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수치 여사는 뭘 원할까’

‘수치 여사는 뭘 원할까’

한때 인권의 수호자로 칭송 받던 미얀마 지도자가 무슬림을 학대하고 외부세계를 속이려 한다고 비난 받는다
사진:SAURABH DAS-AP-NEWSIS
미얀마 수도 양곤의 유명 음식점 ‘하우스 오브 메모리스’. 티셔츠 차림의 20대 청년 2명이 미얀마 지도자 아웅산 수치(72)에 관한 한 방문자의 질문을 긴장된 표정으로 경청하고 있었다. 양곤에서 서쪽으로 약 970㎞ 떨어진 라카 인주에서 군대가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상대로 인종청소를 해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방문객은 수치 여사가 이런 행동을 허용했다고 보는지 알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해산물 샐러드와 야채 튀김을 먹으면서 옆 테이블에 있던 일본인 관광객들을 가리키며 서로 뭔가를 속삭이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애처로우면서도 반항적인 어조로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그들은 버마족이 아니에요.” 로힝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웅산 수치의 명성이 크게 퇴색됐다.지지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아웅산 수치. / 사진:U AUNG-XINHUA-NEWSIS
미얀마의 다수민족인 불교도 버마족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들은 수치를 자신들 편으로 여긴다. 그녀는 영국과의 전쟁을 이끌었던 아웅산 장군의 사랑 받던 막내딸이다. 아웅산 장군은 1947년 영국이 미얀마의 독립을 인정하기 불과 몇 달 전 정적들에게 암살당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교육받은 그녀는 수십 년 동안 군사정권에 반대한 애국자 중 애국자다.

군사정부는 1962년 정권을 잡은 뒤 전체주의 통치를 시작했다. 수치는 반체제 저항 운동가로 1988년 군부에 대한 전국적인 항의시위의 상징이 됐다. 당시 군부가 시위 탄압에 나서 수천 명의 국민을 죽였다. 미얀마에선 ‘여사(The Lady)’로 알려진 수치는 10년 이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그녀의 저항은 치열했다. 군사정권이 자신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을까봐 잉글랜드에서 거행된 영국인 남편 마이클 애리스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1991년 비폭력 투쟁 정신, 민주주의·인권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투쟁은 그 뒤로도 20여 년 더 계속됐다. 그러다가 2015년 테인 세인 당시 대통령이 자유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서방의 제재로 경제가 또다시 수렁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승리해 민정을 구성하고 수치가 현재 국가 고문으로 당을 이끈다.
정부군과 싸우는 카친족 독립군 전사. / 사진:ESTHER HTUSAN-AP-NEWSIS
그러나 총선 후 약 3년이 지난 오늘날 그녀가 무엇보다도 국적 없는 로힝야족을 희생시키고, 언론자유를 후퇴시키고, 다양한 무장단체들과 평화 체제를 구축하지 않고, 이런 태도로 장성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군사·방위·국가안보 정보를 제공하는 영국 기업 제인스의 방콕 주재 분석가 앤서니 데이비스는 “사실상 수치의 위대함은 재야에서 활동하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정치판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실수를 범했다. 군부의 얼굴마담이자 인질이 됐다.”

그렇다고 장성들이 그녀가 제공하는 화장발에 흡족해 하는 것도 아니다.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과 밀접한 관계의 한 퇴역 고위장교는 “그녀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며 서방의 압력으로부터 군부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이 기사를 위해 인터뷰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민감한 사안이라며 익명을 요구했다. 수치와 그녀의 국가고문실 모두 논평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수치 고문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 / 사진:AUNG SHINE OO-AP-NEWSIS
수치의 추락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를 항상 테레사 수녀와 잔다르크를 합쳐놓은 이미지로 봐왔던 사람들이 갖고 있던 높은 기대의 희생양이 됐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지난해 영국 BBC 방송 인터뷰에서 “나는 정치인일 뿐”이라고 항변했다. 총선 승리 후 그녀는 아웃사이더-운동가에서 궁극의 정치적 인사이더로 변신했다. 하지만 평행선을 달리는 두 정부 사이에 갇힌 신세가 됐다. 표면상 미얀마의 수뇌지만 헌법상의 권한을 부여받아 권력을 유지하는 강력한 군부에 고삐를 잡힌 신세다. 그녀의 정당은 교활한 장성 그룹을 조종하거나 통치에 뛰어난 수완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분석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수치가 자신의 조심성과 통제욕구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녀가 로힝야족 위기를 완화하지 못한 것은 원주민 다수파의 무슬림 그룹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지나치게 경계하기 때문이다.
수치(왼쪽)는 미얀마 국경을 넘기 전 총상을 입은 이 아이(아래)처럼 로힝야족 대상의 잔학 행위를 규탄하지 않았다. / 사진:GEMUNU AMARASINGHE-AP-NEWSIS, AP-NEWSIS
정치수 출신으로 현재 양곤의 공공 권익운동 싱크탱크 탐파디파 연구소를 이끄는 킨 조 윈은 “그녀는 민족주의 자”라며 “상당수 버마족은 로힝야족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녀도 그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3년 전 수치가 총선에서 낙승했을 때 그녀의 추종자들은 열광했지만 앞길에 놓인 장애물도 의식하고 있었다. 물론 군부가 선거 결과를 용인했지만 그 배경에는 그들이 갖고 있던 권력의 대부분을 지키리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2008년 장성들은 의회 의석의 25%와 함께 국방부·국경관리부·내무부 등 주요 부서의 통제권을 군부에 배정하는 새 헌법의 승인을 강행했다. 특히 군부의 휘하에 들어간 내무부는 세금을 걷어들이고 토지구입부터 사망까지 모든 일을 기록하는 방대한 관료체제였다. 그런 권력을 손에 넣음으로써 국민의 개인·사업 정보뿐 아니라 국가 자산을 움직이는 지렛대를 맘껏 주무를 수 있게 됐다.

군부는 또한 가족 중에 외국 국적자가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이 규정이 명백하게 수치를 견제하려는 목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녀는 영국인과 결혼했을 뿐 아니라 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도 영국인이다. 총선에서 NLD가 승리했을 때 수치가 국가고문 타이틀을 택한 것도 헌법에서 그녀의 대통령 지명을 금지했기 때문이다(“2008년 헌법의 원칙들은 미얀마의 계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최선의 보호장치”라고 퇴역 군 장교는 주장한다).

오늘날 수치의 지지자들은 라카인주 로힝야족의 강제추방·사지절단·강간·살해를 수치가 막지 못하는 것은 헌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군부의 로힝야족 탄압은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최근의 위기는 지난해 8월 본격화됐다. 그 뒤로 미얀마의 로힝야족 약 110만 명 중 70만 명 정도가 방글라데시로 피신했다. 유엔과 인권단체들은 군대가 도망치는 로힝야족의 마을들을 불태우며 집단학살을 자행했다고 말한다. 수치가 장성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그녀 지지자들의 지적은 정확하다. 군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예산도 독자적으로 수립한다. 지난해 총 예산은 21억4000만 달러로 국가 지출의 14%에 육박했다.

군 장성들이 멸시 받는 로힝야족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얀마의 소수민족 집단과 협상을 방해하려 한다는 냉소적인 주장도 제기된다. 정치수로 두 차례 감방을 다녀온 미디어 컨설턴트 진 린은 “수치가 평화와 화해를 말할 때 군대는 소수민족 지역에서 더 많은 공세를 펼친다”며 “현재 카친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로힝야족은 미얀마에서 국적 없이 아무런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다. 사진은 미얀마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항의 시위를 벌이는 방글라데시 난민촌의 로힝야족. / 사진:AP-NEWSIS
장군들도 평화를 원하지만 “소수민족 군대에 권력이나 영토를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퇴역 장교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어쨌든 제인스에 따르면 지난 4월 초 8000명의 전사를 거느린 민병대 ‘카친 독립군’과 미얀마군 사이에 새로 전투가 시작됐다. 그 싸움으로 중국 바로 아래 위치한 미얀마의 그 최북단 주에서 지금까지 6000명 이상의 카친족이 피란을 떠났다. 진 린은 “사실 수치 여사는 이 나라에서 또 다른 유혈극을 원치 않는다”며 “그녀는 모든 민족과 통합, 정치적 계약을 원한다. 그녀가 그렇게 조심스러운 이유”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수치는 로힝야족 대상의 잔학 행위를 규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로힝야족이라는 단어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을 나름의 권리를 가진 별개 그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속내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그녀가 유엔이 비판하는 “대학살 행위”와 “인종청소의 교과서적 사례”를 축소한다는 비판도 있다. 수치는 지난해 9월 이번 위기에 관한 첫 논평에서 악화하는 무슬림 관련 위기를 “가짜 뉴스” 탓으로 돌리며 “오보의 거대한 빙산”이라고 평했다. 그해 3월에는 그녀의 국가고문실에서 미얀마 정부군 병사들이 로힝야족 여성들을 성폭행했다는 주장을 “가짜 강간”으로 일축했다.

탐파디파 연구소의 킨 조 윈은 “그들은 ‘강간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증거는 모두 그곳 라카인주 사람들 특히 여성들 몸에 있다. DNA 검사를 하면 그것이 증거가 된다. 수치가 ‘증거를 대라’고 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수치를 더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권감시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의 아시아 지부 필 로버트슨 부국장은 “군대가 로힝야족에게 저지른 반인륜 범죄를 은폐하려는 그들을 수치가 나서서 옹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수치가 이끄는 NLD는 여전히 인기 정당이다. 열병식 중인 미얀마 정부군 병사들. / 사진:AUNG SHINE OO-AP-NEWSIS
하지만 로힝야족과 기타 민족집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미얀마에는 신뢰할 만한 여론조사가 없지만 압도적 과반수의 버마족 불교도는 로힝야족을 외국인으로 간주해 ‘벵골인’으로 부르며 극히 싫어한다고 분석가들은 말한다. 영국 식민지주의자들이 현재의 방글라데시에서 일꾼으로 끌어들인 이들은 대략 2세기 전 이주한 나라에서 여전히 국적 없이 아무런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다. 군사정권은 다수 민족인 버마족에게 다른 모든 민족집단보다 우월한 지위를 부여해 그들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 정치수 출신으로 수치의 보좌관을 지낸 의사·작가·운동가인 마 티다 박사는 “군부는 버마족에게 우월한 지위를 보장하려 한다”며 “정부 당국에 의도적이고 무능한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고 말했다.

군부가 인정하는 소수민족그룹은 135개이며 미얀마 전체 인구 5400만 명의 25%를 차지한다. 나머지 75%는 버마족 즉 바마르족이다. 소수민족 중 최대 그룹으로는 샨·카렌·라카인·카친·친 족 등이 있다. 버마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들 소수민족 집단을 탄압해 왔다. 가장 최근에는 군부 실력자들이 그들을 후원했다. 상당수 소수민족이 저항운동을 전개하면서 현재 21개의 “민족 무장조직”이 생겨나 미얀마에서 활동한다. 2012년 이후 군과 준(準)민간정부(그리고 이제 현 정부)가 휴전협정을 추진하면서 국가적 화합을 이뤄 적대행위를 끝내고 무장단체들을 무장해제하는 휴전협정을 추진해 왔다.

앞서의 퇴역 장교는 “소수민족 그룹들이 휴전협정에 서명해야만 협정이 성사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조직들은 지역의 자치권을 요구한다. 휴전협정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서명한 그룹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

2015년 다수의 소수민족 유권자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수치에 혹해 NLD에 표를 몰아줬다. 미국 기반 싱크탱크인 프로젝트 2049 연구소의 미얀마 지국장이자 친족 정치운동가인 치어리 자하우는 “친족은 NLD보다는 그녀를 보고 투표했다”며 “보통 사람들은 수치가 찾아와 자신들에게 직접 먹을 것을 주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치어리 지국장은 그런 변화를 직접 경험했다. 친주의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수치의 정당 후보에 패했다. 친주는 도로·전력공급·병원 등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여전히 미얀마에서 가장 가난한 주에 속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지금은 수치가 자신들을 구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친족은 자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양곤에서 공판 후 이동하는 초소에 우 로이터 기자. / 사진:THEIN ZAW-AP-NEWSIS
카친주의 카친족도 비슷한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특히 2011년 17년에 걸친 휴전이 깨진 뒤 간헐적으로 전투가 이어지면서 바로 지난 4월에도 미얀마 군의 공격을 받은 상황이다. 수치의 정당이 이끄는 카친주 정부는 피란민을 수용할 난민촌을 승인하고 구조작업을 허가했지만 미얀마 정부군이 그런 노력을 차단했다. 분쟁을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위장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기능이 마비된 “2개 정부”의 또 다른 사례였다. 반군부항의시위가 빈발하는 카친족 도시 미트키나의 카친 침례교 연맹 사무총장인 흐칼람 샘슨 목사는 전화 통화에서 “두 개의 조직이 따로따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80만 명에 달하는 이 주 주민 중 대략 절반이 침례교도이며 이들 복음주의 조직이 마을 주민과 난민 대상으로 지원활동을 펼친다. 샘슨 목사는 “수치 고문은 우리를 몹시 혼란스럽게 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서방 정부들만 상대하지 소수민족 문제는 외면한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실망하는 이유다. 그녀는 군부와 너무 밀착돼 있다.”

소수민족 집단에 대한 군사작전이 계속 확대됨에 따라 그런 실망이 해소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지난 5월 중순 샨주 중국 접경 인근에서 아편재배 반대 활동으로 유명한 반군단체 타앙 민족해방군(Ta’ang National Liberation Army)과 정부군 간에 전투가 벌어져 최소 19명 이상이 사망했다. 샘슨 목사는 수치의 평화전략이 좌초됐다고 말했다.

수년 간 장성들을 향해 말폭탄을 날리던 수치는 그들과 불편한 관계다. 한 측근에 따르면 그녀는 사석에서 자신과 민 아웅 흘라잉 장군 사이에 “아무 관계도, 아무 소통도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총선 후 흘라잉 장군과 친해지려 했지만 라카인주의 폭력사태로 그런 노력도 물거품이 됐다. 수치를 잘 아는 또 다른 소식통은 그 뒤로 “두 정부” 지도자가 샅바싸움을 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치는 현실정치(realpolitik)의 관점에서 비난을 삼가면서 군부와의 충돌을 피해왔다. 그녀가 사석에선 라카인주 인종청소에 군대의 개입 사실을 인정한다고 그 소식통은 전하지만 공식석상에선 그와 비슷한 말을 한번도 꺼낸 적이 없다.
틸라와 특별경제구역의 공장 근로자들. / 사진:U AUNG-XINHUA-NEWSIS
수치의 비판자들은 헌법상의 제약에 따른 권력 행사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녀가 2015년 총선 직후의 인기에 편승할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한다. 제인스의 분석가 데이비스는 “그녀는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고 말했다.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개헌을 추진할 적기였다. 군부도 필시 움찔했을 것이다. 그녀라면 반 시간 만에 50만 명을 랭군 거리로 불러낼 수 있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군부는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는 데 거의 망설임이 없었다. NLD 소속의 보보 우 의원은 수치가 이끄는 민간 정부는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가두시위를 하지 않는 “점진적인 접근법”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장성들이 권력을 잡고 있으니 필시 실력을 행사하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 구슬리는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보보 우 의원은 지난 2년 간 수치의 업적을 꼽아 달라고 하자 “대단히 엄격한 헌법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시인한 뒤 세제개혁(“세수가 상당히 늘었다”), 교육과 건강의료의 개선을 들었다. 정치수 출신 킨 조 윈은 빈약한 성과인 건 사실이라고 말한다. 규제 단순화로 투자를 확대하고 붕괴되는 인프라 개선안을 내놓은 공로는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그래도 대단한 업적은 아니라고 그는 평한다. 정부 관료들은 대부분 어려운 정책 문제에는 마치 말로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양 구두탄을 남발했다.

석유·가스 기업 그룹 스마트의 초 초 흘라잉 회장은 “역량도 열정도 모두 떨어진다”고 말했다. 정부가 특정 직책에의 능력이나 열정을 보지 않고 수치와의 친분 관계를 따져 관료를 임명한다는 의미다. 그는 “모든 일이 병목에 걸려 진척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무도 결정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게 수치 여사 또는 장관을 거쳐 그녀 앞에 놓인다.” 그는 허공에 대고 정신 없이 두 손을 휘젓는 몸짓을 하며 관료들을 패러디한다. “‘여사가 무엇을 원하지? 여사는 어떻게 할까?’ 그들은 그녀를 겁내는 게 아니라 일자리를 잃을까 무서워한다.” 수치의 권위적이고 외로운 늑대형 관리 스타일도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지적하는 분석가도 있다. NLD가 2015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전에도 그녀는 헌법 규정상 대통령이 되지 못하더라도 “대통령의 상전이 되겠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민간인 대통령(먼저 지난 3월 물러난 틴 초 그리고 지금은 윈 민)은 주로 수치 고문에게로 이어지는 통로 역할을 했다. 수치 여사는 외교부 장관 역할도 맡는다. 킨 조 윈은 “그녀의 정부는 개인화된 중앙집권형으로 장관들이 모두 그녀를 대단히 두려워하며 감히 비판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수치가 더 결단력 있다면 이런 중앙집중형 시스템이 효과적일 수 있다고 비판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스마트의 초 초 흘라잉 회장의 말마따나 “그녀는 결정을 내릴 때 결과에 너무 신경 쓴다.”
일부 로힝야족에 시민권을 부여하려는 정부안에 항의하는 불교도들. / 사진:ESTHER HTUSAN-AP-NEWSIS
그런 우유부단한 태도가 수치의 2020년 총선 전망을 어둡게 할 수 있다고 분석가들은 말한다. HRW의 로버트슨은 “2020년 미얀마에서 다시 총선이 실시될 때는 그녀가 재임기간 중 이룬 업적보다 그녀의 전설적인 과거 경력에 미얀마인이 더 큰 관심을 갖도록 기대하는 편이 좋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러나 수치 여사는 많은 업적을 자랑할 수 없더라도 승리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유권자는 연방주의와 평화 같은 거시적 문제보다는 전력공급과 쓰레기 수거 개선, 주차장과 유기견 보호소 신설 등에 더 관심이 많다고 NLD 소속 보보 우 의원은 주장한다. “이슈 별로 해결해 나갈 작정이다. 그리고 국민은 여전히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NLD만한 정당이 없다고 믿는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NLD는 여전히 인기 정당이며 유권자에게 선택지도 많지 않다. 최선의 대안은 사실상 통합단결발전당을 내세운 군부다. 장성들은 국정운영을 민간인에게 맡기고 대신 군사력 강화와 수익사업에 집중하는 데 만족한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2020년 총선에서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본격적으로 수치의 라이벌로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가 출마할까? 몇 가지 조짐이 보인다. 그는 공개석상에 곧잘 모습을 드러내고 요즘 소셜미디어를 이용한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미얀마 국민은 통상적으로 군부에 반감을 갖고 있지만 흘라잉 장군은 불교도 버마족 사이에서 어느 정도 지지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그가 로힝야족과 기타 소수민족 집단을 잔혹하게 탄압해 왔기 때문이다. 일부 버마족은 그를 불교의 수호자로 간주하기도 한다.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 장군. / 사진:LYNN BO BO-AP-NEWSIS
그는 수치와 그녀의 정당에 대다수 정부부처의 통제권을 떠넘긴 뒤 느긋하게 그녀의 정책 실패를 비난하는 위치에 있으며 미얀마의 비민주적인 행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막는 방패막이로 그녀를 내세울 수도 있다. 데이비스 분석가는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의 입장에선 많은 버마족에게 폭넓은 해외여행 경험을 가진 유능하고 강력한 지도자로 인기를 모으면 군대의 후원이 강화되는 한편 국내에서 갈수록 도전이 거세진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불교 국가의 수호자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썼다.

그러나 장군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중적 지지를 받고는 있지만 그의 동료 일부도 그의 야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앞서의 퇴역 장교는 “군 내부에 그의 태도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많다”며 “장군이 국가의 이익보다 개인의 권력과 부에 더 관심이 많다고 보는 하급 장교가 많다”고 말했다.

만일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총선에서 수치 여사를 누른다면 군부가 다시 미얀마의 정권을 완전 장악할 수 있다. 마 티다 박사는 “군부는 항상 정통성에 목 말라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2008년 개헌과 그 뒤의 총선으로 그것을 손에 넣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군사 쿠데타는 또 다시 없을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쿠데타의 필요성은 아예 없어진다.

수치는 그런 결과는 피하려고 작정한 듯하다. 로힝야 사태로 군부와 충돌하거나 평화 절차에서 장성들을 너무 앞서가지 않으려는 그녀의 조심성은 그 정치적인 폭발력을 그녀가 인정한다는 방증이라고 킨 조 윈은 말한다. 지난해 12월 이후 미얀마에 잡혀 있는 로이터 통신 기자 2명을 석방하려 노력하지 않는 듯한 것도 마찬가지다. 기자들은 라카인주에서 로힝야족 10명의 피살을 취재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언론자유를 불신하는 그녀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고 종종 정부 관계자들에게 기자들의 취재에 응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그러나 실망한 그녀 후원자들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충성을 다짐한다. 카친족 지도자 샘슨 목사도 그중 하나다. 그는 “그녀 혼자 힘으로는 이 괴물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우리가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

- 레녹스 새뮤얼스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시중은행 해외 진출…다음 공략지는 동유럽 되나

24대 은행 해외법인 순익…신한 ‘맑고’ KB ‘흐림’

3삼성전자 노사 임금협상 파행...노조, 기자회견 예고

4쿠팡 PB 상품 우선 노출했나...공정위 심의 하루 앞으로

5일동제약 우울장애 치료제 '둘록사'...불순물 초과로 회수 조치

6‘오일 머니’ 청신호 켠 카카오모빌리티…사우디 인공지능청 방문

7‘레녹스 합작법인’ 세우는 삼성전자가 노리는 것

8고령화에 日 기업 결단...줄줄이 '직책 정년' 폐지

9여름 아직인데 벌써 덥다...덩달아 바빠진 유통업계

실시간 뉴스

1시중은행 해외 진출…다음 공략지는 동유럽 되나

24대 은행 해외법인 순익…신한 ‘맑고’ KB ‘흐림’

3삼성전자 노사 임금협상 파행...노조, 기자회견 예고

4쿠팡 PB 상품 우선 노출했나...공정위 심의 하루 앞으로

5일동제약 우울장애 치료제 '둘록사'...불순물 초과로 회수 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