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경제 성장률 2.5%·코스피 8000시대에 가려진 그늘[한국경제 K자형 성장의 그림자]①
- 삼성·SK하이닉스가 끌어올린 성장률…한국경제는 왜 얼어붙었나
AI·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만든 산업·고용·소득 양극화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올해 대한민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5%로 상향 조정하고 주식시장이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사상 최고치를 향해 가고 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경기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거시경제 지표의 화려한 숫자와 바닥 민생경제의 냉혹한 현실이 철저하게 분리되는 이른바 디커플링 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종로의 한 골목에서 만난 자영업자는 수출이 잘되고 경제가 성장한다는데 서민들은 외환위기 때보다 더 살기 퍽퍽하다고 호소하며 손님이 끊겨 저녁 장사를 공치는 날이 허다하다고 전했다. 한국 경제가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특정 산업만 독주하고 나머지는 고사하는 K자형 양극화의 짙은 그늘에 가려져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KDI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보다 높게 잡은 배경에는 인공지능(AI) 열풍에 따른 반도체 수요 폭발이 자리 잡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필두로 한 반도체 기업들이 역대급 실적을 갈아치우며 증시와 수출을 강력하게 견인한 결과다. 주식시장 역시 기술주 중심의 랠리가 이어지며 온기가 도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러한 온기는 경제 전반으로 퍼지지 못하고 반도체 대기업이라는 한정된 영역에만 머물고 있다. 통계학적 착시가 민생의 고통을 가리고 있는 셈이다.
사라진 낙수효과, 자본집약적 AI 성장의 그늘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제조 분야와 내수 시장은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다. 고물가로 인해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소비 부진의 늪에 빠진 모습이다. 자영업자들은 불어난 대출 이자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 최근 몇 년 새 폐업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2024년 폐업 신고 사업자는 100만8282명으로 처음 100만명을 넘어섰다. 아울러 지난해 자영업자 실업급여 수급자는 3820명, 지급액은 205억2600만원으로 각각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중소기업 가동률 역시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외형상 경제는 커졌는데 국민의 지갑은 더 얇아지는 기이한 불황이 지속되는 모습이다.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약점인 특정 산업 외골수 구조는 이번 슈퍼사이클을 계기로 더욱 고착화됐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37%를 돌파하며 단일 품목에 대한 의존도가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수출 회복세와 무역수지 흑자의 대부분이 반도체 한 곳에서 발생한 착시인 것이다. 과거 한국 경제를 지탱하던 전통적인 주력 산업들은 중국의 기술 추격과 글로벌 공급과잉 속에서 구조적 침체에 허덕이는 모습이다.
세계 시장을 호령하던 철강과 석유화학 업종은 수익성 악화로 감산과 공장 가동 중단을 고심하는 처지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여파로 건설업 역시 고사의 기로에 서 있다. 그나마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 중인 조선업 정도를 제외하면 반도체의 독주를 받쳐줄 우군이 전무한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한 나라의 국가 경제가 단 하나의 산업 엔진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극도로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반도체 사이클이 하강 국면에 진입하는 순간, 한국 경제 전체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릴 수 있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반도체 중심의 성장이 가진 또 다른 한계는 고용 유발 효과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반도체와 AI 산업은 대규모 장치와 기술이 중심이 되는 자본집약적 산업이다. 수조원의 투자가 이뤄져도 실제 창출되는 직접 고용 인원은 전통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KDI에 따르면 생산액 10억원이 증가할 때 발생하는 취업자 수는 반도체 산업이 2.1명으로 전체 제조업 평균(6.2명)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대기업의 막대한 수익이 가계 소득 증대와 고용 확대로 이어지는 낙수효과는 사실상 소멸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4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반도체 등 일부업종의 수출 호황에도 제조업은 5만5000명, 건설업은 8000명 줄며 각각 22개월, 24개월 연속 감소했다.
이 같은 고용 구조의 변화는 청년 세대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4월 고용동향을 보면 지난 4월 15세 이상 취업자는 2896만1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7만4000명(0.3%) 증가했다. 이는 16개월 만에 최저 수준이다. 특히 청년층 취업자는 1년 전보다 19만4000명 감소했다. 이는 2022년 11월부터 42개월 연속 감소세다. 청년층 고용률 역시 1년 전보다 1.6%포인트 하락한 43.7%로 2024년 5월 이후 24개월 연속 하락세다. 청년층 실업률은 7.1%로 전년보다 0.2%p 하락했다.
청년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반도체와 AI 등 일부 첨단 분야에 한정돼 있는데, 이들 기업의 채용 문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반면 청년들을 흡수해야 할 중소기업과 도소매업, 서비스업은 침체로 인해 신규 채용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첨단 산업 종사자들은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반면, 대다수 청년과 서민들은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해 소득 양극화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K자형 노동시장이 고착화되고 있다.
청년층 강타한 고용 한파…벼랑 끝 ‘K자형 노동시장’
이처럼 현재 한국 경제는 상단과 하단이 극명하게 갈리는 불균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상단에 위치한 반도체 산업은 KDI 성장률 전망치 상향과 코스피 상승을 이끌며 대규모 성과급 잔치를 벌이고 있다. 반면 하단에 위치한 철강, 석유화학, 건설, 도소매 및 자영업 분야는 업황 부진과 내수 소비 침체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유례없는 실적 호조는 분명 국가적인 성과이지만 기업의 성장이 국가 경제의 건강한 성장과 동의어가 되던 시대는 끝났다. 정부와 정책 당국은 거시경제 지표가 주는 풍요로움에 취해 기민한 대응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반도체 단일 엔진에 쏠린 리스크를 분산하고 무너진 내수 경제를 살릴 정교한 핀셋 정책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지난 5월 ‘최근 반도체와 반도체 이외 제조업의 경기 양극화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제조업 경기가 현재 상승 국면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는 반도체 경기의 가파른 상승이 제조업 전체 경기를 끌어올린 결과”라며 “반도체 산업은 낙수 효과가 작으므로 반도체 수요가 둔화될 경우 제조업 경기 전반에 미치는 하방 압력이 크게 작용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정책처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반도체 경기에 민감한 메모리 생산 위주에서 비교적 안정적 수요 기반을 가진 반도체 소재와 반도체 설계, 검사, 후공정 등의 경쟁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아울러 로봇, 스마트 제조, 자율주행 등 반도체 제조 이외의 AI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전략적으로 발굴 육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속에서 정부도 하반기 경제정책의 초점을 ‘잠재성장률 반등’과 ‘양극화 해소’에 맞추기로 했다. 최근 국내총생산(GDP) 반등과 반도체 수출 호조가 ‘K자형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점에서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5월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겸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경제 재도약의 골든타임을 적극 활용하면서 중동전쟁 이후 대응 전략과 잠재성장률 반등, 양극화 해소 등 구조적 문제 해결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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