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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명 숨진 텍사스 총격 사건…美 총기규제 언제쯤 가능할까 [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국제 이슈

미국 텍사스 주에 있는 인구 1만5000명의 작은 도시 유밸디의 롭 초등학교에서 5월 24일 학생과 교사를 노린 무차별 총격사고가 발생했다. AP통신에 따르면 이 사고로 적어도 어린이 19명과 성인 2명이 숨졌고, 또 다른 3명은 중태에 빠졌다. 18세 고교생인 범인은 진압요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학교에서 총격이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급히 출동할 수 있는 무장경찰이나 군이 인근에 없어 가까운 곳에 있던 국경경비대가 동원돼 범인을 무력화했다. 이날 미국 백악관에는 사건이 보고된 즉시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기가 게양됐다.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순방을 마치고 이날 귀국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 도착 직후 사고를 보고받고 “또 다른 학살”이라고 표현하며 의회에 총기규제법 처리를 촉구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무차별 총격 희생자들의 시신은 윌리드 리온 하사 기념시민회관으로 옮겨졌다. 다수의 시신을 보관할 공간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 4명 이상 숨진 학교 총격사고 건국이래 29건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 사건이 올해 들어 미국에서 발생한 19번째 학교 총격이라는 사실이다. 비영리연구단체인 ‘총기폭력아카이브(GVA)’에 따르면 5월에만 세 번째다. 5월 17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8살 어린이가 모친의 침대 아래에서 총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가방에 넣어 학교까지 가져갔다. 그런데 학교에서 사고로 격발돼 7살짜리 급우가 다쳤다. 이 사건으로 28세의 아이 엄마는 아이들을 위험에 놓이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5월 9일엔 조지아 주 서워니에서 한 여성이 지나가는 스쿨버스에 12발의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아무도 총에 맞진 않았지만, 운전기사가 총탄으로 깨진 유리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유밸디 사건 한 달쯤 전인 4월 22일에는 워싱턴DC에서 한 주민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인근의 에드먼드 버크 학교에 239발의 총탄을 퍼붓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총격으로 자동차에 타고 있던 12살짜리 어린이와 2명의 성인, 그리고 학교 경비원이 부상을 입었다. 총격을 가한 범인은 경찰이 문을 부수고 방에 들어오자 자해를 했는데 이 부상으로 나중에 숨졌다. 4월 5일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이리의 고등학생이 학교에 들어온 신원 미상의 범인으로부터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상처를 입었다. 3월 31일에는 12살의 학생이 다른 학생이 쏜 총에 맞아 학교에서 숨졌다. 미국에서 학교 총격이 얼마나 흔한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는 사실 미국에서 오래된 현상이다. GVA에 따르면 미국에서 4명 이상이 숨진 학교 총격사고는 건국 직전부터 기록에 남은 것만 29건에 이른다. 사망자(총격범 포함) 30명 이상이 1건, 20명 이상이 2건, 10명 이상이 7건이며 4~9명의 희생자를 낸 사고는 19건에 이른다. 역대 최악은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 주 블랙스버그의 버지니아 공대에서 재학생이던 23세의 조승희가 두 자루의 권총으로 벌인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이다. 당시 본인을 포함해 33명의 학생과 교직원이 숨지고 17명이 부상했다. 이 사건은 당시엔 학교를 넘어 미국에서 발생한 모든 총격 사건 중 가장 피해자가 많은 사건으로 기록됐지만 그새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총격 사건이 더 발생해 현재는 세 번째로 희생자가 많은 사건이다. 그 다음이 2007년 12월 14일 코네티컷 주 뉴타운의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격이다. 당시 20세의 애던 랜저가 집에서 모친을 살해한 뒤 모친 소유의 총기 네 자루를 들고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를 찾아가 6~7세의 1학년 학생들과 교사와 교장, 그리고 학교 정신과 상담원 등을 살해했다. 범인은 경찰이 도착하자 총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날 범인을 포함해 28명이 숨졌다. 2명은 부상을 입었다. 셋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 이번 유밸디의 롭 초등학교 총격이다. 이번 사건도 어린이를 무참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범인인 18세의 살바도르 라모스는 교실 한 곳에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어린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7~10세의 어린 학생 19명과 2명의 교사를 포함해 21명이 살해됐고, 범인은 진압을 위해 도착한 국경경비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국경경비대원도 2명이 부상을 당했다. 범인은 자신의 할머니에게도 총격을 가해 중태로 만들었다. CNN을 비롯한 미국 언론들은 유밸디의롭 초등학교 총격사고가 뉴타운의 샌디 훅 초등학교 사건의 충격을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미국 사건은 패닉에 빠졌으며 총기 구매와 총기협회 가입이 줄을 이었다. ━ 10명 이상 숨진 학교 총기 사건 모두 21세기에 발생 놀라운 점은 지금까지 살펴본 미국 최악의 3대 학교 총격사고가 모두 21세기 들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10명 이상 사망자가 나온 10건의 학교 총격사고 중 21세기 들어 발생한 것이 7건이다. 나머지는 1999년 4월 20일 콜로라도 주에서 발생한 컬럼바인 고교 총격 사건, 1966년 8월 1일 벌어졌던 텍사스대 타워 총격 사건, 미국 건국 직전인 1764년 벌어진 이녹 브라운 학교 학살 사건 등이 있다. 1999년 발생한 컬럼바인 고교 총격은 15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학교 학생인 18세의 에릭 해리스와 17세의 딜런 클레볼드가 학교 정원에서 2명의 학생을 사살하고 교사를 중태에 빠트린 뒤 도서관에 들어가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를 살해했다. 21명은 이들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었다. 두 범인은 뒤이어 도착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며, 결국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당시로선 가장 끔찍한 학교 총격으로 기록됐지만 21세기 들어 그 모든 기록이 깨지고 더욱 잔혹한 일이 줄을 이었다. 1966년 텍사스 주 오스틴의 텍사스대 타워 총격 사건은 희생자는 많았지만 다른 사건과 방식이나 성격은 좀 다르다. 해병대에서 제대하고 이 대학 공대에 다니던 25살의 찰스 휘트먼이 범인이었다. 그는 대학의 종탑에 올라가 3명을 살해한 뒤 그곳을 관측대로 삼아 96분 동안 학교 교내를 지나다니던 12명을 사살하고 3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는 앞서 자신의 집에서 모친과 부인을 살해했다. 그는 출동한 경찰에 사살됐다. 1764년 펜실베이니아 주 그린캐슬에서 벌어진 이녹 브라운 학교 학살 사건은 당시 백인들과 전쟁을 벌이던 인근 원주민들이 학교에 들어와 교장 이녹 브라운을 총기로 살해하고 10명의 학생을 근접무기로 살해했다. 총기로 피살된 사람이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총기 사고로 분류하기도 모호한 점이 있긴 하다. 이 세 건을 제외하고 1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학교 총기 사건은 모두 21세기에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총기가 갈수록 흔해지고, 이를 이용한 무차별 총격 사건이 갈수록 잦아지고, 그 피해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미국에서 발생한 학교 총격 사건이 벌써 19건이나 된다. 팬데믹으로 미국 전역이 고통을 받았던 2021년에도 32건이나 된다. 2020년에는 50건이었으며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이전인 2019년에도 43건에 이른다. 이러한 데이터는 학교 총격에만 국한한 것이다. 미국에서 발생해 사망자가 4명 이상인 모든 총격 사건은 2014년 272건이었던 것이 2021년에는 692건으로 늘었다. 총기가 갈수록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셈이다. ━ AR-15 소총 저가 버전은 400달러면 구매 미국에서 이처럼 학교를 비롯한 다양한 장소에서 총격 사건이 흔해진 큰 이유는 총기가 흔하고 접근성이 좋은 데다 성능이 좋다는 점에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텍사스 주 유밸디의 롭 초등학교에서 범인이 사용한 총기가 AR-15 소총이라는 사실이다. 1950년대에 개발된 AR-15 소총은 미군이 제식 소총으로 채택한 M-16이나 총신 길이를 줄인 M-4와 구조와 기능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전쟁터에서 살상용으로 사용하는 군용 돌격소총의 원형인 셈이다. 가볍고 장전과 조준, 발사가 쉬운 데다 위력이 강하다. 이 때문에 미국 민수 시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저가 버전은 400달러 정도의 가격에 구매할 수 있으며, 범인이 사용한 사양이 좋은 종류는 2000달러쯤 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학교 총격을 물론 미국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총기 사고에 자주 등장하는 종류가 됐다. 일부 주에서 민수용은 연발 사격이 되지 않도록 규제했지만, 워낙 광범위하게 보급됐다 보니 이를 피해 개조할 수 있는 부품과 서비스 시장이 활발하게 가동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 문제는 총기 접근성이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18세가 되면 합법적으로 총기와 실탄을 살 수 있다. 총포상에서 신분증만 제시하면 형식적인 범죄이력 조회나 정신병원 입원 여부 조사를 할뿐 별 문제없이 살 수 있다. 돈이 부족하면 매달 100달러씩 갚는 금융지원을 받아 총기를 구매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살상력이 좋은 고성능 총기가 미국에 널려 있다. 전미사격스포츠재단(NSSF)은 2018년까지 미국에서 팔린 소총이 1600만 정을 넘는다고 추산한다. 또 다른 문제는 연방법에 따라 총기등기소가 총기 소지 이력을 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이를 관리해야 할 연방주류·담배·화기·폭발물단속국(ATF)조차 자국 내에 얼마나 많은 총기가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총기 관리가 느슨할까. 그 이유는 막강한 로비력을 가진 전미총기협회(NRA)에서 찾을 수 있다. 민주당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1994년 공격용 무기 판매를 금지했다. 하지만 NRA는 막대한 자금을 사용하면서 로비에 나서 결국 2004년 판매가 가능하도록 되돌렸다. 그 결과 AR-15는 물론 장거리 저격용 소총까지 민간에 나돌고 있다. 더욱 문제는 이렇게 총기가 흔하다 보니 총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구매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총기 구매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상승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롭 초등학교 총기 사고 뒤 대국민 연설에서 “도대체 우리는 언제나 총기 로비에 맞설 수 있을까”라며 개탄했지만 이런 비극과 참사에도 총기 규제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 공화당 꽉 잡은 NRA 로비력 막강 그 중심에 NRA가 있다. NRA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인 1871년 참전용사 2명이 ‘과학적인 소총 사격의 장려와 촉진’을 앞세워 세운 단체로, 151년의 역사에 회원 수 300만명(추산)을 보유한 막강한 특수 이익 로비 조직이다. 이미 1934년부터 국가총기법(NFA)‧총기규제법(GCA) 등 총기와 관련한 입법 정보를 회원들에게 제공하면서 총기 로비의 이력을 쌓았다. 오랜 로비 끝에 1970년대에 GCA가 단체의 뜻에 맞게 통과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다. 1975년이 되자 입법행동연구소를 세워 미국의 총기 규제정책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더욱 주목할 점은 1977년 정치행동위원회(PAC)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정치 로비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는 2020년 한 해에만 2억5000만 달러의 예산을 사용했다. 공식적으론 예산을 주로 교육 등에 사용하고 정치 로비엔 300만 달러 정도를 사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공개된 부분이지 공개되지 않은 곳에서 어떤 거래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바이든 대통령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에서 NRA의 로비력이 막강하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스스로 무장해서 자신을 보호한다는 뿌리 깊은 미국의 총기문화가 결합해 총기 문제를 더욱 늪으로 빠뜨리고 있다. 총기와 관련한 각종 통계를 보면 암울하기만 하다. 국제 무기연구단체인 ‘스몰암스서베이(SAS)’에 따르면 민간 보유 총기는 2017년 기준 미국이 3억9330만여 정으로 압도적인 1위다. 2위인 인도(7110만 정)의 다섯 배에 이른다. 총기가 흔하니 당연히 총격사고도 많다. 세계인구리뷰는 2019년 총기 관련 사망자 1위가 브라질로 4만9436명이고, 그 뒤를 미국이 3만738명으로 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치안 불안을 개탄하는 베네수엘라와 멕시코는 그 다음이다. 미국인이라고 다른 나라보다 더 이성적으로 총기를 다루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다. 2017년 인구 15만면 이상 국가 중 100명당 총기 소지 비율은 미국이 1위(120.5명)이고 2014년부터 격렬한 내전을 겪고 있는 예멘(52.8명)이 2위다. 예멘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시리아‧소말리아‧우크라이나와 함께 한국 국민이 외교부의 특수입국허가를 받지 않으면 입국도 할 수 없는 나라다. 미국은 그런 나라보다 총기 보유 비율이 2배나 높다. 미국은 언제나 이런 총기의 악순환과 이로 인한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5.31 19:00

8분 소요
민주당 텃밭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 패배…위기의 바이든 [채인택 글로벌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조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1년 늦가을을 상큼하게 출발했지만, 그에게 이 계절은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1월 10일 취임한 뒤 처음으로 대규모 다자간 정상회의에 참석해 전 세계 정상들을 줄줄이 만나고 글로벌 사회의 최대 문제인 기후변화 등을 협의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10월 30~31일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개막한 제26회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 함께했다. 글로벌 지도자로서 미국 대통령의 리더십과 장악력을 전 세계에 보여줄 기회였다.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인 그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는 기쁨도 누렸다. 그런 뒤 워싱턴 근방의 앤드루스 공군기지를 거쳐 11월 3일 오전 전용 헬기인 마리1을 타고 백악관에 도착한 바이든 대통령의 표정은 어두웠다. 오랜 비행과 해외 출장에 따른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령에 따른 기력부족도 아니었다. 3일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악몽의 날이었다고 CNN은 지적했다. ━ 美 민주당, 텃밭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서 공화당에 패배 민주당 텃밭인 버지니아주의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에 패배하면서 국정운영에 적신호가 왔기 때문이다. 전날인 11월 2일 치른 선거에서 50.7%를 득표한 공화당의 글렌 영킨 후보가 48.6%를 얻은 민주당의 테리 매콜리프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다. 이번 선거는 바이든이 취임한 뒤 처음 치르는 선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는데 텃밭에서 패배한 것이다. 버지니아주는 민주당의 오랜 정치적 텃밭이었다. 1873년 주자지 선거 이후 1969년 선거까지 100년 가까이 민주당 주지사만 뽑았다. 1969년 당선한 린우드 홀튼이 버지니아주의 20세기 첫 공화당 주지사의 기록을 세웠을 정도다. 공화당은 1970~82년과 1994~2002년, 그리고 2010~2014년에만 버지니아주 주지사를 차지했을 뿐이다. 21세기 들어 지난번까지 치러진 다섯 차례의 주지사 선거에서도 단 한 차례만 공화당에 자리를 넘겨줬을 뿐이다. 대통령 선거도 2018년과 2012년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으며,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했던 2016년에도 힐러리 클린턴을 밀었다. 지난해 대선에서도 민주당의 조 바이든에게 아낌없이 표를 몰아줬다. 바이든은 버지니아에서 54.1%를 득표해 44.0%를 얻은 트럼프에 8%P 이상의 차이로 느긋한 승리를 거뒀다. 민주당과 바이든 대통령이 그런 버지니아주의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다. 민주당의 대선 득표율과 주지사 득표율을 비교하면 5.5%가 떨어진 셈이다. 같은 날 치른 뉴저지주 선거도 민주당엔 마찬가지로 충격적이다. 뉴저지주는 원래 민주-공화가 번갈아가며 주지사를 맡아온 지역으로 21세기에 들어와서도 2001년과 2005년 선거에선 민주당이, 2009년과 2013년 선거에선 공화당이 각각 주지사를 차지했다. 그러다 2017년 민주당의 필 머피가 주지사직을 찾아왔으며 이번에 재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박빙이었다. 현역 주지사인 민주당 필 머피 후보가 공화당의 잭 시아타렐리 후보를 박빙의 승부 끝에 간신히 승리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민주당의 머피 지사는 50.1%를 득표해 49.1%를 확보한 시아타렐리 후보에게 신승을 거뒀다. 뉴저지는 대선에선 확실하게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왔다. 1992년 이후 지난 대선까지 한 차례도 빠짐없이 민주당 후보를 밀어줬다. 지난해 대선에선 뉴저지에서 바이든이 57.3%, 트럼프가 41.4%의 지지를 각각 얻었다. 바이든은 뉴저지에서 15%P가 넘는 큰 표차로 낙승을 거둔 셈이다. 게다가 이번 주지사 선거 여론조사에서도 머피 후보는 10% 안팎의 우세로 손쉬운 승리가 예상됐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민주당은 피를 말리는 박빙의 승부로 가까스로 승리했다. 이에 따라 개표와 승리 선언과 연설도 늦어졌다. 더욱 문제는 이번 버지니아주 주지사 선거 패배와 뉴저지주 박빙 승부가 바이든의 인기 하락과 궤를 함께했다는 점이다. 바이든 지지율은 취임 이래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취임 당시 지지율 55%, 반대 32%였지만 8월 19일엔 지지 46%, 반대 49%로 뒤집어지더니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를 코앞에 둔 10월 28일에는 지지 44%, 반대 51%로 취임 뒤 가장 낮은 지지율과 가장 높은 반대율을 보인 것이다. 바이든은 올해 들어 아프가니스탄 철수 혼란, 대규모 경기부양 예산안 통과에서 보여준 정치력의 부족, 연방정부 셧다운 위기, 멕시코 국경에서 아이티 이민자를 말과 채찍으로 내쫓고 강제 추방한 사건 등으로 반대파는 물론 지지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이를 통해 상원 외교 위원장이라는 관록으로 오바마가 부통령으로 모셨던 ‘외교 전문가’라는 명성이 바랬다. 정치력, 협상력, 리더십, 무엇보다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돌아왔음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가다. ━ 국제무대서 뚜렷한 존재감 없어 바이든은 국제적으로도 소리만 요란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난 8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했을 때 미국이 카불 공항에서 보여준 혼란, 동맹과의 소통 부재와 일방적인 철군 시한 결정,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IS-K(이슬람국가 호라산)의 카불 공항 테러에 대한 대비 실패 등으로 바이든은 큰 타격을 받았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과 유지에 필요한 파병과 경제적 지원을 했던 유럽 국가 등 동맹국들은 미국의 일방적인 결정에 실망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국민은 이런 바이든에게 국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실망을 표시했다. 민주당 행정부에 우호적이었던 미국 언론은 물론 중간층 유권자와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바이든에 대해선 실망을 표시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 뒤 남은 미국의 국력을 중국 견제에 쓴다고 했지만, 정작 중국이 대만을 위협하고 나서자 말싸움 외에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국민 생활에 직결되는 유가가 폭등하고 물가가 오르고 있는데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백신 접종률도 목표인 70%에 이르지 못한 가운데 국민에게 접종을 제대로 설득하지도 못하고 있다. 팬데믹이 끝나가고 ‘위드 코로나’ 정책을 펴면서 경제가 기지개를 켜려고 하는 상황에서 항구가 제대로 가동하지 않아 대규모 물류 대란을 막지 못했다. 급기야 일부 지역에선 화장지까지 부족한 상황을 맞고 있다. 미국은 바이든의 민주당 정권 아래에서 자신감과 자존감을 동시에 잃어가고 있다는 불만이 고조됐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에서 열린 G20과 COP26에서도 바이든은 환경 아젠다를 주도하거나 에너지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탄소를 줄일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원전이 꼽히지만, 미국은 1979년 스리마일 원전 사고로 신규 원전 건설을 중단해 기술과 시공 능력, 그리고 관련 산업에 대한 업데이트가 오랫동안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다. 미국은 원전을 개발하고 전 세계에 확대한 원조 국가지만 오랜 산업 마비 상태에 계속 길을 잃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기본적으로 에너지 수출을 거의 하지 않아서 글로벌 변화를 견인할 당근이 부족한 상황이다. 원자로인 APR-1400을 개발하고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안전 인증까지 마친 한국과 손잡고 전 세계를 상대로 원전 건설을 이끄는 정도의 국가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를 통해 미국과 서방이 탄소 배출 감소와 궁극적인 탈탄소 시대 개막을 주도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탈탄소 시기를 미국과 서방이 제시한 2050년이 아닌 2060년으로 잡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2070년으로 잡은 인도와 협력해 시기를 앞당기는 전략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G20과 COP26에서 바이든은 원론적인 입장 제시에 그쳤다. G20의 올해 의장국인 이탈리아나 COP26의 주최국인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처럼 인류를 위한 경고를 하지도 못했다. 바이든은 회의장에서 조는 모습을 보여 ‘슬리피 조’라는 대선 당시 트럼프가 했던 비아냥거림을 다시 들어야 했다. 지난해 당선 뒤 1년간, 취임 뒤 10개월간 바이든은 그야말로 고난의 세월을 보내며 유약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 왔다. 물론 바이든은 이번 주지사 선거는 자신과는 관련이 적은 개별 주의 선거일뿐이라고 선을 그어왔다. 하지만 이번 주지사 선거는 그런 바이든에 대한 정치적인 평가로 볼 수밖에 없다. 바이든이 선을 그은 것 자체가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을 사전이 우려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민주당 버지니아주 주지사 후보로 출마한 테리 매콜리프 후보가 선거전 초반에는 지지율이 두 자릿수로 앞서다 바이든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동반하락 했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의 버지니아주 주지사 패배의 주요 요인이 바이든의 실정과 인기 하락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뉴저지에서도 지난해 대선에서 민주당이 얻은 75.3%와 이번 주지사 선거에서 얻은 50.1%를 비교하면 15.4%나 득표율이 떨어진 셈이다. 뉴저지에서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연임한 것은 1977년 이후 44년 만에 처음이지만, 이를 축하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 물론 득표율에는 정당 선호와 함께 후보 개인의 인기 등이 다양한 요소가 작동하지만,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건 분명해 보인다. 민주당으로선 당장 상원의원의 3분의 1과 임기 년의 하원의원 전원을 새로 뽑는 내년 중간 선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의회에서 민주당의 우위가 간당간당하기 때문이다. 100명 정원에 부통령이 당연직으로 의장을 맡는 연방상원에선 민주당 소속 의원 48명과 친민주당 성향의 무소속 의원 두 명을 합쳐야 겨우 절반을 차지한다. 거기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캐스팅 보트를 행사해야 50석을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에 맞설 수 있다. 435명 정원의 연방 하원에서 민주당은 221명을 차지해 213명의 공화당과 불과 8석 차이다. 과반수인 218석보다 불과 3석이 많다. 의회에서 이런 상황도 내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에 밀리면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만일 내년 중간선거에서 연방 상·하원을 공화당이 장악하면 바이든 행정부는 남은 2년의 임기 동안 의회의 견제와 비협조 속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바이든은 재선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재선에 실패하고 물러난 트럼프처럼 바이든도 정치적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나이도 부담이지만 더욱 현실적인 문제는 지지도의 하락이다. 그런 상황에서 트럼프는 계속 파상 공세다. 지난 1월 의회 난입 선동과 대선 불복 시도 등으로 트럼프는 공화당에서도 사실상 기피 인물로 통한다. 하지만 바이든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실망이 커지면서 공화당 일부가 트럼프를 소환하고 있다. 각종 정치 행사에 트럼프가 나타나면 인파가 몰린다. 물론 트럼프 지지세력이 요란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과대 평가된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공화당에서 바이든에 맞서는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내에서 버지니아주 주지사 선거 패배와 뉴저지주 주지사 선거 신승으로 바이든의 정치력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개혁 요구하는 민주당 좌파와 부활하는 트럼프를 앞세운 공화당 우파 사이에서 국정 샌드위치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내년 중간선거는 물론 차기 대선 재선 가도도 흔들리는 상황이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국내외에서 지치고 유약한 모습을 더는 보이지 않게 이미지 관리부터 해야 한다. 78세의 고령이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때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1.11.06 19:00

7분 소요
[채인택 글로벌인사이트] ‘동맹 포위’ 압박나선 美, 눈 돌리는 中

전문가 칼럼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행정부가 중국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다. 동맹을 앞세운 대중국 포위와 압박의 강화라는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 기조가 갈수록 뚜렷해진다. 특히 5월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과 4월 16일 바이든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미·일 정상회담의 결과는 미국의 동맹을 활용한 대중 포위망 강화 기조를 완연히 보여준다. ━ "트럼프 대중전략 득보다 실 많았다… 동맹 활용해야" 5월 21일 나온 한·미 공동성명은 “한국과 미국은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저해하거나, 불안정하게 하거나, 위협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고 명시했다. ‘국제질서 저해’의 주체를 명시하진 않았지만 이는 누가 봐도 중국이다. 중국이 ‘핵심이익’이라며 유난히 거북해 하는 대만 문제도 명시했다. 같은 의미를 지닌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정도 지적했다. 미국이 동맹인 한국을 배려해 ‘중국’이란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대중 문제의 핵심인 대만과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문제에서 한국의 분명한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장 위구르의 인권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동맹이자 민주주의 가치의 공동 수호자임을 분명히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미국의 중국 포위망에 동참했다. 4월 16일 미·일 정상회담 뒤 나온 공동성명에는 ‘중국’이라 단어가 무려 다섯 차례나 등장했다. “중국이 국제 규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데 우려를 표한다”며 내놓고 국제규범 위반자로 지적했다. 대만과 관련해서도 “양안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해 중국의 무력 사용 위협에 일침을 가했다. 남중국해 문제는 물론 홍콩과 신장 위구르의 인권 문제까지 따지고 나섰다. 일본이 중국 문제에서 미국과 한배를 탔음을 분명히 한 공동성명이다. 중국은 미국은 물론 미국의 서태평양 동맹인 한국과 일본까지 힘을 합친 포위망에 들어간 셈이다. ‘동맹과 함께하는’ 또는 ‘동맹을 앞세운’ 미국의 대중 포위·압박 전술은 어디서 나왔을까. 미국 싱크탱크들의 그간 지적과 주장을 살펴보자.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마이클 스웨인 시니어 펠로우는 민주당 정권은 중국을 상대하는 데 과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했던 것보다 더 강하면서도 더욱 스마트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스웨인은 ‘미국이 중국에 대해 더욱 스마트해지는 전략을 위한 4가지 단계’라는 기고문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미국이 주도하는 리버럴한 글로벌 질서를 전복하는 데 광분하는 독재 권력이자 미·중 관계 자체를 부인하는 수정주의자로 보이게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을 코너로 몰아가는 이런 강경책이 미국의 국익을 손상시킨다고 지적했다. 대신 그는 더욱 강하면서도 스마트한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 홈 구장의 이점을 복구하는 방안이다. 중국 산업이나 기업에 맞서는 강력한 대응 기업을 미국에서 키우는 일이다. 스웨인의 제안은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반도체나 배터리 등 미국이 중국 시장을 압박할 수 있는 분야에서 미국에 투자하는 것이 좋은 사례다. 이는 중국에 압박을 가하면서 미국에도 이익이 되는 강력한 수단이다. 투자는 트럼프가 중국 상품에 대해 막대한 관세를 물렸던 것보다 훨씬 현명하며, 미국 기업을 위해서도, 미국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좋은 방법이다. 두 번째 전략은 강하되 스마트하게 맞서라는 것이다. 인권 문제 등과 관련해 중국을 경제적으로 강하게 압박하되 조심성 있고 세심하게 대응하라는 제언이다. 트럼프의 대중 관세 압박 전술은 중국 경제에 재한 피해보다 미국 경제에 대한 피해가 더 컸다는 지적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중 수입품의 소비자가 미국의 개인과 기업이라는 생각을 하면 더더욱 그렇다. 세 번째는 누구와 상대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하다는 점이다. 중국은 다른 어느 나라와도 다른 라이벌이다. 스웨인은 미국 행정부는 중국이 글로벌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다고 지적한다. 중국 경제는 전 세계의 경제성장과 일자리, 글로벌 투자와 인프라와 관련이 깊다. 기후변화와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무엇보다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막는 데도 협력이 필요한 국가다. 중국이 독재체제라는 점만 생각하지 말고 이런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도 고려하면서 대중 압박을 진행해야 하다는 이야기다. 넷째, 같은 악보를 동맹들과 함께 연주하는 전략이다. 트럼프는 한국과 프랑스·독일·영국·인도·일본 등의 동맹국에도 고액의 관세를 부가하면서 비난을 자초했다. 결국 핵심은 미국이 동맹과 함께 중국을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맹 시너지야말로 미국이 가장 효과적으로 중국을 맞서고, 중국을 압박하며, 욱일승천하는 중국을 누를 수 있는 핵심 전략으로 본다. 동맹을 앞세운 대중 포위 전략은 군사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싱크탱크 랜드연구소는 최근 ‘중국을 다루는 미국 전략의 발전-현재와 미래를 향해’라는 보고서에서 군사를 포함한 미국의 대중 전략을 6가지로 정리했다. 랜드연구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과 중국은 공통된 글로벌 이익을 공유한다, 다만, 중국의 군사력 증대로 미국이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는 능력이 제한되거나 감소되고 있어 이를 우려한다. 둘째, 이에 따라 미 행정부에 중국과의 충돌 가능성이 커지는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이익 보호와 양쪽이 모두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지역에서의 협력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다. 셋째, 중국이 취해온 해상 전략인 A2/AD(Anti-Access/Area Denial: 반접근/지역거부) 개념이 분쟁에서 더 이상 중국의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A2/AD는 간단히 표현하면 적 항모의 해안 접근을 막고, 해안에서 일정 범위 안의 적 해상전력은 철저히 분쇄한다는 전술이다. 이를 위해 바다에 제1 도련선, 제2 도련선 등 가상의 선을 쳐놓고 미국의 접근을 막는다는 게 중국의 개념이다. 중국이 추구하는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에서 해상 항구를 연결하는 ‘바다의 진주목걸이’ 부문이 이에 해당한다는 지적도 있다. 넷째, 미국의 전략은 변화하는 미래에도 약간만 변화하고 계속 적용할 수 있도록 확고해야 한다. 다섯째, 미국의 전략은 지역 내 안정을 도모하고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오판을 방지해야 한다. 여섯째, 미군은 미국과 미국 동맹국의 기지를 보호하고 안보 협력을 강화하며 연합작전 능력을 배양하고 지역에서 전력을 투사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서 말한 미국과 동맹국의 기지 보호 항목은 한국과 일본이 모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중국에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은 당연히 한국이다. 미군과 동맹국 기지 보호는 서태평양 지역의 미국 전략의 중심이며, 미군이 주둔하고 전력을 투사하는 배경이다. 그런 점에서 평택 미군 기지는 미국의 서태평양 전략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 중시 전략, 동맹을 앞세운 중국 포위 전략, 대중 압박 전술을 택하면서 한국과 밀착한 배경이다. 보고서는 위의 셋째에서 지적한 중국의 A2/AD의 저지를 위해 미국의 서태평양 전략을 다음 5가지 기둥을 바탕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첫째는 미국의 전투력 유지와 신속타격 능력 지원, 둘째는 고도의 능력을 갖춘 지역 동맹이다. 미국이 서태평양 지역에서 힘을 발휘하고, 중국을 효과적으로 포위하는 능력의 핵심을 동맹이라고 본 것이다. 이밖에 ▷국경과 수역 너머에 있는 중국 지역에 전력을 투사하는 데 대한 작전적 어려움 극복 ▷중국 목표물에 대한 취약성을 감소할 기술 개발 ▷미국 지도자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다양한 비핵무기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 등이다. 랜드연구소의 보고서는 미국이 전략적으로, 군사적으로 중국을 포위하고 압박하는 데 동맹은 가장 효율적인 고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 중동·동남아·남미 등지서 '소프트파워 외교' 나선 中 이런 미국에 대항해 중국은 어떻게 나올까. 미국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의 라이언 하스 시니어 펠로우의 주장을 들어보자. 하스는 최근 후버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차이나 리더십 모니터’에 ‘중국은 어떻게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 확대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기고문에서 하스는 중국의 대미 전략도 이에 맞춰 급격히 변화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중국이 미·중 관계와 국제적 환경의 급격한 전환에 따라 지정학적·경제적 가치를 재평가하고 국가 발전과 글로벌 전략을 재정비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세계에는 미국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스에 따르면 베이징 당국자들은 미·중 관계가 가까운 장래에 지속적으로 불안정할 것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비롯한 지도부는 중국이 세계무대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데서 시간과 모멘텀은 자신들의 편이라고 믿는다. 하스는 중국 관리들이 자국이 추구하는 국가 목표를 이루려면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다고 본다. 하스는 이를 위해 중국이 세 가지 중기 전략을 추구할 것으로 분석했다. 첫째, 내부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비적재적인 외부 환경을 유지하는 전략이다. 둘째, 미국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다른 나라들의 중국에 대한 의존을 늘리는 전략이다. 셋째는 해외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이다. 하스의 지적대로라면 중국은 미국의 포위와 압력이 거세질수록 미국과 맞상대하며 갈등을 증폭하는 대신 전 세계 다른 국가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강화하고 영향력 확대를 시도할 것이다. 실제로 이런 모습은 3월 24~30일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중동을 순방한 것과도 맞물린다. 중동의 대표적인 친미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터키, 미국과 핵합의(JCPOA) 재개를 추진하는 이란,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오만을 차례로 찾았다. 이란을 제외하고는 모두 친미국가이거나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나라다. 미국은 냉전시대 내내 이 지역에서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일부 국가는 군사적으로 미국에 의지했다. 중국 외교 수장이 오랫동안 미국의 ‘텃밭’인 중동을 순방한 것은 이례적이다. 거기에 중국은 이란에 425조 투자 계획을 발효하고 아랍에미리트(UAE)에는 백신 공장을 합작 건설하기로 하는 등 통 큰 선물 보따리를 풀며 전에 없이 활발한 투자에 나섰다. 물론 중국이 하루 1000만 배럴 이상의 석유를 수입해야 경제 성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석유 수입국이라는 입장도 순방의 요인이었을 것이다. 신장위구르 무슬림(이슬람 신자) 탄압에 대한 서구의 비난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이슬람 국가에 이 문제를 해명하거나 당근으로 입을 막을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중 경쟁 국면에서 전선을 확대해 글로벌 중심으로 부상하겠다는 중국의 대응 전략일 가능성도 커 보인다. 석유 자립으로 미국의 관심 줄어든 중동은 중국이 영향력 확대를 노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또 다른 외교적 노력으론 백신 확산이 있다. 코로나19 확산 책임론에 대한 회피 성격도 있지만 중국은 전 세계에서 많지 않은 코로나19 백신 자체 개발·생산국이다. 베이징에 있는 브리지 컨설팅 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지금까지 7억700만 회분의 코로나19 백신을 해외에 판매했으며, 2080만 회분을 기증했다. 특히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중점적으로 백신을 기증했다. 중국이 백신 외교를 내세워 전 세계 다양한 나라와 외교적으로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부장관으로 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미국이 소프트파워 외교를 전개했다면, 지금은 중국이 백신으로 중국식의 소프트파워 외교를 펼치려고 시도하는 셈이다.미국과 동맹국의 매서운 포위망에 맞서 중국은 다른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1.05.29 20:00

7분 소요
[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UAE가 아랍권 반대에도 이스라엘과 손잡은 속사정] ‘포스트 석유’ 경제 개혁 갈망

전문가 칼럼

기술강국 이스라엘 통해 아랍에미리트 산업개발·치안강화 모색 아랍국가 아랍에미리트(UAE)가 8월 13일 이스라엘과 외교관계 정상화에 합의하면서 중동 지역에 한바탕 외교 지각변동이 전망된다. 이날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최대 토후국인 아부다비의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흐얀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는 각각 양국의 평화협정과 수교를 발표했다. 무함마드 빈 자이드 왕세자는 와병 중인 아랍에미리트 대통령 겸 아부다비 에미르(이슬람 군주)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흐얀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어왔다.이번 조치는 이집트가 41년 전인 1979년, 요르단이 26년 전인 1994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수교한 뒤 처음 있는 일이다. 페르시아 만(아랍권은 아라비아 만으로 부른다) 연안 국가로는 처음이다. 가히 역사적이라고 할 만하다.아랍에미리트와 이스라엘의 수교 결정으로 193개 유엔 회원국 중 163개국이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30개국이 미승인국으로 남았다. 아랍권 지역기구인 아랍연맹(AL) 22개 회원국 중 알제리·바레인·코모로·지부티·이라크·쿠웨이트·레바논·리비아·모로코·오만·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소말리아·수단·시리아·튀니지·예멘 등 17개국이 주축이다. 여기에 이슬람협력기구(OIC) 회원국 중 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브루나이·인도네시아·이란·파키스탄·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7개국과 말리·니제르 등 아프리카 2개국이 포함된다. 남미의 쿠바와 베네수엘라, 아시아의 북한 등 반미국가와, 고립정책을 추구하는 불교 군주국가 부탄도 이스라엘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로 남았다. ━ 첨단 기술 확보에 공 들이는 아부다비 이런 상황에서 아랍에미리트가 ‘퍼스트 펭권’으로 나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중동의 시아파 반미국가인 이란·시리아·예멘 등에 대한 견제 등 다양한 전략적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동기로 경제적인 요인을 꼽을 수 있다.사실 아랍에미리트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석유부국이다. 이 나라의 경제의 핵심은 해상 유전을 중심으로 하는 석유사업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총생산(GDP)은 국제통화기금(IMF) 2019년 명목금액 기준 4057억 달러로 세계 30위에 이른다. 1인당 GDP는 3만7749달러로 24위에 오른 부자나라다.아랍에미리트를 이루는 7개 토후국의 핵심은 아부다비와 두바이다. 아부다비는 아랍에미리트 전체 GDP의 60%를 생산한다. 대부분 석유와 가스다. 연간 2000억 달러를 넘는 아랍에미리트 전체 석유 생산의 94%를 차지한다.주목할 점은 아랍에미리트의 중심인 아부다비가 1976년 설립한 아부다비투자청(ADIA)이 파이낸셜 타임스(FT) 추정 약 9000억 달러(8750억 달러~1조 달러로 추정액이 다양하다)의 국부펀드를 운영한다는 사실이다.아부다비는 포스트 석유 시대에 대비해 첨단기술 확보에 필사적이다. FT 보도에 따르면 아부다비 국부펀드의 하나인 무바달라는 이미 지난해 세계적인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인 GE와 공동으로 아부다비에 80억 달러 규모의 합작법인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GE의 10대 투자자가 되기로 했다. 할리파의 원전 도입은 원전 기술 확보와 산업 진흥이라는 큰 그림의 일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원전 도입의 최종 목표는 결국 에너지 산업 다양화라는 이야기다. 아부다비가 간단치 않은 토후국임을 보여주는 사례다.아부다비는 그린과 에너지 기술뿐 아니라 다양한 고부가 하이테크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독특한 점은 심지어 우주항공 분야에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다는 점이다. 무바달라 펀드는 에어버스 여객기를 만드는 유럽항공방위우주산업(EADS)와 계약을 맺고 일부 항공기 부품을 아부다비에서 제조하는 계약을 맺고 있다. 아부다비에서 현지 젊은 기술자들의 손으로 항공기 부품을 개발하고 제조하겠다는 의지다. 경영난을 겪고 있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항공업체들에 대한 지분도 투자해왔다. 아부다비는 심지어 반도체 분야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무바달라 펀드는 설립 목적부터 독특하다. 벤처 투자, 인수합병 등을 통해 아부다비 경제를 다양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할리파가 UAE와 아부다비를 앞으로 어떤 나라로 만들려는지 의도가 분명히 보이는 부분이다. 그것은 오일달러로 최첨단 기술을 확보해 단숨에 고부가 하이테크 산업 국가로 발돋움하겠다는 것이다.아부다비의 국영 투자회사인 어드밴스드 테크놀러지 인베스트먼트사(ATIC)는 싱가포르의 반도체업체인 차터드세미컨덕터를 18억 달러에 매입한 점도 눈에 띤다. ATIC은 그 전에 미국의 반도체회사인 AMD와 공동으로 글로벌 파운드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차터드 세미컨덕터를 이 회사에 합병해 덩치를 키웠다. ━ 아랍 투자자들 이스라엘 기술에 눈독 이처럼 아랍에미리트, 특히 아부다비는 투자할 곳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스타트업 국가로 발돋움하는 이스라엘에 매력적인 투자처의 하나로 보였을 것이다. 2018년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만난 스타트업 분야 관계자는 “아랍권 투자자들이 다른 나라 여권을 들고 이스라엘을 방문해 스타트업 기업을 살펴보고 있으며 정부도 이를 모른 척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아랍권 투자자들과 당국자들이 이스라엘의 경제력, 과학기술력, 서구와의 네트워크 등을 활용하려고 경제적 접촉 면적을 오래 전부터 넓혀왔다는 이야기다. 이 가운데 투자할 것을 찾고 있는 아랍에미리트 사람이 상당수 있었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아랍에미리트가 이스라엘과 손잡은 이유로 이스라엘의 뛰어난 보안 기술을 꼽을 수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우선 외국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아랍에미리트 인구는 2020년 현재 989만 명으로 추산된다. 2005년 센서스에서 집계한 인구가 410만 명이었으니 12년 새 2배 넘게 늘었다. 세계적인 인구 고속 증가 국가의 하나다. 문제는 늘어나는 인구가 대부분 외국인 이주자라는 점이다. 전 세계 200개국 출신이 아랍에미리트에 거주한다.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구 중 내국인과 외국인 비율이다. 이주민이 몰리면서 그 비율은 이미 오래 전에 역전된 상태다. 2018년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인구의 11.48%만 국민이고 나머지 88.52%는 외국인이다.7개 토후국 중 인구가 많은 5개 토후국을 대상으로 거주자의 국적을 조사한 결과 인도인(25%)·파키스탄인(12%)·에미라티(UAE국민·9%)·방글라데시인(7%)·필리핀인(5%)·스리랑카인(3%)의 순으로 나타났다. UAE가 국제사회에서 ‘거대한 인디언(인도계 주민) 타운’으로 불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0만 명의 영국인과 러시아·유럽·중남미 등에서 온 50만 명의 유럽계 이주민도 존재한다. 국민은 이슬람 종파로 수니파 85%, 시아파 15%의 비율이다.이런 상황에서 해외 이주민을 관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기술과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UAE의 석유 시설의 대부분은 이란과 연결된 해상 유전에서 나온다. 해상 유전은 페르시아 만(아라비아 만)의 작은 섬이나 바다 위에 건설한 인공 섬에서 바다를 뚫어 석유나 가스를 채굴한다. 이 섬의 원유 채굴 시설, 작업장으로 향하는 선박, 이동하는 노동자들의 동태 파악은 UAE 경제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테러라도 벌어지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원전·우주선 개발로 산업 다양화 모색 주목할 점이 석유와 가스에 경제의 상당 부분을 의존해온 산유국인 UAE가 이제는 포스트 석유시대에 대비해 자국에 다양한 산업을 일으키고 세계 각국의 주요한 첨단산업에 투자해 동반 성장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UAE는 한국과 손잡고 바라카 원전 건설에 들어갔으며 지난 8월 1일 1호기가 상업 발전에 들어갔다.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 아랍에미리트(UAE) 총리 겸 부통령 겸 두바이 지도자는 8월 1일 아부다비 바라카 원자력 발전소 1호기 가동을 발표했다. 바라카 원전사업은 한국형 차세대 원전 APR1400 4기(총발전용량 5060㎿)를 UAE 수도 아부다비에서 서쪽으로 270㎞ 떨어진 바라카 지역에 건설하는 프로젝트다. 한국전력 컨소시엄은 2009년 12월 이 사업을 수주해 2012년 7월 착공했다. 애초 2017년 상반기에 1호기를 시험 운전할 계획이었지만 UAE 정부 측에서 자국민 고급 운용 인력 양성을 요구하면서 시기를 수 차례 연기했다. 한국에선 고리 원전에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교(KINGS)를 세워 아랍에미리트 등 국내외 원자력 전문 인력을 양성해왔다.중동권에서 원전 가동은 이스라엘의 네게브 원전과 이란의 부셰르 원전이 이에 세 번째다. 이스라엘과 이란 원전이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는 것과 대조적으로 바라카 원전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규제를 따르는 상업발전 시설이다.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중동의 강국으로 자부하는 터키도 2018년 4월 러시아 국영 원자력 기업 로사톰과 손잡고 지중해 연안 메르신 지역의 악쿠유 원전의 건설 기공식을 열었다. 기공식에 맞춰 터키를 찾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손을 잡았다.AFP 통신에 따르면 아랍권의 강국 이집트도 러시아와 손잡고 원전 4기를 건설하려다 미국의 반대로 주춤한 상태다.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따르면 요르단도 한국과 협력해 연구용 원자로를 가동하며 실력을 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UAE는 원자력으로 다른 나라보다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UAE는 지난 7월 20일 중동 최초의 화성 탐사선 아말을 발사했다. 아랍어로 희망을 뜻하는 아말은 이날 일본의 우주발사체인 H2-A에 실려 일본 남부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발사됐고 BBC방송이 보도했다. UAE의 첨단과학기술부의 주도 아래 과학기술자들이 지난 6년간 개발한 화상탐사선 아말은 5억㎞의 우주 공간을 날아가 2021년 2월 UAE 건국 50주년에 맞춰 화성 궤도에 진압할 예정이다.이런 성과에도 아랍에미리트와 아부다비는 고민이 많다. 1971년에 독립한 아랍에미리트는 석유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지만 작업복을 입고 먼지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국민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한 마디로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다. 아라비아 만(페르시아 만) 연안 산유국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 성과 없는 이스라엘 봉쇄 정책 변경 아랍에미리트 인구의 9%를 차지하는 현지인들은 에어컨이 잘 되는 사무실에 앉아 편안히 일하는 공공 부문 일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건설 등 힘든 일은 대부분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가 맡고 있다. 중동 산유국 도시들이 거대한 인디언 타운이 되고 있는 이유다. 게다가 사회복지는 거의 완벽해 힘들여 일하지 않고도 상당한 수준의 생활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숙련된 기술자와 지식인이 필요한 제조업이나 첨단산업의 발전을 애초에 기대하기가 힘든 구조다.게다가 경제에서 석유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문제도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60%가 석유와 천연가스에서 나온다. 다른 걸프 산유국 평균인 45%와 비교해도 높은 편이다. 2000억 달러 정도를 수출하는 석유 말고는 수출품이라고 해봐야 대추야자와 중동과 인도 요리에서 양념으로 쓰이는 말린 생선 정도밖에는 없다. 다만 국내에서 석유 플랜트를 제작하고 여기에 사용하는 철강을 자체 제철소에서 생산하는 등 아라비아 만(페르시아 만) 연안 산유국 중에선 드물게 자체 산업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다.아무리 부자 산유국이라고 해도 과도한 복지정책을 언제까지나 계속 펼 수는 없다. 인구는 갈수록 늘고 있고 복지비용은 경제에 서서히 부담을 준다. 나라 안에는 석유회사와 국부펀드 운용사, 그리고 공공 부문 말고는 별다른 일자리도 없다. 산업을 추가로 일으킬 필요성이 절실한 이유다. 석유 다음의 시대도 고민해야 한다. 대대적인 경제구조 개혁 드라이브가 필요한 부분이다. 산유국에서 원전을 건설하는 이유는 이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아랍에미리트에 이스라엘은 중동 유일의 과학기술 능력을 보유한 최선의 지역 내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을 위해 이스라엘을 봉쇄한다는 아랍 민족주의의 구호는 실제 팔레스타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현실론도 감안했을 것이다.사실 와병 중인 아랍에미리트 대통령 겸 아부다비 에미르인 할리파는 중동 서민들에게 인기 있는 군주다. 팔레스타인에선 하마스 지도자에 이어 인기 2위의 인물이다. 대대적인 경제적인 지원 때문이다. 할리파는 팔레스타인 자치구인 가자지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신도시인 셰이크 할리파 시티의 건설을 추진해왔다. 팔레스타인의 경제적인 부흥을 지원해 이 지역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기대에서다. 거의 대부분 젊은이 일자리가 없는 팔레스타인에 건설 분야 등에서 일자리를 제공한 것이다.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 심장병과 중환자동 건물 건설에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이 건물에는 자신의 선친인 셰이크자이드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경제개혁가이자 자선기부자인 할리파의 야망은 사막의 열기보다 뜨겁다. 할리파의 뜻을 이복동생인 왕세제 무함마드 빈 자이드가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이 보유한 능력은 한국도 마찬가지로 확보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에 없는 인적 자원과 지식, 기술, 그리고 경험과 의지가 있다. 아랍에미리트와 이스라엘의 수교는 아랍에미리트를 비롯한 중동 산유국들의 숨은 고민을 보여준다. 그 틈새에 한국이 진출할 기회가 엿보인다. 문제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8.2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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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41년 만에 미국이 대만을 찾은 이유] 미국·중국·대만 삼각관계 끝은 어디

전문가 칼럼

美, 중국 폭정 공산당으로 규정… 옛 우방국들과 반중 연대 강화 미국의 앨릭스 에이자 보건복지부 장관이 8월 9~13일 미수교국인 대만을 방문한 것은 미국-대만 관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에이자 장관은 1979년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과 단교한 뒤 타이베이를 찾은 미국 인사 중 최고위급이다. 단교 뒤 미국 각료급 인사의 대만 방문은 6년 전인 2014년 지나 매카시 환경보호청장이 마지막이었다. 에이자 장관의 대만 방문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미·중 무역 전쟁과 지식재산권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이에 따른 휴스턴과 청두의 총영사관 폐쇄 등으로 악화 일로에 있는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다.에이자 장관은 대만에서 눈에 띄는 일정을 보냈다. 의례적인 방문 수준을 넘어선다. 표면적인 이유인 방역 협력은 그 일부일 뿐이다. 8월 9일 특별기 편으로 타이베이에 도착한 에이자 장관은 대만에서 상당히 바쁜 일정을 보냈다. 10일 오전 대만에서 사실상 미국 공관 역할을 하고 있는 민간기구 미국재대만협회(AIT)의 제임스 모리아티 대표 등과 함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을 만나 회담했다. 미수교국인 대만의 최고지도자와 거침없는 만남의 행보를 보인 셈이다. 에이자 장관은 대만의 우자오셰(吳釗燮) 외교부장, 천젠런(陳建仁) 전 부총통, 라이칭더(赖淸德) 전 행정원장과도 만나 대화를 나눴다.이번 방문의 하이라이트는 12일 에이자 장관이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의 분향소가 마련된 타이베이 빈관을 조문하며 대만에 민주주의를 가져왔던 리 전 총통의 업적을 기린 것이다. 대만 민주화의 물꼬를 터 ‘미스터 민주주의’로 불렸던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의 분향소를 찾아 추모한 에이자 장관은 중요한 발언을 쏟아냈다. 에이자 장관은 분향소에 ‘리 전 총통의 민주주의 유산은 미국과 대만 관계를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는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의미심장한 메시지다. 의례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문구다.국민당 소속 리 총통은 1988~2000년 대만 총통을 지내면서 다당제와 총통 직선제를 도입하고 국민당 독재를 종식해 대만 민주주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일본 식민지 시절 대만에서 태어나 일본 교토대 농림경제학과에서 공부하다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일본군 소위로 임관해 복무했다. 그는 종전 뒤 미국에 유학해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석사, 코넬대에서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전공은 농업경제학이다. ━ 美 복지부장관 대만 방문, 중국에 맞서 연대 암시 정치에 뛰어든 그는 본성인(本省人)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만 총통을 맡았다. 본성인은 1945년 이전에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한인을 가리킨다. 1949년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 빼앗기면서 대만으로 이주한 국민당계 한인과는 정체성이 다르다. 리 전 총통은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이루는 한편, 베이징 당국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을 거부하면서 ‘양국론’을 주장하며 대등한 양안 관계를 추구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 대만인으로부터는 ‘국부’로 존경 받았지만 중국 본토에서는 ‘대독(臺獨•대만독립) 세력의 수괴’로 불렸다.에이자 장관은 대만 방문 중 리 전 총통에 대한 찬사를 계속했다. 10일 차이 총통을 만났을 때는 “리 전 총통은 대만 민주주의의 아버지인 동시에 20세기 전 세계 민주주의 조류의 중요한 지도자”라고 말했다. 11일 대만국립대학 강연에서는 리 전 통총을 “위대한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민주주의자인 리 전 총통 추모를 내세워 중국공산당을 자유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세력으로 몰아간 셈이다.에이자 장관의 방문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은 12일 미국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와 연구소와 미국진보센터(CAP)가 공동 주최한 화상회의에서 “대만이 자유·민주의 튼튼한 보루 역할을 하겠다”고 발언했다. 차이 총통은 ‘대만 보위는 인도·태평양 지역 자유의 보루’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이같이 말하고 같은 맥락에서 홍콩인에 대한 지원 입장을 재확인했다. 중국이 전국인민대표회의 결정으로 홍콩 국가안전법을 제정하고 일국양제 체제 분열, 정권 전복, 테러조직 결성 및 활동을 예방·저지·처벌한다며 공안 정국을 조성하자 대만은 홍콩인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지원 의사를 밝혀왔다. 이주를 희망하는 홍콩인을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공개해왔다.에이자 장관은 대만 방문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해 중국 책임론을 강조했다. 중국이 세계보건기구(WHO) 의사결정기구인 세계보건총회(WHA)에서 대만의 옵서버 자격 참가를 반대해 올해 화상으로 열린 총회에 참가하지 못한 것과 관련해 에이자 장관은 “장관으로 있는 동안 대만의 옵서버 지위 회복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코로나19 확산 책임을 두고 중국을 비난하고 대만을 감싼 셈이다. ━ 대만 총통 전투기 구매로 美 대만여행법 통과에 화답 인구 2380만 명의 대만은 중국 우한(武漢무)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즉시 문을 걸어 닫고 중국과의 인적 교류를 중단했으며 철저한 방역으로 확산을 저지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확진자 481명에 사망자 7명의 경미한 피해에 그쳤다. 그 결과 대만은 세계적으로 코로나19에 모범적으로 대처한 국가가 평가된다. 하지만 중국의 방해로 올해 세계보건총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에이자 장관은 대만의 마스크 공장을 방문해 “우리는 안보·경제·보건 분야에서 친구이자 파트너인 대만을 지속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봐도 중국을 겨냥한 발언이다.이러한 에이자 장관의 대만 방문과 언행은 미국과 대만 관계가 새로운 궤도에 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미국은 1979년 단교 뒤 대만과는 공식 외교 접촉은 자제해왔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변해왔다. 2016년 5월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이 첫 취임(올해 1월 재선)하고 그 해 11월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취임은 2017년 1월)하면서 미국과 대만은 전략적으로 접근해왔다. 트럼프는 당선인 신분이던 그 해 12월 차이 총통과 전화 회담을 했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대만의 총통이 전화회담을 한 것은 1979년 미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국교를 맺은 뒤 처음 있는 일이다.2018년에는 미국과 대만 관계가 급진전했다. 미국과 대만 고위 관료들의 상호 방문과 교류를 촉진하는 ‘대만 여행법(Taiwan Travel Act)이 그 해 2월 28일 미국 의회를 통과하고 3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발효됐다. 미국 하원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6년 9월 대만여행법을 발의하고 상원에 제출했지만 부결됐다. 하지만 대만여행법은 2017년 1월에 하원을 거쳐 5월 상원에 다시 제출됐으며, 결국 2018년 1월 하원에서 법안이 가결된 데 이어 2월 28일 상원에서도 만장일치로 통과됐다.대만여행법의 첫 수혜자는 대만의 차이 총통이었다. 그는 2019년 3월 말 남태평양 3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미국 하와이를 경유하며 미군 장성을 비롯한 미국 인사들과 만났다. 차이 총통은 미국의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 세미나에도 참석해 “미국에 F-16V 전투기와 전차 구매를 요청했다”고 직접 밝히고 “전 세계에 대만 방위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뒤 트럼프 행정부는 대만에 F-16V를 팔기로 했다. 이는 대만이 1992년 이후 27년 만에 처음으로 전투기 도입이 됐다.육군 8만8000명, 해군 4만 명, 공군 3만5000명의 병력을 유지하는 대만은 최신 무기체계 획득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중국의 견제로 전 세계에서 무기를 들여올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미국 밖에 없는데 그나마 최신형 무기체계는 팔지 않기 때문이다. 육군의 경우 미군이 쓰는 M1A1 에이브럼스 전차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한 단계 아래인 M60A3 전차 200대 구매에 만족해야 했다. 565대의 주력전차(MBT)를 보유한 대만 기갑 전력의 핵심은 구형인 M-48 전차다. 479대의 전투기를 보유한 대만 공군의 핵심은 143대의 F-16 A/B형이다. 개량된 C/D형은 미국이 팔지 않아 획득하지 못했다. 87대의 F-5E/F도 보유하고 있지만 퇴역 시기가 한참 넘은 구형 기종이다. 그 외에 55대의 프랑스제 미라지 2000을 운용하고 있을 뿐이다. 프랑스는 중국의 눈치를 봤는지 성능이 떨어지는 기종을 넘겼다. ━ 미국·대만, 앞에선 단교 뒤에선 우방국 군사동맹 유지 이런 사정의 대만에 미국이 F-16V를 핀매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을 본격적으로 펼치는 과정에서 대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무역협상 등에서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카드인지도 알 수 없다.이는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와 미·대만 단교 이후 유지돼 왔던 워싱턴과 베이징의 관계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지적된다. 사실 미국은 대만과 단교하면서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대만 방위를 위한 역할도 계속해왔다. 미국 의회는 1979년 미국의 대중 수교와 대만 국교단절 직후인 그해 4월 ‘대만관계법’을 제정했다. 오랜 우방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께 연합국으로 싸웠던 중화민국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과거 양자가 맺었던 외교협정을 유지하고, 대만 방어용 무기에 한해 대만에 미국산 무기를 제공하며, 대만 주민의 안전과 사회경제적 제도를 위협하는 무력사용 등 강제적 방식에 대항하기 위해 방어력을 유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법은 미국 국내법임에도 내용은 외교 협정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대만이 국교는 단절하면서도 군사적 동맹관계는 유지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사실 미국과 중국은 외교 관계 수립을 전후해 1972년 2월 ‘상하이 코뮤니케(공동성명)’, 1978년 12월 ‘미·중 수교 코뮤니케’, 1982년 8월 ‘8·17 코뮤니케’ 등 3개의 코뮤니케를 발표했다. 1972년 상하이 코뮤니케는 미국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처음 언급했다. 1978년 수교 코뮤니케에선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키기 위해) 대만과 공식적인 정치 관계는 단절하되 경제·문화적 관계만 유지하며, 미·중 양국이 국제 분쟁을 줄이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1982년 8·17 코뮤니케에선 이전 코뮤니케에서 나왔던 대만 문제를 재확인했다. ━ 대만관계법·6개보장으로 중국 주도 양안 통일 견제 독특한 점은 8·17 코뮤니케 직전에 대만과 ‘6개 보장’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6개 보장은 대(對)대만 무기판매에 기한을 정하지 않고, 무기수출시 중국과 사전협상하지 않으며, 양안 중재 역할을 맡지 않고, 대만관계법을 수정하지 않으며, 대만 주권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변경하지 않고 대만에 중국과의 협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1979년의 대만관계법과 1982년의 6개 보장은 미국과 대만 관계의 기본 원칙이 돼왔다.상하이 공동성명은 ‘미국은 대만해협 양측의 모든 중국인들이 중국은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미국 정부는 이러한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중국’이라고만 했을 뿐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이 중국이 주도하는 양안 통일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미국은 이렇게 국교를 단절한 대만에 민간기관인 미국주 대만협회(AIT)를 상주시키면서 관계를 이어왔다. AIT는 민간기관이지만 비자 업무 등을 운영하면서 국교를 단절한 대만에서 실질적인 미국 외교공관 역할을 해왔다. 외교공관과 달리 대만의 타이베이(臺北)와 가오슝(高雄)에는 물론 미국 워싱턴에도 사무실을 유지한다.지난해 3월 19일 AIT의 윌리엄 브렌트 크리스텐슨 대표는 우자오셰(吳釗燮) 대만 외교부장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과 대만이 미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 사무소’의 고위 관리가 참석하는 연례 대화를 신설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주목할 점은 대화의 명칭이 ‘인도태평양 민주주의 거버넌스 협의(Indo-Pacific Democratic Governance Consultations)라는 사실이다. 이 포럼의 목적에 대해 크리스텐스 대표는 “미국과 대만이 지역에서 협력을 증진하고 공동 프로젝트를 추구해 오늘날 거버넌스 도전을 받는 다른 나라를 지원하는 것”이라며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을 촉진하는 데 미국과 대만보다 더 좋은 파트너가 없다”라고 말했다.1년 전의 이 발언은 이번 에이자 장관의 대만 방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열쇠일 것이다. 미국과 대만의 관계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반비례해 계속 변화 중이다. 그 궁극적인 종착역이 어딘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8.1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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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베이루트 대폭발 원인 어디서 시작됐나] ‘고인물’ 정권이 레바논 비극의 불씨

전문가 칼럼

국민은 안중에 없는 종파 간 암투… 경제 침체로 상심한 반정부 시위 격화 지난 8월 4일 수도 베이루트의 항구 창고에 보관 중이던 질산암모늄이 인근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대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레바논이 주목 받고 있다. 적어도 135명이 사망하고 5000여 명이 다쳤으며 3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대참사다. 21세기 최대의 도시 폭발로 기록될 이번 사고의 결과 핵 폭발을 방불하게 하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발생했으며 베이루트 항구와 인근 시가지는 초토화됐다. 1975~1990년 레바논 내전으로 온 도시가 무너진 건물 잔해에 뒤덮인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날 정도다.주목할 점은 레바논이 최근 들어 심각한 경제난과 정치적 갈등을 겪어왔다는 사실이다. 레바논의 경제 성장률은 2018년 -1.9%, 2019년 -5.6%를 기록했다. 2007~2010년 연평균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9.1%에 이르렀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레바논 경제는 2011년 이웃 시리아에서 내전이 벌어지자 정정마저 불안해지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세계은행(WB)은 올해 성장률을 -10.9%, 2021년은 -6.3%로 전망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활동 중지는 반영되지 않은 수치다. 관광과 금융업, 무역 중심의 레바논 경제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활동 중지로 전 세계 어디보다 심각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실업자가 늘어 50%에 이른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특히 청년층의 고통이 가중됐다.도대체 레바논은 어떤 나라이기에 2000년대 후반 평균 9.1%의 고성장을 이뤘고, 지금은 왜 이렇게 심하게 뒷걸음질을 치는 것일까. 레바논의 실체를 알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레바논은 중동에서도 독특한 나라다. 중동이라면 흔히 연상되는 사막도, 석유도 없다. 대신 축복 받은 기후와 인적 자원이 있다.레바논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 지역으로 겨울에 시원하고 비가 많으며, 여름은 덥고 습기 차다. 고지대 산악에는 겨울에 눈도 상당히 내린다. 산맥에 가로 막힌 북동 지역을 제외하고는 강수량이 풍부해 농업에 안성맞춤이다. 레바논은 구약성서에서 나올 정도로 유명한 목재 산지다. 2016년 조사에서 전 국토의 13.6%가 숲이며 여기에는 백향목(Cedar)으로도 불리는 삼나무가 풍족하게 자란다. 삼나무는 레바논의 국기에도 새겨질 정도로 이 나라를 상징한다. ━ 왕족국가 중동서 프랑스 업고 공화국으로 출범한 레바논 레바논은 작은 나라다. 면적이 경기도(1만171㎢)와 비슷한 1만452㎢로 섬나라를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 가장 작은 주권국가다. 이 작은 나라에 2018년 추산치로 689만 명이 거주한다. 영국 외교·영연방부 통계에 따르면 레바논 출신이나 그 후손으로서 해외에 거주하는 인구는 최대 14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브라질과 레바논 정부 자료에 따르면 그 중 580만 명에서 700만 명이 브라질에 산다. 레바논 국회 자료와 추정 등에 따르면 레바논의 해외 이주자는 아르헨티나에 120만~350만 명, 콜롬비아에 100만~340만 명, 베네수엘라에 34만~50만 명, 멕시코에 24만~50만 명 등 중남미에 집중됐다. 미국 인구 센서스 등에 따르면 미국에도 50만~90만 명이 거주한다. 호주에도 27만~35만 명이, 프랑스에도 25만~30만 명이 거주한다.프랑스와 레바논의 관계는 독특하다. 1920~45년 레바논을 위임 통치하면서 레바논의 탄생을 주도했다. 프랑스가 1920년 9월 1일 시리아에서 기독교도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별도로 분리하면서 비로소 레바논이 탄생했다. 레바논 주민들은 1926년 5월 23일 헌법을 제정하고 프랑스처럼 공화국을 건설하기로 했다. 영국이 후원하거나 일시 지배한 사우디아라비아에 알사우드 가문의 왕국이, 요르단과 이라크(나중에 바트당 쿠데타로 공화국이 됨)에 하심 가문의 왕국이 각각 들어선 것과 대조적이다. 레바논은 제2차 대전이 한창인 1943년 11월 22일 독립을 선언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10월 24일 프랑스는 위임통치를 공식적으로 끝냈다. 1946년 4월 17일에는 프랑스군이 완전 철수했다.프랑스는 그 뒤로도 레바논의 보호자로 자처하며 내부 혼란이 극심하면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필요한 경우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왔다. 레바논에는 프랑스 국적(대부분 이중국적)을 보유한 주민이 2만1500명이 있다. 프랑스는 전 세계를 11개 선거구로 나뉘어 해외거주 주민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을 선거구당 각 1명 선출하는데 레바논은 중앙·동부·남부 아프리카 및 중동의 48개국과 함께 제10 선거구를 형성한다. 2017년 선거에서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으로 모로코 출신으로 마크롱의 정당인 ‘레퓌블리크 앙 마르슈’ 소속의 아말 아멜리아 라크라피가 당선해 활동 중이다. 프랑스에는 레바논계 프랑스인이, 레바논에는 프랑스 국적자들이 다수 거주하면서 양국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셈이다. ━ 공용어 프랑스어로 유럽·중동 잇는 교역국으로 성장 프랑스와 레바논을 묶어주는 끈 중의 하나가 프랑스어다. 레바논 헌법 제11조는 ‘레바논의 공식 언어는 아랍어이다. 프랑스어도 사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레바논은 프랑스어를 모국어나 행정언어로 사용하는 국가들의 국제지구인 ‘프랑스어권 국제기구(OIF)’의 회원국이다. OIF의 2010년 조사에 따르면 2010년 레바논 국민의 20%가 프랑스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한다.레바논 주민의 약 40%는 프랑스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으며, 15%는 부분적으로 이해한다. 교육의 60%가 프랑스어로 이뤄지며 수학과 과학은 프랑스어로 가르치고 배운다. 레바논의 지폐에는 프랑스어가 적혀 있으며 주요 건물과 도로 표지판은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나란히 적힌다. 프랑스어를 알면 레바논에서 생활하고 사업하기에 지장이 없다. 국민의 20% 이상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레바논이 ‘동방의 스위스’로, 베이루트가 ‘중동의 파리’로 각각 불리는 것은 그만큼 자연과 도시가 아름답고 경제적으로 한때 풍요를 누렸다는 것 말고도 이런 이유가 있다. 이는 레바논의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레바논의 항구는 유럽과 중동을 잇는 교역 창구다. 아울러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모두 능통한 이중 언어 구사자가 많다는 점은 금융에도 이점으로 작용한다. 프랑스 수준의 합리적이고 경쟁력 있는 금융산업이 발달한 원동력이다. 레바논의 은행은 중동 산유국 자금이 모이는 집합소다. 이 자금은 레바논 경제를 움직이는 연료 역할을 한다. 레바논은 이렇게 중동과 유럽, 미국을 잇는 금융 허브가 됐다. 레바논은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지중해 해안을 중심으로 리조트를 건설해 관광국가로 거듭났다.사실 레바논은 오랫동안 중동의 경제 모범국가였다. 건국 초부터 시장경제와 개방경제를 채택해 교역국가로 자리 잡았다. 정부 간섭과 규제를 최소화하는 자유방임주의를 펼친 것도 주효했다. 무역과 금융, 관광이 경제를 이끌었다. 중동 산유국들의 레바논 투자가 이어졌다.2019년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따르면 레바논의 국내총생산(GDP)는 585억 달러로 세계 81위이며, 1인당 GDP는 명목금액 기준으로 9654달러로 67위에 이르다. 8957달러의 터키나 8796달러의 브라질보다 많다. 산유국을 제외하고 중동에선 풍요를 누리는 지역이다. ━ 정치균형 명분 삼아 4대 종파 권력 나눠 먹기로 경제 피폐 이런 레바논이 지금 삐걱거리고 있다. 특히 경제 사정이 심각하다. 지난해 10월 이후 레바논의 통화인 레바논 파운드의 가치는 80%가 하락했다. 레바논 정부는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170%에 이르는 국가부채를 안고 있으며, 상징적인 것이 잦은 단전이다. 전기공급이 불안해 만성적인 단전에 시달리고 있다. 단전은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불편이다.급기야 국민의 불만이 폭발해 2019년 9월부터 청년층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격화했다. 이들은 정치 지도자들의 부정부패와 무능, 그리고 무책임을 비난했다. 반정부 시위는 레바논 국기에도 그려진 나라의 상징 나무를 따서 ‘백향목(Cedar) 혁명’으로 불린다.반정부 시위는 올해 코로나19가 확대되는 와중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국민의 불만과 분노가 얼마가 큰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친시리아 국가로 분류됐던 레바논에서 반시리아 세력이 확대됐다. 최근 들어서는 전통적인 친시리아 세력인 시아파 조차 시리아에 등을 돌리기에 이른 것으로 분석된다.레바논 사태의 바탕에는 책임지지 않는 정치가 자리 잡고 있다. 레바논은 1943년 독립하면서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이슬람 신자), 그리고 드루즈 신자가 모여 권력분점을 규정한 ‘1943년 국민협약’을 맺었다. 다종교 국가 내에서 정치적 안정과 균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종교별로 권력을 나눈 것이다.대통령과 레바논 군대의 최고사령관은 항상 마론파 기독교도다. 총리는 항상 수니파 무슬림이다. 국회의장은 시아파 무슬림이다. 국회부의장과 부총리는 항상 그리스 정교도다. 군대의 합참의장은 항상 드루즈교도다. 국회에서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비율은 항상 6대 5로 한다. 이는 1932년 인구조사 결과 기독교도가 51%, 무슬림이 49%로 나타난 것으로 바탕으로 했다.하지만 그 뒤 인구비중이 변화해 다수를 차지하게 된 무슬림의 정치적 불만이 증가하게 됐다, 결국 마론파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충돌로 1975년 비극적인 레바논 내전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거점을 마련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무장조직과 충돌하면서 1982년 레바논을 침공했다. 1985년에는 남부 지역을 점령해 2000년 5월 철수 때까지 머물렀다. 시리아도 1976년 레바논에 군대를 보내 2005년까지 머물렀다.레바논 내전은 12만~15만 명의 사망자를 낸 채 1990년 내부 협상을 통해 종결됐다. 1975년 시작돼 15년 가까이 계속되던 레바논 내전은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이프에서 이뤄진 각 정파 간 협상을 통해 ‘타이프 협정’을 맺으면서 종식됐다. 협정의 내용은 권력분점 형태의 변화와 특정 정파를 지원하는 외국 군대의 철수였다.타이프 협정 결과 기독교도와 무슬림은 국회에서 종전의 55대 45의 분포를 50대 50으로 바꾸었으며, 무슬림이 맡는 총리의 권한을 강화했다. 레바논에서 국내외 모든 무장세력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철군, 또는 추방했다. 다만 이란의 지원을 맡는 이슬람 시아파 무장 정파 헤즈볼라는 이를 거부하고 세력을 키웠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레바논에서 추방됐다. 이스라엘군은 2000년, 시리아군은 2005년 4월까지 각각 철수했다. ━ 정치 엘리트들의 특권화가 부정부패·무능·무책임 초래 하지만 그 뒤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정치적으로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등 요직을 차지한 정치 엘리트들이 특권 세력화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대통령과 의회가 있고 선거가 치러졌지만, 종교별 세력 분포를 규정한 1943년 국민협약과 1989년 타이프 협정 때문에 국민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선거로 교체되거나 견제되지 않는 특권 세력이 레바논의 지도층으로 고착된 셈이다. 견제를 받지 않으니 이들은 특권화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무능·무책임이 판을 쳤다. 견제 받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의 말로다. 이는 이번 폭발 사고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비료와 폭발물 원료로 강한 폭발성을 지닌 질산암모늄이 2700t 이상 압류돼 항구에 6년 이상 보관되고 그 위험성이 지적되면서도 아무도 처리하지 않은 것만큼 분명한 증거가 없다. 이런 무책임은 결국 비극적인 사고의 원인이 됐다.주목할 점은 6일 베이루트에 도착해 사고 현장을 둘러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이다. 베이루트 폭발사고 뒤 현장을 찾은 첫 외국 지도자인 마크롱은 폭발 현장에 파인 폭 140m의 웅덩이와 잔해로 어지러운 항구를 불러본 뒤 주변 지역으로 옮겼다. 그를 발견한 현지 주민들은 마크롱 앞에서 “혁명”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레바논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분노를 표현했다. 마크롱은 “나는 정권을 인정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다”라며 “프랑스의 지원은 결코 ‘부패한 자의 손’에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마크롱은 “레바논은 외롭지 않다”며 지원을 약속하면서도 “긴급하게 개혁하지 않으면 계속 가라앉을 것”이라고 정권에 변화를 촉구했다. 수많은 사람이 숨지거나 다치고 수십억 달러로 추산되는 사고 현장에서 외국 국가원수가 내정 간섭으로 비칠 수 있는 개혁을 촉구한 것은 이례적이다.베이루트 폭발 사고 직후 러시아는 즉시 긴급구조팀과 수색견, 구호물자를 레바논에 보냈다. 독일, 네덜란드, 폴란드, 체코 등이 뒤를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바논이 자력으로 상황을 수습하고 복구 작업을 할 능력이 없다는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프랑스2 방송은 유엔에 도움을 요청하고 국제 사회가 사태 수습에 나서는 방식을 둘러싸고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레바논의 비극은 결국 정치가 마비되고 고인물이 된 권력 분점에서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채인택 -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8.09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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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코로나를 통해 본 미국의 이데올로기] 전쟁보다 더 많은 국민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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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좌·우 정쟁 촉발한 코로나… 마스크 뒤엔 ‘백인 우월주의’ 도사려 7월 말 미국에선 우울한 소식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한결같이 미국을 출렁거리게 하기에 충분한 메가톤급 악재였다. 7월 30일에는 미국 상무부가 미국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32.9%로 73년 만에 최악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GDP가 분기에 32.9%가 감소한 셈이다. 지난 1분기 -5%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폭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이 미국 경제에 주는 타격이 본격 나타난 셈이다. 그동안 실업률이 조금씩 나아지자 자신을 ‘일자리 대통령’이라고 자랑하던 트럼프는 경제에 관한 한 당분간 고개를 들 수 없게 됐다. 이대로 가다가는 3분기에도 회복을 장담할 수 없다.경제를 회복세로 돌리려면 방역에 따른 이동 제한이나 가게나 공장의 영업과 가동 제한을 추가로 풀어야 한다. 문제는 그럴 경우 방역이 위험해진다는 점이다. 미국의 딜레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3일로 예정된 선거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트럼프가 7월 30일 자신의 트윗에 선거 연기를 시사하는 내용을 올린 이유다. 하지만 미국의 선거 일정은 헌법에 정해져 있다. 따라서 의회의 특별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합당한 이유를 대고 논리를 제시해야 하며 의회와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트럼프가 제아무리 대통령 중심제 아래에서 막강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고, 소속 정당인 공화당이 상원을 장악하고 있어도 선거 일정을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공화당도 트럼프에 정치적인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트럼프로선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아볼 심정으로 무리한 발언을 한 셈이다.트럼프를 이런 상황으로 몰고 간 가장 큰 원인은 코로나19의 대대적인 확산이다. 미국은 7월 이후 사실상 제2의 코로나 충격을 맞고 있다. 조금씩 완만해져가던 확진자 발생 곡선이 다시 가파르게 상승하는 중이다. 수치를 살펴보면 기겁할 정도다. 미국은 7월 26일 코로나19 누적 사망자가 한국시간 7월 30일 기준 15만3848명에 이르렀다. 세계 최다 수준이다. 전 세계 사망자 67만943명의 22.93%에 이른다. 전 세계 코로나 사망자 4~5명 중 1명이 미국인인 셈이다. 미국 코로나19 사망자 수는 그 다음으로 많은 브라질(9만188명)과 영국(4만5961명)을 합친 것보다 많다. 단일 질병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례는 미국은 물론 세계 역사에서도 드물다.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한국 시간 7월 30일 기준 456만8375명으로 전 세계 1721만7829명의 26.53%를 차지한다. 미국 인구는 3억3110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 75억9400만 명의 4.36%를 차지하는 것과 비교하면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에 살면 코로나19 확진자가 될 가능성이 다른 나라에서보다 6배 이상인 셈이다.미국에서는 1월 20일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나온 이래 3월 19일 1만명에 이르렀으며 3월 27일 10만명을 넘었다. 그 뒤 4월 10일 50만명을 초과했으며 4월 27일 100만명을 넘어섰다. 6월 7일 200만명을, 7월 6일 300만명을 각각 넘었으며 그 다음 증가 속도가 더욱 빨라져 7월 21일 400만명을, 7월 28일 450만명에 이르렀다. 450만명에 이른 속도도 빠르지만 현재도 많은 확진자가 계속 나오고 있어 언제 진정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인의 건강과 목숨만큼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인 생명도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 미국 코로나19 확진자 증가 갈수록 빨라져 15만이라는 숫자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글로벌 패권 국가가 된 뒤에 치렀던 모든 전쟁에서 발생한 것보다 더 많은 인명손실이다. 미국 보훈부 통계와 학계 연구 등을 종합하면 미국은 2차대전 뒤 6·25전쟁(1950~53년)에서 3만6516명, 베트남전쟁(1955~75년, 미군의 본격 참전은 1964년 이후)에서 5만8209명의 전사자를 각각 냈다. 이라크전쟁(2003~2011년)에선 4576명, 2001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 중인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선 2200명 이상의 군인이 숨졌다. 이를 다 합쳐도 10만1500명 정도다. 미국의 현재 코로나19 사망자 15만 명은 이보다 1.5배 정도 많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최고사령관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밀리고 있는 셈이다.지금까지의 코로나19 사망자를 미국이 1776년 건국 이래 치러왔던 전쟁에서의 군인 사망자와 비교하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남북전쟁(약 65만 5000명)과 제2차 세계대전(40만5399명)에 이어 셋째로 큰 규모다. 11만6516명의 미군이 전사한 제1차 세계대전보다 많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국 정부가 코로나19 대응에서 극적인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조만간 2차대전 희생자 숫자를 넘기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미국은 1775~1785년 영국과 미국독립 전쟁을 치른 이래 2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전쟁을 12차례 치렀다.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전쟁이 남북전쟁(1861~1865년)으로 북군 36만여 명, 남군 29만여 명에 전체 약 65만5000명이 숨졌다. 그 다음으로 2차대전(1939~1945년, 미국은 41년 참전) 40만5399명,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 미국은 17년 참전), 베트남 전쟁, 6·25 전쟁, 미국독립 전쟁 약 2만5000명, 1812년 전쟁(미국-영국 전쟁, 1812~15년) 약 1만5000명, 미국-멕시코전쟁(1846~48년) 1만3283명의 전쟁에서 1만 명 이상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 외 이라크 전쟁 4576명, 필리핀-미국 전쟁(1899~1902년) 4196명, 스페인-미국 전쟁(1898년) 2246명, 아프가니스탄 전쟁 2216명 등이 숨졌다. ━ 전쟁 후유증 미국 선거에 영향 정권 바뀌어 코로나19 피해의 규모와 속도는 미국이 치른 어느 전쟁보다 크고 빠르다. 하루 평균 사망자 숫자가 이를 잘 말해준다. 통계 사이트인 스테이티스타에 따르면 미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7월 28일까지 하루 평균 사망자는 923.2명이다. 이는 미국이 건국 이래 치른 어느 전쟁의 하루 평균 전사자보다 많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미국의 2019년 하루 평균 사망자(모든 사망원인 포함)는 7969.7명이다. 2019~2020년 겨울 동안 유행했던 바이러스 질환인 인플루엔자에 의한 하루 평균 사망자는 331.6명으로 코로나19의 35.9% 정도다. 미국이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얼마나 큰 희생자를 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이 치렀던 전쟁에서 하루 평균 사망자는 남북전쟁이 449명으로 가장 많고 2차대전 297명, 1차대전 200명, 6·25전쟁 30명, 멕시코-미국 전쟁 29명, 1812년 전쟁 15명, 베트남전 11명, 미국독립 전쟁 11명이 뒤를 잇는다.주목할 점은 미국이 큰 전쟁을 치른 뒤에는 막대한 전비 지출에 따른 경제적 부담과 전사자 발생에 따른 반전 분위기가 확산하면서 선거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의 미국 대선에선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대선에선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백악관 주인의 소속 정당이 각각 바뀌었다.하나씩 살펴보자. 2차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전쟁을 치렀던 오성 장군 출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1952년 대선에서 6·25전쟁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했으며 선거 직후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대선에서 39개 주에서 승리해 9개 주를 차지한 민주당의 애들레이 스티븐슨 후보를 꺾었다. 선거인단 확보에서는 442대 89로 그야말로 대승을 거뒀다. 그는 공약대로 1953년 7월 27일 공산군과 정전협정을 맺고 6·25전쟁을 끝냈다.베트남전쟁은 1973년 1월 27일 남·북 베트남과 미국이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종전의 길에 들어갔다. 미군이 떠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시달리다 몰락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재 호찌민)의 대통령궁에 진입해 점령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파리평화협정을 맺을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72년 선거에서 재선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었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리자 1974년 8월 9일 사임했다. 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포드는 1976년 11월 대선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전체 득표율 48.0% 대 50.1%, 확보 선거인단 240대 297로 석패했다. 확보 주는 27개로 23개에 워싱턴DC를 얻은 카터보다 오히려 많았다.심지어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1990~91년 걸프전에서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이라크 정권을 상대로 미군 전사자를 294명으로 최소화하면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재선에는 실패했다. 유권자들의 표심은 막대한 전비를 쏟은 걸프전의 승리가 아닌 대통령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경제난이 좌우했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2차대전 뒤로 많은 인적·물적 희생을 치른 전쟁 중이나 뒤에 진행된 선거에선 묘하게도 정권이 교체되는 전통을 남긴 셈이다. ━ 트럼프의 지지층 결집 배경엔 대안 우파 포진 그렇다면 코로나19와의 전쟁이라는 바이러스 전쟁을 치른 미군 최고사령관 트럼프 대통령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결과만 보면 트럼프는 코로나19에 대한 방역 실패와 이로 인한 경제난 해결에서 보인 무능, 그리고 무리한 대외정책에 리더십 난조까지 겹쳐 오는 11월의 대선에서 불리한 상태다. 현재 그는 마스크와 같은 코로나 관련 사안을 정치화해서 지지층을 결집해 전세를 뒤집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트럼프 자신도 오랫동안 쓰지 않고 버티다 최근 들어서야 드물게 쓴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의 우파는 마스크를 정쟁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우파는 미국 곳곳에서 격리를 해제하고 영업과 조업을 재개하며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다. 때로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외치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 앞에서 마스크 착용을 금지하지 말라는 대항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마스크 반대는 미국 우파를 상징하는 시위이자 행동 지침이 되고 있다.심지어 미국 남부 조지아 주와 이 주에 있는 애틀랜타 시는 마스크 착용을 둘러싸고 뜨거운 권한 다툼까지 벌이고 있다. 애틀랜타 시의 민주당 소속 케이샤 랜스 바텀스 시장이 7월 7일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는 행정 명령을 내린 것이 계기다. 바텀스 시장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벌금형은 물론 징역형까지 내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의 러닝메이트 물망에 오르고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민주당의 유망주 바텀스 시장이 마스크를 의무화하자 애틀랜타가 포함된 조지아 주의 공화당 소속 브라이언 캠프 주지사는 7월 16일 바텀스 시장과 이를 승인한 시의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캠프 주지사는 “이러한 강제 조치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강력한 마스크 의무화는 인간의 자율 의지를 해치는 팬더믹 정치”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조지아 주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하지 않고 권고만 하는 행정명령에 7월 15일 서명했다. 애틀랜타 시장과 조지아 주지사가 마스크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서 방역 주도권과 지방 정부 권한을 놓고 열띤 공방을 벌이는 셈이다. 방역이 이데올로기가 되고 정치화하는 ‘위험한’ 현장이다. 방역 필수품인 마스크 착용이 미국에서 정치 아이템이 된 것이다. ━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방역의 방해물로 작용 그 배경에는 미국 우파들의 자유에 대한 고집스러운 집착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우파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집단 모임을 자제하며 밀집 장소에는 가지 말라는 의학적·과학적 방역 지침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마스크 착용이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사회적 의무나 책임으로 보기는커녕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으로 여기기 일쑤다. 마스크를 쓰는 행동에 대놓고 반대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항의 시위까지 벌인다. 마스크 착용과 거리 두기를 무시한 집회다.이들 중 극렬한 생각과 행동을 일삼는 일부는 미국 언론에서 백인우월주의자·백인지상주의자로 부르는 ‘대안 우파(alt-right)’로 분류된다. 대안 우파는 합리적이고 온정적인 주류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소수민족·여성·동성애자장애인·이민자·무슬림에 대한 차별·혐오·폭력을 조장하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를 앞세운다. 대안 우파는 민주당을 비롯한 미국 좌파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며 다수인 백인을 차별하고 소수민족을 우대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방역 당국의 격리나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지침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조치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방역 조치를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의 일부로 여긴다.대안 우파는 ‘억압받는’ 백인이 원래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뒤로 밀린 백인들이 다시 미국을 이끌어야 한다며 ‘백인 내셔널리즘’을 부르짖는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트럼프의 선거 구호는 이런 대안 우파들의 입맛에 딱 맞았을 것이다. 트럼프가 내세운 ‘미국 우선(America First)’이라는 선거 구호도 대안우파에겐 ‘백인 우선’으로 들렸을 가능성이 크다.문제는 백인우월주의가 인종차별·인종분리와 외국인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이민자와 무슬림에게도 화살을 겨눈다.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실업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반이민주의’다.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무슬림은 이민은 물론 입국도 막아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왔다. 이른바 ‘자국 문화 보호주의’다. 무슬림 전체를 잠재적 테러범으로 보고 대놓고 모욕적인 발언을 하기 일쑤다.주목할 점은 대안 우파가 동맹국의 해외 주둔과 국제문제 개입에 반대하는 ‘고립주의’와 외국 상품으로부터 국내 시장을 지키는 ‘보호무역주의’도 내세운다는 점이다. 이는 고스란히 트럼프의 지난 선거 공약이 됐다. 집권 뒤에 동맹인 한국과 독일, 그리고 주요 교역 대상국인 중국을 압박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는 11월 3일의 미국 대선과 현재의 미국 정치 상황이 국제 질서는 물론 한국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유다. 8월과 11월 사이에 트럼프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 마스크는 미국 좌우 정쟁의 상징이 됐다. 방역을 위해 써야 할 마스크가 미국에선 대선을 좌우할 정치적 투쟁의 도구가 됐다는 점은 미국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코로나19라는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8.02 15:05

9분 소요
[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미국의 중국 총영사관 폐쇄의 내막] 미국을 해킹하는 중국

전문가 칼럼

지식재산·개인정보 빼앗아 공산당 사회주의 키우려는 야욕 미국이 7월 21일 텍사스 주 휴스턴 주재 중국 총영사관을 72시간 안에 폐쇄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파장과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외교 관계를 맺은 1979년 이후 공관 폐쇄 명령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그동안 미·중 간에 무역분쟁과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다툼, 그리고 중국의 해킹과 개인정보 유출, 대선 개입 시도 등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미국이 외교 공관 폐쇄라는 초강경수를 펼칠 것으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는 중국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겠지만, 미국 국내와 전 세계에 상당한 파장을 미칠 수밖에 없다.중국은 미국 워싱턴DC의 대사관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일리노이주 시카고, 뉴욕주 뉴욕에 총영사관을 각각 두고 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선 비자 사무소를 운영한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는 거대한 차이나타운이 있으며 중국계 미국인이 몰려 산다. 미국은 중국에 베이징(北京)의 대사관과 함께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주, 성(省)급 행정구인 상하이(上海) 직할시,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각각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홍콩 특별자치지구에도 홍콩·마카오 총영사관을 운영하고 있다.그렇다면 미국은 왜 휴스턴의 중국 총영사관에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전격적으로 폐쇄를 요구 했을까. 그것도 불과 72시간의 짧은 시간 안에 폐쇄하라고 했을까. 미국 국무부의 모건 오테이거스 대변인은 휴스턴 총영사관 폐쇄 요구의 이유에 대해 “미국인의 지식재산권과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테이거스 대변인은 “각국은 빈 협약에 따라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의무가 있으며 미국은 중국이 우리 주권을 침해하고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중국이 미국의 지식재산권과 개인정보, 그리고 미국 내정과 관련한 모종의 행동을 했으며 이를 응징하기 위해 휴스턴 총영사관 폐쇄를 요구했다는 뉘앙스다. 이것이 미국 국무부가 밝힌 공식 폐쇄 이유다. ━ 중국 정부 업은 해커들의 미국 정보 탈취 사건 잇따라 이는 미국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던 문제다. 이와 관련, 크리스토퍼 레이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7월 7일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 행사에서 중국이 해킹을 통해 개인정보를 유출했으며, 미국 대선에 개입하려 한다고 경고했다고 AFP 통신 등이 보도했다. 레이 국장은 “해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중국의 악설 활동이 우리를 24시간 표적으로 삼고 있다”며 “이는 연중 상시 위협이지만 분명히 선거에 영향을 끼친다”며 중국이 해킹 등을 통해 미국 대선에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레이 국장은 “중국은 현재 FBI가 담당하고 있는 방첩 사건 5000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017년 중국 해커들이 미국 신용평가기관 에퀴팩스의 데이터를 유출한 사건을 지적하며 “미국의 성인이라면 중국이 당신의 개인정보를 훔쳤을 가능성이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보다 크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최고 수사책임자가 중국이 미국의 내정인 대선에 개입할 가능성과 미국 상대의 해킹과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게다가 미국 법무부가 해킹 혐의로 중국인 2명을 기소했다고 뉴욕타임스 등이 7월 21일 보도한 것도 이와 연관이 커 보인다. 이들 중국인은 최근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 관련 정보 해킹을 시도하고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 정부의 협조 아래 해킹을 통해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기업체 등의 영업 비밀을 탈취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이들은 중국 국가안전부와 협력하며 미국과 일본 등의 방산업체, 무선·레이저 업체, 에너지 기업 등의 첨단기술은 물론, 홍콩의 민주화 운동가나 반체제 인사와 관련한 정보도 해킹해 중국에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12개국, 42개 이상 기관·기업 전산망을 해킹했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보도했다. 방송은 미국이 지난해 10월에도 중국 정보요원과 해커를 기소했다고 지적했다. ━ 거액으로 인재 영입해 미국에 대적할 기술·재능 흡수 중국이 미국의 과학기술 분야의 지식재산권을 돈을 주고 구입하는 대신 ‘해킹을 통해’ ‘공짜로’ ‘몰래’ 가져가고 기업의 경영과 노하우와 관련한 정보를 탈취해갔다는 이야기다. 이 방송에 따르면 레이 FBI 국장은 “중국 정부가 배후인 경제 스파이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며 “공정한 경쟁은 환영하지만 해킹이나 절도, 거짓말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한 어조로 경고했다. 이번 휴스턴 총영사관 폐쇄 조치에 대해 국무부가 배경이라고 설명한 지식재산권·개인정보를 보호, 그리고 내정과 관련한 모종의 혐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사건과 발언이다.미국의 인터넷과 인공지능(AI) 전략가인 에이미 웹이 지난해 출간한 에 따르면 중국은 오래 전부터 미국의 과학기술과 기업의 노하우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확보해 자국의 발전에 활용하려고 시도해왔다. 웹은 대표적인 사례로 중국 중앙정부가 2008년 가동을 시작한 ‘천인계획(千人計劃)’이라는 이름의 인재 영입 프로그램을 들었다. 과학기술·혁신·기업 분야의 해외 거주 중국인과 외국인 인재를 중국에 영입하는 ‘재능 파이프라인’ 프로그램이다.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연구자와 경력자를 중국으로 데려와 지식재산권과 재능을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관련 기업이나 연구소, 대학에 지식재산권료를 지급하지 않고 인재를 직접 데려와서 지식재산을 확보하겠다는 ‘지식재산권 바이패스’ 전략이다. 중국은 “중국의 3대 발명인 종이·나침반·화약에 대해 서구가 저작권료를 준 적이 없다”는 황당한 이유를 내세우며 서구의 저작권료 개념에 대해 알러지 반응을 보여왔다. 영입 대상자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교육·훈련을 받고 미국의 대학과 기업에서 일하던 인물이다.이들은 중국이 전략적으로 키우는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 등 대기업에서 직간접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들 3대 기업은 중국에서 알파벳 머릿글자를 따서 ‘BAT’로 불린다. 바이두는 검색엔진, 알리바바는 온라인 상거래, 텐센트는 인터넷·미디어로 각각 시작했지만 지금은 이를 넘어 인공지능(AI) 분야의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전략적으로 BAT를 키워왔다. 미국의 구글과 분야가 상당히 겹치는 바이두, 아마존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알리바바, 페이스북과 중복되는 텐센트가 미국에서 금지되고 있는 이유로 짐작된다.웹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기술과 노하우를 보유한 미국의 ‘인재’들에게 ‘황금 티켓’을 제안한다. 개인 수입과 연구비 부문에서 눈이 번쩍 띌 정도의 금전적 인센티브를 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 규제나 행정적인 압박 없는 자유로운 R&D 환경도 함께 제공한다. 중국 정부는 통 크게 이들에게 100만 위안(약 1억7000만원)의 사이닝 보너스(signing bonus), 즉 계약서에 서명하는 즉시 선지급하는 보너스를 지급해왔다. 최초 개인연구 예산으로 300만~500만 위안(약 51억원~85억원)을 지급하고 여기에 더해 주택비와 자녀 교육비 지원, 식대 보조, 이주 보상금, 배우자에 새 직장 알선, 심지어 가족 방문 여행경비 전액까지 지원 받는다. ━ 시진핑, 전투기념관 찾아 대미항전(對美抗戰) 결의 이에 대한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반응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시 주석은 22일 둥베이(東北) 지방의 지린(吉林)성 쓰핑(四平)시의 쓰핑(四平) 전투기념관을 방문했다고 인민일보가 23일 보도했다. 쓰핑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중국의 지배권을 놓고 벌였던 국공내전(1945~1949년) 당시 1946~1948년에 걸쳐 4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시 주석은 이날 휴스턴 총영사관 폐쇄나 미·중 무역전쟁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대신 중국 공산당의 투쟁사를 언급하며 항전 결의를 다졌다. 시 주석은 “난창(南昌) 봉기에서 징강산(井岡山) 투쟁까지, 그리고 힘들고 어려웠던 장정(長征)과 항일(抗日) 전쟁에서 다시 해방(解放) 전쟁과 항미원조(抗美援朝)까지 열사들의 피로 혁명의 성공을 이뤄냈다”며 “신(新)중국을 어렵게 얻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창업은 어렵지만 수성은 더 어렵다”며 “중국 공산당이 만든 사회주의의 위대한 사업을 지키고 대대손손 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이날 시 주석이 거론한 전쟁들은 중국공산당이 세력을 확보한 일련의 사건들이다. 난창봉기는 저우언라이(주은래) 공산주의자들이 1927년 8월 1일 중국 남부 장시(江西)성 난창에서 국민당을 공격한 무장봉기로 중국인민해방군은 이날을 창설 기념일로 친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창당한 중국 공산당은 소련 주도의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의 지시로 1923년 국민당과 제1차 국공 합작을 했지만 갈등을 계속하다 이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징강산은 장시성과 후난(湖南)성 경계에 있는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봉기에 실패한 중국공산당이 은거하며 게릴라전을 벌인 근거지로 마오쩌둥(毛澤東)이 1931년 이곳의 루이진((瑞金)에서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아 중화소비에트공화국(루이진 소비에트라고도 함)을 세웠다. 장정은 루이진 소비에트가 국민당의 토벌을 견디지 못하고 1934년 10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370일에 걸쳐 병력과 주민을 이끌고 루이진에서 중국 서북쪽 오지인 산시(陝西)성 옌안(延安)까지 약 9600㎞를 도보로 이동한 사건이다. 장정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항일전쟁은 일반적으로 1931~32년의 만주사변과 1937~45년의 중일전쟁을 의미하는데, 중국공산당은 중일전쟁 발발 뒤 제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이 토벌을 중지한 뒤에 비로소 참전했으며 주로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해방전쟁은 공산당이 국민당을 공격해 대만으로 밀어낸 국공내전을 가리킨다. 항미원조는 6·25전쟁의 중국인민지원군 참전을 가리킨다. 신중국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킨다. ━ 과학기술로 사회주의 세계 꿈꾸는 중국 공산당의 야심 시 주석이 휴스턴 총영사관 폐쇄 직후 쓰핑(四平) 전투기념관을 찾아 중국공산당의 피의 투쟁사를 회고한 것은 미·중 대결 국면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내부 결속을 다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사실 중국이나 중국공산당에 위기가 닥치면 과거 힘든 시절을 떠올리며 정신력으로 극복하자고 강조하는 것은 시 주석이 흔히 사용해온 방식이다. 이런 업적이 공산당과 사회주의 시스템의 업적이라고 강조하며 단결을 외쳤다. 시 주석은 2018년 초 국영통신사인 신화통신에 “우리는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고 이를 악물며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수소폭탄의 두 핵폭탄과 인공위성)을 개발했다”고 회상했다. 양탄일성은 모두 마오쩌둥 시절 개발한 군사용 무기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중국은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와 함께 핵보유국으로 올라서게 됐다.시 주석은 양탄일성 개발과 관련해 “이는 우리가 사회주의 시스템을 최대한 유효 적절하게 활용했기 때문이며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노력을 집중했다”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다음 단계는 과학기술을 이용해 같은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우리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자력갱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 주석과 중국 공산당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는 발언이다. 서구가 주도하는 민주주의, 민간 중심의 시장경제, 지적재산권에 대한 존중과 비용 지불 등의 방식으로는 중국이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를 누를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중국이 패권국가로 올라서려면 이런 것을 무시하고 중국만의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다.CNN은 이와 관련해 미 의회 의원과 전직 관료, 전문가들은 미국이 중국의 사이버 공격을 통한 정보 수집, 산업 스파이 행위, 홍콩과 신장위구르 지역의 인권 침해, 남중국해에서의 공격적 세력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에 강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우선 휴스턴 총영사관 한곳만 폐쇄 대상으로 잡은 것은 충격의 강도를 어느 정도 조절하면서 강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이라는 관측이 있다고 전했다.결국 미국의 휴스턴 중국총영사관 폐쇄는 미·중 무역전쟁의 새로운 시작으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중국의 의도를 읽었고, 중국은 미국의 공세 앞에 노출됐다. 중국은 미국의 조치가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가 유리한 국면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는 내용의 선전전에 들어갔다.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무리한 조치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안간힘이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 선거 없이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중국이 합리적이라는 억지에 다름 아니다. 그동안 중국의 해킹과 지식재산권 탈취에 쌓이고 쌓였던 미국의 불만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고 있다. 미국이 이를 거론함으로써 미·중 무역전쟁도 거센 풍랑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중국이 미국 여객기나 농산물을 좀 더 사주는 것으로 풀릴 수 있는 단계는 이미 지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다음 단계는 무엇일지 전 세계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미·중 충돌은 두 나라에서 끝나지 않고 전 세계의 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7.26 15:20

8분 소요
[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미국 페미니즘 폴리틱스(Feminism Politics)] 박 시장이 촉발한 페미니즘의 본질

전문가 칼럼

국민이 인식하는 평등과 정치인이 생각하는 평등의 간극이 사회갈등의 원인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사건의 후폭풍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피해자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2차 가해가 가해지고 있다. 진상 규명보다 의혹 덮기에 바쁜 모습도 보인다. 사태가 정쟁으로 확대되는 모습까지 모인다.문제의 본질은 여성 권리에 대한 국민의 인식 발달을 정치권이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여권주의)은 이미 한국은 물론 국제 사회 전반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상당수 정치·경제·사회 지도자들이 아직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숨어있는 이런 인식이 박 시장 사건을 계기로 수면에 등장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국민이 인식하는 페미니즘과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 사이의 간극이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는 셈이다.페미니즘은 정치제도, 문화관습, 사회동향에 존재하는 성별에 따른 차별을 밝혀내고 성차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목적의 이념과 운동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이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전반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 사회 변화 이뤘지만 권리 향상은 못 이뤄 주목할 점은 페미니즘은 인간존중과 권리확대를 추구하는 시민혁명 속에서 생겼으며 19~20세기의 여성참정운동으로 시작해 사회관습이나 인식에 자리 잡은 성차별과 싸우는 사회운동으로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의 이런 기원은 자연스럽게 지평의 확장으로 이어졌다.사회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리버럴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래디컬 페미니즘, 생태주의적 패미니즘 등으로 다양한 흐름을 이뤘다. 그러면서 인종, 사회 계급, 국적, 종교, 연령에 성적 지향까지 폭넓은 문화적·사회적 요인에서 차별금지와 평등을 지향하는 광범위한 사회운동으로 이어졌다. ‘확대된 페미니즘’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모든 중류의 억압이나 차별에 맞서는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이런 과정을 통해 페미니즘은 학문이나 사회적 변화의 영역을 넘어서서 정치의 영역으로 이어졌다. 영국 정치학자이자 교과서 저술가인 앤드루 헤이우드의 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이미 정치적 용어다. 역사적으로 여성 참정권 확보운동으로 시작됐지만 갈수록 영역이 확대도 피임약·낙태 합법화, 공적 부문에서 엘리트 여성의 참여 확대, 직장내 젠더 관련 권력관계의 평등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변화를 이끌어왔다.여기서 생각할 점이 정치는 인간과 권력과의 관계라는 사실이다. 페미니즘 정치는 의회와 정당에서 벌어지는 정치는 물론 사회 전반의 권력 관계에 고루 스며들었다. 사회와 직장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변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과 공직자는 일부 직종을 여성에 맡기거나 여성이 맡아야 좋다는 기대착오적인 인식으로 대응해왔다. 여성 비서에게 속옷 정리나 마라톤 동행, 혈압 측정 등 개인 수발을 들게 하는 것이 뒤늦게 문제가 된 이유다.대한민국 사회의 역동적인 발전에서 여성 권리의 자각을 지도자들이 과소평가하거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이라는 정치적 성과를 거뒀다. 이는 같은 해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노동조합 활동의 정착이라는 사회적 변화라는 변혁을 이끌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자각과 사회적 권리 확대는 정치적 변화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촛불혁명은 거대 권력도 시민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정치권력의 교체를 가져왔다. 이는 여성의 정치적 자각과 사회적 권리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남녀 할 것 없이 정치적 변혁에 힘을 보탰다. 그럼에도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발언권은 이에 비례해 신장하지 못했다. 여성의 인식이나 자각과 현실 사회 사이에 괴리가 생긴 셈이다. 이 간극이 불만을 불러왔다.페미니즘이 역사적으로 두 차례의 물결로 이뤄졌다는 점을 새삼 떠올릴 필요가 있다. 1차 물결은 동등한 참정권 확보였고, 2차 물결은 사회 전반에 걸친 양성 평등의 확립이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으며 대한민국은 1948년 헌법을 제정하면서 성차별 없이 모든 국민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여성권리를 확대하는 사회운동은 겉과 속이 달랐다. 수많은 남성 정치인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지만 이는 이미지 정치에 이용되는 경향이 컸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양성 평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거나 구체적인 권리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여성들의 인식도 변했는데 민주화를 이끈 세력조차 이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셈이다. ━ 인종 문제 안에 여성차별 이슈 담겨 있어 페미니즘이 정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미국을 보면 잘 드러난다. 페미니즘은 미국의 2020년 대통령 선거 지형에도 이미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겉보기엔 인종차별 문제에서 촉발한 인종문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확대된 페미니즘’의 작동으로 볼 수 있다. 잠시 사태를 살펴보자. 5월 25일 미국 중서부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사태가 발생했다. 흑백 인종차별에서 시작한 운동은 여성·동성애자·이민자·빈민층 등 다양한 계층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차별금지와 평등을 주장하는 시위가 인종을 넘어 젠더, 사회계층, 성적 지향 등 다양한 부분에서의 평등 운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셈이다. 여성을 배려의 대상으로나 여기는 정도로는 전근대적이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당당한 세계의 절반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인 유리천정 깨기를 통해 시대를 이끌어갈 기회를 함께 마련하는 태도가 필요하다.이는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민주당은 조 바이든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여성 후보를 내세울 예정이다. 유세과정에서도 이를 밝혔다. 바이든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그가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인물은 미국의 첫 여성 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바이든은 뿐만 아니라 1942년생으로 올해 78세다. 만일 올해 11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해 내년에 취임하면 임기 중 80세를 넘긴다. 차기 대선에 나올 가능성이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부통령을 맡았던 여성이 차기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임기 중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11월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다면 단순한 민주당의 승리를 넘어 페미니즘 정치의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여성 부통령, 유색인종 부통령, 유색인종 여성 부통령이 탄생하는 것은 물론 다음 선거에서 그런 대통령의 탄생을 기대할 수도 있다.실제로 이번에 거론되는 민주당 부통령 예비 후보군을 살펴보면 미국 정치가 그동안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서 유색인종·여성 정치인·지도자를 길러왔는지를 알 수 있다. CNN 방송은 6월 26일 카말라 해리스(56) 연방상원의원(캘리포니아), 케이샤 랜스 바텀스(50) 애틀란타 시장(조지아), 발 데밍스(63) 연방하원의원(플로리다), 엘리자베스 워런(71) 연방상원의원(매사추세츠) 등을 유력 후보로 거론했다. AP통신은 미셸 루한 그리샴(61) 뉴멕시코 주지사와 수전 라이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유력 후보로 더했다. ━ 다양한 인종의 여성 리더들 미국사회 포진 그리샴 지사는 뉴멕시코에서 12대를 살아온 히스패닉(또는 라티노) 집안 출신이다. 그는 히스패닉계표를 모을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다. 주목할 점은 히스패닉의 정치적 가치다. 히스패닉은 미국 독립 이전 멕시코 땅이었다가 나중에 미국 영토가 된 캘리포니아·뉴멕시코·텍사스 등에서 원래 거주하던 스페인 이민이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중남미계를 전반적으로 가리킨다. 미국에서 히스패닉 인구는 흑인보다 더 많다. 미국의 인종별 분포를 보면 백인 76.5%에 흑인 13.4%, 아시아계 5.9%의 분포다. 히스패닉은 인종은 아니지만 강력한 정체성을 가진 별개의 인구 집단이자 정치적인 세력으로 미국 인구의 18.35%를 차지한다. 흑인보다 5%포인트 이상 많다. 히스패닉은 미국의 대표적인 경합주인 플로리다 주 등의 표심을 좌우할 수 있다. 경합주은 미국 정치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백중세를 이루거나 선거 때마다 지지 정당이 변하는 주를 가리킨다. 그리샴은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히스패닉 출신인데, 바이든도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라 겹치는 문제가 있다.라이스 전 보좌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스탠퍼드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교육 받은 뒤 빌 클린턴 행정부의 국가안보실에서 1993~1997년 근무했다. 1997~2001년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차관으로 일하며 지역 개발과 에이즈 협력에 주력했다.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일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2013~2017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냈으며 2009~2013년 유엔대사를 맡았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유엔대사를, 트럼프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고 최근 외교 막후를 폭로해 물의를 빚은 존 볼튼과 경력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소속 정당에 대한 충성심, 업무스타일, 그리고 인종 정체성은 반대다. 라이스 보좌관은 성공한 흑인 여성 외교관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바이든이 연방상원에서 외교위원장을 오래 맡은 외교통이라 경력이나 전문 분야가 겹치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워런은 백인으로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파산법을 강의하던 교수 출신이다. 변호사로 소비자 보호와 경제 분야 전문가이기도 하다.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와 바이든과 대결하기도 했다. 버니 샌더스 연방상원의원과 함께 미국 민주당의 진보세력의 주축으로 평가 받는다. 문제는 나이가 72세라 바이든과 정부통령으로 나설 경우 모두 70대라는 게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유력한 주자로 꼽히는 해리스 연방상원의원은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첸나이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던 타밀족 출신의 어머니와 자메이카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시아말라 고팔란 해리스는 유방암 전문 과학자이며, 아버지 도널드 해리스는 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다. 해리스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 ‘흑인’으로 말하고 있다. 해리스는 변호사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 법무장관을 지냈다. ━ 미국 대선, 페미니즘 정치의 열매 수확 앞둬 바텀스 시장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변호사다. 기업체와 로펌 등에서 사회경험이 풍부하게 쌓았다는 장점이 있다. 판사와 시의회 의장을 거쳐 애틀란타 역사상 처음으로 입법·사법·행정 분야에서 모두 근무한 경력도 있다.데밍스 연방하원의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경찰에 27년간 근무하며 플로리다주 올란도의 첫 여성 경찰서장을 지냈다. 여성과 대한 유리 천정을 하나 깨부순 인물로 평가받는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진행하면서 실무를 맡았다.정치전문 매체인 폴리티코는 7월 12일 태미 덕워스(52) 일리노이주 연방상원의원을 유력 후보로 꼽았다. 덕워스는 미국 퇴역군인과 중국계 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국 방콕에서 태어났다. 미국 육군에 들어가 1992~2014년 복무하면서 중령으로 전역했다. 헬기 조종사로 이라크전에 참전했다가 두 다리를 잃는 전상을 겪어 의족을 차고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에서 2009~2011년 국가보훈부 차관을 지냈으며 일리노이주 연방하원의원을 거쳐 2017년 연방상원의원이 됐다. 미국 연방상원의원 중 두 번째 아시아계이며 첫 참전여성이다.미국은 여성들이 집단적·사회적으로 성폭행·성희롱·성차별을 사회적으로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2017년 10월 처음 나타난 나라다. 미투 운동은 할리우드의 권력자인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행과 성희롱을 폭로하기 위해 시작됐다. 하지만 그 배경은 남성이 지배해온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벌어져온 부절절한 젠더 불균형, 또는 젠더 간 권력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와인스틴이 영화 제작이나 캐스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바탕으로 개인의 성적자유결정권을 유린하고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하 관계, 주중 관계, 계약 관계로 이뤄진 사회와 직장의 다양한 영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상으로 벌어져왔다.여성의 사회진출, 디지털 미디어 확산에 따른 여성의 젠더 인식 확대와 연대 강화 등 여러 요수가 결합해 오늘날 미국이 미투의 중심국가이자 페미니즘 정치의 선두 국가로 대두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번에 민주당 부통령 예비후보로 거론되는 미국 여성 지도자들의 면면을 보면 드러난다. 다양한 분야에서 실력과 경험을 쌓아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홍보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여성과 소수파의 사회적 인식 확대와 자각이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진 경우일 것이다. 장구한 페미니즘 정치에서 하나의 싹이 돋아난 셈이다.한국의 성추행 사건도 단순히 개인의 일탈을 넘어선다. 산업화와 민주화까지 이뤘지만 그동안의 사회적 변화와 여성들의 인식 변화를 제대로 감안하지 못한 지도자들이 벌이는 인지 부조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사회는 변하고 있고, 사람의 인식도 바뀌는데 정치와 제도가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페미니즘은 이미 세계를 바꾸고 있는데 말이다. 페미니즘은 인간적인 21세기를 살기 위해 반드시 함께 가야 할 시대정신의 동반자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7.1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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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인사이트 | 코로나19 확산에도 경제 재개하는 속사정] 돌림병보다 무서운 경제 추락과 민심 이반

전문가 칼럼

미국·유럽, 코로나 기승에도 외출제한 완화... 경제활동 재개로 국민 달래기 진땀 지역과 체제를 막론하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민심이반만큼 무서운 게 없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전 세계가 고통 받는 상황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한 외출 제한과 경제활동 중단을 언제까지 계속하느냐를 결정하는 일은 정치인들에게 심각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으려면 외출 제한을 계속해야 하지만, 당장 생활이 어려워지고 갇힌 생활에 갑갑해하는 국민은 빠른 경제활동 재개를 주장한다. 이율배반적이다. 정책 결정자는 방역이냐, 경제냐를 두고 고뇌의 결단을 해야 한다.과학적·의학적으로 따지면 아직 외출 제한을 완화하고 경제활동을 재개할 때가 아닌 나라가 많다. 코로나19 신규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충분히 줄어들지 않거나, 검사가 충분하지 않은 나라가 상당수다. 그럼에도 5월에 접어들면서 외출 완화를 단계적으로 푼 데 이어 경제활동도 순차적으로 재개하는 나라가 유럽을 중심으로 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확진자 곡선이 여전히 상승세임에도 경제 재개를 서두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방역의 위험을 무릅쓰는 결정이지만, 정치적인 위기는 피할 수 있다. 정치인과 정책 결정자는 코로나19보다 경제 추락과 이에 따른 민심 이반을 더욱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보여준다.BBC방송과 CNN 방송, 그리고 유로뉴스와 일본경제신문, 글로벌 통계사이트인 월드오미터와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를 종합해 전 세계의 외출 완화와 경제 재개 상황과 그 속사정을 알아본다.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고 봉쇄령을 내렸던 나라 중에 외출 완화와 경제 재개에 가장 먼저 나선 나라는 유럽과 미국에서 멀리 떨어진 뉴질랜드다. 5월15일까지 1497명의 확진자와 21명의 사망자를 낼 정도로 코로나19에 따른 피해가 적은 나라다. 인구 100만 당 310명의 확진자와 4명의 사망자가 나왔을 뿐이다. 검사는 20만9613건이나 실시해 인구 100만 당 4만3468명에 이른다. 방역모범국인 뉴질랜드는 4월27일 외출 제한을 완화한 데 이어 5월14일부터는 가게와 음식점의 영업도 재개했다. 다만 술집 영업 재개는 5월21일로 시차를 뒀으며, 실외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10명까지로 제한했다.유럽에선 코로나19로 심각한 피해를 본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각각 5월 2일과 4일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외출 제한을 완화했다. 스페인은 27만 명 이상의 누적 확진자와 2만7000명이 넘는 누적 사망자를 기록했으며, 외출 제한을 완화한 하루 전인 5월 1일에도 3639명의 신규 확진자를 냈다. 이탈리아는 22만 명을 넘는 누적 확진자와 3만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으며 외출 제한 완화를 결정하기 전날인 5월 3일 1389명의 확진자가 추가됐다. 그럼에도 경제활동 재개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 스페인·이탈리아 경제 재개하자 유럽 전역 뒤따라 스페인은 외출 제한을 완화하는 것과 동시에 가게 영업도 허용했다. 다만 식당은 5월 중순 이후에 문을 열기로 했으며 극장은 관객들이 거리를 두고 앉을 수 있도록 전체 좌석의 절반만 채우도록 했다. 이탈리아는 가게 영업은 5월18일부터, 음식점 영업은 6월1일부터 시일을 두고 재개하도록 했다. 다만 신규 감염자가 많이 나오는 일부 지역은 이동을 금지했다.유럽에서 코로나19 피해가 가장 크고, 신규 확진자가 여전히 하루 수천 명 규모로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두 나라가 이렇게 나오자 외출 제한 완화와 경제활동 재개는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국제통화기금(IMF) 2019년 명목금액 기준 통계로 각각 3만7232달러와 3만4282달러다. 유럽 전체의 국가별 1인당 GDP 평균인 2만4969달러보다는 높지만 5만3276달러인 독일이나 4만6793달러인 프랑스, 4만5217달러인 영국보다 떨어진다. 아무래도 서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경제적 여유가 적다 보니 조기 경제 재개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이미 4월 6일 소규모 점포의 영업 재개를 허용했던 독일은 5월 6일 외출 제한을 완화하면서 동시에 모든 점포의 영업재개를 허용했다. 음식점도 5월 안에는 문을 열게 할 예정이다. 다만 8월까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는 금지했다.하지만 한 사람의 환자가 몇 명을 감염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재생산지수가 다시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코로나19의 재확산이나 2차 유행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독일의 코로나19 대책을 주도하는 로베르크 코흐 연구소는 10일 독일의 재생산지수가 1.03이라고 발표했다. 독일의 재생산 지수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봉쇄 완화를 발표한 6일 0.65까지 떨어졌다. 낮아진 재생산지수는 외출 제한을 완화하고 경제활동을 재개하는 과학적인 근거였는데, 그 근거가 다시 악화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10일간의 신규감염자가 인구 10만 당 50명을 넘는 주에 대해 제한을 다시 강화하도록 했다. 이에 최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경제활동 재개를 늦춘 데 이어 집단 감염이 발생한 지역을 봉쇄했다.프랑스는 비교적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5월 11일에서야 외출 제한과 가게 영업 제한을 풀었다. 음식점과 카페는 계속 문을 닫도록 했다. 아울러 사람의 이동은 100㎞ 이내로 제한했다. 다만 직업적인 이유로 이동하는 것은 예외로 허용하기로 했다. 이번 조치로 프랑스에선 40만 개 이상의 기업과 함께 가게가 일제히 문을 열었다. 파리 시내의 메트로와 기차역은 마스크를 쓴 사람으로 붐볐다. ━ 러시아, 위험 무릎 쓰고 완화 조치 유가 폭락 설상가상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3만30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셋째로 많은 22만9000명 이상의 확진자를 낸 영국도 5월 11일 건설업과 제조업의 활동을 재개하도록 허용했다. 13일부터는 그동안 주민들에게 하루 한 차례의 허용하던 야외 운동을 횟수에 제한 없이 허용했다. 코로나19로 입원에 이어 중환자실 신세까지 졌다가 회복한 보리스 존슨 총리는 7월을 목표로 식당과 호텔 영업의 영업 재개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심지어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코로나19 확산 속도가 빠른 것으로 평가되는 러시아도 외출 제한 완화와 경제 재개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는 15일 0시 기준으로 유럽에서 둘째로 많은 24만2271명의 확진자를 낸 것은 물론 5월3일부터 13일까지 하루 1만 명 이상의 신규 확진자가 계속 발생했다.최근 가장 빠른 속도로 코로나19가 확산한 러시아도 3월 말 시작한 기업활동과 외출에 대한 제한을 5월 12일 단계적으로 해제하기 시작했다. 신규 확진자가 연일 하루 1만 명을 넘어서는 위험한 상황이지만 경제 마비로 시민 불만이 커지면서 경제 활동을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 해제 배경은 코로나19가 진정되어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7~8%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59%로 떨어진 것도 한 몫 했다.사실 러시아는 경제 비상상황을 맞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지난 6주간 이동금지령을 발령해 외출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노동자들에게 유급 휴가를 지시한 결과 경제 활동은 사실상 마비 상태가 됐다. 결국 푸틴은 지난 11일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유급 휴무 조치의 종료를 선언했다. 아직 확진자가 급속도로 늘고 있지만, 방역만큼 경제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와 장갑 착용을 의무화하면서 무리하게 경제 재개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러시아는 ‘역사적 수준’으로 떨어진 유가 때문에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국제 유가는 지난 2월 초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13개국으로 이뤄진 석유수출기구(OPEC)와 러시아를 핵심으로 하는 10개국 간의 감산 합의가 삐걱거리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5월부터 하루 970만 배럴을 감산하기로 지난달 합의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글로벌 수요 감소로 유가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가 전체 수출의 60%에 가까운 러시아에 저유가는 국가적인 재앙이다.러시아산 석유의 기준인 우랄산의 유가는 1월까지 배럴당 60달러 전후를 유지했다. 하지만 2월 말 49.35달러로 처음 50달러 이하로 떨어진 데 이어 사우디와 감산 합의에 실패한 4월1일 18.30달러까지 폭락했다. 국제유가 실시간 정보사이트인 오일프라이스닷컴에 따르면 우랄산 원유는 5월 14일 0시 현재 배럴당 30.1달러의 가격을 형성했다. 우랄산의 유가는 1월 초와 비교하면 반 토막이 난 셈이다. BBC는 러시아 연방정부가 올해 예산을 짜면서 우랄산 유가를 배럴당 42.4달러로 예상했다. 당장 러시아 정부가 올해 예산을 제대로 확보하기 힘들 수도 있게 됐다. ━ 미국, 제한과 재개 사이에서 민주당·공화당 당파 싸움 루블화 값의 하락도 심각하다. 현재 1달러가 74.13루블에 거래된다. 1달러가 73루블 이상으로 거래된 것은 2016년 2월 이후 처음이다. 낮은 루블화 가치는 국제 금융시장이 러시아 경제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는 의미나 다름없다.코로나19의 확산으로 러시아에선 5월 9일 75주년 대독 전승기념일(서유럽에선 8일이지만 소련은 하루 뒤 별도로 항복을 받아 기념일 날짜가 다르다)에 전통의 열병식과 가두행진을 연기하고 축하 비행과 불꽃놀이만 진행했다. 코로나와 저유가로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는 경제뿐 아니라 푸틴의 권위도 위협받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경제활동을 재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활동 재개로 신규 확진자 숫자가 늘어날 것으로 우려된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하루 17만 건 수준이던 검사를 더욱 늘리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확진자와 비교해 사망자가 유달리 적다. 러시아 일간지 노바야 가제타는 “사망원인을 분류하는 방식이 달라서 나타나는 것”이라며 “모스크바 시의 경우 실제 사망자가 발표의 3배는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소속 주지사들이 조속한 경제 재개를 외치고. 민주당 출신 주지사들은 신중한 대처를 주장하면서 방역 문제가 정쟁으로 비화했다. 이런 가운데 백악관의 코로나19 태스크포스를 주도해온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감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은 12일 화상을 통해 이뤄진 상원 청문회에서 “경제활동을 조급하게 재개하면 피할 수 있는 고통과 죽음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국에선 이미 과학적·의학적 합리성을 경제적·정치적 타당성이 누르는 형국이다. 외출제한 완화와 경제 재개가 시기상조라는 지적은 현실 정치에선 ‘세상 물정 모르는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만연하고 있다.미국은 5월 11일까지 뉴욕과 주변 주를 제외한 47개주가 경제활동을 부분적이나마 재개한 데 이어 뉴욕 주도 건설과 제조업부터 순차적으로 재개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뉴욕 주는 5월 15일 0시를 기준으로 35만3096명의 확진자가 나와 미국 전체 확진자 145만5617명의 24.3%를 차지한다. 대재앙의 중심지인 셈이다. 그런데도 앤드루 쿠오모 주지사가 경제활동 재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방역과 함께 경제재개도 유권자인 주민들이 주지사의 능력과 리더십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 싱가포르 인적기록 의무화, 중동 제한적으로 축제 싱가포르는 외출 제한은 여전히 적용하는 가운데 5월12일 미용실, 이발소, 케이크 가게를 비롯한 가게의 영업제한을 풀었다. 식당은 포장만 가능할 뿐 점 내 식사는 여전히 할 수 없다. 사업장과 가게 방문자는 들어오고 나갈 때 인적 사항을 의무적으로 기록하게 했다. 확진자가 나올 경우 접촉자를 쉽게 추적하기 위해서다. 싱가포르에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기가 사실상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시설의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를 중심으로 확진자가 대거 발생했다. 지금까지 2만5000명 이상의 확진자와 21명의 사망자가 나왔다.중동 각국도 코로나19에 따른 활동 제한으로 경제사정이 악화하자 속속 이를 풀고 있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이전에도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나라가 대부분이다. 나라 전체를 봉쇄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5월 중순 쇼핑몰과 소매점의 영업 재개를 허가했다. 하지만 라마단이 끝난 직후 열리는 이드 알 피트르 축제는 금지했다. 기부를 통해 이웃과 교기를 나눠먹는 축제다. 요르단은 낮 시간 중 외출 가능시간을 확대했으며, 대중교통 수단도 정상화했다. 이란은 4월 11일 소매점의 영업을 재개했다. 그러자 한동안 동안 감소했던 신규 확진자 숫자가 5월 들어 다시 늘고 있어 당국이 고민에 빠졌다.아랍에미리트(UAE)는 이슬람 금식월인 라마단(올해는 4월23일~5월23일)을 맞아 외출제한을 절반 수준으로 완화했다. 5월 들어선 쇼핑몰의 영업도 재개했다.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은 라마단 기간 중 낮에는 금식하다 해가 진 뒤 성대하게 음식을 먹는다. 이 기간 중에 친척·친지들과 선물도 교환한다. 이에 따라 음식점과 쇼핑몰 영업과 필요하다. 라마단 기간이 대목인 셈이다. UAE 당국은 이를 감안해 식당 영업을 허용하되 전체 좌석의 30%이하만 채워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조건을 달았다. 종교와 풍습, 그리고 방역의 조화를 이루는 결정이다. UAE에선 지금까지 2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2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터키는 65세 이상 연장자의 외출금지를 조건부로 해제했다. 6월 초순에 국내 여행 제한을 해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이처럼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한 봉쇄를 풀고 경제활동에 나섰고 있다. 마스크 사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검사 확대는 기본 조건이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위험이 여전한 상황에서 확산하고 있는 외출 완화와 경제 재개가 어떤 결과를 몰고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자칫 코로나19의 2차 대유행을 부를 수도 있다. 코로나19의 제2파나 제3파가 지금 겪고 있는 1파에 비해 얼마나 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완화조치를 막을 수는 없어 보인다. 전 세계의 정부와 지금 정치지도자들은 불확실성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0.05.1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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