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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앞으로 수출 해 보시오”

박정희 “앞으로 수출 해 보시오”

▶1961년 9월 박정희 의장이 예고도 없이 수원의 선경직물 공장을 방문했다.

1961년 9월 수원의 선경직물 공장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일행이 들이닥쳤다. 공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박정희는 “앞으로는 수출을 해보도록 하시오”라는 조언을 했고, 이 한마디에 최종건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불과 7개월 후 그는 한국을 ‘직물 수출국’ 대열에 올려놓았다.
195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직물업계는 서서히 그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면직 계통으로는 금성방직·대한방직·경성방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모직분야에서는 제일모직·태평방적이 쌍벽을 이뤘다. 견직에서는 선경직물을 비롯해 심도직물·이화직물 등이 군웅 할거했다. 그중에 심도직물이 가장 큰 회사였다. 그러나 심도 역시 면직이나 모직 회사에 비하면 덩치가 미미했다. 견직물의 수요가 면직이나 모직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인조견 안감만 만드는 선경직물의 규모야 견줄 것이 못 됐다. 이를 일시에 만회해준 것이 ‘봉황새 이불감’이었다. 58년 선보인 봉황새 이불감의 큰 성공으로 선경은 여유자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최종건은 기다렸다는 듯 설비 확장에 나선다. 4만5000달러의 산업은행 지원 자금을 신청해 염색가공 설비까지 갖췄다. 그해 11월엔 나일론 생산을 선언한다. 한국전쟁 때 한국에 처음 선보였던 나일론은 이후 10년이 넘도록 ‘금값’으로 거래됐다. 질기고 부드러운 데다 세탁도 간편해 주부들의 인기를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나일론 생산은 곧 노다지를 캐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일론 원사를 구하는 일부터 막막했다. 당시만 해도 정부가 대일 구매 금지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수입이 곤란했다. 그래서 최종건은 미국의 섬유회사인 비스코스 한국대리점을 맡고 있던 김병세 사장을 찾아갔다. “비스코스에서 레이온 들여올 때 나일론 원사 몇 고리만 같이 들여올 수 있을까?”(최종건) “글쎄. 쉽지 않을 거야.” 최종건은 “그까짓 나일론 원사 몇 고리 가지고 무슨 본사 승낙이냐”며 김병세를 설득했다. 어렵사리 나일론 원사를 구했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실에 윤활유를 발라 보라구” 모든 직물은 씨실(가로 실)과 날실(세로 실)이 엮인다. 나일론을 직조하다 보니 날실이 끊어지거나 실밥이 일어나는 일이 잦았다. 나일론 원사에 묻은 풀이 제대로 마르지 않아 서로 달라붙거나 정전기까지 발생하는 것이었다. 궁즉통(窮則通)이라고, 습기가 정전기를 방지한다는 말을 듣고 직기 바닥에 거적을 깔고 물을 흥건히 적신 다음 그 위에 숯불을 피웠다. 이렇게 숯불을 피우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태피터(Taffeta·광택이 있는 얇은 견직물로 ‘호박단’으로 불림)’를 생산했는데 시장에서는 무섭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거적이 썩어 버섯이 필 정도였으니 작업 환경은 말이 아니었다. 악취가 풍겨 여공들이 일하기에도 불편했다. 아교풀을 먹여봤지만 소용없었다. 미국과 일본 회사에 문의해봤지만 답장이 없었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없을까?’ 최종건은 김용산 극동건설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때 마산에서 만나 막역하게 지내던 당대의 호걸이자, 불세출의 사업가였다. 이 무렵 극동은 대동공업·중앙산업·삼부토건·대림산업과 함께 전후 한국 건설업계를 주름잡던 ‘5인조’의 한 멤버였다. 김용산은 우남회관(전 서울시민회관) 공사를 맡으면서 건설자재 구입차 사흘이 멀다 하고 일본에 다녀오던 때였다. 며칠 후 김용산한테서 연락이 왔다. “알아봤어?”(최종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그냥은 안 돼.” “(크게 웃으며)그래. 술 살게.” 바로 술자리로 옮겼다. 술이 몇 순배 돌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최종건의 가슴은 바짝 타들어갔다. 거나하게 술이 들어가서야 김용산이 입을 열었다. “실은 딱 한마디다. 실에다 윤활유를 발라보라구.” “뭐 윤활유?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않구.” 김용산이 얻어낸 정보는 정확했다. 나일론 원사에 풀을 먹일 때 실에 윤활유를 바르는 한 단계를 거치면 깔끔히 해결되는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선경직물에선 거적과 숯불이 사라졌다. 이듬해 3월 최종건은 일본에서 사이징(sizing) 기계(실에 풀을 먹이는 설비)를 사들여 나일론 생산을 대폭 늘린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합섬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정치 문제가 갈 길 바쁜 선경의 발목을 잡았다. 한·일 간 재일동포 북송 문제를 놓고 외교 분쟁이 벌어진 것. 59년 6월 11일 북한과 일본 적십자사 간 재일동포 북송 계획이 합의되자, 한국 정부는 15일을 기해 모든 대일 통상을 중단한다고 발표한다. 하루아침에 원사 수입처가 막혀버린 것이다. 여름철 비수기까지 겹쳐 선경직물은 벼랑 끝에 몰린 셈이 됐다. 잘나가던 봉황새 이불감마저 재고로 쌓였다. 회사의 안살림을 맡아보던 김영환이 “월급 줄 돈도 없다”며 달려왔다. 최종건은 고육책을 써야 했다. “재고를 풀어서라도 월급은 주세요. 옷감을 나누어 쌀이라도 사야지요.” 미국과 홍콩에서 어렵사리 원사를 구해온 것이 9월 초. ‘이제 새봄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번엔 천재지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59년 9월 16일, 태풍 사라호가 닥친 것이다. 마침 추석 연휴라 모처럼 종업원들에게 월급과 함께 보너스로 치마저고리 감을 한 벌씩 지급한 날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망자만 529명, 실종자가 304명, 이재민이 25만4000명이나 됐다. 이 엄청난 재해는 3년 연속 흉년을 가져왔고 결국 내수를 3년이나 꽁꽁 얼어붙게 했다. 여기에다 3·15 부정선거에서 4·19로, 다시 5·16으로 이어지는 정치적인 격변은 기업인들에게 헤쳐나가기 어려운 격랑이었다. 큰 시련이었지만 최종건은 끝까지 단념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5·16이 일어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권력기관으로 세를 떨쳤다. 대부분의 기업인은 부정축재 대상자로 몰렸다. 설명이 필요 없이 기업가에겐 서슬이 퍼렇던 시기였다. 다만 불행 중 다행으로 군사정부가 밀수품을 강력하게 단속해 합섬직물의 수요가 크게 늘었다. 문제는 원사를 구할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61년 9월도 마찬가지였다. 성수기는 코앞인데 원사가 없어 정상 조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정문 수위가 숨을 헐떡거리며 공장 안으로 들어왔다.

▶최종건은 여유 자금이 생길 때마다 직기 도입에 열을 올렸다. 사진은 58년 무렵 새 직기를 들여놓고 있는 선경직물 직원들.



“박정희 의장 오, 오셨습니다” “사, 사장님.” “왜 숨이 넘어가고 그래.” “저어, 최, 최고회의 의장이….” “최고회의 의장이라니? 최고회의가 어쨌다는 거야.” “박정희 의장이 오, 오셨습니다.” “뭐야?” 최종건이 자기 귀를 의심하는 찰나, 공장 건물 입구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어안이 벙벙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장 안에 군인이 도열했고, 그 가운데 선 자그마한 이가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중장 계급장이 번쩍거렸다. 분명히 신문에서 보던 박정희 의장이었다. 저절로 “어서 오십시오. 각하”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경황 중에도 허리를 숙였다. “당신이 최 사장이오.”(박정희) “네 그렇습니다만.”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공장 구경 좀 왔소.” 박정희는 어느새 공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떨결에 최종건이 따라붙었다. “공장이 깨끗하군요. 봉황새 이불감 도안이 여기서 나온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봉황새 이불감을?” “허허. 봉황새 이불감은 선경직물에서만 생산된다고 들었소만.” 박정희는 선경직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참모였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통해서였다. 최종건과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병희가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으로 있었는데, 그가 김종필에게 선경직물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다시 김종필이 박정희에게 옮겼다. “기업인들이 거의 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있으니 누가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겠는가”하면서 탄식하던 박정희가 사흘 만에 “수원에 한 번 가보자”고 한 것이다. 한참 동안 공장을 둘러보던 박정희가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앞으로 수출을 해보시오!” 다음날 박정희가 선경직물을 다녀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회사 전화기에 불이 났다. 너도나도 적극 돕겠다는 것이었다. 막혔던 자금줄이 저절로 풀렸다. 그러나 정작 새로운 불씨를 발견한 사람은 최종건이었다. 수출을 해보라는 박정희의 말에 최종건은 막힌 가슴이 확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우리도 이제 직물을 수출한다. 당장 서울 연락사무소부터 널찍한 곳으로 옮기자. 서울 사무소에 업무과를 만들고 수출 업무를 전담케 하자구.” 그 말에 간부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수출에 대해서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수출 업무를 해본 사람도 없었다. 그 일을 알지도 못하니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최종건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일사천리로 사무실을 열었다. 61년 11월 선경직물은 서울 연지동 연락사무소를 당주동 천일빌딩 5층으로 옮겼다. “그나저나 사람이 있어야지.” 소장으로 취임한 이문재가 혼잣말을 투덜대고 있는데, 최종건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큰소리를 친다. “염려하지마. 내가 봐둔 사람이 있으니까.” 마구잡이로 큰일을 벌이는 듯 보였지만 최종건은 이렇게 치밀한 데가 있었다. 최종건은 인천에서 창고와 통관업을 하던 성광공사의 김봉환을 데려왔다. 선경이 일본에서 직기를 수입할 때 통관 업무를 담당하던 그와 자주 만나던 사이였다. 그 다음엔 이토추상사에서 홍콩 무역회사 주소록을 얻어와 그중에 거래가 될 만한 곳을 골라 ‘닭표 안감’의 견본품과 함께 오퍼를 띄웠다. 한편으론 수입업자를 찾아나섰다. 처음에는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오히려 “일본산으로 둔갑시키는 게 어떻겠느냐”는 충고(?)를 듣기도 했다. “품질에 그 정도로 자신 있으면 메이드 인 재팬으로 팔아보지 그래요?” “그렇게는 못합니다. 당당하게 메이드 인 코리아로 팔 겁니다.” “외국사람 누구도 메이드 인 코리아를 거들떠보지 않을 텐데.” 이렇게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이한산업 김상수 무역부장이 서울 사무소를 두드렸다. 거래처인 홍콩 광홍공사에서 우연히 선경직물의 닭표 안감 견본을 보고 값을 흥정하러 온 것이다. 이문재가 “마(碼)당 15센트, 공정환율로 2600만환”을 불렀다. 김상수는 “너무 비싸다. 일제보다 싸게 오퍼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흥정을 해온다. 다음날 최종건은 이문재를 수원으로 불렀다. 간부회의가 소집됐고 수출 가격을 마당 11.3센트로 정했다. 생산원가가 마당 14센트니까 2.7센트씩 밑지는 장사였다. 10만 마를 판다고 하면 정부 보조금 282만5000환을 빼고도 70만환이 적자였다. 그러나 최종건은 “하자”고 결정한다. 수출 장벽을 넘는다는 데 의미를 둔 것이다. 홍콩에서 은행 신용장이 도착한 것이 62년 2월, 두 달 후인 4월 8일 홍콩에서 상품이 흡족하다는 전갈이 왔다. 한국이 비로소 ‘직물 수출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날이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한다고 했다. 최종건은 이 기세를 몰아세우고 싶었다. 그날로 “우리도 무역회사를 세운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에는 시기가 문제였다. 62년 6월 10일 통화 개혁 여파로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 안 좋던 때였다. 선경직물 역시 대금 체납으로 직기에 차압 딱지까지 붙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종건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업은 때를 놓치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문재가 “손해를 보면서 수출할 수는 없다”고 만류했지만 최종건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그해 8월 11일 깃대를 올린 선경산업은 대표이사 사장에 최종건, 이사에 최종현, 감사에 김영환으로 진용을 갖춘다. 최종현은 미국에 유학 중이었지만 나중을 대비해 미리 이사로 선임한 것이다. 그해에 선경은 4만6000달러어치의 수출 실적을 올렸다. 선경직물은 나중에 선경산업을 흡수합병한 후 76년 종합상사에 지정되면서 ㈜선경으로 거듭났고 이후 SK상사→SK글로벌→SK네트웍스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룹 확장의 토대가 된다.

“때 놓치면 다시는 기회 없다” 한편 선경이 내놓은 직물은 동대문은 물론, 해외에서도 유명세를 타게 된다. 이번에는 육영수 여사의 조용한 한마디 덕분이었다. 박정희 일행이 선경직물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일이다. 박정희는 대통령 자격으로 64년 10월 15일 ‘제1회 수원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공장을 둘러보던 육영수 여사가 나직이 말을 걸어왔다. “오는 12월에 서독에 가는데 서독 총리께 드릴 선물이 필요해요. 선경직물에서 만든 양단을 드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최고급 미색 양단을 보내드리겠습니다.”(최종건) 이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선경직물 하면 육영수 여사가 입는 옷으로 소문이 났고, 귀부인들이 찾아들었다. 선경에서 만든 미색 양단은 ‘청와대 갑사’ ‘육영수 가라’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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