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0만 보호법인가, 골목상권 청구서인가]①
플랫폼·프리랜서 시대…기존 노동법 한계에 새 기준 마련 나서
사용자 책임·비용 분담 놓고 충돌…국회 계류 속 소상공인 반발 변수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 출퇴근 기록도 없고 사장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일은 한다. 배달 라이더와 대리운전 기사, 프리랜서 개발자, 학원강사, 방문판매원, 보험설계사까지. 우리 사회에는 이미 수백만 명이 전통적인 근로계약 밖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제도 밖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근로자 추정제'와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을 패키지로 추진하고 있다. 근로자 추정제는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근로자로 추정하고 사용자에게 반증 책임을 지우는 제도이며, 일하는 사람 권리 기본법은 근로기준법 밖 노동자에게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제도의 방향보다 준비 수준이다. 노동 사각지대를 줄이자는 취지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정작 ▲누가 사용자인지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지 ▲근로자와 사업자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다.
자칫 제도 밖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입법이 골목상권의 소상공인을 새로운 '잠재적 사용자'로 만들고 비용과 분쟁의 책임을 떠안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노동자 보호와 영세 사업자의 생존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면서 관련 법안은 국회 소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근로자도, 자영업자도 아닌…흐려진 노동의 경계
기존 노동법이 새로운 노동 형태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이 근로자 추정제 추진의 배경이다.
현행 제도에서는 ▲퇴직금 ▲연차휴가 ▲주휴수당 ▲최저임금 ▲산업재해 보상 등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근로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플랫폼 노동이나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경우 계약서는 개인사업자지만 실제 업무 방식은 일반 근로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례가 적지 않다.
배달 라이더와 대리운전 기사, 학원강사, 방문판매원, 보험설계사 등 이른바 '3.3% 프리랜서' 상당수도 특정 사업자나 플랫폼을 통해 일하지만 법적으로는 개인사업자다. 업무 방식은 근로자에 가깝지만 계약 형태는 개인사업자인 경우가 적지 않아 근로자와 자영업자의 경계는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
문제는 분쟁이 발생했을 때다. 노동자가 퇴직금과 연차휴가, 주휴수당, 산업재해 보상 등을 요구하려면 먼저 근로자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노동위원회와 법원을 오가며 장기간 다툼을 이어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근로자 추정제는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우선 근로자로 추정하고 사용자가 이를 뒤집도록 책임 구조를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노동계는 디지털 플랫폼 중심으로 노동시장이 재편된 만큼 기존 근로자 개념만으로는 보호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플랫폼 노동이 확산하면서 근로자와 개인사업자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사례도 빠르게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존 노동법만으로는 새로운 노동시장을 설명하기 어려운 만큼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보호는 누구에게, 책임은 누구에게
논란의 핵심은 '누가 사용자냐'는 문제다.
▲배달 라이더 ▲대리운전 기사 ▲학원강사 ▲방문판매원 ▲보험설계사 등 상당수는 특정 플랫폼이나 사업자를 통해 일하지만 계약상으로는 개인사업자다. 근로자 추정제가 도입되면 이들의 법적 지위는 지금보다 쉽게 근로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사용자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느냐는 과제가 남는다.
플랫폼 노동에서는 플랫폼 기업과 배달대행사, 입점업체 가운데 누가 사용자인지 명확하지 않다. 프랜차이즈 역시 본부와 가맹점주 간 책임 경계가 불분명하다. 반대로 영세 점주들은 본사의 운영 기준을 따를 뿐인데 ▲퇴직금 ▲연차휴가 ▲주휴수당 ▲최저임금 ▲4대 보험 등 사용자 책임까지 떠안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소상공인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비용 문제다. 근로자로 인정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퇴직금과 연차수당, 4대 보험 등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근로자성 여부를 둘러싼 법적 분쟁도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영세 사업장일수록 노무·법무 대응 여력이 부족해 부담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소상공인들은 정부가 보호하려는 대상은 플랫폼 노동자지만 실제 비용과 법적 책임은 현장의 영세 사업자가 떠안을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이 때문에 근로자 추정제가 현장에서는 '소상공인 비용 법안'으로 읽히고 있다는 것이다.
소상공인연합회는 지난 6월 국회 앞 결의대회에서 일하는 사람 권리 기본법과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에 반대했다. 소상공인 측은 특수고용직과 프리랜서에게 근로기준법이 적용될 경우 1인당 연간 약 505만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적용 대상이 870만명 규모로 확대되면 부담이 44조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관련 법안은 국회 소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사용자 범위와 적용 대상, 비용 부담 등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면서 논의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소상공인연합회의 반발이 법안 심사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입법 완성도를 둘러싼 법리 논란도 남아 있다. 일부 학계와 법조계에서는 근로자 추정제가 현행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판단 체계와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계약 종료 이후 근로자성을 주장하는 퇴직금 분쟁이나 집단소송이 늘어날 가능성도 우려한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최근 열린 ‘국민의힘-경총 정책 간담회’에서 “일하는 사람 기본법과 근로자 추정제는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의 고용 부담을 높여 오히려 일자리 감소를 초래할 수 있다”며 “노동법적 규제가 아닌 공정거래법과 같은 경제법적 해결 방안 마련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쟁점은 이른바 '선택적 근로자성' 논란이다. 평소에는 개인사업자로 활동하다가 퇴직금이나 산재 보상, 최저임금 등 특정 권리가 필요할 때만 근로자성을 주장하는 구조가 가능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결국 이번 논쟁은 근로자 추정제 도입 여부를 넘어 플랫폼 노동 시대에 맞는 노동법 체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근로자와 개인사업자라는 기존 이분법만으로는 새로운 노동시장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직종과 계약 형태에 따라 필요한 권리를 단계적으로 보장하는 '제3의 법적 지위' 또는 '선택적 보호 체계'를 검토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플랫폼 노동자 사이에서도 근로자 추정제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누군가는 개인 사업자 지위를 유지하는게 더 유리할 수 있다"며 "소상공인 입장에서는 이번 법안이 통과되면 비용적인 부담이 크게 증가할 수 밖에 없다. 성급하게 법안을 통과시키기보다는 통과됐을 때, 발생할 부작용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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