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올리가르히의 수난 시대

올리가르히의 수난 시대

미국의 제재 강화로 러시아 신흥재벌과 기업의 피해 눈덩이처럼 불어나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올레그 데리파스카 루살그룹 회장은 미국의 새 제재 대상에 오르면서 개인 재산이 크게 줄어들었다. / 사진:AP-NEWSIS
지난 1월 26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러시아의 올리가르히(신흥재벌)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올레그 데리파스카 루살그룹 회장은 호화 샬레에서 파티를 열었다. 샴페인이 흘러넘치고 스피커에서 신나는 음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손님들은 철갑상어알 요리를 맘껏 즐겼다. 유명한 라틴 팝가수 엔리케 이글레시아스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날 사진을 보면 흥이 오른 데리파스카 회장은 타이를 풀고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데리파스카 회장은 더는 춤이 내키지 않는 것 같다. 지난 4월 6일 미국은 크렘린과 연계된 다른 올리가르히 6명과 함께 그를 제재 대상에 올렸다. 여러 러시아 고위 관리와 기업도 그 명단에 포함됐다. 강화된 제재에 따르면 그들은 미국 국적자와 사업 거래를 할 수 없고, 그들이 미국에 가진 자산도 동결된다. ‘2차 보이콧(secondary boycott) 원칙’에 따라 그들과 사업하는 다른 국가 국적자도 미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

미국 의회는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시리아·우크라이나 군사 작전 등 여러 ‘적대적 와해 활동’과 관련해 이처럼 강력한 새 제재 조치를 도입했다. 미국 재무부는 성명서를 통해 “러시아 올리가르히와 지배계층도 러시아 정부의 와해 활동에 대한 제재에서 예외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미국의 새로운 제재가 발표되면서 루블화 가치는 단 일주일만에 1999년 이래 가장 가파른 하락세인 10%가 떨어졌다가 약간 회복했다. / 사진:AP-NEWSIS
이전에도 미국은 러시아 사업가와 관리들을 대상으로 자산을 동결하고 비자 발급을 금지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제적 이익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 제재는 이번이 처음이다.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의 분석가 알렉산드르 바우노프는 “이젠 제재가 러시아 외교정책 수정을 유도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며 “미국의 새로운 제재는 러시아를 전방위로 최대한 압박한다”고 말했다.

데리파스카 회장이 제재 대상에 포함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측근이자 한때 대선캠프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폴 매너포트와 수년 동안 거래했기 때문이다. 매너포트는 ‘러시아 스캔들’(러시아 정부-트럼프 대선 캠프의 공모와 트럼프 대통령 측의 사법방해 의혹)과 관련한 로버트 뮬러 특검의 수사에서 기소된 인물이다. 러시아 야권 인사들은 데리파스카 회장이 2016년 8월 노르웨이 연안에서 요트 여행을 하면서 매너포트로부터 입수한 트럼프 대선운동에 관한 정보를 푸틴 대통령의 참모인 세르게이 프리호도코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데리파스카 회장은 혐의를 부인하며 미국의 제재를 두고 “아무런 근거 없고 터무니없으며 불합리한 조치”라고 말했다. (매너포트 회장은 뉴스위크의 논평 요청에 회신하지 않았고 프리호도코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베트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제(APEC) 기업인자문회의장에 입장하는 푸틴 대통령과 데리파스카 루살그룹 회장. / 사진:AP-NEWSIS
그러나 제재에 따른 피해는 벌써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알루미늄 대기업인 루살그룹의 주가는 4월 9일 시가에서 절반 이상 폭락했다. 세계의 투자자들이 그의 사업체와 거리를 두면서 그의 개인 자산도 48시간 만에 54억 달러에서 37억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사실 데리파스카 회장만 그런 것도 아니다.

러시아 언론은 4월 9일을 ‘블랙 먼데이’로 불렀다. 경제 잡지 포브스에 따르면 그날 러시아 50대 부호는 전부 합해 12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치를 잃었다. 금속업 재벌로 순자산 가치 15억 달러가 줄어든 블라디미르 포타닌을 포함해 그중 다수는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르지도 않았다. 제재 대상으로 지정된 올리가르히 중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가한 억만장자 투자자 빅토르 베크셀 베르크와 러시아 최대 금 생산업체인 폴리우스를 소유하는 술레이만 케리모프는 모두 합해 2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투자자들은 러시아 기업의 주식도 대량으로 매각했다. 러시아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고 푸틴 대통령이 영국에서 러시아 이중첩자 출신 망명자의 암살기도를 지시했다는 의혹에 따라 미국이 추가적인 제재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미국의 제재는 러시아의 통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루블화 가치는 단 6일만에 거의 10%(1999년 이래 가장 가파른 하락세)가 떨어졌다가 약간 회복했다.

러시아 관리들과 국영 언론은 이전의 미국 제재를 허약하고 비효과적이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누구도 웃을 수 없는 형편이다. 지난해까지 러시아 경제부의 예측팀을 이끌었던 분석가 키릴 트레마소프는 “이번에 미국이 러시아의 경제 고립을 목표로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이로써 서방과의 관계가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이제 새로운 현실에 마주쳤다.”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미국의 제재 강화를 환영했다. 이번 제재 대상엔 2013년 푸틴 대통령의 딸과 결혼한 억만장자 키릴 샤말로프도 포함됐다. 나발니는 SNS를 통해 “이들은 우리의 돈을 훔치고 러시아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크렘린은 미국의 제재에 “똑같이 강력한 조치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국 경제를 해치지 않고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분석가들은 러시아 중산층이 고통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루블화가 허약해지면서 수입 식료품·의류·의약품 가격이 급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데리파스카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이던 폴 매너포트(가운데)와 수년 동안 거래했다. / 사진:AP-NEWSIS
또 푸틴 대통령의 과거 행동으로 미뤄보면 러시아 대중은 앞날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서방이 제재에 들어갔다. 그러자 푸틴 대통령은 미국과 유럽의 식품 수입을 금지함으로써 대응했다. 그런 결정으로 러시아 국내 물가가 급등하면서 중산층의 분노가 표출됐다. 이탈리아산 치즈와 스페인산 햄 등 그들이 그동안 즐기던 수입 식품을 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이번 제재로 러시아인은 여름휴가 계획까지 망쳤다. 해외여행이 더 비싸져서다. 러시아 여행사들에 따르면 해외여행 예약 건수가 40% 정도 줄었다.

현재 러시아 의회는 술·의약품·담배 등 다양한 미국 상품의 수입을 금하는 보복 조치를 제안하고 나섰다. ‘맞불’ 제재인 셈이다. 또 미국 지적재산권 침해를 합법화하는 방안과 티타늄 대미 수출 금지도 검토한다고 발표했다. 티타늄 금수조치는 미국 항공기 제작사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러시아의 국영 VSMPO-아비사마는 세계 최대의 티타늄 관련 제품 생산업체로 보잉에 상당량의 티타늄을 판매한다). 그러나 분석가들은 그런 조치가 지금보다 더 심한 수준의 미국 제재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러시아 관리들은 맥도널드·포드·펩시 등 러시아에서 사업하는 미국의 다국적 업체를 겨냥하는 방안을 거론한다. 그러나 그런 다국적기업은 러시아인 수만 명을 고용하고 러시아산 재료와 부품을 사용한다. 영국의 정치 리스크 관련 자문업체 GPW의 모스크바 주재원 앤드루 리스크는 “그런 방안을 검토할 때 러시아는 국내 업계와 소비자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고려해 대응 방안의 비용편익을 철저히 분석하면서 실보다 득이 많은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크렘린은 업계 지도자들이 불만을 갖지 않도록 다독거려야 한다고 분석가들은 지적한다. 러시아 정부는 많은 인력을 고용하는 업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6만2000명을 고용하는 데리파스카 회장의 라술그룹이 대표적이다. 또 관리들은 제재 대상에 오른 기업들의 어려움을 덜어줄 목적으로 러시아 내부에 세제와 규제 관련 혜택을 제공하는 특별 구역을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미국의 러시아 제재 강화를 환영했다. / 사진:AP-NEWSIS
그러나 크렘린과 연계된 기업가들에게 세제 혜택을 제공하면 사회 분위기가 악화될 수 있다. 수많은 러시아인이 빈곤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정부는 최저임금(현재 월 19만원 정도의 수준이다)을 인상할 재정적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야권 성향의 라디오 방송 에코 모스크비를 운영하는 알렉세이 베네딕토프는 생방송 토론에서 “여러분이 낸 세금인 국가 예산이 데리파스카를 돕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재벌 사업가들은 미국의 제재에 따른 막대한 재정적 손실에도 푸틴 대통령을 지지한다(적어도 공개적으론 충성을 표한다). 저명한 정치 분석가 예카테리나 슐만은 “그들 모두 러시아의 적으로부터 당하는 고통이 심하다며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방과 대치하는 크렘린을 보면서 실망이 커질 수도 있다.

러시아 금융사업가 출신으로 지금은 영국에서 반(反) 푸틴 운동을 벌이는 블라디미르 아슈르코프는 “푸틴 대통령의 측근만이 아니라 정·재계 엘리트층 인사들도 재산 피해가 막대할 뿐 아니라 이제 그들은 국제 자본시장에도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그들은 러시아가 최근 들어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등 국제 문제에 깊숙이 개입해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면서 그런 상황이 더는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푸틴 대통령은 만약 그런 불평이 반체제 운동으로 발전한다면 그들을 무자비하게 단속할 수 있다. 2005년 석유업계의 거물이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는 고위층의 부패를 두고 푸틴 대통령에게 도전한 뒤 논란 많은 사기 혐의로 구속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외에도 분석가들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잘 알려진 재계 거물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려 나머지 사업가들이 겁먹고 고분고분 따르도록 만들었다. 거부 사업가였던 블라디미르 예브투셴코프가 2014년 불황기에 돈세탁 혐의로 체포됐다가 나중에 기소 취하로 풀려난 것이 그런 사례다.

아슈르코프 같은 반체제 망명 인사들은 강력한 국제 제재가 러시아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좀 더 온건한 외교정책으로 전환하고 그 대신 국내에서 더욱 압제적으로 나가면 서방은 못 본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럴 경우 서방의 제재가 완화되거나 해제될 수 있다. 서방은 직접적인 피해만 없다면 러시아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 쓰지 않는다.”

- 마크 베네츠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주금공, 12월 보금자리론 금리 동결…연 3.95~4.25%

24대은행, 경북 청도시장서 ‘공동ATM’ 운영

3iM뱅크, 가산·동탄 점포 12월 말 개점…8.5% 고금리 적금 판매

4테슬라 실주행 측정하니...'계기판 주행가능거리' 보다 120㎞ 못가

5산업은행-오픈AI, AI생태계 조성 위해 ‘맞손’

6조병규 우리은행장 "조직 쇄신 위해 연임 않겠다"

7 외교부 "추도식 관련 日 태도에 어제 유감 표명"

8내년 韓 경제성장률 '주춤'…트럼프 당선 때문?

9티웨이항공, 신입 및 경력 사원 채용...내달 4일까지

실시간 뉴스

1주금공, 12월 보금자리론 금리 동결…연 3.95~4.25%

24대은행, 경북 청도시장서 ‘공동ATM’ 운영

3iM뱅크, 가산·동탄 점포 12월 말 개점…8.5% 고금리 적금 판매

4테슬라 실주행 측정하니...'계기판 주행가능거리' 보다 120㎞ 못가

5산업은행-오픈AI, AI생태계 조성 위해 ‘맞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