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세 명장 얼굴에 비친 앳된 ‘소년의 꿈’ [대한민국 명장]
서정석 전산응용가공 명장
17살 떠난 고향, 기술 터득 일념 하나로 버텨
“힘들게 일궈낸 기술 강국 ‘후배 양성’ 힘써야”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699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편집자주>
[이코노미스트 박세진 기자] 서정석 대한민국 명장은 ‘노력형 승부사’다. 학창 시절 그는 공부도 곧잘 했다. 손재주도 좋았다. 주위에선 ‘크게 될 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떡잎부터 달랐다. 경쟁에서의 패배는 그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했다. 이 때문일까. 주위에서 바라본 그는 손쉽게 명문대학교에 진학해 탄탄대로만 걸을 것 같았다. 그가 17살이 되던 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결정을 내리기 전 까진 말이다.
1974년, 그는 고향인 충남 광천을 떠났다. 17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직 기술에 본인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아직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할 앳된 청년은 ‘기술자’라는 꿈을 품은 채 과감히 고향을 떠났다.
타지살이는 쉽지 않았다. 그가 처음 배운 기술은 ‘냉동’이다. 냉동 기술은 주위 온도를 낮추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부터 설치까지 모두 아우른다. 이를 터득하기 위해 그는 서울 을지로에 위치한 ‘냉동 기술 학원’을 등록했다. 이곳에서 1년이란 시간 동안 냉동 기술을 연마하고 또 연마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의 지원은 없었다. 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배웠다. 당시 그의 잠자리는 책상 두 개다. 학원 창고에 놓인 책상 두 개를 붙이고 잠들기를 1년간 반복했다. 고된 생활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가 마치 패배처럼 느껴진 까닭이다. ‘노력형 승부사’라는 별명이 여기서 나온다.
갖은 고생 끝에 어느덧 18살이 된 그의 다음 행선지는 ‘섬유 회사’다. 그는 이 곳에서 6개월간 경리로 일하면서 돈의 흐름을 파악했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기업의 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또 이를 어떻게 관리해야하는지를 어깨 넘어 배웠다.
시간이 흘러 그해 가을, 그는 철공소에 몸을 담는다. 2년이란 시간을 철공소에서 보냈다. 선배들에게 맞으면서 기술을 배웠다. 추운 겨울에도 찬물로 기름때를 씻어냈다. 출퇴근은 오직 두발로 했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함이다. 열악하디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버틸 수 있던 원동력은 ‘기술 터득’의 일념 하나다.
선배들의 괴롭힘과 열악한 환경 속, 어린 소년의 가슴엔 ‘오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갖은 욕설과 폭력으로 배운 기술인 만큼, 애증의 기술 하나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경지에 오르겠다는 승부욕이 생겼다. 그 결과, 그는 기술을 전문적으로 연마하기 위해 ‘직업훈련원’으로 터를 옮겼다.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당시엔 아무것도 몰랐기에 무시도 많이 받았다. 욕은 기본이고, 심할 경우 맞기도 했다”며 “그럴수록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 보다, 내가 체계적으로 배워서 그들을 이기고 싶다는 오기가 커졌다”고 말했다.
‘떡잎’부터 달랐던 소년, ‘두각’을 드러내다
산전, 수전 그리고 공중전까지 다 겪었다는 그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인천의 직업훈련원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체계적으로 기술을 갈고 닦기 시작했다. 17살부터 기술을 배웠으니, 기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손에 익어있었다. 그 덕일까. 그는 직업훈련원에서 인정받으며 줄곧 1등을 하곤 했다.
직업훈련원에서 정점을 찍은 그는 창원으로 향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가 창원으로 향한 이유는 ‘병역’이다.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원에 위치한 방산업체로 향했다. 60개월 방산업체에서 근무하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됐다. 병역 특례다. 이곳에서 5년간 묵묵히 병역의 의무를 다했다. 이 시간 속에서도 기술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굴지의 서 명장은 기어코 ‘대형상용차 운전석 개폐용 유압실린더’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는 국내 자동차산업 분야에서 연간 100억원 이상 생산원가를 절감하는데 기여했다. 해당 기술은 ‘수익성’과 함께 ‘안전’ 향상에도 직결됐다.
서 명장은 “과거 8톤 이상 트럭 즉, 대형 상용차의 엔진오일을 교환할 때는 운전석을 이제 들어올려야 했다. 그 방식 자체가 유압 시스템이 아닌, 수동 시스템이었다”며 “운전석을 들어올려 막대로 받쳐놓고 하던 당시 막대가 운전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사람이 사망하는 사례가 있었다. 운전석 개폐용 유압실린더의 국산화를 성공하면서 이 같은 사고를 적게나마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본인이 터득한 기술을 토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던 서 명장은 1998년 법일 정밀을 설립했다. 이 곳에서 초음파금속 용착용 툴 및 타이어 커팅용 초음파 혼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수십년간 갈고닦은 기술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그의 공로를 알아본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그를 기능한국인으로 선정했다. 기능한국인 선정을 위해선 10년 이상 산업 현장 몸 담으며 숙련된 기술력을 갖춰야한다. 서 명장은 기능한국인 선정 이후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국내 최정상 ‘대한민국 명장’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민국 명장은 산업 현장 최고 수준의 숙련 기술을 보유해야만 임명된다.
‘기술’과 ‘꿈’은 계속되는 것이다
17살 청년의 오랜 꿈이 실현된 곳 법일정밀. 이곳에서 그의 ‘기술’과 ‘꿈’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법일정밀은 글로벌 초음파 용접기 스위스 브랜드 링코(RINCO)와 기술 제휴를 맺고 연구개발에 열심이다.
그는 올해로 만 67세를 맞이했다. 그럼에도 기술을 향한 그의 애정과 어릴 적 품었던 꿈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을 소개하는 그의 표정 속에서 이를 어림 짐작 할 수 있었다. 직접 기술을 소개하던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17살 어린 서정석이 이따금 보이기도 했다.
그가 기자에게 소개했던 제품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용접용 액츄에이터와 특수용도 커팅 기계다. 동종·이종 금속의 용접용 액츄에이터는 ▲BI-MW(20kHz) ▲BI-MW(35kHz) ▲BI-MW(40kHz)로 나뉜다.
해당 기계들의 작동 원리는 초음파다. 초음파를 통해 용접을 실시한다. 초음파 용접은 동종 및 이종의 금속 또는 플라스틱을 초음파 에너지를 이용해 용접하는 고체 상태 접합(solid-state bonding) 공정이다.
초음파 용접기는 ▲전원공급장치 ▲액츄에이터 ▲초음파 스택(컨버터·부스터·혼)으로 구성된다. 전원공급장치는 110V·220V·50~60Hz 전기에너지를 용접에 사용되는 공진주파수(평균 20~40kHz)를 갖는 전기에너지로 변환한다.
여기서 초음파 스택은 전원공급장치의 전기에너지를 같은 주파수의 기계적 진동에너지로 변환한다. 해당 에너지는 용접 소재에 전달된다. 초음파 용접기의 핵심 부품인 혼은 용접 소재에 압력을 가해 특정 공진 주파수로 진동하며 용접부를 형성하게 된다.
핵심 부품 혼은 ▲20kHz ▲35kHz ▲40kHz 등으로 제작된다. 이들 제품은 ▲리튬 이온 배터리 셀 ▲자동차 ▲의료 ▲에어백 센서 ▲디스플레이 ▲필름 ▲타이어 커팅 ▲식품 커팅 ▲패키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법일정밀은 초음파 혼의 설계 및 제조와 관련된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확립했다. 혼은 원하는 진동 특성과 안전성을 얻기 위해 각종 해석 후 설계 수정 단계를 거쳐야 한다. 최적의 설계를 얻기 위해 설계·해석·수정과 같은 주기를 수 차례 반복해야 하는 셈이다.
법일정밀은 이 모든 과정에 필요한 기술 확립을 통해 수요자의 요구에 대응해 자체적으로 혼을 설계하고 제조해 공급한다. 서 명장의 분신과 같은 ‘초음파 장치’는 ▲화학 ▲의학 ▲가정 등 많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서 명장은 “초음파 용접은 말 그대로 음파의 떨림을 활용해 금속이나 플라스틱과 같은 물질을 초음파의 마찰열을 통해 용접하는 과정”이라며 “해당 용접 기술은 자동차나 핸드폰 배터리와 같은 2차 전지 등을 접합할 때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용접을 하는데 있어 별도의 이음제 없이 단순히 재료 두 개를 놓고 초음파 용접기의 마찰열을 통해 용접하는 셈”이라며 “현재 기술 관련된 특허를 22개 보유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특허권이 초음파 용접기의 핵심부품 혼을 제조하는 방법에 대한 특허권”이라고 덧붙였다.
명장이 바라본 기술 ‘100년 대계’
기술력 하나로 우리나라의 정점에 우뚝 선 서 명장에게도 말 못할 고민은 있다. 바로 후배 양성이다. 직접 후배를 양성하기 위해 ‘기술 교육기관 설립’도 고민하던 그였다. 후배 양성을 위한 그의 꿈은 주변의 만류에 현재 답보 상태다.
그가 바라본 우리나라 ‘기술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특히 기술력이 필수인 산업 현장의 기계 게통은 무너졌다고 평가했다.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유입이 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기술의 대를 물려줄 대상이 사라져 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서 명장은 “젊은 사람들은 이 기술을 배우는 행위 자체가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기술 터득으로 성장해온 저로선 확실한 기술이 있으면 평생 직장을 얻을 수 있고, 또 생계를 유지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이에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바이오, 철도, 항공 등 전문 분야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어느정도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며 “다만, 모든 제품은 기계를 바탕으로 제작된다. 즉, 기계를 다를 줄 알아야 어느 분야에서든 두각을 드러낼 수 있다. 기계가 모든 산업의 뿌리인 셈인데 이를 기피하는 형상이 두드러지다 보니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현실을 가만히 방관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명색이 대한민국 명장인 만큼, 그 이름이 주는 책임감을 절실히 느꼈다. 결국 기계와 관련된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직접 학생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대물림은 이뤄지지 않았다. 학생들의 관심이 지나치게 적었던 까닭이다.
명장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답하던 그는 “스스로 기술을 힘들게 배워온 까닭에 후배들은 조금 더 편한 환경에서 전문적으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대한민국 명장이 직접 기술을 알려주면 분명 후대에 좋은 선순환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8월 직접 서울 소재 한 공업고등학교에서 일주일 기술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했는데, 당시 학생들이 모집이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8명의 학생 모집 조차 힘든 것이 기술 인력 양성의 현주소다.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비판했다.
수 십년 기술 외길을 걸어온 그다. 인터뷰 말미, 그의 마지막 부탁은 단 하나였다.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한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관심이다. 긴 세월이 흐른 뒤, 주위를 돌아보니 힘들게 닦아놓은 길을 뒤따르는 후배들이 보이지 않아 절망적이라는 그다. 그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명장은 “우리가 힘들게 배워서 일궈낸 기술 강국이다. 시간이 흘러 우리 세대가 은퇴를 하고 나면 후손이 이 기술을 배우고 다시 살려나가야 하는데 이런 순환 과정이 현재로서 완전 붕괴됐다” 며 “ 교육은 100년 대계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 100년은커녕 10년도 채 못채우고 망가질 판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선 우리 사회 모두의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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