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CONOMIST

4

BTS 흩어지고, 블핑 공백에도…“엔터주 줍줍해라” 이유는 [이코노 株인공]

증권 일반

매주 수요일 아침, 빠르게 변하는 주식 시장에서 주목할 종목을 짚어 드립니다. 한 주 동안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된 주식을 ‘이코노 주(株)인공’으로 선정합니다. 주가가 급등락했던 원인과 배경, 앞으로의 전망까지 집중 해부합니다. 올 들어 찬밥 신세에 그치던 엔터테인먼트 종목에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그간 엔터사들은 그룹 소속 가수와의 재계약 불발, 군입대 이슈 등으로 실적 불확실성에 휩싸였지만 신인그룹 데뷔 등의 호재로 주가 변동성이 회복되는 모양새다. 이에 증권가는 현재 엔터사들의 주가가 ‘바닥 다지기’에 들어갔다고 평가한다.이달 12일 코스피 시장에서 엔터 대장주 #하이브는 전 거래일 보다 0.74%(1500원) 오른 20만4500원에 마감했다. 하이브와 함께 엔터 4사로 불리는 #JYP Ent.(0.70%), #와이지엔터테인먼트(0.11%) 역시 상승 마감했다. 다만 에스엠은 전일보다 0.66%(500원) 내린 7만5300원으로 장을 마쳤다. 앞서 이들 종목의 주가는 올 들어 20~30% 가량 급락한 바 있다. 특히 지난 7일에는 4개사가 동시에 52주 신저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엔터 업종의 조정이 길어진 주요인으로 주 먹거리인 앨범 판매량 감소가 꼽힌다. 지난해 9월 엔터4사 합산 앨범 판매량(하이브 287만, 에스엠 151만, JYP Ent. 11만, 와이지엔터 8만장)은 457만장을 기록했다. 7월 1200만장을 기록했던 것과 비교해 크게 줄어 지속 성장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했다.또 매출 의존도가 컸던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초대형 아티스트의 활동이 쉬어간 영향이 크다. 멤버 전원이 입대한 BTS는 내년 6월에 완전체가 복귀할 예정이다. 블랙핑크의 경우 그룹 활동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기존 엔터사들의 주요 핵심 그룹이었던 이들의 활동 모멘텀이 없어지자, 엔터사들은 대형 신인을 포함해 복수의 아티스트를 쏟아내는 전략을 펼치며 상승 동력을 마련하고 있다. 매출의 80%(대신증권 추정)를 블랙핑크에 의존했던 와이지엔터테인먼트는 4월에 ‘베이비몬스터’가 데뷔 앨범을 발표하고 본격 활동을 예고하고 있다. 데뷔 4년 차를 맞은 보이그룹 ‘트레저’도 2분기에 신규 앨범을 내놓고 일본, 동남아시아 등까지 반경을 넓혀 활발하게 활동할 계획이다. 하이브는 세번째 걸그룹 ‘아일릿’과 미국 현지화 걸그룹 ‘캣츠아이’가 데뷔할 예정이다. 하이브 또한 지난 1월 투어스를 시작으로 아일릿, 캣츠아이를 순차적으로 데뷔시킨다. 세븐틴·앤하이픈·뉴진스 등 기존 아티스트도 2분기부터 본격 활동에 나선다. JYP의 미국 걸그룹 ‘비춰’는 데뷔 싱글을 발매했고, 에스엠의 신인 ‘NCT 위시’도 활동을 시작했다. 또 엔터사들은 음반뿐 아니라 음원, 공연, 굿즈(MD), 팬 플랫폼 등 지식재산(IP)을 기반으로 한 성과 창출에도 집중하고 있다. 이에 증권가에선 엔터사들의 주가 역시 1분기 바닥을 다진 후 점진적인 상승이 기대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재원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그간 엔터주는 저PBR(주가순자산비율)주, 인공지능(AI) 테마에 밀려 소외됐었다”며 “신인그룹 데뷔와 인기그룹 컴백 기대감이라는 신규 모멘텀에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기훈 하나증권 연구원은 “앨범 하락으로 실적 역성장 전망 우려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며 “하이브는 여름 캣츠아이의 넷플릭스 다큐 공개 및 데뷔만 감안해도 작년 대비 올해 OP가 최소 300억원 내외 개선될 것으로 추정되며 여기에 아리아나 그란데 컴백 및 투어 가시화, 그리고 4월 별이되어라2 출시로 추가적인 업사이드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JYP는 4분기 상당한 규모의 일본 투어 매출 분이 올해 1분기로 이연됐고 올해 작년 대비 많은 컴백과 투어 확대, 그리고 3팀의 데뷔가 이어질 것”이라며 “에스엠 역시 작년 상반기 분쟁 여파와 4분기 빅배스로 실적이 부진했는데, 올해 1분기부터 이미 투어 규모가 70만명에 근접하는 등 매니지먼트가 온기 반영되면서 증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환욱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연초 이후 앨범 판매량 역성장을 기록한 엔터사의 주가 흐름이 더욱 뚜렷하게 약세를 보였고, 최근에는 열애설 등 센티멘트를 더욱 약화시키는 이슈로 인해 추가적인 주가 하락이 이어졌다”면서도 “다만 엔터 4사 합산 구작 판매량은 올해 1분기(2월 3주차 누적)들어 지난해 4분기 판매량을 웃돌고 있다”고 말했다.이 연구원은 “또 2분기부터 예정된 본격적인 아티스트 IP(지식재산권)의 컴백 러시는 글로벌 라이트 팬덤 확대로 이어질 전망"이라며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에는 초대형 K-팝 아티스트 IP인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의 활동도 기대해 볼 수 있어 주가 회복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2024.03.13 07:01

4분 소요
5% 하락한 하이브, BTS 군입대 논의 언제까지 [증시이슈]

증권 일반

하이브가 장 초반 5% 이상 빠지고 있다. 장중 11만원선이 무너지면서 52주 신저가를 찍기도 했다. 17일 오전 9시 43분 기준 하이브는 전 거래일보다 5.51%(6000원) 내린 11만2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장중 한때 10만9500원까지 빠지기도 했다. 하이브 주가가 하락한 건 BTS 입대 이슈가 미뤄지면서다. BTS 공백으로 인한 실적 불확실성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투자 심리가 악화된 모양새다. 하나증권은 올해 3분기 하이브 영업이익이 지난해보다 7% 빠진 608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기훈 하나증권 연구원은 “BTS의 입대 이슈가 계속 지연되면서 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며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군 면제 혹은 2024년 하반기∼2025년 상반기 내 완전체 활동이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넷마블이 하이브 주식을 담보로 맡긴 것도 악재다. 17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하이브 2대 주주인 넷마블은 지난 11일 하이브 보유 주식 전량인 753만813주(지분 18.2%)를 하나은행 등 금융회사에 맡기고 10억3500만달러(1조4837억원)를 조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차입금의 만기는 내년 10월 6월까지다. 넷마블이 금융회사에 담보로 맡긴 하이브 지분가치는 지난 11일 기준 8924억원에 달했다. 홍다원 기자 daone@edaily.co.kr

2022.10.17 09:55

1분 소요
[장원석 기자의 ‘앵그리 2030’(17) 돈 무서운 줄 모르는 2030] 결혼할 때 아버지가 좀 도와주겠지…

Check Report

후배와의 술자리에서 자연스레 돈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의 월급은 250만원, 실수령액은 220만원입니다. 원룸 월세로 50만원, 부모님 용돈을 포함한 생활비로 90만원을 씁니다. 남은 80만원은 적금에 넣고 있었습니다. 적금에만 기대는 게 답답하긴 했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가 묻기 전까지,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적금 금리가 얼마인지, 현재까지 모은 돈이 얼마인지 몰랐습니다. 결혼을 안 했으니 주택청약통장 하나 정도는 있겠지 싶어 물었는데 없답니다. 없는 거야 괜찮은데 그에겐 주택청약의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CMA나 ELS(주가연계증권)는 설명조차 못했죠. ‘원룸 월세도 연말에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자 반색합니다. 혹시나 싶어 물었습니다. “전입신고는 했지?” “….” ━ ‘대충 먹고 살자’는 무기력증 확산 극단적인 예가 아닙니다. 요즘 20~30대는 ‘돈’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합니다. 대학생이야 그렇다 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심지어 결혼까지 하고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죠. 일단 어린 시절 결핍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세대적 특성이 있습니다. 못 먹고, 못 입은 기억이 별로 없으니 ‘돈 욕심’이 덜합니다. 자연히 ‘어떻게든 이 가난을 벗어나겠다’며 허리띠를 졸라맸던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의 ‘악착같음’을 지금 20~30대에게선 찾아보기 어렵습니다.시원찮은 벌이와 꽉 막힌 재테크 수단 또한 원인입니다. 취업은 늦고, 첫 월급은 쥐꼬리 수준입니다. 결혼이라도 하려면 그동안 모은 종잣돈을 다 털어야 하고, 아이라도 낳으면 지출이 급증합니다. 2000년까지만 해도 두 자릿수에 달하는 고금리 덕에 은행에만 돈을 넣어도 원금이 쑥쑥 불어났습니다. 이렇게 모아서 차를 사고, 집을 샀죠. 그러나 지금은 이 등식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한두푼 아껴도 둘 데가 없습니다. 은행 예·적금 금리는 바닥을 향해가고, 이미 하늘로 치솟은 부동산은 엄두도 못 냅니다. ‘어떻게 해도 큰 차이 없다’ ‘대충 먹고 살자’는 무기력증이 지금 젊은 세대를 휘감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상황적 고단함이 무관심의 합리적 이유는 아닙니다. 형편이 어렵다고 돈을 안 모으고, 얼마 안 된다고 대충 내버려두면 정말로 평생 목돈을 손에 쥘 수 없습니다. “어려운 것과 길이 없는 것, 안 되는 것과 안 해본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인데 젊은 세대가 아예 돈을 불릴 고민조차 안 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 최근 자산관리 업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메리츠자산운용의 존 리 대표가 사석에서 한 얘기입니다.돈을 모으려면 일단 종잣돈이라는 게 있어야 합니다. 재테크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좀 아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20~30대는 대부분 쓸 계획을 세우는 데 능하지만, 저축 계획은 섬세하지 않습니다. 절약의 진정한 의미는 아끼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지출의 적합성을 따지는 데 있습니다. 해외 여행에 목돈을 쓰고, 먹을거리와 입을거리에 씀씀이를 줄이지 않으면서 은행 잔고가 늘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취업했다고 차부터 사겠다는 20대 남성, ‘나를 위한 선물’이라며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할부로 긁는 20대 여성. ‘자기 만족’이라고 포장하겠다면 할 말 없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돈까지 모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절대 그렇게 될 리 없습니다.종잣돈을 모았다면 불려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은행만 쳐다봅니다. 최근 시중은행 예금 금리가 속속 1% 후반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물가상승률이 1% 정도라 실질금리는 마이너스를 면하고 있지만, 이자소득세 15.4%를 떼고 나면 사실상 남는 게 없습니다. 수십, 수백억원대 자산가가 보관 목적으로 돈을 맡긴다면 모를까,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들겠다면서 은행만 고집하는 건 앞으로도 티끌만 가지고 살겠다는 얘기입니다. 예·적금은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삼고, 다른 ‘무언가’에서 묘수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지요.어쩔 수 없이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같은 금융회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배당을 늘리겠다’고 하면 최소한 배당주펀드라도 사보는 성의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펀드 등 금융상품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고, 거시경제 흐름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도통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재테크 좀 해봐야겠어!’ 결심은 있는데 실천은 없습니다. 넘쳐나는 게 재테크 서적이고, 정보가 천지에 널렸는데 공부하지 않는 거죠. 공부를 왜 해야 할까요? ━ ‘적금 금리 1%대’ 은행만 쳐다봐선 답 없다 금융회사는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홍보하지만, 진짜 A도 모른 채 찾아가면 엄청난 환영을 받을 겁니다. ‘호갱님(호구+고객님)’이니까요. 불행히도 금융회사는 그리 착하지 않습니다. 1990년대 말 ‘바이코리아 펀드’라는 게 있었습니다. 첫해에 무려 77%의 수익률을 기록했죠. 당연히 너도나도 몰렸습니다. 설정액이 무려 12조원에 달한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 이 펀드를 팔던 증권사 회장은 ‘2005년 코스피지수는 6000까지 오를 것’이라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이 펀드, 불과 1년 뒤 IT 버블 붕괴와 함께 원금의 55%를 까먹고, 휴지통으로 들어갔습니다.2007년 인사이트펀드 대란이나, 2013년 브라질 국채 폭락, 지난해 ELS(종목형) 폭락 등도 비슷한 사례입니다. 피해는 온전히 투자자의 몫입니다. 금융회사의 목표는 투자자의 수익률을 높이는 게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늘리는 겁니다. 펀드가 마이너스 수익률을 내도 그들은 수수료와 보수를 받습니다. 원금 손실이 발생했다고 돌려주는 금융회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송에서 졌다고 수임료 되돌려주는 변호사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하나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CEO의 투자 철학은 굉장히 심플합니다. 좋은 회사를 찾아서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그는 매일 일간지와 경제 주간지를 탐독하고, 거기서 여러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합니다. ‘투자의 달인’이라는 버핏도 공부하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수익률 타령을 하는 건 너무 배짱이 같은 소리입니다. A라는 회사가 있다고 치죠. A의 주식을 단돈 1만원어치라도 가지고 있으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A가 속한 업종의 경기는 어떤지, 회사의 실적은 어떻고, 어떤 이슈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보게 마련입니다. 관심은 A에서 B로 확장되고, 그렇게 공부가 누적되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 종목이 눈에 들어옵니다. 채권도 마찬가지죠. 직접 사보지 않으면 그냥 남 얘기일 뿐입니다.산다고 끝이 아닙니다. 펀드를 예를 들어보죠. 적금이야 제때 돈을 입금하고, 만기를 기다리면 끝입니다. 그러나 펀드는 돈만 적립하는 게 아니라 관심도 함께 적립하는 겁니다. 가입 첫 달의 투자자와 30개월째 돈을 불입한 투자자의 지식과 수준이 같아선 안 된다는 뜻이죠. 2~3년 돈을 넣었으면 그 펀드에 관한 한 운용사 직원만큼 자세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니다 싶을 때 갈아 탈 수 있고, 괜찮은 새 펀드를 발굴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금융회사가 내 자산을 늘려 줄 거라 기대한다?’ 이런 걸 ‘욕심’이라고 합니다.금융회사에 대한 젊은 세대의 맹목적 신뢰는 보험과 연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당 보험 가입 건수는 3.6건에 달합니다. 2010년 3.08건이었는데, 불과 4년 만에 0.5건 이상 늘었고, 20~30대에서 가장 많이 늘었습니다. 우리나라 보험사의 최우량 고객은 사회 초년생입니다. 보험과 연금은 꼭 필요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과잉이 문제입니다. 사실 보험·연금은 주식·펀드보다 훨씬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계약기간이 짧아도 10년, 길면 종신입니다. 한번 가입하면 중간에 액수를 줄이기 힘들고, 해지라도 하려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하죠. ━ 보험·연금 과잉 가입에 ‘보험푸어’ 양산 한창 돈을 모아야 할 20~30대에 보험과 연금에 과하게 돈을 쓰면 나중에 큰 돈이 필요할 때 적절한 대응이 어렵습니다. 결혼이나 주택 마련 등 목돈 들 일이 많고, 아이가 자라면 교육비 부담도 커질 겁니다. 가뜩이나 원금의 중요성이 커졌는데 월급의 약 20~30%를 보장성 보험에만 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득 수준에 비해 보험이나 연금에 너무 많이 가입해 생활고를 겪는 ‘보험푸어’도 적지 않습니다. 실손의료보험 하나쯤은 꼭 필요하지만 여러 개 들어봐야 중복 지급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액보험·종신보험 등은 더욱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변액보험은 보험료 중 일부를 금융상품에 투자해 그 수익을 고객에게 돌려주는 개념인데, 연간 수익률이 마이너스인 상품이 수두룩합니다. 종신보험은 보험사가 수수료를 가장 많이 챙기는 상품입니다. 왜 자꾸 추천하는지 이제 감이 오시나요?그릇된 믿음은 저축은행, 대출회사로 번져갑니다. ‘친구가 돼 주겠다’는 말을 덜컥 믿어버립니다. 빚 무서운 줄 모르는 우리나라 20~30대는 돈을 너무 쉽게 빌리고 있습니다. 주로 등록금·기숙사비·생활비를 충당하려 빚을 내지만 본인의 소비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돈을 빌리는 이들도 꽤 많습니다. 없어서 빌리는 게 아니라 더 쓰려고 빌린다는 뜻이죠. 이들 중 상당수는 은행이 아닌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립니다. 40~50대는 약 80%가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만 20대는 61.5%만 은행을 이용합니다. 16.2%는 저축은행에서, 14.6%는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습니다. 다른 연령대와 비교할 때 현저히 높은 수치죠. 고정적인 벌이가 없고, 신용이 낮으니 은행에 가도 신용대출은 힘듭니다. 반면 ‘휴대전화만 있으면 된다’고 광고하는 대부업체는 300만~500만원 정도는 쉽게 빌려줍니다.그러나 쉽게 빌려줄 땐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저축은행은 대학생에게 평균 27.7%, 대부업체는 평균 36.6%의 금리로 돈을 빌려줬습니다. 돈 좀 번다는 사람도 감당하기 힘든 고금리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중소기업에 입사한 김이겸(30)씨는 5년 전인 대학 시절 한 대부업체에서 빌린 500만원을 취업 3년차인 올해 겨우 상환했습니다. 처음엔 월세가 부족해서, 그 다음엔 데이트 비용이 모자라서 조금씩 빌린 돈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대부업체에 갚은 돈은 이자와 원금을 포함해 1200만원이 넘습니다. 기껏 사회생활을 시작해도 종잣돈 마련은커녕, 빚 갚는데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거죠. ━ 손쉽게 빌리는 고금리 대출에 허리 휘청 더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죠. 사실 20~30대가 이렇게 ‘돈에 무지한 삶’을 택한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인지도 모릅니다. 금융정보분석원(FIU) 관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늘어나는 주택담보대출의 상당 부분이 증여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대출을 받아 자식의 결혼비용(주로 주택 마련)을 대거나 증여세를 줄이려 일부러 대출을 받는 일도 흔하다.” 실제로 최근 30대의 주택 구입이 크게 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처럼 자산 증식이 힘든 시기에 그 많은 돈이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요? 오로지 빚일까요?아닙니다. 결혼은 가계에서 부의 이전이 가장 확실하게 이뤄지는 시점입니다. 바로 이 때, 대부분의 20~30대는 약간의 기대를 합니다. ‘결혼할 때 아버지가 좀 도와주겠지’ ‘엄마가 나 주려고 조금 챙겨뒀을 거야’와 같은 거죠. 그러나 이 기대, 과연 정당한 걸까요? 부모 세대가 뼈 빠지게 일해 힘들게 모은 이 돈, 쉽게 받으려고 하는 것이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아무리 곱씹어도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게 ‘부모에게 도움을 받아도 된다’는 걸 정당화시켜 주진 않습니다.20~30대에게 부모가 ‘믿는 구석’이란 근거는 또 있습니다. 26세 이하 국민연금 임의가입자(의무 가입 대상이 아니지만 본인 의사로 가입하는 사람)가 2010년 이후 급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만 3311명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학생이나 군입대자로 소득이 없습니다. 월 20만~30만원가량의 국민연금 보험료를 부모가 대신 낸다는 얘깁니다. 20대 건강보험 피부양자는 2007년 이후 11.7% 증가했습니다. 같은 기간 20대 건강보험 가입자는 4.6% 줄었습니다. 취업은 늦어지고, 소득은 없으니 부모가 보험료까지 대신 내주는 겁니다.여유가 있어서 집도 사주고, 재산도 물려준다면 나쁠 게 없습니다만 지금 부모 세대의 형편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노후 대비’란 키워드가 세상의 화두인 것 자체가 노후 대비가 잘 안 돼 있다는 증거입니다. 겨우 집 한 채에,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운 연금에만 기대는 50대 이상 가구가 수두룩합니다. 이런 분들이 결혼을 기점으로 자식에게 집까지 덜컥 내주고 나면, 노후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년 퇴직을 한 지 5년이 넘었는데 아들 결혼시키겠다고 5000만원 대출을 받은 분도 봤습니다. 대체 그 돈을 어떻게 갚을 건가요? ━ ‘부모 탓, 사회 탓, 나라 탓’ 자기 탓은 왜 안 할까? 냉정하게 말해 지금 20~30대는 자립심이 없습니다. 노력은 안 하면서 돈이 안 모이는 이유를 국가나 사회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진 않은지, 애써 키워준 부모 원망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이 파란만장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내려면 돈을 모르곤 방법이 없습니다. 싫다고 안 할 수도 없고, 내 일 아니라고 모른 체 할 수도 없습니다.다음 세대 걱정도 해야 합니다. 시대의 책무 같은 겁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취업이 잘 되고, 소득이 충분하고, 자산 증식이 가능하고, 노후 대비도 잘 된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요? 변화의 출발점은 정치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 2030은 기성세대가 만든 정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좌우로 나뉘어 물고 뜯는 것까지 꼭 닮았습니다. 다음 번에는 ‘분열을 답습한 2030’을 주제로 지혜를 모아보겠습니다.- 장원석 기자

2015.10.10 11:53

9분 소요
10억 달러짜리 와일드카드

산업 일반

내년 미국 대선 뒤흔들 자금력과 경력 충분한 블룸버그 뉴욕시장의 야망이 실현될까 마이클 블룸버그(65) 뉴욕 시장은 작가 에스더 포브스의 어린이 소설 ‘조니 트레메인’이 간행된 1943년 한 살이었다. 그 소설은 미국의 13개 주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고 벌인 독립전쟁(1775~1783) 직전 보스턴에서 일하던 한 어린 은세공 견습생의 이야기다. 바로 그 책이 블룸버그의 상상적인 삶을 지배하게 된다. 매사추세츠주 메드퍼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블룸버그는 “그 소설을 50번이나 읽었다”고 말했다. 소설의 핵심을 상징하는 장면에서 독립투사 제임스 오티스는 조그만 술집에서 열린 모임에서 연설한다. 그 자리에는 미 2대 대통령인 새뮤얼 애덤스, 그의 사촌으로 나중에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지낸 독립투사 존 애덤스, 그리고 1776년 독립선언문에 최초로 서명한 존 핸코크도 등장한다. 오티스는 그 자리에서 새 독립투사들에게 자신들의 투쟁은 국가적일 뿐 아니라 세계적임을 주지시킨다. 미국은 “전제정치가 더 이상 발을 못 붙이도록” 전쟁에 나서야 한다고 오티스는 역설했다. 독주를 마셔가며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프랑스의 농민, 러시아의 농노는 현재 짐승과도 같은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 덕분에 그들도 서쪽에서 뜨는 새로운 태양처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 해도… 하느님이 모든 인간에게 내린 천부적 권리는… 우리는 우리의 삶, 재산, 안전, 기술 등 우리가 가진 전부를 다해 싸워야 한다… 우리는 단순한 가치를 지키려고 싸우고 죽는다. 오직 인간만이 항거할 수 있기에.” 얼마 후 회의가 끝나고, 조니 트레메인(나중에 폴 리비어에게 올드 노스 교회 탑에서 망을 봐야 할 대상을 알려주는 전령이 된다)은 오티스의 말을 곰곰이 되뇐다. “ ‘오직 인간만이 항거할 수 있기에.’ 그처럼 단순한 거야.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비출 낯설고 새로운 태양은 서쪽에서 뜨지….” 물론 낭만적이고 감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책은 미 독립전쟁의 전설에 둘러싸여 자란 어린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작가가 열정적으로 서술한 태양은 블룸버그의 유년기 내내 비추었다. 블룸버그는 지난주 뉴욕의 시장 공관인 그레이시 맨션에서 뉴스위크와 인터뷰를 시작할 때 그 책을 손에 들고 나타나면서 보란 듯 외쳤다. “(영국군이) 육로로 공격해 오면 등불 한 개를, 해로로 공격해 오면 두 개를 켜라!”(그는 1997년 회고록에서 그 책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했으므로 나도 책을 한 권 갖고 갔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책 표지를 응시하다가 잽싸게 화제를 2007년 가을로 옮겼다. “왜 내가 이 책을 그토록 애지중지 하는지 모르겠단 말야.”사실 그 이유를 알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가 조니 트레메인을 좋아한 이유는 트레메인이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고된 노력과 창의성을 통해 리비어 등 다른 사람들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된 소년 말이다. 소설은 헌신적인 노력이 결국엔 큰 보상을 받는다는 점에서 매우 미국적인 이야기였다. 블룸버그의 인생 전부를 지배한 어린 시절의 드라마는 독립전쟁의 영웅들 이야기를 탐독하면서 형성됐다. 실제든 허구든 간에 다수의 이익을 위해 홀로 대담하게 행동한, 그래서 위대한 사람으로 칭송 받고 기억되는 영웅들 말이다. 블룸버그와 그의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은 실제로 그 영웅들의 무덤을 성조기로 장식했다. 블룸버그는 일찍부터 자신도 위대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대다수 10대 소년은 가능만 하다면 스포츠 분야에서 영웅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야구나 미식축구를 잘하지 못한 블룸버그는 자신의 족적을 남길 다른 분야를 찾아야 했다. 그는 자신이 살던 동네에서 그 영광을 찾아야 했다. 윈스롭 거리와 플레이스테드 거리 모퉁이에선 매년 4월이 되면 리비어가 영국군의 보스턴 진격 사실을 알리려고 힘차게 말을 달리는 모습이 재현됐다. 그 행진에 참가하는 마을 사람들은 메드퍼드 광장으로 행진하기 전에 잠시 고인들에게 조의를 표하러 유명한 장의사에 들르곤 했다고 블룸버그는 말했다. 메드퍼드 광장에선 보이스카우트 한 명이 “큰 무대” 위에서 롱펠로의 시 ‘폴 리비어의 질주’를 낭송하곤 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제 블룸버그가 전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 어린 시절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은 우뚝 세운 연단에서 참석자들을 내려다보며 낭송하도록 선발된 순간”이라고 그는 회고록에 썼다. “‘폴 리비어’가 내 앞에서 힘차게 말을 달리고, 고교 밴드가 전설적인 밴드 지휘자 존 필립의 곡을 연주하고, 신문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터질 때 나는 생중계되는 마이크를 통해 롱펠로의 그 유명한 시를 큰 소리로 낭독했다. ‘들어라, 나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듣게 되리라/1775년 4월 18일 폴 리비어가 감행한 한밤의 질주에 관해/그 유명한 날과 해를 기억하는 사람은/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도…/육로로 공격해 오면 등불 한 개를, 해로로 공격해 오면 두 개를 켜라/그러면 나는 반대쪽 해변에서…/그럼에도 어둠과 빛을 통해/일국의 운명이 그날 밤 달리고 있었다네…’ 그 시를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그가 기억하는 다른 사실들도 주목하자. ‘우뚝 솟은 연단, 운집한 군중, 이곳저곳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진기자, 실제 상황의 마이크’ 등이다. 블룸버그에게 대중을 위한 서비스와 대중적 주목은 교묘하게 연관됐으며 집중 조명을 받으면 힘이 펄펄 난다. 트루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레이건 대통령 등 미국의 위대한 정치인들은 쇼맨십이 리더십의 중요한 부분임을 이해했다. 블룸버그도 미국 정치 무대에서 가장 뛰어난 쇼맨십과 지도력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메드퍼드 광장에서 열린 ‘애국의 날’ 행사 이래 큰 무대에 자주 섰지만 이제 백악관 입성을 향한 진군이라는 가장 큰 무대에 서고 싶은 생각인지도 모른다. 블룸버그의 대선 출마 문제는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다. 올해 초 블룸버그가 공화당적을 버리고 무소속이 되겠다고 발표한 뒤 부시 대통령은 월스트리트의 헬기 착륙장에 내린 뒤 자신의 전용 헬기를 가리키며 블룸버그에게 “저 새가 당신 소유가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무소속 후보로 대선에 뛰어들면 불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블룸버그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못한다고 말할 때 더욱 용기가 생기고 성공적인 경우가 많다. 그는 회고록에서 “완고하다는 말은 나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직함이 더 적절하다”고 썼다. “나처럼 거꾸로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계속 뭔가를 하지 말라고 충고하면 거의 예외 없이 신속하게 위험하고 인기 없는 길을 내달린다.” 그는 인습적인 생각을 거부하며 자신이 존경하는 독립투사들처럼 롱펠로가 어둠과 빛으로 표현한 역경을 헤쳐나가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영웅이 돼 길을 인도함으로써 차이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한다. 지난주 금요일인 11월 2일 아침 블룸버그는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둘러보려고 간밤에 비행기를 타고 시애틀로 날아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연설도 하고,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 회장, 빌 게이츠 부부 등과 식사 일정이 잡혔기 때문이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로비에서 자신에게 언제 용기가 생기는지 재차 강조했다. “거리를 따라 걷고, 지하철을 타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 한두 명이 ‘시장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라는 말을 하면 용기가 생긴다. 그런 말을 듣고도 만족과 흥분과 스릴을 못 느끼는 사람이라면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 블룸버그는 인자하지만 성격이 각기 다른 부모를 뒀다. 블룸버그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합격했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자만하지 말라”며 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1929년 뉴욕대를 졸업한 어머니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어머니 도로시 워커 부시에 필적할 만한 보스턴 출신의 유대계 여성이다. 도로시 워커 부시는 항상 아들에게 스스로를 너무 내세우지 말라고 훈계했다). 반면 한 낙농제품 회사에서 경리과 직원으로 일하다 블룸버그가 하버드에 입학하기 바로 전 해에 사망한 아버지는 크게 기뻐했을 법하다. “매사추세츠주 첼시 출신의 평균적인 근로계층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에게 하버드는 위대한 미국의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매우 드물고 도달하기 힘든 목표였다”고 블룸버그는 말했다. 아버지의 자부심과 어머니의 겸양은 블룸버그의 삶에서 아직 서로 싸우는 듯하다. 그는 상황에 따라 자기중심적이면서도 겸손하고, 허세를 부리면서도 조용하다. 게다가 상냥하면서도 냉소적이고, 민주적이면서도 권위주의적이며, 유연하면서도 의지가 확고부동하다. 2008년 대선을 정확히 1년 앞둔 시점에서 블룸버그는 억만장자 ‘와일드카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제3당 후보로 대통령에 독자 출마할 수단을 지닌 중도론자이기 때문이다. 재산이 130억 달러가 넘으리라 보이는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로스 페로보다 더 많은 자금을 지녔다. 게다가 내년 대선에 출마할 어떤 그럴듯한 무소속 후보도 못 가진 그 무엇을 가졌다. 바로 공적 부문에서 쌓은 탄탄한 이력이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봉사 경력과 거의 무한해 보이는 야망을 지닌 그는 전통적인 양당 후보들에게 큰 위협이다. 그의 수석 정치 보좌관 케빈 시키는 지난 주말 위싱턴 DC에서 시애틀로 향하는 블룸버그의 팰컨9 전용기 안에서 뉴스위크에 “이번은 10억 달러짜리 선거운동”이라고 말했다. 그러곤 “만일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렇다는 말”이라고 고쳤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무엇이 그 일을 가능케 할까? 시키가 보기엔 바로 민주·공화 양당의 지지율이 40% 또는 이를 다소 웃도는 후보를 결국 지명하게 되는 경우다(9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힐러리 클린턴은 49%, 루디 줄리아니는 38%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물론 블룸버그는 자신으로선 시장 잔여 임기가 790여 일이나 남았고,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면서 대선 출마를 부인했다. 만일 최근의 대선에서 그랬듯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70% 이상이 현재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한다면 블룸버그에게도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시키는 “국민이 기본적으로 불행을 느낄 때는 국민이 기본적으로 불쾌하게 느끼는 상대가 있어 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표현대로 “시키의 마스터 플랜”에 따르면 21개 주가 예비선거를 치르는 2월 5일 직후가 아니라 텍사스주 예비선거 하루 뒤인 3월 5일에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다(시키는 공화당 경선이 텍사스주 예비선거 때까지는 윤곽이 잡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궁극적으로 50개 주에서 후보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일이 가능하다고 시키는 말했다. “자원이 있으면 가능한 일이다.” 제3당 후보가 특정 이슈를 밀어붙이거나 현 상황에 항의하는 표시로 출마한 예는 많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선거인단 중 270표를 얻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확신을 갖기 전까진 출마하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블룸버그는 허황된 후보도 아닐 뿐 아니라 선거판의 훼방꾼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출마한다면 목표는 승리라는 얘기다. 동시에 로스 페로 후보가 1992년 대선에서 거둔 19%의 지지는 시키의 표현을 빌리면 “무소속 후보로서 확보 가능한 상한선이 아니라 하한선”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선거인단 득표전은 곧바로 정치적 난타전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블룸버그가 누구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힐까. 그가 중도적 메시지를 만들어내(그는 민주당원이었다가 공화당으로 당적으로 옮긴 뒤 다시 무소속이 된 정치인이다) 주요 미디어를 통해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써 일반 인기투표에서 최다 득표가 가능할까. 그런데도 선거인단 득표 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270표를 못 얻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미국 헌법에 따르면 선거인단이 대통령 선출에 실패하면 결정 권한은 하원으로 넘어간다. 현 하원은 민주당이 다수당이며 그 결정은 2008년 11월 다시 구성되는 의회가 내리게 된다. 이때 민주당이 여전히 하원을 장악한다고 가정하면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자가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 가능성을 미리 차단할 확실한 대안은 캘리포니아, 뉴욕, 텍사스주에서 승리함으로써 선거인단 득표 수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길이다. 시키는 견제와 균형을 따지는 18세기 제도에 따라 의회가 최다 득표를 못 얻은 대통령을 뽑도록 허용하지 말자고 결정하는 방안을 가정한다. “2000년 대선 당시 앨 고어 후보가 일반 유권자의 표는 부시보다 더 많이 얻고도 플로리다주에서 패하면서 선거인단 득표 수에서 밀리는 바람에 부시가 당선됐을 때 과연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많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러면서 “만일 블룸버그가 일반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할 경우 민주당 지배 하의 의회가 2위나 심지어 3위를 차지한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싶을까? 그것은 아무도 못 장담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한 가지 장담이 가능한 부분은 바로 블룸버그의 끈기와 자신감, 그리고 현실적인 태도다(마지막 자질은 정치인들의 가장 보편적인 자질과 거리가 멀다). 블룸버그는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부모는 노먼 록웰(미국의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그림을 즐겨 그렸다)처럼 나를 길렀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1주에 7일 간을 일했다. 나의 학업 성적은 결코 탁월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형편없지도 않았다. 나는 7학년 사회 시간에 배운 내용을 믿는다. 내 마음속 깊이 이 나라에선 모두에게 기회가 있으며… 미국은 누구든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건국됐다. 불가능해 보이던 사람들이 결국 성공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98세의 고령에 아직도 아들 집에서 함께 사는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리라고 의심한 적이 없다. 아들은 항상 자부심과 자신감에 차 있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블룸버그는 어릴 적 동네에서 가장 친한 친구도 자기보다 두 살 더 많았고, 항상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과 어울렸다. “아들은 나이가 더 든 아이들과 함께 사귀는 능력이 있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고 어머니는 돌이켰다.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연설은 그에겐 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글리슨 초등학교 시절 블룸버그는 매년 현충일 기념식에 참가했고, 매년 한 학생에게 연설 기회가 주어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뽑힌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 청중 앞에 나서서 말하는 일은 아들에겐 결코 성가신 일이 아닌 듯했다”고 회상했다. 블룸버그의 학구적 모험은 어머니가 현재 기억하듯 늘 영웅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는 기복이 심한 학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런 면은 그의 지능보단 성격을 더 잘 보여준다. 여동생 마조리 블룸버그 티븐은 “오빠는 지능이 비범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는 고교 시절 그 모든 능력을 다 이용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오빠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만 머리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일을 처리했다. 오빠가 수학 과목 2개를 수강했는데 하나는 A학점을, 하나는 D학점을 받았다. 부모님은 당혹했다. 알고 봤더니 D학점을 받은 과목에선 오빠가 문제지에 정답만 적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론 문제를 다 풀고도 정답을 도출한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오빠가 다른 학생의 답안지를 훔쳐봤다고 여겼다.” 블룸버그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다닐 때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내겐 고집이 센 구석이 있다. 대학원 시절엔 한 가지 문제를 푸는 데 답안을 10쪽이나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예시된 사실 중 하나가 잘못됐으므로 사실상 문제의 요건에 맞지 않는다는 대답을 답안지 반 쪽에 썼다. 그런 답안을 또다시 내자 교수에게 불려갔다. 그러곤 만일 졸업을 하고 싶으면 규칙에 따르고,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혼자 똑똑한 체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다.“ “잘난 체하는 문제를 항상 잘 극복했는가”라고 내가 물었다. “그렇지 않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하는 말을 이따금씩 한다. 사람은 현실적이면서 재미가 있어야 한다. 모두들 유머는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슬픈 일이다.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피 속에는 맹렬한 애국심이 흘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를 생각하는 어머니의 가장 생생한 기억은 저지 시티에서 정전(停戰) 기념일에 내걸 국기를 사려고 난생 가장 먼 곳까지 외출하도록 허락 받은 일이다. 왜냐하면 모두 국기를 가졌으니까”라고 블룸버그는 회상했다. “당시는 미국에서 애국심이 매우 고조될 때였다.” 물론 그랬다. 그러나 블룸버그의 어린 시절은 여전히 유대인 차별 등 보다 노골적인 차별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말로만 하는 미국의 자유와 실제 삶 간에 차이가 있었다. 적어도 어떤 면에선 자신이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자각이 블룸버그에게 경쟁의식을 갈고닦게 했을지 모른다. 그에게 자라면서 반유대주의를 체험한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처음엔 없다고 했다가 나중엔 세 가지 사건을 기억했다. 1947년 어머니는 남편과 어린 두 자녀가 함께 살 집을 물색했다.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린에서 두 가족이 사는 집에 세를 들어 살았으나 새 주인으로부터 더 이상 아파트를 세놓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그처럼 편안한 다른 집을 사자”고 말했다. 자신의 직장이 있는 서머빌에서 가까운 집을 찾자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도를 살펴본 뒤 메드퍼드에 집을 마련했다. 그늘진 언덕 위에 나무가 우거진 거리에 있는 회색 집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쉬운 거래가 아니었다. 집 주인은 이미 그 동네를 개발했고, 블룸버그가 기억하기에 주인은 그 동네에서 유대인에게 집을 판 최초의 가족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아일랜드계 변호사에게 집을 팔았고, 다시 그가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 되팔았다.” 여동생은 그 일을 잘 기억했다. “부모님이 우리 집을 마련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분명 우리가 그 동네에서 환영 받지 못하리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블룸버그는 어린 시절 똑같은 문제 탓에 싸움에 휘말렸다. “한 아이가 내게 무슨 말을 하면서 서로 싸운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라고 그는 말했다. “싸움에서 이겼느냐”고 물었다. 블룸버그는 웃으며 “글쎄, 나는 아직 살아 있고, 그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1940년대 말 블룸버그의 아버지는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대규모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로선 중요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대규모 집회에 관한 책을 구하러 도서관에 갔다. 말 그대로 어떤 복장을 하고, 무슨 말을 하며, 어떻게 호텔에 투숙하는지를 알고 싶어서였다”고 블룸버그는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올 때가 되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귀가하면 함께 저녁을 들기를 고집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마이애미 비치로 가서 호텔에 체크인 하자 호텔 직원이 ‘블룸버그라면 유대인 이름 아닌가요’라고 묻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다고 했더니 직원들은 ‘우리는 유대인은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나서야 아버지를 들여보내 줬다.” 블룸버그에게 더 넓은 세상에서 불안감(앞서 소개한 개발업자나, 그와 싸운 아이나, 그 호텔 직원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성공을 향한 욕구가 강해지게 됐는지 물었다. 순간 머뭇거리던 그는 “열등감 콤플렉스 때문에 남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느냐는 질문 같은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다시 추궁했다. 어쩌면 자신이 남과 다르거나,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생각 때문에 성공하고 싶어 하지 않는가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느낀다고 말하면 기사 쓰기는 좋겠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는 안 그랬을까? “만일 내가 그렇게 느꼈다고 말하면 당신이 기사 쓰기엔 좋겠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한 번도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만일 내가 흑인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장애자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나도 모른다. 그러나 지하철을 타서도 누구와도 다르지 않다고 느끼며 그때도 그런 생각뿐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블룸버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유일하게 돈을 댄 영화는 작가 아서 밀러의 소설 ‘포커스(Focus)’를 토대로 만든 영화뿐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 한 WASP(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도)가 겪은 이야기였다. 그는 안경을 써야 했는데 사람들은 그에게 혹시 유대인이 아닌지 묻기 시작한다. ‘혹시 유대인이 아닙니까’라고 묻곤 했다. 안경 하나가 사람의 인상을 그토록 바꿔 버리다니 놀라운 일이다. 결국 그 남자는 ‘그래요, 나는 유대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서로 얼마나 연관돼 있으며 우리가 똑같은 국민임을 잘 보여준다.” 그 이야기가 블룸버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물론 그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가 살면서 몸소 겪은 체험은 국민을 분열시키는 문제들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종교, 인종, 계급 등의 분열을 그가 극복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모든 수단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여동생은 “오빠의 애국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애국심은 우리가 교육받고, 신봉한 사실들의 일부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에 속한다는 믿음 말이다. 아버지는 이민자의 2세대였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안정감과 신체적 안전에 매우 감사했다.” 봉사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배심원이 돼 달라는 요청을 받은 때가 기억난다. 아버지는 판사에게 자신은 일이 바빠 배심원에서 빼 달라고 말했다.아버지는 저녁을 들며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다. 판사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블룸버그씨, 만일 귀하가 피고라면 배심원석에 누가 앉기를 바랍니까? 빈둥거리는 건달 중 한 명입니까, 아니면 귀하와 비슷한 사람입니까?’ 아버지의 이야기에 담긴 교훈은 모두가 자신의 몫을 다하고 공공이익을 목표로 하는 봉사를 피하지 말아야만 제도가 제대로 굴러간다는 사실이었다. 오빠는 운이 좋게도 이런 가치관과 함께 성장했다.” 블룸버그도 그 점을 잘 알며 고맙게 생각한다. 그는 무조건 실력만 있으면 높이 사는 풍조와 능력보다는 출신을 따지는 차별주의가 충돌하는 시대의 삶을 즐겼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모든 일에 열심인가? “나는 열심히 일하기를 ‘즐긴다’”고 대답했다. “일을 싫어한 적이 없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다…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면 계속 하고 싶다.” 블룸버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존스 홉킨스대에 진학했다(그는 회고록에 자신이 “파이 카파 프사이 클럽에 가입한 첫 유대인”이었다고 썼다). 거기서 공학 학위를 받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들어갔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 시절에도 어머니가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가 20분 떨어진 곳(보스턴 북서쪽 8㎞에 위치한 메드퍼드)에 살아서 다행이었다”고 블룸버그는 말했다. “나 혼자서는 과제물을 타이핑도 못했다.” 그는 1966년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조니 트레메인’과 폴 리비어를 존경하는 블룸버그는 더 큰 출세의 길을 찾기 전에 군입대를 결심했다. 사관후보생으로 합격했지만 신체검사에서 편평족(扁平足)으로 판정 받아 합격이 취소됐다. “군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늘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부끄럽게 생각했다.” 곧 그는 월스트리트의 증권회사인 살로먼 브러더스에 입사했다. 그로써 출세가도에 들어섰다. 현재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의 투자자문가인 짐 블룸은 하버드에서 블룸버그를 알았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함께 일하던 젊은 시절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은 롱아일랜드 햄튼스에 여름 별장을 함께 임차했다(블룸버그가 먼저 제안했고 내야 할 임차료 분담액도 그가 계산했다). 블룸은 “그는 증권 중개인이었고 나는 조사 분석가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전화를 걸어와 ‘이봐 무슨 일이야? 잠깐 기다려봐’라고 하더니 3분 뒤에 다시 전화기를 들고 ‘이제 됐어. 용건이 뭐야?’라고 물었다. 나는 황당해서 ‘이봐, 자네가 내게 전화했잖아!’라고 푸념했다. 그 친구는 한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주식 거래에 열중했다.” 섀런 봄은 블룸버그가 뉴욕으로 온 직후 하버드 경영대학원 동창회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봄은 그보다 한 해 전에 여학생 7명 중 한 명으로 졸업했다). 두 사람은 진지한 생각 없이 데이트를 했다. 블룸버그는 젊은 시절에도 통 큰 행동을 했다. 1969년 봄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날 블룸버그는 12송이 장미를 보내며 동봉한 카드에 이렇게 적었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전부 누리기 바란다.” 봄은 젊은 주식중개인 블룸버그를 무한한 정력의 사나이로 기억한다. 그들은 밤이 되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활기찬 사교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미식가 모임, 서커스 구경, 아이스 스케이트쇼 등. “요즘은 그런 일이 너무도 시시하기 때문에 자신이 옛날에 그런 곳에 다녔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봄은 말했다. 블룸버그는 뉴욕에 반했다. “블룸버그는 뉴욕에 왔을 때 이 도시를 너무 좋아했다. 그는 메드퍼드 출신이고 나는 미주리주 제퍼슨 시티 출신이다. 뉴욕에 가고 싶어 안달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부동산 중개회사 코코란의 임원인 봄은 밤에는 파티에서, 아침에는 매디슨 애브뉴에서, 그리고 유대교 회당 템플 에마누엘에서 블룸버그를 자주 만난다. 템플 에마누엘에서 “블룸버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살짝 왔다가 가 버리지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날까 봐 옆문을 이용하는 법도 없다. 그냥 그곳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 좋아한다. 만약 즐기지 않는데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연기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봄은 블룸버그의 변하지 않은 점은 침착성이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편안함을 느낀다는 얘기다. “그를 보면 아무리 힘든 때에도 낙관적으로 생각한다는 게 행동에서 드러난다… 딸들과 그토록 가깝게 지내고, 첫 아내 수와 가까운 친구로 지내는 모습을 보라. 요즘 많은 사람이 그런 일 때문에 구설에 오르지만 블룸버그의 딸이나 전처는 언론에 오른 적이 거의 없다.” 봄은 블룸버그의 가치관을 이해하려면 어머니가 열쇠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2005년 12월 대중교통 파업 도중에 맨해튼 북단의 자선행사에 가는 블룸버그를 우연히 만났다. 봄은 블룸버그에게 통근자들과 함께 브루클린 다리를 걷는 사진을 신문에서 봤는데 아주 좋았다고 칭찬했다.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어. 근데 모자는 어떻게 했지?”라고 봄이 물었다. 블룸버그는 우거지상을 지으며 “어휴, 너나 엄마나 똑같아”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봄이 화제를 돌렸다. “대선에 출마하지 그래?” 블룸버그는 앞서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어휴, 너나 엄마나 똑같아.” 블룸버그는 두 딸에게 좋은 아버지였다. 영국 출신 수전 브라운과 19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에마(1979년생)와 조지나(1983년생)를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에마는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을 묻자 머뭇거렸다. “거의 늘 같이했기 때문에 말하기 힘들다. 늘 곁에 있었다. 특히 내가 어리고 회사 규모가 작았을 땐 더욱 그랬다. 동생이 태어날 때 나는 만 세 살이 좀 넘었다. 나는 동생이 생긴다는 생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유타주에 갔다. 아버지는 그 정도로 내 마음을 잘 알았다.” 그는 딸들에게 스키를 가르쳤고, 승마 쇼에 데려갔고, 제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 영화를 함께 보며 폭격기 기술의 발달 과정을 설명해 줬다.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하자 함께 엘리베이터 모형을 만들며 가르쳐 주셨다”고 에마가 말했다. “아직도 그 모형이 있다.” 또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자신을 한 주 동안 독립전쟁 캠프에 보냈다고 회상했다. 그곳에서 에마는 삼각형 모자를 쓰고 장난감 소총을 갖고 놀았다. 블룸버그 부부는 1993년 이혼했지만 아주 가깝게 지낸다. 이혼 후 그들은 1년 이상 뉴욕에서 살며 별장도 같이 썼다. “지금도 명절을 함께 보낸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다고 해서 우리가 가족이 아닌 건 아니다”고 에마는 말했다. 수전 브라운은 전 남편의 선거운동도 거들었다. 블룸버그는 뉴욕주 은행감독을 지낸 다이애나 테일러와 7년 동안 만났다. 블룸버그는 1981년 살로먼 브러더스를 그만두고 블룸버그 LP사를 설립했다. 그 회사에서 블룸버그가 만든 문화는 민주적이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유도했다. 한번은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하는 회의가 너무 길어지자 회의가 끝난 뒤 회의실 의자를 치워버렸다. 그 다음주 회의는 더 빨리 진행됐다. 또 사내에서 직함을 사용하지 않게 하고(“직함은 기껏해야 분열만 낳는다. 계급으로 구분해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개인용 사무실을 줄였다(밀실 음모와 책략을 줄이려는 목적이었다). 매력적인 업무 환경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엄격한 점도 있었다. 그는 퇴직 사원들의 송별연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고록에서 그는 “내가 왜 참석해야 하나?”라고 적었다. “그들이 잘못되기를 바라진 않지만 잘되라고 행운을 빌어줄 생각도 없다. 회사 직원들은 서로에게 기대야 한다. 누군가가 그만두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대신 남아 있는 직원들은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블룸버그는 모든 직원이 존경하는 상사는 아니었다. 블룸버그사의 기업 문화 내부에서 여직원 처우를 두고 심각한 문제가 제기됐다. 1998년 여성이 다수인 영업부문의 초기 입사자 중 한 명인 세키코 개리슨은 맨해튼의 연방법원에 블룸버그와 회사를 고소했다. 블룸버그가 여직원들을 모욕하고 성희롱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개리슨이 블룸버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자 블룸버그가 “아기를 떼어버려”라고 말했다는 주장이 충격적이었다. 또 블룸버그는 개리슨이 출산휴가를 받는 16번째 직원이라는 사실에 실망을 표했다는 주장도 있었다(블룸버그 LP의 한 간부는 임신한 여직원 차별은 “터무니없으며… 사실이 아니다. 우리 회사는 다른 회사들보다 훨씬 가족친화적”이라고 반박했다). 2000년 블룸버그는 법정 증언 도중 자기 사무실에서 여러 여성을 가리키며 “같이 자고 싶다”고 말했다는 개리슨의 주장에 관한 질문을 받자 퇴장하려 했다. 개리슨의 변호인 닐 브릭먼은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그 문제는 잘 해결됐다. 만족스러운 합의가 이뤄졌다.” 그는 합의금을 포함한 세부 사항은 ‘비밀’이기 때문에 말해 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블룸버그와 뉴욕 시장 사무실 측은 소송의 세부사항은 논평을 거부했다. “합의를 했고 내용을 발설하지 않기로 했다”고 블룸버그는 말했다.) 음담패설을 즐기는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일부 고위 임원 중에는 여성이 있었다. 블룸버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장기간 지속된 청소년기에서 서서히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그게 사실인지 묻자 블룸버그는 “나이가 든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좀 더 철학적인 모습을 보였다. “나이를 먹으면 아량이 넓어지고 결국은 우리 모두가 같은 땅에 묻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경험이 많아지고 어떤 문제는 더욱 잘 대처하게 된다.” 그의 시장 사무실은 마치 신문사 편집국과 같다. 그는 개인 사무실이 아니라 칸막이 없이 트인 자리에서 직원들과 함께 일한다. 중도우파 노선의 맨해튼 연구소에서 일하는 선임 연구원 줄리아 비툴로-마틴은 “블룸버그는 잠시 거쳐가는 시장으로 집무를 시작했지만 아주 혁명적인 일을 많이 벌였다. 거의 아무도 예상치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흡연 금지에서 트랜스지방 사용 금지, 탄소 배출 제한으로 뉴욕을 가능한 한 친환경 도시로 만들겠다는 공약(11월 2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탄소 세금 신설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에 이르기까지 블룸버그는 인기 몰이를 하는 시장이 됐다. 11월 1일 워싱턴의 비영리 환경단체 컨저베이션 인터내셔널을 위한 만찬 자리에서 뉴욕 타임스의 저명 칼럼니스트 톰 프리드먼은 블룸버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에 관해 많은 사람이 바꾸고 싶어 하는 유일한 부분은 그의 직함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어떤 직함인지 거론하지는 않겠다…” 사실 말할 필요도 없었다. 청중은 바로 알아채고 환호했다. 민주당 출신의 전 뉴욕 시장 에드 카치는 블룸버그가 인종 문제에서 뉴욕을 더욱 관용적인 도시로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블룸버그 시장은 인종 관계를 마찰이 전혀 없도록 만들었다. 그 자신이 그런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의 성품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블룸버그는 시장에 취임한 초기에 흑인 인권운동가 알 샤프턴이 시청을 걸어나가는 모습을 봤다. 카치는 이렇게 설명했다. “블룸버그가 직접 그에게 다가가서 자신을 소개했다. 줄리아니였다면 당장 경찰을 불렀을 게다.” (카치와 줄리아니는 사이가 좋지 않다.) 블룸버그 아래서 뉴욕시청 관리들의 인사이동은 거의 없었다. 그는 단호하면서도 수완 좋은 상사다. 뉴욕시청의 재무 책임자인 마사 스타크는 “예산국장과 내가 서로 고함을 치며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직원 모두는 자신의 일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일이 꼬이면 격분하게 된다. 블룸버그 시장이 그 소식을 듣고 예산국장과 나, 부시장들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블룸버그는 머리가 아주 비상하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그의 모든 말은 ‘여러분들이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스타크는 블룸버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힘의 관계를 잘 알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스타크는 홍일점이었다. “권력과 성별의 역학적 관계를 정확히 읽어냈다”고 스타크는 말했다. “블룸버그는 ‘여보게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 남자들이 똘똘 뭉쳐 스타크에게 반대할 건 아니잖아?’라는 식으로 말했다.” 블룸버그가 누구보다도 예민한 남자는 아니다. 하지만 시장이라는 직을 수행하면서 많이 깨우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경관이 총에 맞거나 소방수가 사망하면 내가 가장 먼저 병원에 달려간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내가 직접 상황을 설명해 주려고 한다. 내가 성직자보다, 그들의 상사보다 나이가 더 많고 경험도 더 많다. 그래서 그게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족들을 따뜻이 얼싸안아 줘야 하며, 어설프게 자기가 당한 일처럼 연기를 하면 안 된다. 그게 그들의 가슴 아픈 일이지 내가 직접 당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누군가를 진실된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그가 진실한 이미지를 신중하게 가꿨다는 의미다. 그러나 블룸버그의 경우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성이 드러난다. 2001년 시장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시작한 첫날 그는 스태튼 아일랜드의 사우스 비치에 갔다. 한 노파가 그에게 다가와 “낙태를 반대한다니 아주 마음에 들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유세 첫날 바로 그곳에서 정치적 난관에 봉착했다. 그냥 둘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진실을 말해야 하나? 결국 나는 진실을 말했다. ‘할머니, 죄송합니다만 저는 낙태 찬성론자입니다’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결국 그 할머니가 투표소에서 나를 찍었다고 장담한다.” 블룸버그와 측근들은 정직성과 중도노선으로 다른 대선 주자들과 차별화된다는 데 기대를 건다. (그는 대선 야망을 제외하고 거의 전부를 밝혔다. 그러나 대권 야망은 현재로서는 익살로써 감춘다.) 블룸버그는 지난주 연설에서 할로윈 데이에 사탕을 달라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동료 시민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고 농담을 던졌다. 그는 그들이 자신에게 더 높은 직책에 출마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그때 나는 코미디언 스티븐 콜버트 가면을 쓰고 있었거든요”라고 익살을 부렸다. 뉴욕의 정계와 사교계에선 몇 달 동안 블룸버그와 전 뉴욕시장 줄리아니 후보 사이의 긴장 때문에 블룸버그가 대선에 출마할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공식적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 줄리아니 측은 줄리아니가 시장 시절 추진한 뉴욕시의 성공한 정책, 특히 공공지출과 범죄 정책에서 블룸버그가 너무 많은 공로를 가로챘다고 본다. 또 그들은 블룸버그가 10억 달러의 재산을 활용해 백악관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하원의원과 뉴욕시 간부를 지냈으며 한때 저명한 민주당 파워 브로커였지만 지금은 공화당원인 허먼 바딜로는 “블룸버그가 대선 출마를 계속 저울질한다는 사실을 줄리아니가 달가워할 리 없다”고 말했다. “나는 줄리아니를 잘 안다. 그는 블룸버그가 자신의 지지 없이는 시장에 당선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기자들이 보기에는 줄리아니 진영은 그런 문제를 초월한 듯하다. 줄리아니의 한 정치 보좌관(선거운동본부 내부의 일이라며 익명을 요구했다)은 “줄리아니나 그의 측근이 블룸버그를 비난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뉴욕시의 행정 문제를 들고 줄리아니를 찾아오면 줄리아니는 ‘나는 이제 시장이 아니다’라고 말해 준다. 줄리아니는 자신의 후임 시장과 경쟁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범죄율을 낮추는 데 기여한 치안 방식 등 줄리아니 자신이 시작한 정책을 블룸버그가 계승한 점을 높이 산다고 그 인사는 귀띔했다. 만약 대선 주자들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 블룸버그가 출마한다면 그는 아웃사이더로서 선거운동을 할 듯하다. 예측하기가 더 힘든 점은 10억 달러 가까이를 쏟아 붓는 TV와 인터넷 광고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느냐다. 그런 광고와 선거운동의 주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분명해진다. 블룸버그는 각종 연설에서 워싱턴의 문화를 더욱 노골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워싱턴 정가의 모든 사람과 민주·공화 양당은 반드시 다뤄야 할 문제를 외면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워싱턴을 “기능 장애의 늪”이라고 불렀다. 블룸버그는 낙태, 총기 규제,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한다. 그는 지구온난화를 막자는 주장을 열렬히 펼친다. 뉴욕의 재산세를 인상했지만 재정 지출을 억제하고 자유무역을 지지해도 크게 욕을 먹지 않을 듯하다. 증권거래 서비스 시스템인 블룸버그 터미널을 만들어낸 사람보다 시장의 힘을 더 믿는 사람이 있을까? 현재로선 블룸버그는 전형적인 미국의 정치현상에서 나오는 혜택을 누린다. 출마를 아직 선언하지 않았기 때문에 훌륭한 후보자로 비친다는 얘기다. 그는 외교 정책에 관한 논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질문을 받으면 억제할 수 없다. “이라크의 현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미군이 왜 거기에 가 있는지 국가 지도자의 설명을 국민이 이해하지 못한다.” 이란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핵확산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공격이나 폭격을 해야 할 타당한 근거가 없다. 모든 관련 당사자와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미국 대통령이 이란 대통령과 직접 협상을 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막후 대화 채널이 있어야 한다.” 얼마 전 뉴욕시장 공관에서 블룸버그는 대선 관련 질문에는 원래 짜인 각본 그대로 대답했다. “나는 출마하지 않는다. 아직 뉴욕시장 임기가 790여 일 남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자리다. 아니 아마 둘째로 좋은 자리일지 모른다. 시장 직은 실제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자리다.” 블룸버그는 헨리 키신저처럼 자신도 다른 여러 분야를 통달했다는 점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의 방식에 동의하든 않든 간에 키신저는 학계, 정부, 재계에서 성공했다. 나도 사업으로 성공했고, 내가 이 자리를 떠나면 사람들은 내가 시장으로서 일을 잘했다거나 아주 훌륭한 시장이었다고 말하리라 기대한다. 자선사업이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 될지 모른다. 운 좋게 나는 돈이 많다. 다 기부할 생각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출마 여부를 다시 한번 따져 묻자 블룸버그는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같은 시대에 자신과 같은 사람이 할 일이 있다는 점을 간접적이면서도 분명히 언급했다. “현재의 대선 주자들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는 대통령에 선출됐을 때 무엇을 할지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소위 ‘토론’ 과정에서 이라크전을 어떻게 할지, 의료 문제를 어떻게 할지, 외교를 어떻게 할지, 사회보장제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등의 중요한 문제를 두고 각각 30초 내로 말한다. 그게 어떻게 말이 되나?” “대통령은 나라와 의회를 이끌어야 한다. 또 그 두 부분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이 유일하게 남은 초강대국이기 때문에 자유 세계도 이끌어야 한다. 신뢰를 얻어야 하고, 집단 학살과 핵확산을 막고 공정 무역이 이뤄지도록 다른 나라들과 함께 노력해야 한다… 무역, 이민, 테러, 질병 문제는 전부 모든 나라의 협력을 요구한다. 서글픈 점은 현재 세계가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눈뜬 장님이다. 우리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점점 불가능한 데도 말이다. 과거에도 그러지 못했고, 지금도 그럴 수 없으며, 앞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대선 주자들은 세계를 하나로 이끌어 미국이 존경 받게 만들 방법을 내놓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존경을 받을까? 상대를 인정하고 존경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다른 나라 사람들이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미국에서 통하는 게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블룸버그는 뉴욕의 서로 다른 구역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곳에선 애국주의가 공공연하고 보편화돼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학교에서 매일 아침에만 충성을 맹세하는 게 아니라 매 수업이 시작될 때마다 한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곳에서는 국가적 긍지를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는다(“국기 배지를 옷깃에 다는 일이 없다”고 그가 말하며 자신의 배지를 가리켰다). “그런데 내가 가장 자랑스러운 점은 양쪽 지역 모두에서 내가 75%의 표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내 임무는 사람들을 단합시키는 일이다.” 이런 일화는 사실로서 정확하다기보다는 상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많은 점이 드러난다. 블룸버그는 자신의 미덕과 철학, 경험이 국가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잘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일련의 언급을 마무리 지으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애국심과 국기, 전통 보존 같은 주제로 되돌아갔다. 문화와 관습이 확연히 다른 가상적인 두 구역을 연결시켜 주는 게 무엇이었나? 아무런 공통점도, 연결 고리도 없었다. 단 한 가지, 마이클 블룸버그라는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매사추세츠주의 다음 애국 기념일은 2008년 4월 21일 월요일이다. 그 전에 블룸버그는 대선 출마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그가 살아온 삶을 보면 그런 도전을 회피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블룸버그는 늘 그런 문제에 정면으로 부닥쳤다. 조니 트레메인과 폴 리비어처럼 블룸버그도 나라의 운명을 자신의 손에 넣고 싶어 한다. 미국의 운명을 맡기기에 그보다 더 안전한 곳을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With JONATHAN DARMAN, SUZANNE SMALLEY, MARK HOSENBALL, EVE CONANT, ASHLEY HARRIS, ROXANA POPESCU and KAREN BRESLAU

2007.11.13 14:08

26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