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갇혀버린 원화, 1400원 시대]③
역대급 수출에도 뚫린 1500원선
외국 자본의 안전 자산 쏠림 심화…개인·기업·국민연금 영향도 커져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미국과 이란 전쟁 여파로 뚝 떨어진 원화 가치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23년 말 기준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원‧달러 환율)은 1299원 수준이었는데, 지난 4월 30일 기준 1485.30원까지 치솟았다. 약 2년 반만에 200원 가까이 오른 셈이다. 지난 3월 18일 중동 전쟁 심화로 전 세계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면서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뚫었던 것보다는 소폭 내려왔지만, 여전히 1400원대 후반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중동 전쟁 여파에 원화가 직격탄을 맞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동 전쟁 이후 글로벌 자금은 이른바 ‘안전 자산’으로 쏠렸다. 대표적인 기축통화로 꼽히는 미 달러는 초강세를 보이면서 ‘킹달러’라고 불리고 있다. 올해 초 미 달러화 약세가 이어지면서 달러 패권이 약화하고 있다는 우려도 나왔는데, 불과 넉 달 만에 “믿을 건 역시 달러”라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다.
IMF·금융위기 수준의 충격
한국은행과 서울외환시장 등에 따르면 지난 3월 1~2주 원‧달러 평균 환율(주간 거래 종가 기준)은 1476.9원이었다. 이는 월간 기준 1998년 3월(1488.87원)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3월 첫째 주 주간 평균환율은 1480.7원으로 2009년 3월 둘째 주(1504.43원) 이후 최고치였다. 1998년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던 외환위기 직후이고, 2009년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았던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였다. 최근 벌어진 중동 전쟁 여파는 우리나라에는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단순히 달러 강세와 원화 약세 현상이 아니라, 글로벌 통화시장에서 유독 원화 가치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데 있다. 3월 1~14일까지 원화 가치는 3.84% 떨어졌다. 달러인덱스를 구성하는 주요 6개국 통화 가운데 ▲유럽연합(EU)의 유로(-3.29%) ▲일본 엔(-2.39%) ▲영국 파운드(-1.85%)보다 하락 폭이 컸다.
원화가 기축통화가 아니라는 점은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변동성을 키우는 핵심 요소로 거론된다. 기축통화국은 경제 위기 시 자국 화폐에 대한 수요가 오히려 늘어나는 ‘안전 자산’ 효과를 누리지만, 한국과 같은 비기축통화국은 자본 유출 위험에 더 노출되기 때문이다. 유로나 엔, 파운드는 달러만큼은 아니지만 국제 거래에서 안정성과 신뢰성을 바탕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통화들이다. 사실상의 기축통화군에 포함된다.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으로 몰리면서 원화와 한국 주식을 팔아치우기 시작하자 그 영향은 고스란히 환율 상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 지난해 한국의 수출 대금 결제액 중 원화 비중은 3.4% 수준이었다. 미국 달러 결제 비율은 84.2%, 유로 결제는 5.9%로 집계됐다.
원화 가치 하락은 한국의 높은 에너지 해외 의존도와도 연관 있다는 해석이다. 한국은행의 ‘중동 사태의 환율 영향 차별화 배경 및 평가’ 보고서를 보면 한국뿐 아니라 태국, 대만 등 중동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 환율이 전쟁 이후 크게 상승했다. 반면 캐나다나 브라질 등 에너지 수출국은 환율이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특히 한국은 석유나 천연가스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데, 중동 지역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약 70%를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지역에서 수입한다. 일본은 중동산 석유 의존도가 90%에 육박한다. 그런데도 원화가 일본 엔화보다 전쟁 충격을 더 크게 받은 것은 ‘기축통화’, 즉 국제적 신뢰도 면에서 생긴 차이라는 지적이다.
‘경상수지 흑자=원화 강세’ 공식 깨져…환율 메커니즘 변화
수출 호조에 따른 경상수지 개선도 원화 약세를 막지 못하고 있다. 통상 경상수지가 개선되어 달러 유입이 늘면 원‧달러 환율도 떨어졌는데, 이제는 이런 공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우리나라 대외부문의 구조적 변화가 환율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보면 2023년 4분기 이후 국내 경상수지 흑자 폭 확대 기조 속에서도 실질 환율은 상승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김지현 한은 국제국 국제금융연구팀 과장은 “우리나라 대외부문은 2000년대 이후 장기적으로 전환을 겪었고, 과거와 달리 경상수지 흑자가 원화 절상으로 직결되지 않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경상수지 흑자가 발생하면 달러가 국내에 축적되면서 환율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달러가 증권투자 중심으로 축적되면서 자본 유출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 과장은 “외환시장 거래 규모가 클수록 동일한 자본 유출에도 환율 변동이 완화되며, 우리나라는 주요 선진국 대비 반응도가 높은 편”이라고 했다.
국내 기업들의 단기외채 비중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든 점도 변수다. 과거에는 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국내로 가지고 들어왔다면 최근에는 이런 자금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가 해외 사업에 직접 투자하면서 시장을 통한 달러 유입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분석이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는 퇴임식에서 “외국인 투자자의 자본 유출입에 크게 좌우되던 외환시장에서 이제는 국내 기업, 개인, 국민연금 등 거주자 영향도 크게 확대됐다”며 해외 투자자나 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가 더 복잡한 요인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통화·재정정책만으로 우리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이뤄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도 개선 노력 없이 과거와 같이 외환시장 개입이나 금리정책만으로 환율을 관리하려고 하면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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