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도의 열기 품은 마데이라 와인
고통을 예술로 승화...침묵의 증인
[김욱성 와인칼럼니스트] 한 잔의 와인(포도주)에는 한 해의 기후가 기록돼 있다. 수천 년을 이어온 땅의 역사가 녹아 있으며, 그 모든 것을 해석한 인간의 철학도 담겨 있다. 그 모든 것을 넘어 인류 역사의 가장 역동적인 한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해 낸 와인도 존재한다. '액체의 증인'이라고 불리는 그 이름은 바로 '마데이라 와인'이다.
15세기 유럽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망으로 들끓었다. 지중해에 갇혀 있던 낡은 세계관은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았다. 이 대항해 시대를 가장 먼저 개척한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그들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그리고 신대륙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며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대서양의 십자로' 마데이라 섬
이 거대한 항해는 필연적으로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포르투갈 본토를 떠난 범선이 망망대해로 나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담수와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었던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아프리카 북서쪽 대서양에 떠 있는 화산섬인 마데이라였다.
'나무의 섬'(Ilha da Madeira)이라는 이름처럼 울창했던 이 섬은 포르투갈 항해자들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보급 기지였다. 험난한 파도와 싸워야 할 선원들에게 물과 식량 그리고 무엇보다 '와인'은 필수품이었다.
와인은 선상에서 가장 안전한 음료이자 유일한 위안이었다. 마데이라 섬의 가파른 화산 경사면에서는 포도가 자랐고, 선박들은 이 와인을 싣고 인도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다.
적도를 통과하는 기나긴 항해 동안 배의 갑판 아래 적재된 와인 통은 작열하는 태양열에 그대로 노출됐다. 와인은 끓어오르듯 뜨거워졌고,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선원들은 와인의 변질을 막기 위해 포도 증류주를 첨가하는 주정 강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인도를 향한 기나긴 항해를 마치고 다시 섬으로 돌아온 와인 통이 있었다. ‘비노 다 로다’(Vinho da Roda), 즉 ‘왕복 여행을 한 와인’이라 불린 이 술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와인은 경이롭게 변해 있었다. 색은 짙은 황금빛 호박색으로 변했고, 맛은 끓어오르는 열기 속에서 농축돼 캐러멜과 볶은 견과류, 말린 과일의 복합적인 풍미를 뿜어냈다. 항해의 고통과 적도의 열기라는 ‘시련’이 와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멸의 존재'로 단련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이 독특한 산화와 숙성 과정을 '마데라이제이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우연한 발견'은 곧 마데이라 와인의 핵심 정체성이 됐다. 생산자들은 더 이상 비싼 비용을 들여 와인을 배에 싣고 적도를 왕복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섬 안에서 이 '항해의 열기'를 재현할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이것이 바로 마데이라 와인만의 독특한 숙성 방식인 '에스투파젬'(Estufagem)의 탄생이다.
에스투파젬은 '찜질실'을 뜻하는 '에스투파'(Estufa)에서 유래한 말이다. 와인을 인위적으로 가열해 숙성하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쿠바 드 칼로르' 방식이다. 와인을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 담고 45~50도의 온도로 3개월 이상 가열함으로써 배의 선실에서 겪었던 빠르고 강렬한 열 충격을 재현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칸테이루' 방식이다. 와인을 담은 오크통을 다락방(Canteiro)에 두고 태양열로 수십 년간 노출하며 숙성하는 방식이다.
가혹한 열과 산화의 과정은 와인 속의 미생물을 모두 사멸시키기 때문에 마데이라는 코르크를 개봉한 후에도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그 맛을 유지하는 ‘불멸의 와인’으로 탄생한다.
역사의 축배가 된 ‘문화적 아이콘’
마데이라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항해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특히 신대륙 미국에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영국 본토의 무거운 세금을 피해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와인을 직접 수입하는 것은 식민지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가장 역사적인 순간은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찾아왔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문서, 즉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후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축배를 들었다. 그들의 잔을 채운 것은 프랑스의 샴페인이나 보르도 와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머나먼 대서양의 섬에서 항해의 시련을 견디고 온 마데이라 와인이었다.
마데이라 와인의 비즈니스 모델은 현대의 어떤 와인과도 다르다.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이 수확 후 몇 년 안에 소비되는 것과 달리 마데이라의 가치는 '기다림' 그 자체에서 나온다.
와이너리들은 10년, 20년 숙성 와인을 기본으로 판매하며 19세기나 20세기 초에 생산된 100년 넘은 빈티지 와인을 여전히 시장에 공급한다. 이는 한 세대가 와인을 만들면 그 와인은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가 판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청난 인내심과 자본 없이는 불가능한 ‘시간의 비즈니스’이다.
한 잔의 마데이라 와인을 마시는 것은 15세기 범선의 흔들림과 적도의 태양 그리고 신대륙을 개척한 이들의 함성을 함께 마시는 것이다. 그것은 황금빛 액체에 담긴 격동의 역사이며,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침묵의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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