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의 호적수(1) 수양대군과 김종서] 김종서는 방심했고, 수양은 준비했다
[김준태의 호적수(1) 수양대군과 김종서] 김종서는 방심했고, 수양은 준비했다
“라이벌은 나의 힘”… ‘대호(大虎)’ 제치고 왕위찬탈 성공한 수양대군
적수(敵手). 우열을 가리기 힘든 기량으로 대척점에 있거나 같은 목표를 놓고 경쟁하는 사람이다. 적(敵)보다 긍정적인 의미지만, 적보다 편하다는 뜻은 아니다. 치열하게 충돌하는 사이지만, 나의 단점을 보완하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관계다. 그래서 ‘좋은’이라는 뜻까지 추가해 ‘호적수’라고 칭한다. 새 연재는 우리 역사 속 호적수에 관한 이야기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어린 세자를 남겨두고 승하했다. 세자가 성년이 되기 전에 즉위하면 할머니 대왕대비나 어머니 대비가 수렴청정을 한다. 새 왕이 통치자로서 역량을 갖출 때까지 왕실 최고어른이 후견인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세종의 왕비이자 세자의 할머니 소헌왕후, 문종의 왕비이자 세자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모두 유명을 달리해 수렴청정을 할 사람이 없었다. 왕의 숙부나 종조부에게 섭정을 맡기는 것은 법적 근거도 없고 권력투쟁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국정을 책임지는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돼 새 임금을 보좌해달라는 것이었다.
문종의 지시는 부득이한 것이었지만 정국이 갈라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정도전의 재상 정치가 좌절한 후, 조선에서는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가 번갈아 채택돼왔다. 이 둘은 왕권을 강화하거나 견제했는데 어느 쪽이든 국정의 중심은 왕이었다. 하지만 문종의 고명으로 정치의 중심이 재상에게 넘어간 것이다. 세 정승은 ‘황표정사(黃標政事)’ 등으로 정치를 독단했다. 조선에서 관리를 임명할 땐 이조와 병조에서 후보자 3인을 올려 왕이 낙점한다. 그러나 왕이 어려 누가 적임자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재상들이 선택한 인물에 노란색 종이인 ‘황표’를 붙여놓고, 왕은 그 사람을 그대로 임명해야 했다. 이로 인해 왕의 선택권조차 무력화됐고 인사 부처 업무가 침해 받았으며, 세 정승의 권력이 비대화된다.
그러자 왕족이 반발했다. 정승들과 대척점에 선 왕족들의 중심에 선 인물이 수양대군이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은 원래 군호가 ‘진양(晉陽)’이었다. 1445년, 아버지 세종이 ‘수양(首陽)’으로 고치게 했는데, 충절의 상징인 백이와 숙제가 은거해 죽은 곳이 ‘수양산(首陽山)’이었음을 생각하면, 아들이 형과 조카에게 계속 충성하길 바랐던 것 같다. 아무튼 수양대군은 형 문종이 뛰어나 문종 재위기간에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린 조카가 즉위하자, 정승들의 전횡에 맞서 왕권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전면에 등장했다. ‘신하에게 휘둘리는 어린 왕보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낫다’는 마음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대호(大虎)’라 불리며 정국을 호령했던 김종서와 부딪혀야 했다. 김종서 하면 위풍당당한 풍채의 무장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체구는 작았다고 한다. 그는 문신 출신이다. 경연에서 주자의 [근사록]을 강의했으며 역사서 편찬을 책임졌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세종의 하명을 받아 북방개척에 나섰고 탁월한 지략과 능력으로 무공을 세워, 오늘날 우리가 김종서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서는 형조판서·우찬성·판병조사·우의정 등을 역임하며 조정의 중추로 활동했는데, 이때 그는 세종과 문종의 후광을 함께 가진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황희·맹사성·허조·최윤덕 등 세종시대 신하들이 대부분 죽었기 때문이다. 황보인도 있었지만 정치적 위상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정인지·신숙주·성삼문 등 집현전 출신은 실무진이었지 세종시대를 주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에 문종의 고명까지 받았으니, 김종서는 권위와 힘이 막강했다.
수양대군에게 김종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그런데 결국 승리한 것은 수양대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종서는 수양대군에게 방심했다. 자신의 재주에 자부심이 컸으며 나이 차이도 커 수양대군을 자신의 상대라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대군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분경(奔競)을 추진하다가도 수양대군이 반발하자 철회해줬고, 수양대군의 월권행위도 넘어가줬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과 손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했지만 제스처에 그쳤다. 신하로서 선왕의 동생이자 현 임금의 숙부를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겠지만, 제대로 대비했다면 수양대군의 손에 죽음을 맞진 않았을 것이다. 김종서가 종친을 적으로 돌린 것도 방심의 연장선상이다. 그는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종친의 활동을 제약해 종친들의 불만을 폭증시켰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제외하면 세종과 문종의 형제 대부분이 반(反) 김종서로 돌아서는 결과를 초래했다. 훗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왕위 찬탈에 성공한 데에는 이들의 지지가 영향을 미쳤다.
수양대군는 김종서를 반드시 이겨야 할 적으로 여겼다. 그는 “간당(姦黨, 간사한 무리들) 중에 간사하고 교활하기로 김종서 같은 자가 없다. 저 자가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강력한 만큼 철저한 정치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에 각 분야의 인재를 포섭하고 종친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명나라 사신행을 자원했고 명나라 황실에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한확과 친교를 맺었다(한확의 여동생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었다. 나중에 사돈까지 맺는다). 장차 왕위를 인정받으려면 명나라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창구를 사전에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게다가 정인지·최항·신숙주 등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신하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으며, 정승의 전횡을 다스려 정치를 안정시키자는 명분으로 성삼문 등 소장파의 암묵적인 동의까지 이끌어내 김종서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한 것이다.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성공은 이 같은 치밀한 준비 덕분이다.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사례는 적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겨 방치했고, 결국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 반면,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극복해야 할 적수로 인식해 철저히 준비했다.
김종서의 존재는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른 뒤에도 영향을 준다. 아버지가 총애하는 신하이자 형의 고명을 받은 신하를 죽였다는 것. 비록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웠지만 김종서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아버지와 형의 위업을 계승하고 그것을 빛나게 할 적임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수양대군은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여진 정벌에 나서는 등 북방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비극으로 끝났지만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성장시킨 ‘호’적수였던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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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수(敵手). 우열을 가리기 힘든 기량으로 대척점에 있거나 같은 목표를 놓고 경쟁하는 사람이다. 적(敵)보다 긍정적인 의미지만, 적보다 편하다는 뜻은 아니다. 치열하게 충돌하는 사이지만, 나의 단점을 보완하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관계다. 그래서 ‘좋은’이라는 뜻까지 추가해 ‘호적수’라고 칭한다. 새 연재는 우리 역사 속 호적수에 관한 이야기다.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어린 세자를 남겨두고 승하했다. 세자가 성년이 되기 전에 즉위하면 할머니 대왕대비나 어머니 대비가 수렴청정을 한다. 새 왕이 통치자로서 역량을 갖출 때까지 왕실 최고어른이 후견인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세종의 왕비이자 세자의 할머니 소헌왕후, 문종의 왕비이자 세자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모두 유명을 달리해 수렴청정을 할 사람이 없었다. 왕의 숙부나 종조부에게 섭정을 맡기는 것은 법적 근거도 없고 권력투쟁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국정을 책임지는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돼 새 임금을 보좌해달라는 것이었다.
문종의 지시는 부득이한 것이었지만 정국이 갈라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정도전의 재상 정치가 좌절한 후, 조선에서는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가 번갈아 채택돼왔다. 이 둘은 왕권을 강화하거나 견제했는데 어느 쪽이든 국정의 중심은 왕이었다. 하지만 문종의 고명으로 정치의 중심이 재상에게 넘어간 것이다. 세 정승은 ‘황표정사(黃標政事)’ 등으로 정치를 독단했다. 조선에서 관리를 임명할 땐 이조와 병조에서 후보자 3인을 올려 왕이 낙점한다. 그러나 왕이 어려 누가 적임자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재상들이 선택한 인물에 노란색 종이인 ‘황표’를 붙여놓고, 왕은 그 사람을 그대로 임명해야 했다. 이로 인해 왕의 선택권조차 무력화됐고 인사 부처 업무가 침해 받았으며, 세 정승의 권력이 비대화된다.
그러자 왕족이 반발했다. 정승들과 대척점에 선 왕족들의 중심에 선 인물이 수양대군이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은 원래 군호가 ‘진양(晉陽)’이었다. 1445년, 아버지 세종이 ‘수양(首陽)’으로 고치게 했는데, 충절의 상징인 백이와 숙제가 은거해 죽은 곳이 ‘수양산(首陽山)’이었음을 생각하면, 아들이 형과 조카에게 계속 충성하길 바랐던 것 같다. 아무튼 수양대군은 형 문종이 뛰어나 문종 재위기간에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린 조카가 즉위하자, 정승들의 전횡에 맞서 왕권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전면에 등장했다. ‘신하에게 휘둘리는 어린 왕보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 낫다’는 마음도 품었을 것이다.
‘선왕 후광’에 기대어 수양대군 얕본, 골리앗 김종서
김종서는 형조판서·우찬성·판병조사·우의정 등을 역임하며 조정의 중추로 활동했는데, 이때 그는 세종과 문종의 후광을 함께 가진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황희·맹사성·허조·최윤덕 등 세종시대 신하들이 대부분 죽었기 때문이다. 황보인도 있었지만 정치적 위상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정인지·신숙주·성삼문 등 집현전 출신은 실무진이었지 세종시대를 주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에 문종의 고명까지 받았으니, 김종서는 권위와 힘이 막강했다.
수양대군에게 김종서는 버거운 상대였다. 그런데 결국 승리한 것은 수양대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김종서는 수양대군에게 방심했다. 자신의 재주에 자부심이 컸으며 나이 차이도 커 수양대군을 자신의 상대라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대군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분경(奔競)을 추진하다가도 수양대군이 반발하자 철회해줬고, 수양대군의 월권행위도 넘어가줬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과 손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했지만 제스처에 그쳤다. 신하로서 선왕의 동생이자 현 임금의 숙부를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겠지만, 제대로 대비했다면 수양대군의 손에 죽음을 맞진 않았을 것이다.
거물 꺾으려 포위망 구축한, 다윗 수양대군
수양대군는 김종서를 반드시 이겨야 할 적으로 여겼다. 그는 “간당(姦黨, 간사한 무리들) 중에 간사하고 교활하기로 김종서 같은 자가 없다. 저 자가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강력한 만큼 철저한 정치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이에 각 분야의 인재를 포섭하고 종친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명나라 사신행을 자원했고 명나라 황실에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한확과 친교를 맺었다(한확의 여동생이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었다. 나중에 사돈까지 맺는다). 장차 왕위를 인정받으려면 명나라의 승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창구를 사전에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게다가 정인지·최항·신숙주 등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신하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으며, 정승의 전횡을 다스려 정치를 안정시키자는 명분으로 성삼문 등 소장파의 암묵적인 동의까지 이끌어내 김종서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한 것이다.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성공은 이 같은 치밀한 준비 덕분이다.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사례는 적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느냐가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겨 방치했고, 결국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 반면,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극복해야 할 적수로 인식해 철저히 준비했다.
김종서의 존재는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른 뒤에도 영향을 준다. 아버지가 총애하는 신하이자 형의 고명을 받은 신하를 죽였다는 것. 비록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웠지만 김종서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아버지와 형의 위업을 계승하고 그것을 빛나게 할 적임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수양대군은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여진 정벌에 나서는 등 북방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비극으로 끝났지만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성장시킨 ‘호’적수였던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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