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삼 상인 임상옥의 ‘통 큰 승부수’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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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삼 상인 임상옥의 ‘통 큰 승부수’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⑥]

포삼 판매한 무역상인…청나라 상인간 경쟁 붙여 홍삼 가격 올리고 단기간에 부 축적

 
 
조선의 부자 임상옥은 청나라를 오가며 홍삼을 판매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조선의 부자 임상옥은 청나라를 오가며 홍삼을 판매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의주에 살았던 임상옥이 재물을 잘 늘렸다. 양국의 이익을 움켜쥐고 왕실처럼 부(富)를 누렸으니, 북경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거론한다”  
 
구한말 황현이 쓴 [매천야록]의 한 대목이다. 조선과 청나라 무역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죽은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임상옥(林尙沃, 1779~1855).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임상옥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20여년 전 [상도]라는 소설과 동명의 드라마를 통해서다. 올곧은 성품과 뛰어난 상재(商材)를 지닌 주인공이 시련을 딛고 성장하는 이야기가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한데 여기서 다뤄진 내용에는 허구가 많았다. 상인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려 했던 탓인지, 다른 사람의 일화들까지 임상옥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상옥이란 인물의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는 명실상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거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문일평이 쓴 [조선명인전]의 ‘임상옥’편에 따르면 임상옥은 국경도시 의주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나라와의 국경에 자리한 덕분에 그는 자연스레 국제무역에 관심을 두게 된다.  
 
임상옥의 젊은 시절은 순탄치 못했다. 그가 스물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는데, 그 후 빚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가세가 빈곤하여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상업 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처지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생계를 위해 장사에 나서야 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헐값에 넘기지 않고 불 지르는 승부수 띄워  

그러던 임상옥이 10년 후에는 수백 칸의 대규모 저택을 지을 정도로 부자가 된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포삼(包蔘, 포장한 홍삼)’ 무역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된 홍삼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조선 조정은 1797년 홍삼 무역을 공식 승인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자 하였는데, 임상옥이 다른 만상(灣商, 대청 무역에 종사한 의주 상인) 5명과 함께 홍삼 무역을 관장하게 된다.  
 
이때 임상옥은 독점권을 따내기 위해 호조판서 박종경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순조의 외삼촌이자 국가 경제를 총괄하는 박종경이 모친상을 당하자 백지 어음(문일평의 기록에는 4000냥이라고 되어 있다. 쌀값을 기준으로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3억원 정도다)을 부의금으로 내서 호감을 샀다는 것이다. 뇌물을 통한 정경유착이니 칭찬할 만한 일은 못 되겠지만, 통 큰 승부였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포삼무역을 담당했던 상인 6명 중 오직 임상옥만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청나라 상인들과 벌인 치킨게임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임상옥이 사신단을 따라 북경에 당도했을 때(조선은 개인의 사무역을 금지하고, 사신단을 통한 공무역만 허용했다) 청나라 상인들이 조직적으로 짜고 아무도 임상옥이 가져온 홍삼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사신단이 머무는 기한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기다리면 어쩔 수 없이 헐값으로 넘기리라 생각한 것이다. 체류 기간 안에 홍삼을 팔지 못하면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조선 상인의 처지를 악용한 것이다. 청나라 상인들은 이 방식으로 이미 많은 재미를 본 바 있었다.
 
하지만 임상옥은 그들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았다. 청나라 상인들을 불러 모은 임상옥은 가져온 홍삼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한다. 상인들이 설마 그러겠냐며 코웃음을 치자 임상옥은 포삼 상자를 모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깜짝 놀란 상인들은 앞다퉈 불을 끄고 자신에게 홍삼을 팔라며 사정했다고 한다. 청나라 상인들의 경쟁에 홍삼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임상옥은 10배 가까운 이윤을 남길 수 있었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조선 홍삼이 인기였다. 그러나 수요보다 공급이 한참 부족하여 부르는 게 값이라 할 정도로 귀했다. 조선에서 비싸게 내놓는다 해도 홍삼만 구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홍상 거래가 불발된다면 청나라 상인들에게도 큰 손해였다. 한데 상인들은 배짱을 내민 것이다. 기한 내 무조건 물건을 팔아야만 하는 임상옥이 불리한 처지니, 담합하여 밀어붙인다면 그가 양보할 거라고 생각했다.  
 
임상옥은 그와 같은 예상을 뒤집고 강하게 반격한 것이다. 무릇 치킨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 상대방이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일 필요도 있다. 그럼으로써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다. 충돌할 경우 양쪽 다 피해를 보는 상황이라면,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을 구사하는 사람이 이기고, 두려워서 먼저 회피하는 사람이 지게 된다. 임상옥은 이러한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대청 홍삼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임상옥에게는 운도 따랐다. 1810년 130근이었던 홍삼 수출량이 1823년 1000근, 1832년 8000근이 되는 등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성장기에 홍삼 수출을 주도했고, 청나라 상인들까지 굴복시켰으니 그에게 재물이 쏟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즈음 임상옥의 집에는 은덩이와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밑에서 회계 업무를 보는 서기가 70명이었고, 한 번에 손님 700명을 대접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재산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나라 위해 재산 기부하며 안위 챙겨  

이렇게 돈이 많아지면 그것을 노리는 사람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임상옥을 몰락시키면 그의 막대한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온갖 트집과 모함이 난무했다. 더욱이 임상옥의 뒤를 봐주던 박종경도 실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임상옥은 나라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았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정부군에 군수물자를 지원하고 의병을 모아 직접 맞선 것이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기 위해 1만 냥을 나라에 기부하였고, 몇 년 후에는 수재의연금으로 다시 수천 냥을 내놓았다.  
 
당시 비변사가 올린 계사에 따르면, 평안도에서 재난을 당한 가구의 대부분이 그가 낸 의연금에 의지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임금이었던 순조는 “재물을 가벼이 여겨 구휼을 위해 내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매우 가상하다. 조정에서는 임상옥의 공을 어떻게 기릴 것인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임상옥에게는 곽산군수, 구성부사(구성부사는 절차상의 이유로 취소된다)와 같은 실직이 내려졌는데, 상인이 큰 공을 세우더라도 명예직만 받았던 관례에 비하면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임상옥이 평안도민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그를 통해 민심을 다독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올랐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에도 임상옥은 공공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선의에 의한 행동이었는지, 철저히 계산한 행동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를 지켜준 든든한 보호막이 되었음은 분명하니까. 요컨대 전략적인 투자와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배포, 아낌없는 나눔이 거상 임상옥을 만든 성공비결이라 말할 수 있다. 
 
 
※ 김준태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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