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27세에 글로벌 톱이 됐는데, 멈춰섰다" 배상민 KIAST 교수가 가난한 90%’로 향한 이유
- 뉴욕서 세계적 기업 제품 디자인, 27세에 파슨스 최연소 교수
“새 제품 나오면 버려지는 디자인,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전기·연료 없이 식수 만드는 ‘솔라스틸 박스’ 개발, 수상까지
기부 넘어 현지 생산·판매까지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야”
[이코노미스트 서지영 기자]“저에게 주어진 환경을 나만을 위해 쓰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생각해요.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제 삶의 자리에서 조금 더 이타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소명입니다.”
배상민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에게 디자인은 더 이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한때 그는 뉴욕에서 세계적인 기업들의 제품과 브랜드를 디자인하며 ‘성공한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다. 27세에 동양인 최초로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 교수가 됐고, 이후 KAIST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2021년에는 롯데그룹 디자인경영센터장(사장)까지 맡았다. 하지만 성공의 정점에서 그가 붙잡은 질문은 의외로 단순했다.
‘디자인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지난 2월 대전 연구실에서 만난 배 교수는 자신의 디자인 인생을 돌아보며 한때 “매일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들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몇 달 동안 공들여 만든 제품이 새 제품이 나오면 창고에 들어가고, 결국 버려지는 과정을 반복해서 봤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문제를 찾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일이죠. 그런데 아무리 좋은 제품도 6개월 뒤 새 제품이 나오면 그대로 폐기되는 것들이 많았어요. 패션이나 화장품도 마찬가지죠. 내용은 그대로인데 껍데기만 바꿔 다시 사도록 합니다. 필요하지 않은데도 소비하게 만드는 ‘비주얼 피싱’을 하고 있었던 거죠.”
자신이 하는 일이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 고민하던 그는 디자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더 새롭고 화려한 제품을 만드는 대신 정말 필요한 사람을 위한 디자인을 하기로 했다.
세계 90%를 위한 디자인
배 교수는 현재 디자인 산업이 사회의 상위 10%를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본다. 더 좋은 스마트폰과 자동차, 가전처럼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는 제품에는 막대한 기술과 자본이 투입된다. 반면 하루에 몇 달러도 쓰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제품에 대한 투자와 개발은 외면받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디자인의 대상은 상위 10%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를 보면 하루에 10달러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이제 그 90%를 위한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KAIST에서 사회공헌 디자인을 연구해온 이유다. KAIST 산업디자인학과는 공학과 디자인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배 교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기술을 새로운 소비 욕망을 만드는 데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나눠주는 방식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배 교수는 아프리카 현장에서 고장 난 우물과 방치된 구호물품을 반복해서 봤다. 외부에서 돈을 들여 우물을 만들어도 펌프가 고장 나면 현지에서는 고칠 도구도, 재료도 없었다.
“200만원을 모아서 우물을 만들어줬다고 합시다. 처음에는 깨끗한 물이 쏟아져 좋아하죠. 그런데 펌프가 고장 나면 끝이에요. 디젤 엔진을 구할 수도 없고 고칠 사람도 없습니다. 우물은 방치되고 못 쓰게 되죠. 선의가 나쁜 게 아니라 다음 단계를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배 교수는 적정기술에 주목했다. 최신 부품과 고가의 기술을 넣는 대신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고장이 나도 주민들이 직접 고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방식이다.
개발도상국을 위한 의료용 산소 발생기 ‘옥시나이저’는 배 교수가 적정기술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옥시나이저 개발은 코로나19 당시 전기와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서 산소 공급이 어렵다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연구팀은 전기가 없어도 사용할 수 있도록 자전거 공기펌프를 활용하는 구조를 고안했다.
“비싼 기술을 넣으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계가 고장 나면 아무도 고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희는 일부러 어렵게 만듭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그곳 사람들이 고칠 수 있도록요.”
최근 세계를 놀라게 한 ‘솔라스틸 박스’ 역시 같은 철학에서 나왔다. 식수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서 태양열을 이용해 오염된 물을 증류하고 깨끗한 물을 얻는 장치다. 전기나 연료에 의존하지 않고 현지에서 쉽게 조립하고 수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성능을 높이는 것보다 실제 사용 환경을 먼저 고려한 셈이다.
“현장에 가서 먹고 자면서 봐야 압니다. 잘사는 나라에서 쓰는 센서와 모터를 가져가면 처음에는 멋있죠. 그런데 고장 나면 끝입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것, 버려진 것까지 활용해서 스스로 만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지난 7월 솔라스틸 박스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사회적 임팩트’ 부문 최고상인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를 받았다.
기부가 아니라 자립을 디자인한다
배 교수에게 중요한 것은 제품을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영원히 존재하는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그는 솔라스틸 박스를 현지 주민에게 단순히 나눠주는 대신 주민들이 직접 생산하고 판매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제품을 생산해 수익을 얻고, 그 돈이 다시 지역에 축적되도록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립과 독립을 위한 기반을 닦겠다는 의미다.
돌이켜보면 배 교수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된 뒤 다시 매달린 질문은 화려한 미래 기술이 아니었다. 얼마나 비싸고 정교한 제품을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필요한 사람에게 닿았고 그들의 삶을 얼마나 오래 바꿀 수 있는가였다.
“누구든 그냥 주면 좋아합니다. 우물도 파주면 당장은 좋지요. 그런데 지속 가능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직접 만들고 팔 수 있어야 합니다. 교육을 통해 자립하고, 부를 축적해야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배 교수는 과거 진행한 기부 상품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같은 사실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판매 수익 전액을 기부했지만 주문이 늘수록 생산을 이어갈 자금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너무 순수하게 했어요. 판매하면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힘든 거예요. 주문이 들어와도 다시 생산할 돈이 없었습니다.”
이후 기업의 지원과 판매를 연결하고 제품 자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구조를 바꿨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지속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가 말하는 사회공헌 디자인은 단순히 ‘착한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좋은 의도가 지속될 수 있도록 생산·판매·교육까지 함께 설계하는 일이 됐다.
“착한 기업이 경쟁력이 없는 시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으로는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느냐가 기업의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겁니다.”
배 교수는 최근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바로 AI다. 뉴욕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하며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경쟁했던 그는 이제 KAIST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다. 한때는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되지 않을까’라며 낚싯대를 드리워봤지만, AI의 등장으로 다시 공부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고 한다.
“예전에는 내가 쌓아온 지식으로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AI의 등장과 함께 저도 다시 달려야 할 이유가 생겼죠.”
거친 광야를 건너본 사람은 안다. 다시 길을 나서게 하는 힘은 꼭 거창한 계획과 꿈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자신이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나누는 것만으로도 거센 비와 바람을 견뎌낼 이유가 된다는 것을.
“선교사나 목회자만 소명을 갖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일, 자기 가정, 자기 직장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죠. 저는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그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겁니다.”
더 많이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더 필요한 곳에 쓰는 삶. 배 교수에게 배움과 가르침, 끝없는 연구는 그렇게 삶의 소명이 됐다.
공교롭게도 배 교수는 아직 미혼이다. 삶에 주어진 소명을 다하느라, 정작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정을 일구며 자박자박 살아가는 행복’은 찾지 못한 건 아닐까 싶었다. 훤칠한 외모에 남다른 유전자까지 갖췄으니, 기자 입장에서는 당장이라도 좋은 짝을 찾아 중매라도 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사랑이나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저도 이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세상을 향해 달려온 그가, 이제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에도 마음을 내어줄 때가 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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