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다니는 루이뷔통 백과사전
걸어다니는 루이뷔통 백과사전
설립자 루이 뷔통의 5대손 파트릭, 초창기에 세워진 프랑스 아니에르의 공장에서 하드케이스 여행가방 등 대표 제품 생산하며 가문의 전통 이어 가 루이뷔통은 세계 어디서나 ‘명품 가방 브랜드’라는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프랑스 아니에르-쉬르-센 지역은 예외다. 이곳에서 (루이) 뷔통은 그 동네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한 집안일 뿐이다. 파리 교외로 편입되기 이전 센강 유역의 작은 마을 아니에르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 자주 등장했다. 뷔통 가문은 1859년 집안의 저택 바로 옆에 가방 공장을 설립했다. 1977년까지는 이곳이 루이뷔통의 유일한 작업장이었다.
요즘 루이뷔통 아니에르 공장의 책임자는 설립자인 루이 뷔통의 5대손인 파트릭 루이 뷔통이다. 매년 2200개 남짓 생산되는 루이뷔통의 전통적인 하드케이스 여행가방과 특별 주문품을 이곳에서 제작한다. 또 최근 문을 연 ‘아니에르 갤러리’를 포함해 루이뷔통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대한 자료도 보관돼 있다.
세계 곳곳에 있는 루이뷔통 매장 중 규모가 가장 큰 유형은 ‘메종’(주택)으로 불린다. 몇몇 매장은 ‘팔레’(궁전)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정도로 웅장하다. 하지만 아니에르 공장의 가정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면 메종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저택 입구로 들어서면 12인용 식탁이 놓인 식당이 있다. 그곳을 지나면 아르 누보 스타일의 응접실이 나온다. 곡선미를 살린 벽난로가 인상적이고 아이비를 연상시키는 석고세공 장식이 마치 ‘페리에 주에 퀴베벨 에포크’ 샴페인 병 속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을 자아내는 곳이다.
하지만 웅장하다기보다는 아담하고 현실적인 느낌이 강하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지극히 현실적인 작업장이 들여다 보이기 때문이다. 검정색 테두리의 아치형 창문과 크림색 석고세공 장식이 인상적인 공장 건물 두 채가 유리 지붕이 덮인 회랑으로 저택과 연결됐다.
아니에르의 루이뷔통 공장이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파트릭의 공이 크다. 짧은 머리에 상냥한 인상을 지닌 그는 코듀로이 재킷 자락에 초록색과 빨간색의 ‘메리트 아그리콜’(프랑스 농업공로 훈장) 리본을 달고 다닌다. 루이뷔통 가문의 본거지인 아니에르는 지금은 파리 교외로 편입됐지만(샹젤리제의 루이뷔통 본점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다) 파트릭에게 그곳은 여전히 도시 속의 시골처럼 느껴진다. 그는 요즘도 사슴 사냥을 하고 ‘가문의 요람’인 쥐라(19세기 중반 그의 증조부가 파리로 떠날 때까지 살던 프랑스 동부 지방)를 자주 찾는다.1951년생인 파트릭은 아니에르의 저택에서 성장했고 바로 옆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1964년 104세에 세상을 떠난 그의 증조모는 창업자 루이 뷔통의 딸이었다. 그녀는 파트릭에게 집안의 과거와 1870년대 프로이센군의 파리 포위 등 자신이 경험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해줬다.
이제 뷔통 가문의 역사를 살아 숨쉬게 하는 일은 파트릭의 책임이다. 파트릭은 어린 시절 이른 아침 일어나면 공장에서 동물 뼈와 생선을 원료로 한 접착제를 데우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로 그는 루이뷔통이 지금보다 훨씬 더 소규모였던 시절로 우리를 데려간다. 1960~70년대에 루이뷔통의 사업 규모는 파리와 니스에 각각 1개씩 있던 매장과 직원 120~130명이 전부였다. 그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더는 고약한 생선 비린내가 안 나고 사용하기 전에 데울 필요가 없는 접착제가 대표적인 예다.
파트릭은 루이뷔통이 뷔통 가문의 소유였을 때부터 대기업 LVMH에 합병되기까지 43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해왔다. 따라서 루이뷔통의 역사에 관한 한 그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트릭은 언젠가 일본의 TV 방송국과 인터뷰했을 때 기자가 빈티지 루이뷔통 서류가방 하나를 건네면서 제작연도를 물어봤던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가방 안팎을 살펴본 뒤 그 제품이 구매된 연도뿐 아니라 달(7월)과 장소(니스)까지 제시했다(구입 날짜는 2~3주일 차이 났지만 연도와 장소는 정확히 알아맞혔다).
이런 놀라운 능력은 평생 지켜온 장인 정신에서 비롯됐다. 파트릭의 감독 아래 목공팀이 포플러 나무로 루이뷔통 여행가방의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질기기로 유명한 캔버스 가죽을 입힌다. 아니에르 공장은 연간 약 300개의 특별 주문품도 제작한다.
일례로 대만 고객은 DVD 플레이어와 영화 DVD 여러 편, 에스프레소 머신을 넣을 수 있고 태양열 전지판까지 갖춘 트렁크를 주문했다. 이 트렁크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영화를 보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니에르 공장은 또 파트릭의 지휘 아래 구급상자와 자녀의 젖니 보관상자, 룰렛 휠을 포함한 카지노 트렁크 등 독특한 제품들을 제작했다. 그 밖에도 문신과 미용, 바비 인형 수집, 크로케(잔디 구장 위에서 나무망치와 나무 공을 이용하는 구기 종목) 등 실용성을 살리거나 취미활동을 위한 다양한 트렁크들이 생산됐다. 기타와 시가 케이스, 샴페인과 리카르 파스티스(식전주의 일종) 보관용 케이스도 제작됐다(리카르 파스티스용 케이스는 파트릭의 60회 생일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더러 황당한 아이디어도 있지만 파트릭의 스케치와 제안, 축적된 경험으로 매우 실용적인 제품들이 탄생했다. 중국의 다도 행사를 위한 트렁크든 기존 모델에 잠금장치나 주머니 등을 원하는 위치에 추가한 여행가방이든 루이뷔통에 특별 제품을 주문할 때는 한 가지 분명한 이점이 있다. 설립자 루이 뷔통의 5대손인 파트릭 루이 뷔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 니컬러스 포크스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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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루이뷔통 아니에르 공장의 책임자는 설립자인 루이 뷔통의 5대손인 파트릭 루이 뷔통이다. 매년 2200개 남짓 생산되는 루이뷔통의 전통적인 하드케이스 여행가방과 특별 주문품을 이곳에서 제작한다. 또 최근 문을 연 ‘아니에르 갤러리’를 포함해 루이뷔통의 역사를 보여주는 방대한 자료도 보관돼 있다.
세계 곳곳에 있는 루이뷔통 매장 중 규모가 가장 큰 유형은 ‘메종’(주택)으로 불린다. 몇몇 매장은 ‘팔레’(궁전)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정도로 웅장하다. 하지만 아니에르 공장의 가정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면 메종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저택 입구로 들어서면 12인용 식탁이 놓인 식당이 있다. 그곳을 지나면 아르 누보 스타일의 응접실이 나온다. 곡선미를 살린 벽난로가 인상적이고 아이비를 연상시키는 석고세공 장식이 마치 ‘페리에 주에 퀴베벨 에포크’ 샴페인 병 속에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을 자아내는 곳이다.
하지만 웅장하다기보다는 아담하고 현실적인 느낌이 강하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통해 지극히 현실적인 작업장이 들여다 보이기 때문이다. 검정색 테두리의 아치형 창문과 크림색 석고세공 장식이 인상적인 공장 건물 두 채가 유리 지붕이 덮인 회랑으로 저택과 연결됐다.
아니에르의 루이뷔통 공장이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파트릭의 공이 크다. 짧은 머리에 상냥한 인상을 지닌 그는 코듀로이 재킷 자락에 초록색과 빨간색의 ‘메리트 아그리콜’(프랑스 농업공로 훈장) 리본을 달고 다닌다. 루이뷔통 가문의 본거지인 아니에르는 지금은 파리 교외로 편입됐지만(샹젤리제의 루이뷔통 본점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다) 파트릭에게 그곳은 여전히 도시 속의 시골처럼 느껴진다. 그는 요즘도 사슴 사냥을 하고 ‘가문의 요람’인 쥐라(19세기 중반 그의 증조부가 파리로 떠날 때까지 살던 프랑스 동부 지방)를 자주 찾는다.1951년생인 파트릭은 아니에르의 저택에서 성장했고 바로 옆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1964년 104세에 세상을 떠난 그의 증조모는 창업자 루이 뷔통의 딸이었다. 그녀는 파트릭에게 집안의 과거와 1870년대 프로이센군의 파리 포위 등 자신이 경험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해줬다.
이제 뷔통 가문의 역사를 살아 숨쉬게 하는 일은 파트릭의 책임이다. 파트릭은 어린 시절 이른 아침 일어나면 공장에서 동물 뼈와 생선을 원료로 한 접착제를 데우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로 그는 루이뷔통이 지금보다 훨씬 더 소규모였던 시절로 우리를 데려간다. 1960~70년대에 루이뷔통의 사업 규모는 파리와 니스에 각각 1개씩 있던 매장과 직원 120~130명이 전부였다. 그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더는 고약한 생선 비린내가 안 나고 사용하기 전에 데울 필요가 없는 접착제가 대표적인 예다.
파트릭은 루이뷔통이 뷔통 가문의 소유였을 때부터 대기업 LVMH에 합병되기까지 43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해왔다. 따라서 루이뷔통의 역사에 관한 한 그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트릭은 언젠가 일본의 TV 방송국과 인터뷰했을 때 기자가 빈티지 루이뷔통 서류가방 하나를 건네면서 제작연도를 물어봤던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가방 안팎을 살펴본 뒤 그 제품이 구매된 연도뿐 아니라 달(7월)과 장소(니스)까지 제시했다(구입 날짜는 2~3주일 차이 났지만 연도와 장소는 정확히 알아맞혔다).
이런 놀라운 능력은 평생 지켜온 장인 정신에서 비롯됐다. 파트릭의 감독 아래 목공팀이 포플러 나무로 루이뷔통 여행가방의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질기기로 유명한 캔버스 가죽을 입힌다. 아니에르 공장은 연간 약 300개의 특별 주문품도 제작한다.
일례로 대만 고객은 DVD 플레이어와 영화 DVD 여러 편, 에스프레소 머신을 넣을 수 있고 태양열 전지판까지 갖춘 트렁크를 주문했다. 이 트렁크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영화를 보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니에르 공장은 또 파트릭의 지휘 아래 구급상자와 자녀의 젖니 보관상자, 룰렛 휠을 포함한 카지노 트렁크 등 독특한 제품들을 제작했다. 그 밖에도 문신과 미용, 바비 인형 수집, 크로케(잔디 구장 위에서 나무망치와 나무 공을 이용하는 구기 종목) 등 실용성을 살리거나 취미활동을 위한 다양한 트렁크들이 생산됐다. 기타와 시가 케이스, 샴페인과 리카르 파스티스(식전주의 일종) 보관용 케이스도 제작됐다(리카르 파스티스용 케이스는 파트릭의 60회 생일을 기념해 만들어졌다).
더러 황당한 아이디어도 있지만 파트릭의 스케치와 제안, 축적된 경험으로 매우 실용적인 제품들이 탄생했다. 중국의 다도 행사를 위한 트렁크든 기존 모델에 잠금장치나 주머니 등을 원하는 위치에 추가한 여행가방이든 루이뷔통에 특별 제품을 주문할 때는 한 가지 분명한 이점이 있다. 설립자 루이 뷔통의 5대손인 파트릭 루이 뷔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 니컬러스 포크스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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