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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의장맡는‘국가경제委’ 필요해요”

“대통령이 의장맡는‘국가경제委’ 필요해요”

지난해 12월17일 미 월 스트리트 저널지는 한국이 단행해야 할 ‘IMF(국제통화기금)식 개혁의 선구자’란 제목으로 1면에 유종근 전북지사(54)를 크게 소개했다. 경제고문이 되기 전 일이다. 기사에서 주로 다뤄진 내용은 외국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그가 벌인 활동과 실적, 기업에 대한 행정규제 완화, 관광객수 증가세 등 도백(道伯)으로서의 활동에 관한 것이다. 행정가로서의 그의 면모다. 대통령 경제고문이기도 한 그는 국내보다 미국에서 더 높이 평가하는 경제통이다. 지난해 루빈 미 재무장관은 IMF 지원 협상과정에서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고 립튼 재무차관도 “생각이 제대로 돼 있는 사람”이라고 코멘트했다. IMF 구제금융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미국과 IMF는 물론 외국 언론에 대해 창구역할을 했다. 뉴욕 외채협상의 주역이었고 그 마무리를 위해 2월27일 도쿄, 3월2일 미국, 3일 프랑스, 4일 독일, 5일 영국 등지를 돌면서 외채설명회를 갖는다. 도쿄설명회를 마치고 그날 밤으로 돌아온 유종근 대통령 경제고문(전라북도 지사)을 빡빡한 외채설명회 스케줄 틈을 비집고 다음날 아침 공덕동 지방행정회관에 있는 전라북도 서울사무소에서 만났다.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개혁을 역설하는 그의 말엔 힘이 있었다. ─얼마 전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우리 국민들이 두 달만에 위기의식을 상실하고 있고, 진짜 고통을 아직 못 느끼고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다고 봅니까? “안 그렇다고 보세요? 불과 두 달 전 다들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강도 높은 개혁이 시작됐고 반발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뉴욕 외채협상이 잘 됐다니까 정부 조직개편은 죽도 밥도 아닌 게 돼 버렸고 총리 인준도 못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무리 협상을 하러 다니고 있는데 말이에요. 중요 고비를 넘겼다는 말들이 계속 나오는데, 시간을 번 거 지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닙니다. 디폴트(국가부도)상황은 면했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물론 시간을 벌었다는 건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개혁하라는 시간입니다. 국민들도 그래요. 생산이 크게 줄고 실업자가 늘어나는 건 경제가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거리엔 차가 늘고 있어요. 고통의 세월이 이어 질 겁니다. 더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더 많은 실업자들이 생길 겁니다. 올 한 해는 상당히 힘겨울 거예요. 며칠 전 사업하는 어떤 분이 저더러 ‘짓다만 아파트를 인수하게 은행 대출을 주선해 달라’고 하길래 ‘경기가 언제 회복될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지금은 빚 안 지는 게 사는 길입니다.” ─‘DJ노믹스’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DJ노믹스가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유고문이야말로 일급 ‘DJ노미스트’ 아닙니까. DJ노믹스의 요체가 뭡니까? 시간은 벌었지만 개혁하라는 시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혔듯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하는 겁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나요? “민주주의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룰입니다. 정당이 더 좋은 정책으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 즉 정책의 소비자에게 신임을 받아 집권하듯 기업은 더 좋은 제품으로 소비자의 신임을 얻어 시장점유율을 늘려야 합니다. 이 때 공정한 경쟁이 보장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보다 재벌에 유리하게 작용해 온 경쟁 제한요소를 없애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재벌들도 구조조정을 안 할 수 없을 겁니다. 사실 과거 정권이 나라의 주인 행세를 했듯 우리 기업의 주주들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주주라면 경영진에게 책임을 묻고 갈아치울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했어요. 우리 금융기관들은 민유(民有)지만 관영(官營)기관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은행장을 청와대서 결정하니 임명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경영을 할 수밖에요.” ─이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원인이 뭐라고 봅니까? “총체적 부실의 원인은 국가고 기업이고 책임 경영이 이루어 지지 않고 국민과 주주들이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 한 데 있다고 봅니다. 한 마디로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 했기 때문이에요. 우리 국민은 참으로 변화를 두려워 하는 국민입니다. 나라가 파탄지경에 이르다 보니 정권 교체가 되긴 했지만 얼마나 아슬아슬했습니까? 그런데 되고 보니 괜찮거든요. 그렇게 나쁘지 않단 말이에요. 이제 정권 교체도 쉬워 질 겁니다.” ─세간에 김대중 정부의 경제실세라는 평가가 있는데요? “재경부장관이 있고 경제수석이 있는데요. 그 동안 정부가 조직이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자주 전면에 나섰고 그러느라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습니다. 일 자체가 대외채무관계고, 외국의 투자가·금융기관·언론을 상대로 국가 신인도를 높이는 게 급선무라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팀이 구성됐으니 마무리 되는 대로 ‘고문답게’ 도정에 전념해야죠.” ─고문이 하는 일은 뭔가요?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겁니다.” ─도지사와 경제고문 중 어느 한 쪽에 주력할 생각은 없습니까? “지사 출마 당시 당선되면 재선에 도전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반드시 하겠다고 했습니다. 3년 동안엔 도저히 마칠 수 없는 일입니다. 도민들이 신임한다면, 도전할 겁니다. 그 이상은 생각 없지만….” ─그 후에는요? “종교적인 얘기지만, 믿는 사람으로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는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라고 열어 주시는 길은 확신을 가지고 뛰어들 겁니다. 두 달여 전 그런 기회가 있었고, 조그만 심부름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직전이었죠.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합니다. 학창시절 못 사는 사람들을 위해 경제학자가 되어 국가경제에 이바지하겠다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죠. 개인적으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도전하면 무투표당선 아닌가요? “무투표당선이 어디 있습니까. 해 봐야 알죠. 선거인데.” ─외환시장은 언제쯤 안정될 것으로 봅니까. 환율이 1천6백원대면 예상보다 안 내려가는 것 아닌가요. 외환시장 안정의 조건은 뭔가요? 책임경영·주주권리강화가 개혁요체 “1천6백원대에서 안정됐다고도 볼 수 있죠. 더 안 내려가는 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게 없기 때문입니다. 뉴욕 협상 타결은 만기를 임시 연장한 것에 불과합니다. 액수 큰 신규자금이 들어와야죠. 외환시장이 안정되면 금리도 내려갈 겁니다. 3월 중 금리가 내려가기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고 4월부터는 나아질 겁니다.” ─국내 금융기관들의 ‘느슨한 금융관행’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안 하고 권력과 유착, 방만한 대출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개선방안이 무엇이라고 봅니까? “주주 중시 경영을 해야죠. 그렇게 하도록 소수주주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대표소송제의 경우 개혁과정서 물타기가 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지분의 하한선이 0.05%로 낙착됐지만 IMF의 권고는‘단 한 주만 있어도 할 수 있게 하라’는 거였습니다. 미국·일본이 그래요. 반대한 사람들은 소송을 남용할 우려가 있다지만 소송비용이 막대해 남용 못 합니다. 이겨도 이익 챙기는 게 아닌 데 무엇 때문에 남용합니까. 일본서도 남용된 사례가 없습니다.” ─지나간 얘기지만 빅 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빅 딜이 되든 안 되든 재벌경제체제의 효용이 다한 것 아니냐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은데, 재벌 개혁의 요체가 뭐라고 봅니까? “책임경영과 주주 권한의 강화입니다. 그 동안 10∼20%의 지분을 갖고 있는 재벌들이 1백% 주인 행세를 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자동차를 하든 뭘 하든 정부가 하라 마라 할 일은 아니지만 주주가 리스크(위험)가 크니 안 된다고 하면 못 하게끔 돼야 합니다. 상호지급보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주가 막으면 못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주주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주주 권한에 대한 인식 없이 ‘주식은 으레 그런 것’이려니 하고 ‘고무도장’ 노릇한 게 우리 주주들이에요.” ─그러면서 시세차익만 노렸죠. 빅 딜은 되는 건가요? “강요된 빅 딜은 강압에 의한 결혼이나 같습니다. 시간을 두고 풀어야죠.” ─유고문이 제의한 대통령 직속의 국가경제위원회는 물건너갔나요? “청와대에 경제정책을 통합·조정할 기구가 필요합니다. 장관은 국정을 맡고 이 기구가 개혁의 구심점이 되는 겁니다. 개혁 마인드가 있는 사람도 장관이 되면 부처이기주의의 포로가 돼요. 부처 이익을 대변 못 하면 부하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거든요. 그러다 보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걸림돌이 되는 게 관료들인데 그 사람들 애환 다 들어 주다 보면 개혁은 물건너 가는 거죠. 미국의 경제위원회 같은 형태도 좋지만 형태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의장은 반드시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 대통령의 지시 아니면 저항하는 세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미 다우 코닝사 투자유치에 실패한 원인이 뭐라고 봅니까? “복합적입니다. 인프라도 아직 완성 안 됐고…. 땅값에 대해서는 약속했지만 세금 조정 요구도 못 들어 줬죠. 문제는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2년 동안 노력했지만 재경원-통산부간 협조가 잘 안 됐고, 막판에 비대위에서 해 주기로 했는데 국회엔 상정이 안 됐습니다. 에피소드지만 2년 동안 코닝측 실사팀이 9번 방문했는데 통산부 담당과장이 그 새 3번 바뀌었습니다. 인수·인계라도 제대로 해 줘야 하는데 인계하는 사람들이 사안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어요. 협조가 될 만하면 바뀌고, 새로 온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니 일이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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