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기업 지배구조 변화 단초 ‘이사회’…기업의 의지 보여주는 ‘거울’ [스페셜리스트 뷰]
- 국내 기업 이사회 구성…재무·법률 중심에 머물러
목표 구체화·후보군 관리 등 이사회 관리방안 설계 중요
[김상원 대신파이낸셜그룹 전무·대신경제연구소 ESG컨설팅 총괄] 글로벌 기업 거버넌스 리서치 업체 딜리전트 마켓 인텔리전스(DMI)에 따르면 국내 행동주의 펀드 캠페인 대상 기업 수는 2020년 10개에서 2024년 66개로 대폭 증가했다. 주주 행동주의는 더 이상 일부 기업에만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기업 지배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며, 이제 시장은 기업을 평가할 때 ‘회사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구조를 갖췄는가’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사회로 향한다.
이사회가 다시 중요해진 이유
이사회는 회사의 방향을 점검하고, 경영진의 판단이 위험하지 않은지 감시하는 곳이다. 이사회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중장기 전략도 말에 그칠 수밖에 없다. 최근 투자자들이 이사회 구성에 유독 민감해진 이유다.
실제로 주주제안의 흐름을 보면 변화는 분명하다. 최근 3년간 이사·감사 선임과 관련된 안건이 전체 주주제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시장이 ‘회사를 감독할 수 있는 구조부터 바꾸자’고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다.
최근 상법 개정으로 주주총회에서 이사·감사 선임 안건이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사회가 형식적인 승인 기구에 머문다면 시장은 그 기업을 ‘문제를 미리 막을 수 없는 회사’로 인식할 것이다. 이제 이사회에는 독립성뿐 아니라, 위험을 이해하고 토론을 통해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역량이 요구되고 있다.
복잡해진 환경, 따라가지 못하는 이사회
문제는 이사회가 다뤄야 할 사안이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공급망 불안 ▲국제 정세 변화 ▲기후 이슈에 더해 ▲인공지능(AI) ▲데이터 활용 ▲사이버 보안 등은 이제 기업의 존속과 직결된 사안이 됐다. 이들 대부분은 재무제표에 즉각 드러나지 않지만, 한 번 문제가 발생하면 기업가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사이버 보안은 단기적 재무손실을 넘어 중장기적 평판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는 영역이다. 최근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한 쿠팡의 경우, 그동안 상당히 많은 정보보안 비용을 투입해온 회사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러한 투자는 인프라 구축과 솔루션 도입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조직 차원에서의 체계적인 관리는 미흡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경영 의사결정 과정에서 최고정보보호책임자(CISO) 등 보안조직이 얼마나 실질적 권한을 가지고 위험 제어 역할을 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국내 많은 기업의 이사회 구성은 여전히 재무·법률 중심에 머물러 있다. 학계나 공공부문 출신 비중은 높은 반면, 실제 사업을 이끌어본 경험이나 기술 분야에 대한 이해를 갖춘 인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현장에서 어떤 위험이 커지고 있는지 놓치기 쉬운 구조다.
“이사회가 회사의 전략과 리스크를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가.” 글로벌 지배구조 원칙과 의결권 자문사들도 이같은 질문을 던진다. 국내에서도 기업지배구조보고서를 통해 이사회 구성뿐 아니라, 어떤 전문성을 갖추고 있고 그 체계가 실제로 작동하는지까지 설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사회 역량 관리는 더 이상 ‘하면 좋은 일’이 아니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비용과 부담으로 되돌아오는 사안’이 됐다.
BSM의 함정, 표를 채우는 데서 멈추는 순간
이런 환경에서 많은 기업이 이사회 역량표(Board Skill Matrix·BSM)를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사들의 경력을 키워드로 나열한 ‘현황표’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BSM의 본래 목적은 분명하다. 회사가 향후 어떤 역량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고 현재 이사회에 부족한 부분을 점검해 이를 이사 선임 계획에 연결하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2023년 12월 ‘은행지주·은행 지배구조 모범관행’을 통해 은행(지주)에 BSM 작성을 권고하고, 이를 이사 후보군 관리와 신규 이사 선임에 활용토록 했다. 또한 이사회 전문성 목표비율 설정 및 그와 연계된 ▲이사회 구조 설계 ▲사외이사 후보군 추천 경로의 다변화 ▲자격 검증 강화 역시 강조했다. 명확한 목표 없이 작성된 BSM은 의사결정 도구가 아니라 단순 체크리스트에 그치기 쉽다.
또 다른 함정은 이른바 ‘스타 이사’ 중심의 접근이다. 복잡한 리스크는 한 명의 전문가로 관리되지 않는다. AI나 디지털 전환 문제만 보더라도 기술·보안·규제·윤리가 얽힌 복합 이슈다. 중요한 것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이사회 전체가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구조다. 이사회가 이해하지 못하는 위험은 관리할 수 없으며, 위기 상황에서 서로 다른 시각이 유입되지 않으면 이사회 논의는 쉽게 한 방향으로 쏠린다. 결국 시장은 ‘이 이사회는 정말로 회사를 감독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이사회가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이사회의 감독 기능은 이름뿐인 기능에 그친다. 이사회 구성 자체를 위험관리 수단으로 인식, 다양한 영역에서의 경험 및 네트워크 등을 보유한 이사들을 선임하고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특히 해외 규제와 소송 리스크가 큰 산업일수록 글로벌 경험을 갖춘 이사는 필수적이다.
지금 필요한 ‘세 가지’ 실행
해법은 이사회 관리방안을 제대로 설계하는 것이다. 첫째, 회사에 정말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부터 정리해야 한다. 사업 구조와 핵심 위험을 기준으로 목표 역량을 정하고, 현재 이사회와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AI’라는 단어를 적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사회가 어떤 문제를 감독하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까지 구체화해야 한다.
둘째, 이사 선임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기업 내부 추천에만 의존하지 말고 외부 네트워크와 다양한 추천 경로를 활용해 후보군을 상시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번 선임으로 무엇을 보완할 것인가’를 명확한 기준으로 삼는 동시에 이력에 대한 적합성 검증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평가와 개선이 실제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사회 평가 결과가 ▲재선임 여부 ▲위원회 배치 ▲교육 계획으로 연결될 때 역량 관리는 작동한다. 외부 평가를 주기적으로 병행하고, 행동 중심의 지표를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아가 ‘2년 내 OO분야 사내이사 1인 발탁’과 같은 구체적인 ‘이사 교체 및 보강에 대한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 진행 상황을 공개하는 기업일수록 투자자의 신뢰를 얻는다. 공시는 성과를 자랑하는 문서가 아니라, 개선 로드맵을 약속하는 계약서에 가깝다.
이사회는 ‘간판’이 아니라 ‘조타실’
특히 간과되기 쉬운 점은 전문성은 직함과 이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재무 전문가나 법률 전문가, 혹은 행동주의 투자 경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기업에 적합한 이사가 될 수는 없다. 산업 구조와 사업 모델, 현장 리스크를 이해하지 못한 전문성은 피상적인 조언에 머물기 쉽다. 이사회에 필요한 것은 ‘유명한 전문가’가 아니라, 해당 기업의 맥락 속에서 판단할 수 있는 전문성이다.
내부 인재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기업의 전략과 리스크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 외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회사 안에서 사업을 이끌며 성과를 만들어온 인재, 위기 국면에서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본 경험이 있는 인물은 기업의 핵심 자산이다. 내부에서 이러한 인재를 발굴하고 준비시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환경에서 이사회는 거버넌스를 장식하는 간판이 아니라, 기업의 항로를 정하는 조타실이다. 계기판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수치를 읽고 해석하며, 상황에 맞는 판단으로 연결할 수 있는 산업 이해와 경험이 함께해야 한다.
투자자는 완벽한 이사회를 기대하지 않는다. 무엇이 부족하며 이를 어떻게 보완해 나갈 것인지를 투명하게 설명하는 기업이 신뢰를 얻는다. 기업과 산업을 깊이 이해하는 이사회는 위기 앞에서 문제를 조기에 인식하고 방향을 수정하는 반면 외형적 전문성에만 의존한 이사회는 신호를 뒤늦게 읽거나, 판단을 경영진에게 미루기 쉽다. 시장이 두 이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은 ‘의사결정의 질’이다.
결국 이사회는 기업의 의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리스크를 그때그때 감당하는 조직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학습하고 성장설계하는 조직으로 나아갈 것인지는 이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준비되는지에 달려 있다. 조타실의 계기판과 선원 구성을 점검하지 않은 채 항해에 나서는 기업은, 성패를 전략이 아니라 운에 맡기는 셈이다. 시장은 이제 그 차이를 분명히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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