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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런치 모드’ 부활에 게임업계 종사자들 한숨

‘크런치 모드’ 경험 비율 2022년 19.1%에서 지난해 38.2%로 크게 늘어

서울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야근하는 직장인들 모습. [사진 연합뉴스]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 오랜 기간 게임업계 종사자들을 괴롭혀왔던 ‘크런치 모드’가 지난해 다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게임산업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상황에서 ‘크런치 모드’가 본격적으로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3년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게임업계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43시간으로 조사됐다. 이는 2021년(41.3시간)과 2022년(41.5시간)보다 소폭 증가한 수치다. 아울러 회사 밖 비공식적 노동시간은 4.1시간으로, 이 역시 2022년(3.1시간)보다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평균 노동시간 증가를 비롯해 노동 강도도 강해진 것으로 조사됐다. 게임업계 관행인 ‘크런치모드’ 경험 비율은 2022년 19.1%에서 지난해 38.2%로 크게 늘어났다. 10명 중 4명은 크런치모드를 경험한 셈이다. 크런치모드는 평균 11.1일 지속됐고, 크런치 모드가 가장 길었던 일주일 노동시간은 평균 51.6시간이었다. 특히 300인 이상 대기업에선 59.4%가 크런치모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크런치 모드란 업무 마감 시한을 앞두고 개인 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장시간 업무를 지속하는 것을 뜻한다. 크런치 모드는 과거부터 게임업계의 고질병으로 불려 왔다. 특히 7~8년 전만 하더라도 게임업계에서 야근은 일상이었다. 대형 게임업체 사옥에는 대부분 수면실과 샤워실이 마련돼 있었다. 일부 업체들은 직원들에게 컵라면과 커피를 무제한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직원 복지 차원에서 보자면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야근이 많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게임업계의 고질병 ‘크런치 모드’

게임업체에 근무하는 개발자들은 회사 규모와 상관없이 대부분 고된 업무에 시달린다. 게임의 경우, 실시간으로 유저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하기에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특히 대규모 업데이트 일정이라도 잡히면, 개발자들은 집에 가는 것을 아예 포기하고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한다. 게임업체가 밀집해 있는 구로와 판교에는 과거 ‘등대’라 불리는 업체들이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퇴근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사무실 불을 밝히면서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는 자조(自嘲) 섞인 별명이다.

특히 2015년 이후 모바일게임으로 시장이 중심축을 옮겨가면서 빠른 업데이트와 이벤트가 요구되자 크런치 모드가 잦아지고 게임종사자들의 부담도 커졌다. 과거 온라인게임 위주였던 시절 게임 개발기간이 3~5년 정도였던 것에 비해 모바일 시대로 들어서면서 개발기간이 2년도 채 안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심지어 몇 개월 만에 게임을 ‘찍어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 시작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개발 속도가 빨라지면서 개발자들이 점점 부품화되고 있다”며 “대형 퍼블리셔로 인해 중소 개발사들은 하청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게임업계의 고된 노동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2017년부터 고용노동부가 본격적인 노동 실태 조사에 나섰고 이후부터는 과거와 같은 고된 격무는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게임사에서는 암암리에 크런치 모드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특히 이번 한콘진의 ‘2023년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서는 지난해 크런치 모드 경험 비율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크런치모드’ 경험 비율은 2022년 19.1%에서 지난해 38.2%로 크게 늘어났다. 2021년 15.4%와 비교하면 2배 이상 늘었다. 크런치 모드의 발생 주기는 12.6주에 한 번으로 조사됐으며, 크런치 모드 지속일 수는 11.1일로 나타났다. 크런치 모드 시기가 가장 길었던 일주일 노동시간은 평균 51.6시간으로 나타났으며, 크런치 모드 시기 한 번에 지속된 총 노동시간은 평균 24.2시간으로 나타났다.

종사자 규모별로는 300인 이상 사업체 소속 종사자들의 59.4%가 크런치 모드를 경험했다고 응답해 다른 종사자 규모에 비해 매우 높은 경험률을 기록했다.

300인 이상 사업체 소속 종사자 59.4%가 크런치 모드 경험

직군별로는 기획(53.2%), 프로그래밍(37.1%), 그래픽, 디자인(35.1%) 직군에서 크런치 모드 경험률이 높게 나타났다. 특히 기획 직군은 크런치 모드 발생 주기와 지속일 수가 가장 길고, 지속 노동시간 및 총 노동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특징이 나타났다. 반면 QA·운영·사업·관리·인사·행정 등 직군은 크런치 모드 경험률, 발생 주기, 지속일 수, 일주일 노동시간 모두 타 직군 대비 낮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었다.

매출액 규모별로 보면, 1000억원 이상 사업체의 경우 크런치 모드가 있었다는 응답이 75%로 가장 많았으며, 5억~10억 원 미만 사업체의 크런치 모드 발생률이 28.6%로 가장 낮게 나타났다. 매출액 규모가 커질수록 크런치 모드 경험률이 높은 경향성을 보였다. 종사자 규모별로는 50인 이상 사업체에서 크런치 모드가 있었다는 응답이 70% 이상으로 높게 나타났고, 50인 미만 사업체의 경우 크런치 모드 발생률이 40% 미만으로 낮게 나타났다.

종사자 조사에서 크런치 모드 진행 후 휴식이 보장되는 정도에 대해서는 휴식이 보장된다는 의견은 58.8점으로, 전년도 62.6점과 비교하여 낮은 수치를 나타냈다. 100~299인에서 휴식 보장 응답(50.0점)이 가장 적었으며, 50~99인에서 휴식 보장 응답(65.1점)이 가장 높은 것으로 파악됐다.

종사자 조사 결과 크런치 모드 발생의 이유로 시스템 오류, 버그 등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53.5%), 상시적으로 많은 업무량(41.7%)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 외에 퍼블리셔, 사업부 등의 급격한 추가 요구(35.6%)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크런치 모드를 바라보는 종사자와 기업체의 시선도 엇갈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크런치 모드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종사자의 약 38.0%는 크런치 모드가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보통 34.7%, 필요하지 않음 27.3%로 나타났다. 사업체의 크런치 모드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전체 응답 사업체의 약 57.0%가 필요하다 응답했고 보통 26.9%, 필요하지 않음 16.1%로 나타났다. 종사자와 사업체의 크런치 모드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비교한 결과, 전반적으로 크런치 모드의 필요성은 사업체(62.2점)가 종사자(51.9점)보다 높게 나타났다.

고용불안정 역시 최근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임업계 정규직 비중은 평균 90%를 넘을 정도로 게임업계의 고용 형태는 정규직-상용직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고용불안정을 나타내는 지표라 할 수 있는 계약 해지 또는 해고 경험에 대한 조사 결과를 비교하면 2020~2021년까지는 경험률이 지극히 낮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2022~2023년 최근에 경험률이 다소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계약 해지 또는 해고 경험은 2020년 2.8%에서 지난해 8.6%까지 늘어난 상황이다.

계약 해지 또는 해고 경험 2020년 2.8% -> 2023년 8.6%
 
개발자들의 경우, 주로 프로젝트팀 단위로 개발이 진행되기 때문에 중간에 프로젝트가 중단되면 회사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게임시장이 PC 온라인게임에서 모바일게임 위주로 재편되면서 개발 기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과거 온라인게임의 경우, 3~4년 정도 개발 기간이 있어서 어느 정도 고용이 보장됐지만, 모바일게임의 경우 짧게는 한두 달 만에 프로젝트가 중단돼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계약 해지 또는 해고의 주된 사유로는 예산 부족에 따른 인원 감축·조정, 프로젝트 중단·취소 등의 사유가 전체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상대적으로 프로젝트의 중단·취소로 인한 계약 해지나 해고의 경험률은 최근 들어서 줄어든 반면, 회사 폐업으로 인한 계약 해지 또는 해고 비율은 2022~2023년에 걸쳐 20~30% 정도로 매우 높게 집계되고 있다. 

한콘진 관계자는 “2022~2023년 회사 폐업으로 인한 계약 해지·해고가 높은 비중의 응답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코로나19 특수가 종료되면서 국내 게임업계의 비즈니스 환경이 악화하고 있고, 이로 인한 경영난으로 중소 개발사의 폐업이 증가해 종사자의 계약 해지나 해고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체적인 추이를 보면 2019년 이후로 해고될 것이라는 응답의 비중은 다소 감소했고, 기존팀에서 신규 프로젝트 수행, 또는 본인 의사에 따른 전환 배치가 될 것이라는 응답률이 높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결과로 미뤄 볼 때, 고용불안에 대한 종사자의 심리적 인식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방향이 지속되는 상황이다. 다만 2023년 조사에서, 해고를 예상하는 응답이 3.9%, 권고사직 항목이 13.2%로 여전히 높게 나타났고, 대기발령도 5.6%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전반적으로 개선되던 고용 안정성 문제가 게임산업의 전반적인 불황과 함께 다시 불안정해진다는 점을 드러내는 결과로 해석된다.


특히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 벌어진 상황들은 근무 환경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정리하면서 해당 팀원이 해고되거나 권고사직 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2017년 큰 인기를 끌었던 모바일 RPG ‘킹스레이드’를 개발해 중소 게임사의 성공 신화로 불린 베스파는 이미 2018년과 2020년 50% 이상의 사업 손실을 냈음에도 대형 게임사와의 경쟁을 고려한 무리한 인건비 상승을 추진했다. 

그 결과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2020년 4800만원에서 2021년 6700만 원으로 2년 동안 약 2000만 원가량이 인상됐지만 2021년 367명에 이르던 직원이 2022년에는 3분의 1가량인 105명까지 줄어들었다. 결국 베스파는 2023년 3월 매각 절차를 진행하며 직원 해고를 진행했다. 게임산업의 전반적인 실적하락 속에서 중소기업 종사자의 처우 및 복지가 점차 악화하고 있다. 처우와 복지의 양극화 심화는 국내 게임산업이 발전하면서 지속해서 제기된 이슈이며 많은 종사자가 처한 현실적 문제다.

“노동시간 증가, 재택근무 및 원격근무 축소가 영향 미쳐”

한콘진 관계자는 “2023년 조사 결과, 종사자의 전반적인 노동시간이 증가했다. 크런치 모드 발생 비율도 2022년 19.1%에서 2023년 38.2%로 많이 증가했다”며 “이러한 원인은 코로나 팬데믹의 종료에 따른 재택근무 및 원격근무 축소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로 ‘코로나19로 인해 재택 및 원격근무를 도입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시행하지 않고 있다’고 응답한 종사자는 2022년 54.3%에서 2023년 62.2%로 약 7.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는 경우에도, 주 5일(전면 재택)의 빈도는 2022년 20.9%에서 2023년 11.8%로 크게 줄어드는 등 전반적으로 종사자들의 ‘사업장 복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근로 시간의 증가와 재택근무의 축소는 종사자의 휴가 사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올해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휴가 기간을 조사한 결과 2022년 15.5일에서 2023년 12.4일로 축소돼 근로 시간의 증가로 인해 종사자 휴가 사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콘진 관계자는 “노동시간의 증가는 종사자 300인 이상 사업체에서 두드러진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기업 규모가 클수록 종사자의 노동환경이 좋을 것이라는 통념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비록 대기업 종사자의 급여나 복리후생 조건이 상대적으로 좋더라도 노동시간 측면에서는 절대적인 수치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높은 보상과 높은 수준의 노동강도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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