설사를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서 원·하청 구조에서 원청사의 사용자성이 인정될 가능성이 확대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홍정모 화우 변호사는 “분쟁 발생 이후 대응에 나서기보다 계약 구조 설계 단계부터 리스크를 관리하고, 내부 가이드라인을 정비하는 등 선제적인 컴플라이언스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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