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보험사 일감 아니면 생존 어렵다…독립손해사정사의 딜레마
- [설 자리 좁아지는 손해사정법인]②
소비자 직접 선임은 0.001%…보험사 선택에 좌우되는 손해사정시장
민원 부담 크고 보수도 낮은 '손해사정권' 기피 현상도
[이코노미스트 김정훈 기자] 보험사가 비용을 부담하고 소비자가 직접 손해사정사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시행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이용 실적은 사실상 ‘없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24년 소비자가 직접 독립손해사정사를 선임한 지표는 전체 손해사정 업무의 0.001%에 불과했다. 업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이 수치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제도가 정착하지 못하면서 보험사와 독립적으로 영업하는 손해사정법인들은 여전히 보험사가 배분하는 일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한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 역시 독립손해사정법인의 생존 기반을 넓히지 못한 채 멈춰 있는 상황이다.
보험사 선택 업무 94.3%...소비자 선택은 0.001%
손해사정은 보험금 지급 여부와 지급액을 판단하기 위해 사고 원인과 손해 규모를 조사하는 절차다. 보험금 청구가 접수되면 보험사는 해당 업무를 직접 처리하거나 자회사 손해사정법인, 비자회사 손해사정법인 등에 위탁한다.
현재 손해사정시장은 사실상 보험사가 업무 주체를 선택하는 구조다. 2024년 소비자가 직접 독립손해사정사를 선임한 사례는 1174건으로 전체 손해사정 업무의 0.001%에 불과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2024년 전체 손해사정 업무 1억75만2000건 가운데 보험사가 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 위탁한 업무는 1838만4000건으로 18.2%를 차지했다. 비자회사 손해사정법인에 맡긴 업무는 7666만건으로 76.1%, 보험사가 직접 고용한 손해사정사가 처리한 업무는 570만6000건으로 5.7%였다.
자회사 위탁 비중 자체보다 주목할 부분은 전체 업무의 94.3%를 보험사가 선정한 손해사정법인이 처리한다는 점이다. 보험사가 직접 고용한 손해사정사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모든 손해사정 업무의 수행 주체를 보험사가 결정하는 셈이다.
독립손해사정법인 역시 예외는 아니다. 명칭은 ‘독립’이지만 실제로는 보험사가 발주하는 위탁 물량이 주요 수입원이다. 보험사와 거래 관계를 확보하지 못하면 안정적인 일감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다. 업계에서는 지난해와 올해에도 이 같은 시장 구조에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은 소비자 선택권을 확대하고 손해사정시장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보험계약자가 직접 손해사정사를 선임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소비자가 원하는 독립손해사정사를 선임하고 비용은 보험사가 부담하도록 했다.
보험사와 이해관계가 없는 손해사정사가 보험금 산정 과정에 참여하면 소비자 신뢰를 높이고, 독립손해사정법인에도 새로운 시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됐다. 다만 제도 도입 이후에도 이용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시장 구조는 사실상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말 교통사고 자동차 보험금을 청구했던 A씨는 “보험사가 비용을 부담하면서 내가 손해사정사를 직접 고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험금 지급이 끝난 뒤에야 알았다”며 “이런 권리가 있다는 점을 제대로 안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화가 났다”고 말했다.
독립손해사정법인 설 자리 더 좁아져
업계에서는 독립손해사정사 제도가 정착하지 못한 이유로 제도 자체의 구조적 모순을 꼽는다.
우선 보험사가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인 만큼 보험사가 소비자에게 독립손해사정사 선임권을 적극적으로 알릴 유인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 보험사들은 보험금 청구 문자나 안내문 등을 통해 관련 내용을 고지하고 있지만, 필요 서류와 청구 절차 등 여러 정보 사이에 함께 담기는 경우가 많아 소비자가 이를 인지하기 쉽지 않다.
한 독립손해사정사는 “소비자 대부분은 손해사정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며 “문자 한쪽에 직접 선임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넣는 것만으로는 실질적인 안내가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독립손해사정사도 보험사 비용으로 진행되는 사건을 적극적으로 맡을 유인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험사가 지급하는 보수는 소비자가 직접 의뢰할 때보다 낮은 경우가 많지만 보험사와 소비자의 의견이 충돌하는 사건이 많아 민원과 분쟁 부담은 오히려 크다는 것이다.
한 손해사정법인 대표는 “보험사 비용으로 맡는 사건은 보수는 낮은데 조사와 설명에 들어가는 시간은 적지 않다”며 “보험금 결과에 불만이 생기면 소비자의 민원이 손해사정사에게 집중될 수 있어 수익성과 위험을 따졌을 때 적극적으로 맡기 어렵다”고 말했다.
독립손해사정사 제도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곳은 보험사 위탁물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손해사정법인들이다.
대형 보험사와 지속적인 거래 관계가 있는 손해사정법인은 일정한 업무량을 확보할 수 있지만, 보험사의 선택을 받지 못한 법인은 소비자 직접 의뢰나 소규모 사건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소비자가 직접 손해사정사를 선임하는 시장이 전체의 0.001%에 불과한 상황에서는 안정적인 사업 기반을 만들기 어렵다.
손해사정업계에서는 이 같은 구조가 계속되면 독립손해사정법인의 수가 줄고 시장이 보험사와 거래하는 일부 법인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독립손해사정법인의 생존 기반이 약해지면 소비자가 보험사 밖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전문가의 폭도 함께 좁아질 수밖에 없다.
손해사정업계 관계자는 “독립손해사정법인이 살아남아야 소비자도 보험사가 선정한 손해사정사 외에 다른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며 “현재처럼 소비자 직접 선임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보험사에 선택받지 못한 손해사정법인의 설 자리가 계속 좁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단순히 선임권이 있다는 사실을 안내하는 데서 끝날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이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도록 고지 방식을 바꾸고, 독립손해사정사가 적정한 보수를 받을 수 있는 구조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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