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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작은 희망의 불씨’ 전하는 장혜선식 나눔 철학

경제일반

누적 지원금액 약 2478억원, 누적 수혜인원 약 38만5048명. 할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다시 손녀로 이어지며 세대를 잇는 나눔을 실천한다. 롯데그룹 창업주 고 신격호 명예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롯데재단을 이끄는 손녀 장혜선 롯데장학재단·롯데삼동복지재단 이사장은 2023년 취임 이래 ‘실질적이고 효율적인 지원’을 핵심 철학으로 진두지휘하고 있다. 여느 재벌가 구성원의 취임과 달리 장 이사장은 외부로 드러내기 쉽지 않은 개인의 아픔을 기꺼이 꺼내어 공감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장 이사장에게 지난 2년여간 가슴 뭉클했던 순간, 장학사업의 발전 방향, 재단이 꿈꾸는 미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스포츠 꿈나무들의 빛이 되다롯데장학재단은 지난 10월까지 2025년에만 약 150억 원의 사업비를 운용하며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장 이사장이 꼽은 재단의 핵심 사업으로 1983년 재단 설립과 함께 시작된 ‘신격호 롯데 희망장학금’이다. 이 장학사업은 42년간 약 691억원을 전달하며 대학생들의 안정적인 학업 활동을 돕는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 중 스포츠 인재 육성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스포츠 꿈나무를 돕는 ‘신격호 롯데 재능장학금’을 통해 스키·스노보드 등 동계스포츠 유망주들을 발굴하고 지원하고 있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총 92명을 발굴해 약 4억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실제 이 중 16명이 국가대표에 선발, 대한민국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장 이사장은 스포츠 장학생 중 ‘2025 하얼빈 아시안게임’에서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 종목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이채운 선수에게 특히 감동했다. 그는 “스키장 수도 적고, 운영 기간도 1년 중 90여 일 정도에 불과한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영광의 결실을 얻어 정말 자랑스럽다”며 스포츠 장학생들의 열정과 도전을 응원했다.장 이사장은 장애인 스포츠의 활성화도 놓치지 않고 있다. 시각장애인축구대회와 농아인야구대회 등 박수와 함성이 더욱 필요한 곳에 지원을 더하며 나눔의 폭을 넓히고 있다. 시각장애인축구대회를 관전했던 때를 떠올린 장 이사장은 “눈이 아닌 몸과 귀, 온몸의 감각으로 공을 차는 모습을 봤을 때 ‘한계를 뛰어넘는 일은 결국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고 했다.효율적이고 실질적인 곳에 틔운 ‘작은 불씨’장 이사장은 취임 이래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작은 불씨’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에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지도록 연결해 더욱 큰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효과를 내는데 힘을 쓰고 있다. “사업 현장에 갈 때마다 ‘우리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이 많구나’를 느낀다”는 장 이사장은 “우리가 전한 도움의 손길이 실제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직접 체감한다”고 밝혔다.장학사업을 통한 뿌듯함과 동시에 도움이 필요한 곳이 더욱 많다는 현실을 자주 마주한다. 장 이사장은 이 현실이 자신에게 주어진 중요한 숙제라고 여긴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더 효율적이고, 맞춤형으로 지원할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취임 2년 차 새로운 장학사업 조성에도 눈을 떴다. 새로 방향을 튼 사업 중 하나는 작은 도움조차 절실한 예술가 자립 지원이다. 실력 있는 K-예술가들이 서포트를 받지 못해 해외로 나가는 안타까운 사정도 장 이사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코로나19 이후 닫혔던 극장 문이 열렸지만 여전히 무대는 부족하고 후원 환경이 회복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장혜선’ 이름 내건 장학금의 힘장 이사장은 취임 후 실명을 내건 사업을 펼치며 재단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조부가 만든 사회공헌 재단에 이름 석 자를 건 사업을 더했기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올해 처음 출범한 ‘장혜선 가정 밖 청소년 장학금’과 ‘장혜선 위기 임산부 긴급지원 사업’은 장 이사장에게도 큰 보람을 안겨준 사업이다. 특히 가정 밖 청소년 장학금의 조성과 관련해 실효성을 두고 고민하다 조심스레 스텝을 밟았는데, 무엇보다 ‘엄마’의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다. 가정 내 학대 등에 어려 어려움에 노출된 아이들을 진짜 엄마처럼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싶었단다. 장 이사장은 “지난 7월 열린 전달식에서 오히려 내가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며 “가정환경으로 인해 상처받고 무너져 있을 거라는 생각을 바로잡은 계기였는데 그들에게서 훨씬 더 밝고 단단한 빛을 느꼈다. 사실 몸이 너무 좋지 않았는데 참석하길 잘했다”고 말했다.장 이사장은 장학금 전달에 그치지 않고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줄 혜택을 모색하고 있다. 재단이 운영하는 장학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거나 재단에 구직할 시 우선으로 기회를 주는 등 여러 기회를 받을 수 있도록 검토 중이다.‘약점은 감춘다’는 말과 달리 장 이사장은 여러 행사에서 그동안 몰랐던 개인적 아픔을 내보이며 수혜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호응을 얻고 있다. 개인사를 모른 주변의 반응이 오히려 더 컸다. 그는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전하려면 나 역시 그 과정을 직접 겪어봤다는 것을 말해줘야 한다”며 “나도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경험이 있어 ‘여러분도 할 수 있다’는 말이 작은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이와 더불어 장 이사장과 어머니 신영자 의장, 딸과 함께 3대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 훈훈함을 더했다. 다 같이 활동하는 과정에 이견은 없었을까. 장 이사장은 “나는 늘 어머니께 조언을 구하고 딸에게는 도움을 청한다”며 “우리는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돕고 큰 힘이 되어주는 존재들”이라고 흐뭇해했다.“지난 2년 재단을 정비했고 올해 목표한 방향대로 자리를 잡아 감사하다”는 장 이사장은 다가오는 2026년의 계획도 일찌감치 세워놨다. 그는 “내 손이 닿지 않아도 될 만큼 (사업을) 안정적으로 세팅하는데 집중해 희망의 불씨를 계속 키워나가고 싶다”고 말했다.이현아 기자 lalalast@edaily.co.kr

2025.12.08 07:00

4분 소요
천장 뚫은 넥슨, 가로막힌 크래프톤…NK 엇갈린 명암

게임

국내 게임 업계를 이끄는 NK(넥슨·크래프톤)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글로벌 시장 공략에 성공한 넥슨과 달리 크래프톤은 대표 IP ‘펍지: 배틀그라운드’(배틀그라운드)의 경쟁작들이 돌풍을 일으키자 노심초사하고 있다. 결국 게임사의 유일한 위기 탈출구인 신작의 성과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업계에 따르면 넥슨은 최근 부진했던 실적에 개의치 않고 벌써 다음 성적표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신작이 연이어 대박을 터뜨린 덕이다.넥슨, 실적 부진에도 ‘여유’넥슨은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크게 성공한 ‘던전앤파이터 모바일’(던파 모바일)을 비롯해 ‘메이플스토리’와 ‘FC’ 등 3대 프랜차이즈 IP의 선전으로 2024년 연간 매출이 국내 게임사 최초로 4조원을 넘어섰다. 모기업인 넥슨코리아와 개발 자회사 네오플은 총 1600억원의 성과급을 받아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그런데 올 하반기를 기점으로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중국 ‘던파 모바일’의 기저효과에 수익성 높은 신작 부재와 비용 부담이 겹치면서 3분기 영업이익이 3000억원 중반대로 전년 동기보다 두 자릿수(27%) 감소했다. 다만 지난 3월 네오플이 내놓은 ‘던전앤파이터’ IP 기반 하드코어 액션 RPG ‘퍼스트 버서커: 카잔’이 서구권 시장에서 호응을 얻으며 콘솔 경쟁력을 입증했고, 같은 시기 출시한 ‘마비노기 모바일’이 유저 친화적인 BM(비즈니스 모델)으로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수상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이처럼 불안했던 넥슨에 날개를 달아준 게임은 ‘아크 레이더스’였다. 신작은 서구권 강자들이 즐비한 콘솔·PC 중심의 익스트랙션 슈터라 도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배틀로얄 장르에서 파생한 익스트랙션 슈터는 제한 시간 안에 미션을 완수하면 플레이하는 동안 얻은 아이템과 경험치를 획득해 성장하는 RPG 요소가 특징이다. 대신 목적을 완수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는 특성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다. ‘아크 레이더스’는 기본 중고 장비를 무료로 제공해 이런 스트레스를 완화했다.최신 언리얼 엔진5 기반의 생동감 넘치는 그래픽과 1970~1980년대 미래상을 재해석한 ‘카세트 퓨처리즘’(구시대적인 아날로그 전자기술을 기반으로 발전한 세계를 가정한 SF 장르)의 미학이 더해져 신작은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지난 10월 출시 이후 2주 만에 글로벌 누적 판매량 400만장을 돌파했다. 이후 성과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는데, 패키지 가격(5만8900원)으로 단순히 계산해도 매출이 2000억원은 가뿐히 넘어선다.PC 게임 플랫폼 스팀에서는 실시간 플레이어 수 20만명대, 일 최대 동시 접속자 수 30만명대로 ‘배틀그라운드’와 최다 플레이 게임 3위를 다투고 있다. 5위권 아래로는 실시간 플레이어 수가 10만명 밑이라 최상위 입지를 굳게 다진 셈이다.국내에서는 11월 조용히 출시한 ‘메이플스토리 키우기’가 깜짝 흥행에 성공했다. 한국과 대만의 2030 유저들에게 친숙한 ‘메이플스토리’ IP에 간편히 즐길 수 있는 모바일 트렌드를 반영한 효과다. 론칭 직후 ‘리니지M’과 ‘뱀피르’ 등 대작을 누르고 양대 앱마켓 매출 선두를 달리고 있다.넥슨 관계자는 “라이트한 장르라 다른 신작과 달리 대대적으로 마케팅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었다”며 “방치형 장르로 1위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말했다.신작의 연이은 승전보로 일본 증시에 상장한 넥슨은 지난 11월 28일 시가총액이 3조1000억엔(약 29조1000억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크래프톤, ‘배틀그라운드 원툴’ 한계반면 크래프톤은 사운이 걸린 중대 기로에 섰다. 유일한 버팀목인 ‘배틀그라운드’가 흔들리면서 차세대 IP 없이는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현재까지는 안정적인 실적을 내고 있다. 올해 3분기 누적 영업이익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1조원을 넘어섰다. ‘배틀그라운드’ IP를 중심으로 글로벌 브랜드와 K-팝 아티스트 등 협업 콘텐츠를 꾸준히 선보여 탄탄한 이용자 기반을 유지했고, 인구 대국 인도에서 e스포츠로 저변을 넓혀 국민 게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그렇게 실적을 견인하는 ‘배틀그라운드’가 막강한 적수들의 추격에 시달리고 있다. 전 세계적인 인기의 프랜차이즈 IP를 활용한 EA의 ‘배틀필드 6’는 지난 10월 출시 3일 만에 판매량 700만장을 찍으며 올해 최고 흥행작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여기에 무료 배틀로얄 모드 ‘배틀필드 레드섹’까지 내놓으며 공격적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다.이런 돌풍마저 뚫고 최상위권에 안착한 게임이 ‘아크 레이더스’다. 스팀 플레이어 수로 ‘배틀필드 6’를 누르고 ‘배틀그라운드’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글로벌 게임 시상식 TGA(더 게임 어워드)의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 게임’ 부문 후보에도 올라 한국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이 외에도 중국판 ‘배틀그라운드’인 ‘화평정영’은 텐센트의 신작 모바일 슈팅 게임 ‘델타 포스’에 쫓기고 있다.크래프톤은 기대작의 출시 지연으로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2021년 5억 달러를 들여 미국 개발사 언노운월즈를 인수해 해양 생존 게임 ‘서브노티카 2’를 선보일 예정이었는데, 올 하반기였던 출시 시점을 내년으로 연기했다. 크래프톤은 근무 태만으로 해임한 언노운월즈 전 경영진이 게임 개발에 집중하지 않아 출시가 지연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언노운월즈 전 경영진은 크래프톤이 인수 당시 약속한 성과 보상금을 지급하기 싫어 꼼수를 부렸다고 맞서면서 맞소송이 벌어졌다.증권가도 크래프톤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매수 의견을 유지하면서도 일제히 목표 주가를 하향 조정하며 신중한 투자를 당부했다.크래프톤의 목표 주가를 39만원에서 30만원으로 낮춘 김진구 키움증권 연구원은 “기존 레거시 IP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 필요성이 명확하다”고 평가했다.정길준 기자 kjkj@edaily.co.kr

2025.12.08 07:00

4분 소요
'해외 수주 폭발’ K건설, 단순 외형 경쟁 넘어 구조개편 시험대

건설

올해 글로벌 경기 둔화와 지정학 리스크에도 국내 건설사의 해외 수주가 연일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시장 반전의 분기점에 들어섰다. 중동 중심이던 발주 구조가 유럽과 에너지 시장으로 옮겨가고, 원전·플랜트 중심의 고수익 프로젝트가 실적 개선을 주도하고 있다. 다만 대형 프로젝트 쏠림과 수익성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만큼, ‘외형 확대’에서 ‘수익형 글로벌 사업 모델’로의 체질 전환이 향후 K-건설 경쟁력을 좌우할 전망이다.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국내 건설사는 올해 10월까지 총 428억8579만달러(약 63조640억원)의 해외 공사를 수주했다. 전년 동기 285억2585만달러(약 41조9590억원) 대비 50% 이상 증가한 수치로, 통계가 집계된 매년 10월 누적 기준 2014년 이후 11년 만의 최고 실적이다. 총 45개 기업이 34개국에서 72건을 따냈고,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삼성물산·현대건설·두산에너빌리티·삼성E&A·현대엔지니어링 등이 수주 상위권을 형성했다. 중동에서 유럽으로…원전이 시장 판 바꿔 올해 수주 실적을 보면 한수원이 196억218만달러(약 28조8370억원)로 단일 기업 기준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사실상 올해 해외 수주 성장분의 절반을 한 기업이 견인한 셈이다. 핵심 기여는 동유럽 체코 '두코바니 신규 원전' 프로젝트(187억달러·약 27조5100억원)였다. 이는 한국 해외건설 역사상 역대 2위 규모로, 업계는 이를 계기로 폴란드·불가리아 등 인접국 원전 재건 시장 진입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으로 평가한다. 건설사별 성과도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은 플랜트·에너지 분야에서 굵직한 프로젝트를 연달아 확보하며 민간 부문 최상위권을 견인했다. 삼성물산은 중동과 오세아니아를 중심으로 발전설비 사업을 잇따라 따내며 해외 수주 규모를 빠르게 확장했다. 올해 확보한 해외 사업액은 약 63억달러(9조2700억원)에 달하며 업계 2위권에 자리했다. 특히 카타르에서 진행되는 초대형 태양광 발전 프로젝트를 단독 EPC(설계·조달·시공) 방식으로 담당하게 되면서 신재생 인프라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했다. 앞서 수주한 라스라판·메사이드 프로젝트까지 포함하면 카타르 태양광 발전 용량의 대부분을 삼성물산이 수행하게 된다.현대건설은 중동·아시아 지역에서 고르게 성과를 냈다. 이라크 해수처리 사업, 사우디 송전선로 공사 등을 잇달아 수주하며 올해 해외 수주액은 약 41억달러(약 6조306억원)를 기록했다. 원전·송배전·담수화 등 공종 다변화가 실적 방어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건설은 향후 원전·소형모듈원전(SMR) 분야를 신성장 축으로 삼아 2030년까지 연간 7조원 규모 원전 수주 달성이라는 중장기 목표도 제시한 상태다.삼성E&A도 지난 10월 미국 와바시 지역의 저탄소 암모니아 플랜트 EPF 프로젝트를 따내며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금액은 약 4억7000만달러(약 6900억원) 규모로 크지 않지만, 친환경 암모니아 분야 첫 진출이자 2011년 이후 10여 년 만의 미국 재진출로 상징성이 크다.대우건설과 포스코이앤씨 역시 해외 발주 대응을 강화하면서 수주 순위 상위권에 재진입했다. 반면 GS건설과 DL이앤씨는 해외 플랜트 경쟁 심화와 프로젝트 선별 강화 영향으로 전년 대비 실적이 다소 주춤했던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지역별 수주 비중에서도 뚜렷한 이동이 관측된다. 사우디·카타르 등 중동에 쏠렸던 수주가 올해는 유럽이 주력 시장으로 부상했다. 올해 유럽 수주액은 198억1932만달러(약 29조1500억원)로 전체의 46.2%를 차지해 처음으로 지역별 1위에 올랐다. 전년 대비 6배 이상 폭증한 수치다. 업계 관계자는 “중동의 초대형 도시·인프라 사업은 여전히 전략적이지만 발주 위축과 지연 이슈가 존재하는 반면, 유럽은 원전·청정에너지·인프라 리뉴얼이 분명한 정책 수요로 등장하고 있다”며 “중동 의존도가 줄어드는 가운데 수주 기반 다변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건설사들은 연말까지 사우디 ▲네옴(NEOM) 프로젝트 ▲카타르 액화천연간스(LNG) 플랜트 추가 발주 ▲동남아 인프라 패키지 사업 등을 노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남은 기간 변수가 없다면 올해 총 해외수주 500억달러(약 73조2750억원) 돌파는 무난하다”는 전망을 낸다. 실제로 정부도 ‘수출·수주 외교지원단’ 출범을 통해 재외공관·부처·경제단체가 참여하는 민관 합동 지원 체제를 가동, 금융 접근성·정책 지원·국가 간 프로젝트 협력에 힘을 싣고 있다.'천장 뚫은 해외 수주'…낙관 일변도는 금물해외 수주 실적은 역대 최고 수준이지만, 구조적 한계와 리스크도 여전하다. 우선 올해 실적 증가분 대부분이 두코바니 원전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에 집중된 만큼, 향후 후속 대형 사업이 지연되거나 부재할 경우 성장세가 꺾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원전 효과를 제외하면 전체 수주 규모는 지난해와 큰 차이가 없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해외 사업은 고위험 구조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지정학 갈등 ▲환율·자재비 변동 ▲저가 수주 경쟁 심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 강화 등은 국내 기업 수익성에 위협 요인이다. 중동 프로젝트 감소세 역시 지속된다면 시장 다변화 속도도 예상보다 더디게 나타날 수 있다.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올해 흐름이 단순한 ‘수주 반등’이 아니라 K건설 산업의 체질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라고 해석한다. 국내 주택경기 의존도를 낮추고, 플랜트·에너지·스마트 인프라 중심의 글로벌 비즈니스모델로 전환하는 기업이 향후 업계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업계는 이제 양적 수주 확대보다 ‘수익형 해외 진출’에 방점을 찍고 있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국내 수요가 반등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해외 수주 확대가 필수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중요한 건 ‘공사 따오는 것’이 아니라 ‘돈 남기는 사업’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원전·에너지·친환경 인프라는 선진국 중심으로 발주가 꾸준해 글로벌 시장에서 구조적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전망했다.

2025.12.07 14:00

4분 소요
“센스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끝까지 생각하는 힘이다”[새로 나온 책]

The Sense : 당신도 센스가 있다“센스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느끼고, 끝까지 생각하는 힘이다.” 세계 광고계가 주목하는 크리에이티브 리더, TBWA하쿠호도 CCO 호소다 다카히로는 ‘센스’의 본질을 탐구한 책 ‘The Sense : 당신도 센스가 있다’를 통해, 논리와 감성의 균형으로 일과 삶을 다시 바라보는 방법을 제시한다.저자는 “AI와 데이터가 모든 답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감각의 언어, ‘센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번 책은 감각과 논리의 경계에서 창의성을 길러온 저자가 30년간의 현장 경험과 사유를 바탕으로 ‘센스를 단련하는 법’을 구체적 사례와 함께 풀어낸 책이다. 도요타, 소니, 유니클로, 산리오, 닌텐도 등 일본 대표 브랜드들의 크리에이티브 현장에서 그가 얻은 통찰이 살아 숨쉰다. 호소다는 말한다. “센스란 감정의 섬세함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에서 비롯된다.” 센스 있는 사람은 세상을 다르게 본다. 그들은 상식을 의심하고, 과거를 재상상하며, 데이터 대신 마음을 읽는 사람들이다. 이 책은 “센스는 감각이 아니라 훈련”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독자가 자신만의 창의적 감각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세계미래보고서 2026-2036AI의 발전은 범용 인공지능인 AGI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더 똑똑한 기계 지능의 탄생을 뜻한다.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인간을 뛰어넘는 AI 개발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이 흐름에 동참하는 중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적인 존재는 인간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AI를 만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세계미래보고서 2026-2036’은 이미 시작된 AGI가 미래 지도를 어떻게 그려나갈지를 미리 보여준다. AGI의 출현과 로봇의 급증, 기술 실업률 증가와 노동의 위기, 기본소득 사회와 무료 주택 시대, 대학의 종말, 기후 목표 사망, 전 세계 1시간 이동권 시대, 의식주 변화까지 AGI가 일상이 되는 시대를 담았다. 동시에 인간을 뛰어넘는 기계 지능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물론 인간다움을 지키며 AGI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질문을 던진다. 퀀텀의 시대양자역학과 양자컴퓨터의 탄탄한 입문서로 자리매김한 ‘퀀텀의 세계’ 이순칠 교수가 신작 ‘퀀텀의 시대’로 돌아왔다. 이순칠 교수는 첫 책을 출간한 뒤 ‘그래서 어떤 방식의 양자컴퓨터가 최종 승자인가요?’라는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 이 책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서 양자기술이 가져올 미래의 변혁과 이를 선도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다양한 양자컴퓨터기술의 강점과 약점, 실용화 요건을 깊은 통찰로 이해하기 쉽고 현실감 있게 담아냈다.양자물리의 등장은 인류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학문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저자는 이를 문명의 첫 번째 퀀텀 점프, 즉 비약적 도약으로 보는 한편, 양자물리를 응용한 양자기술이 경제와 산업 전반에 변혁을 몰고 와 문명의 두 번째 퀀텀 점프를 이룩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대한민국 양자정보 1세대 연구자이자 최근까지 한국연구재단 양자기술단장을 맡으며 늘 양자컴퓨터 개발의 중심에 있던 저자는 남다른 통찰력으로 양자물리의 과거와 미래를 관통함으로써 현재의 양자기술 수준을 짚어내고 우리의 대처까지 제시한다. 한층 가까이 다가온 변혁의 문턱에서 이 책은 양자기술의 흐름을 읽어내는 눈을 길러줄 것이다. 하버드 문과생의 과학 수업하버드는 왜 문학과 철학, 정치와 경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칠까? 하버드대학교 학부 교육의 핵심은 ‘교양’이다. 다시 말해 폭넓은 교양 교육으로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 같은 취지로 과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해 개설한 과학 입문 강좌를 ‘하버드 문과생의 과학 수업’에 옮겨 담았다.샤피로 교수는 과학이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배울수록 더 많이 질문하게 된다고 말한다. 질문이 탐구로 이어져 이해에 이르며 또 다른 질문으로 더 멀리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버드 문과생의 과학 수업’을 통해 질문에서 시작해 자연을 바라보는 인류의 관점을 뒤바꾼 중요한 과학적 발견들을 살펴보며, 그 발견들이 또 어떤 새로운 질문들로 확장됐는지 확인해 보자.

2025.12.07 13:00

3분 소요
2028 대입 내신·수능 동시 개편… 새 판 마주하는 고1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8학년도 대입부터 학교 내신과 수능 제도가 전면 개편된다. 적용 대상은 현재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로, 이들은 새로운 평가 체계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달라지는 대입, 첫 타자는 고1현재 고1 학생들은 1학기 내신을 마무리한 상태다. 내신 체계는 기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전환됐다. 또한 2028학년도 수능에서는 문·이과 통합 체제가 도입되며 사회탐구·과학탐구 2과목을 모두 응시해야 한다. 두 과목의 문항 수는 기존 20문항에서 25문항으로 늘어나고, 배점 역시 2·3점 체계에서 1.5·2·2.5점으로 변경된다. 현 고1 학생들은 올해 3·6·9·10월 총 네 차례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렀다. 이 중 6·9·10월 시험에서 개편된 2028 수능 방식이 적용됐다. 3월 시험은 중학교 범위 기반 평가였고, 사탐·과탐은 기존 절대평가로 진행됐다.내신 5등급제를 처음 적용받는 현 고1의 1학기 성적 분포는 교육계의 높은 관심을 모았다. 서울 지역 고교를 기준으로 전 과목 1등급을 받은 학생 수는 9등급제 대비 약 10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고의 경우 전체 학생 중 약 2%가 전 과목 1등급이었고, 자사고는 약 1.4%, 특목고는 약 0.4% 수준으로 확인됐다.학교알리미 공개 자료에 따르면, 올해 고1 학생들의 학교 내신에서 통상 90점 이상에 해당하는 A등급 비율은 일반고 기준 국어 23.0%·수학 21.4%·영어 24.5%·사회 25.9%·과학 23.7%로 주요 5개 교과 모두 20%를 넘겼다.특목·자사고는 일반고보다 A등급 비율이 훨씬 높다. 국어 53.2%·수학 44.7%·영어 47.4%·사회 46.3%·과학 50.6%로 일반고 대비 대략 두 배 수준을 보였다.그러나 수능 모의고사 성격의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는 내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국어의 경우 90점 이상 비율은 3월 1.2%·6월 2.1%·9월 0.8%·10월 4.7%에 불과했다. 80점대 비율도 3월 5.8%·6월 5.9%·9월 4.1%·10월 9.3% 수준이었다.수학 역시 난도가 높게 나타났다. 90점 이상 비율은 3월 1.2%·6월 1.1%·9월 1.1%·10월 3.2%였다. 80점대는 3월 3.5%·6월 4.1%·9월 5.2%·10월 5.0%로 집계됐다.과학탐구는 50점 만점 기준 45점 이상 비율이 6월 6.9%·9월 10.8%·10월 8.7%로 나타났다. 중학교 범위였던 3월 절대평가에서는 40점 이상 비율이 4.1%였다. 당시 절대평가 등급 기준은 1등급 40점 이상, 2등급 35점 이상 등 5점 단위 9등급 체계였다.사회탐구는 45점 이상 비율이 6월 10.1%·9월 6.9%·10월 3.2%로 확인됐다. 절대평가로 시행된 3월에는 40점 이상 비율이 16.6%였다.영어는 90점 이상인 1등급 비율이 3월 8.0%·6월 13.5%·9월 6.2%·10월 10.6%였다. 80점대 2등급은 3월 10.3%·6월 12.2%·9월 8.5%·10월 13.9%로 나타났다.2025학년도 서울권 대학 학생부교과전형 평균 합격선은 인문계 2.58등급, 자연계 2.08등급이었다. 이를 새 5등급제로 환산하면 인문은 약 1.6등급, 자연은 약 1.4등급 수준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금년도 입시 결과는 인문 3.05등급, 자연 2.71등급으로, 5등급제로 환산 시 두 계열 모두 1.8등급으로 추정된다. 내신 성적, 수능 모의평가 사이 괴리도고1 학생들은 중간·기말고사 성적과 수능 모의평가의 체감 난도 사이에서 상당한 괴리를 경험하고 있다. 이는 각 고교 유형 간 내신 최상위권 비율에서도 뚜렷한 차이로 나타나며, 이러한 격차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문제는 1학기 종료 시점에서 내신 등급이 목표 대학 입시에 불리하게 형성된 학생들의 대응이 학교마다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내신 등급은 개인 실력뿐 아니라 소속 학교의 학생 수와 구조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 고1이 끝난 시점에서 이미 내신으로 목표 대학 접근이 사실상 어려워진 학생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단순히 학생 개인에게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라’고 조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신과 수능 간 평가 구조의 격차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학교 차원에서 내신 출제와 평가의 적정성, 수능 대비 전략 등을 고1 단계부터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고교학점제 운영과 수능 준비 과정, 평가 결과 등 주요 정보를 학부모에게 적극적으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 현 고1은 내신과 수능 모두 기존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입시 경로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학년이기 때문에 어느 한 요소만을 자신 있게 강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2025.12.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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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보상의 함정…형식적 도입은 ‘그린워싱’ 일 뿐 [대신경제연구소 ESG인사이트]

ESG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이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선진국 기업들은 이미 임원 보상에 ESG 지표 한두 개를 반영하는 단계를 넘어섰다. 유럽 주요 기업의 40% 가량이 ESG 평가·보상 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애플을 비롯한 미국 기업들도 임원 성과급에 환경·사회 목표를 연계하는 것이 보편화됐다. 이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명확하다. ESG 투자가 영업 및 재무 성과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실제로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업이 자신의 산업에서 중요한 ESG 이슈에 집중할 때 장기 주가 성과가 유의미하게 개선된다. 유니레버가 2010년대 신흥국 시장에서 경쟁자들보다 월등히 높은 매출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사적으로 추진됐던 지속가능성 제고 전략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한국은 어떠한가. 국내 시가총액 상위 250개 기업 중 ESG 지표를 임원 보수에 반영하는 기업은 겨우 27곳, 10.8%에 불과하다. 일부 선도 기업들이 2019년부터 최고경영자(CEO) 평가에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는 시도가 있지만, 이는 소수의 예외에 가깝다. 한국 기업들은 ESG 보상 체계 도입에서 선진국 대비 최소 5~10년은 뒤처져 있다.선진국의 형식적 도입, 그 실패의 교훈그렇다면 뒤늦게 출발하는 한국 기업들은 서둘러 선진국을 따라가기만 하면 될까? 흥미롭게도 먼저 출발한 유럽과 북미 기업들의 경험은 정반대의 교훈을 전한다. ‘빠르게 도입’하는 것보다 ‘제대로 설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일 튀빙겐대학 연구진이 유럽 대형 상장기업 73개사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ESG 지표를 도입한 기업은 많지만 그 지표가 임원 보수 총액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명확히 규정된 ESG 지표의 평균 가중치는 5%에 불과했고, ESG 지표 달성 여부는 전체 임원 보수 총액 변화의 1%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ESG 보상이 진정한 인센티브가 아닌 ‘그린워싱’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결국 문제의 핵심은 ‘형식적 도입’에 있다. 많은 기업들이 ESG 목표를 설정했지만, 그 목표는 처음부터 쉽게 달성 가능한 수준으로 설정됐다. 연구에 따르면 ESG 지표의 수나 가중치가 높을수록 오히려 목표 달성률의 변동성이 낮아지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경영진이 항상 거의 100%에 가까운 목표 달성률을 보장받도록 설계됐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북미에서는 ESG 성과급 지급률이 재무 성과급보다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ESG 목표가 훨씬 느슨하게 설정됐기 때문이다.또 다른 문제는 재량적 평가의 남용이다. 많은 기업이 ESG 목표 달성 여부를 이사회나 보상위원회가 연말에 재량으로 판단하도록 했다. 재량적 평가는 측정이 어려운 ESG 성과의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문제는 그 재량권이 한쪽으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재무 실적이 좋을 때는 재량적 ESG 보상이 추가로 지급되지만, 환경 사고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보상을 삭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임원에게는 ‘추가 혜택’만 있고 ‘책임’은 없는 비대칭적 구조가 고착된 것이다. 이러한 선진국의 시행착오는 한국 기업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ESG 보상을 도입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처음부터 다르게 설계해야 하는가?韓 기업이 달리 출발해야 하는 지점늦게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기회다. 한국 기업들은 선진국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처음부터 실질적인 ESG 보상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것은 ‘의미 있는 가중치’다. 5% 미만의 가중치로는 임원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없다. ESG가 진정한 인센티브로 작동하려면 최소 10~15% 이상, 환경 리스크가 높은 제조업이나 화학·에너지 업종의 경우 20% 이상의 가중치를 부여해야 한다. 둘째, 목표의 엄격성이다. ‘지속가능경영 강화’ 같은 모호한 목표는 무용지물이다. ▲탄소 배출량 전년 대비 12% 감축 ▲중대재해 제로 달성 ▲여성 임원 비율 30% 달성처럼 명확하고 측정 가능한 지표를 사용해야 한다. 목표 수준도 재무 목표만큼 도전적으로 설정해야 한다. 달성률이 항상 90% 이상이라면,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확정 지급’에 가깝다.세 번째는 책임의 대칭성이다. 재량적 평가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투명성을 극대화해야 한다. 평가 기준과 결과를 공개하고, 무엇보다도 부정적 ESG 사건 발생 시 확실한 페널티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 환경 사고·중대재해·인권 침해 등이 발생했을 때 이미 지급된 보상을 환수하거나 향후 보상을 삭감하는 메커니즘을 명문화해야 한다. 보상은 양방향이어야 한다.넷째, 맞춤형 설계가 필요하다. 임원의 책임 범위에 맞춰 생산 부문 책임자에게는 탄소 배출과 안전 지표를, 인사 책임자에게는 다양성 지표를, 구매 책임자에게는 공급망 ESG 지표를 연계하는 식이다. 모든 임원에게 동일한 지표를 부여하는 것은 책임 소재를 흐리고 효과를 반감시킨다.한국 기업들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선진국처럼 형식적으로 ESG 보상을 도입해 10년 뒤 다시 재설계하는 우회로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제도를 구축하는 지름길을 택할 것인가. ESG 보상은 ‘녹색 페인트칠’이 아닌 ‘경영 엔진의 핵심 부품’이 돼야 한다. 늦게 시작하는 만큼, 더 제대로 시작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2025.12.0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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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A를 서울 대표 국제미술관으로”…최은주 관장 취임 3년 차 포부 [이코노 인터뷰]

유통

“서울시립미술관(SeMA)을 관광객이 꼭 방문해야 할 서울의 명소 중 하나로 만들고 싶습니다.”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이 최근 를 만나 “SeMA를 ‘서울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미술관’으로 만들겠다”며 “SeMA의 대표성·상징성·정체성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게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기획력, 남이 하지 않은 이야기서 나와”SeMA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획력’이 중요하다는 게 최 관장의 생각이다. 올해 취임 3년차을 맞은 그는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미술관은 풍부한 문화적 자원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대한민국은 미술관의 역사가 짧아 기획력에 더 기대야 한다”며 “남이 하지 않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SeMA의 학예사(큐레이터)에게 항상 “남이 하지 않는 걸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는 그는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영역을 빠르게 포착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최 관장은 지난 2023년 취임 직후부터 ‘SeMA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자체 콘텐츠를 늘리는 데 집중해 왔다. 그는 해외 소장품을 그대로 가져와 보여주는 대신 여러 해외 기관과 함께 전시와 프로그램 등을 개발·기획·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공동 기획 전시의 대표적인 사례로 최 관장은 지난 2023년 열린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국내 첫 대규모 개인전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를 꼽았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과 SeMA가 공동 주최한 에드워드 호퍼 전(展)은 기획 단계부터 휘트니 미술관과 SeMA의 큐레이터가 함께 참여해 약 3년간 준비한 대형 전시다. SeMA에 따르면 4개월의 전시 기간 동안 에드워드 호퍼 전을 찾은 관람객은 약 33만명으로 집계됐다. 지난 2019년 37만명이 방문한 ‘데이비드 호크니’ 전에 이은 최대 규모다. SeMA는 ▲아시아·태평양(2023년) ▲중동·중앙아시아(2024년) ▲동유럽(2025년) 등으로 국제교류 권역을 늘리며 비서구 지역과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넓히는 중이다.지난 5월에는 아부다비의 예술 지구인 마나라트 알 사디야트(Manarat Al Saadiyat) 섬에서 아부다비음악예술재단(ADMAF)과 공동 기획 전시 ‘Layered Medium: We Are in Open Circuits’를 열었다. SeMA 소장품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60여년 간의 한국 동시대 미술의 전개 과정을 조명한 전시다. 백남준·김구림·박현기 등 총 29명이 참여했고, 전시 작품 수는 48점에 이른다. 걸프협력회의(GCC) 지역에서 개최된 한국 동시대 미술품 전시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다.최 관장은 “해당 전시는 아부다비에서 열린 국제전 중 가장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면서 “오는 12월 16일부터는 SeMA 서소문본관에서 아랍에미리트의 동시대 미술을 조명하는 ‘근접한 세계’ 전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다. ‘네트워크형 미술관’ 구축…8개 본·분관 체제 완성최 관장은 국제교류뿐 아니라 서울 시민이 서울 곳곳에서 SeMA를 통해 동시대 미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형 미술관’ 체제를 완성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현재 SeMA는 서소문 본관을 중심으로 서울 전역에서 ▲북서울미술관 ▲남서울미술관 ▲사진미술관 ▲미술아카이브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등 7개관을 운영 중이다.최 관장은 “지난 5월 문을 연 ‘사진미술관’에 이어 내년 ‘서서울미술관’이 개관하면 총 8개의 본·분관 체제를 완성하게 된다”며 “이런 미술관 구조는 한국에서도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은 사례”라고 설명했다.내년 SeMA는 의제에 충실한 전시를 준비하며 서서울미술관 개관에 집중할 계획이다. 현재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으나 현존하는 세계적 거장의 전시도 기획 중이다.최 관장은 “내년 서울 최초의 뉴미디어 특화 미술관인 서서울미술관을 올해 개관한 사진미술관처럼 원활하게 운영하는 일이 가장 큰 목표”라면서 “우선 개관 전시를 잘 준비하는 데 중점을 둘 예정”이라고 밝혔다.재임 중 꼭 기획하고 싶은 전시를 묻자 최 관장은 “지난해 서소문 본관과 북서울미술관, 남서울미술관, 미술아카이브 등 네 개 분관에서 선보인 대규모 소장품 기획전 ‘SeMA 옴니버스’ 전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며 “SeMA 옴니버스 전을 보완해 1만점에 달하는 SeMA의 소장품으로 한국의 현대미술을 제대로 알리는 전시를 열고 싶다”고 답했다.그는 “최근 해외에서 한국의 위상이 많이 높아지며 한국 현대미술의 정수를 보여줄 대규모 기획 전시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면서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전’처럼 SeMA의 이름을 내건 전시로 해외 순회까지 하는 게 꿈”이라고 덧붙였다.최 관장은 “뉴욕의 뉴욕현대미술관(MoMA), 런던의 테이트 모던,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퐁피두 센터 등처럼 ‘서울=SeMA’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며 “SeMA가 독보적인 현대미술관으로 성장해 서울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2025.12.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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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완 우리은행장, 취임 1년만 회장 후보까지…‘두 번째 시험대’에 서다[CEO열전]②

은행

은행장 취임 1년 만에 우리금융 회장 후보까지 이름을 올린 정진완 우리은행장은 위기 속에서 체질개선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정 행장은 취임 후 금고 관리부터 전사적 내부통제 시스템까지 손보며 조직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법인의 금융사고는 우리은행 글로벌 사업의 취약한 고리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드러냈다. ‘초고속 승진’의 상징으로 불리는 정 행장은 취임 2년차를 앞두고 두 번째 실력 검증대에 서게 됐다.금고부터 시스템까지 손봤지만…‘불안요소’ 여전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2일 우리금융지주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는 차기 회장 최종 압축 후보군(숏리스트)으로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정진완 우리은행장·외부 후보 2명 등 총 4명을 추렸다. 정 행장이 은행장을 맡은 지 1년 만에 회장 후보까지 오르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그는 중소기업그룹 부행장으로 승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은행장으로 발탁된 전력이 있어 ‘초고속 승진’의 대표 사례로 꼽혀왔다.정 행장이 취임하던 당시 우리은행은 전임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의 친인척 부당대출 사태로 어수선했다. 내부통제 부실이 반복적으로 지적됐고 조직 전반에 신뢰 회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는 취임 직후 내부통제 강화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정 행장은 취임사에서 “(형식적이 아닌) ‘진짜 내부통제’가 되어야만 신뢰가 두터워질 수 있다”며 “직원들이 불필요한 업무는 줄이고 고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간과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시스템과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정 행장은 가장 먼저 영업 현장의 금고 관리부터 직접 손봤다. 이에 따라 지점장이 매월 첫 영업일에는 금고를 열고, 마지막 영업일에는 금고를 닫는 데 함께한다. 지점장이 ▲금고 개·폐문 ▲잠금장치 이상 유무 ▲금고 내부 관리 상태 등을 직접 점검해 단순 실수부터 시재 사고까지 예방하도록 했다. 또한 전사적 통제 체계도 대폭 손질했다. 자금세탁방지센터(AML)와 여신감리부를 본부급으로 격상해 여신심사·AML·감독 기능이 상호 견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정보보호본부와 자금세탁방지본부를 준법감시인(부행장) 산하로 통합해 내부통제·IT보안·AML 기능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도록 시스템도 재편했다.올해 2월에는 은행권 최초로 시나리오 기반 부정거래 검사(FDS) 시스템도 도입했다. 시스템 마련을 위해 대출 취급 시 연소득 허위 입력·허위 자금용도 증빙자료 제출·고객 몰래 예금 해지 후 편취 등 사고 사례나 취약 유형에 대해 데이터를 분석했다. 이를 기반으로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담당 검사역에 알림을 보내 즉시 검사에 착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내부통제 체계가 아직 완성됐다고 보긴 어렵다. 글로벌 사업 부문에서의 사고까지 막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은행은 지난 11월 6일 인도네시아 현지 법인인 우리소다라은행에서 약 17억원 규모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고 공시했다. 자체 감사 결과 현지 직원이 대출 서류를 부정 취급한 사실이 확인됐고, 은행은 해당 직원을 직무에서 배제한 뒤 현지 법령에 따라 사법 처리를 의뢰할 계획이다. 우리은행은 앞서 6월에도 우리소다라은행에서 1078억원 규모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고 공시한 바 있다. 3분기 누적 글로벌 법인 순익 ‘뚝’…내실경영 중점해외 법인에서 발생한 사고들은 글로벌 실적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줬다. 올해 3분기 누적 기준 우리은행 해외법인 순손익은 68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5.6%나 줄었다. 미국·베트남·캄보디아 등은 호조를 보였지만 중국·인도네시아 법인의 부진이 전체 실적을 끌어내렸다.우리소다라은행의 경우 올해 3분기 말 529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지난해 460억원 흑자에서 한 해 만에 적자로 돌아섰다. 이는 인도네시아법인 금융사고에 따른 여파다. 사고금액은 미정으로 원금 회수 및 현지 금융당국 조사가 진행 중이다. 우리은행은 종합감사 등을 통해 사고방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같은 기간 중국우리은행 역시 작년 176억원 흑자에서 올해 95억원 적자로 전환했다. 중국의 부동산 경기둔화 및 내수침체에 따른 개인·기업의 소득 감소가 실적 부진의 원인이다. 반면 미국 법인 우리아메리카는 작년 254억원에서 올해 366억원으로 실적이 43.8% 개선됐다. 미국 법인은 대출금이 전년 말 대비 약 2억불 증가했으며, 현지 진출 한국계 우량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계 고객 대상 리테일 영업을 확대하고, 비대면 채널을 구축해 접점을 늘리고 있다. 베트남우리은행 또한 비대면 영업 강화로 순손익이 519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24.3% 성장했다.정 행장은 남은 임기 동안 글로벌 부문의 정상화와 체질 개선에 주력해야 한다. 우리은행은 앞으로 글로벌 부문 리스크 관리 및 건전성 강화를 핵심 과제로 삼고, 내부통제 강화를 통한 내실경영에 주안점을 둘 예정이다. 또한 디지털 기반의 비대면 영업 강화와 수익성 증대를 위한 신사업을 지속 발굴한다는 복안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동남아 지원체계 강화 및 현장지원을 위한 조직을 예전부터 검토해오고 있었고 7월 초 동남아성장센터 설립 추진팀이 구성됐다”며 “우리은행은 동남아 3대 법인의 순이익을 끌어올리기 위해 올해 ‘동남아성장센터’를 출범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2025.12.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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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엔진’ 영주, 철도 도시의 새로운 실험[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앞선 여정에서 봉화가 태고의 자연으로 치유를 건네고, 안동이 유구한 전통으로 정신을 압도했다면, 소백산맥을 넘어 마주한 영주는 사뭇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이곳은 ‘속도’와 ‘직선’의 도시다. 1942년 개통된 중앙선 철도는 고요했던 농촌 마을 영주에 근대라는 엔진을 이식했다.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을 위해 깔린 차가운 쇠길이었지만, 해방 이후 그 길은 산업화의 동맥이 돼 영주를 경북 북부 내륙의 물류 심장부(Logistics Hub)로 재편했다.영주역을 정점으로 사방으로 뻗는 도로망과 철도 관사(官舍)를 중심으로 구획된 주거지는 자연 발생적인 촌락이 아닌, 철도 중심 계획도시의 전형적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도시의 흥망은 인프라의 수명과 궤를 같이한다. 석탄 산업 합리화와 고속도로 중심의 국토 개발은 철도 도시에 가혹한 구조 조정을 강요했다. 여기에 인구구조 변화와 광역도시 중심의 성장 전략이 겹치면서 쇠퇴 압력이 커졌다. 2024년 초, 영주시 인구가 심리적 저지선인 ‘10만 명’ 아래로 붕괴된 사건은 단순한 숫자의 감소가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도시를 지탱해온 성장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리는 구조적 경고음이다.2021년 KTX-이음 개통으로 수도권 접근성이 1시간 40분대로 획기적으로 개선됐으나, KTX 개통과 별개로 인구 감소, 소비 패턴 변화 등과 맞물려 대학로 상권 공실이 늘고 있는데, 이는 고속철 개통 시 지적되는 빨대 효과(Straw Effect) 우려와도 맞닿아 있다 이제 영주에게 필요한 것은 물리적 연결을 넘어, 사람을 머물게 하는 ‘체류의 자석(Magnetism)’을 만드는 일이다. 하드웨어 재생의 한계와 ‘모지코’의 교훈지난 10년간 영주의 도시재생은 ‘공간의 보존’에 방점을 뒀다. 후생시장, 중앙시장, 그리고 관사골로 이어지는 재생 사업은 쇠퇴한 구도심의 물리적 뼈대를 정비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점(點)이 아닌 면(面) 단위로 등록문화재를 지정한 ‘근대역사문화거리’ 전략은 도시의 맥락(Context)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하드웨어 중심의 재생은 ‘지속 가능성’이라는 난제에 부딪혔다. 잘 지어진 건물도 콘텐츠가 없으면 유령 공간이 된다. 인근 안동이 고택 리조트로, 단양이 레저로 체류형 관광을 선점하는 동안, 영주는 대규모 인프라 확충에도 불구하고, 체류 시간이 길어지는 체험·숙박 콘텐츠는 여전히 더 보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잠시 일본 기타큐슈의 ‘모지코(Mojiko) 레트로’사례를 살펴보자. 이곳은 영주에 유의미한 벤치마킹 대상이다. 모지코 역시 석탄과 물류 기능 상실로 쇠락했으나, 붉은 벽돌의 근대 건축물을 현대적 감각의 F&B와 야간 관광 콘텐츠로 재해석하여 연간 200만 명이 찾는 명소로 부활했다. 핵심은 ‘과거의 박제’가 아닌 ‘현재적 활용’이다. 영주의 관사골 적산가옥과 풍국정미소 같은 산업 유산 역시 단순 관람용이 아닌, MZ세대가 소비하고 머물 수 있는 힙(Hip)한 상업 공간이나 스테이(Stay) 모델로 과감히 전환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로컬 스타트업이 쏘아 올린 희망다행스러운 점은 최근 영주에서 감지되는 변화의 기류가 과거의 관(官) 주도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민간 기업과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바텀업(Bottom-up) 생태계가 싹트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주시와 SK스페셜티, 임팩트 투자사가 협력한 ‘STAXX(스택스) 프로젝트’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단순 기부를 넘어 지역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공유가치창출(CSV) 모델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빈집 재생 노하우를 이식해 공유 주거를 만드는 ‘블랭크(Blank)’, 영주의 풍부한 소나무 자원을 뷰티 제품으로 고부가가치화 한 ‘피노젠’, 지역 농산물로 새로운 F&B 문화를 만드는 ‘리쿼스퀘어’등 혁신적인 소셜벤처들이 영주에 둥지를 틀었다.이들 청년 창업가들은 영주를 ‘소멸 위기 지역’이 아닌 ‘기회의 땅’으로 재정의한다. 수도권의 살인적인 비용과 경쟁에서 벗어나, 지역 고유의 자원(Local Heritage)을 비즈니스 모델로 연결할 수 있는 최적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인구 10만 붕괴를 넘어, ‘강소(强小) 도시’로의 체질 개선인구 10만 명 붕괴는 충격적인 지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도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절대 인구수의 감소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활동 인구’와 ‘창조 계층’의 소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영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타트업들의 도전은 도시의 체질을 바꾸는 중요한 변곡점이다. 봉화의 자연이 쉼을 주고, 안동의 정신이 뿌리를 확인시켜 준다면, 영주의 실험은 지방 도시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생존법’을 제시한다. 과거 영주를 움직인 동력이 증기기관차였다면, 미래의 동력은 골목길 곳곳에서 혁신을 실험하는 로컬 크리에이터들이다.도시재생은 끝이 없는 과정(Process)이다. 관사골 할머니들이 운영하는 ‘할매 묵공장’의 온기가 구세대 주민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버팀목이라면, ‘스택스’를 통해 유입된 청년들은 도시에 새로운 혈류를 공급하는 펌프와 같다. 신구(新舊) 세대의 이러한 공존과 협업이야말로 지방 도시가 소멸의 파고를 넘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대안이다.영주는 지금 쇠퇴가 아닌 ‘축소 균형’을 향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100년 전 기찻길이 도시를 낳았듯, 이제는 혁신적인 로컬 비즈니스가 영주의 다음 100년을 견인할 것이다. 위기 속에서도 움트고 있는 이 작은 변화의 싹들을 주목하고 응원해야 할 이유다.영주의 철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륙의 물자가 모이던 이 거대한 결절점(Node)을 지나, 이제 그 맥박이 닿았던 바다의 끝으로 향한다. 기찻길이 실어 나른 근대의 애환이 가장 짙게 남아있는 항구, 다음 여정은 ‘군산’이다.(다음에 계속)

2025.12.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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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 때마다 사과·과징금·소송 포기…반복되는 악순환 [쿠팡도 뚫렸다]③

산업 일반

올해 1~8월 민간기업이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 신고한 개인정보 유출 규모는 3038만건이다. 여기에 이번 쿠팡 개인정보 유출 3370만건을 더하면 단순 합계만 6000만건이 훌쩍 넘는다. 사실상 전 국민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셈이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업들은 사과문과 함께 1인당 수만원 수준의 배상금을 지급한다. 피해 규모 대비 처벌이 약하다는 것이 소비자들의 공통된 불만이다. 기업의 책임 구조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상황 속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500원짜리 개인정보올해의 시작은 해킹과 함께였다. 지난 1월 GS리테일은 홈페이지 해킹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고객 9만여명의 이름·아이디·연락처가 빠져나갔다. 전국 편의점·슈퍼 체인을 거느린 유통 대기업의 웹사이트 기본 보안이 뚫렸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2월에는 홈쇼핑 웹사이트에서 158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기도 했다.4월에는 SK텔레콤에서 2324만명 가입자 정보가 한꺼번에 새어 나갔다. 외부 공격자는 탈취한 계정으로 내부 시스템에 접속해 이름·휴대전화 번호·생년월일 등을 가져갔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다단계 인증 미적용, 계정 관리 부실 등을 이유로 1300억대 과징금을 부과했다. SK텔레콤의 1300억대 과징금을 유출 건수로 나누면 ‘1건당 500원 남짓’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9월에는 금융과 통신이 동시에 뚫렸다. 롯데카드에서 297만명 고객 정보가 해킹으로 유출된 데 이어, KT는 불법 중계기(‘가짜 기지국’) 장비를 통해 약 2만명 가입자 통화·문자 관련 정보가 새어 나갔다. 지난 2014년 1억건 넘게 털린 카드 3사(국민·롯데·농협) 사태를 겪은 지 10년도 안 돼 비슷한 구도가 반복된 셈이다.가상자산 시장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11월 국내 최대 거래소 업비트에서는 400억원대 암호화폐 탈취 사고가 발생했고, 당국은 계정·인증 정보 2차 피해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같은 달 27일에는 쿠팡마저 당했다. 쿠팡은 고객 3370만건 유출을 인정했다. 이름·휴대전화번호·주소·이메일 등 기본 인적 정보가 대량으로 빠져나갔다. 무엇보다 논란이 된 건 ‘인지 시차’였다. 공격 발생 후 약 5개월이 지나서야 이상 징후를 발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G마켓에서도 잡음이 발생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G마켓을 이용하던 소비자 약 60명이 본인 의사와 무관한 결제 내역이 발생했다며 금융감독원에 피해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G마켓 측은 내부망 해킹이 아닌, 외부에서 유출된 고객 정보로 인해 발생한 일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실제 사실관계를 확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징벌적 손해배상 ‘재점화’해킹사고 수습 구조는 늘 비슷하다. 사고가 터지면 정부는 조사에 착수한다. 기업은 과징금을 낸다. 피해자는 각자 소송을 한다. 과징금은 전액 국고로 들어가고, 피해 배상은 개별 소송에 나선 이들에게만 돌아간다. 대다수의 피해자는 “어차피 받아봐야 몇만원”이라는 체념 속에서 소송을 포기한다.물론 한국의 법적 테두리가 마냥 허술한 것은 아니다. 개인정보보호법은 기업이 법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면, 고의·과실이 없음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는 한 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중대한 침해의 경우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릴 수 있다는 조항도 이미 들어가 있다.행정 제재도 마련돼 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관련 매출액의 일정 비율(최대 3%)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SK텔레콤 사건에 대해 1300억대 과징금이 부과된 것도 이 조항에 근거한 조치다.카드 3사(국민·롯데·농협) 대규모 유출 사태 이후 도입된 법정손해배상 제도 덕분에, 실제 손해액 입증이 어려운 피해자도 1인당 일정 한도 내에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 제도만 놓고 보면, 한국이 ‘솜방망이 처벌 국가’로만 보이진 않는다. 문제는 이 장치들이 현실에서 얼마나 쓰이느냐다. 카드 3사 유출 사건에서 법원이 인정한 위자료는 1인당 10만원 수준이었다. 수천만명이 피해를 보았지만, 소송에 참여한 일부만 그 돈을 받았다. SK텔레콤 사건에서 분쟁조정위가 제시한 1인당 30만원 배상안은 회사가 거부했다. 이런 상황 속 매번 언급되는 것이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말 그대로 ‘실제 손해보다 더 많이 물리는 배상’이다.우리 민법의 원칙은 손해가 난 만큼만 채워 넣는 전보(塡補)배상이다. 그러나 고의·중대한 과실로 대규모 피해를 낸 경우까지 같은 잣대를 적용하면 억제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래서 특정 영역만 법원이 실제 손해액을 기준으로 2·3배, 많게는 5배까지 배상액을 부풀려 책임을 묻도록 하는 제도가 징벌적 손해배상이다.문제는 실효성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개인정보보호법상 징벌적 손해배상이 실제 판결에서 인정된 사례는 지금까지 사실상 없다. 이정렬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난 2일 국회 질의에서 “지난 10년간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으로 인정된 사건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그간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이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쌓여왔다. 쿠팡 대규모 유출 이후 청와대와 이재명 대통령까지 이 조항을 직접 입 밖에 낸 것도 이런 맥락이다. 특히 이 대통령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이고 실효적인 대책 마련하라"고 주문했다.전문가들은 징벌적 손해배상을 두고 ‘손해액 입증’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지목했다. 개인정보 유출로 인한 손해액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하는데, 이 부분을 개개인이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송태원 법무법인 해광 변호사는 “한국에도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 자체는 있지만, 실제 재판에서 제대로 적용된 사례는 거의 없다"며 "개인정보보호법처럼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인정할 수 있는 조항이 있어도, 법원이 적극적으로 쓰지 않으니 사실상 ‘명목 규정’에 그치는 셈”이라고 말했다.이어 “실제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여러 요건을 모두 충족한 뒤 손해액을 구체적으로 입증해야한다”며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거나 카드가 도용되는 식의 2차 피해가 명백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지 않고, 권리구제는 결국 재판부가 얼마나 손해액 입증을 폭넓게 인정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덧붙였다.

2025.12.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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