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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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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한밤의 정치드라마…美언론, 광범위한 파장 염려

정책이슈

미국 주요 언론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가 6시간 만에 해제한 사건을 신속히 보도하며, 그 배경과 향후 정치적 여파에 주목했다.워싱턴포스트(WP)는 '윤 대통령, 왜 계엄령을 선포하고 철회했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처음에는 윤 대통령과 군이 국회의 결정을 받아들일지 불확실했지만, 수요일 새벽 윤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계엄령 종료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윤 대통령의 이례적인 조치가 많은 국민의 분노를 샀으며, 1980년대 민주화 이전 군사 통치 시절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고 전했다. WP는 "6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은 이번 계엄령은 활기찬 민주주의로 알려진 한국에서 큰 정치적 파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또한,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대해 WP는 "야당에서 이미 관련 소문이 제기된 바 있어 충격적이지만 전혀 예상 밖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배경으로는 "최소한의 필요성조차 느껴지지 않는 여러 정부 조치들과 연이어 터진 스캔들로 인해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졌다"고 지적했다.뉴욕타임스(NYT)는 "윤 대통령이 몇 시간 만에 계엄령을 철회했으며, 서울 거리에는 대통령 사퇴를 외치는 시위대가 수천 명 모였다"고 보도했다. 이어 "이 조치가 한국의 독재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평화적인 반대를 억압했던 과거를 상기시켰다"고 전하며, "하지만 이 책략은 서울의 새벽이 되기 전 역효과를 냈다"고 분석했다.AP통신은 "긴박했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군대가 국회를 둘러싸는 동안 선포되었던 계엄령이 해제됐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야당이 장악한 국회에 대한 상징적 반발"이라고 해석하며, "이 조치가 탄핵 가능성에 직면한 윤 대통령의 절박함을 반영한다"고 덧붙였다.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빅터 차 석좌의 분석을 통해 "윤 대통령이 야당의 입법 독재로 인해 통치가 어렵다고 비판했다"며 야당과 여당 간 대립을 조명했다. 이와 함께 "북한이 이번 사태를 윤석열 정부를 공격하는 선전 도구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CNN은 윤 대통령의 계엄령 철회를 "단결된 대규모 반대 속에서 나온 선택"이라고 평가하며, "야당의 규탄과 여당 내부 비판까지 촉발했다"고 보도했다.마지막으로, 허드슨센터의 나탈리아 슬래브니 연구원은 "한국은 정치적 다원주의와 대규모 시위, 신속한 탄핵 절차에 익숙한 나라"라며 윤 대통령의 조치가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로 여겨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윤 대통령의 계엄령 철회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는 여전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미국 언론들은 이번 사태가 향후 한국 정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24.12.04 07:56

2분 소요
‘중동 유일 민주국가’ 이스라엘, 12년 장수 총리 물러나고 새 시대 시작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국제 이슈

이스라엘에서 12년 만에 정부 수반인 총리가 바뀌면서 중동의 사실상 유일한 세속 민주국가로 자리 잡은 이 나라의 정치 제도에 관심이 쏠린다. 새 정부는 이스라엘 크네세트(국회)가 6월 13일 표결에서 극우·중도·좌파·아랍계 등 8개 정당이 참가한 새 연립정부를 승인하면서 탄생했다. 이로써 2009년 3월부터 연속 12년간 총리로 재직했던 베냐민 네타냐후(71)는 자리에서 물러나 야당인 리투드(통합)의 대표가 됐다. 이스라엘은 ‘포스트 네타냐후’ 시대를 맞았다. 네타냐후는 1996~1999년 이어 2009~2021년까지 모두 15년간 총리를 지내 이스라엘의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지만 이번엔 연정 구성에 실패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번 총리 교체로 이스라엘은 네타냐후가 6월 1일 교체한 해외정보공작기관 모사드의 다비드 바르네아 국장, 크네세트가 6월 2일 선출해 7월 9일 취임할 이삭 헤르초크 대통령까지 국가 권력의 실질적인 3대 핵심 자리가 바뀌게 됐다. 이스라엘로서는 정부를 대표하는 세 인물이 한꺼번에 교체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2019년 4월과 9월, 그리고 2020년 3월과 올해 3월 23일 등 지난 2년간 총선을 네 번씩 치를 정도로 극심한 정치적 분열과 위기 상황을 겪었다. ━ 신임총리, ‘초강경 우파’ 나프탈리 베네트 이번에 연립정부를 구성한 8개 정당은 전체 120석의 크네세트 의석 중 61석을 차지해 아슬아슬한 과반을 유지한다. 네타냐후 지지파는 리쿠드 30석을 포함해 모두 57석의 의석으로 집권 연립을 압박하게 된다. 네타냐후의 리쿠드는 2020년 3월 선거에선 36석, 2019년 9월엔 33석, 4월엔 35석을 각각 차지하면서 제1당을 차지해 연정 구성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1당이 되면서도 연정 구성에 실패해 정권을 넘겨주게 됐다. 새 총리는 극우 정당인 야미나(우파)의 나프탈리 베네트 대표(49)가 첫 2년 간 맡게 된다. 그 뒤 2년은 연정 구성 당시 합의에 따라 중도자유주의 정당인 예시 아티드(미래는 있다)의 야이르 라피드(57) 대표가 이어받기로 했다. 연정이 무너져 새 총선을 치르게 되면 합의는 무효가 된다. 정체성이 극과 극인 다른 정당들이 반(反) 네타냐후와 정권 획득이라는 목적 아래서 손을 잡은 연정인 만큼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길게 갈지는 알 수 없다. 네타냐후가 지난해 3월 36석을 획득한 상황에서 정적인 베니 간츠 전 군참모총장이 이끄는 청백연합과 연정을 구성하면서도 총리를 우선 네타냐후가 맡은 뒤 간츠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네타냐후는 그 전에 크네세트를 해산하고 3월 23일 새 총선을 치렀다. 총리직 물려주기 약속의 정치적 허망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동안 이스라엘에선 네타냐후 총리가 팔레스타인에 맞서는 등 지나치게 우파 드라이브를 건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등에 유화적인 반네타냐후 그룹이 서로 힘을 합치는 일이 맞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특하게도 네타냐후보다 더 강력한 반팔레스타인 정책을 외치면서 극우파 소리를 듣는 베네트가 총리를 맡는 일이 벌어졌다. 이스라엘 정치의 아이러니다. 베네트 신임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모든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했지만, 발언대로 정치를 펼지는 의문이다. 우파 중에서도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키는 2국가안에 반대하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강하게 지지하며, 가자지구를 장악한 이슬람주의 무장 정파인 하마스를 폭격으로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해온 초강경파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하면 강경파로 분류되는 리쿠드와 네타냐후 전 총리도 유화파로 보일 정도다. 리쿠드와 네타냐후는 중도 우파, 또는 우파로 분류되지만 베네트는 우파 또는 극우파로 분류된다. 베네트는 네타냐후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지만, 팔레스타인 등에 더욱 강력한 압박을 주장하면서 2013년 유대인의 집이라는 정당 대표로 나갔으며, 2018년 신우파 대표를 맡았다가 2019년 야미나(우파)를 창당해 대표를 맡고 있다. 2013년 이후 리쿠드와의 연정에 참여하면서 경제·종교·디아스포라·교육·국방·지역 장관 등을 맡아왔다. 이번 연정 구성에서 리쿠드 및 네타냐후와 일시 결별한 셈이어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있다. 베네트는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면서도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이란 핵 합의(JCPOA) 복귀에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베네트는 신임투표 직전 연설에서 “이란의 핵무기 획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선 “JCPOA 복귀는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정권을 정당화하는 실수”라고 주장했다.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숙적인 이란에 대해선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여야 할 것 없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이스라엘의 생존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알라위파(시아파의 한 분파) 정권과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장파인 헤즈볼라를 군사적으로,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레바논에서 가끔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 인근으로 떨어지는 로켓은 이란이 헤즈볼라에 지원한 무기로 볼 수 있다. 이란은 가자지구를 장악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발사하는 로켓의 원료와 기술을 제공했을 것으로 의심을 받는다. 따라서 이란에 유화적인 이스라엘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없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스라엘에서 일부 유대교 ‘원리주의자’가 이란이 여는 국제 행사에 참여하기는 한다. 이들은 초정통파 유대교도의 일부로 ‘인간이 이스라엘을 인위적으로 건국한 것은 하느님의 뜻과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에 회의적인, 독특한 분파다. 베네트는 이란에 특히 반대의 입장을 표시한다. 문제는 새로 들어선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가 탈퇴했던 이란 핵 합의(JCPOA) 복귀를 추진한다는 점이다. 이란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미국과의 동맹 강조는 정치적으로 이율배반적이다. 여기에 베네트의 과제가 있다. 이번 정권 교체로 이스라엘의 민주주의 체제가 새삼 관심을 받는다. 이스라엘 하면 흔히 안보에서 일사분란하고 국론이 통일된 나라로 한국에 알려졌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치를 살펴보면 각자 서로 다른 목소리 내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를 추구해도 안보와 경제가 문제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안보중심·일사불란·극론통일의 나라로 여기는 것은 한국에서만 진행됐던 안보 ‘상징조작’의 일부인 셈이다. ━ 이스라엘, 다원주의 정치의 실천현장 이스라엘은 120석을 확보한 의회인 크네세트가 국정의 핵심이다. 의회가 선출하는 대통령은 의전을 주로 맡으며 정치적으로는 제 1당 대표에게 형식적으로 정부 구성권을 의뢰하고, 시일 안에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면 제 2당에 이를 넘기는 등의 일을 맡을 뿐이다. 이스라엘 총선은 의원내각제이며, 선거는 정당명부제 투표로 치른다. 유권자는 개별 후보가 아닌 정당에 투표한다. 2019년 4월 이스라엘 총선을 현장에서 참관했더니 거리에 붙은 각 정당의 홍보 현수막이나 벽보에는 대표의 얼굴 사진만 보였다. 투표소에 가봤더니 각 정당의 약자가 검게 히브리문자로 적힌 기다란 투표용지 샘플이 벽에 붙어 있었다. 당시엔 50개가 넘는 정당이 나왔는데, 올해 3월 23일 총선에선 39개 정당이 나왔다. ‘팔레스타인 폭격’으로 하마스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대놓고 외치는 극우, ‘사회주의 실현’을 주장하는 극좌, 중도파에다. 유대교 종교 정당,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스파르드 유대인 정당, 동유럽에서 이주한 아슈케나즈 유대인 정당, 러시아에서 이주한 유대인 정당, 이스라엘 건국 뒤에도 고향에 남은 아랍인들이 만든 아랍계 보수 정당까지 다양한 정당이 존재한다. 이스라엘 정치는 그야말로 다원주의 정치의 실천 현장이다. 이스라엘 총선은 3.25% 이상 득표한 정당만 의석을 배분 받는다. 나머지 정당은 해산되고 다음 총선 때 다시 창당할 수 있다. 올해 총선에선 13개 정당만 3.25%의 벽을 넘어 의석을 배분 받았다. 이번 총선에선 리쿠드당이 24.19%의 지지율로 지난번보다 7석이 줄어든 30석으로 제 1당을 차지했지만 연정 구성에 실패해 정권을 넘겨줬다. 무지개 연합에 참여한 이스라엘의 정당을 살펴보자. 중도 정치인 야이르 라피드가 대표를 맡은 예쉬 아티드(미래는 있다)가 13.93%의 지지율로 4석을 늘려 17석을 차지해 제 2당이 됐다. 네타냐후가 연정을 구성하지 못하자 구성권은 제2당 당수인 라피드에게 넘어갔다. 라피드는 연정을 구성해 네타냐후를 총리 자리에서 밀어내기 위해 6.21%의 지지율로 7석을 차지한 극우 정당 야미나의 베네트 대표를 총리로 민 것으로 알려졌다. 베니 간츠 전 군 참모총장이 이끄는 청백연합은 6.63%의 지지율로 지난번보다 6석이 줄어든 8석으로 이번 연정에 참여했다. 지난해 네타냐후와 연정을 구성해 국방부 장관을 맡았던 간츠도 무지개 연합으로 말을 갈아탔다. 간츠는 원래 반네타냐후 정치인으로 그에게 날을 세워왔다. 하지만 지난해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다시 선거를 치르기도 만감한 상황이 되자 일단 총리직을 순차적으로 맡기로 하고 연정 구성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당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지지율도 떨어져 의석수도 줄면서 원래의 반네타냐후로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의 좌파 정당인 노동당은 6.09% 지지로 7석 확보에 그쳤다. 중도우파 정당인 이스라엘 베이테이누(이스라엘 우리의 집)이 5.63%로 7석을, 좌파 정당인 메레츠가 4.59%로 지난 선거 때보다 3석이 많은 6석을 각각 배분 받았다. 민족주의·자유주의 정당인 새희망이 4.74% 지지로 6석을 차지했다. 여기에 아랍인 정당인 라암(아랍연합의 약자)이 3.79%의 지지율이라는 턱걸이로 4석을 배분 받았다. 이렇게 모두 8개 정당이 연정을 구성했지만, 라암은 내각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극우·극좌·아랍 정당까지 반네타냐후 ‘무지개 연합’ 8개 정당이 함을 합쳐 정권을 교체한 것이다. 지난해 총선 이후 네타냐후의 리쿠드 등과 연립정권을 이뤘던 청백연합의 간츠 국방부 장관은 새 정권에 참여해 국방부 장관 자리를 계속 유지한다. 만일 네타냐후가 크네세트 해산과 새 총선을 치르는 대신 사임했다면 간츠는 총리 자리를 물려받아 남은 크네세트 임기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을 것이다. ━ 복잡한 정치에도 ‘안보와 경제’ 두 마리 토끼 잡아 이렇게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특유의 정치 지형 속에서도 이스라엘은 안보와 경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 왔다. 네타냐후 집권 시절 ‘스타트업 국가’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 달러대에 진입했다. 국제통화기금(IMF) 2020년 추정치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명목 금액 기준으로 1인당 GDP가 4만4474달러로 세계 19위의 부자 나라다. 한국과도 경제와 군사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으며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이스라엘이 비즈니스 아이디어 중심의 스타트업 산업은 발달했지만 이를 글로벌 경제 현장으로 연결한 산업체는 별로 없어 한국과 협력하면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 2021년의 정권 교체로 관심을 받는 ‘중동 유일 민주국가’ 이스라엘은 이렇게 다양성을 추구하는 정치로 안보와 경제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 온 셈이다. 문제는 한 정당이라도 반대하면 법안을 통과 못 하는 독소 조항을 이번 연정 조건에 삽입했다는 점이다. 베네트의 극우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정치적 장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분열 가능성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2차례 15년 집권했다. 이번에 물러난 네타냐후 전 총리가 총리로서 마지막 연설에서 “예상보다 빨리 돌아오겠다”고 말한 배경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21.06.20 12:00

7분 소요
철의 장막 다시 드리워지나

산업 일반

러시아 정부는 오래 전부터 다수 국가주의 정당과 정치인들을 지원하며 유럽을 분할 정복하려 애써 왔다. 적어도 이제 헝가리는 EU의 가치·원칙·규칙에 대한 저항의 심장부가 됐다 지난 4월 8일, 봄인데도 여전히 공기가 차가웠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도나우강 주위로 수만 명이 운집해 영웅의 연설을 들으려고 밤 늦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자정께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열광했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선언했다. “헝가리를 수호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오르반 총리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역사적인 4선에 성공하고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오르반 총리는 철저하게 반이민 캠페인을 펼치면서 유럽연합(EU)을 ‘제국’으로 비난했다. 대다수 유권자의 반응이 좋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그를 지지했다. 푸틴 대통령은 10여년 동안 자신의 권력을 총동원해 오르반 총리의 성공을 도왔다. 오르반 총리는 유럽 대륙 전반에 걸쳐 자기 브랜드의 분열적인 반EU 정서를 퍼뜨려왔다. 러시아 관영 통신사 RT는 그 과정을 “유럽의 오르반화”라며 칭송했다.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스페인의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로부터 영국 브렉시트(EU 탈퇴) 운동가 등의 단체들을 후원하면서 EU를 분할하고 약화시키려 애써 왔다. 크렘린은 프랑스의 극우 국가주의 정당 국민전선에 융자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프로파간다 채널을 이용해 발트해 연안의 러시아 소수민족 박해와 관련해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부다페스트 기반 싱크탱크 폴리티컬 캐피털에 따르면 러시아 발 악성 댓글, 트위터 봇, 소셜미디어 위장계정이 동원돼 이민자의 범죄를 부풀리고 “타블로이드 신문의 음모론 패키지에서 친크렘린 스토리를 퍼뜨렸다.” ━ 헝가리의 변절자 이웃 체코 공화국에선 지난 2월 친러시아 포퓰리스트인 밀로스 제만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친EU 성향의 경쟁 후보 지리 드라호스가 아동성애자이며 공산주의 협력자라고 비난하는 조직적인 흑색선전에 희생된 뒤였다. 그런 스토리의 출처는 대부분 약 30개의 체코 웹사이트였다. 모두 모스크바와 관련된 사이트라고 프라하 기반 싱크탱크 유러피언 밸류스가 운영하는 단체 크렘린 워치가 밝혔다. 친푸틴 동조자를 지원해 유럽 전역에 걸쳐 의혹과 불화의 씨앗을 심어 EU 당국이 우크라이나 같은 곳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을 집단적으로 제재하기 힘들게 만들려는 노림수다.크렘린은 분명 유럽의 다수 국가주의 정당과 정치인을 도우려 애썼다. 그러나 오르반에 대한 후원은 규모와 범위 면에서 전례 없는 수준이었다. 프로파간다뿐 아니라 가스 공급 계약 특혜, 수십억 달러 융자, 전략적인 투자, 폭력적인 극우 혐오단체에 대한 은밀한 후원이 잇따랐다. 그리고 적어도 크렘린으로선 큰 보상을 받았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군 지원 여파로 다른 EU 국가들이 러시아를 멀리할 때도 오르반은 유럽에서 푸틴 지지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목청 높여 반대했으며 다른 EU 지도자들이 푸틴 대통령을 규탄하려는 시점에 수시로 부다페스트에서 그를 맞이했다. 또한 러시아 스타일의 정실 자본주의 신흥재벌 엘리트들을 등용하고, 충성스러운 사업가들을 동원해 반체제 뉴스 매체를 인수하고, 비정부기구(NGOs)와 시민사회 단체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크렘린으로선 무엇보다도 헝가리가 EU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원칙·규칙에 대해 확대되는 저항의 심장부가 된 것이 의미심장했다.영국 옥스퍼드대학 허트포드 칼리지의 정치경제학자 윌 허튼 교수는 “보수적 국가주의의 세계적인 부상이 우리 시대 최대의 위협 요소”라며 “유럽은 국가주의의 가장 어두운 악령을 다시 마주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분명 유럽(또는 미국)에서 일고 있는 포퓰리스트적인 반동의 배후는 아니다. 그러나 크렘린은 얼싸 좋다하며 그것을 이용한다. 그리고 적어도 오르반의 헝가리에선 그 전략이 먹힌다.오르반이 원래부터 모스크바 편인 건 아니었다. 그는 반러시아·반공산주의, 자유주의 반체제 인사로 정치 경력의 첫발을 내디뎠다. 1988년 헝가리계 미국인 금융가 조지 소로스에게 편지를 써보내 옥스퍼드대학 학자금 지원을 요청했다(소로스는 훗날 오르반의 가장 큰 적이 됐다). 최근 헝가리 언론이 발굴해낸 그 편지에서 청년 오르반은 ‘시민 사회의 부활’을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학자금을 지원받았으며 공산주의 몰락 후 귀국하자마자 대학생 중심의 친자유시장 정당 피데스 설립에 참여했다. 당시의 많은 동유럽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르반은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면 헝가리가 경제난을 극복하고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다.2004년 EU가 헝가리와 기타 중부유럽 국가들을 받아들이면서 오르반의 꿈은 실현됐다. 부다페스트 지역 출판인 타마스 파르카스는 초기 피데스를 지지했지만 훗날 환멸을 느껴 등을 돌렸다. 그는 “일단 유럽의 일원이 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특히 구세대와 농촌지역에는 자신의 모든 문제를 정부에 의지하는 삶에 익숙한 사람이 많았다. ‘우리가 아무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브뤼셀 당국이 알아서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신 국경개방과 자유무역은 경기가 침체된 동안 해외에서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헝가리 젊은이들의 대규모 두뇌유출을 촉발했다. 유럽의 최빈국 개발을 목표로 보조금과 후원금 형태로 지급되는 EU 지원금이 2016년 헝가리 국내총생산(GDP)의 4% 가까이 차지했다. 헝가리는 오늘날 EU 자금의 최대 순 수혜국으로 꼽힌다. 연간 45억 유로를 받으면서 EU의 연간 예산에 기여하는 돈은 10억 유로도 안 된다.동시에 헝가리는 EU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반부패 NGO 국제투명성기구(TI)에 따르면 수뢰와 공직자 횡령에서 불가리아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출판인 파르카스는 “사람들은 EU가 무임승차가 아님을 깨닫고는 크게 분노했다”며 “그들은 모든 문제가 자신들이 아니라 외부인 탓이라고 말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몰아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2008년 10월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이후 당시 헝가리 야당 지도자이던 오르반은 러시아를 규탄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조지아에서 일어난 일은 냉전 종식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현재 러시아가 보여주는 이런 원시적인 무력정책은 유럽에선 20년 동안 유례가 없었다”고 말했다. 에이프럴 폴리 당시 헝가리 주재 미국 대사는 오르반이 구미 관계를 중시하며 “러시아와 극좌파의 생존과 복귀”를 헝가리에 대한 최대 위협으로 믿는다고 워싱턴 정부에 보고했다.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전문 내용이다. 폴리는 ‘오르반이 천사는 아니지만 이 문제에선 천사 편’이라고 썼다.그러나 오르반은 훗날 2010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을 하면서 대중영합적이고 외국인혐오적인 공약이 유권자에게 먹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오르반의 오랜 측근인 지외르지 마톨치 경제 보좌관(현 헝가리 중앙은행장)은 그의 자유주의적인 세계관이 시대착오적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독립적인 헝가리 언론 그룹 디렉트 36의 한 대규모 조사 프로젝트에 따르면 마톨치는 떠오르는 동방이 곧 서방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실세는 물론 주도적인 정치 모델이 되리라고 오르반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2009년 11월 오르반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가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고 다음 달 베이징으로 건너가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던 시진핑을 만났다. ━ 날아간 수십억 달러의 이익 오르반은 분명 두 사람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그는 곧 러시아와 중국을 대표적인 모델로 거론하면서 개종자 같은 열정으로 헝가리의 “국가적인 토대 위에 비자유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메릴랜드 대학 정치학과 블라디미르 티스마네누 교수는 오르반을 가리켜 “사회주의 언론인에서 파시스트 독재자로 변신한 베니토 무솔리니” 같다고 평했다. “그는 자유주의 전통과 거기에서 다원주의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안다. 그는 시민사회 출신이면서 그것을 파멸시키려 안간힘을 쓴다. 그는 과거와의 단절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을 가지려 애쓰는 변절자다.” 2010년 4월 오르반은 자신의 새로운 국가주의적 정강을 기반으로 선거운동을 벌인 뒤 총리로 선출됐다.푸틴 대통령도 분명 오르반에게서 또는 적어도 그의 국가주의적 가치에 대한 갑작스러운 열정의 파괴적 가능성에 그 못지 않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문제는 그의 인화성 강한 메시지가 전파되도록 러시아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그 답은 곧 명백해졌다. 총리에 오른 오르반은 그해 11월 러시아를 다시 찾아가 푸틴 대통령과 회동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러시아 지도자 푸틴 대통령만이 해결할 수 있는 골치 아픈 문제를 논의했다. 앞서 2009년 헝가리 최대 석유회사 몰의 21.1% 지분을 러시아 국유 에너지 대기업 수르구트네프테가스가 인수했었다. 오르반의 전임자 정부는 러시아의 주주 권리 행사를 막아 이고르 세친 러시아 부총리를 분노케 했다. 위키리크스 전문에 따르면 세친이 몰의 CEO에게 “당신의 싸움 상대는 수르구트네프테가스뿐 아니라 기업들에 없는 도구를 가진 러시아 국가도 있다”고 위협했다고 미국 대사관이 워싱턴에 보고했다.신임 총리 오르반은 모스크바와 대결 양상은 어떻게든 피하기를 원했다. 대신 그는 수르구트네프테가스가 가진 몰의 지분을 헝가리가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오르반이 몰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데뿐 아니라 국내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헝가리 최고 부자 중 한 명인 산도르 차니는 최대 은행장 겸 몰의 부사장이었다. 몰을 국가에서 인수하면 오르반이 차니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나아가 오르반이 헝가리의 에너지 시장을 통제하는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러려면 러시아 석유업계의 파수견인 세친 부총리가 지분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푸틴 대통령의 관점에선 이익과 지정학적 이해 간의 선택이었다. 후자가 선택 받았다. 2011년 4월 모스크바가 갖고 있던 몰의 지분이 헝가리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르반이 푸틴 대통령에게 넣은 다음 청탁은 헝가리 가스 거래 업체 MET 문제였다. 원래 몰이 창업했지만 오르반이 총리에 오를 무렵엔 소유구조가 불투명했다. MET는 서방 공급업체들뿐 아니라 러시아 가스 대기업 가즈프롬과 가스 조달계약을 체결했다. 2011년 서방의 가스 공급가가 러시아산보다 더 낮았다. MET의 중간 거래상들이 가즈프롬과 장기 계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훨씬 더 큰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부패 리서치 센터 부다페스트’의 한 조사에 따르면 오르반 정부가 내린 일련의 결정으로 MET는 서방에서 받는 물량을 늘려 회사에 수십억 달러의 순익을 안겨줬다. 무엇보다도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가스·전력 요금을 낮춰 오르반에 대한 유권자의 호감도가 더 높아질 수 있었다.가즈프롬은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했다. 그 러시아 업체는 MET와 이른바 의무인수 계약(take-or-pay agreement)을 체결했다. 이론상 MET가 사용하든 않든 구입하기로 계약한 가스 전량의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조건이다. 그리고 독일 에너지 업체 E.ON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는 거세게 항의했으면서도 MET의 계약 불이행에는 침묵을 지켰다. 그 결정으로 러시아는 수십억 달러를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치적으로 보상받았다. 낮은 에너지 가격이 2014년 오르반의 재선 성공에서 큰 변수로 작용했다.비슷한 시기에 러시아는 원자력 에너지에서도 오르반을 정치적으로 돕기로 결정했다. 헝가리 정부는 헝가리 중부 팍스 인근에 공산주의 시대 발전소와 함께 가동할 새 원자로 2기의 건설을 계획했다. 미국 원전 업체 웨스팅하우스, 프랑스 에너지 업체 아레바,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납품업체들이 입찰에 참여하려 팍스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2013년 8월 오르반은 러시아의 국유 원자력 에너지 업체 로사톰 대표를 비밀리에 만났다. 그 회동 결과는 2014년 1월 푸틴 대통령과 오르반이 모스크바에서 발표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지만 오르반 총리는 공개 입찰을 거치지 않고 팍스 확장 프로젝트를 로사톰에 맡기기로 합의했다. 그 결정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러시아 정부가 오르반에게 100억 유로의 융자를 제시한 것이다. 수년래 헝가리에서 단연 최대 규모의 투자였다. ━ 푸틴의 전략 팍스 원자로 계약에 관한 비밀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례 없는 수준의 이민 물결이 유럽 국경으로 몰려들었다. 이민위기는 유럽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들 사이에 논란과 심도 있는 성찰을 촉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수석 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은 지난 3월 워싱턴 연설에서 “새로운 정치현실은 좌파 VS 우파가 아니라 세계주의자 VS 국가주의자 간의 대립”이라고 말했다. 2013년 오르반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반세계주의 전도사로 떠올랐다. 그는 틈만 나면 EU 정부 엘리트들을 조롱하며 크렘린에 기쁨을 안겨줬다.오르반은 1848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헝가리 혁명을 기념하는 휴일에 대규모 지지 군중 앞에서 기독교 유럽과 헝가리가 대이민 물결에 맞서 “문명 투쟁”을 벌인다고 말했다. 그 이민 물결은 말썽꾼들과 “국제 투기꾼들의 후원을 받는 NGOs” 네트워크가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제 투기꾼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옛 후원자이자 유대인인 소로스를 지목했다(소로스는 부다페스트의 많은 시민사회 단체와 대학 한 곳을 후원한다). 그러면서 반유대주의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드는 용어를 구사했다. ━ 믿을 만한 좋은 친구 베테랑 해외 통신원이자 부다페스트 주민인 아담 레보는 “그의 발언을 두고 1930년대의 불쾌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조잡하고 혐오스럽고 심지어 인종차별을 넘나드는 전술로 보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방의 자유주의 금기에 도전하는 아이디어들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통했다. 주권, 통제가 이뤄지는 국경, 공통된 역사·문화의 중요성, 국가적인 단결의식 등이다.”그러나 난민과 이민에 대한 오르반의 집요한 공격이 국내뿐 아니라 중부 유럽 전반적으로 먹혀드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와 호르스트 제호퍼 독일 내무장관 모두 이민에 관한 그의 강경 메시지를 앵무새처럼 되뇌며 공개적으로 그를 귀빈으로 맞았다. 피데스의 발라스 히드베기 대변인은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유럽 정치 지도자가 갈수록 늘어난다”며 “빅토르 오르반이 옳다”고 말했다.오르반은 또한 푸틴 대통령의 전략을 일부 베꼈다. 과거 독립적인 기관들에 자신의 지지자들을 채워 넣고 부패를 통해 자신과 한통속이 된 패거리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의회 과반수 의석을 동원해 검찰·감사원·언론 등 헝가리 정부와 사회의 과거 독립적인 조직들을 피데스의 휘하로 끌어들였다. EU는 크게 분노했다. 유럽의회의 브렉시트 협상대표 가이 베르호프스타트는 지난 3월 “연합의 가치에 서명했으면서도 모든 가치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EU 자금은 원하면서도 우리의 가치는 원치 않는다.” 한편 소로스는 푸틴 대통령을 본받아 헝가리를 ‘마피아 국가’로 만든다고 오르반을 비판해 왔다. EU도 그들의 보조금이 오르반의 친구·친지들의 배를 불리는 데 흘러들고 있다는 광범위한 증거를 찾아냈다.하지만 오르반과 크렘린의 우정이 정말로 빛을 보기 시작한 건 2014년 3월이었다. 소속불명의 군복 차림을 한 러시아 병력이 크림 반도를 침공했을 때였다. 그 일로 푸틴 대통령은 대다수 유럽 지도자들 사이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웃에서 왕따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처지는 2014년 7월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에서 말레이시아 항공 보잉 여객기가 러시아군의 부크(Buk) 지대공 미사일을 이용하는 반군에 격추당했을 때 더 분명해졌다. EU와 미국 모두 여러 차례 갈수록 강도 높은 제재를 가했다. 대다수 러시아 기업들이 국제신용도 상향조정에서 제외되고 푸틴 대통령의 핵심 가신들이 서방에서 자산을 보유할 수 없게 됐다. EU의 제재에는 회원국 전체의 만장일치 찬성이 필요했다. 오르반은 러시아의 전통 우방인 그리스, 키프러스와 함께 제재에 회의적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끄는 대규모 외교노력으로 두 나라가 입장을 바꿨다. 협상 내용을 잘 아는 한 EU 외교관은 익명을 요구하며 “때로는 그들이 쓰는 돈을 누가 내는지 상기시켜 줘야 한다”며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단합된 유럽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는 메르켈 총리의 입장은 단호하다”고 말했다.오르반은 언제나 제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뿐 아니라 러시아를 집단적으로 규탄하려는 EU의 시도를 외면했다. 오르반은 2017년 2월 부다페스트의 합동기자회견에서 “서유럽은 극히 반러시아적인 태도와 정책을 갖고 있다”며 “다자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고 말했다.푸틴 대통령은 헝가리를 러시아의 “중요하고 믿음직한 파트너”라고 부르며 맞장구쳤다. EU 정부가 러시아를 불량국가로 낙인 찍으려는 시점에 중부 유럽을 방문해 환영받는 것은 커다란 외교적 자산이다. 지난해 푸틴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게자 제스젠스키 전 헝가리 외무장관은 “푸틴은 자신에게 믿음직한 좋은 친구가 있음을 NATO와 EU에 과시하려 한다”며 “헝가리는 동맹 내의 트로이 목마”라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말했다.하지만 오르반이 제재 문제를 두고 EU 정부에 전면적으로 반항하지 못하는 한 가지 요인이 있다. 대다수 헝가리 유권자는 푸틴 대통령의 보수적인 세계관에 동정적일지 모르지만 특히 오르반의 핵심 지지기반인 구세대 중 많은 사람이 여전히 러시아를 1956년 헝가리 민선정부를 탄압한 식민지 세력으로 여긴다. 따라서 잉글랜드 솔즈베리에서 러시아군 정보장교 출신인 세르게이 스크리팔의 암살기도 이후 지난 3월 23개국이 160여 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했을 때 헝가리도 한 명을 추방했다.러시아에 대한 EU 제재는 6개월마다 갱신된다. 그리고 오르반은 반EU 주장을 펼치면서도 2014년 이후 지금까지 모든 투표에서 EU 정부의 노선에 순종했다. 헝가리 정부 대변인 졸탄 코박스는 “우리의 결정이나 정책에서 우리가 러시아나 푸틴 대통령에 다른 어떤 서방 국가보다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요소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푸틴 대통령은 오르반이 더 많이 지지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렘린의 10여 년에 걸친 베팅이 보여주듯 러시아는 장기전을 펼칠 각오가 돼 있다. 그들의 투자는 이미 배당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오르반의 압승은 보수적 국가주의가 헝가리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제재로 경제규모가 스페인보다 작아진 러시아는 경제적으로는 EU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군사적으로도 최근 푸틴 대통령이 차세대 핵군비와 크렘린의 국방비 지출을 대폭 늘렸다고 말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NATO 동맹이 여전히 러시아에 대해 상당한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프로파간다 면에서는 푸틴 대통령을 따를 자가 없다. 그는 EU가 해체된다면 내부적인 문제가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듯하다.- 오언 매튜스 뉴스위크 기자

2018.05.2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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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 진보주의가 부상한다”

산업 일반

콜롬비아 반군대원 출신에서 대통령 후보가 된 구스타보 페트로, 5월 총선에서 승리 다짐해 1985년 11월 콜롬비아에서 중도좌익 반군단체 ‘4월 19일 운동(M19)’이 대법원을 점령했다. 그들은 당시 대통령 벨리사리오 베탄쿠르가 휴전 합의를 위반했다며 법관과 사무원, 방문객 등 350명을 인질로 잡고 그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장갑차를 앞세워 진압하는 군과 28시간 대치하는 동안 법관 11명을 포함한 98명이 사망했다. 법원 건물은 불탔고 콜롬비아는 혼돈에 빠졌다.그 한 달 전 콜롬비아 정부군은 구스타보 페트로라는 젊은 M19 대원을 체포해 며칠 동안 고문했다. 페트로는 풀려난 뒤 반군 단체들과 정부 사이의 평화협정안 작성에 참여했다. 올해 58세인 페트로는 이제 콜롬비아의 차기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 승산이 없지 않다. 진보정당 콜롬비아 후마나 운동의 대통령 후보인 그는 우파 진영의 유력한 라이벌 이반 두케 전 상원의원에게 약간 밀리는 상황이다. 두케 후보는 강경 우파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중도당의 지명을 받았다.페트로 후보는 이번에 처음 정치에 뛰어든 게 아니다. 그는 2000년대 초 의원에 선출됐고, 2012년엔 보고타 시장에 당선됐다. 2013년 그는 보고타의 위생 프로그램과 관련된 정치 스캔들에 연루된 의혹으로 시장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무죄를 판결하면서 그는 시장에 복귀해 임기를 마쳤다.그러나 오는 5월 27일 치러질 콜롬비아 대선을 앞두고 이웃나라 베네수엘라의 혼란상이 그의 보고타 시장 시절 스캔들보다 더 많은 주의를 끈다. 비판자들은 그가 좌편향 운동인 ‘차베스주의’(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취한 포퓰리스트 좌파 이념)를 묵인했다고 지적한다. 그 운동이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국경 지대에서 인도주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페트로 후보는 반박한다. 하지만 그 공방전은 단순히 이념 논쟁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3월 유세에서 그가 탄 방탄차가 총격을 받았다. 현재 콜롬비아 당국은 그 사건을 수사 중이다. 최근 페트로 후보는 뉴스위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고(故)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그리고 정치에 관한 폭넓은 주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다.먼저 트럼프 대통령에 관해 얘기해 보자. 갈수록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중국산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오히려 우리에겐 호재가 될 수 있다. 우리도 수입하는 농산물과 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의 농업과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선 그런 제한 조치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2006년 체결된 콜롬비아-미국 자유무역협정(FTA)을 재협상할 생각인가?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럴 필요가 없다. 내가 제안한 탄소세 때문이다. 수입품의 온실가스 배출에 따라 부과되는 세금을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주의 조치는 콜롬비아의 보호주의 조치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콜롬비아의 생산성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제안하는 조치는 기후변화 완화에 초점을 맞춘다.근년 들어 콜롬비아의 코카(코카인의 원료) 생산이 늘었다. 마약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예전처럼 마약을 단속하느라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낭비할 순 없다. 마약과의 전쟁은 실패했다. 콜롬비아도 미국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미국 볼티모어에서 브라질까지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폭력이 난무하게 됐다. 나는 환지 정책과 농토의 민주화를 제안한다. 코카 나무는 비옥한 땅에서 자라지 않는다. 농민은 농사 지을 수 있는 땅을 갖게 되면 코카 나무보다 더 수익성이 좋은 기본 농산물 생산에 전념할 것이다.하지만 미국과 어떻게 협력할 생각인가? 제프 세션스 미국 법무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은 아주 강경한 마약 정책을 추진한다. 심지어 마약 거래상을 사형에 처하겠다는 입장인데.포퓰리즘 정책을 신봉하는 미국 우익 진영은 강경 처벌이 마약을 퇴치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미국에서 마약과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 과잉 복용으로 인한 사망자가 2016년 6만 명이 넘었다는 사실은 미국 정책이 실패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처벌만 강화하면 사망자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얼마 전 미국 국무장관에서 물러난 렉스 틸러슨은 남미 국가들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주권 침해와 영향력 확대에 굴복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동의하는가?정치를 회색 지대나 흑백 이분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나쁜 접근법이다. 그런 정책은 순진해 빠졌거나 어리석을 뿐이다. 우리는 미국이나 러시아 또는 중국에 충성하려는 게 아니라 ‘삶의 정치’를 추구하려 노력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후변화를 줄이는 노력을 지지해야 한다.베네수엘라 문제로 넘어가 보자. 그곳에서 발생하는 인도주의 위기에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나는 모든 나라의 주권을 존중한다. 따라서 내가 하는 말은 하나의 제안일 뿐이지만 미국이 맡아야 할 최선의 역할은 화석 연료를 멀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나 트럼프 정부가 진지하게 검토하는 개념이 아니다. 세계의 석유 수요가 그처럼 높지 않았다면 베네수엘라 정권도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야권과 현재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 사이에서 베네수엘라 정치를 둘러싼 논의가 지금과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오일머니를 둘러싸고 이해당사자들 간의 다툼이 심하다.지난 3월 미국 스페인어 TV 방송사 유니비전의 앵커 호르헤 라모스와 인터뷰를 가졌을 때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독재자였나?’라는 질문에 당신이 정확히 답변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 인터뷰가 오는 콜롬비아 대선에서 당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차베스 시절을 마두로 시절과 별개로 생각한다. 베네수엘라를 깊이 있게 분석하려는 사람이면 그런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당시 인터뷰에선 내겐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 차베스가 독재자였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난 ‘아니다’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마두로가 독재자냐고 묻는다면 난 ‘그렇다’고 답하겠다. 그 두 사람은 서로 다르다.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차베스가 대통령이던 시절 그는 고공행진하는 유가 덕택에 정치적으로 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나 마두로 대통령은 그와 달리 하락하는 유가와 씨름한다. 차베스 대통령은 어느 정도의 다원주의를 허용했다. 반대파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2002년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쿠데타 기도가 있었고 여러 차례 파업 사태도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원주의를 유지하거나 확산시켜야 했다. 반면 마두로 대통령은 살인을 서슴치 않는다. 또 차베스 대통령 시절엔 반정부 성향의 TV 채널도 있었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은 2007년 정부를 비판하던 TV 채널인 RCTV를 폐쇄했는데.그래도 어느 정도의 다원주의는 유지했다. 하지만 요즘 베네수엘라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차베스 시절엔 선거가 치러졌다. 차베스 대통령은 2007년 장기 집권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패한 뒤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가 재선됐을 때 야당에선 아무도 부정선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베네수엘라 국민 대다수가 그를 지지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유가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베네수엘라 경제의 거품이 터졌다. 불행하게도 그건 차베스 대통령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석유 기반에서 벗어나 다각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임기 말에 갈수록 더욱 석유에 의존했다. 현재 마두로 대통령은 유가를 높이 유지하려 애쓰면서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적인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우리는 독재라고 부른다.그렇다면 지금도 차베스가 훌륭한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하는가?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난 그가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가 훌륭한 지도자였는지 형편없는 지도자였는지는 베네수엘라 국민이 결정해야 할 문제다. 차베스 대통령이 베네수엘라를 쿠바 모델에 맞추려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의 통치 아래서 강도 높고 독재적인 접근법을 보지 못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좀 더 생산적인 경제로 전환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보다 석유 증산에만 전념한다. 또 그는 사회적인 문제의 민주적인 토론과 항의 시위를 금지했다.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베네수엘라의 인도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하겠는가?콜롬비아의 관점에서 보면 석탄과 석유에서 멀어지는 것이 관건이다. 사실 우리가 베네수엘라에 모범적인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워지면 베네수엘라가 석유 의존도를 줄이는 데 우리가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콜롬비아가 좀 더 생산적인 경제로 전환하고 베네수엘라에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규모 난민을 막을 수 있다. 베네수엘라 문제의 본질이 석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문제는 베네수엘라 국민만이 해결할 수 있다. 앞으로 후보자 토론에서 상대측이 M19 반군 대원 전력을 끄집어내면 어떻게 대응할 생각인가?M19의 역사는 평화가 반군과의 협정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인 콜롬비아를 공정한 국가로 만드는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사회와 합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적 불평등이 마약 거래와 폭력, 빈곤의 근본 원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콜롬비아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베 전 대통령이 이끄는 보수운동이 패배하고 내가 승리한다면 콜롬비아를 생산적인 국가로 평화롭게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두고 우익 진영의 지도부와 머리를 맞댈 것이다. 경제 문제를 얘기하자면 분석가들은 콜롬비아의 시장이 당신을 두려워한다고 믿는데 왜 그런가?외국 투자자들은 명료한 규칙을 원하기 때문에 난 이렇게 제안하겠다. 태양광 발전 같은 청정 에너지에 투자하려는 사업가는 환영한다. 또 식량 생산의 산업화에 도움을 주려는 사업가도 환영한다. 프로그래밍, 웹,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우리를 도우려는 사업가도 환영한다. 그러나 광석 채굴, 석유·석탄 시추 같은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겐 우린 절대 우호적인 정부가 되지 않을 것이다.남미에서 또 다른 좌익 성향의 대선 후보가 부상하고 있다. 오는 7월 1일 대선을 실시하는 멕시코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다. 베네수엘라의 혼란상을 보면서도 좌파 운동에 식상한 듯한 이 지역에서 아직도 좌익에 미래가 있다고 믿는가?나는 세계를 우익 대 좌익의 대치로 보지 않는다. 요즘 세계는 정치를 삶과 죽음의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 전쟁을 지지하고 격화시키며, 장벽을 세우고, 외국인을 혐오하고, 경제를 화석연료에 의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음의 정치에 매달린다. 난 멕시코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와 친해지고 싶다. 서로 교환할 아이디어가 많기 때문이다.브라질에서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다시 출마한다면 거기서도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페루도 비슷한 상황이다. 최근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대통령이 사임하고 독재자였던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이념이 무너지면서 진보 진영이 부상할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베네수엘라-니카라과-쿠바를 잇는 축과는 완전히 다른 축이 될 것이다. 남미 진보주의의 이런 새로운 시작이 생산적인 경제에서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대한다.콜롬비아 정부가 2016년 최대 반군 조직 콜롬비아무장 혁명군(FARC)과 체결한 평화협정을 재협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체결된 평화협정은 존중돼야 하며 그들을 비난해서도 안된다. 콜롬비아가 게릴라 손에 넘어갈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믿는 국민이 없기 때문이다. FARC도 이젠 반군단체가 아니라 이제 어엿한 정당이다. 하지만 총선에서 그들은 고작 5만 표밖에 얻지 못했다. 콜롬비아 국민은 FARC와 체결한 평화협정을 주요 관심사로 생각하지 않는다5월 대선에서 승리를 자신하는가?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5세기 만에 처음으로 이 나라를 지배한 엘리트층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에 선출될 기회가 왔다. 만약 내가 암살당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로버트 발렌시아 뉴스위크 기자

2018.04.30 15:01

8분 소요
[지구촌 이모저모] 민주주의 지수 | 완전 민주주의 누리는 세계 인구 비율 5% 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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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 중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5%에도 못 미친다. 정치 체제가 얼마나 기능을 햐느냐에 따라 각국의 순위를 매긴 새 보고서 내용이다.영국 이코노미스트 부설 경제 연구소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이 167개국을 대상으로 민주주의 지수를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의 순위가 하락했다. 조사는 5개 요소를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선거가 자유롭고 공정한가(‘선거과정과 다원주의’), 정부에 견제와 균형이 있는가(‘정부의 기능’), 시민이 정치에 포함되는가(‘정치참여’), 정부를 지지하는가(‘정치 문화’),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가(‘시민자유’) 등이다.세계 인구 중 3분의 1 가까이(과반수가 중국에 속한다)가 권위주의 통치 체제 아래서 살아간다. 노르웨이가 2010년 이후 가장 민주적인 국가 자리를 지켜왔다. 한국은 10점 만점 중 8점으로 20위에 올랐다. 미국은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강등됐다. ‘미국 유권자가 정부, 선출된 정치인, 그리고 정당을 낮게 평가한다’는 것을 이유로 꼽았다.비정치적인 글로벌 감시단체 프리덤 하우스는 지난 1월 보고서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에 상당한 가속이 붙었다고 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언론을 ‘가짜 뉴스’로 폄하하고 뉴스 매체를 매도하기로 유명하다. 여러 전문가가 이를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깎아 내리는 위험 요인으로 간주했다.프리덤 하우스의 마이클 J. 아브라모위츠 대표는 “미국의 전통적인 견제와 균형을 업신여기는 정부에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가 수난을 겪는다”고 말했다.미국인은 미디어의 중요성과 민주주의와의 연관성을 이해하지만 신뢰·미디어·민주주의에 관한 2017년 갤럽·나이트재단 서베이에서 대중은 “미디어가 그런 역할을 썩 잘 수행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 지수는 앞으로 사회적 분극화의 확대 추세를 전망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행동을 자제하지 못할 경우 “미국 민주주의가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레이시 리 뉴스위크 기자※

2018.03.0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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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1 17:42

2분 소요
중국 vs 미국 글로벌 리더십 누가 차지할까

국제 이슈

미국이 패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중국은 권위주의 정치 시스템 탓에 지도력 인정 받기 어려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은 단 한 가지 측면에서만 ‘역사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방문으로 미국이 뒤늦게나마 글로벌 리더십을 둘러싼 중국과의 경쟁으로 눈을 돌렸다는 사실 때문이다.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떠오르면서 그동안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미국의 리더십 시대는 막을 내렸다. TV를 보는 모든 미국인은 그런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언론이 중국 베이징과 베트남 다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행보를 보도하면서 그런 점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그들 도시에서 두 사람은 아시아의 미래를 두고 서로 다른 비전을 제시했지만 언론은 그들이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처럼 다뤘다.이젠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더는 아닌 듯하다. 현재로선 미국과 중국이 동등하게 취급받는다. 1979년 미국과 중국의 공식 수교 이래 지적재산권부터 환율, 인권 문제까지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을 부른 쟁점 대부분은 양자 관계에 국한됐다. 그러나 이제 두 나라는 자국의 가치와 정책을 국제무대가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세계질서 구축을 위해 경쟁을 벌인다.남중국해에선 암초와 바위에 대한 영유권보다는 국제법이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특권기구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가 더 큰 일이다. 무역과 투자 분쟁에선 한쪽의 개방성·호혜성·다자주의와 다른 쪽의 보호주의를 세계 각국이 어떻게 봐야 하느냐가 쟁점이다. 문화와 미디어, 시민사회의 영역에선 국가의 이익이 집단이나 개인의 자유에 비해 어느 정도 중요한지 판단하는 것이 핵심적인 차이를 이룬다.이런 경쟁의 무대에서 승리하기 위해 중국과 미국은 파트너십과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세계적인 공동선을 추구하며, 다자주의에 입각한 제도와 기구를 만들고, 전 세계에서 소프트파워와 경제 관계를 증진함으로써 자신들이 선호하는 정책과 비전이 보편적으로 용인될 수 있도록 정통성을 확립해야 한다.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을 지켜본 국제정세 분석가 중 다수는 G2 양자 경쟁에서 중국이 앞서고 있으며 미국은 이미 패했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 주석은 일인 지배 체제를 굳혔다. 그러나 미국과 국제 언론이 그런 점을 과대평가한 면이 있다. 그 영향으로 앤서니 J. 블링켄 전 국무부 부장관 같은 지식인도 “트럼프 대통령이 글로벌 리더십을 중국에 넘겨주고 있다”고 말했을지 모른다. 그런 평가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중국의 성취에 대한 감탄을 똑같은 수준으로 반영한다. 다른 한편으로 시 주석이 자신의 글로벌리즘 찬가와 트럼프 대통령의 국수주의 허풍의 대조를 구태여 강조하는 연설로 그런 비교를 부추긴 면도 있다. 지난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은 시 주석의 연설은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바로 며칠 전에 나왔다. 그 연설은 만약 미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원치 않는다면 중국이 기꺼이 세계질서를 떠받치겠다는 선언으로 널리 해석됐다.10개월 뒤의 제19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에선 시 주석이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중국이 세계 무대에서 중심 역할을 떠맡겠다고 말했다. 미국이 리더십을 원한다고 해도 다른 나라들이 모방할 수 있는 모델은 중국이 제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 연설 사이에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파리 기후협정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글로벌 리더십 열망이 근거 있는 듯이 비춰졌다.시 주석 아래서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같은 중요한 지역 기구를 출범시켰다. 또 중국의 첫 해외 군사기지를 세웠고, 신실크로드 전략으로 불리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제시하며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인프라 구축에 대규모로 투자했다.세계 최대의 중산층과 무역 규모, 외환보유고를 가진 중국은 ‘국가종합실력’의 대부분 지표에서 급성장한다. 그에 따라 중국은 서태평양의 안보구조 재조정과 미국의 전략정책 재평가를 요구한다.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적인 정치 시스템 탓에 중국의 제도적·이념적인 영향력은 해외에서 대부분 환영 받기 어렵다. 중국의 힘이 더 강해진다고 해도 시 주석이 제19차 중국 공산당 당대회에서 선언한 ‘중국 모델’은 현대 세계를 이끌 중국의 능력을 방해할 게 분명하다. 중국의 리더십 역량에 의문을 제기하는 요인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중국이 다면화된 글로벌 시스템을 진정으로 이끌기 원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다보스와 다낭에서 시 주석은 신중하게도 ‘경제 세계화’만 거론했다. 글로벌리즘의 정치적·안보적·문화적·규범적인 측면은 쏙 빼놓았다.그는 중국이 찬란했던 옛 영광과 최근의 성공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중국의 부상을 가능케 했던 무역 정책을 이끌 자격을 갖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시 주석이 말하는 중국은 물질적·기술적 웰빙을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을 이끌 준비를 갖췄다는 뜻이다. 그는 그것을 ‘인류운명공동체’라고 불렀다. 그러나 법의 지배,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 대의정체,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다원주의 등 국제적 현대성의 특징과 개방된 시장, 글로벌 공급사슬 등을 증진할 수 있는 가치와 제도를 옹호하진 않았다.이런 사실은 중국의 글로벌 비전에 중대한 제한을 가한다. 쉽게 비교하자면 맹점이 있다기보다 눈 하나가 완전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구나 시 주석은 글로벌 경제 시스템을 이끌겠다고 제안했지만 중국 스스로 그 원칙을 수시로 위반한다는 모순도 커 보인다. 현실 세계의 실적이 이상적인 리더십을 손상시킨다는 뜻이다.중국의 높은 관세 장벽, 상대적으로 폐쇄된 경제, 지적재산의 침해와 강압적인 이전, 국가 정책의 일방적인 선전, 정치 문제를 빌미로 파트너를 무역으로 보복하는 행위는 시 주석의 경제개방 선언이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제19차 당대회에서 시 주석은 ‘중국의 지혜’가 세계를 이끌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그는 세계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서 진지한 해결책을 제시한 적이 없다. 시 주석은 지난 1월 다보스 기조연설에서 “전 세계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세계화 탓으로 돌릴 수 없다”며 “글로벌 리더들은 개방과 협력을 밀어붙여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중동·아프리카 난민 유입은 시장 개방이 아니라 전쟁과 분쟁, 지역적인 혼란 때문이며, 평화를 약속하고 화해를 도모하고 안정을 회복하는 것만이 해법이다.” 이것이 소위 ‘시진핑 사상’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건 전쟁과 분쟁, 혼란 같은 특정 단어의 반의어가 평화, 화해, 안정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얘기일 뿐 구체적인 알맹이가 없어 누가 봐도 정책 지침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난민 문제에 관한 장황한 언급은 2014년 내가 중국의 한 국제관계 학자와 가진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내게 중동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시 주석의 새로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시 주석이 그런 제안을 했는지 잘 모른다며 그게 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반드시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 시 주석의 생각”이라고 답했다. 제안이 아니라 그냥 하기 좋은 말처럼 들렸다.더구나 중국이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려는 열의가 진지하다고 해도 다른 나라들이 중국의 리더십을 따르고 싶어 하는지 여부도 문제다.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국제관계 교수이자 한국학연구소장인 데이비드 강은 2013년 쓴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중국은 인민을 위한 경제 성장의 가치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들이 본받으려 하거나 공유하길 원하는 다른 가치는 거의 다 옹호하지 않는다. 먼 옛날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오래 지속된 문명의 발생지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시아에서도 문명적인 영향력을 더는 갖지 못한다. 문명을 꽃피웠던 고대 그리스와 달리 현대 그리스가 지금 유럽에서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보라. 중국도 그와 마찬가지다. 현대 동아시아 국가나 사람들이 문화적 혁신과 국가적 가치, 현 시대의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동아시아 지역은 중국 리더십을 원치 않을 뿐 아니라 중국의 의도도 완전히 불신하지만 그런 사실은 중국 학자들에게 제시하는 외교적 이론에 의해 가려지고 있다. 시 주석은 “중화민족의 피에는 남을 침략하거나 세계를 억눌러 제패하려는 유전자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중국은 ‘천하’와 ‘왕도’ 사상에 뿌리를 둔 어진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세계를 안심시켰다. ‘천하’ 이론은 외국인이 자신의 문명 수준이 낮다고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중국에 복속되는 데서 중국의 탁월함이 나온다는 것을 가리킨다.시 주석은 중국이 이웃을 강압하는 미국식 ‘패도(覇道)’가 아닌 도덕과 인의를 앞세운 ‘왕도(王道)’로 국제질서를 새롭게 구축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도’ 아래선 지배적인 국가가 뛰어난 미덕과 자애를 베풀면 그 점을 인정하는 나머지 국가들로부터 존경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폭력을 통해 의지를 관철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요지다. 동남아에서 그런 발상을 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시 주석의 민족적인 유전학이 아니라 남중국해의 인공섬 건설을 통한 영유권 확대를 근거로 중국의 패권을 직시한다. 지난해 7월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중국의 ‘9단선’(남중국해에 그은 U자 형태의 선으로, 이 일대 바다의 90% 차지한다)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PCA는 남중국해 대부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은 불법이며,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권리 주장과 인공섬 건설은 국제분쟁을 악화시켰을 뿐 아니라 분쟁 지역의 산호초 및 자연환경을 파괴했다고 판결했다. 이에 중국은 PCA의 판결을 무시할 것이며, 남중국해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무력사용도 불사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중국의 이익을 존중한다는 정신이 모든 아세안 회원국들의 사고방식에 내면화되기를 기대한다”고 싱가포르 외무부 자문역인 빌리하리 카우시칸은 지적했다. 다시 말해 중국에 복속되는 국가들은 왕도 아래 펼쳐지는 자비의 대가로 정신적 자율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다.중국은 중화주의를 내세우며 자국의 우월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리더십을 떠맡음으로써 치러야 하는 대가를 감당할 준비가 돼 있을까? 내가 보기엔 아직 그런 증거는 거의 없다. 현대의 글로벌 리더라면 작고 큰 모든 국가에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을 제시해야 한다. 자국의 이익보다 글로벌 시스템의 이익을 앞세워야 하는 경우도 많다. 자국민에게 먼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달라고 주문해야 한다. 또 예고 없이 닥친 상황에 직면하면 정보가 불충분해도 위험부담이 큰 행동을 과감히 취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쏟아지는 비난도 무던히 감수해야 한다.그러나 중국의 정치 문화는 리더십의 그런 불가피한 측면을 혐오한다. 중국 공산당은 인민에게 언제나 고도로 도덕적이며 교화적인 용어로 외교 정책을 설명한다. 중국은 고유한 특성과 오랫동안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역사로 인해 다른 강대국들과 달리 이기심과 탐욕을 멀리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또 중국은 조화로운 사회를 추구하며, 자국의 안녕만을 원하고, 자신과 다른 모든 신념과 정치 체제도 존중하며, 다른 나라의 내정에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이런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이 너무나 오랫동안 중국의 집단의식 속에 주입되면서 벌써부터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온라인에서 해외 원조에 대한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중국 네티즌들은 거의 5억 명에 이르는 인민이 하루 5.50달러(약 6000원) 미만으로 살아가는 현실에서 중국이 왜 가난한 외국인을 도와야 하느냐고 묻는다.또 중국은 유엔 평화유지군을 가장 많이 파견한다고 걸핏하면 자랑한다. 그러나 지난해 남수단에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됐던 중국 군인 여러 명이 전사하자 네티즌은 아프리카의 평화를 지키려고 중국인이 희생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며 거세게 항의했다.최근의 19차 당대회에서 확정된 시 주석의 두 번째 5년 임기(2017~2022년) 동안 중국이 진정한 글로벌 리더십을 떠맡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는 이번 당대회에서 중국의 주요 모순을 “인민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수요와 불균형, 불충분 간의 모순”으로 정의하며 인민의 복지를 늘리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낳은 불평등과 부패 문제 등을 해결해 중국판 복지국가인 ‘샤오캉(小康, 모든 인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는 뜻)’ 사회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같은 대내적 도전을 고려하면 중국은 역내 영향력을 서서히 강화하는 길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중국이 무력 시위와 원조 외교를 통해 세계 무대에서 특권을 주장하려는 노력은 지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외부의 도발이 있거나 너무 좋아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를 제외하면 중국이 성급하게 리더십을 떠맡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또 중국은 세계적인 평판을 높이고 행동 반경을 넓히기 위해 소프트파워 투자를 지속하는 동시에 미디어를 통해 중국의 주장을 알리고 그대로 믿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규제를 받는 중국의 문화는 해외에선 물론 자국에서도 호소력이 떨어진다. 당연히 외부에선 중국 공산당의 관영 매체를 선전기관으로 볼 수밖에 없다.소프트파워에 대한 중국의 개념적 문제는 더 심각하고 역설적이다. 중국 공산당은 권위주의적 통치만이 국내 안정과 경제 발전을 제공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그런 믿음에 따라 그들은 비밀주의에 기초한 압제적인 통치와 소통 방식을 채택했으며, 그런 관행에 길들여졌다.만약 중국이 이런 관행을 세계무대에 적용한다면 곧바로 외국인들의 거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투자를 환영하는 나라도 그 측면에선 예외가 아닐 것이다. 중국 공산당도 그런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국내에서 강경 정책을 펼치는 상황에서 대외적으로만 권위주의를 떨쳐버리고 편안하게 대화할 순 없다. 외부 세계와 긴밀히 교류하는 중국인이 너무 많아져 더는 이중 잣대가 용납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곤경에 처했다.무엇보다 중국의 통치 이론은 글로벌 리더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 주석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길 바라지만 그 세계무대엔 이미 회의주의, 냉소주의, 불손, 논리적 반박, 요란한 논쟁, 터무니없다는 비난과 비판이 무성하다. 중국의 공공 담론에선 전부 금지된 행위다. 그런 현실을 시 주석이라고 바꿔놓을 수 있겠는가?싱가포르 외무부 자문역 카우시칸은 “개방된 시스템의 리더는 자신도 개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유화가 좀 더 진행되면 공산당의 지배 체제가 위태로워진다고 중국 공산당은 우려가 크다.” 이런 조건에서 중국이 영향력을 계속 키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제적으로 번창할 순 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이 행사했던 방식의 리더십은 중국으로선 그림의 떡일 뿐이다.‘시진핑 사상’의 승리주의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시스템을 이끌 중국의 능력은 한참 떨어진다. 그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1945년 이래 상대적으로 어느 때보다 힘이 빠진 상태지만 아직도 중국이 부러워하는 패를 들고 있다.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본능은 세계 문제에서 발을 빼는 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아직 실망하긴 이르다. 경쟁에서 이기고, 존경 받고 싶어하는 그의 욕구는 글로벌 리더십 쟁취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정책을 촉진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위대함’이나 자신의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발휘되는 지리적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확신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여러 가지 다른 ‘팩트’도 그에게 미국의 글로벌 이익 추구를 강요할 것이다. 나는 지난 1월 중국 문제 전문 매체 ‘차이나파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조만간 트럼프 대통령은 아시아 재균형(Rebalance to Asia) 정책의 전략적 근거를 반드시 재발견할 것이다. 그 근거를 더 빨리 발견할수록 낫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 기간에 여러차례 표명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구상은 아직 설익고 정의도 분명치 않으며 미온적인 언급이긴 하지만 아시아 재균형 전략으로 돌아서는 과정이 벌써 시작됐다는 조짐일지 모른다.미국과 중국은 이제 쌍방간의 쟁점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정립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세계 질서에 영향을 미치려고 경쟁하는 상황으로 돌입했다. 이 경쟁의 무대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든 그 국가는 국제관계의 사소한 좌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통 큰 자세를 가질 수 있다. 반면 패배하는 나라는 설사 자국의 국제적인 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축하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중국은 공산주의 이념에서 비롯되는 불리함을 안고 있지만 무엇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지, 자국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전략을 채택해야 할지 확실히 아는 상황에서 경기장에 들어섰다. 미국은 중국보다 유리한 여건을 갖췄다. 아울러 두 나라의 시합을 구경하는 국가 중 미국을 응원하는 쪽이 훨씬 많을 듯하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로커룸의 벤치에 혼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무심하게 TV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시합이 시작됐으며 상대가 점수를 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의 귀에는 들썩이는 관중석의 응원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하다.미국이 얼마나 오래 이런 상황을 지속할 수 있을까?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축돼 세계무대에서 내몰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로버터 데일리※

2017.12.1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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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16)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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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를 만든 인물들은 거의 누구나 사후 평가 측면에서 부침을 겪었다. 잊혀졌다가 다시 재조명을 받으며 각광받는다. 그 정도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만큼 심한 인물은 없다. 미국 독립혁명기에 콜럼버스는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됐다. 하지만 20세기, 21세기에 그는 불세출의 영웅에서 살인마로 전락했다. 미국 혹은 미주 대륙 전체를 지칭하는 말은, 이탈리아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의 이름에서 따온 ‘아메리카(America)’다.(중남미 사람들도 엄연히 아메리카노스(Americanos), 아메리카인이다.) 하지만 역시 이탈리아 탐험가로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에서 유래한 ‘컬럼비아(Columbia)’ 또한 미국·미주를 지칭하는 역사적 표현이다. 덜 쓰이는 아메리카의 동의어다. 특히 시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비록 컬럼비아가 미국 국명이 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수도 이름으로 채택됐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DC는 ‘컬럼비아 특별구(District of Columbia)의 약자다. 오하이오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주도도 컬럼버스다. 아이비리그 명문 컬럼비아대학도 그의 이름을 담고 있다. ━ 불세출의 영웅에서 살인마로 전락하기도 오늘의 세계를 만든 인물들은 거의 누구나 사후 평가 측면에서 부침을 겪었다. 잊혀졌다가 다시 재조명을 받으며 각광받는다. 그 정도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만큼 심한 인물은 없다. 사후 16세기 초반까지는 거의 무시됐다. 16세기 중반에는 역경을 이겨낸 비전으로 역사를 바꾼 인물로 부활했다. 18세기에는 영국과 거리를 두려는 미국인들이 콜럼버스를 미국 정체성 근거의 한 요소로 삼았다. 미국 독립혁명기에 콜럼버스는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됐다. 19세기 말 가톨릭 신자들인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에게 콜럼버스는 영감과 롤모델의 원천이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는 컬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400주년을 맞아 (1893)를 작곡했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프랑스 사람들이 그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그가 성인이 되는 데 필요한 기적이 없었다. 또한 그에게 아들 페르디난드를 낳아준 정부(情婦) 베아트리스 엔리케스 데 아라나와의 관계도 문제시됐다. 20세기, 21세기에 그는 불세출의 영웅에서 살인마로 전락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인도(人道)에 반(反)한 죄(crime against humanity)를 지었다. 대략 1970년 대에 콜럼버스에 대한 공세가 본격화됐다. 문화다원주의의 부상이 한 몫 했다.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인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은 미국의 연방 공휴일이다. 공휴일 폐지 운동도 있다. ‘콜럼버스의 날’은 인디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짓이라는 것이다. 콜럼버스 깎아내리기에 또다른 충분한 근거는 그가 미주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1만4000년 전부터 북미의 인디언과 중남미의 인디오가 이미 미주 대륙을 발견해 살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마다가스카르까지 진출한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남미에 도달했다. 뒤를 이어 1000년께 레이프 에이릭손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에이릭손은 오늘날의 미네소타까지 도달했다. 한편 한 인디언 여성이 아이슬란드로 이주해 정착하기도 했다. 에이릭손은 콜럼버스를 아메리카를 ‘재발견’한 사람으로 떨어뜨렸다. 마르코 폴로가 13세기 중엽에 알라스카 땅을 밟았다는 설도 있다. 어쩌면 1405~1435년 세계의 대양을 누빈 중국의 정화(鄭和, 1371~1434) 원정대도 콜럼버스의 선배다. 정화가 1421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요즘은 ‘조우(遭遇, encounter)’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발견’을 대체했다. 역사적 위인들은 신화에 휩싸여 있다. 콜럼버스도 마찬가지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압축적으로 콜럼버스의 업적을 상징하지만, 꾸며낸 이야기다. 그의 항해 자금을 대기 위해 이사벨 1세 여왕(1451~1504) 자신의 보석을 팔았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콜럼버스가 지구가 편평하다는 당시 사람들의 믿음을 거슬러 동인도에 가려고 했다, 지구가 편평하다고 믿는 가톨릭 신학자들이 콜럼버스의 계획에 반대했다는 말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 항해를 해야 하는 선원들이나 당시 교육받은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실리콘밸리를 연상시키는 콜럼버스 스토리 콜럼버스는 미스터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어떻게 스페인 카스티야 왕실을 설득해냈는지 불확실하다. 생전에 그린 초상화가 없기에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가 묻힌 장소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그의 일기와 서신이 거의 다 사라졌기에 그의 인생을 재구성하기 힘들다. 콜럼버스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상 중 일부가 유대계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가 ‘동인도’를 향해 떠난 1492년 8월2일은 스페인의 유대인들이 개종과 처형 중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데드라인이었다. 콜럼버스의 성공 덕분에 1492년은 한때 세계의 3분의 1을 지배한 스페인의 제국 건설이 시작된 해가 됐다. 동시에 콜럼버스는 세계화의 선구자다. 토머스 프리드먼처럼 그가 대서양을 건너 미주 대륙을 발견한 1492년을 세계화의 기점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콜럼버스의 삶을 조명하면 유럽이 세계의 나머지를 앞서게 된 이유가 일정부분 파악된다. 그에게는 아이디어가 있었고 그 아이디어의 가치를 인정받아 ‘펀딩’을 받을 수 있었다. 카스티야의 군주들은 엄청난 고위험 고수익 프로젝트에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콜럼버스의 성공 스토리는 실리콘밸리를 연상시킨다. 콜럼버스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그 시대의 벤처 기업가였다. 벤처 기업가는 CEO로서 거짓말은 안되지만 적절한 과장은 구사해야 할 때가 있다. 콜럼버스는 자기홍보에 능했다. 서쪽으로 가는 항해를 장밋빛으로 잘 포장한 덕분에 그의 두 번째 항해에서는 17척의 배와 1200명의 인력을 확보했다. 키가 183cm였던 그는 학구적인 인물이었다. 지리서·역사서 등 방대한 독서를 했다. 특히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쓴 『동방견문록』을 콜럼버스는 책의 여백에 메모를 해가며 꼼꼼하게 읽었다. 그가 남긴 글을 분석해보면 문체와 단어 선정, 글씨체로 보아 콜럼버스는 어려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독서를 통해 내린 결론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이 있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아니었다. 보고 싶은 것만 봤다. 그가 발견한 것은 동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이라는 것을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콜럼버스가 자신이 발견한 땅의 ‘실체’를 3번째 항해부터는 알았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뱃사람의 길에 들어선 그는 지중해·서아프리카, 그리고 아마도 아일랜드까지 가봤다. 1478~1484년께 서쪽 해상루트로 동인도로 가겠다는 구상을 갖게 됐다. ‘동인도(東印度)’ 즉 “인도·인도차이나·말레이제도를 포함하는 지역”은 황금과 향신료가 기다리고 있는 땅이었다. 그는 특히 독서를 통해 유럽에서 중국으로 가려면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치는 것보다 대서양으로 가는 게 더 빠르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477~1485년 리스본에 체류한 그는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영국·이탈리아 왕실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다. 1483년 계획안을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에게 제출했다. 거절당했다. 포르투갈은 희망봉을 거쳐가는 동쪽 루트에 집중했다. 그의 구상을 수용한 것은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이었다. 우여곡절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책결정자들은 ‘위원회’를 꾸린다. 위원회의 전문가들 또한 서쪽으로 가면 동인도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다만 서쪽 뱃길이 더 빠르다는 콜럼버스의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콜럼버스는 아시아까지 3900km만 가면 된다고 계산했다. 실제 거리는 2만 km다. 이사벨 1세가 고해신부의 조언을 듣고 불가 결정을 내렸으나 남편 페르난도 2세가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이 공동군주들은 콜럼버스와 1492년 4월 항해를 허용한다는 산타페 협약을 체결했다. 콜럼버스는 성공할 경우 ‘대양 제독’이라는 호칭, 그가 발견해 스페인에 편입시킬 땅의 부왕·총독 자리와 수익의 10%를 보장 받았다. 1492년 세 척의 배(니냐·핀타·산타마리아)로 그는 항해 5주 만에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에 도달했다. 1492~1503년 4차례의 항해를 통해 그는 쿠바·아이티·마먀 문명을 발견했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영웅은 ‘영웅적인 일을 달성한 보통사람’이다. 보통사람은 약점이 많다. 콜럼버스는 위대한 탐험가·항해가였다. 밤하늘만 슬쩍 보고도 뱃길이나 날씨를 예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반대로 항해가로서도 그가 무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행정가로서는 의문이 남는다.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무자비한 폭정에 대한 소식이 1499년 국왕의 귀에까지 전달됐다. 특히 그가 인디오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세례를 금하고 있다는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1500년에 결국 해임된다. 그는 옹졸했고 남의 공을 가로채기도 했다. 육지를 처음 본 사람이 종신연금을 받게 돼 있었는데 1492년 10월 12일 아침 2시에 “육지다!”라고 처음 외친 것은 망보고 있던 로드리고 데 트리아나라는 선원이었다. 연금을 가로챈 컬럼버스는 훗날 자신이 몇 시간 전에 육지의 불빛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 위대한 탐험가·항해가였던 콜럼버스의 도전 콜럼버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제, 징기스칸, 히틀러, 나폴레옹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살인마 반열에 올라 있지만, 동시에 여러 고장에서 서로 차지하려는 인물이기도 하다. 출신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탈리아반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는 게 정설이지만 반론도 있다.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아르메니아 등이 그의 출신 지역으로 제시된다.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와 미주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다른 인물이라는 설도 제기됐다. 콜럼버스의 조상이 스코틀랜드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사실 콜럼버스의 머리칼은 금발 혹은 붉은 색이었고 30세 나이에 백발이 됐다. 콜럼버스와 그리스도교의 관계는 복잡 미묘한 문제다. 지금 남아있는 그의 글에는 예수·마리아·성인들과 성경구절 인용으로 가득 찼다. 황금과 노예를 찾아 나선 콜럼버스였지만 신(神)이 자신에게 소명을 부여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스도교 전파는 그에게 중요한 항해 목적이었다. 그가 황금 찾기에 혈안이 됐던 이유는 이스라엘에서 무슬림들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예수의 재림 전에 예루살렘을 그리스도교의 성지로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중세 신학자들의 문헌을 바탕으로 예수의 재림이 155년 남았다고 믿었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작용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1492년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스페인은 종교적인 열정으로 불탔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자행했다. 어쩌면 그가 초래한 ‘환경학살(ecocide)’는 한가한 이야기다. 그는 인디오들을 학살했다. 노예로 팔았다. 어린 여자 아이들을 성노예로 팔았다. 집단 자살하는 인디오들도 있었다. 가톨릭 교리상 신자를 노예로 삼을 수 없었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세례를 금지했다. 도망가는 노예들은 산 채로 불에 태웠다. 그가 통치한 히스파니올라는 그가 도착하기 전 인구가 300만이었으나 도착 후 20년 만에 인구가 6만으로 줄었다. 50년 후에는 수백 명 남았다. 물론 학살 보다는 병균이 큰 원인이기는 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신앙과 행위 사이의 모순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는 광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야만을 무기삼아 그들의 문명을 전파했다. 가톨릭 교회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시작한 만행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당시 일부 유럽인들은 인디언·인디오가 아예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아니라면 세례를 줄 필요도 없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노예로 삼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바오로 3세 교황(재위 1534~1549)은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내용이 담긴 교황 칙서 《하느님의 초월성(Sublimus Dei)》을 1537년 공포했다. 인디오들을 노예로 만들려는 유럽 군주들의 정책을 단죄한 것이다. 중남미에서 가톨릭 교회는 압제자들의 편에 서기도 하고 고통 받는 인디오들을 대변한 유일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 성공 거두고 이름 남겼지만 개인적으론 불행해 교회는 항상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가톨릭 교회를 탄압했다. 교회가 진보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은 ‘해방신학’을 전개시키며 피압박인 편에 섰다. 해방신학에 상대적으로 부정적이었던 전임 두 교황에 비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을 수용하려는 제스처를 보이고 있다. 신화와 다르게 콜럼버스가 가난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기 연민과 회한에 빠진 채로 54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했을 때 이를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최고경영자(CEO)들은 냉정하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는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 소위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도전은 미지의 세계로 향해 떠나는 것이다. 인공지능(AI)이나 생명공학의 발전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다. 전혀 보장할 수 없는 길이다. 일단 가는 것이다. 원래 목표인 아시아가 아니라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일도 많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는 불행했다. 사생활도 없이 자신의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앞으로 수십년 간 여러 혁명이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1550~1800년에 중남미는 전세계 은의 80%, 금의 70%를 생산했다. 눈앞에 이미 시작된 혁명에서도 금맥이 발견될 것이다. 콜럼버스라면 그 길을 갈까. 아마 갈 것 같다. 불교에서는 집착을 버리라고 하지만 그는 집착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불행하게 된 것일까.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

2017.06.24 09:12

8분 소요
[리뷰, 다보스포럼(3) | 다보스가 내놓은 포퓰리즘 해법] ‘열린 도시’가 포퓰리즘의 해독제

산업 일반

글로벌 도시 특성은 긍정적·포용성·다원성 … 이주민 많은 곳이 범죄율 낮아 현재 전 세계를 관통하는 정치·경제 현상 중 하나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과 국가주의의 득세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Brexit·브렉시트) 등으로 확인됐다. 대중의 인기만을 좇는 포퓰리즘과 국가주의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 레이놀드 달리오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 최고경영자(CEO)와 로버트 머가 이그라페인스티튜트 이사, 티모시 가턴 애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등이 다보스에 둘러앉아 해법을 모색했다.티모시 가턴 애시 교수는 ‘도시’에서 그 답을 찾았다. 도시 자체가 포퓰리즘을 치유하는 ‘해독제’일 수 있다는 얘기다. 글로벌 도시는 상향식(bottom-up)으로 정치·경제·환경 활동을 재구성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긍정적·포용적·다원적이라는 3가지 특징이 있다. 애시 교수는 “다양한 종교·언어·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생활하면, 포퓰리즘이 유포한 ‘타자’라는 고정 관념은 매일 경험에 의해 반박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주장은 포퓰리즘의 뿌리를 살펴보면서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국가주의에 기반한 포퓰리즘은 주로 경제 변동성이 클 때 인기였다. 최근 포퓰리즘도 뿌리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비롯됐다. 이때 발생한 경제적 재앙이 정치적 반발로 이어진 것이다. 글로벌화가 제공한 혜택의 이면에는 일자리 감소와 불평등 확산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깔려 있다. 여기에 노출된 사람들은 임금 하락이나 실업이 사회 엘리트층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분노한다. 경제·사회적 변화가 점점 빨라지면서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는 축소하고 있다. 일부 대중이 카리스마 있는 독재자가 내놓은 단순한 해답을 따르고자 하는 유혹이 생기는 배경이다. ━ 경기침체로 득세하는 포퓰리즘·국가주의 인구 구조를 살펴보면 영국·미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폴란드에서 포퓰리즘이 부상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포퓰리즘은 토박이 인구가 감소하는 준도시와 농촌을 중심으로 확산한다. 반면 국제적 도시에서는 포퓰리즘이 감소한다. 실제로 중소도시 유권자 다수는 트럼프 정부와 브렉시트를 지지했고, 대도시 유권자는 정반대로 투표했다고 로버트 머가 이사는 다보스포럼에서 발표했다.갑작스럽게 인구가 유입되는 배경을 살펴보면 통상 이민과 같은 정부 정책이 영향을 미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민자들의 도시가 형성된 이후, 규모에 걸맞게 학교·병원 등 지역 서비스를 높이기 위해 정부가 자원을 투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머가 이사는 “이 같은 현실은 사람들이 이민을 인식하는 방식에 왜곡을 일으키고 포퓰리즘의 불씨를 자극한다”고 말한다. 무슬림 인구를 과대평가하는 현상이 대표적 사례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미국 인구의 17%가 무슬림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 무슬림 인구 비율은 고작 1% 안팎이다. 영국인은 자국에 거주하는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21%라고 믿지만, 실제 비율은 약 5%다. 머가 이사는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은 자국 무슬림 인구가 실제보다 3~5배 많다고 과다추정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잰 워너 뮐러 프린스턴대 정치학과 교수는 “포퓰리즘의 핵심은 다원주의에 대한 깊은 거부감”이라며 “기득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시작된 포퓰리즘의 칼날이 이주민에게 향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들이 진짜 배척하고자 한 것은 사회 기득권층이지만, 다양성을 반대하는 행위로 왜곡됐고, 결국 이민자들을 몰아내자는 주장에 동조하게 됐다는 뜻이다. ━ 이념 아닌 개방과 폐쇄로 분열된 세상 그렇다면 어떻게 포퓰리즘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다원도시’가 해법이 될 수 있다. 도시는 국가주의의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보 달더 글로벌어페어스 시카고카운슬 회장은 “우리는 더 이상 ‘좌우’나 ‘보수·진보’로 분열된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개방과 폐쇄’로 분열된 세상에 살고있다”며 “세계화된 도시는 개방성의 선봉에서 국경·시장·사회·마음의 개방을 독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시는 민주주의 정치 발전 과정에서 시련의 장이다. 도시는 언제나 갈등과 마찰을 경험한다. 현대의 거의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이 시작된 곳도 도시다. 벤자민 바버 세계시장의회 설립자는 “도시는 다문화와 관용, 그리고 개방사회의 보안관”이라고 비유했다.포퓰리스트는 이주자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이주민들이 많은 도시가 범죄율도 높다고 생각한다. 이주민 서비스가 부족한 초기 도시의 범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다원화·세계화된 도시는 상황이 다르다. 이런 도시에서 이주민들이 원주민보다 범죄에 가담할 확률은 낮다. 외려 외지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는 범죄율이 더 낮다. 예컨대 영국은 이주민이 1%포인트씩 증가할 때 도시 범죄가 0.4%포인트씩 줄어든다. 도시는 국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네트워크도 구축 중이다. “이미 도시는 국제적 위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게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모인 인사들의 생각이다. 예컨대 최근 출범한 ‘세계시장협약’은 공약으로 ‘도시 영향력 확대’를 내세웠다. 119개국 7100개 도시가 6억 명의 도시 주민들을 대표해 만든 세계시장협약은 저탄소 사회 구축에 자원을 투자하고 타 도시의 동참을 유도할 계획이다.다보스포럼은 앞으로 도시가 ‘보호구역(sanctuary)’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다 주도적인 자세로 포퓰리즘 이데올로기와 맞서 싸우고, 이주·통합에 대한 공개 토론을 펼치고, 다원주의의 혜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역할을 도시가 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도시는 이주 문제에 더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유럽 도시 네트워크인 ‘유로시티’를 구성한 130개 도시는 유럽 난민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 있지만, 독일 콜로뉴나 스웨덴 스톡홀름과 같은 도시는 이민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개토론을 추진한 바 있다. 다원화 도시의 핵심은 다양한 단체의 상호 대화와 교류다. 접촉이 늘어나면 포퓰리즘을 촉진하는 주범인 ‘편견’을 줄일 수 있고, 관용적이고 탄력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나아가 다보스포럼은 “국가가 아닌 도시가 미래 사회의 중심축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미 도시에 살고 있으며, 아시아 주요 도시에는 매월 500만 명의 이주자가 유입 중이다. 이런 도시가 확산하면 창조성과 갈등을 중재하는 장이 벌어지고, 결국 포퓰리즘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게 다보스포럼의 주장이다.

2017.02.12 16:37

4분 소요
‘현대 유학의 최고봉’ 뚜웨이밍 중국 고등인문연구원장

산업 일반

세계적인 유교학자 뚜웨이밍(杜维明) 중국 북경대학 고등인문연구원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유교를 믿는 사람은 단순히 생각하고 성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철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뚜웨이밍 원장을 10월 8일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인터뷰했다. 같은 인물을 부르는 말이지만 공자(孔子)·쿵쯔·콘푸키우스(Confucius)·컨퓨셔스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주윤발(周潤發, 저우룬파) 주연의 중국영화 (2010)를 보고 상당한 ‘문화 충격’에 빠진 독자도 꽤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의 공자와 주윤발의 공자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공자가 사실은 실제 공자의 모습에 가까울 수도 있다. 누가 진짜 공자일까. 공자는 누구인가? 그는 세상을 주유하며 어떤 꿈을 꿨을까. 선불교의 주요 화두인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만큼이나 그 답이 알고 싶은 질문이다. 또 세속적 관점에서는 일개 ‘실패한 관리’에 불과한 공자는 어떻게 유교의 창시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됐을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도 있는데 왜 유교는 중국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할 것인가. 한국은 앞으로 유교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세계적인 유교학자 뚜웨이밍(76) 중국 북경대학 고등인문연구원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경희대학교와 (재)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 주최하는 문명전환강좌 시리즈 ‘세계 지성에게 묻는다:문명전환과 아시아의 미래’에서 강연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자란 뚜웨이밍 원장은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프린스턴대·UC버클리·하버드대에서 가르쳤다. 그를 빼놓고는 현대 유학·유교의 흐름을 논할 수 없다. 다음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나눈 인터뷰 요지. ━ 통치자는 서번트 리더십을 발휘해야 공자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인류 공동체의 안녕(安寧)을 위해 헌신한 학식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는 은둔자가 아니다’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이해했다. 그는 세계를 완전히 벗어난 영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그는 특히 정치 영역에서 세상의 상태를 향상하려고 했다. 그는 상당한 야망을 품었던 것 같다. 요즘으로 치면 총리의 자리에 오르는 게 그의 세속적인 목표였는가. 별로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관리가 되려고 시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인간의 조건을 변화시키고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치에 가담한 사람들이 특히 영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래서 정치에 관심을 두었지만 그에게 정치 참여는 목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바꾸는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했다. 공자는 당시 분열된 중국의 통일을 꿈꿨는가. 그는 중국의 통일보다는 세계의 평화를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수양, 가정 내의 규율, 국가의 가버넌스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 보편적인 평화에 대해 말했다. 또한 평화뿐만 아니라 번영이 그의 관심사였다. ‘유교는 종교냐 아니면 철학이냐’하는 논란에서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유교는 종교이자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적인 철학(religious philosophy)’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유교는 철학이지만,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철학이다. 또한 유교는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신앙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교를 믿는 사람은 단순히 생각하고 성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 철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한다. 동아시아 경제 발전에 유교가 어느 정도까지 공헌했는지에 대해 학술적 논란이 있다. 한·중·일과 홍콩·싱가포르·베트남 등 유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은 모두, 일단 시장경제를 채용한 다음에는 빠른 경제 성장을 체험했다. 유교와 발전은 어떤 관계인가.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이 ‘유교는 근대화의 장애물이다’라고 믿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부상은 유교적 교육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 서구와는 다른 근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아마도 동아시아 모델은 개인 이익의 극대화보다 협력, 소통, 협업, 상호 존중을 보다 존중한다. 유교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을 것이다. 유교는 경제발전에는 좋고 정치에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유교 입장에서 경제발전 또한 수단이다. 목표가 아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부자가 돼야 한다. 부(富)를 추구하는 과정은 공정해야 하며, 부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통치자는 종복(從僕)이 돼야 한다. 통치자는 사회 전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발휘해야 한다. 유교는 민주주의적이 아니지만 민본주의적이다. 유교는 인간을 ‘좁게’가 아니라 ‘넓게’ 본다. 인간은 단순히 ‘경제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이며 문화적 존재다. 또한 생태적(ecological) 존재다. ━ 유교가 경제발전을 용이하게 할 수 있어 많은 한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유교를 비즈니스에 적용하는 데 큰 관심이 있다. 그들은 『논어』를 중시한다. 유교는 비즈니스에 좋은 체제를 제공하는가. 금융위기 전에는 유교가 동아시아의 활력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사람들은 지나친 국가주의, 정경유착, 인맥에 대한 지나친 의존, 개인의 존엄성이나 인권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등 부정적인 요소들을 살피게 됐다. 하지만 우리가 유교를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본다면, 유교가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는 아니지만 경제발전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유교는 인류의 자기실현을 위한 길을 제시한다. 올바른 인간이 되는 길을 배운다는 게 유교적 휴머니즘(Confucian Humanism)의 가장 중요한 특질이다. 유교는 완전한 인간의 성숙과 번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경제는 인간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측면을 포괄하는 ‘유교 이야기’에서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유교는 부활하고 있는가. 그렇다.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 차원에서 그렇다. 부활의 과정은 하향식(top-down)이 아니라 상향식(bottomup)이다. 유교에 대한 관심은 널리 퍼져 있다. 중국은 한국과 달리 역사적 기억과 유산을 대폭 상실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잔인한 침략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문화적 연속성은 탄탄하다. 대만·홍콩·싱가포르도 문화적 연속성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불가역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유교의 부활은 국가 주도 아닌가. 위험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유교의 부활이 처음 시작된 곳은 학계와 대학이다. 1980년대에 대학생들은 서구에 관심을 가지는 한편 중국의 문화적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교에 대한 문화혁명 당시의 공격을 극복하려고 했다. 정부는 학계·재계 그리고 일반 대중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교 부활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려고 한다. 정부는 유교 부활에 소외되지 않기 위해 가담하려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유교를 이용해 위계서열적인 통치를 도모하려는 것은 아닌가. 세상은 보다 복잡하게 바뀌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중국 정부가 가장 막강한 세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겠지만 군림할 수는 없다. 세상이 보다 다원주의적(pluralistic)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부 자체가 다원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사회에 명령하는 게 아니라 사회와 협력하고 협상해야 한다. 한국의 유교를 어떻게 보는가. 나는 사실 한국의 유교를 상당히 오래 전부터 연구했다. 1967년부터다. 그래서 퇴계와 다산의 연구에 대해서도 친숙하다. 나는 한국 유학이 유교 전통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본다. 유교는 중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사실 한국의 유교·유학은 중국 중심의 유교·유학에 대한 이해에 도전한다. 그래서 유교·유학(Confucianism)보다는 복수형으로 유교들·유학들(Confucianisms)이라고 해야 한다. 이들 전통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서로 보완관계다. 한국의 유교 전통은 매우 풍성하다. 한국의 유교는 사회적으로나 군주의 권력에 대해 매우 강력했다. 사회적으로 중국 유교는 한국 유교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그가 지닌 특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군주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고 동등한 위치에서 유교 세계에 참가하는 일개 구성원에 불과했다.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동아시아는 새로운 유교를 창안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 또 불가피하다. 유교의 부활과 부흥은 복고적인 형태를 띄면 안된다. 오늘날 세계의 위기와 난제에 대답하는 형태가 돼야 한다.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통일 한국의 인구는 독일과 비슷하다. 한국은 그리스도교 인구의 비중이 크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을 ‘유교적 그리스도교인’, ‘그리스도교적 유교인’으로 이해한다. ‘휴머니즘적 유교’와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상호 이해를 넓힐 것이다. ━ 한국 유교가 중국에 가르칠 게 많다 미래의 유교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미래 유교가 ‘영적인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고 본다. ‘영적인 휴머니즘’으로서 유교는 지구를 보살필 것이며 다른 영성 전통을 존중할 것이다. 새로운 유교는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로 이해할 것이다. 인류 공동체와 지구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또 그리스도교·이슬람·불교 등 다른 전통을 존중할 것이다. 유교의 ‘하늘’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하나님과 어떻게 다른가. 하늘은 편재하는(omnipresent) 존재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하늘은 모든 것을 느낀다. 그래서 하늘은 모든 것을 안다(omniscient). 하지만 하늘은 전능한(omnipotent) 존재가 아니다. 하늘은 창조주(creator)가 아니다. 우리와 하늘은 우주적 질서에 함께 참가하는 ‘공동창조주(cocreator)’다. 유교를 유럽·미국에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 사실 유교는 16~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啓蒙主義)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이프니츠, 볼테르,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칸트, 등 유럽 사상가들은 중세 그리스도교와 거리를 두고 싶어했기 때문에 유교가 대안이었다. 이제 지나치게 돈벌이에 치중하는 소유욕에 사로잡힌 개인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다.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이슬람 등 전통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자 한다. 유교 또한 인간의 조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 제공할 것이다. 유교가 극복해야할 단점은? 지난 200여 년간 유교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양성평등과 관련해 페미니즘의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유교는 아직 지나치게 가부장적, 위계서열적이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유교는 아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앞으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 나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 나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 유교 전통에서 해답을 추출해야 한다. 유교에 대한 선생님의 공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유교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제 유교는 동아시아를 넘어 유럽·미국·아프리카의 유교가 돼야 한다. 내가 수행한 작업은 세계라는 공동체에서 유교 세계화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중국식·한국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들은 동시에 글로벌 시민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뿐만 아니라 천하(天下)의 모든 사람들을 보살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은? 한국의 유교 전통은 매우 풍성하다. 한국은 한자를 버렸기 때문에 유교 전통으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태극기나 화폐 속 등장인물만 봐도 얼마나 한국의 유교 전통이 뿌리 깊은지 알 수 있다. 한국 유교는 중국에 가르칠 게 많다. 한국 드라마가 중국에서 인기 있는 이유도 중국인들이 한국 드라마를 통해 유교의 가치를 배우기 때문이다. - 김환영 중앙일보 논설위원 kim.whanyung@joongang.co.kr ━ 플라톤 아카데미는?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는 국내 최초로 인문학 지원을 위해 2010년 11월 설립된 재단이다. 설립 목적은 “인간 정신의 보편적 발전과 인격의 탁월함을 추구하는 성찰의 인문학을 심화·확산시킨다”이다. 기원 전 387년 플라톤이 설립한 ‘아카데미아’는 그리스 최초의 학교로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학자들의 공동체로 출발해 서양 문명의 사상적 원류가 됐다. 1462년 피렌체의 유력한 가문의 수장이자 르네상스 예술과 인문주의 운동의 후원자였던 코시모 데 미디치는 ‘플라톤 아카데미’를 부활시켜 르네상스와 근대정신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는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인문학 연구자와 학문 공동체를 꿈꾸며 인문학의 심화와 확산을 위해 노력한다. (재)플라톤 아카데미는 올 한 해 ‘세계지성에게 묻는다: 문명전환과 아시아의 미래’강좌를 통해 인류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을 시민들과 공유하고, 우리 미래를 공동으로 기획하는 장을 펼쳐 내고자 노력해왔다.

2016.11.2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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