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슈
메모리·조선·원전이 한국의 힘.. 렉슨 류 "질서 설계자로 나서야"
- 세계 질서의 수혜자 넘어 규칙 만드는 국가로 변화
80년 동맹 넘어 다음 70년 파트너십 제시해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
"지난 80년이 안보 동맹의 시대였다면, 앞으로 70년은 공동 투자와 공동 설계의 시대가 돼야 합니다."
렉슨 류 더 아시아 그룹(TAG) 사장(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비확산담당관)은 17일 서울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7회 이데일리 전략포럼 둘째 날 무대에서 한미동맹의 미래를 이렇게 정의했다. 미국이 안보를 제공하고 한국이 성장의 혜택을 누리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한미동맹은 반도체와 조선, 원자력, 방위산업 등 전략 산업을 함께 육성하는 '공동 투자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류 사장은 이데일리 전략포럼 둘째 날 첫 기조연설에서 "우리의 목표는 80년 전 만들어진 동맹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70년 동안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이라며 "한국은 설계의 대상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포럼 주제는 '힘의 시대, 문명의 재편: 누가 신세계를 설계하는가'다. 류 사장은 전날 열린 첫째 날 곽재선 KG그룹 회장이 언급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낡은 것은 죽어가고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문구를 인용하며 국제질서가 구조적 전환기에 들어섰다고 설명했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 경제를 떠받쳐온 자유무역과 글로벌 공급망, 경제적 상호의존이 더 이상 안보를 보장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에는 경제적 상호의존이 안정의 기반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취약성을 키우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반도체와 희토류, AI, 전력망은 산업을 넘어 국가안보의 핵심 자산이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은 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반도체 수출 통제와 공급망 재편, 핵심 광물 확보 경쟁이 대표적이다. 사실상 국가 경쟁력과 산업 경쟁력, 안보가 하나의 축으로 결합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류 사장은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이 드문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중 경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는 동시에 북한 핵 위협에 직면한 국가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이 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특히 한국이 보유한 산업 경쟁력을 '전략 자산'으로 규정했다.
가장 먼저 언급한 분야는 반도체였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D램 시장 점유율은 70%를 웃돈다. 생성형 AI 시대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는 SK하이닉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류 사장은 "모든 AI 모델은 메모리 위에서 작동한다"며 "한국은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보유한 국가"라고 평가했다.
조선 산업도 대표적인 전략 자산으로 꼽았다. 글로벌 선박 수주 시장은 중국과 한국, 일본이 주도하고 있으며 미국의 상선 건조 비중은 1% 미만이다. 반면 한국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최근 미국이 해군력 확대와 조선업 재건을 국가 전략으로 내세우는 배경에도 한국과의 협력 필요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원자력 산업 역시 주목했다. 한국은 현재 26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으며 UAE 바라카 원전 수출을 통해 세계 원전 시장에서 경쟁력을 입증했다. 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 능력은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방위산업에 대한 평가도 높았다. 그는 한국 방산이 단순한 무기 수출을 넘어 생산 역량과 기술 이전, 공동 생산 체계를 갖춘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한국 방산 수출은 2024년 기준 약 95억 달러 규모를 기록하며 세계 주요 방산 공급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산업 역량이 한미동맹의 성격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80년 동안 미국이 안보를 제공하고 한국이 혜택을 받는 구조였다면 앞으로는 양국이 자본과 역량을 함께 투자하는 관계가 될 것"이라며 "미국은 보호국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파트너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건강한 동맹이라면 서로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며 "한국은 반도체와 조선, 원자력, 방산 분야에서 미국이 필요로 하는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주의할 부분은 있다. 류 사장은 한국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으로 '방기(abandonment)'보다 '거래 대상화'를 꼽았다. 과거에는 동맹국으로부터 버림받는 위험이 컸다면, 앞으로는 강대국 간 협상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위험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한 해법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역량 확보를 제시했다. 공급망과 기술 체계 깊숙이 자리 잡아 한국 없이는 글로벌 시스템이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류 사장은 연설 말미에 "많은 국가가 앞으로 어떤 미국이 등장할지 예측하는 데 시간을 쏟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며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국제 환경에서도 번영할 수 있는 한국을 설계하는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더 이상 세계 질서를 지켜보는 국가가 아니라 미래의 규칙을 만드는 국가가 돼야 한다"며 "설계의 대상이 아니라 설계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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