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회의실 자리만 바꿔왔다…이사회 개혁이 놓친 것들 [대신경제연구소 ESG인사이트]
- 사외이사 늘려도 95% 이상 원안 가결
개혁의 초점은 ‘누가’ 아닌 ‘어떻게’
[윤태준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 팀장]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내놓은 대규모기업집단 지배구조 분석은 한 가지 불편한 숫자를 담고 있었다.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의 99% 이상이 원안 그대로 통과됐고,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의 비율은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낮은 0.38%였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그 뒤에 있다. 사외이사 비율이 높을수록 원안 가결률이 조금은 낮아지는 경향이 확인됐지만, 사외이사가 이사회의 4분의 3을 넘는 회사조차 원안 가결률이 95%를 웃돌았다. 독립적인 이사를 아무리 많이 앉혀도, 회의실에서 반대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숫자를 이사들의 나태나 무능으로 읽는 것은 손쉽지만 정확하지 않다. 이사회가 경영진을 제대로 견제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사가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쥐고 있어야 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회의에서 입을 열 수 있어야 하며, 그 발언이 흩어지지 않고 살아 있는 토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정보가 있는가, 발언할 수 있는가, 그리고 토론이 되는가. 셋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이사회는 아무리 독립적인 인물로 채워도 침묵하는 방이 된다. 앞의 99%라는 숫자는 바로 그 침묵의 크기다.
문제는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가 이사회 제도 개선에 쏟은 에너지가 이 조건들 중 어느 것도 겨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외이사의 비율과 이사의 독립성 요건, 감사위원을 뽑는 방식. 논의는 온통 ‘누가 회의실에 앉는가’에 집중됐다. 지배구조라는 집의 하드웨어, 곧 이사회의 구성은 부지런히 손봤다. 하지만 그 집을 실제로 돌아가게 하는 소프트웨어, 곧 회의의 진행 방식과 이사에게 정보가 흘러드는 통로는 논의의 바깥에 남겨졌다. 좌석은 다 채웠는데 그 자리에서 오가야 할 말은 오가지 않는 것이다.
이사들은 왜 회의실에서 입을 닫는가
최근 나온 연구들은 바로 이 방 안의 풍경을 파고든다. 네덜란드 학자 마릴리케 엥버스가 2026년 발표한 논문 ‘Behind Closed Doors’는 실제 이사회 회의를 녹음하고, 참석 이사 전원을 따로 인터뷰해 회의실의 실상을 추적했다. 겉보기에 아무 갈등 없이 매끄럽게 끝난 회의를 두고, 이사들은 저마다 “사실 그때 이런 점이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문제의식은 있었으나, 아무도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엥버스는 이 침묵이 소심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고 말한다. 침묵은 ‘지금 말할 자리가 아니다’ ‘문제를 제기하면 관계가 상한다’ ‘말해도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등의 계산에 따라 작동하는 학습된 관행이었다.
더 뼈아픈 지적은 그 다음이다. 회의를 효율적으로 만들겠다며 짜 놓은 절차, 곧 촘촘한 안건과 빠듯한 시간과 위원회 분업이야말로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없는지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효율을 위한 장치가 도리어 침묵을 조장하는 셈이다.
이사회 현장을 직접 촬영해 관찰한 연구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이탈리아와 호주 연구진이 조건이 비슷한 두 공기업의 이사회를 비교했더니, 짧고 잦은 회의를 시간에 쫓겨 진행한 쪽에서는 안건마다 이사의 34%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반면 여유 있는 회의에서 의장이 발언권을 고루 돌린 쪽에서는 침묵한 이사가 15%에 그쳤다. 두 이사회를 가른 것은 이사 개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회의 시간과 의장의 진행 방식, 곧 회의의 설계였다.
좌석을 채우는 개혁에서 회의를 바꾸는 개혁으로
여기서 한국 기업을 위한 첫 번째 과제가 나온다. 이사들이 입을 열고 그 발언이 토론으로 이어지도록, 회의를 이끄는 사람의 역할을 다시 세워야 한다. 대표이사와 의장을 분리하는 일은 중요한 출발점이지만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의장이 발언권을 고루 나누고, 이견이 오가는 데 주저함이 없도록 회의를 운영하는 진행자가 되는 일이다. 개별 이사의 독립성이나 전문성만이 아니라, 반대 의견이 안전하게 오가는 회의 문화를 갖추었는지를 이사회 평가의 핵심 지표로 삼아야 한다.
두 번째 과제는 남은 조건, 곧 ‘정보가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발언권을 아무리 고르게 나눠줘도, 이사가 사안을 파악하지 못하면 던질 질문 자체가 없다. 미국 학자 스티븐 보이비 등은 2016년 연구에서 상시 감시가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여러 회사를 겸임하며 1년에 몇 차례 모이는 사외이사가 거대하고 복잡한 기업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해 경영진을 실시간으로 감독하기란 애초에 무리라는 것이다.
우리 현실도 다르지 않다. 상장사가 내는 기업지배구조보고서에는 사외이사에게 정보와 자원을 충분히 제공하는지, 이를 전담할 인력을 두었는지를 적도록 되어 있지만 그 서술의 상당수는 형식에 그친다. 이사에게 감시 의무를 무겁게 얹으면서 정작 그 의무를 수행할 정보와 시간을 주었는지는 묻지 않은 것이다. 방향은 분명하다. 안건 자료가 회의 직전에 던져지듯 배포되어서는 이사가 사안을 파고들 여지가 없다. 이사들이 내용을 검토하고 미리 질문을 벼릴 수 있도록, 자료는 시간적 여유를 두고 사전에 전달돼야 한다.
결국 엥버스가 던진 물음으로 돌아온다. 이사들은 하나같이 “우리 이사회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논의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회의실을 지배하는 것은 그 말이 아니라 침묵이다. 우리가 표방하는 이사회와 실제로 작동하는 이사회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지난 수년의 개혁은 회의실의 자리를 새로 채웠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자리에 앉은 이사가 판단할 정보를 손에 쥐고 입을 열 수 있으며, 그 발언이 살아 있는 토론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이다. 누구를 앉힐지를 넘어, '그들이 어떻게 일하게 할지'를 물어야 한다. 개혁의 시선은 이제 회의실 문 안으로, 이사회의 회의 진행표와 자료 봉투 위로 옮겨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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