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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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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심 잃고 좌·우파 정치 협공까지…흔들리는 마크롱 정권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개혁에 힘을 실어줄 범여권 연합인 ‘앙상블(다함께)’이 6월 19일 치른 총선 결선투표에서 하원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해왔던 경제‧사회 분야 개혁 정책이 속도 조절의 길을 걸을 것인지, 오히려 더욱 강력한 추진으로 마크롱의 정치적 브랜드를 확고히 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인다. 6월 12일의 총선 1차 투표에 이어 1주일 만인 19일에 열린 결선 투표에서 앙상블은 38.57%를 득표해 577석의 하원 의석 중 245석을 얻는 데 그쳤다. 289석 이상인 과반에서 45석이 부족한 것은 물론 2017년 총선에서 마크롱이 확보했던 의석보다 무려 105석이나 줄었다. 반면 1997년 이후 처음으로 4개 정당이 힘을 합쳐 선거를 치른 좌파연합 뉘프(NUPES‧신민중연합환경‧사회)는 31.60%를 득표해 131석을 얻었다. 연합세력으로선 2위의 의석이다. 뉘프에 참가한 극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와 녹색당‧사회당‧프랑스공산당 등 4개 정당은 지난 총선에서 획득했던 의석보다 79석을 더 얻었다. 이번 좌파연합은 장 뤽 멜랑숑이 이끌었다. 프랑수아 미테랑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을 배출했던 전통의 중도좌파인 사회당이 초라한 모습으로 극좌 정당과 손잡고 좌파 연합에 참여한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프랑스 공산당도 마찬가지다. 사회당은 지난 대선 1차 투표에서 불과 1.7%의 득표율로 당 자체가 존폐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 공산당의 2.3%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위기가 이들 정당이 1997년 이후 처음으로 좌파 연합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주목할 점은 극우 국민연합(RN)이 17.30%를 득표해 89석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난 총선 때 얻은 8석보다 무려 81석이 증가한 비약적인 발전이다. 프랑스 하원에선 15석 이상을 차지해야 원내교섭단체의 지위를 얻는데, 극우정당이 ‘마의 15석 고지’를 넘어 이를 얻은 것은 프랑스에서 처음이다. 극우 정당의 개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극좌를 포함한 좌파연합과 극우 진영이 약진한 것에 비교해 전통의 중도우파는 이번 총선에서 그야말로 몰락했다. 7.29%를 득표해 64석 확보에 그쳤다. 지난 총선에 비해 66석이 줄었다. 이런 결과를 낸 이번 총선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멜랑숑이다. 지난 대선에서 21.95%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했던 극좌, 또는 급진좌파로 분류되는 정치인이다. 당시 멜랑숑은 2위를 차지했던 극우 마린 르펜과의 득표율 차이가 40만 표 정도로 1%포인트도 채 되지 않았다. 840만 표 이상을 득표해 1958년 제5 공화국 헌법 아래에서 극좌파로서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특히 18~34세 유권자의 3분의 1이 그를 지지해 청년층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이를 통해 멜랑숑은 프랑스 정치 지형에서 좌파가 재기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 여세를 몰아 멜량숑은 사분오열된 좌파를 모아 연합을 이루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 멜랑숑 “부 재분배, 정년 연장 반대”로 마크롱에 대립 멜랑숑은 급진적인 정책으로 마크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인 도전자로 평가된다. 그는 프랑스가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더해 전염병 위기에 처해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다른 정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해법으로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해 극좌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정부가 금융을 통제하고 부를 재분배하며, 복지를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에너지를 공공주도로 전환할 것을 주장해왔다. 그의 생각과 정책적 의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에서 마크롱이 주장해온 정년 연장(62세에서 65세로)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한국에선 정년 연장을 은퇴자나 장년층에 대한 취업 기회의 연장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상시 고용 노동자의 평균소득을 기준으로 한 연금의 평균 소득대체율이 31.2%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2.2%보다 11%포인트가 작으며, 그 60% 수준이다. 이에 따라 노후 대비를 순전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정년 연장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자녀 교육비와 결혼 경비를 비롯한 생계 외적인 부담도 상당하다. 하지만 일찍이 연금제도가 발달한 선진국에선 2017년 기준으로 미국 71.3%, 프랑스 60.5%, 일본 57.7%, 영국 52.2%, 독일 50.9%로 소득 대체율이 높은 편이다. 일찍이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시절에 연금 개혁을 이룬 독일에서 연금의 소득 대체율이 낮은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는 비교적 넉넉한 은퇴 생활을 보장하고 있다. 퇴직하고 연금생활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마크롱이 추진하는 정년 연장이 연금 지급 시기를 늦추고 더 길게 일해야 연금을 주겠다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마크롱이 법정 은퇴 시기를 늦추는 것은 여기에 드는 연금 재정의 안전화를 기하기 위해서다. 연금 고갈을 늦추려는 연금 ‘개혁’의 일환이다. 정치적으로는 멜랑숑이 여기에 반대의 기치를 들었지만, 포퓰리스트인 극우 르펜도 같은 입장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사안이다. 이념적으로 극과 극인 극좌와 극우가 정년 연장 반대를 들고 나선 것은 그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정책이 이해가 걸린 사람이 생각 외로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멜랑숑의 가장 큰 정치적 지지 세력은 노동조합과 함께 ‘노란조끼’ 시위대에 참가하는 성난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마크롱 집권 초인 2018년 10월 유류세 인상에 따른 석유 제품 가격 인상에 항의하며 노동자의 상징인 녹색 안전복을 입고 처음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노란조끼의 요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동차세 인하와 고유가에 대한 대책 마련 요구로 확대됐다. 여기까지는 노동 계층 생활고의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마크롱 정부는 휘발유와 디젤유 인상을 6개월 연기하는 등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 멜랑숑 지지세력 노동계, 마크롱 개혁 정책에 반기 하지만 여러 차례의 시위로 세력을 확인한 노란조끼 시위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본격적으로 마크롱의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번졌다. 부유세 인하와 재정 긴축 등 마크롱이 2017년부터 추진해온 개혁정책 전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정책 등 마크롱의 개혁 정책 전반에 반기를 들었다. 마크롱의 개혁 정책이 중산 계급과 노동 계급에게만 일방적으로 부담을 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크롱의 개혁정책은 좌우파 모두의 이념적 도그마에 사로 잡혔던 프랑스 경제 체질을 바꾼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2017년 대선부터 600억 유로의 공공 지출 축소와 공공부문 일자리 12만 개 축소를 공약했다. 이렇게 절약한 돈으로 500억 유로 규모의 공공투자로 프랑스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150억 달러를 청년과 구직자를 위한 직업교육에 투입하고, 도 다른 150억 유로를 환경과 에너지 분야에 투자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공양이었다. 아울러 낙후한 공공행정의 디지털화와 농업과 지역 교통, 보건 부문의 현대화를 당면 과제로 설정해 프랑스를 능률적인 나라로 바꾸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프랑스는 1960년 이래 ‘지도주의(Dirigisme)’라는 정책 이념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정부가 강력한 정책적 수단을 통원해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왔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의 정책적 비원과 동력을 제공하고, 노동 계층을 보호한다는 게 정부가 경제를 자유방임하지 않고 개입한 명문이었다. 실제 프랑스는 이를 통해 1960~80년대 고속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2007~2012년 우파의 니콜라 사르코지와 2012~2017년 좌파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집권기에 프랑스는 심각한 성장 동력 하락을 경험했다. 사르코지 집권기에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은 2007년 2.4%, 2008년 0.3%, 2009년 –2.9%, 2010년 1.2%, 2011년 2.2%의 낮은 경제성장률에 머물렀다. 사르코지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좌파인 올랑드를 대통령으로 밀었지만, 올랑드 집권기에 프랑스 경제는 2012년 0.3%, 2013년 0.6%, 2014년 1.0%, 2015년 1.1%, 2016년 1.1%의 성장률을 보여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줬다. 올랑드의 사회당 정부에 장관으로 몸담았지만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며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실용을 추구하는 새로운 중도를 표방한 신예 마크롱이 2017년에 대통령에 오른 원동력은 경제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희망이었다. 전통의 지도주의에서 탈피한 자유방임적‧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프랑스 경제에 성장 동력을 새롭게 마련하라는 유권자의 기대가 마크롱의 어깨에 얹힌 셈이다. 마크롱은 더 일하고 더 성장하는 프랑스 경제를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지만 그의 경제 성적표도 썩 좋지 않은 상황이다. 2017년 2.3%로 반짝 좋아졌지만 2018년 1.8%, 2019년 1.5% 정도에 머물렀다. 코로나19가 강타하면서 전국적으로 봉쇄를 할 수밖에 없었던 2020년 성장률은 –8.1%로 떨어졌다. 물론 2020년의 마이너스 성장은 팬데믹 때문이라는 변명이 가능하긴 하지만 개혁의 화려한 기치에 비해선 초라하다는 평가를 면하기는 힘들다. ━ “부유층 입김 강한 대통령제 폐지, 대중 참여제” 주장도 기본적인 경제 통계로 국세를 살펴보면 마크롱의 프랑스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2021년 1월 통계기준 인구 6800만 명에 국내총생산은 국제통화기금(IMF) 2022년 전망치가 명목금액 기준 3조610억 달러로 세계 7위다. 미국(25조3468달러), 중국(19조9115억 달러), 일본(4조9121억 달러), 독일(4조2565억 달러), 인도(3조5347억 달러), 영국(3조3760억 달러) 다음이다. 유럽연합(EU) 내에선 전통의 경쟁국이자 협력국인 독일 다음으로 GDP가 많다.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를 거쳐 2020년 1월 31일을 기해 EU에서 완전 탈퇴한 영국보다도 떨어진다. 독일은 인구가 8324만 명으로 프랑스보다 많지만, 영국은 6722만 명으로 프랑스와 거의 같다.. 그런데도 프랑스 GDP가 영국보다 떨어진 것은 여러모로 프랑스 경제의 상황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프랑스가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 정부의 방역 통제 등에 불만을 품은 노란조끼 시위가 계속됐다. 이는 프랑스 정치‧경제‧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을 욕하는 극좌파와 포퓰리즘 정책을 들고나온 극우파가 지난 대선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 세력을 얻은 원인으로 분석할 수 있다. 마크롱은 개혁을 하지만 이를 계급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노동 계층과 좌파 세력에 다양한 이유를 들며 이에 지속해서 저항한 것이다. 이는 지난 4월 연임에 성공한 마크롱의 집권 2기 내내 따라다닐 ‘잎 속의 검은 잎’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마크롱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야당 인물은 극좌 멜랑숑일 수밖에 없다. 멜랑숑은 연금 개혁에 반대한 것은 물론, 유가 등 생필품 가격 인상에 정부가 더욱 개입할 것을 요구해왔다. 당장 오르는 물가에 시달리는 국민이 이에 호응한 것이 이번 총선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랑숑은 여기에 더해 정치 개혁까지도 부르짖는다. 1958년 샤를 드골이 만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제5공화국의 헌법과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수술하자고 주장한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드문 대통령 중심제, 그것도 대통령의 권력이 집중된 독특한 권력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밀랑숑은 이런 체제 때문에 계급적으로 부유층의 입김이 강해지고, 노동 계층의 목소리가 제대로 정치에 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통령 중심제를 폐지하고 대중의 참여와 토론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모순과 문제점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온다며 이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주장한다. 반마크롱과 반신자유주의를 넘어 반자본주의, 반세계화로 이어지는 반체제적인 성격까지 보이는 셈이다. 이런 멜랑숑과 마크롱의 대립과 경쟁은 앞으로 프랑스 정치와 경제를 강타할 가장 큰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극우 포퓰리스트인 르펜까지 가세하면서 프랑스 정치는 혼미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프랑스 정치는 앞으로 마크롱의 임기와 이번에 선출된 제5공화국 제16대 국회의 임기 5년 내내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좌·우파 모두를 공격하며 새로운 중도 정치세력을 형성한 마크롱이 좌우로부터 동시 협공을 당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21세기 프랑스에서 정부가 경제를 지배했던 지도주의를 넘어 정치가 경제에 본격적으로 부담을 주는 묘한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2022.07.02 15:00

8분 소요
K-9부터 천궁-Ⅱ까지, 한국 무기체계 수출의 국제정치학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한국이 개발하고 생산하는 고가 무기체계의 수출 계약이 연일 성사되고 있다. 한국 방산업계가 바야흐로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해 12월 13일에는 호주에서 K-9 자주포 구매를 발표했다. 새해 들어 1월 17일에는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천궁-2 지대공 요격미사일, 2월 1일에는 이집트에서 K-9 자주포의 도입을 각각 발표했다. ━ K-9 자주포 이어 K-2 전차, T-50 훈련기도 수출 기회 K-9 자주포는 장거리 화력 지원과 실시간 집중 화력 제공 능력이 뛰어난 무기체계로 호평을 받아왔다. 다양한 작전 환경에서 운용이 가능하며 사격 시 반동이 경쟁 자주포보다 적어 호평을 받아왔다. 2000년 전력화가 이뤄졌으며, 최대 사거리 40㎞에 분당 최대 6발을 발사할 수 있다. 급속 사격 시에는 15초 이내 3발 사격도 가능하다. 지속 사격 시에는 1시간 동안 분당 2~3발을 쏠 수 있다. 48발의 포탄을 적재할 수 있으며, 최대 시속 67㎞의 속도로 이동이 가능하다. 특히 국방과학연구소(ADD)와 한화디펜스가 개발한 K-9 자주포는 한국산 무기체계 수출의 선봉장을 맡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7개국이 1700여 문을 운용 중이며, 호주와 이집트를 합하면 모두 9개국이 운용하게 된다. 터키에 350문(약 10억 달러), 폴란드에 120문(약 3억 2000만 달러), 핀란드에 48문(약 1억6000만 달러), 에스토니아에 12문(가격 미정), 인도에 100문(3억8000만 달러), 노르웨이에 24문(약 2억3000만 달러), 호주에 30문과 K-10 탄약운반장갑차 15대(합계 최대 1조900억원), 이집트에 200문과 K-10 탄약운반장갑차(17억 달러) 등을 수출해 실적이 화려하다. K-9 자주포의 호주 수출은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 한화디펜스는 “K-9 자주포를 ‘파이브 아이즈’ 국가에 처음으로 수출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파이브 아이즈’는 미국·캐나다·뉴질랜드·호주·영국으로 이뤄졌으며, 미국이 주도하는 기밀정보 공유 동맹이다. 한국을 포함할 가능성도 타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K-9 자주포의 호주 수출은 주요 무기체계를 아시아권에 처음으로 수출하는 사례다. 한화디펜스는 호주 동남부 빅토리아주의 질롱에 생산시설을 세워 현지에서 K-9 생산과 납품을 진행할 예정이다. 현지 생산인 셈이다. 2월 1일 발표된 K-9 자주포의 이집트 수출은 아시아·유럽·대양주에 이어 중동·아프리카 지역 첫 진출이라는 의미가 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복잡한 환경의 중동 지역에 한국산 중화기인 자주포가 처음 수출된다는 것은 한국이 이런 환경 속에서 다양한 외교와 비즈니스를 펼쳐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 630여 문을 공급한 K-9은 현재 영국 수출도 추진 중이다. 한국 방위산업(K방산)은 지난해 70억 달러(약 8조3496억원)를 수출해 역대 최고 실적을 올렸다. 앞으로 유럽·호주로 시장을 확대한다면 5년 안에 100억 달러(약 12조원)를 넘어설 전망이다. 현재 세계 9위 수준인 한국의 방산 수출 규모는 조만간 5위권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크다. 현재 한화디펜스의 보병전투차량(IFV) AS-21 레드백은 180억~270억 호주달러(약 16조~24조원) 규모인 호주 육군의 LAND 400 사업에 뛰어들었다. 독일 라인메탈 디펜스의 링스 KF41과 경쟁 중이다. 현대 로템의 K2 전차는 노르웨이에서 성능 테스트를 받고 있는데 추운 지역의 적응력이 높아 호평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독일 KMW의 레오파르트2 개량형인 레오파르트2A7가 경쟁자로 등장하고 있다. 폴란드도 차기 전차로 K2에 관심이 높다. 항공 분야에서도 서광이 비친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고등 훈련기 T-50이 UAE에서 새 시장을 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 무기 기술·생산 원하는 UAE에 현지 테스트로 천궁-Ⅱ 수출 1월 17일에는 초대형 낭보가 전해졌다. ‘한국형 패트리엇’으로 불리는 탄도탄 요격미사일 체계인 ‘천궁-Ⅱ'(M-SAM2·중거리 지대공미사일)의 아랍에미리트(UAE) 수출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첨단 하이테크 무기체계인 미사일, 그것도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탄도탄 요격 미사일이 처음 수출되는 것은 한국 방산 수출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다. UAE를 방문 중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전날인 16일 UAE의 두바이에서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 UAE 총리 겸 두바이 에미르(이슬람 군주)와 만나 천궁-Ⅱ의 수출을 확정 짓고 사업계약서를 교환했다는 게 당시 청와대 발표다. 천궁-Ⅱ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주도로 LIG넥스원·한화시스템·한화디펜스 등이 참여해 개발했다. 2012년부터 국방과학연구소(ADD) 주도로 개발하고, LIG넥스원이 생산을 밭았다. 천궁-Ⅱ는 최대 사거리가 40㎞로, 항공기와 탄도미사일을 모두 요격할 수 있다.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계의 핵심이다. 5년간 개발해 2018년 양산에 들어갔으며, 2021년 11월 군에 인도됐다. 사격통제소, 다기능레이더, 3대의 발사대 차량 등으로 1개 포대를 구성된다. 발사대 하나당 8발의 요격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다. 명중률도 뛰어나 국방기술품질원이 2021년 7월과 8월 ADD 안흥시험장에서 각각 탄도미사일과 항공기에 대한 요격 시험을 한 결과 표적에 모두 명중했다. 이번 계약 규모는 무려 35억 달러(약 4조1000억원)로 한국의 무기체계 단일계약으로는 가장 크다. 그날 문 대통령이 공동 연구개발, UAE 내 생산, 제3국 공동 진출을 언급했는데 이는 UAE의 숙원이었다. 중동 국가들은 무기 구매에 많은 예산을 지출해왔지만, 자체 기술력, 생산력이 부족해 일방적인 구매에 만족해왔다. 이에 따라 기술력과 생산능력 확보와 축적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한국 정부가 UAE 정부와 미사일 요격 시스템을 포함한 첨단무기체계 분야에서 방산 협력 강화를 추진한 것은 2017년이었다. 당시 한국은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체계의 일환으로 개발 중인 ‘미사일 요격 시스템’의 UAE 현지 테스트를 포함한 양국 국방 협력 논의를 진행했다. 당시 한국군은 북한 미사일 도발 위협과 관련해 ▶발사 전에는 킬체인(한국형 공격형 방위 체계) ▶발사 이후에는 KAMD를 통한 요격 ▶미사일 타격 피해 이후에는 KMPR(대량응징보복) 등 3축 체계의 조기 구축을 추진해왔다. 3축 체계 중 KAMD는 저층에서 요격하는 미국산 패트리엇 시스템(PAC-2·PAC-3 등)과 국산 지대공(地對空)미사일(M-SAM, 천궁 개량형), 중·고도에서 저지하는 장거리 지대공미사일(L-SAM)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KAMD와 관련해 고도 20~40㎞에서 적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지대공 미사일(M-SAM)이 한·UAE 간 협력 분야로 꼽혔다. KAMD의 핵심 무기 체계이기 때문이다. 고도 60㎞까지 방어하는 장거리 지대공 미사일은 2022년을 목표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당시 한국이 추진하는 KAMD의 핵심인 요격 미사일의 현지 테스트를 UAE에서 하는 논의를 진행했으며 이는 양국 간 방산 협력, 특히 그렇게 개발된 천궁-2의 수출로 이어졌다. 국내 미사일 시험장은 UAE의 넓은 사막지대보다 좁아 인근 주민들의 소음 피해가 우려되지만, UAE는 입지가 좋고 미국산 요격 미사일인 패트리엇의 실제 운용 경험도 풍부해 한국 측이 시험장으로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 미국·유럽과 소원해진 사우디·터키 문 두드리는 K-방산 천궁-Ⅱ의 UAE 수출은 사우디아라비아 수출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2019년 6월 방한 당시 대전의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방문해 “우리도 이렇게 무기체계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연구소를 세우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에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21년 2월 인도주의적 재앙이 벌어지는 예멘 내전 참전을 이유로 미국산 무기 수입이 금지됐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과 접경한 예멘에 시아파를 따르는 후티족 반군이 내전을 벌어지자 2014년 UAE 등과 수니파 연합군을 결성해 참전해 왔다. 그러자 예멘의 후티 반군은 이란에서 확보한 것으로 보이는 탄도미사일을 수시로 사우디아라비아 영내로 발사해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산 패트리엇 미사일만으론 물량이 부족했던지 미사일 요격용 미사일 물량을 확보하려고 러시아 등 다양한 나라의 문을 두드려왔다. 그 전에도 미국산 무기를 사려면 미 의회의 까다로운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므로 물량 확보에 항상 초조한 터였다. 실제로 예멘에서 후티 반군이 발사한 탄도 미사일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나 항구도시인 제다 등으로 수시로 날아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국왕이 무함마드 왕세자를 데리고 모스크바까지 날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 미사일 요격 미사일인 S-400을 구매하려고 시도했을 정도였다. 한국산 고가 무기체계의 수출에는 국제정세와 지역의 지정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한국산 무기체계 수출과 기술 협력의 대표적인 파트너인 터키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지만 인권문제 등으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과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다. 특히 2019년 터키가 국경을 맞댄 시리아 동북부의 쿠르드족을 잇달아 공격하자 독일과 노르웨이 등 유럽 주요 나토 회원국이 터키에 대한 무기 수출을 금지했다. 당시 터키는 시리아 쿠르드족 민병대(YPG)를 자국 내에서 독립을 주장해온 쿠르드노동자당(PKK)의 분파 또는 동조세력으로 간주해 공격해왔으며 당시 7만여 명의 민간인이 인도주의적 위기에 처했다고 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했다. 독일은 분쟁 지역에 자국산 무기 수출을 금지한 법을 근거로 나토 동맹국인 터키에 대한 무기 수출을 중단했다. 독일에는 초청노동자(가스트아르바이터)로 이주한 터키인과 그 친지와 후손이 300만~700만 명이 거주하며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런데도 독일은 인권이라는 원칙에서 양보하지 않았다. 독일은 2018년 전체 무기 수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억4300만 유로의 무기를 터키에 수출했다. 2018년 2900만 유로의 무기를 터키에 수출했던 네덜란드도 대터키 무기수출 금지에 동참했다. 전차와 장갑차 등에 장착하는 원격 조작 화기체계(RWS)로 유명한 콩스베르그 등 고도 방산업체를 보유한 노르웨이도 터키에 대한 수출을 중단했다. 스웨덴은 이미 2018년부터 터키에 대한 공격용 무기의 수출을 불허했다. ━ 지정학 연구와 현지 외교 중요한 무기체계 수출 나토 회원국인 폴란드는 나토의 동쪽 경계를 이루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러시아의 역외영토인 칼리닌그라드, 러시아와 국가연합을 이루고 있는 벨라루스, 그리고 러시아의 위협을 받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같은 나토 회원국인 독일·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리투아니아와 접경한다. 유사시 러시아의 지상 공격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유럽 방어에서 핵심적인 지역이다. 이에 따라 유럽의 나토 회원국 가운데 가장 강한 지상 전력을 운용한다. 각각 200여대의 전차를 보유한 나토 핵심국가 영국·프랑스·독일의 전차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800대가 넘는 전차를 운용한다. 한국산 K-2 전차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K-9에 관심을 보일 수도 있다. 핀란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국가로 나토 회원국은 아니다. 냉전 당시 경제와 정치체제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무기는 소련산을 쓰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겨울전쟁을 치르면서 준비가 안 된 러시아군에 궤멸적 타격을 안겨줬던 핀란드는 나중에는 나치 독일과 손잡기도 하면서 우왕좌왕했다. 당시 타격에 놀란 소련은 핀란드의 자주성을 인정했지만, 국방에서 국경을 맞댄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은 견제해왔다. 냉전 뒤 핀란드는 서구 무기체계로 갈아탔으며 네덜란드가 쓰던 중고 레오파르트-2 전차를 대거 샀으며, K-9 자주포도 구매해 화력을 강화했다. 핀란드는 나토에 가입하고 싶어 하지만 러시아와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결국 일단은 자주국방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발트국가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제국 영토였다가 러시아혁명 뒤 독립을 이뤘지만 1940년 소련에 점령된 발트삼국의 하나다. 핀란드 남쪽에 위치한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국가라 안보에 고민이 많으며 나토에 합류해 공동안보에 운명을 맡기고 있다. 한국산 등 무기를 확보할 수밖에 없다. 노르웨이는 2차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된 쓰라린 경험으로 유럽연합(EU)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나토에는 창설 당시부터 회원국이다. 콩스베르그 등에서 정밀 무기체계를 생산하지만, 강력한 화력의 K-9이 필요한 나라다. 유럽에 대한 한국산 무기 수출은 결국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연결된다. 무기체계 수출은 곧 외교와 직결된다. 호주는 중국에 대한 견제 등을 위해 K-9 자주포를 대거 구매했다. 히말라야 산맥을 경계로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여온 인도는 중국에 대한 견제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런 호주와 인도에 한국산 무기체계를 파는 것은 결국 중국에 대한 견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선거로 집권한 민간 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린 이집트에 무기체계를 수출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 측면에서는 많은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다. 무기체계 교역은 국제정치의 또 다른 얼굴이다. 무기체계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지정학 연구와 현지 외교를 강화할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2.02.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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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100년 중국 공산당의 생존비결은?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국제 이슈

중국공산당(중공)이 7월 1일로 창당 100주년을 맞았다. 이날은 공식적인 중국공산당 탄생 기념일(중국 공산당 건당 기념일, 7·1 건당절)이다. 중국 공산당은 성대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중국 전역의 혁명 유적지는 9000만 명이 넘는 공산당원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실 중공이 실제로 창당된 날은 1921년 7월 23일이다. 이날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외국인 치외법권 지역)의 망지로(望志路) 106번지(현재 흥업로(興業路) 76번지)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중국 전역에 공산당원 57명(50여 명으로도 알려졌으며, 밝혀진 인물은 41명)을 대표하는 13명과 첫 대표회의를 요구한 외국인 코민테른 요원 2명 등 모두 15명이 모였다. 마지막 날인 30일 조계의 프랑스 경찰이 현장에 들어와 수색하고 순찰을 강화하자 이들은 상하이에서 서남쪽으로 100㎞쯤 떨어진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에 있는 유람선으로 옮겨 대회를 마쳤다. 그리고 당의 기본 임무와 민주집중제 등 조직원칙, 규율 등을 담은 중국공산당 강령을 채택했다. 천두슈(陳獨秀·1879~1942)가 중앙집행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그렇다면 왜 7월 23일이 아닌 7월 1일이 건당 기념일이 됐을까?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1938년 5월 옌안(延安)에서 내놓은 ‘지구전을 논하다’에서 7월 1일을 창당 기념일이라고 언급한 게 계기다. 그 뒤 1941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건에서 ‘창당 20년, 7·7절 4년’이라고 표현하며 그날 기념식을 열기로 하면서 7월 1일이 공식적으로 정착됐다. 7·7절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당시엔 베이핑(北平)) 서남쪽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인 발포로 중일전쟁이 시작된 날을 가리킨다. 중국공산당이 100년을 생존한 요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비결로 경제 업적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현대 중국사를 주도한 핵심 세력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들은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개혁·개방을 바탕으로 이룬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주역으로 자평한다. ━ 마오쩌둥 실수 딛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오늘날 중국은 14억4399만 명 인구에 명목 금액 기준 국제통화기금(IMF) 2021년 국내총생산(GDP) 예상치가 16조6400억 달러로 미국(22조6752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그 뒤를 잇는 일본(5조3781억 달러), 독일(4조3192억 달러), 영국(3조1246억 달러), 인도(3조497억 달러)보다 한참 앞선다. 중국의 2021년 1인당 GDP 예상치는 1만1819달러로 세계 78위다. 세계 평균을 조금 넘는 액수다. 2020년 수출 2조5900억 달러에 수입 2조600억 달러다. 말 그대로 눈부신 성적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마오쩌둥식 공산주의 이념을 정치·경제·사회에 확산했다. 건국 초기인 1950~70년대 초 중국은 거대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에 나서기까지 중국에선 역사 발전의 바퀴가 사실상 멈춰 섰다.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은 전국에 자신들의 이념을 적용하려고 시도하다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중국 인민이 받았다. 중국 헌법 서언(서문)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노동계급이 지도하는 노농동맹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 독재 즉 실질상의 무산계급독재가 강고해지고 발전되었다”고 적혀 있다. 여기에 초기 시행착오의 원인을 엿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대 초 ‘인민민주주의’를 앞세워 지주를 비롯한 ‘반혁명분자’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인민민주주의는 무산계급이 지주·자본가와 기득권층으로 이뤄진 유산계급이 지배하던 봉건 체제를 무너뜨린 뒤 공산당 중심의 중앙집중적인 권력체계를 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무산계급이 인민의 적인 유산계급과 반혁명분자를 배제하고 적대시하면서 독재를 펼친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중국 당국이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인민민주주의를 가리킨다. 이는 당의 지도와 지배 아래에서 이뤄지는 체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와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중국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을 만든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창한 ‘민주집중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집중제는 ‘토론은 자유롭게 하되 일단 당이 결정하면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당이 정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은 1951년부터 사상개조 운동과 함께 부패·낭비·관료주의에 반대한다는 삼반(三反) 운동, 그리고 뇌물·탈세·국영재산강탈·정부계약사기·국가경제정보누설을 반대한다는 오반(五反) 운동을 펼쳤다. 둘을 합쳐 삼반오반운동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반혁명 세력 타도에 나섰다. 1955~57년에는 반우파운동을 펼쳐 공산당에 대한 불평불만 분자를 제거에 나섰다. 토지개혁, 집단농장 등 반대파 숙청 등을 통해 공산당은 독재체제를 확립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발전은커녕 혼란에 빠졌다. ━ 덩샤오핑, 헌법개정으로 개혁개방 시작 그 뒤에는 더 큰 사건이 벌어졌다. 1957년 반우파 투쟁으로 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1958~1961년 대규모 인력 투입으로 농업과 공업의 대규모 증산을 노린 대약진 운동을 진행했다. 그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인민공사와 합작사, 집단식당 등을 운영하면서 인민의 재산을 공유화하고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면, 15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을 만큼 고도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 마오쩌둥은 농촌에 소형 용광로를 다량 보급해 쇠를 생산하는 등 기기묘묘한 정책을 펼쳤다. ‘참새는 해롭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참새를 대대적으로 잡는 바람에 참새가 먹던 해충이 창궐해 농촌에 대규모 흉년이 들었다. 중국 전역의 산업과 인프라, 그리고 환경이 대대적으로 파괴되면서 전국이 혼란에 빠졌고, 그 결과 대기근이 발생해 이 시기에만 1500만~55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1976년에는 권력 회복을 노린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며 중국은 또다시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문화대혁명은 인민민주주의를 더욱 확고화 한다면서 어린 홍위병의 폭력에 의존해 민중의 사상과 행동을 통일하려고 시도한 사건이다. 명분은 ‘봉건적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수세에 몰린 마오쩌둥의 정치적인 술수라는 평가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가 수십만에서 250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는 폐쇄됐고 지식인·문화예술가들과 마오쩌둥에 맞서던 공산당 지도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공산당 원리주의 또는 교조주의의 생생한 모습이었다. 마오쩌둥 집권 시절인 1954년 제정된 중국 헌법은 그의 말년인 1975년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공산주의 색채를 희석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 국가 건설에 힘을 실어줬다. 1975년 첫 헌법 개정 때는 당시에 이미 유명무실했던 국가주석 제도를 폐지하는 등 정치·제도적 변화에 그쳤다. 하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78년 3월에 이뤄진 헌법 개정은 중국과 중국공산당의 방향을 대대적으로 바꿔놓았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이 그야말로 작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이를 위한 첫 조치로 공산주의 계급투쟁 노선을 의미하는 ‘전면적인 독재’라는 구절을 헌법에서 뺐다. 그 대신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가리키는 ‘4개 현대화’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4대 현대화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년)가 주창했던 정책으로 덩샤오핑은 이를 중국의 공식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조치다. ━ 중국 경제 살린 ‘흑묘백묘’론 변화를 위한 기반을 다진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2회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제안했다. 국내체제 개혁과 대외개방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바로 1978년 개헌이었다. 그해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싱가포르에 다녀온 뒤였다. 당시 헌법에 삽입된 4개 근대화는 개혁·개방의 상징으로서 경제성장의 소중한 거름이 됐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사상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대표된다.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덩샤오핑의 생각이 잘 반영된 말이다. 여기에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존재하듯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일방적인 평등화보다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先富論)을 합치면서 덩샤오핑의 경제사상이 완성됐다. 덩샤오핑의 신념은 공산당 지배는 그대로 둔 상태에서 헌법 개정 작업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는 “인민들이 잘 먹고 잘사느냐가 사회주의냐 아니냐의 핵심”이라며 실용주의 노선을 앞세웠다. 공산주의의 기본정신은 부정하지 않고, 인민 민주주의 독재 정치체제를 지키며, 공산당의 지도력을 유지한다는 중국 사회주의의 3가지 원칙은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통해 부강한 중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덩샤오핑의 의도였다. 이는 그 뒤 중국 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1979년 헌법 개정은 정치적인 보수화를 상징한다. 공산당은 4대 민주, 또는 4대 자유로 불렸던 대명(大鳴·자유로운 발언)·대방(大放·자유로운 조직과 활동)·대변론(大辯論·자유토론)·대자보(大字報·벽보 붙이기)를 폐지했다. 78~79년 웨이징성(魏京生) 등이 베이징 시단(西單)의 벽에 민주화·자유를 선전하는 대자보를 붙인 ‘민주의 벽’ 운동이 원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이 개헌을 통해 개혁·개방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4대 민주는 문화혁명 시기 인민의 완전한 언론·조직 활동을 보장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한다며 한때 마오쩌둥이 주창했던 인민동원방식이었다. 하지만 민주의 벽 운동에선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1982년 개헌도 보수파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무산계급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4원칙을 지킨다는 내용의 ‘4항 기본원칙’을 헌법에 반영했다. 급진적인 개혁 요구를 제한하겠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은 정치개혁 없는 경제개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 다음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당제·공정선거 등 정치개혁 없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있었으며 이를 서로 타협해 해결했음을 보여준다. ━ 지금 중국경제는 타협의 산물 이런 개혁을 통해 보수파를 달랜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로 더욱 달려 나갔다. 1988년 개헌에선 헌법 11조에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동소유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한 구성 부분”임을 인정하고 “국가는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유 경제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라고 명문화했다. 민간경제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이 추가된 셈이다. 토지사용권 양도도 가능하게 했다. 1993년 개헌에선 국유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선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기업 활동에서 공산당이나 정부의 입김을 배제한 획기적인 조치이기 때문이다. 1999년 개헌에선 덩샤오핑 이론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헌법 5조에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한다”며 법치를 명문화했다. 법치의 도입은 중국의 변화를 상징한다. 실제로는 법도 공산당보다는 앞설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2004년에는 사유재산권 보장을 헌법에 못 박았다. 헌법 13조에 “공민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 제도를 실현해 빈부 격차를 없앤다는 고전적 공산주의 이념이 인민이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앞에 잠시 고개를 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인민 대부분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 사상에 대한 헌법적 지위도 확립했다. 중국공산당도 변했다.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를 꾀했다. 개혁·개방 초기 과거의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평가를 바로 잡는 평반(平反)을 활성화했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과거 역사의 과오를 청산하고 중국 사회를 재구성하는 계기가 됐다. 심지어 당원 자격도 무산대중에서 당을 지지하는 홍색 자본가로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주의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권위는 그대로 유지됐다. 이를 통해 중국공산당은 변화와 개혁을 실험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중국공산당이 지금까지 100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건국 초기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내부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과만 보지 말고 내부의 변화 과정을 더욱 정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장단점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2021.07.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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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호적수(9) 정도전과 이방원] 조선 건국 최고 공로자 정도전과 이방원의 비극적 인연

전문가 칼럼

뜻 함께한 동지도 대업(大業) 후 파열음 많아… 鄭 아성 틈새 노려 승리 거둔 李 생사를 함께 한 동지라도 대업을 이루고 난 뒤에는 파열음이 나게 마련이다.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든가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위 ‘개국공신’, ‘혁명동지’ 간에 내분이 없었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창업 군주인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제외한다면, 조선 건국의 최고 공로자는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다.정도전이 새 왕조를 설계하고 이성계를 제왕의 길로 이끌어주었다면, 이방원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단호한 결단으로 이성계 세력을 지켜냈다. 고려 공양왕 4년,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거동할 수 없게 되자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를 체포하여 유배 보내고, 정도전과 조준 등 핵심인사를 처형하려고 했다. 정몽주의 파상공세에 이성계 측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때 그 흐름을 끊어낸 것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왕조의 마지막 버팀목을 제거해버렸다. 정도전뿐 아니라 이방원이 없었어도 역사는 필시 다른 길로 이어졌을 것이다. ━ 조선 건국 이후 정적으로 돌아서 그런데 조선이 건국된 후, 두 사람은 정적으로 돌아섰다. 왕위계승 문제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 보위는 적장자 승계가 원칙이다. 이성계의 후계자도 맏아들인 방우가 우선순위에 있었지만, 방우는 새 왕조 창업에 반대하여 은둔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다음 서열인 둘째 아들 방과, 아니면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방원을 세자로 삼는 것이 통례다.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은 예상 밖이었다.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아마도 방석의 친어머니 신덕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정도전은 방석을 지지했다. 처음부터 방석을 옹립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성계가 이를 끝내 관철하자 방석의 후견인을 자임한다. 방석의 장인 심효생이 정도전 세력의 핵심인사였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도전은 방석이 훌륭한 왕이 될 만한 그릇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방원이 방석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다. 정도전은 누구보다도 방원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학문적 소양, 지혜와 용기, 판단력과 결단력, 객관적으로 봐도 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정도전은 이방원과 갈라선 것이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구상하는 조선의 미래에 어울리는 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유학은 본래 구성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임금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왕은 백성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깨우쳐주고 이끌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왕의 판단과 선택이 공동체의 안위와 직결되는 이유도 있다. 요 임금이 아들이 아닌 순 임금에게, 순 임금이 역시 아들이 아닌 우 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그래서다. 혈연이 아니라 오로지 ‘최선(最善)’, ‘최적(最適)’을 기준으로 후계자를 고른 것이다.그런데 세습군주제가 정착되면서 이러한 유학의 이상은 더 이상 실현이 불가능해졌다. 창업군주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 아들, 손자까지 훌륭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말을 빌리면 “왕 중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더 큰 문제는 이것이 랜덤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 선대의 위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재벌 2세도 있지만, 아예 말아먹는 2세도 있는 것을 말이다.따라서 정도전은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훌륭한 성군이 계속 출현하면 좋겠지만 복권에 당첨되듯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니, 대신 구성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자는 것이다. 능력과 인품을 검증받은 현자(賢者)들이 계속해서 재상을 맡는다면 세습 군주제의 단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고 여겼다.다만, 이러한 시스템이 자리 잡으려면 왕은 상징적인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좋은 재상을 임명하는 것 정도랄까?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를 추구하였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방원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방원이 이를 받아들일 리도 없고 말이다.아무튼 방석을 세자로 받든 정도전은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겨갔다. 한데 사병혁파 등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으로 인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도전이 태조의 신임을 등에 업고 독주하다 보니, 조준 같은 혁명동지와도 차츰 사이가 벌어졌다. 이들을 포섭하며 반정도전파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것이 다름 아닌 방원이다.방원은 책략가 하륜을 휘하로 거둬들이고, 기득권을 빼앗겨 정도전에게 비판적이던 종친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리고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 이거이·이저(태조의 사위) 부자, 측근인 이숙번, 조영무를 중심으로 병력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398년 8월 26일, 방원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킨다.이방원은 광화문 앞에 병력을 집결하여 무력시위를 했다. 반대파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은 것이다. 실제로 세자 방석이 군사를 모아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했다”라고 한다. 이어서 이방원은 정도전을 급습하여 죽였다. 조정을 장악하고 궁궐을 점거하기 전에 우선 정도전부터 제거한 것은 정도전의 존재가 거사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의 일들은 역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다. ━ 유리한 상황 이용하지 못한 정도전 정도전의 죽음과 이방원의 쿠데타 성공. 조선을 세운 두 주역의 인연은 이처럼 비극으로 끝났다.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끝내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이 합심하여 조선을 이끌어갔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은 의미가 없다. 생각과 방향이 전혀 다른,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없는,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양보할리도 없는 두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가정이다.주목할 것은 두 사람의 성패를 가른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다.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군권까지 장악한 재상이었으며, 학문적 깊이나 정치 경험도 이방원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패한 것은 그가 방심했기 때문이다. 세자도 어느새 열여섯 살이 되었고 추진하던 개혁도 어느 정도 안착이 되었고. 방원도 더 어쩌지 못하리라고 안심한 것이다. 정도전은 방원의 불온한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 이방원은 그 틈새를 노려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적수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한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2020.11.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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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50년의 기적’

산업 일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륙에서 글로벌 경제의 성장엔진으로 어떻게 탈바꿈했나 1820년 아시아는 세계인구의 3분의 2, 글로벌 소득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 뒤 세계경제가 식민주의로 형성되고 제국주의에 의해 성장하면서 아시아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아시아는 소득수준 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륙이었다. 인구가 많다는 점 말고는 내세울 게 없었다. 세계 최악으로 꼽히는 사회개발 지표는 이 지역의 낮은 개발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이 1968년의 저서 ‘아시아의 드라마(Asian Drama)’에서 논한 아시아 경제전망에 관한 깊은 비관론이 당시 널리 퍼져 있었다.그 뒤 반세기 동안 아시아는 국가들의 경제전망과 주민의 생활환경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UN 자료를 분석해봤더니 2016년 세계소득의 30%, 세계 생산의 40% 그리고 세계무역 중 3분의 1 이상을 아시아가 담당했으며 1인당 소득이 세계평균에 가까워졌다. 이 같은 변화가 주민과 국가 전체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상상을 뛰어넘는 변화였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걸친 아시아의 경제발전은 역사상 거의 전례 없는 일이다. 나의 신저 ‘아시아의 부흥(Resurgent Asia)’은 이런 극적인 변화를 조명한다.아시아 대륙의 크기와 다양성을 감안할 때 그 지역을 일괄적으로 보는 방식이 항상 적절하지는 않다. 내 리서치에선 아시아를 동아시아·동남아시아·남아시아·서아시아 등 4개 하위 지역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아시안 14이라는 14개 선별적인 국가로 세분화했다. 동아시아의 중국·한국·대만, 동남아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베트남, 남아시아의 방글라데시·인도·파키스탄·스리랑카 그리고 서아시아의 터키다. 이들 국가가 대륙 인구와 소득의 5분의 4 이상을 차지한다. 일본은 아시아의 고소득 국가이며 50년 전에 이미 공업화했기 때문에 조사에서 제외했다.아시아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영토의 크기, 역사, 식민지 유산, 국가주의 운동, 초기 여건, 천연자원, 인구규모, 소득수준, 정치체제 면에서 국가 간에 두드러진 차이가 있었다. 경제개방의 정도와 시장 의존도가 국가와 시대에 걸쳐 천차만별이었다.아시아 전반적으로 정치도 전제정권 또는 과두체제부터 민주주의 체제까지 다양했다. 이념도 공산주의부터 국가자본주의·자본주의까지 제각기 달랐다. 개발 결과도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보편적인 솔루션, 마법의 지팡이 또는 특효약이 없어 발전에 이르는 길도 제각각이었다. 그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진 공통 패턴이 있다. 경제성장이 발전을 견인했다. 아시아의 국내총생산(GDP)과 일인당 GDP 증가율은 눈부셨으며 세계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높았다. 그 저변에는 교육의 확대와 맞물린 투자·저축률 증가가 있었다. 급속한 공업화가 성장을 견인했다. 생산과 고용의 구성변화와 관련해 수출이 공업화를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업종과 시대에 걸쳐 언제 어디서든 필요에 따라 비정통적이고 조직적인 경제정책이 그 뒤를 받쳤다.도처에서 문해율과 기대수명이 높아지면서 1인당 소득 증가가 사회개발 지표를 크게 높여 놓았다. 절대빈곤도 많이 감소했다. 그러나 세계은행의 데이터에 따르면 잔존하는 절대빈곤 규모는 전례 없는 성장에도 불구하고 1984~2012년 성취한 대폭적인 빈곤해소만큼이나 두드러진다.불평등 확대만 없었다면 빈곤을 더 많이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국가에서 국민 간 불평등이 확대됐다. 하지만 아시아의 부국과 빈국 간 격차는 변함없이 크며 아시아 부국과 빈국의 일인당 GDP 비율은 1970년과 2016년 모두 100대1을 웃돌았다.경제 개방은 아시아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어디서든 세계경제에 수동적으로 편입되기보다 전략적으로 통합하는 형태를 띠었다. 예컨대 통상정책은 수출에는 개방적이었지만 수입에는 제한적이었다. 국가발전 목표를 추종하는 산업정책에 따라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정부정책이 수립됐다. 성공적인 공업화에는 개방이 필요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으며 산업정책과 결합될 때에만 공업화를 촉진했다.반세기에 걸친 아시아의 경제혁신에서 정부는 지도자부터 촉매자·후원자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와 시장 간의 이 같은 진화하는 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아시아 발전의 성공이 좌우됐다. 역시 시간에 따라 변하는 각각의 역할 간에 적당한 균형점을 찾는 방법이었다. 한국·대만·싱가포르의 개발시대 정부는 국가발전 목표에 따라 오랜 기간 동안 산업 전반에 걸쳐 정책을 조율했다.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그들의 아젠다를 집행하면서 불과 50년 만에 공업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중국은 이런 정부주도 발전 모델을 모방해 큰 성공을 거뒀으며 베트남도 20년 뒤 같은 노선을 따랐다. 두 나라 모두 정책을 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강력한 공산주의 일당 정부체제를 갖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아시아의 모든 정부가 이런 모델을 모방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도·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방글라데시·터키 같은 다른 나라도 효과는 그만 못하지만 일부 제도와 시스템의 진화를 이뤄 공업화와 개발을 뒷받침했다. 이 중 몇몇 나라에선 정부가 개발과 국민친화 정책을 지향하는 데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아시아의 부상은 세계 경제력의 균형이동과 서방이 누리던 정치적 우위의 약화를 상징한다. 아시아가 어떻게 이런 기회를 활용하고 도전에 대처하는지 그리고 세계의 어려운 경제·정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배 종식 후 한 세기가 지난 2050년께는 아시아가 세계 소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지구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게 되리라는 전망도 충분히 가능하다. 경제·정치적으로 세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1820년에 그런적이 있었지만 5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디팍 네이야르※

2019.11.04 11:35

4분 소요
미국과 이란의 위험한 불장난

산업 일반

트럼프 대통령의 대이란 ‘최대 압박’ 정책은 미국을 또 다른 전쟁으로 이끌 수 있어 지난 9월 28일 미국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골프를 쳤다. 워싱턴 D.C.에서 약 50㎞ 외곽에 위치한 버지니아주 스털링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 본인 소유의 골프장이었다.포토맥 강변의 숲 우거진 코스에서 골프 치는 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이자 상원 법사위원장인 그레이엄 의원은 하원에서 진행 중인 탄핵 조사와 관련해 상원의 공화당 의원들이 대통령을 적극 지지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날 그의 주된 메시지는 따로 있었다. 이란군을 그냥 둬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미국인은 지난 9월 중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시설 2곳을 표적으로 한 드론·크루즈 미사일 공격의 배후가 이란군이라고 믿는다.그레이엄 상원의원은 다음날 CBS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해 “이란이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촉구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지난 6월 미군의 드론을 격추한 이란군에 대한 보복 공격 계획을 시행 직전 취소한 것이 이란의 추가적인 도발을 억제하는 데 실패했다고도 말했다며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 말을 이렇게 전했다. “그들이 우리 드론을 격추했을 때 대통령이 신중하게 반응했지만 그건 통하지 않았다. 지금 이란은 제멋대로 날뛰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함부로 도발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제어해야 한다.”지금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중동 전쟁의 확대를 촉발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이란의 도발에 최대한 절제된 반응을 보였다(일부 지지자는 그런 확전이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분석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그 같은 반응 자제와 상관없이 중동 지역 전체가 대변란으로 치닫고 있다고 판단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5년 체결된 이란 핵합의를 ‘나쁜 거래’라고 혹평하며 그 체제에서 탈퇴한 지난해 이래 이란을 상대로 엄격한 제재를 다시 부과했다. 그에 따라 이란에선 석유 수출이 크게 줄면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치솟았다.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엄포 수사를 동원하며 자신의 ‘최대 압박’ 정책이 지속되면 이란이 협상 테이블에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재협상이 이뤄진다면 이란은 핵과 지역 패권 야망이 엄격히 제한되는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그러나 이란은 제재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미국의 ‘최대 압박’에 ‘최대 저항’으로 맞대응하고 나섰다. 예를 들어 이란은 페르시아만 부근의 유조선 항행을 방해하거나 나포했고, 2015 핵합의의 일부 조항 이행을 중단했으며, 미군의 드론을 격추했고, 가장 최근에는 사우디 석유 시설을 공격해 단번에 세계 석유 공급량의 5%를 시장에서 사라지게 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앞으로 그들이 이란의 석유 수출을 가로막는다면 페르시아만 전체에서 기름이 한 방울도 수출되지 못 하게 하겠다”고 경고했다.중동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엄격한 제재를 유지하는 한 미국과 이란은 대규모 군사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공격-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레바논·시리아·이라크·쿠웨이트·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라이언 크로커는 뉴스위크에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성급하게 전쟁을 벌이지 않는 국가안보 ‘미니멀리스트’라는 점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와 그의 팀이 제재를 통해 이란에 최대 압박을 가한다는 점이다. 이란은 그것을 자국의 정치체제와 정권을 완전히 바꾸려는 미국의 적대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들도 ‘최대 저항’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그런 상황에 대비하지 않는다.” 카타르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패트릭 테로스에 따르면 이란의 그런 저항 작전은 20년에 걸친 전략 분석에 바탕을 둔다. 이란은 해전이 벌어질 경우 막강한 미국 해군이 페르시아만의 석유 수출 관문인 호르무즈 해협을 장악하는 상황을 막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 이란은 주요 인프라를 파괴할 수 있는 미국의 위력적인 공습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따라서 이란은 세계경제가 페르시아만의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하는 현실을 표적 삼아 미국에 타격을 주는 전략을 고안했다고 테로스 전 대사는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란은 친미국 연합인 페르시아만(걸프)협력회의(GCC)의 회원국들인 사우디·카타르·아랍에미리트·쿠웨이트의 석유 생산·수출 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미사일·상륙 부대 전력을 1990년께부터 증강했다.테로스 전 대사는 워싱턴 D.C. 소재 싱크탱크 걸프 국제포럼의 웹사이트에 9월 24일 게재된 논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6년 이란은 자국의 그 같은 공격 능력을 GCC에 알려주며 회원국들에 만약 미국이 이란을 공격한다면 이란은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량의 20%를 없애버리겠다고 미국에 전하라고 통고했다.”그는 이란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이런 전략을 실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이 자국의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할 때 사용한 논리와 똑같다는 설명이었다. “드골 대통령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적대국에 맞서려면 그들의 존재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능력까지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몸 전체가 아니라 팔이나 다리 하나를 떼어낼 수 있는 능력으로 족하다고 말했다.”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군의 미군 드론 격추에 대한 대응으로 보복 공습을 취소하는 대신 페르시아만의 유조선 운항을 모니터하는 이란 시스템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을 지시했다. 또 그는 대이란 경제제재를 강화하고 인근 지역에 미군을 추가 파병했다. 또 사우디 석유 시설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도 트럼프 대통령이 사이버 공격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정치 컨설팅 회사 유라시아그룹의 이언 브레머 회장(뉴욕대학 정치학 교수)에 따르면 최근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 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GCC 회원국 지도자들과 비공개 만찬을 가진 자리에서 미국은 이란을 상대로 하는 군사 공격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그들을 안심시켰다. 브레머 회장은 고객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그로써 이란이 배후로 지목하는 최근의 사우디 석유 시설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이 군사적 행동을 할 것인지를 둘러싼 궁금증은 확실히 가라앉았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대화를 거부하면 제재를 더 강화할 생각이지만 전쟁은 원치 않는다고 확실히 선언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GCC 회원국 지도자 대다수가 그의 언급을 환영했다.”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이란에 맞서 무력 사용을 자제하는 자신의 태도를 옹호하기도 했다. “흔히 ‘나약함을 드러내는 그런 소리는 그만두고 보복 공격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 생각엔 무력 사용을 자제하는 게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이다.”그러나 제재는 이란의 더욱 거센 저항을 부를 것이다. 미국 국방부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워싱턴 D.C. 소재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이란 분석가 아리안 타바타바이는 뉴스위크에 “현재의 제재 강도가 지속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군사적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한편 이란과 미국 사이의 고조되는 긴장을 외교적으로 완화하려는 국제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별 성과가 없었다. 지난 8월 말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G7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을 깜짝 초청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자리프 장관의 만남을 주선하려는 중재 노력이었다. 그러나 자리프 장관은 마크롱 대통령의 초청에 응해 프랑스 비아리츠에 도착했지만 트럼프 대통령 면담은 거부했다. 알맹이 있는 실질적인 협상이 중요하지 사진 찍기로 생색만 내는 것은 쓸데없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프랑스가 또다시 중재에 나서면서 지난 9월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제재를 해제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이란 측에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유엔 총회가 열리는 도중 틈을 내어 로하니 대통령과 만나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양자 협상을 추진하기로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시도도 트럼프 대통령이 내건 조건 때문에 무산됐다. 이란은 그런 조건이 굴욕적이며 자국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로하니 대통령은 그 후 자신의 웹사이트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제재가 해제되기 전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다면 이란이 ‘최대 압박과 제재의 분위기’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협상한다는 인상을 준다. 이란은 그런 굴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또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양자 협상 요구도 거부했다며, 미국이 먼저 2015년 핵합의로 복귀하고, 그 협정의 다른 서명국인 영국·중국·프랑스·독일·러시아를 포함하는 다자간 논의에 합류한다면 얼마든지 미국과 대화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외교적 노력의 실패를 이란 탓으로 돌렸다. “이란은 대화하려면 내가 부과한 제재를 먼저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난 물론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그런데도 프랑스 관리들은 트럼프와 로하니 대통령 사이의 만남을 중재하려고 계속 노력할 생각이다.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페르시아만에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면서 걸프 국가들과 러시아·중국·유럽연합(EU)·인도는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페르시아만 항행 안전 조치를 구상하고 있다. 한 관리는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에 “그런 대안 조치가 없으면 페르시아만에서 대규모 군사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이란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일부 분석가는 유엔에서 외교적인 노력이 실패했지만 트럼프와 로하니 대통령 모두 대화에 관심이 있으며 현시점에서 양자 협상의 주된 걸림돌은 제재 해제와 대화의 순서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재로 인해 이란이 미국을 향해 갖는 분노가 매우 크다는 사실과 이란 내부 강경파의 압력이 외교적 노력을 추진할 수 있는 로하니 대통령의 입지를 크게 제한한다고 보는 분석가도 있다. 강경파 중에는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도 포함된다. 그들은 미국을 불신하며 제재가 풀리기 전에 로하니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양자 회담을 갖기로 합의하는 것은 이란의 치욕이라고 맹비난할 것이다.이란이 제재에 따른 석유 수출 감소로 큰 고통을 받는 상황이지만 실제 이란 경제는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이 거듭 예측한 만큼 붕괴 직전이 결코 아니라고 보는 분석도 있다. 영국 비즈니스 온라인 매체 부어스앤 바자의 에스판디야르 바트만겔리지 편집인에 따르면 이란은 경제의 다변화를 통해 방대한 비(非)석유 산업 기반을 구축했으며 이웃 국가들과 교역에 치중할 뿐 아니라 40여 년에 걸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를 겪으며 그동안 갈고 닦은 밀수 기술을 갖추고 있다.바트만겔리지 편집인은 뉴스위크와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이란 경제는 미국이 생각하는 것보다 복원력이 훨씬 더 강하다”며 “그런 복원력으로 로하니 대통령은 트럼프 정부의 제재에 더 강하게 저항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로하니 대통령과 직접 만나든가 최소한 사진이라도 같이 찍지 않으면 제재를 해제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미국과 이란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양국이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치하는 것은 중동의 평화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전문가들과 전직 관리들은 말한다. 랜드연구소의 이란 분석가 타바타바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압박’ 정책에는 전쟁 위험을 해소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고 우려한다. “외교에선 채찍과 당근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상대방이 행동을 바꾸면 기꺼이 당근을 내놓겠다는 의사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 이란은 서로 그런 모습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란의 관점에서 본다면 2015년 핵합의를 아무리 준수해도 그와 상관없이 미국으로부터 채찍질만 당한다는 억울함이 있다. 따라서 핵합의를 준수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미국 국무부 관리를 지낸 재릿 블랑크는 제재에 기반한 트럼프 대통령의 대이란 정책은 전쟁을 부르는 지름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른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란의 미군 드론 격추와 더욱 최근의 사우디 석유 시설 공격과 관련해 “이란은 최근 놀라울 정도로 위험한 행동을 보였다”고 말했다. “미국과의 다툼에서 이란이 자칫 선을 넘어 전쟁으로 비화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2015년 이란 핵합의의 실행을 감독한 블랑크는 그런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중동 전체의 전쟁으로 확대될 위험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란은 중동 도처에 파트너가 있다.” 이란이 훈련과 장비를 공급하고 지원하는 레바논·시리아·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를 가리킨다. “이란은 압도적인 군사 우위 국가로부터 위협을 느끼면 그런 비대칭적인 자산을 총동원해 대응할 것이다. 지역 전체로 전쟁이 확대될 수 있다는 뜻이다.”미국과 이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지면 2015년 이란 핵합의에 서명한 유럽 3개국도 난처한 입장에 처한다. 프랑스·독일·영국은 한편으로는 미국의 가까운 동맹국으로서 이와는 다른 상황이라면 당연히 군사적으로 미국 편을 들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유럽 동맹국이 미국의 정책에 반기를 든 전례가 있다. 2003년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이란 문제의 경우에도 프랑스·독일·영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2015년 핵합의 탈퇴에 반대했다. 심지어 그들은 이란이 제재의 일부를 우회할 수 있도록 예외적인 금융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물론 미국의 압력으로 그 프로그램을 통한 실제적인 금융거래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란에 맞서 미국 편에서 함께 싸우기를 거부하려는 조짐이 또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페르시아만의 항행 자유를 확보하려는 미국 주도의 새로운 연합체 결성에 참여하지 않았다.일부 관측통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이란 ‘최대 압박’ 정책을 1930년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동아시아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에 석유와 고무 수출을 금지한 정책과 닮은꼴이라고 본다. 당시에도 그런 제재는 지역 문제에서 미국의 간섭에 저항하려는 일본의 결의를 더욱 굳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은 아시아의 강대국으로서 입지를 지키기 위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의 해군 기지를 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을 끌어들였다.사우디 주재 미국 대사를 지냈고 외교사를 공부하는 채스 프리먼은 트럼프 정부의 제재에 반발하는 이란의 도발적 행동이 고조되는 것을 두고 “과거사를 통해 우리가 아는 상황이 재현될 것임을 시사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 한 나라를 궁지로 몰면 그 나라가 아무리 군사력이 약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언젠가는 반격해온다는 뜻이다.”프리먼은 진주만 공격을 두고 당시 미국이 일본에 대해 ‘최대 압박’ 정책을 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압박이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고 판단하고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최대 압박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조나선 브로더 뉴스위크 기자

2019.10.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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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70주년 맞은 중화인민공화국] 경제 발전에 무게 두고 끊임없는 자기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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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이후 헌법 개정하며 공산주의 색채 희석…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 국가 건설 중국이 10월 1일로 성립(成立·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용어임) 70주년을 맞았다.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년)은 천안문 광장 망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의 중국은 누가 봐도 거대한 용이 승천을 꿈꾸며 꿈틀거리는 형상이다.경제적으로 중국의 발전은 눈부시다. 국제통화기금(IMF) 2018년 통계를 기준으로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명목금액 기준으로 9608달러로 세계 67위다. 구매력 등을 감안한 구매력지수(PPP)로는 9691달러로 세계 82위다. 어느 기준이든 올해 1만 달러를 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됐다. 중국은 건국 70주년과 1인당 GDP 1만 달러 시대 입성이라는 겹경사를 맞게 됐다. ━ 건국 70년, 1인당 GDP 1만 달러 시대 입성 이런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화제국’ 수립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고대에 동서 세계를 잇던 육상·해상 실크로드를 현대에 복원하겠다는 ‘일대일로’ 정책에는 국제 영향력 극대화 전략이 엿보인다. 총연장 3만㎞에 가까운 고속철도가 선봉에 서있다. 이미 102개국과 진출 계약을 했다. 군사력도 전방위로 증강 중이다. 공격용 무기체계인 고가의 항공모함을 2025년까지 7척이나 보유할 것으로 알려졌다.지적받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경제 성장으로 대국을 지향하면서도 민주주의나 자유·인권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를 둔다. 홍콩 사태는 그런 사례이면서 중국 일국양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중국 내부의 티베트 불교도와 신장위구르 무슬림에 대한 동화정책에 대한 문제점도 국제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지적받고 있다. 지난 70년간 대만과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통일을 위한 협상도 이루지 못한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그럼에도 미국과 무역분쟁을 벌일 정도로 글로벌 경제대국이 됐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누가 봐도 중국은 글로벌 경제대국이다. 중국이 여기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 길은 역대 지도자의 공과 과로 점철됐다. 중국 최고지도자는 초대 마오쩌둥(재임 1945~76년)을 거쳐 화궈펑(1921~2008년, 재임 1976~78년)과 덩샤오핑(鄧小平·1904~97년, 재임 1978~89년), 장쩌민(江澤民·1926년~·재임 1989~2002년), 후진타오(胡錦濤·1942년~, 재임 2002~2012년)을 지나 시진핑(習近平·1953년~·재임 2012년~)으로 이어졌다. 시 주석은 현재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을 맡아 당군정을 총괄하고 있다.마오쩌둥은 공산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군사전략가로 공산혁명에 성공해 공산정권을 수립한 건국 주역이다. 하지만 마오는 1957년 반우파투쟁으로 당내 주도권을 장악한 다음 미국과 영국을 15년 안에 따라잡겠다며 농업·공업 대증산 정책인 대약진운동(1958~62년)에 벌였다가 현실을 무시한 시행착오적 정책으로 대혼란과 기아를 초래했다. 중국 통계로 봐도 이 기간에 인구가 1625만 명이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며, 연구에 따라 4500만~76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마오의 과오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봉건·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이룩하겠다는 명분으로 정치·경제·사회·사상·문화의 전반적인 개혁운동인 문화대혁명(1966~76년)을 일으켰다. 어린 홍위병을 앞세워 전통문화를 대대적으로 파괴하고 하방운동을 펼쳐 도시 주민을 대대적으로 지방 농촌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반대자에게는 재판 없이 홍위병의 린치를 가했다. 그 결과는 중국 사회의 전반적인 후퇴였다. 중국공산당은 1978년 열린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 회의에서 문혁기의 사망자를 40만 명, 피해자를 1억 명 정도로 추산했다. 사망자 숫자는 연구 결과에 따라 40만~1000만 명 이상으로 차이가 있다.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의 사망과 문혁 기간 중 권력을 휘둘렀던 장칭(江靑)·왕훙원(王洪文)·장춘자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 ) 등 이른바 사인방의 체포로 막을 내렸다. ━ 덩샤오핑, 마오 공산주의 노선을 개혁·개방으로 전환 그 후 덩샤오핑은 마오의 공산주의 노선을 개혁·개방으로 전환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대 중국의 노선을 구축했다. 중국이 오늘날 눈부신 경제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근본적인 배경은 덩사오핑의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 주창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중국 헌법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서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국가의 근본 과업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길을 따라 전력을 다해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중국의 여러 민족인민은 계속하여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들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의 지도 아래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과 덩사오핑 이론, ‘세가지 대표’의 중요 사상의 인도 아래 인민민주주의 독재 및 사회주의의 길을 견지하고 개혁·개방을 견지하며 사회주의의 각종 제도를 끊임없이 개선하며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 법제를 건전화하며 자력갱생 고군분투하여 공업, 농업, 국방 및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점차적으로 실현하며 물질문명과 정치문명 정신문명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부강하고 민주적이며 문명된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어 나갈 것이다.’이처럼 중국 헌법은 덩샤오핑 이론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덩샤오핑이 주창한 중국공산당의 공식 이념이 되고 개혁·개방의 바탕이 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도 헌법에 명시됐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는 마오 시절에는 ‘농민이 주도가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의미했지만, 덩은 이를 사회주의의 기본 요건을 온전히 갖추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즉,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흑묘백묘론으로 상징되는 실용주의,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자가 되어라’는 선부론을 바탕으로 먼저 경제 발전을 이뤄 물질적 토대를 갖춘 다음 공산주의 사회로 가자는 이론이다.그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덩사오핑 이론의 정착과 중국의 경제 발전은 상당한 진통을 거쳐 이뤄졌다. 이는 중국의 헌법 개정 역사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마오쩌둥 시절인 1954년 제정된 중국의 헌법은 1975년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공산주의 색채를 희석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국가 건설에 힘을 실어줬다. 1975년 첫 개정 때는 유명무실했던 국가주석 제도를 폐지하는 등 정치·제도적 변화에 그쳤지만 1978년 3월의 헌법 개정은 중국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사오핑이 작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덩은 공산주의 계급투쟁 노선을 의미하는 ‘전면적인 독재’라는 구절을 헌법에서 삭제했다. 대신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가리키는 ‘4개 현대화’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4대 현대화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년, 1949~76년 국무원 총리, 1954~1976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가 주창한 정책으로 덩은 이를 중국의 공식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중국은 이때부터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이렇게 변화의 기틀을 다진 덩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2회 전체 회의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제안했다, 이 1978년 개헌은 중국의 국내체제 개혁과 대외개방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헌법에 삽입된 ‘4개 현대화’는 개혁·개방의 상징이 됐다. 덩은 “인민들이 잘먹고 잘사느냐가 사회주의냐 아니냐의 핵심”이라며 이념보다 실용주의 노선을 앞세웠다. 덩의 개혁·개방 사상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위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존재하듯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일방적인 평등화나 평준화보다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先富論)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덩의 이러한 신념은 헌법 개정 작업을 통해 비로소 실현에 들어갔다. 공산주의의 기본정신은 부정하지 않고, 인민 민주주의 독재정치체제를 지키며, 공산당의 지도력을 유지한다는 중국 사회주의의의 3가지 원칙을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을 통한 부강한 중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덩의 신념이 중국 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됐다.개혁·개방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보수파의 반대 때문이다. 1979년 헌법 개정은 정치적으로 일시적인 보수화를 의미한다. 이 개정을 통해 4대 민주, 또는 4대 자유로 불렸던 대명(大鳴·자유로운 발언)·대방(大放·자유로운 조직과 활동)·대변론(大辯論·자유토론)·대자보(大字報·벽보붙이기)를 폐지했다. 1978~79년 웨이징성(魏京生) 등이 베이징 시단(西單)의 벽에 민주화·자유를 선전하는 대자보를 붙인 ‘민주의 벽’ 운동이 원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이 개헌을 통해 개혁·개방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4대 민주는 문화혁명 시기 인민의 완전한 언론·조직 활동을 보장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한다며 마오쩌둥이 주창해선 인민동원방식이었지만, 민주의 벽 운동에선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1982년 개헌도 보수파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무산계급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4원칙을 지킨다는 내용의 ‘4항 기본원칙’을 헌법에 반영했다. 급진 개혁 요구를 제한하는 장치다. 이를 통해 덩은 중국의 개혁·개방은 정치개혁 없는 경제개혁임을 분명히 했다. 이후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당제·공정선거 등 정치개혁 없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 급진 개혁 요구 제한하는 장치도 마련 하지만 이런 개혁을 통해 보수파를 달랜 덩은 시장경제의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1988년 개헌에선 민간경제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이 추가됐다. 헌법 11조에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동 소유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한 구성부분”임을 인정하고 “국가는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유 경제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라고 명문화했다. 토지사용권 양도도 가능하게 했다.1993년 개헌은 획기적이었다. 국유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했기 때문이다. 경제나 기업 활동에서 공산당이나 정부의 입김을 배제한 조치다. 99년 개헌에선 덩샤오핑 이론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헌법 5조에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법에 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한다’며 법치를 명문화했다.2004년에는 사유재산권 보장을 헌법에 못박았다. 헌법 13조에 ‘공민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중국이 공산화한 지 55년 만에 사유재산은 공민의 합법적인 권리로 지위를 회복했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 제도를 실현해 빈부격차를 없앤다는 고전적 공산주의의 이념은 인민이 잘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앞에 설 자리를 잃었다. 아울러 중국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대부분의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장쩌민의 3개 대표사상의 헌법적 지위도 확립했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헌법 서언에도 들어있다. ━ 중국공산당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 헌법 개정에 맞춰 중국공산당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를 꾀했다. 개혁·개방 초기 과거의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평가를 바로 잡는 평반(平反)을 활성화해 문화혁명을 포함한 과오를 청산하고 중국 사회를 재구성할 계기로 삼았다. 심지어 당원 자격도 무산대중에서 당을 지지하는 자본가(紅色資本家)까지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주의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지만 공산당의 권위는 유지됐으며 변화와 개혁을 실험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역사는 경제에 활력을 주는 방향으로 부단히 발전해왔다. 이렇게 끊임없는 자기 개혁이 중국 발전의 원동력일 것이다. 중국은 이제 동북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성립 70주년을 맞은 중국과 공존할 방법을 찾는 것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과제일 것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09.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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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학각색(各學各色)’ | 북한 비핵화 VS 인권 보호 어느 것이 우선인가 - 경제학] 시급성 관점에서 비핵화가 더욱 중요

정책이슈

북 인권 문제는 김정은 체제와 연관… 비핵화 이뤄도 강요하기 어려워 두 가지 관점에서 북한의 비핵화는 인권 보호보다 중요한 이슈다. 첫째는 시급성의 관점이며, 둘째는 가능성에 대한 논의이다. 먼저 북핵 문제는 시간을 다투는 문제다. 북한의 핵무장이 심화되면 미국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게 되면 한반도에는 전면전 또는 국지전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의 핵무장은 우리에게는 매우 위중한 상황이다.돌이켜 보면 북미 대화가 있기 전인 지난해 초의 한반도 분위기는 매우 위급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북한이 국가 핵무력을 완성해 되돌릴 수 없는 전쟁 억지력을 보유하게 됐다고 선언했다.이에 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월 말 의회 연두교서 연설에서 북한에 대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어떤 정권도 잔인한 북한 독재자만큼 자국민들을 완전히 그리고 잔혹하게 억압하지 않았다”라고 북한의 인권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는 북한의 무모한 핵미사일 추구가 미국을 위협할 수 있으며 미국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압력(Maximum Pressure)을 가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했다.양쪽을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 같았던 미국과 북한의 분위기는 3월 초에 급변한다. 정의용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이 북한을 다녀온 후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난 후 폼페이오가 김정은을 면담했고, 전격적으로 북미 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북미 회담의 배경에는 미국의 대북제재가 효과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중국도 북한 제재에 동참하면서 북중 수출입이 크게 감소했고, 미국이 거의 전쟁 직전으로까지 북한을 압박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결국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가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경제적 제재를 비롯한 여러 압력을 가하는 게 필요했다.다음으로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 보자. 북한 인권 문제는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북한의 인권이 개선되려면 결국 북한의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 이는 북한 정권이 가장 마지막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비핵화보다도 어려운 것이 북한의 인권 문제이다. 김정은은 자신의 정권을 위해 비핵화를 선택할 수는 있을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은 김정은에게 비핵화에 따른 체제 보장을 약속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 경제적 지원과 정상적인 외교관계까지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비핵화는 김정은과 북한에게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북한의 인권 문제는 전혀 다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1인 독재체제와 김정은 중심의 정치체제를 바꿀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정은은 비핵화까지는 몰라도 인권 문제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핵화는 다른 나라에 대한 위협이므로 미국·한국·일본 등이 북한에게 요구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인권 문제는 엄격하게 따지고 보면 내정간섭일 수 있기 때문에 강하게 밀어붙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처칠은 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얄타에서 회의를 한 내용을 회고록에 쓰고 있다. 여기서 처칠은 스탈린에 대한 소름끼친 기억을 말하고 있다. 곧 독일을 점령하게 될 터인데 이때 독일군 장교들을 모두 즉결처형하자고 스탈린이 제안한 것이다. 처칠은 그런 무자비한 일을 어떻게 벌일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처칠은 회고록에서 이처럼 인권을 말살하는 사람과 전쟁 종식을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무력감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이런 일을 감당해야 했다. 북한 정권의 인권 문제는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비핵화는 더 중요한 문제다. 인권 문제는 그 후에 논의할 문제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조성봉 교수는… 녹색성장위원회 위원,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자원경제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9.07.20 12:02

3분 소요
[일국양제 홍콩의 불안한 미래] 중국의 사회 통제로 경제 활력 떨어지나

국제 이슈

‘도망자 조례’ 둘러싸고 홍콩 주민 반발 격화… 민주파 총력전에 중국 대응 주목 홍콩에서 6월 9일부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은 겉으로는 홍콩 정부가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에 대한 홍콩 입법회(의회)의 12일 심의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이 1997년 중국에 회귀할 당시 중국이 했던 ‘일국양제(一國兩制)’ 약속을 지키지 않고 홍콩을 중국화한다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우선 문제의 법안부터 따져보자. 이 법안은 홍콩이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경우에 따라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과 대만·마카오가 포함됐다. 홍콩에 거주하는 민주인사들이 중국의 요구에 따라 송환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홍콩인들이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6월 9일의 이 송환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홍콩에서 벌어져 주최 측 추산 103만명, 경찰 추산 24만 명이 참가해 온 거리를 가득 채우며 시위를 벌였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돌아간 후 벌어진 시위로는 최대 규모다. 홍콩의 역대 시위 중에는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150만 명이 몰려 벌였던 동조 시위 이후 가장 크다. ━ 2014년 민주화 요구한 50만 시위 이후 최대 규모 지난 6월 4일 홍콩에서 벌어졌던 6·4 천안문 민주항쟁 30주년 추모 촛불집회에 천안문 관련 집회 사상 최대 규모인 18만 명이 몰렸던 것과 비교하면 홍콩인의 이 법안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30년 전 중국 본토인 베이징에서 벌였던 천안문 사건에 대한 추모 열기보다 당장 중국이 홍콩 당국에 가하고 있는 정치적 압력, 중국에 송환될 수도 있다는 공포, 홍콩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침해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홍콩인을 더욱 자극한 셈이다.더욱 큰 문제는 홍콩인들이 중국의 일국양제 약속을 근본적으로 불신한다는 점이다. 일국양제는 중국이 사회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홍콩과 마카오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1997년 포르투갈과 영국으로부터 마카오와 홍콩을 돌려받을 때 중국이 현지 주민과 서방권을 안심시키기 위해 내놓은 논리다. 개혁개방의 설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시한 개념이다. 중국은 대만에 대해서도 일국양제로 통일하자고 요구해왔다. 일국양제는 중국의 공식 통일방안인 셈이다.그런데 그런 일국양제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만이 이번 시위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홍콩인들은 시위에서 일국양제와 함께 ‘홍콩인은 홍콩인이 통치한다(香人治香)’ ‘고도자치(高度自治)’의 3대 원칙을 요구했다. 중국이 홍콩 회귀 당시 약속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단순한 법안 하나만 손본다고 홍콩 주민들이 누그러질 태세가 아닌 셈이다.홍콩에서 일국양제를 둘러싸고 대규모 항의 시위와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2014년 7월 행정장관 선거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주최 측은 51만 명, 경찰은 9만8600명이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홍콩 기본법에 따르면 정부수반인 행정장관은 선거위원회가 간접제한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중국 국무원 총리가 임명한다. 국민이 직접 뽑는 지도자가 아닌 것이다. 홍콩 주민은 주민 직접선거를 통한 선출을 요구하지만 중국 당국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럴 경우 홍콩이 준독립국이 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정식 명칭이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인 행정장관은 홍콩의 정부수반이다. 그렇게 높은 자리임에도 현재 주민의 직접 선거가 아닌 간접선거를 통해 뽑는다. 입법회 의원, 구의회 의원, 홍콩에서 선출해 베이징에 보낸 전국인민대표자대회(전인대) 대표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대표, 38개 직능별 선거위원회에서 선출한 사람 등 1200명으로 이뤄진 선거인단에서 선출한다. 가장 많은 선거인단을 차지하는 직능대표는 친중국계가 대부분이어서 대표 선거가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선거인단은 처음 400명으로 시작해 1998년부터 800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2007년 중국 전인대는 2012년 행정장관 선거부터 간접선거 선거인단을 1200명으로 늘리고, 2017년부터는 직선제를 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그런데 2014년 8월 31일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2017년 홍콩 행정장관 선거 직선제 전환과 관련해 1200명 안팎으로 이뤄진 ‘행정장관 후보 추천위원회’에서 50% 이상이 지지한 사람만 행정장관으로 입후보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추천위라는 장치를 통해 사실상 친중파 인사 2~3명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앞서 전인대는 “홍콩 행정장관은 반드시 애국 인사가 맡아야 한다”며 친중인사만 행정장관이 되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시민들은 반발했다. 간선제 시절에도 선거위원 8분의 1 이상의 추천을 받으면 후보로 등록할 수 있었는데 말만 직선제이지 후보 등록부터 제한해 주민의 의사가 더욱 반영되기 힘들게 된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이에 따라 그해 9~12월 청년들을 중심으로 행정장관 선거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와 도로를 점거하는 연좌 시위가 벌어졌다. 이는 시민 불복종운동과 수업거부운동으로 번졌다. 비오는 중에도 우산을 받쳐 들고 시위를 벌였다고 해서 ‘2014년 우산혁명’으로 부른다. 그 결과 홍콩 입법회는 2015년 6월 15일 선거제도 개편안을 8대 28로 거부해 선거제는 간선제로 남게 됐다. 중국은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는 홍콩인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후보 추천’이라는 지뢰를 숨긴 제도를 제안하면서 생색만 낸 셈이다. ━ 일국양제는 중국의 홍콩·대만 통인 방안 2017년 7월에는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홍콩을 방문해 일국양제에서 ‘일국’을 강조해 일국양제에 대한 홍콩인의 회의를 더했다. 홍콩 입법기관인 입법회 선출 방식도 문제로 지적된다. 현재 지역구 35석, 직능대표 35석으로 모두 70석으로 구성된다. 지역구 의원은 홍콩 유권자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하지만 직능대표 30석은 기업을 비롯한 각종 직능단체 회원들이, 나머지 5석은 구의회에서 선출한다. 직능대표는 친중파가 장악하고 있으며 지역구도 현재 친중파 18석, 민주파 16석, 공석 1석의 분포다. 중국이 형식적으로 불가능한 홍콩 내정에 대한 간섭을 실질적으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사실 이 엄청난 정치 사태의 발단은 치정 살인 사건이다. 지난해 2월 17일 대만에서 홍콩인 학생 찬퉁카이(陳同佳·20)가 임신한 여자친구 판샤오잉(潘曉穎·사망 당시 20세)을 치정 문제로 살해하고 암매장한 후 홍콩으로 도주한 사건이다. 판샤오잉의 부친이 딸이 귀가하지 않는다고 신고하자 수사에 들어간 대만 경찰은 CCTV를 통해 찬퉁카이의 범행을 확인했다. 이에 대만 사법당국은 찬퉁카이를 인도 받아 살인죄로 처벌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홍콩은 대만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지 않아 그를 보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홍콩 형법은 ‘장소적 적용범위’ 조항에서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홍콩 영역 안에서 죄를 범한 내국인과 외국인에게만 법을 적용한다는 이야기다. 실행이나 결과 중 어느 하나라도 영역 안에서 발생하면 형법을 적용하지만 판샤오잉 피살 사건은 여기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다. 홍콩 당국이 그를 살인범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대만 사법당국의 연락을 받은 홍콩 당국은 3월 13일 찬퉁카이를 체포해 살인과 암매장 장소를 자백 받았다. 그럼에도 홍콩 당국이 그에게 적용할 수 있었던 혐의는 고작 여자친구의 돈을 훔친 절도와 장물처리 혐의뿐이었다. 홍콩 당국이 수사 과정에서 찬퉁카이가 홍콩으로 도주한 후 판샤오잉의 현금카드로 돈을 인출해 사용한 것을 발견해 이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었다. 재판 막바지에 그에게 중범죄에 해당하는 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판 결과 그에게는 29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됐을 뿐이다. 그러자 홍콩과 대만 모두에서 ‘살인 자백하고도 무죄인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대만 검찰은 찬퉁카이를 살인죄로 기소했으며 지난헤 12월 3일에는 그를 대상으로 최장 시효 37년6개월짜리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끝까지 기다려 그가 송환되면 대만에서 재판을 하고 단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이에 따라 홍콩 당국은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도록 올해 3월 29일 ‘범죄인 인도 법안’을 마련하고 4월 3일 입법회 본회의에서 1차 심의를 했다. 공식명칭이 ‘2019년 도주범과 형사사무 상호법률협조(수정) 조례초안인이 법안은 줄여서 도법조례 수정초안으로 불리지만 미디어와 일반인들은 보는 시각에 따라 도주범조례·인도조례·중국송환조례 등으로 각각 부른다.‘중국송환조례’라는 축약어는 홍콩인들이 이 법안으로 인한 민주인사들의 중국 송환과 처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홍콩의 민주파와 시민들은 이 법안에 필사적으로 반대해왔다. 중국 정부가 이 법을 악용해 홍콩에 거주하는 중국은 물론 홍콩의 반중국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잡아가면서 홍콩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것으로 우려한다. 사형제도가 유지되고, 영장이나 법원 판결 없이도 사람을 잡아가서 가두거나 가택연금을 하는 중국을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 홍콩인 학생 찬퉁카이 치정 살인 사건이 발단 더구나 이번 송환법안이 통과될 경우 홍콩의 민주화 지수도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국제 NGO 등의 조사를 바탕으로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법의 지배’ 항목에서 중국은 126개 국가·지역 중 82위, 홍콩은 16위를 차지하고, ‘부패대책’ 부문에선 중국이 180개 국가·지역 중 87위, 홍콩이 14위다. ‘보도 자유 보장’ 분야에선 중국이 180개 국가·지역에서 177위, 홍콩이 73위, ‘민주주의가 실천되고 있는가’ 항목에선 중국이 167개 국가·지역에서 130위, 홍콩이 73위다. 중국의 낮은 순위, 중국과 홍콩의 격차도 문제지만, 홍콩이 언론과 민주주의 부문에서 상당히 저조한 것으로 나타난 것도 문제다. 홍콩인들이 일국양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중국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최악의 시나리오는 자유방임형 경제체제를 바탕으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룬 홍콩이 정치적·사회적 비민주화와 불안정, 그리고 중국의 간섭으로 성장동력을 잃는 일이다. 사실 홍콩은 오랫동안 중화권의 경제수도이자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센터 역할을 맡아왔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홍콩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구매력 기준(PPP)으로 6만4216달러에 이른다. 부자 나라의 대명사인 미국(6만2606달러)이나 스위스(6만4216달러)와 비슷하다. 카타르(13만475달러), 마카오(11만6808달러), 룩셈부르크(10만6705달러), 싱가포르(10만345달러), 브루나이(7만9530달러), 아일랜드(7만8795달러), 노르웨이(7만3456달러), 아랍에미리트(6만9383달러), 쿠웨이트(6만7000달러) 다음이다. 홍콩은 마카오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특별자치구로 주권국가가 아니라 공식순위에선 빠지지만, 비공식으로 따지면 세계 11위의 부자에 해당한다. 명목 금액으로 따져도 4만8517달러로 독일(4만8256달러), 프랑스(4만2878달러), 영국(4만2558달러), 일본(3만9306달러)보다 많다. 경쟁 대상인 싱가포르에 많이 추월당하고 일부 항목에선 밀렸어도 여전히 중국과 아시아의 경제 엔진이다.홍콩이 이렇게 풍요를 누리는 가장 큰 이유는 사업하기 좋은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거의 없다. 홍콩 당국은 경제 문제에선 수동적이다. 일손을 놓고 있는 게 아니라 일부러 민간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유방임형 경제체제는 홍콩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1912~2006)은 홍콩을 ‘자유방임형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실험장’이라고 칭찬했다. 자유주의적 사상을 전파하는 미국의 카토 연구소도 홍콩을 자유방임형 경제정책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정부의 간섭이 거의 없는 자유방임형 경제체제는 낮은 세금 및 자유무역과 함께 홍콩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기본 요소다. 홍콩이 세계적인 국제금융센터로 성장한 원동력이기도 하다.자유방임형 경제정책은 정부가 규제, 과세, 기부금 등 민간 영역에 대한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재산권 보호에만 주력하는 경제 환경을 조성하는 정책이다. 이를 통해 민간의 창의성과 활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자는 의도다. 정부가 무책임하게 방임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유주의적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인 불개입주의라고도 한다. 물론 주식시장 같은 경제조직을 만들고 관리하는 정도는 개입한다. ━ 홍콩은 ‘자유방임형 자본주의 실험장’ 홍콩은 이런 정책을 바탕으로 경제자유도 지수에서 1995년부터 2018년까지 25년간 세계 1위 자리를 줄곧 유지해왔다. 미국 해리티지 재단과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발표하는 경제자유도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는 영업, 교역, 투자, 금융, 재산권, 노동, 부패영향, 정부 규모와 통화 관리 등 183개 부분을 꼼꼼하게 살펴 정한다. 특히 2018년 지수에서 홍콩은 100점 만점에 90.2점을 기록해 90점 이상을 기록한 전 세계 유일한 나라다. 싱가포르(88.8), 뉴질랜드(84.2), 스위스(81.7), 호주(80.9)가 뒤를 잇고 있다. 한국은 73.8로 29위, 일본은 72.3으로 30위를 각각 차지했다. 국제금융센터는 물론 세계적인 기업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가 상당수 홍콩에 위치한 것도 이런 경제 자유의 힘일 것이다. 이는 홍콩이 기업하기 좋은 기회의 땅으로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유다.홍콩으로선 경제에 타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시위 사태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할 것이다. 이에 따라 홍콩 정부는 인도 대상이 살인·밀수·탈세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국한될 것이라고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선 사형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에 따라 홍콩인의 거부감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그럼에도 홍콩 정부 수반인 캐리람(林鄭月娥) 행정장관과 정부, 그리고 친중파 의원들은 홍콩 사법체계의 허점을 방치해선 안된다는 명분으로 이 법안을 계속 밀어붙여왔다. 시민들의 거센 항의 앞에 이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더구나 중국은 미국과 나라의 명운을 걸고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에 민주주의와 인권과 관련한 가치관에 관한 문제제기를 계속 해온 대표적인 나라다. 홍콩 사태가 미중 대결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어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2019.06.16 12:13

9분 소요
[미·중 무역전쟁 휴전 그 후] 더 치열할 90일짜리 ‘협상전쟁’ 돌입

국제 경제

12월 중순 워싱턴에서 두 나라 대표단 첫 만남…양보 쉽지 않은 사항 많아 가시밭길 예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2월 5일 “미·중 무역전쟁에서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미·중 무역전쟁과 관련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12월 1일 ‘90일 휴전’에 합의했지만 ‘정전 조건’으로 볼 때 충돌이 재발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다.그러면서 무역전쟁이 다시 가열되면 결국 우위를 차지하는 쪽은 미국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중국의 수출품 절반에 대해 내년 1월 1일로 예정했던 추가 관세를 유예했다. 그 대신 중국은 미국에 많은 항목을 양보하는 협의에 들어가기로 합의했다. 만일 양보가 모두 실행되면 중국의 경제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황으로 볼 때 중국이 일방적으로 양보할 수 없었다는 뉘앙스다.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12월 1일 합의한 90일 휴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실적인 우려를 서로 고려한 측면이 강해 보인다. 두 정상이 휴전에 합의할 당시 미국이 특별 관세를 적용하는 중국 상품은 모두 2500억 달러에 이르고, 중국이 보복관세를 부가하는 미국 상품은 1100억 달러에 달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메가톤급 강펀치를 서로 주고받던 미국과 중국이 무역분쟁 150일을 앞두고 일단 90일 휴전에 합의한 데 대해 시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기 때문이다.정상은 이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나 예상보다 긴 2시가30분 동안의 업무 만찬에서 양자 회담을 벌여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양국 정상은 이날 내년 1월 1일 이후 추가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기존 관세율도 올리지 않기로 합의했다. 무역전쟁이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트럼프 행정부가 추가 관세 대상으로 잡은 중국산 상품은 약 2500억 달러(283조원)어치에 이른다. 지난 7~8월 500억 달러어치의 중국산 수입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했고, 9월엔 2000억 달러어치에 10%를 매겼다. 중국은 이에 대응해 1100억 달러(123조원)어치의 미국산 수입품에 보복 관세를 부과해왔다. ━ 미국이 압도적 우위 차지 두눈여겨볼 점은 이번 합의가 무역전쟁의 완화라기보다 ‘일시 유예’라는 사실이다. 이번 휴전 합의에도 일단 기존의 관세 부과는 당분간 그대로 유지된다. 핵심은 미국이 내년 1월로 예상됐던 추가 관세 부과를 90일 간 유예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내년 1월 1월부터 2000억 달러어치에 대한 관세율을 10%에서 25%로 올리고 나머지 2670억 달러어치에 대해서도 추가 관세를 부과한다는 입장이었다. 만일 이렇게 됐다면 중국이 미국으로 수출하는 모든 제품에 최고 25%의 관세가 매겨지는 최악의 전면적인 무역전쟁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이런 최악의 상황은 피했다는 의미가 있다. 중국은 미국산 자동차에 부과하고 있는 40%의 관세를 줄이거나 없앨 것이라고 트럼프 대통령이 밝혔다.경제 규모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양 정상은 지난 6월 무역전쟁 이후 이번에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았다. 그만큼 그동안 앙금이 깊었다는 의미이자 이번에 이렇게 급하게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할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번 합의가 미·중 무역전쟁을 종식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 못하고 두루뭉수리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년 1월 1일로 예상되던 추가 관세 부과를 일단 보류하고 90일 간 무역협상을 재개한다는 내용만 담고 있다. 양국이 가능한 절충점을 모색한 끝에 ‘조건부 정전 합의’를 내놓은 셈이다.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인 의미가 더 커 보이는 이유다.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합의에서 여러 가지 ‘정치적’ 실리를 얻었다. 대부분 트럼프의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국의 협조를 얻어내는 내용이다. 그중 핵심이 중국이 미국의 농업·에너지·산업 제품을 사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중국은 미국이 6월부터 중국산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기 시작하자 7월 7일 미국산 수입품 547개 품목에 대해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 콩·돼지고기·쌀·면화·사탕수수·포도주 등 미국의 주요 수출 농산물을 포함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 기반인 중서부 ‘팜 벨트(농업지대)’에 직격탄을 날릴 수 있는 품목이다.실제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등 미국의 경쟁 농업국이 이를 계기로 중국 시장 진출을 확대해 미국 농산물 수출 시장의 입지가 줄어들 우려도 나온 것이 사실이다. 무역 보복에 나선 중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려고 한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로 합의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국내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 것으로 볼 수 있다.하지만 중국이 트럼프에 일방적으로 선물을 한 것만은 아니다. 미·중 무역갈등 자체가 쌍방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 보복 관세를 부과한 중국도 상당한 타격을 입어왔다. 특히 농산물 무역이 삐걱거리면서 중국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다량의 콩과 옥수수를 미국에서 수입한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옥수수 생산국이지만 세계 최대의 소비국이기도 하다. 2010년부터 미국산 옥수수를 대거 수입하고 있는데, 중국 전체 옥수수 수입의 95%를 차지할 정도로 의존도가 높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콩은 상당수가 동물 사료로 가공된다. 가격 경쟁력이 큰 미국산 콩과 옥수수를 수입해 돼지를 비롯한 가축을 길러 중국인에게 공급하는 ‘축산 체인’이다. 중국은 부족한 고급 돼지고기를 미국에서 수입해왔다. 중국인의 돼지고기 사랑은 유별나며 인민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돼지고기를 충분히 공급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책임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중국 정치에 중요한 돼지고기 공급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료가 되는 농산물에 고율의 관세를 부가한 것은 중국에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중국 당국의 자해라는 평가를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미국산 농산물을 수입하기로 한 것은 트럼프의 승리이면서 중국의 숨통 트기로 볼 수 있다. 결국 미·중 양국의 ‘윈윈’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 의미 더욱 커 트럼프가 거둔 가시적인 성과의 하나가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에 대한 규제에 중국이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백악관은 시 주석이 펜타닐을 규제 약물로 지정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히고 이는 미국에 펜타닐을 불법으로 판 사람은 중국에서 법정 최고형에 처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펜타닐은 의료 분야에서 의사의 처방을 받아 진통제나 마취제로 사용한다. 헤로인보다 약효가 최대 80배 강한 합성 진통제다. 아편 성분을 바탕으로 합성한 오피오이드(아편계) 약물이다. 문제는 이를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약으로 오남용하는 중독자가 미국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트럼프는 ‘오피오이드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강력한 단속을 펼쳐왔다. 미국은 그간 중국이 펜타닐의 주요 공급원이라고 지목하고 근절을 위한 협력을 압박해왔다. 공급원을 근절해 유통을 막겠다는 의도다. 따라서 이번 합의는 트럼프에게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안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트럼프의 또 다른 승리는 세계 최대의 모바일폰 칩 공급 업체인 미국 퀄컴사의 NXP 반도체 인수계약 작업의 물꼬를 극적으로 텄다는 점이다. 미국 퀄컴은 NXP 반도체 인수계약과 관련해 승인을 얻어야 하는 9개 시장 가운데 중국만 남겨놨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미·중 무역전쟁이 가속화하자 최종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NXP 인수는 미·중 무역전쟁의 상징적인 인질이 됐다. 이에 퀄컴은 NXP 인수를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 미국에 미·중 무역전쟁의 ‘부차적 피해자’로 인식됐다. 트럼프에 정치적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합의에서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소득을 얻었다.미·중 무역전쟁은 6월 1일 미국의 관세국경보호청(CBP)이 340억 달러어치에 해당하는 중국 상품 818개 품목에 25%의 특별 관세를 매긴다고 발표하고 6월 15일 첫 특별 관세를 징수하면서 발발했다. 6월 1일을 기준으로 하면 지난 12월 2일로 발발 150일을 맞았다. 그렇다면 미·중이 휴전에 합의한 배경은 무엇일까? 지난 9월 5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게재된 미첼 베이징 지국장의 ‘미·중 무역전쟁은 틀린 가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칼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시 주석은 모두 자기 나라가 무역전쟁에서 우세할 것이라고 확신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옳지 않다는 게 칼럼의 요지다. ━ 중국도 체질 개선 계기로 삼아 이 칼럼은 “미·중 무역전쟁이 심화하는 상황은 양측이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오해한 데서 비롯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르면 미국 측은 무역전쟁이 격화할 경우 중국 경제가 벼랑 끝에 몰릴 것으로 여기지만 이는 중국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해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중국산 수입품 340억 달러에 25%의 특별 관세를 부과하자 미국에선 이 조치가 중국의 투자와 경제 성장을 둔화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상황은 트럼프 행정부의 예상과는 달랐다. 중국 경제의 2분기 성장률은 6.7%를 기록해 1분기의 6.8%보다 0.1%포인트 떨어지는 정도였다. 무역전쟁은 예상처럼 중국 경제를 뒤흔들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이 금융 부문의 과도한 부채 문제를 비롯해 자신의 결점을 찾아 이를 해결하는 노력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미·중 무역전쟁이 중국 경제를 공황으로 몰고 가기는커녕 체질 개선을 촉진해 오히려 더욱 탄탄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는 이야기다.중국 측은 11월 6일의 미국 중간선거 이후의 미국 정치 상황을 지나치게 자국에 유리하게 전망하는 오류를 범했다. 중국 측은 중가선거 이후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더 이상 중국을 상대로 강공을 펼치지 못하면서 무역전쟁에서 후퇴할 것으로 여겼다. 결과적으로 이 선거에서 트럼프의 공화당이 상원을 차지하고, 야당인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했다. 선거 이전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모두 장악한 것과 비교하면 트럼프에 불리한 상황이 된 것은 맞다.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헌법이 부여한 예산권과 법률 제정권, 그리고 행정부 관리 소환권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다.이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를 애먹이거나 정책의 집행 과정을 꼬치꼬치 따지며 강도 높게 견제할 가능성은 크다. 다만 공화당이 하원 주도권을 잃었다고 해서 트럼프 행정부가 경제나 통상 정책 등의 정책 기조를 바꿀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국의 정치체제는 대통령 중심제라 백악관의 권한이 막강하고, 의회는 상원을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의회 권한이 더욱 막강한 상원을 장악하고 있는 한 민주당이 할 수 있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만 높일 수 있을 뿐이다. 하원만 장악한 민주당이 현실적으로 행정부의 도도한 흐름을 돌리거나 막을 수는 없다.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 측이 미국에서 무역 문제가 초당파적인 사안이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국내 정치적으로 볼 때 통상 문제는 더 이상 트럼프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실 미국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자유무역주의를, 민주당은 보호무역주의에 무게를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오히려 민주당보다 더욱 강한 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우면서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는 미국 중서부와 북서부의 쇠락한 중공업·제조업 중심의 공업지대의 실업자들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 2016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기사회생으로 승리하는 원동력의 하나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젠 민주당도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를 반대할 정치적 이유가 없어졌다. 미국의 중간선거에 따른 정치 상황의 변화가 미·중 무역전쟁을 완화시킬 것이라는 중국의 기대는 순진했거나. 미국의 정치 체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보호무역주의를 둘러싼 미국의 내부 정치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중국은 서로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역전쟁을 펴온 셈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구절을 새롭게 떠올릴 때라는 지적이다. ━ 서로의 약점 자국에 유리하게 전망한 오류 이제 남은 것은 무역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세부 협상이다. 이를 위해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가 12월 12∼15일 30명 규모의 협상단을 이끌고 워싱턴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류 부총리는 워싱턴에서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이 이끄는 미국 대표단과 협상하게 된다. 이 협상이 이뤄지면 지난 5월 이후 미·중 간 본격적인 무역갈등 협상이 처음으로 벌어지게 된다. 두 사람은 지난 9월 말에도 협상을 하기로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추가 관세를 발표하면서 일정이 취소된 전력이 있다.두 사람이 협상 테이블에서 얼굴을 맞댄다고 해도 협상으로 가는 길을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미국은 중국에 기술 이전, 지식재산권 침해, 비관세장벽, 사이버 안보를 비롯한 양국 간 현안에 대한 정책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를 중국이 합의해주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은 이 분야에서 우위에 있으며, 중국은 미국의 요구대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적용할 경우 첨단 산업 발전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첨단 기술에서 미국을 따라내는 것을 시 주석 시대 국가 목표로 제시해온 중국으로선 양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지난 몇 년 간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던 이런 난제를 90일 동안에 풀 수 있을까. 양보를 하는 순간 날아올 정치적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지난 150일 간의 미·중 무역분쟁 못지않게 치열할 것으로 전망되는 90일 간의 ‘협상전쟁’에서 양국이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 경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2018.12.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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