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연 6%’ 믿고 해외 빌딩 샀는데…3700억 펀드 ‘0원’ 됐다
- [반토막 펀드의 비밀]①
유럽 오피스 펀드 잇단 대규모 원금 손실
레버리지·자산가치 하락에 손실폭 확대
저금리 시절 해외 부동산 공모펀드가 개인투자자에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다. 글로벌 기업이나 정부기관이 장기간 임차한 미국·유럽 핵심지역 오피스에 투자한다는 점도 안정성을 기대하게 했다. 은행 예·적금보다 높은 배당수익을 기대하면서 부동산에 직접 투자하지 않고도 해외 대형 빌딩의 임대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몇 년 뒤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재택근무 확산으로 오피스 수요가 줄어든 데다 가파른 금리 상승까지 겹치면서 해외 상업용 부동산 가격이 급락했다. 자산가격이 떨어지고 대출 이자 부담은 커졌으며 만기가 돌아온 대출을 갈아타는 차환마저 어려워졌다. 한때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기대했던 상품에서 원금의 절반 이상은 물론 사실상 전액을 잃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대규모 손실이 잇따르자 금융당국도 제도 손질에 나섰다. 이제 해외 부동산펀드를 비롯한 고위험 공모펀드를 새로 출시할 때 같은 유형의 상품에서 과거 20%를 초과하는 원금 손실이 발생한 이력이 있다면 투자설명서에 해당 펀드명과 투자지역·자산, 손실 발생 시점과 규모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동종상품 20% 초과 손실 사례 투자설명서에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9월 30일부터 ‘펀드 핵심위험 표준안’을 시행한다. 해외 부동산펀드와 해외 리츠, 주가연계펀드(ELF), 파생결합펀드(DLF) 등 대규모 손실 사례가 발생했거나 상품 구조상 위험이 높은 10개 유형의 신규 공모펀드가 대상이다.
앞으로 운용사가 해당 유형의 상품을 새로 출시할 경우 자사가 운용한 동종상품 가운데 원금손실률이 20%를 초과한 사례가 있다면 이를 투자설명서에 기재해야 한다. 해당 펀드명과 투자지역·자산명은 물론 손실 발생 시점과 손실 규모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기존 투자설명서에도 부동산 가격 하락이나 공실, 금리·환율 변동, 유동성 등 투자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담겼다. 다만 위험요인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어서 투자자가 비슷한 상품에서 실제 어느 정도의 손실이 발생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번 제도 시행으로 추상적인 원금손실 가능성을 넘어 과거 현실화한 손실 규모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해외 부동산 공모펀드에서는 이미 대규모 손실 사례가 현실화했다. 대표적인 상품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피스 빌딩 ‘트리아논’에 투자한 ‘이지스글로벌부동산투자신탁229호’다.
이지스자산운용이 2018년 설정한 이 펀드는 약 3700억원 규모로 조성돼 트리아논 빌딩에 투자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유럽 오피스 시장이 침체한 가운데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고 자산가치까지 하락하면서 상황이 악화했다.
현지 부동산을 보유한 특수목적법인(SPC)이 도산 절차에 들어가면서 손실도 현실화했다. 운용사는 현지 SPC의 순자산가치를 사실상 0원으로 평가했고 펀드 기준가격도 0.01원으로 조정됐다.
기존에 지급된 배당금을 제외하고 투자원금만 놓고 보면 사실상 전액 손실에 해당한다. 단순히 원금 1억원을 투자했다고 가정하면 원금 평가액이 사실상 0원까지 떨어진 셈이다. 다만 개별 투자자의 최종 손실률은 가입 시점과 보유기간, 그동안 지급받은 분배금 등에 따라 차이가 난다.
건물값 30% 내렸는데 투자자는 75% 손실…왜?
해외 부동산펀드에서 기초자산의 가격 하락보다 투자자의 원금 손실이 커질 수 있는 이유는 레버리지 구조에 있다. 해외 부동산펀드는 투자자가 납입한 자금에 현지 금융기관에서 조달한 대출을 더해 건물을 매입하는 경우가 많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 자기자본 대비 수익률을 높일 수 있지만 가격이 떨어지면 반대로 투자자 손실이 확대된다.
예를 들어 1000억원짜리 건물을 투자자 자금 400억원과 대출 600억원으로 매입했다고 가정해보자. 이후 건물가격이 30% 하락해 700억원에 매각되면 대출금 600억원을 우선 상환하고 투자자에게 남는 돈은 100억원이다. 건물 가격은 30% 떨어졌지만 투자자 원금 400억원을 기준으로 하면 손실률은 75%까지 확대된다.
금리 상승은 이런 구조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시장금리가 오르면서 이자비용이 증가한 데다 기존 대출 만기가 돌아왔을 때 과거와 같은 조건으로 자금을 다시 빌리기도 어려워졌다. 추가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산을 매각해 대출금을 상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금감원의 이번 표준안은 이처럼 상품에 내재한 위험이 실제 손실로 이어진 사례를 투자자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앞으로 대상 공모펀드의 간이투자설명서에는 원본손실 위험과 상품별 핵심 위험이 명확하게 제시된다. 여기에 같은 운용사의 동종상품에서 원금의 20%를 초과하는 손실이 발생했다면 과거 손실 사례도 함께 공개한다.
이에 따라 투자자는 새로운 해외 부동산펀드에 가입하기 전에 해당 운용사가 과거 운용한 비슷한 상품에서 어느 정도의 손실이 발생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투자지역과 기초자산뿐 아니라 실제 손실 규모까지 살펴본 뒤 투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셈이다.
운용업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과거 동종상품의 손실 이력이 신규 상품의 투자설명서에 직접 표시되는 만큼 기존 상품의 운용·위험관리 결과가 향후 신규 상품 판매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해외 부동산펀드는 임대수익과 향후 자산 매각가격뿐 아니라 금리와 환율, 공실률, 대출 비중과 만기, 차환 조건 등에 따라 수익률이 달라진다. 특히 대출 비중이 높은 상품은 기초자산 가격이 일정 수준만 하락해도 투자자의 원금 손실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투자설명서에 원금 손실 가능성이 적혀 있어도 투자자가 실제 어느 정도의 손실까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체감하기는 쉽지 않았다”며 “과거 유사 상품의 손실 사례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투자자가 기대수익률뿐 아니라 손실 위험까지 비교해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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