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페이퍼스가 보여주는 부패권력의 추악한 두 얼굴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대통령제 채택한 중남미 국가 전직 정상 11명, 탈법 명단에 포함
전세계의 수많은 군주·왕족, 정치 지도자, 기업인, 저명인사들이 조세 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세금 회피·탈루를 시도하거나 재산을 은닉했다는 폭로가 또다시 나오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10월 3일 이 같은 내용의 ‘판도라 페이퍼스’를 공개하면서 지도자들의 도덕성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ICIJ는 1997년 설립돼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독립 글로벌 네트워크다. 100여 국가의 280명 이상의 탐사보도 기자와 100개가 넘는 미디어 조직으로 이뤄졌다. 이 조직은 영국의 BBC방송과 일간지 가디언, 프랑스의 르 몽드,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 독일의 쥐트도이체차이퉁, 노르트도이처룬트풍크(NDR) 방송, 인도의 인디언 익스프레스, 스위스의 존타크스차이퉁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2008~2011년 담배산업의 실상을 탐사보도하면서 활동에 들어갔다. 건강보다 돈을 앞세우는 담배산업의 이면에 대한 적나라한 보도와 비판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조직이 전세계에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명성을 얻은 것은 2016년 4월 조세회피처인 파나마의 금융업체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다. 이를 통해 세계적인 정치인, 기업인이 역외 지역에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세금을 회피하고 자금 세탁을 하는 한편 은밀하게 재산을 숨겨왔음을 생생하게 고발했다. 당시 보도는 전세계에 충격을 안긴 것과 동시에 탐사보도와 데이터저널리즘의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이들의 폭로 저널리즘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심지어 도덕적 지도자들에 대한 가면 벗기기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보도에 전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이어 2017년에는 파라다이스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이 입수한 파라다이스 페이퍼스를 함께 분석해 보도하면서 다시 한번 충격을 줬다.
‘파나마 페이퍼스’ 이어 ‘판도라 페이퍼스’ 파문
판도라 페이퍼스는 분량면에서 2016년 파나마 페이퍼스와 2017년 패러다이스 페이퍼스를 넘어선다. 파나마 페이퍼스는 2.6테라바이트 분량의 문서 1150만 건이었고, 파라다이스 페이퍼스는 1.4테라바이트 분량의 문서 1340만 건이었다. 이 방대한 데이터를 전세계 117개국 언론인 600여명이 참가해 파헤쳤다. 그야말로 데이터 저널리즘의 개가다.
문건에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도 경악할 수준이다. 보고서에 이름이 올린 전·현직 정치인이 336명이나 된다. 여기에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 우후루 케냐타 케냐 대통령, 기예르모 라소 에콰도르 대통령 등 전·현직 국가원수와 정부 수반 35명이 포함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번에 공개된 판도라 페이퍼스엔 대부분 국가가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중남미의 전직 정상이 11명이나 무더기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파마나는 리카르도 마르티넬리, 에르네스토 페레스 발라다레스, 후안 카를로스 바렐라 등 전직 대통령 3명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콜롬비아는 세사르 가비리아와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엘살바도르는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와 프란시스코 플로레스 페레즈 등 각각 2명의 전직 대통령이 등장한다. 호라쇼카르테스 전 파라과이 대통령, 페드로 파블로쿠친스키 전 페루 대통령, 포르피리오 로보 전 온두라스 대통령도 등장했다.
대화와 타협, 협상과 양보를 통한 연립정권 구성이 필요한 내각책임제와 달리 일단 대선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임기 내내 당선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승자독식제도(the winner-take-all)’에 따라 부패하기 쉽고 견제받기 쉽지 않은 대통령제의 폐단이 고스란히 나타났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게다가 중남미 국가는 한결같이 부유하지 않는 나라인데, 지도층이 이렇게 세금을 줄이려고 탈법을 일삼는 행동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번 판도라 페이퍼스의 폭로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명목 금액 기준 2021년 전망치에 따르면 전·현직 대통령의 탈선이 드러난 중남미 국가들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상당히 작다. 그나마 교역이 발달한 파나마가 1만3690달러로 유일하게 1만 달러를 넘을 뿐 페루 6678달러, 콜롬비아 5753달러, 파라과이 5146달러, 엘살바도르 4031달러, 온두라스 2586달러의 가난한 나라들이다. 그런데도 전직 대통령들은 조세회피지에 페이퍼컴퍼니를 여러 개 설립해 세금을 회피하거나 자금을 은닉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남미에선 현직 대통령도 3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칠레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에콰도르의 기예르모 라소, 도미니카공화국의 루이스 아비나데르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기업인 출신으로 공직인 대통령이 되면서는 이런 일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번 공개를 계기로 부패, 돈세탁, 글로벌 조세 회피 등 여러 의혹을 받아 정치적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유럽의 안도라·리히텐슈타인·모나코,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남태평양의 마셜제도·나우루·바누아투 등을 자금 투명성 공개 비협조국으로 분류해왔다. 일부 국가는 관련 법령을 통과했지만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평가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적반하장·내로남불형 정치인이 많이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체코의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다. 탈세와 부패 척결을 내세워 정치 권력을 잡았던 바비시 총리는 조세 회피지의 여러 페이퍼컴퍼니로 2200만 달러(261억원)의 자금을 빼돌려 프랑스에 대저택을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바비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재산을 모은 ‘체제 전환 부호’다. 과거의 공산 당적을 시장경제 전환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다. 그런 그는 시민단체 ‘불만 있는 시민들의 행동(ANO)’을 만들고 2012년 이를 ‘ANO 2011’이라는 정당으로 전환했다.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포괄정당으로 중도주의·자유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좌파 계열의 포퓰리즘 정당이라는 평가다. ANO와 ANO2011는 부패방지와 정치인의 면책특권 폐지를 앞세워 기존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를 모으고 실업 대책과 교통인프라 확대 등 생활 공약을 앞세웠다. 기존 정치인의 부패와 불투명성, 특권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힌 인물이 정작 자신은 역외 지역의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세금을 줄이고 자금을 은닉했다가 들킨 셈이다.
부패 척결 외치던 바비시 총리도 조세 회피
아프리카 케냐의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도 “모든 공직자의 자산은 국민이 그 적법성을 물을 수 있도록 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산공개의 투명성을 강조해온 정치인이다. 이처럼 겉으론 공직자 재산 공개의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조세 회피지에 적어도 7개의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3000만 달러(약 350억원)가 넘는 비밀 재산을 보유해왔다.
그는 1963년 독립한 케냐의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1889~1978년, 64~78년 재임)의 아들이다. 2013년 첫 당선했으며, 2017년 재선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2003~2013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009~2012년 재무장관을, 2008~2013년 부총리를 지냈다. 재무장관으로 나라 살림을 책임진 국가원수가 역외 지역을 이용한 것은 도덕성에 큰 흠결로 지적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떤 자금이기에 그런 곳을 이용했느냐는 추궁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제르바이잔의 2대 세습 대통령에 비하면 약과다. 아버지인 게이다르 알리예프(1923~2003년, 재임 1993~2003년)에 이어 2003년 10월부터 대통령을 맡은 일함 알리예프는 2008년·2013년·2018년 대선에 당선해 4선을 기록하고 있다. 2017년 부통령직을 신설해 부인 메흐리반 알리예바를 그 자리에 앉혔다. 세습에 이어 족벌체제를 이룬 셈이다.
주목할 점은 아제르바이잔이 세계적인 산유국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자료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은 2020년 하루 69만3880배럴의 원유를 생산한 세계 22위의 산유국이며, 1인당 하루 원유 생산은 8만5710배럴로 세계 14위다.
아제르바이잔 알리예프 2세 런던 건물 대거 매입
이렇게 아제르바이잔은 산유국으로 명성이 높지만 1000만 국민은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명목 금액 기준 2021년 전망치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883달러 수준이다.
이번 폭로에 따르면 알리예프는 부동산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한 런던 중심지의 건물을 대거 사들였는데, 아예 거의 블록 하나를 다 산 것으로 드러났다. 알리예프 대통령이 족벌정치를 펼치고, 역외 지역을 이용해 재산을 해외에 빼돌린 것을 보면 가난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견제받지 않는 독재정치는 부패를 부르고 부패로 국부가 빠져나가면서 국민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역시 권력은 견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도자들의 세금 회피 기법도 흥미롭다. 한때 세계 좌파의 희망이었던 변호사 출신의 전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2017년 빅토리아 시대 건물을 직접 사는 대신 이를 보유하고 있던 버진아일랜드 등록 업체를 아예 인수했다. 이런 기법을 통해 약 5억원의 세금을 아낀 것으로 드러났다. 블레어는 물론 부인 셰리도 변호사다. 자신들의 지식을 이렇게 탈법적인 사익을 위해 활용했고, 이런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국민의 실망감을 짐작할 수 있다.
2000년부터 러시아를 지배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가까운 여성을 앞세워 모나코의 불법 자산과 관련됐다는 의혹을 받는다. 역외 지역을 이용해 부동산을 취득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의 마피아, 독일의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시퍼도 역외 지역을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역외 지역 이용에는 정치 지도자와 유명인사, 마피아가 따로 없는 셈이다.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2세는 최소 36개의 역외 유령회사를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 말리부와 워싱턴, 영국 런던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지역에서 모두 합쳐서 1억600만 달러(1258억원)가 넘는 14개 저택을 손에 넣었다. 압둘라 2세 국왕은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와 같은 쿠라이시족에 속한 집안인 하심 가문 출신이다. 하심 가문은 오랫동안 ‘두 개의 성지의 수문장(열쇠지기)’이라는 종교적인 직책을 맡아 이슬람 성지인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메디나를 지배했다. 7세기부터 시작한 오랜 가문의 명예가 1300년이 지난 지금 타격을 받는 상황이 된 셈이다.
판도라 페이퍼스에 대해 압둘라 2세 국왕은 즉각 “특이하지도 부적절하지도 않다”고 항변했다. 법적으로 따지면 국왕인 자신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릴 일은 없다는 자신감이 드러난다.
물론 다른 지도자들도 법적으로 따지면 무사히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들이 역외지역 조세 회피처를 이용해 유령회사로 불리는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충분히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대중과 지도자 사이의 괴리도 더욱 깊어간다. 이 간극을 제대로 메우지 않으면 전 세계는 새롭게 정치적·사회적·도덕적 갈등이 심화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셈이다. 문건의 이름이 판도라인 이유일 것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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