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인터넷 ‘블록체인’
미래의 인터넷 ‘블록체인’
모든 거래를 분산원장에 영구 기록하는 플랫폼으로 5000년 동안 계속된 중앙집중형 기록작성 방식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행위자들로 이뤄진 집단사고로 대체하는 게임 체인저다 자메이카에 거주하던 조 루빈에게 2014년의 만남은 암호화폐 억만장자로 변신하는 인생의 전기였다. 그뿐 아니라 언젠가 인터넷보다 더 중요한 기술혁명으로 자리 잡으리라고 일각에서 믿는 새 기술 생태계의 사부가 됐다.
프린스턴대학 출신 엔지니어인 53세의 루빈은 골드만삭스와 여러 헤지펀드를 포함해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지만 업계를 떠난 지 오래 됐다. 글로벌 부채 그리고 월스트리트와 워싱턴 D.C.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위기감을 느낀 그는 2008년 금융위기가 본격화하기 오래 전에 귀금속을 사모을까도 생각했었다. 글로벌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동생과 함께 페루·에콰도르를 트레킹하면서 그 피해를 모면할 만한 남미의 농지 매물을 물색하기도 했다.
대신 위기가 닥치자 루빈은 여자친구와 함께 자메이카로 떠났다.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의 해변에서 멀지 않은 자택에 녹음 스튜디오를 마련해 음악과 동영상 제작을 시작했다. 루빈은 한동안 자신이 뒤에 남기고 떠나온 대참사의 현장에 어떻게든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음악 작업을 하는 편이 훨씬 돈이 적게 들고 더 재미있다고 느꼈다”며 “나는 기타 연주에는 영 재주가 없어서 기획을 더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2011년 캐나다 태생 엔지니어 루빈은 비트코인 관련 기사를 읽게 됐다.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필명으로만 알려진 수수께끼의 인물이 개발한 암호화폐다. 상당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루빈은 정부와 중앙은행의 영향을 받지 않고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벗어나 운영될 수 있는 디지털 통화의 개념에 ‘매료’됐다. 그는 코인을 매입하면서 그 기술과 관련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나카모토의 독특한 혁신은 ‘블록체인’으로 알려진 암호화된 병렬 원장 시스템과 함께 사람들이 자신의 컴퓨터에서 그것을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인센티브 구조의 개발이었다. 나카모토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계속 업데이트되는 기록 데이터베이스의 관리인 역할을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 모든 비트코인 송금·거래의 시각과 출처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여러 컴퓨터에 동시에 기록·수정됐다.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중 과반수의 컴퓨터가 새로운 거래 ‘블록’을 모두 검증해야 했다. 이런 까닭에 누구든 블록체인을 해킹하거나 속이거나 조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루빈이 캐나다 토론토 시내에서 있은 암호화폐 애호가들의 한 모임에서 마른 체구의 19세 수학 귀재를 만난 뒤에야 그의 녹음 기획자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그 젊은이는 대학을 중퇴한 비탈릭 부테린이었다. 그도 암호화폐에 푹 빠져 비트코인 잡지를 공동 창간했었다. 2014년 1월 1일 그날 저녁 부테린은 완전히 새로운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라고 루빈에게 말했다. 나카모토가 개발한 분산원장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야심적인 앱이라는 설명이었다.
부테린의 플랫폼은 비트코인 거래뿐 아니라 어떤 유형의 거래도 분산원장에 영구히 기록하도록 프로그램할 수 있다. 이론상 이 탈중앙화 구조를 이용해 부동산 지분 매각, 조직의 규칙 채택, 6개월 뒤 파운드 당 1.50달러에 면 1000짝(bale)을 구입하는 복잡한 자동집행 계약 등 인터넷에서 가능한 일은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사용하기 쉬운 자체 프로그래밍 언어를 갖게 되고 전 세계 상당수 지역의 많은 컴퓨터에서 동시에 작동해 정부나 기업의 관할구역을 벗어나 그들의 개입 없이 이뤄질 수 있다. 부테린은 그 플랫폼에 이더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부분 부테린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지었을지 모른다. 특히 인터넷 서버와 데이터 센터를 통제하는 기업과 정부의 손에 우리가 얼마나 놀아나는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부테린의 제안서 다시 말해 백서를 읽은 루빈은 자신이 고대해왔던 솔루션임을 깨달았다. 비트코인의 등장으로 자신이 그렸던 글로벌 개혁에 마침내 시동을 거는 가시적인 방법이었다.
이 모든 중앙집중형 서버를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행위자들로 이뤄진 집단사고(hive mind)로 대체할 수 있다. 모두가 통제하는 동시에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시스템이다. 통행료 징수자와 중개인을 배제하고 새로운 제도적·상업적·행정적 구조 그리고 다른 종류의 월드와이드웹, 말하자면 진정으로 민주적인 ‘가상 머신’을 가능케 한다. 페이스북·구글·아마존 같은 기업이 가진 우리의 데이터를 되찾을 수 있다. 창조적 파괴자도 혁파의 대상이 된다.
루빈은 훗날 ‘이 기술은 권력의 폐쇄성을 깨부수고 아주 많은 사람에게 불이익을 안겨주는 정보 비대칭의 균형을 회복하는 잠재력이 있다’고 썼다. 근 5년이 지난 지금 그런 비전이 글로벌 운동으로 확산됐다. 2015년 7월 부테린·루빈과 기타 소수 핵심 개척자 그룹이 이더리움 플랫폼을 출범시켰다. 현재 무려 25만 명의 개발자가 그 플랫폼을 키워나간다. 플랫폼은 루빈과 그의 어린 친구 루테린을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모방하고 거기서 파생돼 나오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는 수십 개의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부테린의 선구적인 블록체인 재설계가 세상을 얼마나 바꿔놓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곧 알게 될지 모른다. 최근 몇 달 사이 블록체인 기반 프로젝트(이더리움 그리고 현재 그와 경쟁 관계에 있는 다수의 분산원장 플랫폼)가 시범운영 단계에서 전면적인 실현의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그런 프로젝트가 가상의 홍수를 이루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이 신기술을 지지하는 그룹은 요즘엔 암호화폐 무정부주의자, 월스트리트에 환멸을 느낀 낙오자, ‘오타쿠’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소수 무리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은 블록체인의 초기 어답터 중 다수가 한때 혁파를 기대했던 권력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기업·정부 지도자까지 포함된다.
공급망 관리 추적, 후방 업무 금융결제, 식품안전 시스템의 재설계 등 이들 지도자가 염두에 두는 그 기술의 용도는 진부하지만 그들은 거의 종교적인 열정을 품고 블록체인을 논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솔직히 털어놓기에는 너무 창피하게 여기는 기술을 중심으로 광적인 과대선전을 낳았다.
셰일라 워렌은 세계경제포럼(WEF)에 공동의 기술적 프로토콜과 단일 표준 개발의 장려에 초점을 맞춘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책임자다. 그녀는 “모든 컨설팅 회사가 이 프로젝트에 병적으로 집착한다”고 말했다. “IBM·마이크로소프트(MS)·페이스북·구글·SAP 같은 대기업에 블록체인 연구소들이 있다. 이들 기업 모두 큰 관심을 보인다.” 더 급진적인 초기 블록체인 혁신가 중 일부는 보편적인 ‘진실 머신’을 향한 자신들의 이상주의적인 비전을 흡수해 더 실용적인 용도에 맞춰 구조를 변경하려는 대기업의 노력을 좋게 바라볼 리 없다. 그러나 루빈 같은 사람들은 이 같은 변화를 모든 종류의 거래에 적합한 새 월드와이드웹의 더 원대한 비전을 향한 유용한 한 걸음으로 본다.
시장조사업체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의 블록체인 기술 관련 지출은 올해 20억 달러 미만에서 2022년에는 117억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고서는 규제준수, 식품안전·디지털ID 등 16가지 용도에 주목했다.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기업들은 바로 초창기 비트코인 블록체인이 우회하고자 했던 금융서비스 업체들이다. IDC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에만 5억 5200만 달러의 지출이 예상된다. 200개 금융업종 경영자 대상의 설문조사에 기초한 또 다른 조사에선 블록체인 관련 지출액을 17억 달러로 추정했다. 조사 대상 은행과 기타 업체 열 중 하나는 블록체인 예산이 1000만 달러를 웃돌았다. 시장정보업체 그리니치 어소시에이츠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형적인 ‘일류 은행’에선 블록체인 기술을 담당하는 풀타임 직원이 18명에 달했으며 향후 24개월 이내에 가동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업계 지도자들에게 혹평을 받아 왔던 비트코인과는 더 이상 큰 연관성이 없다고 본다(성깔 있는 JP모건 체이스 회장 겸 CEO 제이미 다이먼이 비트코인을 가리켜 ‘기만’ ‘사기’라고 돌직구를 날린 일이 가장 유명하다). 그보다는 독자적인 거래 분산원장 덕분에 언젠가는 금융 서비스 업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십억 달러를 절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식거래의 결제시간을 단축하고 정확도를 높이고, 국가간 결제 시간을 단축·단순화하고, 모든 계약 당사자의 의무를 자동적으로 강제하는 자동집행 ‘스마트 계약’을 구현하는 식이다. 그리고 현 시스템에선 거래를 모니터하면서 성사되도록 하는 데 중개인이 필요하지만 블록체인을 이용하면 그런 추가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 컨설팅 대기업 딜로이트는 최근 자사 뱅킹 고객에게 돌린 보고서에서 ‘거래가 블록 별로 묶여 블록들의 체인(블록체인)에 잇따라 기록된다’고 썼다. ‘블록과 콘텐트 간의 연결고리는 암호화 기술로 보호받는다. 따라서 이전의 거래를 파괴 또는 위조할 수 없다. 이는 중앙 당국 즉 ‘중개인’이 없어도 원장과 거래 네트워크가 신뢰를 받는다는 의미다.’
무수한 다른 업종의 소규모 기업들도 이 기술의 혜택을 볼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주로 신흥경제 그리고 중소기업에서 업무 효율화에 따르는 사업비용 감소로 전에는 불가능했던 거래를 통해 1조 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대표적으로 신용위험을 축소하고 수수료를 낮추고 국경에서의 처리시간을 단축하는 등의 방법이다).
한편 공급망 전문가들이 블록체인의 가장 열성적인 전도사로 떠올랐다. IBM의 연구원이자 블록체인 개발 담당 부사장인 제리 쿠오모는 이더리움에 관해 처음 듣고 부테린의 보고서를 읽은 날을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한 경험으로 묘사한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리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블록체인 열병에 걸렸다. 모든 게 갑자기 이해됐다.”
쿠오모 부사장이 당시 창설멤버로서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있던 IBM 사업부는 여러 사업체, 여러 서버 네트워크 간의 교량 역할을 하는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을 가리키는 ‘미들웨어(middleware)’에 초점을 맞춘 60억 달러 규모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었다. 부테린의 아이디어를 처음 들었을 때 쿠오모 부사장은 곧바로 자신이 매일 목격하는 시제품 모델 논쟁을 떠올렸다. “한 납품업체가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결제가 안 됐어요.’ 고객은 답한다. ‘주문한 물건을 받으면 지불하겠소.’ 납품업체는 ‘벌써 보냈다’고 말한다. 운송업체는 ‘우리는 배달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IBM의 공급망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평균 44일이 걸린다. “IBM에선 특정한 날 어느 공급망에서 이런 시비에 묶인 자금이 수천만 달러(수억 달러로 쉽게 넘긴다)에 달한다. 그리고 그것이 통상적인 사업관행으로 받아들여진다. ” 변경 불가능한 디지털 기록 세트가 존재해 모든 관계자가 공유하고 모든 단계에서 모든 당사자의 기업 컴퓨터에 즉시 그리고 동시에 업데이트된다면 세 가지 다른 장부를 두고 논쟁하고 전화로 언쟁을 벌이는 데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블록체인을 한번 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유실물을 즉시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시스템이라면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도 비용을 대폭 절감할 잠재력이 있다고 쿠오모는 직감했다. 상품 추적이 더 쉬워져 보험료도 낮아진다. 컴퓨터 보안 비용도 절감하거나 다른 기업과 분담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세트의 기록만 존재하기 때문에 관리 인력을 다른 업무로 돌릴 수도 있다.
쿠오모 부사장은 부테린의 백서를 읽은 뒤 “이더리움과 사랑에 빠져” 회사가 블록체인 기술에 집중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오모 팀이 IBM 기업 고객의 프라이버시와 보안 요건을 맞추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실제 조사를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기업 고객들이 분산원장 아이디어는 좋아하겠지만 기록을 누가 받아보게 되는지도 통제하고 싶어 할 게 뻔했다. 이더리움의 프로그래머들이 아직 검토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따라서 쿠오모 팀은 엄선된 소수만 접근해 열람할 수 있는 ‘허가형(permissioned)’ 블록체인 개발에 착수했다. 그들은 기존 이더리움 생태계 위에 그런 ‘폐쇄형 서비스(walled garden)’를 세우려면 이더리움의 핵심 코드에 “대형 수술”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게다가 IBM의 사내 변호팀이 비영리단체인 이더리움 재단(그 새 블록체인 생태계의 구축과정 감독 목적으로 설립)에 관해 알아봤더니 그들의 공동체주의적인 지적재산권과 라이선싱 규칙이 지나치게 제한적이었다. 블록체인의 소유자가 IBM이 아닌 재단이었다.
쿠오모 부사장은 “따라서 상업화 용도는 모두 이더리움 재단을 거쳐야 하는데 엄밀히는 IBM 사내 변호팀 입장이지만 더 전반적으로 상거래 관점에서도 이 같은 오픈소스(개발자 무상공개) 라이선싱 조건은 대체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때가 2015년, IBM은 독자 노선을 취하기로 했다. 더 기업 친화적인 IP 즉 인터넷 프로토콜 규칙을 가진 대안 오픈소스 협력체 구축 노력을 선도했다. 하이퍼레저(Hyperledger)로 알려진 이 프로젝트는 리눅스 재단에서 운영되며 담당 개발자 수가 이더리움에 이어 2위로 추정된다. 시스코·인텔·히타치·뉴욕멜론은행·웰스파고·액센추어 등 20개 회원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프로젝트를 감독한다. JP모건 중역 출신으로 디지털 애셋 홀딩스(DAH) CEO인 블라이드 매스터스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DAH는 당국의 규제를 받는 금융기관용 분산원장 기술 개발을 위해 그녀가 공동창업한 회사다(매스터스 CEO는 블록체인에 관여하기 전에는 신용부도스왑(CDS)의 개발자로 가장 유명했다. CDS는 2008년 금융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금융도구다. 바로 이 위기가 비트코인 부상의 촉매였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앞으로 몇 달 사이 하이퍼레저 관련 뉴스가 더 많이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최근 몇 주 사이 초기 기업 블록체인 프로젝트 중 일부가 개념 증명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 IBM 컨설턴트들이 개발한 인프라를 이용하고 IBM이 개발한 하이퍼레저 패브릭이라는 기술을 바탕으로 전개되며 IBM에 의존해 블록체인과 참가자에게 초기 컴퓨터를 제공한다.
그중 HSBC·산탄데르·소시에테제네랄 등 10개 유럽은행의 컨소시엄인 위트레이드(We.Trade)는 지난봄 출범했다. 이 네트워크는 구매자, 구매자 은행, 판매자, 판매자 은행, 운송업체 등 국경을 초월한 무역거래의 당사자들을 연결하는 블록체인을 제공한다. 어떤 네트워크 연결 기기로도 접근 가능하며 이것을 이용해 관리·추적·집행하는 국내외 무역거래가 많지 않지만 급속도로 늘어난다. 이번 가을에 대대적인 확장이 예상된다. 지난 8월 푸드 트러스트(Food Trust)라는 IBM 후원의 식품 안전 프로젝트가 출범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에서 해마다 식중독으로 약 2800만 명이 앓아 눕고 약 3000명이 목숨을 잃는다. 리콜, 그리고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추적 작업 비용으로 업계가 입는 손실이 수십억 달러에 달한다. 지난해 월마트의 프랭크 야나스 식품안전 담당 부사장과 IBM은 망고의 산지 추적 시범을 보였다. 전통 방식으로는 총 6일 18시간 26초가 걸렸지만 블록체인으로는 2초 만에 끝났다.
푸드 트러스트 블록체인이 출범한 뒤로 거래는 200여만 건, 월마트·크로거 그리고 기타 유명 공급업체들의 개별 제품은 4260만 개 이상이 등록됐다고 이 프로젝트를 관장하는 IBM 푸드 트러스트 블록체인 사업개발 담당 브리지드 맥더못 부사장은 설명했다. 물론 이는 소수의 대형 공급업체만 참여해 유통망을 거치는 식품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세계적으로 식품 공급업체는 120만 개, 소매유통업체는 20만 개, 농민은 5억 명으로 추산된다).
우선 드리스콜·돌·유니레버·타이슨푸드 그리고 네슬레 유아식 등 참가 납품업체가 제각기 농장에서 식탁까지 자사 식품의 일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멕더못 부사장은 “소수 제품을 대상으로 초기 단계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규모 확대는 다음 단계다. 하지만 신중하게 통제된 일회성 환경에서 생산 데이터와 실제 제품이 시스템에 유통되는 단계로 올라섰다.” 포천 500대 기업 중 블록체인 사업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곳은 IBM만이 아니다. R3라는 컨소시엄은 100여 개의 세계 최대 금융 서비스 업체를 회원으로 두고 있으며 참여업체들이 새 파트너십과 프로그램을 계속 발표한다. 하지만 이더리움과 그들의 원래 사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평등을 추구하는 원대한 ‘웹 3.0’은 언제 도래하며 루빈의 큰 꿈은 어떻게 된 걸까?
오늘날 루빈의 사업본부 역할을 하는 영리기업 콘센시스의 사무소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다. 당초 자메이카에서 돌아왔을 때 루빈은 섬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원격으로 블록체인 혁명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올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주 안 지나 1월 말 그가 새 친구와 함께 마이애미의 비트코인 컨퍼런스에 참석한 모습이 와이어드 잡지에 포착됐다. 그는 부테린을 가리켜 기자에게 “탈중앙화라는 신성불가침의 선물을 전달하려고 이 행성에 착륙한 천재 외계인”이라고 설명했다.
IT와 비즈니스 분야 양쪽에서 경력을 쌓은 루빈은 곧바로 핵심 전략가로 부상해 부테린의 비전을 구현할 조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스위스에 재단 본부가 설립됐다(루빈은 “미국이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고 돌이켰다). 2014년 7월 부테린·루빈 팀은 이더리움 플랫폼의 전속 토큰 역할을 하게 될 이더라는 새 암호화폐의 ‘사전판매’에 돌입했다. 개인들에게 새 블록체인을 운영하는 컴퓨팅 역량을 제공하도록 하는 보상 메커니즘이자 서비스 교환 수단이었다. 그 무렵 소규모의 광적인 비트코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즐겨 찾는 블로그와 채팅방을 통해 부테린의 원대한 구상 소식이 퍼져나갔다. 많은 사람이 그의 백서를 읽었으며 이더 코인 도입에 대한 기대감이 몇 달 동안 높아져갔다. 이더 코인의 사전 판매 첫 12시간 동안 230만 달러 상당의 3700 비트코인이 조달됐다. 6주 뒤 사전판매 종료 시점까지 그 10배 가까이가 팔려나갔다.
그 돈은 프로젝트 감독을 위해 설립된 두 조직 이더리움 스위스 GmbH와 이더리움 재단 운영자금으로 쓰였다. 루빈은 2015년 플랫폼 출범 직전 몇 달 사이 콘센시스를 설립했다. 이더리움 용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 작업에 개발자 커뮤니티를 끌어들이려는 취지다. 뉴욕시를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미국의 “활성화”를 돕기 위해서였다.
콘센시스는 이더리움과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오늘날 28개국에 1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으며 일부는 자택이나 커피숍에서 일부는 미국의 브루클린과 샌프란시스코, 영국 런던, 이스라엘 텔아비브,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호주 시드니와 퀸즈랜드의 사무실에서 일한다. 회사 구조는 루빈의 유토피아적인 이상을 따랐다. 직원들이 직접 자신의 타이틀을 선택하고 전통적인 계층구조 대신 ‘홀라크라시(holacracy)’라는 지배구조를 갖췄다. 자율 편성되는 팀들 간에 권력이 ‘분산되는’ 탈중앙화된 관리 시스템이다. 예산을 분배하는 기능은 ‘자원 할당 서클’이 맡는다. 동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선발된 사람들이다.
브루클린의 개방된 널찍한 작업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선 책상에 캐주얼 차림의 프로그래머들이 앉아 컴퓨터 작업에 열을 올린다. 그 한쪽 구석에 루빈의 책상이 놓여 있다. 이날 오후 그는 갈색 반바지, 티셔츠 그리고 샌들 차림이다. 54세로 사무실에서 최고령자인 듯한데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려 더 눈에 띈다.
IBM이 하이퍼레저를 개발하면서 업무용 공간을 개척할 동안 콘센시스는 초기에 루빈과 부테린이 말하는 이른바 ‘가상 머신’ 용의 기반 인프라 확충에 초점을 맞췄다. 계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운영하는 수천 대의 상호연결된 컴퓨터의 글로벌 조직망이다. 그리고 그것이 출범한 뒤 몇 달 동안 콘센시스의 프로그래머 팀은 독립 개발자들이 이더리움 블록체인에서 구동할 만한 응용 프로그램을 더 쉽게(그리고 더 매력적으로) 만들도록 하는 도구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런 노력 중의 하나가 메타매스크(Metamask)라는 구글 크롬 브라우저용 플러그인이다. 일단 설치되면 개발자가 월드와이드웹을 통해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접근하고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포털을 제공한다. 또한 개발자 용 ‘스위스 군용 칼’로 알려진 트러플(Truffle)은 새 ‘스마트 계약’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삽입하거나 붙여 넣을 수 있는, 자주 사용되는 코딩과 단축키의 도구함을 갖고 있다. 개발자들은 이를 이용해 프로그램을 블록체인에 연결하고 테스트하고 구동하는 등의 일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코딩을 건너뛸 수 있다.
콘센시스는 추가적인 인센티브로 창업자에게 자금과 상담을 지원하는 벤처 프로덕션 스튜디오 ‘콘센시스 랩스’를 직접 설립했다. 스튜디오의 론 개럿 대표 파트너에 따르면 구성원 2~50명 규모의 42개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개럿 파트너를 비롯한 콘센시스 관계자들은 궁극적으로 이더리움과 기타 공개 블록체인(최근 몇 달 사이 독자적으로 전속 코인을 발행하고 이더리움을 따라잡겠다며 다수의 시스템이 출범했다)에서 사용될 이들 응용 프로그램을 가리켜 웹 3.0 앱으로 부른다.어쩌면 콘센시스와 이더리움이 성숙단계에 들어섰다는 가장 큰 증거는 지난해 둘 다 그 생태계의 기본 인프라를 충분히 확충해 IBM의 쿠오모 부사장이 2년 전 인지했던 우려에 대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블록체인의 진화에 따라 이더리움을 기업에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루빈은 IBM의 하이퍼레저 패브릭과 기타 다른 기업 블록체인의 개발에 참여했던 핵심 개발자 일부를 영입했다. 그리고 공개 블록체인을 토대로 비공개의 허가형 블록체인, 이른바 ‘사이드 체인’ 구축방법의 설계 작업을 그들에게 맡겼다.
쿠오모 부사장 아래서 블록체인 제품 글로벌 책임자로 일했던 IBM 중역 출신의 존 울퍼트도 지난해 하이퍼레저 패브릭 출범 직후 루빈과 합류했다. “우리 회사에서 미래 인터넷 관련 사업을 시작하겠소?” 울퍼트는 루빈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루빈은 ‘노’라고 대답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사람이다. 그리고 응용 프로그램 전문가인 나는 큰 기대를 가졌다. 이더리움이 이제 성숙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에 정말 재미있는 일들을 할 수 있다. 그 생태계를 따라가면 그 앞에 분명 이더리움 체인이 있다.” 울퍼트는 2020년쯤에는 비공개와 공개 블록체인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대부분 갈수록 호환성이 커지면서 서로 연결될 것으로 내다본다.R3 출신의 클라크 톰슨은 “실제로 활동하는 개발자 수십만 명의 공동체 그리고 상업적 후원을 받는 응용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팀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R3는 뱅킹 서비스용 플랫폼 코다(Corda)를 개발한 금융회사들의 컨소시엄이다. 콘센시스에서 글로벌 솔루션스 설계 책임자로 일하는 톰슨은 “코드 기반에 실제로 기여하는 사람이 말 그대로 10만 명을 웃돈다”고 말했다. 이더리움은 독점적 정보의 대외 공개를 막는 코다나 하이퍼레저 같은 ‘폐쇄형 서비스’가 아니어서 업무용 시장에선 경쟁이 안 된다는 건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톰슨은 말했다. “옛날얘기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이더리움 재단은 ‘기업형이더리움연합(EEA)’이라는 조직의 설립을 추진했다. 다른 종류의 허가형 블록체인의 호환성을 보장하는 기술표준을 개발하려는 목적이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지만 나머지 공개 블록체인도 지원한다. EEA는 JP모건·인텔·MS 등 500여 개 회원사와 협력한다.
처음에는 “‘은행들을 날려버리고 모든 중앙 권력을 타도하겠다’며 기세를 올리던 검정 티셔츠 차림의 20대 청년 무리”가 블록체인 운동을 지배했다고 톰슨은 설명했다. 요즘엔 “모두가 연결됐으며 그중 어디에 솔루션을 공급하느냐로 규모·신뢰성·보안성 그리고 특히 그것을 지원하려면 따라야 하는 규제가 결정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는 개념증명 단계였다면 올해는 시범 단계다. ”인텔의 4G 개발 책임자 출신으로 현재 EEA를 이끄는 론 레스닉은 산탄데르와 JP모건 등 일부 금융 서비스 업체는 회사의 결제와 기타 업무 목적으로 이더리움 기반 블록체인을 통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널리 보급되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될 가능성이 크며 필시 내년에 호환성을 보장하는 표준이 완성된 뒤에야 그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요즘 루빈은 민간 기업이 이더리움 블록체인에서 업무를 처리하기에는 비밀유지와 보안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으면 발끈 성을 낸다. 그는 콘센시스의 공급망과 뱅킹 결제 프로그램을 손꼽으며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 중”이라며 “IBM의 마케팅 예산이 우리보다 많을 뿐”이라고 말한다.
블록체인 생태계는 종종 1993년 월드와이드웹이 비상하기 직전의 상태와 비교된다. 하지만 울퍼트는 그런 비유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지난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디스트리뷰티드’ 컨퍼런스 연설에서 그는 “1993년이란 단어가 계속 들린다”고 말했다. “지난해에 들었는데 사람들이 아직도 그 얘기를 한다. 우리의 시간이 멈춘 듯하다. 우리가 사실상 1980년대나 어쩌면 1970년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확산과 수렴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이다.”2018년 저서 ‘진실 머신, 블록체인과 모든 것의 미래(The Truth Machine: The Blockchain and the Future of Everything)’의 저자이자 MIT 미디어 랩 소속 ‘디지털 커런시 이니셔티브’의 선임 고문인 마이클 케이시는 블록체인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전에 이더리움과 기타 블록체인 기업들이 그 기술의 속도와 확장성 문제를 해결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많은 개발자가 해결하려 애쓰는 문제다. 그는 “인터넷은 40년에 걸쳐 개발됐다”고 말했다. “정말로 복잡한 시스템이다. 기술이 진화하고 확장성을 갖춰야 한다.”
전문가들의 그런 논평도 과대선전을 억제하는 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지난해는 수십 개 블록체인 기반 기업들(이더리움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려는 기업도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업을 구축하려는 기업도 있다)도 이른바 암호화폐공개(ICO)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면서 닷컴 거품에 널리 비교되는 투기 열풍이 일었다. 그에 따라 비트코인 도입 이후 반복돼온 많은 암호화폐 호불황의 순환 중 하나가 발생하면서 시세가 2만 달러 가까이 치솟았다. 이더리움은 2015년 약 46센트에서 1300달러까지 상승했다(지난 2월 경제지 포브스는 상당부분 루빈의 이더 코인 지분 추정액에 근거해 그의 재산을 10억~50억 달러로 추산했다. 루빈은 논평을 거부했다).
비트코인 시세가 지금은 6400달러 선, 이더리움은 10월 기준 약 200달러로 하락하면서 그런 과대선전은 당장은 가라앉았지만 그 시세가 다시 상승세를 탄다 해도 해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케이시 고문은 “전체 글로벌 기록작성 시스템이 5000년 만의 패러다임 전환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기록을 추적하고 확인해 왔다. 기록은 경제교류 시스템의 토대를 이루며 기원 전 3000년경 수메르 문명의 점토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는 5000년 동안 중앙집중형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이제 우리는 게임의 판도를 뒤엎는 탈중앙화 시스템을 도입하는 중이다.”
- 애덤 피오르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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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학 출신 엔지니어인 53세의 루빈은 골드만삭스와 여러 헤지펀드를 포함해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지만 업계를 떠난 지 오래 됐다. 글로벌 부채 그리고 월스트리트와 워싱턴 D.C.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위기감을 느낀 그는 2008년 금융위기가 본격화하기 오래 전에 귀금속을 사모을까도 생각했었다. 글로벌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동생과 함께 페루·에콰도르를 트레킹하면서 그 피해를 모면할 만한 남미의 농지 매물을 물색하기도 했다.
대신 위기가 닥치자 루빈은 여자친구와 함께 자메이카로 떠났다.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의 해변에서 멀지 않은 자택에 녹음 스튜디오를 마련해 음악과 동영상 제작을 시작했다. 루빈은 한동안 자신이 뒤에 남기고 떠나온 대참사의 현장에 어떻게든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자메이카에서 음악 작업을 하는 편이 훨씬 돈이 적게 들고 더 재미있다고 느꼈다”며 “나는 기타 연주에는 영 재주가 없어서 기획을 더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2011년 캐나다 태생 엔지니어 루빈은 비트코인 관련 기사를 읽게 됐다.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필명으로만 알려진 수수께끼의 인물이 개발한 암호화폐다. 상당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루빈은 정부와 중앙은행의 영향을 받지 않고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벗어나 운영될 수 있는 디지털 통화의 개념에 ‘매료’됐다. 그는 코인을 매입하면서 그 기술과 관련된 정보를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나카모토의 독특한 혁신은 ‘블록체인’으로 알려진 암호화된 병렬 원장 시스템과 함께 사람들이 자신의 컴퓨터에서 그것을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인센티브 구조의 개발이었다. 나카모토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계속 업데이트되는 기록 데이터베이스의 관리인 역할을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다. 모든 비트코인 송금·거래의 시각과 출처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여러 컴퓨터에 동시에 기록·수정됐다.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중 과반수의 컴퓨터가 새로운 거래 ‘블록’을 모두 검증해야 했다. 이런 까닭에 누구든 블록체인을 해킹하거나 속이거나 조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루빈이 캐나다 토론토 시내에서 있은 암호화폐 애호가들의 한 모임에서 마른 체구의 19세 수학 귀재를 만난 뒤에야 그의 녹음 기획자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그 젊은이는 대학을 중퇴한 비탈릭 부테린이었다. 그도 암호화폐에 푹 빠져 비트코인 잡지를 공동 창간했었다. 2014년 1월 1일 그날 저녁 부테린은 완전히 새로운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라고 루빈에게 말했다. 나카모토가 개발한 분산원장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야심적인 앱이라는 설명이었다.
부테린의 플랫폼은 비트코인 거래뿐 아니라 어떤 유형의 거래도 분산원장에 영구히 기록하도록 프로그램할 수 있다. 이론상 이 탈중앙화 구조를 이용해 부동산 지분 매각, 조직의 규칙 채택, 6개월 뒤 파운드 당 1.50달러에 면 1000짝(bale)을 구입하는 복잡한 자동집행 계약 등 인터넷에서 가능한 일은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사용하기 쉬운 자체 프로그래밍 언어를 갖게 되고 전 세계 상당수 지역의 많은 컴퓨터에서 동시에 작동해 정부나 기업의 관할구역을 벗어나 그들의 개입 없이 이뤄질 수 있다. 부테린은 그 플랫폼에 이더리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부분 부테린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지었을지 모른다. 특히 인터넷 서버와 데이터 센터를 통제하는 기업과 정부의 손에 우리가 얼마나 놀아나는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부테린의 제안서 다시 말해 백서를 읽은 루빈은 자신이 고대해왔던 솔루션임을 깨달았다. 비트코인의 등장으로 자신이 그렸던 글로벌 개혁에 마침내 시동을 거는 가시적인 방법이었다.
이 모든 중앙집중형 서버를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행위자들로 이뤄진 집단사고(hive mind)로 대체할 수 있다. 모두가 통제하는 동시에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시스템이다. 통행료 징수자와 중개인을 배제하고 새로운 제도적·상업적·행정적 구조 그리고 다른 종류의 월드와이드웹, 말하자면 진정으로 민주적인 ‘가상 머신’을 가능케 한다. 페이스북·구글·아마존 같은 기업이 가진 우리의 데이터를 되찾을 수 있다. 창조적 파괴자도 혁파의 대상이 된다.
루빈은 훗날 ‘이 기술은 권력의 폐쇄성을 깨부수고 아주 많은 사람에게 불이익을 안겨주는 정보 비대칭의 균형을 회복하는 잠재력이 있다’고 썼다. 근 5년이 지난 지금 그런 비전이 글로벌 운동으로 확산됐다. 2015년 7월 부테린·루빈과 기타 소수 핵심 개척자 그룹이 이더리움 플랫폼을 출범시켰다. 현재 무려 25만 명의 개발자가 그 플랫폼을 키워나간다. 플랫폼은 루빈과 그의 어린 친구 루테린을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모방하고 거기서 파생돼 나오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는 수십 개의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부테린의 선구적인 블록체인 재설계가 세상을 얼마나 바꿔놓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곧 알게 될지 모른다. 최근 몇 달 사이 블록체인 기반 프로젝트(이더리움 그리고 현재 그와 경쟁 관계에 있는 다수의 분산원장 플랫폼)가 시범운영 단계에서 전면적인 실현의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그런 프로젝트가 가상의 홍수를 이루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이 신기술을 지지하는 그룹은 요즘엔 암호화폐 무정부주의자, 월스트리트에 환멸을 느낀 낙오자, ‘오타쿠’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소수 무리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은 블록체인의 초기 어답터 중 다수가 한때 혁파를 기대했던 권력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기업·정부 지도자까지 포함된다.
공급망 관리 추적, 후방 업무 금융결제, 식품안전 시스템의 재설계 등 이들 지도자가 염두에 두는 그 기술의 용도는 진부하지만 그들은 거의 종교적인 열정을 품고 블록체인을 논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솔직히 털어놓기에는 너무 창피하게 여기는 기술을 중심으로 광적인 과대선전을 낳았다.
셰일라 워렌은 세계경제포럼(WEF)에 공동의 기술적 프로토콜과 단일 표준 개발의 장려에 초점을 맞춘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책임자다. 그녀는 “모든 컨설팅 회사가 이 프로젝트에 병적으로 집착한다”고 말했다. “IBM·마이크로소프트(MS)·페이스북·구글·SAP 같은 대기업에 블록체인 연구소들이 있다. 이들 기업 모두 큰 관심을 보인다.” 더 급진적인 초기 블록체인 혁신가 중 일부는 보편적인 ‘진실 머신’을 향한 자신들의 이상주의적인 비전을 흡수해 더 실용적인 용도에 맞춰 구조를 변경하려는 대기업의 노력을 좋게 바라볼 리 없다. 그러나 루빈 같은 사람들은 이 같은 변화를 모든 종류의 거래에 적합한 새 월드와이드웹의 더 원대한 비전을 향한 유용한 한 걸음으로 본다.
시장조사업체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의 블록체인 기술 관련 지출은 올해 20억 달러 미만에서 2022년에는 117억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고서는 규제준수, 식품안전·디지털ID 등 16가지 용도에 주목했다. 역설적으로 지금까지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기업들은 바로 초창기 비트코인 블록체인이 우회하고자 했던 금융서비스 업체들이다. IDC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에만 5억 5200만 달러의 지출이 예상된다. 200개 금융업종 경영자 대상의 설문조사에 기초한 또 다른 조사에선 블록체인 관련 지출액을 17억 달러로 추정했다. 조사 대상 은행과 기타 업체 열 중 하나는 블록체인 예산이 1000만 달러를 웃돌았다. 시장정보업체 그리니치 어소시에이츠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형적인 ‘일류 은행’에선 블록체인 기술을 담당하는 풀타임 직원이 18명에 달했으며 향후 24개월 이내에 가동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블록체인 기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업계 지도자들에게 혹평을 받아 왔던 비트코인과는 더 이상 큰 연관성이 없다고 본다(성깔 있는 JP모건 체이스 회장 겸 CEO 제이미 다이먼이 비트코인을 가리켜 ‘기만’ ‘사기’라고 돌직구를 날린 일이 가장 유명하다). 그보다는 독자적인 거래 분산원장 덕분에 언젠가는 금융 서비스 업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수십억 달러를 절약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식거래의 결제시간을 단축하고 정확도를 높이고, 국가간 결제 시간을 단축·단순화하고, 모든 계약 당사자의 의무를 자동적으로 강제하는 자동집행 ‘스마트 계약’을 구현하는 식이다. 그리고 현 시스템에선 거래를 모니터하면서 성사되도록 하는 데 중개인이 필요하지만 블록체인을 이용하면 그런 추가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 컨설팅 대기업 딜로이트는 최근 자사 뱅킹 고객에게 돌린 보고서에서 ‘거래가 블록 별로 묶여 블록들의 체인(블록체인)에 잇따라 기록된다’고 썼다. ‘블록과 콘텐트 간의 연결고리는 암호화 기술로 보호받는다. 따라서 이전의 거래를 파괴 또는 위조할 수 없다. 이는 중앙 당국 즉 ‘중개인’이 없어도 원장과 거래 네트워크가 신뢰를 받는다는 의미다.’
무수한 다른 업종의 소규모 기업들도 이 기술의 혜택을 볼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주로 신흥경제 그리고 중소기업에서 업무 효율화에 따르는 사업비용 감소로 전에는 불가능했던 거래를 통해 1조 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대표적으로 신용위험을 축소하고 수수료를 낮추고 국경에서의 처리시간을 단축하는 등의 방법이다).
한편 공급망 전문가들이 블록체인의 가장 열성적인 전도사로 떠올랐다. IBM의 연구원이자 블록체인 개발 담당 부사장인 제리 쿠오모는 이더리움에 관해 처음 듣고 부테린의 보고서를 읽은 날을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한 경험으로 묘사한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리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블록체인 열병에 걸렸다. 모든 게 갑자기 이해됐다.”
쿠오모 부사장이 당시 창설멤버로서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있던 IBM 사업부는 여러 사업체, 여러 서버 네트워크 간의 교량 역할을 하는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을 가리키는 ‘미들웨어(middleware)’에 초점을 맞춘 60억 달러 규모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었다. 부테린의 아이디어를 처음 들었을 때 쿠오모 부사장은 곧바로 자신이 매일 목격하는 시제품 모델 논쟁을 떠올렸다. “한 납품업체가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결제가 안 됐어요.’ 고객은 답한다. ‘주문한 물건을 받으면 지불하겠소.’ 납품업체는 ‘벌써 보냈다’고 말한다. 운송업체는 ‘우리는 배달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IBM의 공급망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평균 44일이 걸린다. “IBM에선 특정한 날 어느 공급망에서 이런 시비에 묶인 자금이 수천만 달러(수억 달러로 쉽게 넘긴다)에 달한다. 그리고 그것이 통상적인 사업관행으로 받아들여진다. ” 변경 불가능한 디지털 기록 세트가 존재해 모든 관계자가 공유하고 모든 단계에서 모든 당사자의 기업 컴퓨터에 즉시 그리고 동시에 업데이트된다면 세 가지 다른 장부를 두고 논쟁하고 전화로 언쟁을 벌이는 데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블록체인을 한번 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유실물을 즉시 찾아낼 수 있다.
그런 시스템이라면 수많은 다른 방법으로도 비용을 대폭 절감할 잠재력이 있다고 쿠오모는 직감했다. 상품 추적이 더 쉬워져 보험료도 낮아진다. 컴퓨터 보안 비용도 절감하거나 다른 기업과 분담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세트의 기록만 존재하기 때문에 관리 인력을 다른 업무로 돌릴 수도 있다.
쿠오모 부사장은 부테린의 백서를 읽은 뒤 “이더리움과 사랑에 빠져” 회사가 블록체인 기술에 집중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오모 팀이 IBM 기업 고객의 프라이버시와 보안 요건을 맞추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실제 조사를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기업 고객들이 분산원장 아이디어는 좋아하겠지만 기록을 누가 받아보게 되는지도 통제하고 싶어 할 게 뻔했다. 이더리움의 프로그래머들이 아직 검토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따라서 쿠오모 팀은 엄선된 소수만 접근해 열람할 수 있는 ‘허가형(permissioned)’ 블록체인 개발에 착수했다. 그들은 기존 이더리움 생태계 위에 그런 ‘폐쇄형 서비스(walled garden)’를 세우려면 이더리움의 핵심 코드에 “대형 수술”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게다가 IBM의 사내 변호팀이 비영리단체인 이더리움 재단(그 새 블록체인 생태계의 구축과정 감독 목적으로 설립)에 관해 알아봤더니 그들의 공동체주의적인 지적재산권과 라이선싱 규칙이 지나치게 제한적이었다. 블록체인의 소유자가 IBM이 아닌 재단이었다.
쿠오모 부사장은 “따라서 상업화 용도는 모두 이더리움 재단을 거쳐야 하는데 엄밀히는 IBM 사내 변호팀 입장이지만 더 전반적으로 상거래 관점에서도 이 같은 오픈소스(개발자 무상공개) 라이선싱 조건은 대체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때가 2015년, IBM은 독자 노선을 취하기로 했다. 더 기업 친화적인 IP 즉 인터넷 프로토콜 규칙을 가진 대안 오픈소스 협력체 구축 노력을 선도했다. 하이퍼레저(Hyperledger)로 알려진 이 프로젝트는 리눅스 재단에서 운영되며 담당 개발자 수가 이더리움에 이어 2위로 추정된다. 시스코·인텔·히타치·뉴욕멜론은행·웰스파고·액센추어 등 20개 회원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프로젝트를 감독한다. JP모건 중역 출신으로 디지털 애셋 홀딩스(DAH) CEO인 블라이드 매스터스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DAH는 당국의 규제를 받는 금융기관용 분산원장 기술 개발을 위해 그녀가 공동창업한 회사다(매스터스 CEO는 블록체인에 관여하기 전에는 신용부도스왑(CDS)의 개발자로 가장 유명했다. CDS는 2008년 금융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금융도구다. 바로 이 위기가 비트코인 부상의 촉매였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앞으로 몇 달 사이 하이퍼레저 관련 뉴스가 더 많이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최근 몇 주 사이 초기 기업 블록체인 프로젝트 중 일부가 개념 증명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 IBM 컨설턴트들이 개발한 인프라를 이용하고 IBM이 개발한 하이퍼레저 패브릭이라는 기술을 바탕으로 전개되며 IBM에 의존해 블록체인과 참가자에게 초기 컴퓨터를 제공한다.
그중 HSBC·산탄데르·소시에테제네랄 등 10개 유럽은행의 컨소시엄인 위트레이드(We.Trade)는 지난봄 출범했다. 이 네트워크는 구매자, 구매자 은행, 판매자, 판매자 은행, 운송업체 등 국경을 초월한 무역거래의 당사자들을 연결하는 블록체인을 제공한다. 어떤 네트워크 연결 기기로도 접근 가능하며 이것을 이용해 관리·추적·집행하는 국내외 무역거래가 많지 않지만 급속도로 늘어난다. 이번 가을에 대대적인 확장이 예상된다. 지난 8월 푸드 트러스트(Food Trust)라는 IBM 후원의 식품 안전 프로젝트가 출범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미국에서 해마다 식중독으로 약 2800만 명이 앓아 눕고 약 3000명이 목숨을 잃는다. 리콜, 그리고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추적 작업 비용으로 업계가 입는 손실이 수십억 달러에 달한다. 지난해 월마트의 프랭크 야나스 식품안전 담당 부사장과 IBM은 망고의 산지 추적 시범을 보였다. 전통 방식으로는 총 6일 18시간 26초가 걸렸지만 블록체인으로는 2초 만에 끝났다.
푸드 트러스트 블록체인이 출범한 뒤로 거래는 200여만 건, 월마트·크로거 그리고 기타 유명 공급업체들의 개별 제품은 4260만 개 이상이 등록됐다고 이 프로젝트를 관장하는 IBM 푸드 트러스트 블록체인 사업개발 담당 브리지드 맥더못 부사장은 설명했다. 물론 이는 소수의 대형 공급업체만 참여해 유통망을 거치는 식품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세계적으로 식품 공급업체는 120만 개, 소매유통업체는 20만 개, 농민은 5억 명으로 추산된다).
우선 드리스콜·돌·유니레버·타이슨푸드 그리고 네슬레 유아식 등 참가 납품업체가 제각기 농장에서 식탁까지 자사 식품의 일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멕더못 부사장은 “소수 제품을 대상으로 초기 단계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규모 확대는 다음 단계다. 하지만 신중하게 통제된 일회성 환경에서 생산 데이터와 실제 제품이 시스템에 유통되는 단계로 올라섰다.” 포천 500대 기업 중 블록체인 사업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곳은 IBM만이 아니다. R3라는 컨소시엄은 100여 개의 세계 최대 금융 서비스 업체를 회원으로 두고 있으며 참여업체들이 새 파트너십과 프로그램을 계속 발표한다. 하지만 이더리움과 그들의 원래 사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평등을 추구하는 원대한 ‘웹 3.0’은 언제 도래하며 루빈의 큰 꿈은 어떻게 된 걸까?
오늘날 루빈의 사업본부 역할을 하는 영리기업 콘센시스의 사무소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다. 당초 자메이카에서 돌아왔을 때 루빈은 섬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원격으로 블록체인 혁명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올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 주 안 지나 1월 말 그가 새 친구와 함께 마이애미의 비트코인 컨퍼런스에 참석한 모습이 와이어드 잡지에 포착됐다. 그는 부테린을 가리켜 기자에게 “탈중앙화라는 신성불가침의 선물을 전달하려고 이 행성에 착륙한 천재 외계인”이라고 설명했다.
IT와 비즈니스 분야 양쪽에서 경력을 쌓은 루빈은 곧바로 핵심 전략가로 부상해 부테린의 비전을 구현할 조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스위스에 재단 본부가 설립됐다(루빈은 “미국이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고 돌이켰다). 2014년 7월 부테린·루빈 팀은 이더리움 플랫폼의 전속 토큰 역할을 하게 될 이더라는 새 암호화폐의 ‘사전판매’에 돌입했다. 개인들에게 새 블록체인을 운영하는 컴퓨팅 역량을 제공하도록 하는 보상 메커니즘이자 서비스 교환 수단이었다. 그 무렵 소규모의 광적인 비트코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즐겨 찾는 블로그와 채팅방을 통해 부테린의 원대한 구상 소식이 퍼져나갔다. 많은 사람이 그의 백서를 읽었으며 이더 코인 도입에 대한 기대감이 몇 달 동안 높아져갔다. 이더 코인의 사전 판매 첫 12시간 동안 230만 달러 상당의 3700 비트코인이 조달됐다. 6주 뒤 사전판매 종료 시점까지 그 10배 가까이가 팔려나갔다.
그 돈은 프로젝트 감독을 위해 설립된 두 조직 이더리움 스위스 GmbH와 이더리움 재단 운영자금으로 쓰였다. 루빈은 2015년 플랫폼 출범 직전 몇 달 사이 콘센시스를 설립했다. 이더리움 용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 작업에 개발자 커뮤니티를 끌어들이려는 취지다. 뉴욕시를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미국의 “활성화”를 돕기 위해서였다.
콘센시스는 이더리움과 마찬가지로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다. 오늘날 28개국에 1000명의 직원을 두고 있으며 일부는 자택이나 커피숍에서 일부는 미국의 브루클린과 샌프란시스코, 영국 런던, 이스라엘 텔아비브,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호주 시드니와 퀸즈랜드의 사무실에서 일한다. 회사 구조는 루빈의 유토피아적인 이상을 따랐다. 직원들이 직접 자신의 타이틀을 선택하고 전통적인 계층구조 대신 ‘홀라크라시(holacracy)’라는 지배구조를 갖췄다. 자율 편성되는 팀들 간에 권력이 ‘분산되는’ 탈중앙화된 관리 시스템이다. 예산을 분배하는 기능은 ‘자원 할당 서클’이 맡는다. 동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선발된 사람들이다.
브루클린의 개방된 널찍한 작업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선 책상에 캐주얼 차림의 프로그래머들이 앉아 컴퓨터 작업에 열을 올린다. 그 한쪽 구석에 루빈의 책상이 놓여 있다. 이날 오후 그는 갈색 반바지, 티셔츠 그리고 샌들 차림이다. 54세로 사무실에서 최고령자인 듯한데 머리를 완전히 밀어버려 더 눈에 띈다.
IBM이 하이퍼레저를 개발하면서 업무용 공간을 개척할 동안 콘센시스는 초기에 루빈과 부테린이 말하는 이른바 ‘가상 머신’ 용의 기반 인프라 확충에 초점을 맞췄다. 계속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운영하는 수천 대의 상호연결된 컴퓨터의 글로벌 조직망이다. 그리고 그것이 출범한 뒤 몇 달 동안 콘센시스의 프로그래머 팀은 독립 개발자들이 이더리움 블록체인에서 구동할 만한 응용 프로그램을 더 쉽게(그리고 더 매력적으로) 만들도록 하는 도구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런 노력 중의 하나가 메타매스크(Metamask)라는 구글 크롬 브라우저용 플러그인이다. 일단 설치되면 개발자가 월드와이드웹을 통해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접근하고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포털을 제공한다. 또한 개발자 용 ‘스위스 군용 칼’로 알려진 트러플(Truffle)은 새 ‘스마트 계약’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삽입하거나 붙여 넣을 수 있는, 자주 사용되는 코딩과 단축키의 도구함을 갖고 있다. 개발자들은 이를 이용해 프로그램을 블록체인에 연결하고 테스트하고 구동하는 등의 일반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코딩을 건너뛸 수 있다.
콘센시스는 추가적인 인센티브로 창업자에게 자금과 상담을 지원하는 벤처 프로덕션 스튜디오 ‘콘센시스 랩스’를 직접 설립했다. 스튜디오의 론 개럿 대표 파트너에 따르면 구성원 2~50명 규모의 42개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개럿 파트너를 비롯한 콘센시스 관계자들은 궁극적으로 이더리움과 기타 공개 블록체인(최근 몇 달 사이 독자적으로 전속 코인을 발행하고 이더리움을 따라잡겠다며 다수의 시스템이 출범했다)에서 사용될 이들 응용 프로그램을 가리켜 웹 3.0 앱으로 부른다.어쩌면 콘센시스와 이더리움이 성숙단계에 들어섰다는 가장 큰 증거는 지난해 둘 다 그 생태계의 기본 인프라를 충분히 확충해 IBM의 쿠오모 부사장이 2년 전 인지했던 우려에 대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블록체인의 진화에 따라 이더리움을 기업에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루빈은 IBM의 하이퍼레저 패브릭과 기타 다른 기업 블록체인의 개발에 참여했던 핵심 개발자 일부를 영입했다. 그리고 공개 블록체인을 토대로 비공개의 허가형 블록체인, 이른바 ‘사이드 체인’ 구축방법의 설계 작업을 그들에게 맡겼다.
쿠오모 부사장 아래서 블록체인 제품 글로벌 책임자로 일했던 IBM 중역 출신의 존 울퍼트도 지난해 하이퍼레저 패브릭 출범 직후 루빈과 합류했다. “우리 회사에서 미래 인터넷 관련 사업을 시작하겠소?” 울퍼트는 루빈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루빈은 ‘노’라고 대답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사람이다. 그리고 응용 프로그램 전문가인 나는 큰 기대를 가졌다. 이더리움이 이제 성숙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에 정말 재미있는 일들을 할 수 있다. 그 생태계를 따라가면 그 앞에 분명 이더리움 체인이 있다.” 울퍼트는 2020년쯤에는 비공개와 공개 블록체인 간의 경계가 사라지고 대부분 갈수록 호환성이 커지면서 서로 연결될 것으로 내다본다.R3 출신의 클라크 톰슨은 “실제로 활동하는 개발자 수십만 명의 공동체 그리고 상업적 후원을 받는 응용 프로그램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팀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R3는 뱅킹 서비스용 플랫폼 코다(Corda)를 개발한 금융회사들의 컨소시엄이다. 콘센시스에서 글로벌 솔루션스 설계 책임자로 일하는 톰슨은 “코드 기반에 실제로 기여하는 사람이 말 그대로 10만 명을 웃돈다”고 말했다. 이더리움은 독점적 정보의 대외 공개를 막는 코다나 하이퍼레저 같은 ‘폐쇄형 서비스’가 아니어서 업무용 시장에선 경쟁이 안 된다는 건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톰슨은 말했다. “옛날얘기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이더리움 재단은 ‘기업형이더리움연합(EEA)’이라는 조직의 설립을 추진했다. 다른 종류의 허가형 블록체인의 호환성을 보장하는 기술표준을 개발하려는 목적이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지만 나머지 공개 블록체인도 지원한다. EEA는 JP모건·인텔·MS 등 500여 개 회원사와 협력한다.
처음에는 “‘은행들을 날려버리고 모든 중앙 권력을 타도하겠다’며 기세를 올리던 검정 티셔츠 차림의 20대 청년 무리”가 블록체인 운동을 지배했다고 톰슨은 설명했다. 요즘엔 “모두가 연결됐으며 그중 어디에 솔루션을 공급하느냐로 규모·신뢰성·보안성 그리고 특히 그것을 지원하려면 따라야 하는 규제가 결정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는 개념증명 단계였다면 올해는 시범 단계다. ”인텔의 4G 개발 책임자 출신으로 현재 EEA를 이끄는 론 레스닉은 산탄데르와 JP모건 등 일부 금융 서비스 업체는 회사의 결제와 기타 업무 목적으로 이더리움 기반 블록체인을 통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널리 보급되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될 가능성이 크며 필시 내년에 호환성을 보장하는 표준이 완성된 뒤에야 그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요즘 루빈은 민간 기업이 이더리움 블록체인에서 업무를 처리하기에는 비밀유지와 보안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으면 발끈 성을 낸다. 그는 콘센시스의 공급망과 뱅킹 결제 프로그램을 손꼽으며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 중”이라며 “IBM의 마케팅 예산이 우리보다 많을 뿐”이라고 말한다.
블록체인 생태계는 종종 1993년 월드와이드웹이 비상하기 직전의 상태와 비교된다. 하지만 울퍼트는 그런 비유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지난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디스트리뷰티드’ 컨퍼런스 연설에서 그는 “1993년이란 단어가 계속 들린다”고 말했다. “지난해에 들었는데 사람들이 아직도 그 얘기를 한다. 우리의 시간이 멈춘 듯하다. 우리가 사실상 1980년대나 어쩌면 1970년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확산과 수렴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이다.”2018년 저서 ‘진실 머신, 블록체인과 모든 것의 미래(The Truth Machine: The Blockchain and the Future of Everything)’의 저자이자 MIT 미디어 랩 소속 ‘디지털 커런시 이니셔티브’의 선임 고문인 마이클 케이시는 블록체인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전에 이더리움과 기타 블록체인 기업들이 그 기술의 속도와 확장성 문제를 해결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많은 개발자가 해결하려 애쓰는 문제다. 그는 “인터넷은 40년에 걸쳐 개발됐다”고 말했다. “정말로 복잡한 시스템이다. 기술이 진화하고 확장성을 갖춰야 한다.”
전문가들의 그런 논평도 과대선전을 억제하는 데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지난해는 수십 개 블록체인 기반 기업들(이더리움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려는 기업도 있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업을 구축하려는 기업도 있다)도 이른바 암호화폐공개(ICO)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면서 닷컴 거품에 널리 비교되는 투기 열풍이 일었다. 그에 따라 비트코인 도입 이후 반복돼온 많은 암호화폐 호불황의 순환 중 하나가 발생하면서 시세가 2만 달러 가까이 치솟았다. 이더리움은 2015년 약 46센트에서 1300달러까지 상승했다(지난 2월 경제지 포브스는 상당부분 루빈의 이더 코인 지분 추정액에 근거해 그의 재산을 10억~50억 달러로 추산했다. 루빈은 논평을 거부했다).
비트코인 시세가 지금은 6400달러 선, 이더리움은 10월 기준 약 200달러로 하락하면서 그런 과대선전은 당장은 가라앉았지만 그 시세가 다시 상승세를 탄다 해도 해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케이시 고문은 “전체 글로벌 기록작성 시스템이 5000년 만의 패러다임 전환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기록을 추적하고 확인해 왔다. 기록은 경제교류 시스템의 토대를 이루며 기원 전 3000년경 수메르 문명의 점토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는 5000년 동안 중앙집중형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이제 우리는 게임의 판도를 뒤엎는 탈중앙화 시스템을 도입하는 중이다.”
- 애덤 피오르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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