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중독자들'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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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부터 주식 투자를 시작한 A씨(55세)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은 증권사 애플리케이션(앱)을 여는 것이다. 밤새 미국 주식시장이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국내 주식시장은 미국 증시와 연관성이 크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오전 8시 50분만 되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오늘은 얼마나 벌지, 또는 얼마나 손해를 볼지가 걱정돼서다. 특히 요새처럼 증시가 롤러코스터일 때는 더 초조하다. 올해 들어서만 이미 20% 이상의 원금 손실을 본 터라 더 예민하다. A씨는 “장기 투자보다 투자 기간을 짧게 잡는 단타 투자를 하기 때문에 주가 변동에 더욱 민감하다”라며 “요새는 회사 일보다 어느 종목을 사고팔아야 하는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얼마 전 추가 대출을 받아 ‘물타기(주가가 내려갈 때 주식을 더 사서 평균 매입 단가를 낮추는 것)’도 한 상태다. 그는 “처음에는 용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는데 이제는 투자를 안 하면 불안하고 고수익을 올리는 남들보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져서 주식투자를 끊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주식 투자에 대한 집착 때문에 불안 증세를 보이고, 원금 회수 생각에 빚을 내서 무리한 주식 투자를 한다면 ‘주식 중독’을 의심해 볼 수 있다. 돈을 벌든, 잃든 투자를 계속해야 하고 투자를 하지 못하면 신경질·우울감·불안감 등을 보인다.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로 돈에 집착하거나 예민해질 때 나타나는 증세다. 22일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주식 중독’ 증세를 호소하며 센터에 상담을 의뢰하는 사람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코로나19 발생 전인 2019년 한 해엔 591명에 그쳤지만, 발생 이후인 2020년엔 1047명으로 2배가량 뛰었다. 주식 중독 증세 확산은 코로나19 이후 동학 개미 열풍 등으로 증시활황이 이어지면서 주식 투자자 수가 급증한 탓이다. 특히 지난해까지 이어진 증시호황에 한탕 수익을 내기 위해 투자하는 20~30대 젊은층이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20·30대의 주식 보유 잔액은 2019년 말 14조원에서 지난해 말 39조원으로 2년 만에 178% 늘었다. 부모 세대인 50대(108%)와 60대(95%)보다 증가율이 훨씬 높았다. 20·30세대는 코로나19 이후 기성세대보다 공격적으로 자산 투자에 나섰다. 젊을수록 충분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걱정이 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지며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 주식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주식 중독의 위험성을 경고한 논문도 나왔다. 최근 안영규 신경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주식 중독의 원인 및 대응방안’ 논문을 통해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는 주식 중독자 4명의 사례자를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했다. 주식 중독자들의 공통점은 노동에 대한 왜곡, 투자와 투기에 대한 혼돈 등의 증세를 보였다. 주식으로 2억원을 잃었다는 A(45)씨는 “애들 학원비 번다고 아르바이트도 했었는데 주식으로 돈 벌던 것이 생각나서 이제 다른 일은 못 한다”며 “식당에서 일당 10만원, 이까짓 것 클릭 한 번으로 버는데 땀 흘려 일할 생각이 들겠나. 노동 의욕은 완전 상실이다”라고 털어놨다. 5억원을 날리고 치료를 받는 전문직 종사자 D(49)씨는 “지인들은 어제도 3000만원을 벌었네, 5000만원을 벌었네 하니까 밤에 잠이 안 온다”며 “주식 그만하라고 상담받을 때마다 얘기를 듣지만 내가 종목을 잘못 고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중독치료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에 이코노미스트는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의 자문을 받아 ‘성인 주식 자가 진단 테스트’ 표를 만들었다. 테스트는 최근 1년 간 본인의 모습을 토대로 응답하면 된다. 질문을 읽은 뒤 체크한 점수가 0점이면 주식으로 건전한 재테크를 하는 상태, 1~2점이면 주식으로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상태, 3~7점이면 과도한 주식 충동 등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수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 8점 이상이면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할 수 있다. ━ 불법 아니어도 중독 위험성 인지해야 스스로 주식 중독을 인지하거나, 사전에 중독되지 않도록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도박 중독과 달리 주식 중독은 불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는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박진희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상담사는 “상담자 상당수는 주식은 불법이 아니고, 본인은 어느 정도 정보를 분석해서 투자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즉 주식 중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단순히 불법 여부가 아닌, 중독 자체의 위험성을 인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식 시작 전 손실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주식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은 손해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다”며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합리화하지 말고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만약 이미 주식 중독에 빠졌다고 판단된다면 빠른 시일 내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최성진 한국건강심리학회 이사(동명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행위중독의 문제는 스스로 통제감을 가지고 자율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지로 판단할 수 있다”면서 “만약 주식 투자를 하면서 스스로 통제가 어려워 일상생활, 대인관계 등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다원 기자 hong.dawon@joongang.co.kr
2022.02.22 07:00
4분 소요10년 사이 가장 많은 거품이 형성된 곳은? 내재가치가 거의 없음에도 1000억 달러 규모로 치솟은 가상화폐(cryptocurrency) 시장이다. 결국 장기적 체제로 자리를 잡겠지만, 그때까지 소수 선구자와 ‘꾼’들이 우매한 다수에게서 폭리를 취하는 장세가 계속될 전망이다.4월24일, 유럽의 최남단인 지브롤터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 세 갈래로 갈라진 빈티지 촛대가 놓여 있는 기다란 원목 식탁을 둘러싸고 마틴 쾨펠만(Martin Koppelmann·31)과 스테판 조지(Stefan George·29), 매트 리스턴(Matt Liston·25)이 등받이가 높은 원목 의자에 앉아 있다. 배경은 고풍스러웠지만, 대화 내용은 21세기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기계지능의 대대적 폭발’을 동력으로 지난 2년간 개발에 매진했던 사용자예측시장 플랫폼 ‘노시스(Gnosis)’를 통해 킥스타터(Kickstarter) 방식의 크라우드세일(crowdsale)을 계획 중이었다. 목적은? 1250만 달러 모집이다. 투자금은 달러로 받지 않고 2년 전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신종 가상화폐 이더(Ether)로 받을 예정이다. 기업 지분 대신 프로젝트의 가상화폐를 판매하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이를 ICO(Initial Coin Offering: 코인공개 상장)라 부른다. 킥스타터 투자처럼 프로젝트로 완성된 상품을 투자자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투자한 이더(혹은 그 일부)를 노시스 전자지갑으로 전송해서 ‘스마트 계약’을 자동으로 생성하고 GNO 코인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화폐로 바꾼다. 이는 투자자가 보유한 네트워크 지분이자 노시스 플랫폼에 대한 특별 접근권이 된다.이론상으로 노시스의 인기가 높아지면 GNO 코인(‘토큰’이라고도 알려짐)에 대한 수요 또한 증가해서 GNO 토큰 보유자가 가진 지분의 가치가 높아진다. 자금모집은 최저가가 아니라 최고가에서 시작하는 더치 옥션(Dutch auction) 방식으로 진행됐고, 11분 만에 1250만 달러의 자금이 모였다. 입찰자들이 그룹을 이뤄 번갈아 입찰받는 담합방식(bidding rings)을 사용한 덕분에 처음 배당했던 1000만 개 토큰 중 4.2%만 매각해서 계획 자금을 모두 모집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토큰의 최종가격은 29.85달러로 정해졌다. 이로써 49쪽짜리 투자백서와 수천 줄의 오픈소스 컴퓨터 코드가 전부였던 이들의 프로젝트는 3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 받았다. 이후 2개월이 지나고 GNO 코인은 1개당 335달러로 가격이 올라갔고, 노시스의 가치 또한 30억 달러로 급등했다. 레블론(Revlon)이나 박스(Box), 타임(Time Inc.)의 시가총액보다 높은 가격이다. 일단 가격만 기준으로 했을 때 쾨펠만의 지분가치는 10억 달러로 늘어났다. “문제가 있어요.” 쾨펠만 또한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치솟은 기업 가치에 대해 그는 “우리보다 훨씬 심한 곳도 많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내놓았다.이 정도면 2017년 현재 진행형인 가상화폐의 엄청난 거품에 관해 필요한 정보는 다 들은 셈이다. 가상화폐 시장의 시가총액은 지난 12개월간 120억 달러에서 1000억 달러로 무려 870% 급등했다. (지금도 증가 추세다. 하루 만에 가격이 30% 급등하거나 급락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닷컴 거품이 한창이던 1995~2000년 당시 시가총액 증가분보다 6배 이상 높다. 가상화폐 급등의 일등공신은 디지털 자산의 원조인 비트코인이다. 암호해독과 클라우드 컴퓨팅, 게임이론을 예술적으로 버무려 낸 비트코인은 2017년에만 가치가 260% 상승했다. 각종 사기 범죄와 절도, 무능력(마운트곡스 거래소의 몰락으로 5억 달러의 돈이 증발했다)이 수년간 판을 치고, 내재가치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중앙정부 등 발행 기관의 가치 조정이나 귀금속으로 만든 실물이 없는데도 비트코인의 전체 가치는 400억 달러를 넘어가는 기염을 토했다.2세대 가상화폐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비트코인보다 기민하게 움직이며 흥미로운 시도를 하는 중이다. 단순 화폐기능에 머물며 투기용으로 사용되는 대신, ‘암호자산(crypto-asset)’을 새로운 개념이나 토큰과 엮어 기발한 사업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부추기는 동력은 바로 이더 화폐를 사용하는 이더리움(Ethereum)이다. 비트코인과 마찬가지로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이더리움은 분산구조를 통해 안전하게 정보를 지키며 상시 업데이트되는 장부 시스템이다. 비트코인 체제에서는 비트코인으로만 거래를 할 수 있지만, 이더리움 네트워크에서는 다른 소프트웨어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 이더리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다른 화폐를 만들어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시장 주도 따라서 디지털 사업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라도 코인을 만들어 발급할 수 있다. 덕분에 현재 시장에는 900여 개 가상화폐와 암호자산이 거래되고 있으며, 거의 매일 새로운 형태의 가상화폐가 출시되고 있다. 6월12일에는 가상화폐의 새로운 기축통화를 기획 중인 방코(Bancor)에서 총 토큰의 50%를 매도하며 3시간 만에 1억5300만 달러를 모집해 ICO 신기록을 경신했다. 바로 그 다음날에는 아이오타(IOTA)에서 사물인터넷 소액결제용 토큰을 공개하며 기업가치를 순식간에 18억 달러로 올렸다. 일주일 후, 메시징 플랫폼 스테이터스(Status) 또한 ICO에 나서면서 1억200만 달러를 손에 거머쥐었다. 그야말로 ‘골드 러시’, 매도자의 시장이다. 이더리움의 가치는 지난 12개월간 2700% 이상 상승하며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다. 지금은 가격이 토큰당 300달러, 시가총액은 280억 달러에 달한다. 물론,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토큰당 10센트로 폭락하다가 415달러로 치솟는 등 롤러코스터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비트코인 또한 31달러에서 2달러로 폭락했다가 1200달러로 치솟고, 177달러가 됐다가 최근에는 2500달러까지 오르는 등, 변동성에 있어 만만치 않은 궤도를 그렸다. 러시안 룰렛에 뒤지지 않는 예측가능성 속에서 거래를 잡으려는 초단타 매매꾼이 몰려든 결과다. 변동성이 아무리 심해도 웹사이트나 페이스북 그룹 메뉴에서는 가상화폐로 투자 성공을 경험했다고 자랑하는 글이 넘쳐난다. 신용카드 대출로 토큰을 샀다는 사람도 있다. 이더나 비트코인 IRA(개인은퇴계좌)에 은퇴자금을 몰아넣으라는 광고도 극성이다. ICO는 허술한 사업모델로도 과도한 가치책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 됐다.선구자들 덕분에 자금을 모집하고 네트워크 효과를 누리는 방법이 크게 개선된 것만은 분명하다. 사업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토큰을 만들어 제공만 하면 투기 세력이 몰려와 서로 먼저 돈을 주겠다고 아우성을 치다가 알아서 값을 올려주는데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의 비위를 맞추고 공개시장에서 연방 규제당국을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디지털 광고산업의 뿌리 깊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고매한 목표를 내걸고 24초 만에 3600만 달러를 빨아들이며 기업가치를 1억8000만 달러로 올린 브레이브 소프트웨어(Brave Software)의 BAT(Basic Attention Token)가 있고, 코인 시스템 구조는 기본적이지만 라스베이거스 스트립클럽에서 받을 수 있는 VIP 서비스와 연동시킨 레전드 룸(Legends Room)도 있다. 이들 각종 코인의 ICO를 통해 모집된 돈은 8억5000만 달러가 넘는다.어디서 들어본 흐름 같다고? 맞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다. 구체적 실체보다 컨셉만 있는 사업 모델, 단타 매매를 앞세운 투기, 통제 범위를 벗어난 변동성, 최고가에서 시작하는 입찰, 순식간에 굴러 들어오는 돈다발 등, 첫 닷컴 거품 당시 어딜 가나 볼 수 있던 풍경과 같다. 닷컴 거품의 붕괴는 급작스러웠다. 2000년 이후 거품이 꺼지며 인터넷주의 가치는 1조8000억 달러 가량 증발했다. 가상화폐 예측시장의 개념이 즉각 30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이더는 이들 화폐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동시에 이들 ‘가치’가 어떻게 변할 지 미리 가늠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도 지금 가상화폐 시장은 17세기 튤립 거품의 단계를 지났다. 첫 번째 닷컴 버블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긴 했지만, 적어도 아마존과 구글, 이베이라는 굵직한 기업을 남겨줬다. 어리석은 단타 매매자와 IPO 중독자들이 닷컴 거품과 함께 추락했지만, 영리한 초기 투자자는 엄청난 부를 얻고 날아올랐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가상화폐는 비디오게임에 대입해 생각하면 이해가 가장 쉽다. 비디오게임에는 언제나 가상세계가 있다. 이 가상의 왕국에서 플레이어는 가상화폐를 벌 수 있고, 이 돈은 게임 속에서 갑옷을 사거나 목숨을 몇 개 더 마련하거나 멋진 옷을 장만하는 돈으로 지출한다. 가상화폐도 마찬가지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과(이론상으로) 화폐를 실제 돈으로 바꾸고 발행 시스템 내에서 실제 재화 및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 닷컴 거품 당시 풍경과 닮아 ICO 설명서를 보면 아주 복잡한 비디오게임 가이드를 읽는 기분이다. 30억 달러 규모 예측시장인 GNO 토큰 보유자들은 토큰당 1달러로 책정된 또 다른 토큰 WIZ로 플랫폼 이용료를 지급할 수 있다.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최대 1년 동안 토큰을 ‘묶어두는(lock in)’ 방식을 선택하면 코인을 벌게 해주는 독창적 방식을 통해 노시스의 가격이 떨어지지 않게 유지한다.자주 사용되는 방식이다. 플랫폼 대다수에서는 토큰의 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사용이 많아지면 수요가 증가해 가격을 밀어 올린다. 사용자가 늘어나면 서비스 가치가 올라가는 네트워크 효과는 암웨이식 피라미드 구조가 주는 이점을 차용한다. 페이스북에도 토큰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친구를 초대해 네트워크 효과를 유도하면 내가 가진 ‘토큰’의 순가치가 그만큼 증가한다.“중앙통제를 벗어난 디지털 경제에 크라우드펀딩으로 투자하는 셈”이라고 크리스 버니스케(Chris Burniske)가 말했다. 그는 비트코인의 최초 투자기관이라 할 수 있는 뉴욕시 상장 펀드운용사 ARK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에서 최근까지 일했다. 버니스케는 새롭게 부상 중인 가상화폐 자산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가장 먼저, 비트코인과 함께 추적이 불가능한 모네로(Monero), 지캐시(Zcash) 등의 가상화폐가 있다. 두 번째로는 분산형 디지털 인프라를 구성하는 기본 토대인 ‘암호 코모디티(crypto-commodity)’가 있다. 미사용 중인 컴퓨팅 파워를 네트워크로 활용해 임대 및 공유하는 ‘골렘 네트워크 토큰(Golem Network Tokens)’이 좋은 예다.사용자가 자는 동안 사용자가 안 쓰는 컴퓨팅 파워를 기계학습 알고리즘 개발 중인 기업가에게 빌려주고, 사용자는 그 대가로 코인을 받는 시스템이다. ‘암호 코모디티’ 중 가장 인기가 뜨거운 서비스는 아마존 심플 스토리지 서비스와 경쟁관계에 있는 파일코인(Filecoin), 시아(Sia), 스토지(Storj) 등 분산 데이터저장 토큰이다. 일종의 ‘우버 (본사) 없는 우버’를 생각하면 된다. 승객과 운전자(혹은 자율주행차) 사이 개인 대 개인(P2P) 네트워크를 구성해 그곳에서 거래에 필요한 가상화폐를 벌고 지불하는 것이다. ━ 암호자산 지원하는 노련한 사업가들 ICO에서 투자금을 모집하는 주체가 항상 스타트업인 건 아니다.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개발자들이 법인을 조직하지 않고 자금을 모집하는 경우도 있다. 자체 토큰 킨(Kin)을 출시한 메시징 앱 킥(Kik)처럼 실제 법인을 조직한 경우라도 크라우드세일은 엄밀히 말해 회사 주식을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서 각종 유가증권 규제를 편리하게 피해갈 수 있다.가상화폐 기술을 뒤에서 추진하는 사람들은 경험 없고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대표적 벤처투자자 팀 드레이퍼(Tim Draper)는 지금까지 2개의 암호자산을 지원했다. BAT로 유명세를 얻은 브랜든 에이크(Brendan Eich)는 자바스크립트를 개발하고 모질라(Mozilla)를 공동 창업한 경험이 있는 노련한 사업가다. 암호자산을 전문으로 하는 판테라 캐피탈(Pantera Capital) 창업주는 타이거 매니지먼트 출신의 댄 모어헤드(Dan Morehead)다.이들은 블록체인 캐피탈(Blockchain Capital)류의 기업을 물색하는 중이다. 블록체인 캐피탈은 아역배우 출신의 브록 피어스(Brock Pierce)가 비디오게임 가상화폐 사업으로 설립한 회사다. 그는 최근 투자금 모집에서 자체 토큰 BCAP로 ICO를 진행하며 매각 제한(lockup) 등의 통상적 규제에서 유한책임 조합원들을 해방시켜줬다. 4월 진행된 ICO에서는 6시간 만에 1000만 달러가 모였다. 피어스는 코인 크라우드세일을 국내 99개 적격 공인투자자로 제한하고, 규제가 좀더 완화된 해외에서 901개 기관을 지정하는 등 비율을 조정해 규제감독을 피했다. 그래도 일단 시장에 풀린 매물은 누구라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즉각 매수에 나섰고, 펀드가치는 최근 1750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전화기가 쉴새 없이 울리더군요.” 피어스가 말했다. “‘우리도 똑 같이 할 수 있을까요?’란 문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루터교 목사의 아들인 올라프 칼슨-위(Olaf Carlson-Wee·27)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컴퓨터 코드를 쓸 줄 모르고 재무분석을 공식적으로 배운 적도 없다. 이전에 자금을 운용해본 경험은 더더욱 없다. 그 때문에 칼슨-위는 2017년 거품처럼 일어난 가상화폐 시장을 대표할 자격이 충분하다. 칼슨-위가 일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폴리체인 캐피탈(Polychian Capital)은 10개월 만에 자산가치가 4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로 치솟는 경험을 했다. 그가 본능적으로 암호자산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통찰력을 활용해 능숙한 운용결정을 내려왔다.칼슨-위가 업계로 뛰어든 계기는 2011년 바사르 컬리지(Vassar College) 재학시절 미네소타 호수에서 보낸 여름방학이었다.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은 2만 달러였는데 예금통장에는 700달러 밖에 없었다. 두 형은 시인이지만, 칼슨-위는 어렸을 적부터 게임과 수학, 가상세계에 푹 빠져 지냈다. 마약 불법거래로 활용되던 온라인 암시장 실크로드와 이 시장을 가능하게 만든 비트코인의 원리를 기사로 읽은 그는 가상화폐가 흘러 넘치는 세상을 상상하며 가진 돈 700달러 전부를 비트코인에 쏟아 부었다. 매입가는 16달러였다. 그런데 가격은 한없이 떨어져 2달러까지 내려갔다.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학 담당교수를 설득해 비트코인을 주제로 한 졸업논문을 써서 사회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워싱턴 주에 위치한 코뮌 공동체에서 천막을 치고 벌목을 하며 지내던 그는 2012년 자신의 졸업논문을 가상화폐 전자지갑 및 거래소 코인베이스(Coinbase)로 보냈다. 그렇게 그는 코인베이스의 첫 고용 직원으로 취직해 고객서비스 관리 업무를 맡았다. 5만 달러 연봉은 비트코인으로 달라고 요청했다. 가상화폐만으로 소득을 얻고 지출한 사람은 그가 최초일 가능성이 높다. ━ 가상화폐의 ‘현자’ 대우 받는 선구자들 고객서비스를 담당한 덕분에 칼슨-위는 빠르게 성장 중인 기업의 역량을 제일 앞자리에서 선보이는 사람이 됐다. 그는 코인서비스의 일차적 고객서비스 대응을 자동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구직 희망자의 점수를 판정하는 일종의 비트코인 SAT를 만들어 이를 통해 8명의 직원을 고용했다. 직원 월급은 전원 비트코인으로 지급했다. 이후 리스크 총괄로 승진한 그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이용해 코인베이스의 사기거래를 75% 가량 낮췄다.지난 9월 그는 코인베이스에서 나와 400만 달러의 자금으로 가상화폐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폴리체인 캐피탈을 설립했다. 400만 달러 자금은 위키하우(Wikihow) 창업자 잭 헤릭(Jack Herrick)과 Y콤비네이터 파트너였던 개리 탠(Garry Tan) 등으로부터 모집했다. 벤처캐피탈과 헤지펀드 대부분은 가상화폐를 비롯한 투기성 자산에 직접 투자할 수 없다. 그러나 코인베이스에서 3년 넘게 일하며 가상화폐 ‘현자’ 대우를 받게 된 칼슨-위는 안드레센 호로위츠와 유니어 스퀘어 벤처스, 세콰이어 캐피탈, 파운더스 펀드, 판테라 캐피탈 등과 손을 잡고 함께 일할 수 있었다.암호자산 운동은 사업과 삶, 부의 축적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민주화를 주창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닷컴 거품 때 가족과 친구에게 먼저 지분이 배분됐던 것처럼 칼슨-위도 자신이 진행한 13건의 투자 대부분에서 ICO 이전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토큰을 취득했다.그가 진행한 투자 중에는 업계 표준으로 떠오른 이더리움, 분산형 슈퍼컴퓨터 체제 골렘, 칼슨-위가 노시스보다 선호하는 예측시장 코인 어거(Augur)가 있고, 이밖에도 분산형 코인 거래가 가능한 가상화폐 거래소 프로토콜 0x, 이더리움의 경쟁자로 부상한 테조스(Tezos) 등이 있다. “테조스가 있으면 계약이 제대로 준수되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칼슨-위가 40층 위쪽에 자리한 사무실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선명한 해골 그림이 그려진 검은색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를 입은 그는 라인스톤으로 장식한 힙합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 내부거래나 부당거래 만연한 시장 그는 단타 매매보다 장기적 관심을 가지고 스타트업을 키우는 방식으로 사업에 임하고 있다. 그래도 광풍이 일고 있는 시장에서 남보다 앞선 지식으로 무장하고 우선매수권을 얻을 수 있는 그는 엄청나게 유리한 입장에 있다.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칼슨-위는 업계의 앞날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다. 그는 기반 프로토콜과 데이터 저장 및 컴퓨팅 파워 서비스 등 인프라가 먼저 구축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정용 컴퓨터에 CPU나 GPU, 메모리, 대역폭, 인터넷 연결 등을 집어넣는 대신, 사용이 필요할 때마다 토큰으로 서비스 비용을 지불하고 외부에서 가져다 쓰는 형태가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필요도 없는 기능을 모든 기기에 넣고 정작 사용은 하지 않는 방식은 줄어들고, 인터넷 패킷 단위로 비용을 지불하거나 필요한 주기, 혹은 사용한 저장공간만큼 실시간으로 지불하는 시대가 온다.” 클라우드 컴퓨팅과 공유경제, 연방준비제도가 혼합된 식이다.그런 미래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전에 많은 사람이 나가떨어질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자본투자로 얻은 코인에 부분적이나마 유틸리티 성격이 있고 특정 단체의 성공에 의존하지 않는 한 유가증권으로 간주하지 않고 일종의 택시면허나 골프클럽 회원증과 비슷하게 취급한다. 더 나아가 토큰 개발업자 중에는 싱가포르나 지브롤타, 스위스 추크(Zug)처럼 규제가 느슨하고 세율이 낮은 곳으로 본사를 옮겨 ‘코인을 유가증권으로 봐야 하는가’라는 쟁점 자체를 피하는 사람도 많다.그러다 보니 내부거래나 부당거래가 만연한 게 당연하다. 엔젤리스트(AngelList)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메타스테이블 캐피탈(Metastable Capital)의 네이벌 라비칸트(Naval Ravikant)는 “ICO에서 토큰을 매수하겠다고 동의하고 가격을 받쳐주면, 30일 뒤 남은 토큰을 공시가격보다 낮게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한 코인 개발자에게 받았다고 한다. 증권가에서 이런 짓을 하면 중 죄다. 가상화폐 시장은 정말 무법천지인 걸까? “여기 저기서 그런 계약이 이루어진다.”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는 업계 스스로 투자자 보호에 나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위기 전후로 드러난 감독기관의 무능력을 생각하면, 기능 통화의 세계가 효과적으로 규제될 것이라 기대하긴 어렵다. “첨단 수법을 이용하므로 소스 코드를 일일이 읽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다. 사기 거래는 미묘하게 이루어진다”고 라비칸트는 덧붙였다.규제당국에서 일일이 코드를 분석한다면? “은행 계좌인 경우 (미국에 있는) 계좌가 폐쇄되면 러시아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고 신용카드를 받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는 게 불가능하다”고 칼슨-위는 말했다. “그러나 비트코인 전자지갑이라면 서비스 업체가 폐쇄되어도 비트코인을 해외 계정으로 순식간에 보내 러시아 증시에서 이루어지는 ICO에 참여하고 러시아 전자지갑에 토큰을 보관할 수 있다.그러니까 글로벌 차원에서 이들 거래를 규제한다는 건 ‘두더쥐 잡기’ 게임을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를 막으면 다른 하나에서 올라온다.” 세금 징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앞으로 몇 번 더 거품이 붕괴할지 모르니 마음 단단히 붙들어 매야겠다. 마운트 곡스와 비슷한 참사가 또 발생하고, 보호장치가 없다시피 한 시장에서 도박에 나선 사람들은 수백억 달러의 손해를 입을 것이다. 그래도 스마트머니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잡을 것이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오직 교만이다. “토큰 매매가 광풍에 휩싸였다고 다들 호들갑을 떤다”고 칼슨-위는 말했다. “판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비교해볼 대상조차 없어서 그렇다.” ━ 사례 연구: 코인의 원리 전 세계에 분산된 골렘 슈퍼컴퓨터 네트워크는 유휴 PC의 컴퓨팅 파워를 필요한 곳에 배치하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에어비앤비를 표상한다. 가상화폐가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자.컴퓨터그래픽 예술가골렘 네트워크의 컴퓨팅 파워를 빌려 쓰기 위해 컴퓨터그래픽 예술가가 골렘 네트워크 토큰(GNT)을 구매했다. 그가 구매한 GNT로 컴퓨터에 애니메이션 렌더링 명령을 내리면 골렘 네트워크는 5대 컴퓨터를 한 시간씩 배정하거나 100대를 1분씩 돌려서 작업을 마무리한다. 남은 컴퓨팅 파워를 제공해 렌더링 작업을 지원한 컴퓨터는 1GNT를 받는다.세계로 분산된 골렘 슈퍼컴퓨터집을 공유하는 에어비앤비처럼 컴퓨터 연산처리 능력을 공유하는 골렘 네트워크는 전 세계 기계를 활용해 서로 거래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하면 놀려두거나 낭비되는 컴퓨팅 파워를 데이터 과학자나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개발 중인 기업이 활용할 수 있다.이더리움 네트워크이더리움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컴퓨터를 ‘채굴장비(miner)’라 부른다. 이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력을 필요로 하는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가장 먼저 문제를 푸는 컴퓨터가 코인을 주조하는 데 필요한 ‘블록 보상금(블록당 5이더리움, 약 1350달러)’을 받는다. 채굴에 성공한 컴퓨터는 장부에 거래 블록을 기록한다.GNT의 스마트 계약이더리움을 이용하면 토큰을 매우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 예술가의 거래는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기록되고, 이에 따라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각 컴퓨터의 계정 잔액이 업데이트된다.이더리움 블록체인2015년 7월 네트워크가 출범한 이후 이루어진 모든 이더리움 거래 내역은 거래시간과 함께 장부에 기록된다. 새로운 거래가 발생하면 약 15초마다 장부에 업데이트된다. 이렇게 한 장부에서 동일하게 모든 거래 내역을 기록한 후 이더리움 소프트웨어를 구동하는 전 세계 3만2000대 컴퓨터에 복사본을 저장하기 때문에 누가 거래내역을 조작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컴퓨터 그래픽 예술가의 GNT 거래 또한 여기 기록됐다. ━ 단타매매의 귀환 20세기 말, 보급형 PC와 인터넷 연결로 무장한 치과의사, 변호사, 은행 창구직원 등 우리 이웃의 ‘개미’ 수백만 명이 본업은 제쳐 두고 주식 게시판에 올라온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익사이트(Excite)와 북스어밀리언(Books-A-Million) 등 신규 상장 인터넷주를 거래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거품을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징표였다.토큰 거품은 닷컴 거품보다 더 매매에 나서기 쉽다. 중개기관이나 규제당국, 세금 신고를 손쉽게 피할 수 있고, 거래는 24시간 내내 가능하다. 주말도 마찬가지다. 전자중개 사이트를 대신하는 ‘거래소’가 들어섰고, 가장 최근 통계에서 그 수는 70개로 늘어났다. 거래소에서는 가상화폐를 채굴하거나 매매하려는 사람들에게 차익거래와 연계매매(pairs trading), 파생상품 등을 제공하고 0~0.3%의 거래 수수료를 부과한다. 샌프란시스코 거래소 크라켄(Kraken)은 5월과 6월에 고객서비스 담당 직원만 100명을 고용했으며, 향후 인원을 충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말 대단했다”고 크라켄 창업자 제스 파월(Jesse Powell)은 말했다. “지난 분기 대비 신규 가입자 수가 5배 늘어났는데, 지난 분기도 작년과 비교하면 큰 폭 상승한 수치였다.”당연하다. 신규 발행된 코인의 크라우드펀딩이 매달 20건씩 이루어지는 상황이라 ICO 시장이 지금만큼 강력한 변동성을 보이며 빠르게 성장한 적도 없다. 가상화폐 산업에서 구글, 애플과 다를 바 없는 이더리움은 300억 달러의 유통 금액 중 매일 평균 5% 이상이 거래되고 있다. 애플의 경우 이 비중은 0.5%다. 올해 들어 현재까지 이더리움의 가치는 40배 증가했고, 하룻동안 가격이 10% 이상 움직이는 일도 흔했다. 인기가 떨어지는 다른 화폐의 거래도 활발한 편이다. 2014년 이자율 5%에 추적이 불가능한 예금계좌를 제공하겠다며 발행된 루비코인(Rubycoin)은 장외 증시에서 거래되는 초저가주(penny stock)처럼 하루 거래 금액이 3만7000달러로 많지 않지만, 상승률은 9%로 제법 높다.거의 모든 거래소에서 5대1의 레버리지를 제공한다. 그러니까 골렘 슈퍼컴퓨터 네트워크 코인 등의 ICO를 1만 달러어치 매입했다면 거래 7개월 후 가치가 5000% 상승했으므로 1만 달러는 250만 달러가 된다. 충분치 않다고? 100대1 레버리지도 존재한다.가상화폐로 백만장자가 된 투자자들의 성공사례성공 사례를 원한다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앨런 아로노프(Alan Aronoff·47)가 있다. 밴드에서 연주를 담당하며 음악인으로 살아온 그는 자신만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게 됐다. 2016년 5월 아로노프는 비트코인 1만 달러어치를 매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중 8000달러는 15개월 무이자 신용카드 대출로 마련했다. 그런데 그가 이용하던 비트코인 거래소가 해킹을 당했다. 아로노프는 비트코인 8500달러어치를 들고 크라켄으로 옮겨가 레버리징 매매를 시작했다. 2016년 12월 코인당 7달러에 이더를 매입했고, 2017년 초에는 골렘과 노시스를 매입했다. 그는 하루 16시간을 비트코인/달러, 이더리움/달러 환율을 확인하며 보냈다. 수익률이 특정 기준을 넘어서면 바로 거래에 나서기 위해 잠은 최대한 자지 않았고, 집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일종의 강박장애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원금 8500달러는 750만 달러로 불어났다. 8만8000%의 수익률이다.가상화폐로 백만장자가 된 또다른 투자자는 바로 션 아이언스태그(Sean Ironstag·37)다. 그는 페이스북에 있는 암호자산거래 그룹 중 하나에서 관리자로 활동한다. 외환거래인이었던 그는 “지붕 위에서 혁명을 외치고 전 세계를 돌아 다녔다”며 ‘아랍의 봄’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를 방문했던 경험을 말해주기도 했다.그는 아로노프보다 거래를 더 활발하게 하는 편이다. 어거 REP와 게임, 라이트코인(Litecoin), 리플(Ripple), 시바견을 밈(meme)으로 삼아 개발한 대체통화 도기코인(Dogecoin) 등의 거래로 높은 수익을 거두었다. 특히 도기코인에서는 순수익 1500%를 얻었고, 1만5000달러를 투자해 2년도 안 되는 시간에 300만 달러로 불리는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다. 최근에는 지인을 통해 유명 트레이더 마이클 스타인하트(Michael Steinhardt)의 초대를 받아 뉴욕 베드포드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가서 월스트리트 거물들 앞에서 금융의 미래에 대한 강연도 했다. “구시대 금융이 존재감을 잃어간다는 걸 그들도 깨닫고 있다”고 아이언스 태그는 말했다.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헤지펀드와 가상화폐 연수기관을 설립해서 버크셔 해서웨이를 벤치마킹한 가상화폐 지주사로 만들 예정이다. ━ 가상화폐로 벌어들인 수익은 면세? 가상화폐 거품으로 수십억 달러가 쏟아지면서 미 과세당국이 자신의 몫을 받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말 돈을 받아낼 수 있을 지는 다른 문제다. 2014년 미 국세청이 특정 시점에서 기존 화폐로 환전이 가능한 (따라서 온라인 게임머니는 제외된다) 디지털 통화를 자본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규제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후 논쟁이 이어졌다. 자본자산으로 간주되면 장점도 있다. 1년 이상 보유한 디지털 통화를 매도할 경우 수익에 대해 세율이 좀더 낮은 장기보유 양도세(0~20%)가 부과된다는 점이다. 단기매매일 경우 매도시 최대 39.6%의 연방 소득세율이 적용되는 건 단점이다.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데이터 저장공간 구매 등 일부 온라인 서비스를 디지털 코인으로 결제할 경우, 모든 결제를 자본매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불한 코인의 가치가 코인 구매 당시 가격보다 상승했다면, 지불을 할 때마다 이를 신고하고 차익에 관해 납세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유로나 엔 등 기존 통화를 보유한 경우 달러 대비 가치가 상승해도 이들 화폐로 지불한 매매에 대해 국세청은 과세를 하지 않는다.)납세자 입장에서 세금 신고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주식, 비트코인, 최신 토큰 중 거래 자산이 무엇이든, 소득은 소득이다. 그러나 투자중개기관 슈왑(Schwab)이 1099-B 양식에 따라 주식 매도를 반드시 신고해야 하는 것처럼 가상화폐 거래소가 국세청에 반드시 거래를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절세 욕구가 가상화폐 거래를 부채질하게 될까? 답을 알고 싶다면 다음을 생각해 보자. 2016년 국세청 전자신고 시스템을 통해 신고된 소득 1억3200만 건 중 가상화폐와 관련된 소득은 802건밖에 되지 않았다.정부는 규제 준수가 개선되길 원한다. 지난 11월 사법부는 코인베이스(Coinbase) 측에 2013년 12월31일부터 2015년 12월31일까지 전환가능 가상화폐를 전송한 미국 고객 전체 기록을 넘기라는 소환장 발부 소송을 연방법원에 제기했다. 법원은 국세청의 손을 들어줬지만, 코인베이스와 고객들은 소환장 집행을 지연시키며 반격에 나섰다. 국세청이 고객 전체의 이름을 받는다 해도 가상화폐로 벌어들인 수익을 과세하기까지 넘어야 할 큰 산이 있다. 거래 대부분이 해외 거래소에서 이루어지며, 이후 더 많은 거래가 해외 거래소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 가상화폐 요지경 도기코인(DOGE): 2013년 시바견 밈을 마스코트로 내세우고 문법에 안 맞는 영어 자막을 달아 인기를 끌었던 도기코인은 가벼운 장난처럼 발행됐다가 가상화폐 시장의 스타로 떠올랐다. 현재 시가총액 2억8000만 달러를 기록한 도기코인은 나스닥 경주차와 아프리카 우물,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의 동계올림픽 출전을 후원했다.문코인(MOON): 문코인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투자 혁명을 내세운다. 기업과 시장에 대해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이 눌러준 ‘좋아요’를 화폐로 전환해 문코인을 벌 수 있다. 시가총액은 2100만 달러다.팟코인(POT): 대마초 산업을 구체적으로 겨냥해 나온 가상화폐로, 데니스 로드맨의 북한 방문을 후원한 걸로 유명해졌다. 시가총액은 2200만 달러다.레전드룸(LGD): 5000토큰 이상을 갖게 되면 ‘뉴욕 배드 애스’로 불리는 이종격투기 선수 필 바로니가 운영에 참여한 라스베이거스 스트립클럽의 평생 VIP 회원권을 받는다. 토큰을 보유하고 있으면 VIP 회원(50% 할인)이 아니더라도 카지노를 제외한 음료 및 서비스에서 2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코인 희석 진행 후 시가총액은 5000만 달러가 넘는다.트럼프코인(TRUMP):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그의 비전을 지지”하기 위해 발행된 코인이다. 트럼프코인 대사들이 코인을 벌려면 매주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트럼프 기사를 게재해야 한다. 취임식 전인 1월에 51센트로 최고가를 기록하며 총 가치가 338만 달러까지 증가했지만, 지금은 6센트로 가격이 떨어져 총 가치는 42만 7000달러다.인세인코인(INSN): 홈페이지에 가면 이렇게 적혀 있다 “인세인코인은 코인 그 이상이다. 하나의 사건이며, 마음 상태다. 제정신 아닌(insane) 사람만 우리커뮤니티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마음 상태가 도움이 되긴 한다.” 투표 시스템을 새로 만들고 2018년 영국에서 인세인 스페이스(Insane Space) 매장을 개장하는 목표가 로드맵에 포함되어 있다. 시가총액은 250만 달러다.유놉태니엄(UNO): 앞으로 300년간 25만 개 코인만 채굴 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희귀한 암호 토큰이 될 가능성이 높다. 홈페이지 동영상에서는 “비트코인이 금이라면 유놉태니엄은 백금”이라고 홍보한다. 시장가치는 840만 달러다.판다코인(PND): 판다곰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초보도 이해하기 쉽고 사용도 편한 가상화폐로 인지도를 높였다. 대안형 은행 계좌로 생각하면 된다. 판다뱅크에 판다코인을 예치하면 연금리 2.5%를 받을 수 있다. 컴퓨터가 인터넷에 접속한 상태이고 판다뱅크가 영업 중일 때 이자가 발생한다. 시가총액은 160만 달러다.스킨코인(SKIN): 비디오게임 에서 사용하는 글록-18-9-밀리미터에 무지개색 스킨을 입히고 싶은가? 스킨코인이 있으면 더 많은 스킨을 살 수 있고, 다른 무기로 거래하거나 베팅을 할 수도 있다. 6월21일 ICO를 진행했고, 6월30일까지 330만 달러어치의 이더를 모집했다. 코인예(COINYE): 원래 이름은 코인예 웨스트(Coinye West)였다. 선글라스를 낀 카니예 웨스트 얼굴의 물고기를 마스코트로 내세웠다가 상표권 침해로 고소를 당하며 발행이 중단됐다. ━ 무시할 수 없는 거품 시가총액 기준으로 선정한 900여 개 가상화폐·암호자산 순위 1~25위. 지금까지 승인된 코인 공급량을 전부 포함하면 대부분의 코인 가치가 더 높아진다. 코인/토큰 시가총액 YTD(연초대비) 수익율 비트코인 $40,520 260% 가상화폐의 원조. 발행량이 2100만 코인으로 한정되어 있어 화폐가치가 가장 좋지만, 아직 변동성이 상당하다. 이더리움 26,720 3,825 ‘스마트 계약(계약조건 자동 실행)’을 위한 블록체인. 이더리움으로 암호토큰에 대한 열풍이 시작됐다. 리플 9,980 4,210 XRP 코인의 가치가 급등했다. 기존 해외송금 서비스의 높은 수수료, 불투명한 과정, 처리 지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보한 은행 파트너만 75개에 달한다. 라이트코인 2,080 980 ‘비트코인이 금이라면 라이트코인은 은’이라고 오래 전부터 마케팅을 했다. 상대적으로 낮은 에너지 원단위와 짧은 블록시간 덕분이다. 이더리움 클래식 1,720 1,395 오리지널 이더리움 블록체인에서 파생된 코인이다. 해킹으로 5000만 달러어치를 도난 당하고 업그레이드됐다. 넴 1,430 4,320 은행들이 기업용 버전을 시험 중인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 서구 가상화폐 팬들에게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대시 1,330 1,690 원래 이름은 다크코인이다. 개인정보 보호에 방점을 두고 있다. 디지털 캐시임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평균 거래금액은 1만 달러가 넘는다. 아이오타 1,120 -35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가격이 너무 비싸고 사물인터넷 소액결제가 느리다. 사물인터넷으로 데이터를 수집해 전송하는 아이오타는 핏빗처럼 수요가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 모네로 640 340 메시징을 비롯해 개인정보가 들어간 앱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불법거래 다크웹 알파베이(AlphaBay)에서 부상 중이다. 비트쉐어 630 6,190 암호 금융서비스를 위한 원스톱 슈퍼마켓. 논란을 몰고 다니는 가상화폐 전문기업가 댄 래리머(Dan Larimer)가 설립했다. 스트라티스 620 8,705 마이크로소프트 플랫폼 사용자를 대상으로 블록체인을 서비스로 제공한다. 기업고객이 대상이다. 지캐시 470 2,825 개인정보 보호에 뛰어난 코인. 입소문을 통해 퍼졌다. 앤트쉐어 440 6,135 중국의 이더리움을 표방하며 ICO에 나선 초기 블록체인. 희석된 코인가치는 10억 달러에 달한다. 골렘 400 6,030 유휴 상태인 컴퓨팅 파워를 활용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다. 컴퓨터그래픽 아티스트와 AI 개발자, DNA 과학자 등에게 매우 요긴하다. 스팀 390 990 ‘가상화폐의 레딧’으로 볼 수 있다. 글을 올리고 인기 있는 콘텐트를 투표해준 사용자에게 지불된다. 창업팀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가 별로 없고 토큰 분배가 엉성하다. 시아코인 390 7,295 아마존 S3의 10%도 안 되는 가격에 더 빠르고 안정적인 분산형 파일 저장 서비스를 제공하며 아마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노시스 360 415 예술 경매부터 보험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앱을 선보일 수 있는 예측시장이다. 웨이브 350 1,410 내부에서는 ‘리플과 분산형 거래소의 만남’이라고 부른다. 회원이 되면 거래 가능한 토큰을 손쉽게 만들 수 있어서 거품 거래에 불을 지폈다. 비트커넥트 350 42,910 투자를 적극 권유하고 귀 얇은 투자자에게 120%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약속한 가상화폐 포털 사이트다. 아이코노미 330 1,245 가상화폐 투자 플랫폼. 토큰화된 디지털 자산 포트폴리오 DAA(Digital Asset Array)를 구성하는 자산은 암호-ETF다. 지금까지 2개를 시장에 내놓았고, 하나는 ICO를 진행했다. 바이트코인 330 3,695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추적이 불가능한 가상화폐. 익명의 팀이 개발했고, 기업고객을 대상으로 한다. 업계 사람들이 멀리하라고 경고하는 코인이다. 어거 310 740 판테라 캐피탈 신규 ICO 펀드 총괄로 있는 조이 크루그(Joey Krug)가 만든 예측시장이다. 중앙통제에서 벗어난 금융시스템을 표방한다. 도기코인 280 1,180 시바견 밈에서 영감을 받아 장난 삼아 시작된 커뮤니티다. 네트워크 단위로 가동 가능한 금융자원을 제공한다. 리스크 270 1,870 애플과 구글 앱 생태계를 모델로 한 분산형 블록체인.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 애저가 인수해서 블록체인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플랫폼(blockchain-as-a-service)에 통합시켰다. 스텔라 루멘스 270 1,595리플 XRP와 연계해 금융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이용하지 않는 계층을 상대로 송금과 모바일 머니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의를 일으켰던 마운트곡스와 관련됐던 사람이 만들었다. - LAURA SHIN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2017.09.0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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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코리아는 한국경영사학회와 공동으로 올해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시리즈를 진행한다. 한국 대표 기업들의 창업 주역들을 연구해온 학자들이 기업의 창업주와 대표를 직접 만나 도전과 혁신으로 기업을 일궈낸 기업가정신을 재조명해 어려움에 빠진 경제공동체의 회생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5월호는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대표하는 유한양행이다. 환절기다. 수면 장애와 만성 피로로 체내 리듬이 망가지기 쉬운 때다. 지친 우리 몸 속 리듬을 깨우는 비타민제 가운데 널리 알려진 알약이 바로 ‘삐콤·씨’다. 반백년 넘게 이어온 유한양행의 효자 상품이다. 삐콤·씨가 온가족의 영양제로서 널리 사랑받아 온 배경에는 좋은 제품을 생산해 국민의 건강에 기여한다는 유한양행의 기업철학이 있다.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대표하는 고 유일한(柳一韓) 박사가 1926년 미국에서 귀국해 창업한 유한양행이 6월 20일이면 창사 90주년을 맞는다.지난 4월 14일 오후, 한국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인 서문석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이정희(65) 유한양행 사장을 찾았다. 서문석(50) 교수는 한국 기업사 연구의 원로로 1974년에 『기업가 유일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고 황명수 교수의 제자다. 당시 황 교수가 주도한 연구는 고 유일한 창업주에 대한 국내 최초의 학술적 연구였을 정도로 선도적이었다. 현재 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서 교수는 유한양행의 기업가정신을 조명하는 포브스코리아의 이번 기획과 관련해 자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인터뷰 요청에도 기꺼이 응했다.서문석 - 제가 수업시간에 한국의 기업가정신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유한양행을 자주 이야기합니다. ‘한국 자본주의에 이런 기업이 있다는 건 행운이다’고 말이죠. 저 자신이 기업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유일한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이 어떻게 지금의 유한양행에 스며들어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 사장님을 뵈러 오면서도 사장실에 유일한 창업주의 사진이 어디에 어떻게 걸려 있을까. 그게 무척 궁금했는데, 바로 의자 뒤에 걸려있군요.(웃음) 이정희 - 그렇습니다. 골치 아픈 일이나 안 풀리는 일이 있을 때 뒤로 돌아서 앉으면 바로 보이도록 의자 뒤에 걸어놓고 있습니다.(웃음) 아시다시피 유한양행은 오너가 없는 전문경영인 체제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늘 직원들이랑 의논하고 이사진과 협의해 결론을 내는데, 그래도 답이 안 나올 때가 있어요. 그 때 유일한 박사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답이 딱 나옵니다.(웃음) 예를 들어 이사회가 열리면 갑론을박이 길어지잖습니까! 그때 의견이 갈리고 해답이 난망하면 ‘유일한 박사님이 계셨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이게 유일한 정신에 맞느냐?’ 그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답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 1650명 임직원들 모두가 그렇게 ‘유일한 정신’으로 살고 있습니다. 유일한 박사님은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우리 회사의 재판관입니다. ━ “유일한 창업회장이 지금도 회사의 재판관” 한국 기업가정신의 표상인 유일한이 세운 (주)유한양행은 창업주 유일한의 이름을 딴 유한(柳韓)과 세계로 통한다는 뜻의 양행(洋行)을 합친 말이다. 유한양행의 상징인 ‘버들표’는 유 박사의 성에서 착안해 만든 것이다. 유한양행은 지배구조상 개인 소유 기업이 아닌 공익기업에 가깝다. 최대주주는 유한재단(공익재단)과 유한학원(교육사업) 등이다. 창업주 유일한은 생전에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정희 사장은『위대한 선각자 유일한 박사』라는 소책자를 손수 엮어서 사람들에게 선물할 정도로 창업주의 경영철학과 기업가정신을 평생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발전시켜 왔다. 그는 지난 38년의 회사 생활을 통해 ‘유한맨’이라는 것을 늘 대내외에 자랑스게 밝혀온 기업인이기도 하다.이정희 사장께서는 유일한 박사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인 1978년에 입사하셨지요. 입사 직후 회사 분위기나 창업주에 대한 인상은 어떠했는지요?처음엔 저도 ‘뭐 이런 회사가 다 있나?’ 참 특이한 회사라고 생각했죠.(웃음) 지금도 그렇지만 회사에 들어오면 신입사원들에게 처음에 노트 한권을 딱 줍니다. 유한양행을 창립한 이유가 당시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무지·기아·질병 등 3대 적을 물리치기 위함이었다는 것, 일제강점기 때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 있다’는 애국사상으로 세운 제약회사이니까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좋은 약을 만들어 판매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두 번째, ‘정직이 유한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는 유일한 박사의 어록을 인용하며 정직을 강조합니다. 기업이 정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돈 벌어서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고 말하면 신입사원들이 다 웃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세금 많이 내야 한다고 직원들을 독려하는 회사가 어디 있겠습니까!(웃음) 세 번째,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다 환원해야 한다’고 교육합니다. 지금은 이게 상식이 됐지만 우리는 90년 전부터 그것을 실천해왔습니다.창업 초기 뿐만 아니라 이 사장께서 신입사원이었던 1970년대도 유한양행은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막 입사했을 때 지점장님들이나 선배님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가 ‘너 정말 좋은 회사 들어왔다’고 그래요. 저희 자랑 같지만 유한양행엔 세 가지가 없습니다. 우선 지역차별, 학력차별이 없습니다. 그 직원이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충청도인지 안 따집니다. SKY대학을 나왔는지, 지방에 있는 대학을 나왔는지 그런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저는 지방대학을 나왔습니다. 사장할 사람을 뽑는데도, 입사해서 무슨 업무를 주로 했는지,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지를 따지는 게 없습니다. 예전엔 주로 재무 분야에서 일한 분들이 사장을 맡았습니다. 지금은 영업 쪽이 많습니다. 저도 영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당대의 흐름에 따라갑니다.또 하나, 지금 회사 내에 유일한 박사님의 친인척이 한 명도 없습니다. 71년 유 박사님이 77살로 돌아가시기 3년 전쯤에 아드님을 미리 회사에서 내보냈고, 그 전에 당신의 친인척도 다 내보냈답니다. 그래서 다른 임원이 ‘이건 역차별 아니냐? 능력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랬더니 유 박사님이 ‘내가 만약에 이대로 놔두고 죽으면 이 회사는 아들 편, 뭐 조카 편, 누구 편, 누구 편 해서 이 회사가 과연 얼마나 지탱하겠느냐. 그건 아니다. 그래서 내보낸다.’ 그러셨답니다. 제가 그런 증언을 생존자 분들께 다 들었습니다.그리고 유일한 박사님은 직원들에 대한 사랑이 정말 각별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입사하던 그 때도 직원 자녀의 학자금을 대학교까지 다 지원해주었습니다. 자녀가 몇 명이건 대학 등록금까지 지원해주는 회사는 반 세기 전에는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이런 경영철학을 가진 회사이기에 유한양행에 입사해서 1년 정도 지나면 누구나 유일한 정신에 딱 젖게 됩니다. 그리고 4~5년만 지나면 스스로 ‘나는 유한맨이다’ 하는 얘기를 하고 다닙니다. ━ 경영진부터 말단사원까지 동등한 회사의 주인 이정희 사장의 말처럼 유한양행이 창업 90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가장 큰 성장동력의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직원들의 ‘공동체의식’이다. 현재 유한양행은 75년 노조 설립 이후 단 한차례의 노사분규가 없다. 유한양행의 노사관계는 독특하기까지 하다. 사내에서는 흔히 노사라는 표현대신 ‘노노(勞勞)관계’라고 말한다. 경영진부터 말단사원까지 모두가 노동자, 동등한 회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원이든 아니든 유한양행의 모든 직원은 회사의 주주이자 종업원이라는 의식이 공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창업주가 선택한 종업원 지주제가 그러한 공동체 의식을 견고히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제도적 역할을 했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보다도 20~30년을 앞서간 유한양행의 종업원 지주제와 지배구조는 70년대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게 된다. 1958년에 공로주 배분 및 자사주 취득 허용 등을 통해 사실상의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한 유한양행은 1973년에는 완성된 형태의 ‘사원지주제’를 채택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4년에는 당시 977명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한 사원이자 ‘주주’가 된다. 유한양행이 명실상부하게 사원들이 경영하는 공익기업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이다.말씀을 듣고 보니 유한양행의 저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유한양행 직원들은 이미 입사 때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유일한 박사의 각오와 철학이 내면에 스며들수 밖에 없는 구조이군요.유한양행은 제가 입사했던 30여년 전에도 굉장히 앞서가는 회사였습니다. 제가 입사해서 바로 전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제가 대구 출신인데, 연고도 없는 전주로 가게 됐어요. 회사에 갔더니 제 책상에 A4용지 크기의 바인더가 놓여 있더라고요, 지금으로 치면 이게 매뉴얼이에요. 유한양행의 직원으로서의 업무수칙, 영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노하우라든지 이런 내용이 자세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그렇게 직원교육이 확실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제가 요즘 직원 교육에 더 신경을 쓰는 이유가 그것입니다.창업이후 벌써 90년입니다. 사람이 바뀌어도 이것만큼은 바뀌지 않는다는 유한양행의 정신이 있는가요?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유일한 박사님이 강조했던 ‘정직’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거짓말하면 많이 혼납니다. 유일한 박사는 철저히 정도경영을 통해 기업이윤을 추구했습니다. 창립 초기 영업망 구축을 위해 만주지역을 둘러보고 왔던 한 임원이 당시 유일한 사장에게 마약중독자들이 많이 늘고 있던 상황을 전하며 헤로인·모르핀 제제가 많이 팔리니 유한도 그 제품을 제조 판매하자고 건의했다고 합니다. 유일한 박사는 이때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임원에게 사표를 쓰라는 불호령을 내렸다지요. 국민의 건강을 지킨다는 제약업자들이 국민 건강을 좀먹어가며 돈을 벌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이었죠.저 역시 취임이후 늘 임직원들에게 정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업인이라면 국가에 대해, 사회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합니다. 회사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선 관대하게 대하지만 고의적인 실수는 덮어두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저 사람은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러면 그것을 아주 큰 욕으로 생각합니다. ━ 혁신형 리더십 보여준 창업주 계승하려 노력해 기업가정신의 요체는 ‘혁신’에 있습니다. 유일한 창업주의 혁신은 어떤 것이고 그 기반은 무엇이라고 보고 계십니까?유일한 박사의 혁신경영은 당시 신약품개발을 위한 연구·개발(R&D), 그리고 창조적 기업가정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유일한 박사의 삶 자체가 혁신적인 삶이었습니다. 9살 어린 나이에 도미해서 미시간대학을 졸업하고, GE에 근무했다가 이건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듭니다. 라초이(La Choy Co.)라는 식품회사를 친구와 함께 설립했는데, 잘 되던 그 회사를 친구에게 넘겨주고 귀국합니다. 친구가 깜짝 놀라서 왜 귀국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돈도 중요하지만 나는 내 조국에 돌아가서 할 일이 있다. 그러니까 네가 정리해 달라.’고 했답니다. 당시 유일한 박사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돈이 50만불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해보면 엄청나게 큰 돈이죠. 1925년, 귀국할 그때가 만 30세 정도밖에 안되는 나이거든요. 아마 당시에 대한민국 제일의 부자였을 겁니다. 국가관과 애국애족의 마음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는 얘기죠.유일한 선생은 탁월한 사업가였습니다. 사실은 ‘양행’이라는 이름 자체가 개화기의 종합무역회사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어업, 자동차, 화장품 등 다양하게 사업을 하셨어요. 그런점에서 저는 지금의 유한양행 사업분야가 제약 부문에 너무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혁신을 도모하되 혁신을 이뤄가는 절차는 타당하고 점진적이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유한양행은 오너가 없기 때문에 중요 현안에 대해 임직원들이 모두 협의해서 결정합니다. 합리적으로 일처리가 이뤄지니까 잘못된 결정이 일어날 확률은 적지만 기업이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데는 조금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장 취임 이후 바꾼 게 하나 있는데, 예년에 비해 이사회를 자주 개최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집행이사들과 자주 의논을 하고, 긴급한 현안에 대해 최종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는 정식 이사회를 열어서 결정합니다. 또 하나, 저는 대주주 분들에게 회사 상황을 자세히 보고해서 회사 경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유한양행은 1대 주주가 유한재단이고, 유한학원이 2대 주주입니다. 제가 이 분들을 모시고 매분기마다 회사의 경영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중요 사안에 대해 전보다 자주 보고를 받게 되니 그 대주주 분들도 저를 믿고 혁신을 추진하는데 힘을 보태주고 계십니다.창업주의 혁신정신을 이어받아 경영혁신을 추진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유한양행을 영속가능한 글로벌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혁신안을 갖고 계시는지요?제가 지난해 4월 취임사에서 강조한 것이 있어요. 무엇보다 ‘직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직원들이 행복해야 고객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유한양행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임직원입니다. 저는 직원 스스로가 일터에서 보람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 때 업무에 최선의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이것이 기업의 경영혁신과 새로운 가치장출을 낳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으로 행복한 회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이를 위한 큰 두 축이 직원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환경과 제도의 개선, 그리고 회사의 영속적인 성장 역량 확보를 위한 사업구조의 고도화와 다변화입니다. 직원들과의 열린 소통을 중시하는 다양한 채널을 확보하기 위해 사원운영위원회, 홍보위원회, 연구위원회, 신제품 출품 전략 위원회를 운영해서 건의사항이 있을 시에는 해당부서의 빠른 검토 후 바로 제도와 방편을 개선하는 피드백 시스템도 마련했습니다.저는 미래를 준비하는 큰 축이 인재양성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인재 양성 교육에 있어서만은 비용과 자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올해도 작년 예산의 두 배 이상을 교육예산에 투여할 예정입니다. 우선 우리 내부의 소프트웨어를 강화하기 위해 유한양행 연구소 옆에 비어있는 7층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연수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래 영속 성장의 또 다른 축으로 사업구조의 고도화와 다각화를 적극 추진해 가고 있습니다. 신규 사업 검토를 위한 미래전략실을 신설하고 신규 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컨설팅을 통해 미래 먹거리 발굴에 속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유한양행이 좋은 약을 많이 만들어왔지만, 근래 R&D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저는 제약회사가 신약을 개발하지 않으면 제약회사라고 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신념을 가진 제가 사장을 맡았기에 앞으로 신약개발과 R&D 투자가 우리 시대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웃음)유한양행은 회사 이미지도 좋고, 예산도 많아서 충분히 신약개발에 투자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장으로서 R&D를 통한 신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연구개발 혁신에 몰두하도록 지원을 강화했습니다. 바이오니아, 제넥신 등 바이오벤처에 2015년부터 5건의 지분 투자를 통해 원천기술 확보와 R&D파이프라인 확대를 도모하고 있지요. 올 3월에는 미국의 항체 신약 전문기업인 소렌토와 JV(조인트벤처, joint Venture) ‘이뮨온시아’를 설립해 면역항암제 개발에 나서는 등, 혁신적인 R&D 투자를 활성화해 글로벌 제약사로의 발돋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유한양행은 지난해 연구비만 720억 정도를 투자했습니다. 당장은 신약 연구 투자에 힘을 쏟게 되면 임상 비용도 많이 들고, 영업 이익이 줄겠죠. 하지만 그렇게 4~5년 정도 지나면 우리가 만드는 신약이 전체 매출의 3분의 1 정도는 점유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느라 지난해 1년 동안에 평상시 10년 정도 쓸 돈을 다 썼던 것 같네요(웃음) ━ 신약개발과 R&D 투자가 당면한 소명 지금도 많은 분들이 유한양행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정희 사장께서 주도하는 경영혁신이 더 기대가 됩니다.과찬이십니다. 올해 우리 회사 매출이 1조2000억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지금까지 유한양행이 쭉 해왔던 것처럼 기업의 좋은 이미지를 사회에 전파하는 것도 좋지만, 성장과 영업 쪽으로도 좋은 성과를 내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저는 유한양행이 글로벌 기업이 되는 데 주춧돌을 놓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혁신적인 R&D 투자를 통해 우리가 만든 신약이 국내외 환자분들에게 치료제로 쓰여서 국민 건강에 봉사하는 때가 반드시 올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게 해서 유한양행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다면 우리가 그 분야의 또 하나의 롤모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저희는 앞으로 제약회사 본연의 성장에 매진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한국 땅에서 기업하는 많은 분들이 ‘전문경영인으로 해도 이렇게 잘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좀 더 강하게 느끼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대담 서문석 교수·글 나권일 기자·사진 전민규 기자 ━ 대한민국 기업가정신의 표상 -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의 기업가정신 서문석 교수와 김성수 경희대 명예교수 등 한국경영사학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1895~1971)은 대표적인 ‘한국형 기업가’로 꼽힌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나라에 보국하고, 그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적 공헌에 대한 리더십을 일찍부터 가져왔다. 유일한의 기업가정신은 첫째, 애국애족에서 잘 나타난다.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어 나라에 기여하고 기업활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정직하게 납세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남는 재산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또 이를 종업원지주제와 주식 기증, 전문경영인제도 도입 등으로 평생을 통해 실천했다.애국애족·납세보국·인재제일주의·사회적 책임시대를 앞서간 그의 인재제일주의 정신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해 고국으로 돌아온 유일한 박사는 연희전문학교로부터 교수초빙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제대로 된 교육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기업을 일으켰다. 이후 회사가 성장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인 1954년. 그는 본격적인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실천한다. 사재를 들여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세웠고, 1961년에는 한국직업학원, 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 66년에는 유한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꾸준하게 펼쳤다. 이는 지금의 유한대학으로 이어졌다.1969년에는 자신의 외아들이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넘겼고, 1971년 타계한 뒤에는 전 재산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현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훗날 딸인 유재라 여사도 숨을 거두며 가지고 있던 유한양행의 주식과 재산 모두를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부의 세습이 당연시 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유일한과 그의 자녀들이 보여준 행동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정신의 표상이 됐다. ━ 유한양행 경영혁신 주도하는 이정희 사장의 경영철학 이정희 사장은 영남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5월 유한양행에 입사해 병원영업과 마케팅, 유통사업부를 거쳐 2009년 3월부터 경영관리본부장을 맡았다. 타고난 성실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경영 관리본부장 직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회사 전반 업무를 고루 경험했다고 한다. 특히 유한양행이 제약업계 최초로 정년연장 및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고용안정과 노사 협력 강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미래 성장 동력’ 창출에 주력부사장을 거쳐 지난해 4월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이정희 사장은 유한양행이 제약업계의 숙원이었던 1조 매출을 첫 달성한 만큼 올해는 회사의 ‘미래 성장 동력’ 창출이라는 또 다른 ‘시대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이 사장은 올해 경영 목표를 도전과 미래 창조로, 경영지표는 Integrity & Progress로 정하고 사장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쏙 들어오도록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았다. 이 사장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유일한 박사가 내건 모토를 계승해 발전시킨 것이라고 했다. 유한 기업정신의 핵심인 Integrity는 청렴, 정직, 성실을 뜻하고, Progress는 개선, 혁신, 진보를 뜻한다.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미래에 도전함으로써 영속기업으로 발전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이 대표는 올해 전년대비 10% 수준의 성장을 경영목표로 설정했다. 특히 미래성장을 위한 R&D투자를 매출액 대비 10% 수준으로 대폭 확대해 나간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이를 위해 유일한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계승한 윤리·정도경영, 직원행복경영, 열린소통경영, 인재개발경영, 미래창조경영, 혁신R&D경영을 내걸고 혁신을 주도해가고 있다.
2016.04.26 09:28
12분 소요![[갈등 조정·통합에 능한 ‘관용의 제국’ 네덜란드] 융합하지 않지만 싸우지도 않는다](https://image.economist.co.kr/data/ecn/image/2021/02/24/ecn3696406334_kH6PnrUu_01.353x220.0.jpg)
유럽연합(EU)이 위기다. 난민·이민자의 과도한 유입, 일부 국가의 탈퇴 움직임, 테러 위협, 우크라이나 사태, 만성적인 경제 침체와 실업 증가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가 올해 상반기 EU 순회 의장국을 맡고 있다. EU 의장국은 각료회의를 비롯한 고위급 회의를 주재하고 28개 회원국 간 이견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난민 문제 해결과 통합성 강화, 디지털·서비스 분야 유럽단일시장 완성을 중점 추진 과제로 밝혔다. 네덜란드가 의장국을 맡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내부적으로 오랜 역사를 통해 갈등 조정과 통합에 능한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관용·개방·공존의 전통: 네덜란드는 사회 구조 자체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개방성, 공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각이나 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서로 간섭 않는 조화로운 사회 구조가 네덜란드의 전통이다. 이를 ‘병립화(pillarisation)의 사회 구조’라고 부른다. 병립화라고 번역했지만 말 그대로 옮기면 ‘기둥처럼 살기’ 정도 될 것이다. 기둥은 서로 부딪힐 일이 없지만 같은 천장을 지탱하고 있다. 이처럼 네덜란드 국민도 서로 다른 생각이나 정체성을 가진 사람과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서로 충돌하지 않고 다만 천장, 즉 정부에서만 서로 만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협상을 통한 사회적 갈등 조정이 의회와 행정부의 핵심 기능임을 강조하는 셈이다.이런 구조를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 국민 구성이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인은 종교에 따라 개신교도와 가톨릭 신자, 이념에 따라 사회주의자·보수주의자·자유주의자로 나뉘어져 있다. 종교와 사고방식이 바뀔 가능성이 별로 없는 완고한 집단이다. 이들은 미국처럼 서로 융합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는 용광로라기보다 서로 개성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샐러드 같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나라를 유지하고 살기 위해 관용원칙에 따라 종교와 이념, 종족 집단끼리 서로 분리해 따로 병존하면서 정부 차원에서만 접촉하는 전통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집단에 따라 정당·신문·방송·대학·은행·청소년클럽·스포츠클럽, 심지어 구호단체까지 서로 별도일 정도다. 심지어 노동조합과 경영자단체까지 각기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점령당한 동안 레지스탕스도 따로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내란이나 국가 분할이 일어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이 24%, 개신교가 20%(네덜란드 개혁교회 7%, 캘빈교회가 5.5%)를 차지한다. 주목되는 점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숫자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이민자 중심의 무슬림이 5.1%를 차지한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종교가 없다.연립정부 구성이 기본: 네덜란드인들은 서로 부딪힐 일을 줄여 갈등을 최소화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싫어하는 전통이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집단을 인정하면서 다름 속에 하나로 공존하려면 사회적 관용과 정치적 타협과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독특한 사회 구조 때문에 네덜란드 정치는 연립정부 구성이 기본이다. 19세기 이래 특정 정당이 의회 의석의 과반 수를 차지한 적도 없다. 정치 리더십은 약할 수밖에 없지만 타협과 협상의 합의 정치는 발달했다. 세계적 노사정 합의 모델로 평가받는 ‘폴더 모델’이 네덜란드에서 나온 것은 이런 사회적 전통이 바탕이 됐다. 폴더 모델이란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대신 사용자도 노조의 부분적 경영 참여 등을 보장하는 상호 협력의 노사관계다. 협력의 의사결정 구조라고도 한다. 폴더(Polder)란 네덜란드에 흔한, 바다를 메운 간척지를 가리킨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상당수가 해수면 아래에 있는 저지 국가다. 해수면 1m 이상에 있는 땅은 국토의 5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 이름인 네덜란드 자체가 저지 국가를 가리킨다.네덜란드는 16세기 이후 간척을 통해 국토를 넓혔으며 현재 전국의 17%가 간척지다.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들고 그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것이 전형적인 네덜란드인의 삶이었다. 이렇게 간척으로 스스로 땅을 얻어 부유해진 농민들이 도시로 진출해 상업과 국제 무역에 종사하면서 17세기 해상제국 네덜란드를 이룰 수 있었다. 간척지에서의 삶은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둑을 관리하고, 들어온 물을 빼고 사는 것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 누구도 둑을 관리하고 간척지에서 물을 빼는 작업을 혼자서 할 수 없다. 그래서 네덜란드인에게 이웃과 서로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사는 것은 숙명이 됐다.노사정 합의로 경제 살린 바세나르 협약: 폴더 모델은 저지의 간척지에서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위기를 극복해왔던 노사정이 서로 협력해 공동 발전을 이루자는 뜻이 담겨있다. 그 핵심은 1982년 맺어진 ‘바세나르 협약(Wassenaars Accord)’이었다. 한국 노사정위원회가 수시로 언급하는 협약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더치병’으로 불리는 과도한 복지와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누적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58%에 이를 정도였다. 네덜란드는 ‘일하지 않는 복지국가’로 불리며 서서히 침몰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중도 우파 루드 루버스 총리가 집권해 예산을 동결하자 전국적인 파업이 벌어졌다. 그러자 루버스 총리는 노동자 대표로 빔 코크 노조총연맹 대표를, 사용자 대표로 찰스 반 빈 산업고용주연합회장을 초청해 협상에 들어갔다. 그 결과 대타협을 이뤄 바세나르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당시 노조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정부는 기업들의 비용감축을 위해 세금을 낮추며, 사용자 단체는 고용을 확대하고 기업의 주요 현안을 노조와 협의키로 3자가 합의했다.구체적인 내용은 혁신적이었다. 노사정 합의로 임금인상률을 4.6%에서 2.2%로 낮추고 주당 근로시간을 40시간에서 38시간(나중에 36시간으로 더 축소)으로 줄였다. 기업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사회적인 일자리 나누기인 셈이다. 이 합의로 네덜란드 기업들은 세금 및 임금 부담이 줄면서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 바세나르 협약을 맺는 데 성공하면서 후버스 총리는 1994년까지 12년 간 장기 집권했다.당시 노조 대표였던 빔 코크는 이를 계기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좌파 노동당 대표가 된 그는 1994년 집권해 2002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네덜란드판 제3의 길을 추구했다. 그는 임금인상률을 2.2%에서 1.1%로 낮춘 데 이어 궁극적으로 0.5%로 억제했다. 그 결과 1997~2000년 네덜란드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유럽에선 상당히 높은 4%대를 유지했으며, 실업률은 완전고용에 접근한 2.6%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다른 유럽 국가들은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2.5% 수준에 머물면서 저성장·고실업에 시달렸다.폴더 구조는 사실 네덜란드의 오랜 타협의 전통이 바탕이 됐다. 무엇보다 전통의 사회통합기구가 폴더 모델을 뒷받침했다. ‘사회경제협의회(SER: Social and Economic council)’라는 노사협의체가 1950년 설립돼 노사문제와 관련한 국가자문 기구 역할을 해왔다. 한국 노사정위원회의 모델이 된 조직이다. 사용자, 노조대표, 전문가(국왕이 임명) 11명씩 33명의 위원이 토론에 임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설립된 ‘노동재단(The Labor Foundation)’도 있다. 경영자 단체와 노동자 단체가 함께하는 민간 협의·협력기구다. 나치 점령기에 손잡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노동자와 사용자가 나라 일도 함께 논의하자고 결성한 협의체다. 동성애·낙태·안락사·성매매·대마초 세계 최초 합법화: 네덜란드는 관용과 개방 정책을 국민 통합과 국가 번영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사용해온 드문 나라다. 이 나라에는 관용 정책과 연관되는 ‘세계 최초’ 기록이 수두룩하다. 네덜란드에는 ‘헤도헌(gedogen)’이라고 해서 타인에 관용을 보이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관용의 전통이 있다. 프랑스어로 ‘레세 페르(laissez faire: 내버려 둬라)’라는 말로 번역돼 전 세계에 유명해진 네덜란드의 관용 전통이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라면 금지 보다 통제가 낫다’라는 실용정신이 바탕을 이룬다.네덜란드는 1811년 ‘동성애 허용법’을 발표했다. 영국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동성애를 단속하는 상황에서 네덜란드는 자기의 길을 걸었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는 관대한 국가라는 평판을 얻으면서 유럽 전역에서 동성애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로 박해받는 다양한 인재가 몰려들었다. 지금도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로 불리는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국민 인식도 개방적이고 관용적이다. 2011년 여론조사에서 국민 90%가 “동성애는 도덕적”이라고 응답했다. 2001년 동성애 결혼을 합법화했는데 이 역시 세계 최초다.2002년에는 안락사를 세계 최초로 합법화했다.미국과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마약 관련 혁신 정책에서도 네덜란드는 모범국가다. 네덜란드는 1976년 중독성과 부작용이 비교적 약한 대마를 세계 최초로 허용했다. 다른 마약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정책이다. 네덜란드 보건부는 “대마 정도는 범죄 아닌 공중위생 문제로 관리만 잘하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이 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1983년과 2010년 사이에 헤로인 사용이 30%나 감소했다. 미국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는 주가 늘고 있는 이유다(네덜란드에서 대마초 카페를 방문한 사람은 한국에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노숙자들에게 마약과 깨끗한 일회용 주사기를 나눠주는 과감한 발상도 네덜란드에서 시작됐다. 이를 통해 마약을 구하기 위해 벌이는 범죄와 지저분한 주사기를 중독자들이 돌아가며 비위생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발생할 수 있는 에이즈를 비롯한 각종 감염 질환의 확산을 막자는 의도다. ‘안전한 마약’으로 불리는 이런 정책은 독일 등 이웃 나라로 확산됐다.네덜란드는 낙태도 1984년 세계 최초로 합법화했다. 1988년에는 심지어 성매매를 구역을 정해 양성화했다. 성매매자를 합법적 직업으로 인정해 세금까지 받아갔다. 이 정책은 성매매의 음성적인 확산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다.이러한 관용의 문화는 현대 네덜란드를 다문화 국가로 만들었다. 현재 1700만 명에 이르는 네덜란드 인구 중 11%가 네덜란드 밖에서 태어났다. 8.5%가 EU지역에서, 2.6%는 비EU 국가에서 태어나 이주했다.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이 나라 인구의 78.31%가 네덜란드인(프리즐란트 제도에 사는 프리즐란트인 포함)이고 터키인(쿠르드족 포함)이 2.35%, 북아프리카 모로코인(베르베르족 포함)이 2.25%를 차지한다. 동남아시아 옛 식민지에서 온 인도네시아인이 2.19%, 독일인이 2.15%, 남미 옛 식민지에서 온 수리남인이 2.26%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인도 인구의 0.39%인 6만6000여 명이 거주한다.세계를 호령한 해상제국 건설: 네덜란드는 개방과 관용정책을 바탕으로 17세기 해상제국을 이룬 소중한 경험이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후발 소국의 단점을 뒤집고 유럽은 물론 세계를 호령하는 강소국으로 성장했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무역과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이 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으로 통하며, 17세기 세계 최대의 국제교역회사로 발전했다. 네덜란드는 당시 최초의 주식거래소를 세워 여기서 여러 나라의 자본을 확보해 이 회사의 무역업에 투자했다. 1609년에는 교역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암스테르담에 은행을 설립했다. 이 은행은 중앙은행 및 투자은행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향신료 교역으로 시작해 북미와 남아프리카, 동인도(중남미 카리브해 연안), 서인도(인도 서부), 인도네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했다. 1640년에는 일본 나가사키 항구 앞에 붙은 작은 연육도인 데지마에 무역관을 세우고 일본과의 교역 독점권을 확보해 큰 이익을 얻었다.기독교를 금지한 도쿠가와 막부는 포교에 앞장선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역에만 관심이 있는 네덜란드에 교역 독점권을 줬다. 임진왜란 이후 왜군이 잡아간 조선 도공들이 규슈 등에서 만든 도자기를 유럽에 실어가서 판매한 주체가 바로 네덜란드 상인이다.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과 하멜도 나가사키에서 중국으로 항해하다 한국에 표류했다. 를 쓴 하멜은 조선을 탈출해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가서 본국 선원을 만나 귀국했다. 네덜란드는 이 시기 유럽에서의 교역도 주도했다. 지중해에 접한 남유럽의 포도주를 북유럽에 팔고, 중유럽의 곡물을 사서 남유럽에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네덜란드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했으며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희귀한 물산이 넘쳤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얼굴을 찡그린 게 많다. 이는 당시 유럽에 귀했던 설탕이 네덜란드에는 흔해서 이를 즐긴 국민이 충치로 고생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인재와 자본 집결한 ‘매력국가’: 종교적·사회적 관용과 개방 분위기 덕에 유럽의 인재가 네덜란드에 집결했다. 인재를 끄는 ‘매력국가’가 된 것이다. 중요한 계기가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가톨릭과 신교도 간의 차별을 금지한 낭트칙령(1598)을 1685년 폐지하고 가톨릭 국가가 되면서 종교관용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자 대부분 기술자와 상인이던 신교도 위그노가 네덜란드로 대거 옮겨왔다.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 유대인을 추방하자 유대 상인과 수공업자(주로 보석)가 자본과 기술을 들고 대거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종교뿐 아니라 과학적 관용도 국가 발전에 한몫했다. 네덜란드에선 17세기부터 유럽 다른 나라에선 종교적인 문제로 금지했던 해부가 공공연하게 이뤄졌으며 입장료를 받는 공개 해부학 강의도 유행했다. 이는 유럽의 과학과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생생한 현장은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1575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서 네덜란드의 독립 봉기를 이끈 총독 빌렘이 세운 레이덴 대학에는 종교 등 이유로 박해를 피해 이 나라로 몰려든 유럽의 과학자들이 집결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르네 데카르트도 1628~1649년 네덜란드에서 살았다. 18세기 네덜란드에선 개방적인 개혁교회가 국교 노릇을 하면서도 다른 종교에 관용정책을 이끌었다. 네덜란드식 관용에 사상적인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 인문학자 에라스무스(1466~1536)다. 가톨릭 사제로 유럽 여러 곳을 다니며 공부했던 그는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인문주의자로서 개방과 관용을 강조했다. 이교도는 물론 종교개혁도 용서 않던 시절에 ‘종교적 관용’을 사실상 유럽 최초로 주장했다. 기독교적인 숙명론 대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해 네덜란드인의 국민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에서는 물론 유럽 차원에서도 다양성과 단합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987년 이후 220만 명이 참가한 유럽 대학생 교환프로그램의 이름도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이다. 협상과 타협, 관용과 개방의 전통은 네덜란드가 17세기 해상제국을 이룬 것은 물론 현재까지도 번영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평가 받는다. 네덜란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대한민국의 다음 진로로 고려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2016.03.12 17:42
9분 소요미국인들은 발전 중독자들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아야 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기회’와 ‘전진’에 더 집착한다. 이제 그들은 이런 폭넓은 기대를 무너뜨리는 새 시대의 문턱을 딛고 서 있는지도 모른다.현재의 금융위기, 그리고 은행 구제로부터 미친 듯 널뛰는 주가에 이르기까지 그 매서운 후폭풍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위기는 고령화 사회, 폭주하는 건강보험 지출, 지구 온난화 등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일련의 다른 도전들과 동시에 닥쳐왔다. 미국의 신임 대통령은 수십 년 만에 가장 감당키 어려운 경제 환경을 맞닥뜨리게 된다.로널드 레이건과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 이후보다는 분명 더 어렵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25% 실업 이후의 어느 때와 비교해도 힘든 시점인 듯하다. 미국 경제가 비관적인 예측을 극복한 적이 많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야망이 넘치고 검증된 혁신 능력을 가진 미국 문화는 성장을 선호한다.이는 분명히 강한 변수들이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주기적으로 주춤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공황은 10년간 지속됐다. 1930년대의 실업률은 평균 18%에 달했다. 70년대의 끈질긴 인플레는 생활 수준과 주가를 포로로 잡았다(82년 주가가 65년 수준을 넘지 못했다). 79년엔 인플레율이 13%에 달해 “그만큼 미국인들의 마음을 짓누를 만한 이슈는 달리 없었다”고 정치평론가 시어도어 H 화이트가 훗날 평했다.미국인들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누릴 권리를 하늘에서 내려 준 것은 아닌 셈이다. 미국 경제는 요즘 과거의 행태를 바탕으로 미래를 점치기 어려운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는 걸까. 그것이 바로 차기 대통령 앞에 놓인 핵심적인 의문이다. 2년 전만 해도 거의 상상할 수 없었던 최근의 사건들에도 가슴이 떨리지 않았다면 정말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다.대형 주택담보대출업체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을 정부가 국유화했다. 재무부는 미국의 주요 은행 다수에 구제금융을 지원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신용시장 안정을 위해 1조 달러를 쏟아 붓고 있다. 얼마 전 4.4%까지 내려갔던 미국의 실업률이 지금은 6.1%이며 8%를 향해 상승 중이라고 한다.차기 대통령의 중차대한 과제는 경제의 활력을 해치지 않고 안정시키는 것이다. 반가운 소식은 현재의 침체가 심화된다고 해도(실업률이 8%에 달하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셋째로 극심한 경기 침체가 된다) 심각성이나 고통 측면에서 대공황 수준에는 근접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미국인들이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FRB와 재무부는 금융체제를 지탱하려 안간힘을 다했다. 미국 은행의 5분의 2가 도산하도록 방치했던 30년대의 상황과 정반대다. 의회는 이미 3000억 달러, 어쩌면 그 이상의 2차 ‘경기부양’ 종합대책을 검토 중이다. 일부 민간 경제전문가는 500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나쁜 소식은 이로 인해 고용 사정은 호전되겠지만 경기 회복이 만족스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미국의 신경제 시대는 “심리적 빈곤(affluent deprivation)”의 상태로 빠져들지 모른다. 이 생소한 용어가 가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여전히 부유한 사회로 남을 것이다. 오히려 ‘심리적 빈곤’은 심리 상태를 가리킨다.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하는데 세금, 에너지 비용, 의료비 지출이 많아져 사람들이 가난해졌다고 느낀다는 말이다. 그런 지출은 모두 혜택을 수반하지만 하루하루의 소비 지출이나 일상적인 여가활동의 비용을 보태주는 건 아니다. 머지않아 민간과 공공의 요구 간에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퇴직급여, 국방비, 도로와 교량의 보수 등 정부가 돈을 써야 할 곳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실용주의적이기 때문에 물질을 쉽게 포기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정말 고급 그릴이나 평면 TV가 필요할까. 미국인들 사이에 낭비와 과소비가 있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이런 주장은 심리적 요소를 간과한다.‘사치품’은 금방 ‘필수품’이 된다. 휴대전화가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다. ‘전진’은 사람들의 낙관주의에 불을 지피고 낙천적인 사회는 “다양성을 더 받아들이고 사회적 이동성이 커지며 공정함에 대한 의식이 높아진다”고 하버드대의 경제학자 벤저민 프리드먼이 최근 저술에서 주장했다.경제성장은 미국의 국가적 자긍심을 일으켜 세웠다. 반대로 성장이 둔화하면 불만과 다툼이 많아진다는 얘기다. 안타깝게도 성장의 둔화는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미국인들은 현재의 위기가 한 경제시대의 끝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대략 4반세기 동안 미국 경제는 인플레 하락이 퍼뜨린 부수 효과의 혜택을 누렸다.미국인들은 낮은 금리에 돈을 잔뜩 빌려 개인 재산을 불렸다. 지금은 그런 즐거움이 도를 지나쳐 후유증을 겪는 시점에 이르렀다. 현재의 경제난을 초래한 원인을 분석할 때 지속적인 번영과 그것이 초래한 관용적 태도와 관행에 더 큰 원인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대체로 간과됐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경제를 주도한 흐름은 두 자릿수 인플레의 등락이었다.인플레는 60년 1% 정도에서 시작해 상승세를 타면서 경제의 안정을 저해했다. 69~81년 경기 침체가 네 차례 있었다. 82년 말에는 실업률이 10.8%까지 치솟았다. 마지막의 그 극심한 경기 침체는 폴 볼커 FRB 전 의장 연출, 레이건 대통령 후원으로 이뤄졌으며 최악의 인플레 심리를 깨끗이 걷어냈다.두 자릿수였던 인플레율은 84년에 이르러 4%를 밑돌았으며 2001년에는 1%로 떨어졌다. 이 같은 인플레 하락(디스인플레이션)이 경제를 지탱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주가는 큰 폭의 회복세를 나타냈다. 낮은 인플레로 금리가 내려가자 투자자들은 채권을 팔고 주식으로 갈아탔다.82년 내내 1000선을 밑돌던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89년에는 2500선을 오르내리더니 99년엔 1만500포인트에 육박했다. 소비가 호황을 낳았다. 부유해졌다고 느낀 미국인들이 마구 돈을 빌려 썼다. 개인 저축률은 82년 11%에서 2005년에는 제로 가까이로 떨어졌다. 단 두 차례 경미한 경기 후퇴가 있었다(90~91년과 2001년).그러나 이 같은 번영이 나쁜 습관을 낳았다는 것이 이제 명백해졌다. 현재의 위기에 대해 흔히 모호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를 탓하지만 실상 디스인플레이션으로 확산된 낙관주의에 그 뿌리가 있었다. 지금은 그 왜곡된 결과가 확연해졌다. 주가와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많은 미국인은 가격이 계속 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일단 그런 사고가 뿌리내리자 느슨한 투자 기준(첨단기술 기업들의 경우)과 대출 관행(주택의 경우)이 만연했다. ‘거품’이 뒤따랐다. 사람들은 기술주에 과도하게 투자하고 거액의 대출을 받아 오른 가격에 집을 사거나 부동산 가격 거품을 바탕으로 현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런 빚잔치는 무한정 지속되지 않았다.부채 증가가 점차 소득 증가 속도보다 빨라졌기 때문이다. 2006년 가계부채가 개인소득의 134%에 달했다. 조만간 소비자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형편이었다. 지금이 그때인 듯하다. 자동차 판매와 소매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는 언젠가 끝나겠지만 경제가 회복된다고 해서 과거의 성장률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지평선 저편에 더 큰 위협이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고령화 사회다. 산술적으로 경제성장은 노동자의 근로 시간과 그들의 생산성 증가, 이른바 효율성을 나타낸다. 1960~2005년 미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4%였다. 여기에는 노동력 증가(1.5%)와 생산성 증가(1.9%)가 거의 균등하게 반영됐다.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함에 따라 노동력 증가는 둔화될 것이다.2020년대 중반에 이르면 경제성장률이 2.1% 정도에 이르며 그중 노동력 증가는 0.4%에 불과하고 생산성 증가가 1.7%를 차지할 것이라고 사회보장청은 내다본다. 생산성은 결정 변수가 많기 때문에(기술, 경영, 근로자의 숙련도) 그 추정치조차 낙관적일 수 있다. 70년대처럼 생산성 증가세가 멈추면 사람들의 소득은 늘지 않는 반면 지출이 많아지면서 미국 경제는 사실상 정체될 것이다.신임 대통령이 직면한 딜레마는 현재의 요구와 미래의 요구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것이다. 당면한 과제는 경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수요와 지출을 되살림으로써 실업자들을 흡수하고 가동이 중단됐던 기업들의 생산을 늘리는 일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과제는 다르다. 국가의 지출을 필요로 하는 온갖 상충되는 요구들 간에 교통정리를 하고 경제의 능력을 키워 그런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결과물을 내놓는 일이다.경제가 침체에 가까워질수록 미국인들 사이에서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더 심화될 것이다. 부유층과 빈곤층뿐 아니라 청년층과 고령층, 이민자와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그런 마찰이 생기게 된다. 그 앞길에 ‘심리적 빈곤’이 자리 잡고 있다. 고리타분하지만 적절한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이 파이를 키워 더 큰 조각을 나눠 갖기보다 정해진 파이의 조각을 차지하려 서로 다투게 될 것이다.승자는 만족하겠지만 패자는 부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게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어제의 승자가 내일의 패자가 되기도 한다. 승패가 더 확실하게 갈리는 속성을 가진 정치에서는 그런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런 전망은 단순히 가설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앞으로 지출해야 할 돈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정부부터 따져보자. 능력보다 더 많은 약속을 했다는 점에서 과욕을 부렸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은퇴연금 비용이다. 잘 알다시피 고령자 대상의 세 가지 정책, 사회보장·메디케어(고령자 건강보험)·메디케이드(영세민 고령자 대상 요양 보험)가 연방예산을 독점하다시피 한다.이들 프로그램은 3조 달러의 예산 중 현재 5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며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함에 따라 2030년에는 두 배 가까이로 불어날 수 있다(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측정할 때). 무엇이 까다로운 문제인지는 뻔하다. 은퇴자 대상의 지출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세금을 올리거나 다른 지출 항목을 얼마나 줄일 것인가.건강보험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한다. 고령자를 위한 연방지출 예상 증가분의 4분의 3가량이 메디케이드·메디케어와 관련돼 있다. 미국 사회는 건강보험 지출을 억제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대다수 미국인은 필요한 의료보장을 모두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출 억제(공공보험과 민간보험 모두)도 효과가 없었다 미국인들이 거기에 따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지출은 60년 GDP의 5%에서 지금은 16%로 늘었으며 2015년에는 20%에 달할지 모른다. 회사가 건강보험료를 내준다 해도 그만큼 임금을 깎기 때문에 직원이 손에 쥐는 급여가 줄어들게 된다. 건강보험 지출은 온 국민이 부담하는 세금의 상승 요인이며 다른 정책예산에 대해서는 삭감 요인으로 작용한다.끝으로 에너지 문제가 있다. 최근 가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배럴당 유가 65달러 선은 2003년의 평균 29달러를 여전히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지구온난화 억제 노력도 가격 상승 요인이다. 많은 미국인은 고통 없이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들에 줄이라고 명령하면 되는 줄 알지만 큰 착각이다. 대부분의 지구온난화 억제 정책들은 탄소세나 ‘총량거래제(cap and trade)’를 통해 “탄소에 값을 매기려” 한다(이산화탄소가 주된 온난화 유발 가스다). 총량거래제는 기업들이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 총량을 제한하고 그 이상이 필요하면 다른 기업들로부터 배출권을 구입하도록 하는 방식이다.탄소 기반 연료의 가격이 상승해 사람들은 도리 없이 사용을 줄이거나 태양광 등 더 값비싼 비탄소계 에너지의 가격 경쟁력을 키우려 할 것이다. 사실, 버락 오바마나 존 매케인 모두 이런 문제를 솔직하게 다루지 않았다. 물론 공약은 내놓았지만 대부분 표를 얻으려는 것이었지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을 분명하게 알릴 목적은 아니었다.둘 다 총량거래제를 지지하지만 예컨대 이런 계획들이 성공하려면 에너지 가격을 더 높여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지 않았다. 두 후보가 내놓은 건강보험 개혁안은 비용을 억제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보험 적용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해 지출을 늘릴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리고 두 후보는 뻔한 얘기지만 감세와 지출 정책을 지지해 이미 비대해진 예산적자를 키울 듯하다.양 진영 모두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측면이 있었다. 심하게 기력이 떨어진 경제에는 적자 확대가 올바른 처방일지도 모른다. 마중물을 먼저 한 바가지 부어야 물이 쏟아져 나오는 고전적인 ‘펌프 프라이밍(pump priming, 공공투자에 의한 경기부양책)’ 방식 말이다. 2008년 4550억 달러(GDP의 3.2%)였던 적자가 2009회계연도에는 1조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적자 효과는 일시적인데도 미국 정부의 반영구적인 특징이 되고 말았다.61년 이래 예산흑자는 다섯 차례에 불과했다. 적자는 국민이 정부로부터 원하는 것과 납세를 통해 지불하려는 비용 간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또 다른 지표일 뿐이다. 필경 현실성 있는 어떤 경제성장률도 공적·사적 지출에 대한 모든 미국인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들보다 더 나쁜 결과도 있다.앞으로 예상되는 사회보장과 메디케어 지출을 줄이지 못한다면 전례 없는 세금 부담에 직면하게 된다. 그에 따라 근로와 위험 부담에 대한 보상이 줄어 경제성장이 한층 위축될지도 모른다. 미국 의회예산국의 추산에 따르면 기존 보험급여를 충당하려면 2030년까지 세금을 50% 인상해야 한다(요즘 물가로 연간 1조 달러 이상). 다른 대안들도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다른 정책 예산의 대폭적인 삭감이나 대규모 적자는 언젠가는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미국은 이런 정책들이 변화된 사회환경을 반영하도록 현대화하지 못했다. 연금 수급 연령을 점차 높여야 한다.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졌으며(사회보장법이 통과된 35년에는 기대수명이 62세였지만 지금은 78세) 더 고령까지 일할 수 있다.대다수 직업이 공장과 농장에서 사무실로 이동하면서 육체노동이 많이 줄었다. 많은 은퇴자는 적당한 저축을 보유해 사회보장과 메디케어에 덜 의존해도 된다. 돈 많은 은퇴자에게는 연금급여를 축소할 수 있다. 현 제도는 역(逆) 로빈후드 효과를 낳았다. 허덕이는 청년들의 소득을 느긋한 고령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다.지구온난화에 대해서도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요즘 기술(바뀔 수 있지만)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이 엄연하고도 어쩌면 비극적인 현실이다. 세계 에너지의 5분의 4가 석유(35%), 석탄(25%), 천연가스(20%) 등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2030년에는 세계 에너지 소비가 2005년 수준 대비 55% 증가할지 모른다고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발표했다.중국·인도와 기타 빈국들이 소비 증가분의 4분의 3을 차지할 것이다. 이런 나라들은 에너지 사용을 억제하려고 빈곤을 해소하는 경제성장을 희생하지는 않을 게 뻔하다. 인도만 해도 4억 명가량이 지금도 전기 없이 지낸다. 많은 돈을 들여 미국의 배기가스를 줄이려는 정책도 헛발질일지 모른다. 미국 경제에는 부담을 주면서도 지구온난화는 거의 억제하지 못할 가능성 때문이다. 단순히 청정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큰돈을 들이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연구와 개발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 지구온난화 억제의 최대 희망은 온실가스를 제거하고 부국과 빈국의 경제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적당한 비용에 생산하는 신기술에 있다. 탄소를 ‘걸러내 저장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전지로 움직이는 자동차도 마찬가지다.석유 수입 감축 등 다른 근거에서 온실가스를 약간이라도 줄일 수 있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있다. 예컨대 유류세를 올리면 소비자들이 연비가 더 좋은 자동차를 구입할 것이다. 미국 의회가 새로 통과시킨 규정에 따르면 신차는 2020년까지 현재 갤런당 40㎞인 연비를 평균 56㎞로 높여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미국 경제발전의 미래는 실물경제 못지않게 심리가 좌우할 것이다.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상당 부분 경제발전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그것을 눈에 확 띄도록 이루지 못하면 미국인들의 자신감이 크게 약화될 것이다. 전에도 앞날이 깜깜해 보일 때가 있었지만 미국인들이 저력(보편화된 근로 윤리와 강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통념을 뛰어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또 다른 대공황이 오거나 잘돼야 경제가 아주 약간 성장할 것이라는 우려가 널리 퍼져 있었다.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큰 호황이 찾아와 교외 주택지가 대거 생기고 자동차·전자제품·TV 등의 소비재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 어쩌면 오늘날의 근심도 똑같이 기우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임 대통령(버락 오바마든 존 매케인이든)이 중대한 갈림길에서 국정의 방향타를 잡게 됐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단지 금융위기가 그렇게 생소하고 위협적으로 여겨져서만은 아니다. 이번 위기는 미국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를 위협한다. 그것을 다스리려면 경제 독트린만큼이나 경제 외교도 필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4반세기 동안 디스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르는 개인 재산과 차입 증가에 힘입어 경제의 성장동력 역할을 했던 대변수들도 분명 추진력을 잃었다.미국 경제가 앞으로 더 빨리 성장하려면 새로운 성장동력을 키워야 한다. 이번 금융위기는 이미 대규모의 정부 개입을 유발했으며 그 범위와 심각성을 감안할 때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개입 또는 잘못된 개입이 성장·투자·위험 감수 의욕을 해칠 위험성도 있다.사람들은 희생양을 찾기에 혈안이 될 것이고 만만한 표적이 널려 있다. 그러나 새로운 규제와 세금 형태의 대응과 응징이 너무 억압적이면 성장 잠재력을 저해할 수도 있다. 좋든 싫든 신임 대통령은 이번 폭풍의 눈에 앉게 된다. 미국의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과거와 미래 간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2008.11.04 14:21
11분 소요일러스트:김희룡(aseokim@joongang.co.kr) 지난 1950년 한 심리학자가 쥐의 두뇌에 전극을 설치하고 전기 자극을 주는 실험을 했다. 뇌의 일부인 시상하부 주변에 전극을 설치해 자극을 주자 쥐는 황홀경에 빠졌다. 쥐가 미로에서 길을 성공적으로 찾으면 보상으로 전기 자극을 줬다. 전기 자극에 맛을 들인 쥐들은 나중에 인간에게도 어려워 보이는 길도 찾을 수 있게 됐다. 미로를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지만 전기 자극을 받고 싶은 욕망이 쥐들을 어려운 길 찾기에 나서도록 독려했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나오는 레버와 전기 자극을 주는 레버를 함께 두면 쥐는 전기 자극 레버를 선택한다. 쥐들은 1분에 수백번씩 전기 자극을 주는 레버를 누른다. 쉬는 것도,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 그리고 굶어죽는다. 주식투자자들은 전기 자극 레버를 누르는 쥐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단기 주식투자의 유혹이 바로 전기 자극 레버와 같다. 장기투자에 비해 실적이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투자자들이 단기매매와 초단타매매에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쥐가 전기 자극에서 얻는 황홀경 같은 쾌락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쾌락이 투자자를 단기매매 중독자로 만드는 것일까? 주식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경제적인 이득이고, 또 하나는 주가 등락에 따른 스릴이다. 이것은 쥐의 실험에서 쥐가 누르는 두 가지 레버에서 얻는 쾌락과 비슷하다. 하나의 레버는 경제적 이득(먹이)을 얻는 것이고, 또 다른 레버는 스릴(전기 자극)을 얻는 것이다. 주식투자자도 전기 자극을 얻는 레버만 누르다 굶어죽은 쥐처럼 행동하기 쉽다. 처음엔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서 단기매매 한다고 나선다. 그러나 나중에는 스릴 자체에 중독되고 만다. 도박중독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돈을 번다는 사실이 아니라 스릴 그 자체에 있다. 도박중독자들이 진정 원하는 건 스릴과 자극인 것이다. 계속 이기는 승리의 열매를 얻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패배의 고통, 승리의 쾌감이 교차하는 자극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도박중독자들은 손끝으로 패를 쥘 때 여러 번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룰렛이 돌아가다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면 도박자는 마치 섹스를 할 때처럼 심장이 고동치고 숨을 헐떡거리게 된다고 한다. 단기주식투자자도 도박자와 마찬가지로 이익이 아니라 스릴과 자극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일부 정신병리학자들은 단기 주식투자자들을 섹스중독자와 같이 취급한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단기주식투자와 섹스는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단기주식투자자는 가능성 있는 주식을 발견하면 본격적인 매수에 앞서서 약간 시범 매수를 해 본다. 이것은 섹스중독자가 섹스 전에 여성을 상대로 집적대는 행동과 같다. 또 단기 주식투자자가 사용하는 차트 용어인 클라이맥스·발기·밑바닥자극 등은 섹스 용어와 똑같다. 단기 주식투자자들은 주가가 저항선을 관통(성교)하고 오를 때 흥분이 절정(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또한 매도 뒤 이익을 거두고 나면(섹스가 끝난 뒤) 안도감과 쾌감을 느낀다. 결국 많은 투자자들이 단기매매와 초단타매매에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스릴을 통해서 쾌락(도파민)을 얻으려는 본능 때문이라는 얘기다. 언젠가 한 증권사 지점장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나는 거래하고 싶은 욕망을 참기 힘들다. 며칠 동안만이라도 거래를 하지 않으면 손가락이 근질거려서 미칠 것 같다.”이 같은 쾌락 본능을 이겨내지 못하면 부자의 길은 요원하다.
2005.01.14 00:00
3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