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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얼음물 속으로 들어가는가

그들은 왜 얼음물 속으로 들어가는가

핀란드 오울루에서 바다 얼음 깨고 들어가 스타트업 투자를 설득하는 ‘폴라 베어 피칭’을 체험하다
올해 우승팀은 기발한 프레젠테이션을 한 핀란드의 전기차 충전 관련 스타트업 비르타였다.
핀란드 북부의 2월. 발트해는 몇 달 전부터 꽁꽁 얼어붙었다. 나는 그 바다 얼음을 깨어 만든 구멍 속에 들어가 가슴까지 몸을 담근 채 똑바로 서서 심호흡을 한 뒤 청중을 쳐다봤다.

여기는 ‘에어 기타’(기타 없이 기타 연주 실력을 뽐내는 행동) 경연대회, 메탈 밴드, 옛 휴대전화 대기업 노키아의 본산인 오울루다. 북극권에서 160여㎞ 떨어진 핀란드 북부 도시 오울루는 발트해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인구 25만 명의 작은 도시지만 자칭 ‘북부 스칸디나비아의 수도’다. 나는 한때 세계에서 막강한 위력을 떨치던 휴대전화 회사 노키아의 본부를 방문하러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행운인지 불운인지 지난밤 만찬 자리에서 미아 켐팔라라는 쾌활한 여성 곁에 앉게 됐다.

‘기회를 짜는 방직공’이라고 적힌 명함을 건넨 그녀는 ‘폴라 베어 피칭(Polar Bear Pitching)’의 설립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세계 각지의 스타트업이 투자자 패널에게 사업 아이디어를 홍보하는 특이한 경연대회다. 우승하면 상금 1만 유로와 함께 2주 동안 미국 실리콘밸리 혁신 기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다 좋은 데 얼음물 속에 서서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다는 게 아주 고약한 문제다.

‘폴라 베어 피칭’의 아이디어는 2013년 나왔다. 그해 노키아가 무너졌고 그 잔해 속에서 여러 IT 스타트업이 생겨났다. 노키아는 2011년까지 휴대전화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이 1위였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등 모바일 중심으로 흘러가는 휴대전화 시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경쟁사들에 크게 밀리며 결국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했다.

노키아에서 일하던 직원이 1만 명에서 2000명으로 줄었다. 고학력 고숙련 인력 수천 명이 실업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창업 아이디어가 수없이 많았다. 켐팔라는 ‘폴라 베어 피칭’이 그들의 창업을 도울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할 수 있다는 발상을 떠올렸다. 그처럼 별난 스타트업 발표 행사 아이디어를 접한 기업 스폰서들과 투자자들이 큰 관심을 보이면서 행사 주관기관은 2014년 2월부터 얼음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켐팔라는 “핀란드에선 ‘시수(sisu)’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핀란드어인 ‘시수’를 다른 언어로 직접 번역되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 고유한 핀란드 정신으로 설명될 수 있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1940년 보도된 미국 뉴욕타임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시수’는 ‘허세와 용기, 맹렬함과 강인함, 대다수가 포기한 뒤에도 계속 싸울 수 있는 능력과 이기겠다는 의지를 갖고 싸우는 힘이 어우러진 것’이다. 인터넷 오픈 사전 어번 딕셔너리는 ‘시수’를 ‘핀란드의 정신을 상징하는 단어’로 정의한다.

지난해 우승팀인 노르웨이의 스마트폰 보정기 전문업체 플로모션은 상금으로 1만 유로를 받았다.
종합해 보면 기근이나 전쟁, 불경기 또는 혹독한 겨울 등 어떤 상황에서도 핀란드인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인 듯하다. 560년간(1249~1809)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러시아의 지배를 108년간(1809~1917) 받은 핀란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웃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으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남은 저력을 바로 ‘시수’라고 말할 수 있다. 밟아도 죽지 않는 잡초처럼 강인한 핀란드의 생명력이라고나 할까?

켐팔라는 노키아의 몰락에 따른 어려운 시기를 오울루가 견뎌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시수’라고 말했다. “핀란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시수’를 알아야 해요. 노키아의 붕괴 후 오울루가 다시 일어선 것도, ‘폴라 베어 피칭’의 정신도 전부 ‘시수’가 바탕이 됐거든요.”

그녀의 자세한 설명에도 난 아직도 ‘시수’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자신이 없다.

켐팔라는 “그런데 마침 잘 됐네요”라며 슬쩍 주제를 바꿨다. “내일 ‘폴라 베어 피칭’에 참가하기로 돼 있던 스타트업이 경연을 포기했어요. 그들은 몸이 좋지 않아 얼음물 속에 들어갈 수 없는 형편이라서 그래요. 우린 그들을 대신해 프레젠테이션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당신이 IT 전문기자이니 이번 기회에 경연에 참가해 ‘시수’를 제대로 배워 보는 게 어때요?”

다음날 저녁 나는 바로 몇 시간 전에 알게 된 한 스타트업의 사업 아이디어를 프레젠테이션할 준비를 위해 탈의실에 들어갔다. 두꺼운 겨울옷을 다 벗고 운동용 반바지로 갈아 입으면서 방금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남자에게 얼음물 속이 견딜 만한지 물었다. 몸집이 큰 그는 양팔에 문신을 새겼고 머리를 빡빡 밀었으며 배는 체조용 공처럼 둥글고 단단했다. 붉그스레하게 번쩍이는 몸에 젖은 반바지 차림으로 선 그는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면서 “별것 아니죠”라고 단조로운 핀란드인 어조로 답했다. “고양이 오줌 정도라고나 할까요.”

그러자 다른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그 말을 잘못 듣고는 “당신도 얼음물 속에서 소변을 봤다고요?”라고 물었다. 말을 잘못 들은 그 남자는 너무 추워 몸을 약간이라도 녹이며 프레젠테이션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얼음물 속에서 소변을 보려 했다고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다. 그는 그 직전에 맥주 두 잔을 급하게 마시고 얼음물 속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소변을 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경연 참가자들이 얼음물 속에서 견디려고 짜낸 전술은 그뿐이 아니었다. 한 스타트업의 대표는 바셀린을 가득 채운 수영모자를 들고 얼음물 속에 들어가 자신의 가장 예민한 부위에 문질러 발랐다고 털어놓았다. “어제 찬물 안에서 연습했을 때 그 부위가 너무 아팠다”고 그는 내게 말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내가 대신 프레젠테이션하는 스타트업 회사의 이름을 까먹을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나는 손등에 볼펜으로 그 회사 이름을 눌러 쓰고 발표할 내용까지 생각나지 않을 때를 대비해 원고도 들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오울루의 2월 평균 기온은 영하 10℃다. 반바지에 양말을 신고 가운을 걸친 채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벌써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마침내 얼음 구멍 속에 들어가자 내가 경험한 첫 감각은 쇼크였다. 첫 몇 문장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냥 얼얼할 뿐 피부 아래서 추위가 실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난 “자, 제가 설명하려는 것이 뭘까요?”라며 떠듬거렸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이 얼어붙으면서 말할 내용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난 “소셜 미디어 광고 플랫폼이죠”라고 둘러댔다. 곧 다시 생각났지만 정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폴라 베어 피칭’이 시작된 이래 프리젠테이션 최고 기록은 7분이 넘는다고 전해진다.
난 1분 30초 약간 넘을 때까지 버텼다. 추위를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기도 전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보다 용감한 참가자들은 거의 4분을 견뎠다. 그러나 여러 참가자들은 ‘폴라 베어 피칭’이 시작된 이래 최고 기록은 7분이 넘는다고 말했다.

얼음 구멍에서 나와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온수 욕조로 걸어갈 때까진 몸이 별로 떨리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다리를 담그자 처음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첫 30초 동안 나의 아랫도리는 바늘에 찔리는 듯 따끔거렸고 윗도리는 마꾸 떨렸다.

참가업체 18개 중 나의 프레젠테이션 순서가 맨 마지막이었다. 내가 온수 욕조에 앉아 있는 동안 경연대회 결과가 발표됐다. 올해 우승팀은 핀란드의 전기차 충전 관련 스타트업 비르타였다. 그 팀은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2명이 얼음물 속에 들어가 서로의 등을 임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로 활용했다.

그들은 뒤로 공중제비를 넘어 얼음물로 들어간 지난해 우승팀에 뒤지지 않으려고 사업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프레젠테이션 연기에서도 그처럼 최선을 다했다(올해 대회에선 건강과 안전을 이유로 공중제비와 물속에 머리 담그기를 금지했다).

지난해의 우승팀은 노르웨이의 스마트폰 보정기 전문업체 플로모션이었다. 플로모션은 1만 유로의 상금을 탔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홍보 효과였다. 그들은 ‘폴라베어 피칭’ 우승의 효과로 지난해 말 킥스타터 캠페인에서 130만 달러를 확보했다.

올해 우승한 비르타 팀은 홍보 효과에서도 플로모션에 근접할 수 있을지 걱정이 클 것이다. 하지만 대회가 끝난 그 순간엔 그들도 상금으로 받은 대형 수표를 어떻게 현금으로 바꿔야 할지 궁금해 하면서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느라 바빴다.

나는 따뜻한 내 호텔 방으로 돌아가면서 늘 쾌활한 켐팔라를 지나쳤다. 그녀는 “이제 ‘시수’가 뭔지 알겠어요?”라고 물었다.

“대충은 감 잡았죠”라고 난 거짓말을 했다. “아무튼 고마워요.”

- 앤서니 커스버트슨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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