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취업 혼자면 더욱 좋다
해외 취업 혼자면 더욱 좋다
국내취업이 어렵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해외로 눈을 돌린 글로벌 워킹 노마드족. 그들이야말로 당신의 미래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꿈을 이뤄가는 싱글 노마드족 7인의 삶을 소개한다. 21세기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진취적이고, 창의적이며, 도전적인 젊은이들이다. e-메일과 전화통화를 토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역사의 현장을 누비는 국제공무원 적도의 열대 왕모기는 오늘도 그녀를 공격한다. 지난 1월부터 동티모르 유엔 통합대표단(UNMIT)에서 정무담당관(Political Affairs Advisor)으로 일해온 김보람(26)씨의 팔다리엔 울퉁불퉁 ‘영광의 상처’가 아물 날 없다. “수십 명이 함께 있어도 어떻게 알고 나만 공격하는지 모르겠다.” 전기도 자주 끊기고, 급수난도 심각하다. 하지만 그 대신 노벨 평화상 수상자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동티모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과정을 지켜봤고, 21세기 최초의 신생독립국이 제 힘으로 민주선거를 치르는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다. UNMIT의 주 임무는 동티모르 현지에 파견된 각종 유엔 관련 기구의 역할 통합과 조정이다. 김씨가 일하는 정무부서는 동티모르 정부기관의 자문역할은 물론, 선거준비·치안 등의 지원 업무도 맡는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동티모르는 곧 인도네시아에 합병됐다가 유엔 감시 아래 실시된 국민투표로 2002년에야 공식 독립했다(한국도 한때 유엔평화유지군으로 상록수부대를 파견했다). 김씨는 현재 UNMIT의 민간 인력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김씨가 동티모르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고교 때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을 다룬 기사를 읽고 국제문제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관심은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국제대학원까지 진학하게 했다. 학부 때는 한일학생교류(KJSE)라는 연합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교환학생으로 미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근교 대학에서 1년을 보냈다. 대학원 때는 여성부의 국제전문 여성인력으로 선발돼 1년간 학업과 병행했다. 여성부의 지원으로 대학원 2학기 때 유엔본부 인턴으로 6개월간 뉴욕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김씨의 요즘 기상 시간은 오전 6시30분. 출근 준비를 하고, 차로 수도 딜리에 있는 UNMIT 단지에 들어서면 7시40분이다.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켜고 e-메일부터 확인한 뒤 전날 저녁 뉴욕으로 보낸 일일 상황보고서를 토대로 하루 일정을 짠다. 오전 9시쯤 정무부서 책임자와 전체 직원이 모여 회의를 한다. 정보를 공유하고, 향후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다. 점심은 12시30분에서 1시 사이. 점심은 대개 대표단 단지 내 파키스탄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3달러를 내고 먹는다. 김씨는 “6월 30일 총선 직후까진 하루 평균 12시간씩 일했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올해 4월 1차 대선 때는 정시에 투표를 시작하지 못한 투표소도 많았고, 일부 투표소에선 투표용지가 동나기도 했다. 투표소 직원의 미숙으로 실수도 많았다. 그러나 2차 대선과 6월 총선 때는 이런 점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동티모르에 파견된 국제사회 일원 모두가 뿌듯함을 느꼈다. 신생국가에선 자립 능력배양(capability building)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거 당일 한 표를 행사하려고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두세 시간을 불평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동티모르의 미래를 위한 작지만 긍정적인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녀는 밝혔다. 김씨가 뜨거운 섬나라에서 일하는 처지에 감사할 때는 형형색색의 산호초와 물고기를 보며 수영하거나, 멋진 석양을 바라보며 신선한 코코넛을 통째로 마실 때다. “직장에서 때때로 스트레스 받고 울적해질 때가 있더라도 넓고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고 김씨는 말했다. 분명 그녀는 그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다. 김씨의 현 소속은 UN Volunteer다. 그래서 월급이 아니라 활동비를 받는다. 한 달에 미화 2000달러 남짓이다. 연차휴가 말고 두 달에 열흘 정도의 휴가가 더 주어진다. UNMIT는 임무가 끝나면 해체되는 한시적인 일자리다. 그러나 UNV에 소속되면 보통 2년간 일한다. 김씨는 내년 말이나 여름까지 일할 생각이다. 2006년 스페인에서 1년여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안락한 일자리가 주어졌지만 고민 끝에 고사했다. UNV에서 일정기간 일하고 나면 다른 유엔 기구의 정식 직원으로 지원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김씨는 “앞으로 유엔 조직에서 더욱 경력을 쌓아 개발관련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유엔에 진출하고 싶은 사람은 국제기구초급전문가(JPO)뿐 아니라 UNV제도도 활용하라고 권했다. 한국인 수요는 늘 있으므로 신청 명단에 등록해 두면 어느날, 또 다른 역사의 현장에서 초대장이 날아들지 모른다(국제공무원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한국판 2006년 9월 6일자 표지 기사 참조). 프랑스에서 가는 요리사의 칼 윤화영(30)씨는 매일 칼이나 뜨거운 불과 싸운다. “어떤 직업이 아무 보호장비도 없이 200도의 기름을 만지고 칼을 쓸까?” 그 직업은 바로 파리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사다. 실제 주방의 평균기온은 겨울에 30도, 여름엔 40도를 훌쩍 넘는다. 파리의 유명 셰프(식당 경영까지 총괄하는 주방장) 피에르 갸네흐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윤씨는 “해외 취업은 해외 여행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하루 하루가 전투니까”라고 잘라 말한다. 새벽 6시 반에 일어나 14시간을 꼬박 주방에서 보내다 보니 주중에는 개인생활이 없다. 주말에나 청소, 빨래, 장보기, 관공서 방문 등을 처리한다. 좋은 숫돌을 골라 매주 두 시간씩 칼을 가는 것도 큰일이다. 그래도 보람차다. 전 직장인 파리의 고급 호텔 크리용의 셰프 프랑수아 피에주와 일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녀석을 잡아야 돼. 그 녀석은 최고야”라는 평을 들었고, 이 시대 천재 요리사로 평가 받는 그의 ‘음식 검사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또 셰프의 요리법을 수정할 권한까지 부여 받았다. “내가 만든 요리법 중 몇 가지는 지금도 손님들 식탁에 나간다.” 프랑스 요리계는 “자신의 비법을 숨기기보다는 완전히 공개함으로써 후진을 양성해 새로운 기술을 계속 개발해 나가는 풍토”라고 윤씨는 설명했다. 한국외국어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던 윤씨는 원래 사진 유학을 가려고 식당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학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요리의 매력에 반해 2000년 2월 파리로 떠났다. 우선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입학이 되는 르 코르동 블루를 1년간 다니면서 줄곧 프랑스 최고요리학교(ESCF) 진학을 준비했다. 2002년 ESCF에 입학해 수석 졸업했다. 그 덕분에 프랑스 요리계의 거물들을 만나게 됐다. 1990년대 프랑스 요리계를 좌지우지하던 조엘 호뷔숑과 많은 원로들, 호텔 플라자 아네테의 세계적 스타 셰프 알랭 뒤카스와 앞서 말한 피에주 등이 그들이다. 동세대 요리사로서는 매우 드문 이력이다. 윤씨에 따르면 프랑스 요리업계는 크게 3등급(cafe/cantine, brasserie/bistro, gastro)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엔 카페, 구내식당, 프랜차이즈 식당 등이 속하며 대부분 아르바이트제여서 구인 요청은 많다. 두 번째 부류는 축구나 야구의 마이너리그와 같다. 업무 환경이 열악해 언제나 구인 요청이 많다. 세 번째는 ‘미슐랭 스타급’ 레스토랑으로 마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같다. 엄청나게 폐쇄적이며 철저히 ‘누구 아래 있었던 누구’가 중시된다. 구직자는 많지만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 프랑스 요리사는 ‘서류상 연봉’은 좋다. 대신 사회보장 비용(노후보장 국민연금+4대 보험)으로 월급의 50% 이상이 원천 징수되고, 모든 물건에 부가세 19.6%가 붙는다. 그래도“의료비가 전액 무료고, 사교육비가 없는 사회구조여서 비록 풍족하진 않아도 나름대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 만하다”고 윤씨는 말했다. 물론 실업자가 많은 프랑스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일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프랑스의 고용계약은 크게 단기계약직(CDD)과 종신계약직(CDI)으로 나뉘는데 정년이 보장되는 CDI는 사회보장비 부담이 크기 때문에 업주 측에서 계약을 꺼린다. 윤씨는 “운 좋게도 그동안의 네 직장 모두 CDI 계약을 했다.” 많은 사람이 그가 정년을 보장 받고도 세 번이나 이직한 이유를 궁금해 한다. “요리사가 사계절을 보내고 나면 그 레스토랑의 주방을 알게 된다. 이때 ‘자리를 원하면 남고, 새로운 기술을 원하면 떠나라’는 게 내 원칙이다. 타성에 젖은 음식은 쉰 냄새가 난다.” 윤씨는 현재 프랑스 체류증(cart?de s?our)의 ‘취업자(salarie)’ 자격으로 거주한다. 프랑스 본국과 국외령에서 모두 유효하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근무가 가능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1단계는 9개월짜리 ‘임시노동직 체류증’(travailleur temporaire)으로 직장 변경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 ‘취업자’ 자격으로 바뀌면, 2단계로 ‘임시노동직 체류증’이 발급된 시(市)에서, 3단계로 도(道)에서 1년간 자유로운 전직이 가능한 체류증이 나온다. 그리고 4단계로서 프랑스 전국에서 일할 자격이 생긴다. 2003년 12월 인턴을 시작하면서 취업비자로 전환했다. 언어문제는 어떨까. “유창하고 좋은 발음보다 자기 분야의 전문어에 능숙해야 한다”고 윤씨는 말했다. “발음이 안 좋아도 말하는 내용이 좋으면 상대방이 경청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열린 자세다. ‘우리나라는 이런데, 여기는 왜 그래’라고 하기보다는 ‘아, 여기는 그렇구나’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윤화영씨에게 파리는 종착역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뉴욕이든, 서울이든, 상하이든 장소가 문제는 아니다.” 업종 특성상 직장을 옮길 때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음식 맛을 알기 전에 돈 맛을 알아 버린 요리사는 이미 요리사가 아니다.” 구글에서 키우는 야망의 첨단기술 정기현(34)씨는 얼마 전 구글 코리아의 초기화면을 ‘바꾸는’ 작업을 총지휘했다. 검색창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초기화면에 구글 대표 기능들을 색색의 이모티콘과 함께 가지런히 정렬했다. 종합 포털에 익숙한 한국 이용자를 위한 배려였다. 이 프로젝트는 구글 창업 이래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사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겼다. “구글처럼 큰 기업에서 한국시장을 겨냥한 특화된 전략을 기획하고 실행했다는 점에서 무척 뿌듯했다. 얼핏 단순한 작업처럼 보여도 기본에 충실한 구글의 정신이 이번 홈페이지 개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과정에서 ‘실직’ 위기에 몰릴 뻔했다. 수십 가지 디자인 안(案) 중 하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최종 의사결정자와 몇 주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거의 매일 부사장실을 들락거렸고, 때론 퇴근길까지 쫓아가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하루는 부사장이 “당신을 죽여버려야 하나(I may have to kill you)”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주장이 먹혀 들었고, 회사 내부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정씨는 오전 8시30분쯤이면 어김없이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 위치한 구글 본사로 출근한다. 그리곤 유기농 과일주스와 오믈렛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다. 9시까진 주로 사내 카페에서 신문 기사를 훑어본다. 오전엔 e-메일로 주요 안건을 챙기고 팀들과의 회의 일정을 점검한다. 오후 일과는 정신 없이 흘러간다(많은 사람이 구글 하면 자유스러운 환경에 예쁜 캠퍼스, 맛있는 음식만 생각하지만 “일도 열심히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주로 다른 팀을 만나 문제를 이해시키고, 조언을 구하고, 자신이 수행하는 프로젝트의 결과를 공유하며 나아갈 방향을 논의한다. 간간이 ‘테크 토크(Tech Talk)’에도 참여한다. 엔지니어링·마케팅·제품관리 분야의 석학들이 와서 강연하는 자리다. 대가들의 통찰력을 접할 기회다 보니 강연엔 빠짐없이 참석하려 애쓴다. 팀장급 제품매니저(product manager)로 한국시장을 관리하는 바쁜 와중에도 매주 금요일 오후 4시엔 어김없이 달콤한 ‘여유’가 찾아온다. 한 주간 있었던 주요 안건들을 창업자(세르게이 브린·래리 페이지)가 전 직원에게 발표하고, 카페엔 맥주와 간단한 다과가 준비된다. 직원들은 밴드 음악에 맞춰 간간이 발을 흔들거나, 황당한 질문을 창업자에게 던지는 동료를 보면서 한 주를 마무리한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92학번인 정씨는 국내에서 학·석사를 마치고 보스턴 컨설팅과 액센추어의 한국지사에 근무하다 미국으로 건너와 2006년 캘리포니아대(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재학 도중 2005년 하계 인턴십을 구글에서 했다. 당시 구글은 공식적인 인턴십 프로그램이 없었지만 하스 경영대학원의 동창 명부를 샅샅이 뒤져 모든 선후배를 접촉해가며 집요하게 인턴십을 따냈다. 그 과정에서 즐겁게 일하는 직원들과, 혁신을 장려하고 실패에 책임을 묻기보다 얼마나 배울 점을 얻었는가를 강조하는 경영진의 모습에 큰 호감을 느꼈다. 특히 ‘Don’t be evil(단기적 이익에 집착해 장기적인 브랜드 이미지와 경쟁력을 해치지 말라는 구글의 모토)’ 정책으로 사업하는 경영진의 모습에 매료됐다. 아직도 기술용어가 난무하는 회의에 들어가면 “sorry”를 연발하지만, 그런 포기를 모르는 한국인의 뚝심이야말로 정씨가 세계적인 기업에 안착한 비결인 듯하다. 하늘에 펼치는 하얀 날개 꿈과 목표를 향한 노력이라면 아랍에미리트 항공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는 이화용(27)씨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2005년 외대 아랍어과를 졸업한 그녀는 사실 대학 때부터 그 항공사를 ‘찜’해두었다. 전공인 아랍어를 살릴 수 있다는 점, 100여 개국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 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원 절차는 결코 만만찮은 과정이었다. 온라인 서류 심사를 거쳐 1,2차 면접을 본 뒤 3차 그룹토의와 4차 에세이, 그리고 토익 형식의 필답시험을 본 뒤 한 번 더 그룹토의를 치렀다. 특히 3,4차는 당일 합격 여부가 가려지는 ‘서바이벌’ 형식이어서 많이 긴장됐다. 하지만 최종 면접 후 두바이에서 합격을 알려주는 전화가 왔다. 학부때부터 여러 번 지원한 경험과 영어 스터디, 모의 면접 연습이 주효했다.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럴 만도 하다. 에미리트항공은 1985년 10월 25일 처음 정기항로를 개통했을 때만 해도 임차 항공기인 보잉 737과 에어버스300 B4 두 대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103대의 항공기가 59개국의 90개 노선을 누빈다. 명실공히 여행이나 관광을 전문으로 하는 거대기업으로 발전했다. 에미리트항공의 저력을 나타내는 단적인 지표가 있다. 정부 소유임에도 당국으로부터 전혀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에미리트항공의 여러 사업부가 300여 개의 굵직굵직한 상을 받았다. 이씨는 그 비결을 “혁신과 미래지향적 사고”라고 말했다. 에미리트항공에 지원한 또 다른 이유는 “직장 내 상사와의 관계가 한국에 비해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로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생복지도 후하다. 주택·세금·전기·수도·가스요금·시내전화·교통비가 모두 무료다(쉬는 날엔 두바이에 있는 여러 호텔의 고급 헬스장과 스파시설도 무료 이용). 스케줄 조정도 자유로워 자신이 원하는 날에 비번을 정한다. 게다가 1년에 30일간의 휴가가 주어져 그달의 비번 시간을 잘 조정하면 보다 여유로운 여행이 가능하다. 본인뿐만 아니라 직계가족에게도 티켓 할인 특혜가 있어 부모 동반 여행도 가능하다. 지난 2월 부모와 함께 일본을 여행했고, 다음 휴가도 친척이 사는 뉴질랜드를 방문하거나 유럽 여행을 할 생각이다(에미리트항공은 가족 할인율이 부모의 경우 90%에 이른다). 현재 전체 승무원 8000명 중 한국인은 약 530명으로 영국인 다음으로 많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보니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에겐 해결책이 있다. “내 실수로 룸메이트가 화나면 건강식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한국 음식을 요리해줘서 푼다.” 그러면 룸메이트도 보답으로 이씨에게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어주고, 그렇게 해서 다시 사이 좋게 지낸다. 3년 거주비자(residence visa)로 현재 3명이 함께 쓰는 회사 아파트에서 사는 이씨는 “모두 국적도 다르고 모국어도 다르지만 친자매처럼 서로 보듬고 챙겨주면서 사이가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왜냐고? 우리는 세계 시민이니까.” 항공사와 3년 계약이 끝난 뒤 이씨는 어떤 미래를 계획할까. “또 다른 도전을 위해 계속 두바이에 머물지는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이슬람적인 표현으로 인샬라…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블룸버그에서 이룬 기자의 대망 싱가포르에서 블룸버그 통신 기자로 일하는 이유림(37)씨는 오늘도 시간과의 싸움을 벌인다. 싱가포르 근무는 1996년 서울 블룸버그 입사 이후 두 번째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지자 1999 ~2000년 혼자 싱가포르로 건너가 동남아 담당 경제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 후 2003년까지 서울 지국장으로 근무한 뒤 2004년부터 다시 싱가포르 지국에서 근무 중이다.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금융 전문 월간지인 블룸버그 마케츠(Bloomberg Markets)의 싱가포르 주재 수석기자로 일한다. 블룸버그 마케츠는 블룸버그가 발행하는 월간지로 전 세계에서 18명의 기자가 활동한다. 싱가포르 뉴스룸은 국제사회의 축소판이다. 60명가량의 기자와 에디터 등 모두 250명이 일한다. 싱가포르 출신을 포함해 영국·호주·미국·뉴질랜드·대만·남아공 등 다양한 국적의 직원이 일한다. 이런 모습은 블룸버그의 다른 지국을 가봐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싱가포르지국에서 일하면서 힘든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한다.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해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을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작성하는데 월급까지 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1993년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부전공 영어교육)를 졸업한 이씨는 서강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중학교 2학년에서 고1까지 부모님을 따라 미국 뉴저지주에서 살았던 몇 년과 싱가포르에서 지낸 5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다. 이씨의 경제전문 기자로서의 소신은 확고하다. “흔히 경제가 딱딱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경제를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인생사가 녹아 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곡물 가격·원유 가격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친다.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고 시장을 움직이는 사람, 그리고 때로는 그 주변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그 이야기를 정확하게 써 세계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을 통해 기자들은 사회 흐름을 빨리 배운다.” 그녀가 해외 언론사, 그것도 블룸버그 통신사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그곳에선 남녀차별도 없고, 열심히 일하면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아버지 조언이 한몫했다. 아버지는 일간지 기자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물론 보다 구체적인 이유도 있다. 첫째, 모두가 능력대로 평가 받는다. 둘째, 최고의 언론을 지향한다(블룸버그의 모토는 ‘5F’로 First Word, Factual word, Fastest Word, Future Word, Final Word다). 셋째, 직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그녀는 “사규상 어쩔 수 없다”며 급여 수준은 밝히지 않았다). 이씨는 “정보와 통신의 발달로 지구촌은 점점 작아진다”며 “한국에 머물지 말고 더 큰 무대에서 일할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상은 크게 갖되 현실을 직시하면서 말이다. 그러려면 언어(영어와 중국어)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19세기가 영국의 시대였고, 20세기가 미국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중국의 시대다. 중국어는 분명 해외취업에 도움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해외취업 3대 원칙을 알려주었다. 첫째,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라(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결국 불행해진다). 둘째, 처음부터 완벽한 직장을 찾기보다 일단 그 업계에 발을 들여 놓아라(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경력을 쌓다 보면 가끔 길이 열린다). 셋째, 일단 취업이 되면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며 즐겨라(즐겁게 일하면 항상 더 좋은 성과가 나온다). 이씨는 무엇보다 다른 배경을 가진 기자들과 같은 목적(‘가장 정확하고, 가장 빠르고,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기사를 쓴다’)으로 함께 일하며 보람을 느낀다. 이곳에서 지내며 자신을 특별히 한국사람으로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지구촌 사람’이랄까. 우리는 그렇게 지구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가장 뿌듯할 때는 물론 특종할 때죠.” 캘리포니아에서 펼치는 전문 간호사의 꿈 지구촌 사람들이 모인 곳에선 ‘갈등’도 생긴다. 한혜선(27)씨는 미국 정부에 등록된 정식 간호사(Registered Nurse)다. 2005년 5월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비타 병원의 내외과 병동에 배치돼 일하다 8개월 후 준중환자실로 옮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 외에도 혈액투석 간호사(Dialysis RN)로 일한다. 투석 간호사 일은 간호사가 환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투석을 도와주기 때문에 병원에서만 근무할 때와 달리 독립적 근무가 가능하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인 간호사 2~3명이 새로 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병동에 새로 온 한국 간호사에게 다른 한국인 간호사가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하자 필리핀 출신 간호사들이 이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출신 간호사들도 자기들끼리는 모국어를 사용한다. 한씨가 일하는 병원의 간호사를 출신국별로 보면 필리핀 40%, 중국 20%, 미국 20%, 그리고 인도·베트남·한국을 합해 20%다(미국에서 간호사는 공급이 부족해 외국인 간호사 수요가 많다). “현실적으로 미국 간호대학에서 공급하는 간호사론 도저히 병원에 필요한 간호사를 충당하지 못해 간호사 중 거의 60%가 아시아 출신 간호사”라고 그녀는 말했다(다비타 병원은 미국의 모든 주에 산재한 신장전문 병원으로 한국 출신 간호사가 곳곳에서 일한다. 특히 캘리포니아와 뉴욕주에 한국 간호사가 많이 몰려 있다). 한씨는 2002년 2월 대학 졸업 후 한국의 한 병원에서 약 6개월간 간호사로 일했다. 그 후 미국 간호사시험 준비를 시작했고, 필리핀으로 어학 연수를 다녀왔다. 2004년 미국 간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2005년 1월 캘리포니아주로 가 3~4개월 정도 적응기간(운전면허 취득 등)을 거친 뒤 현재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채용 절차는 서류 심사와 한 차례 인터뷰였다. 그러나 서류 준비에만 1년 걸렸다. 미국으로부터 각종 증명·확인을 받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미국 간호사시험을 못 보기 때문에 미국 간호사 지원자는 괌이나 사이판에서 시험을 봐야 한다. 간호사 수요가 있는 미국 병원 정보를 한국에서 개인이 직접 구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한국에 있는 여러 취업 알선기관을 통해 채용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한씨는 “개중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어 기관을 잘 선택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한국과 미국 간호사의 업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에선 간호사 한 팀이 환자 10~15명을 함께 관리하지만 미국에선 간호사 1명이 환자 4~5명의 병원 차트 관리와 간병을 모두 맡는다. 간호사 한 명당 담당 환자 수가 정해져 있다 보니 간호사의 책임도 더 커진다. 또 병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미국에선 아침마다 의사와 간호사가 함께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 계획도 짠다. 게다가 한국에선 간호사가 인턴·레지던트를 돕지만 미국에선 대학병원이 아닌 이상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간호사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환자를 치료한다는 소명감도 더욱 크다”고 한씨는 말했다. 미국 간호사의 연봉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시간당 계산이 대부분이어서 근무 일수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지만 주 3일을 기준으로 신입은 시간당 약 28~30달러선(연봉 약 5만 달러)이다. 한씨는 현재 영주권 비자를 얻었다. 그녀는 “간호사는 후원자만 잘 두면 다른 어떤 직종보다 쉽게 영주권 비자를 받을 수 있다”며 “영주권이 나오기까진 근로허가증(Work Permit)을 매년 갱신하면서 근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막상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문제를 추상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간다면 한국 간호사의 미국 진출은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 “이국땅에서 이민와 살면 어려움과 시련을 겪지만 모두가 나중을 위한 밑거름이다. 내게도 그런 생각이 밑바탕이 됐다. 목표와 꿈을 절대 버리지 말라. 항상 노력하는 자의 모습이 아름다우니까.” 뉴욕에서 아이디어와 싸움하는 광고인 뉴욕 매디슨 애버뉴는 세계 굴지의 광고 회사가 즐비하다. 그중 하나 Y&R 광고대행사는 그랜드 센트럴역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본사를 두었다. Y&R은 82개국에 180여 개 사무실을 둔 세계적 광고 대행사다. 이곳에서 김형진(33)씨의 일과는 비교적 자유롭다. 우선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다. 언제든 나와서 7~8시간만 채우면 된다. 동료들은 보통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6시쯤 퇴근한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학사·석사 과정을 마친 김씨는 미국의 일반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가고 싶은 대학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2004년 여름 미국 최고의 예술대학인 Academy of Art University(AAU)의 광고대학원(3년제)에 진학했다. 100% 실무 중심 대학원이다. 처음엔 대학 교수들이, 나중엔 미국에서 유명한 광고제작 책임자(creative director)들이 가르친다. 따라서 일반 회사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광고는 ‘그룹 프로젝트’다. 한국 학생들이 다른 나라 학생들보다 더 똑똑해도 부족한 영어 실력이 늘 문제였다. “한국 학생 아이디어로 시작한 프로젝트라도 영어 실력이 쟁쟁한 다른 나라 학생이 적극 의견을 제시하면 그 프로젝트는 그 학생의 아이디어로 둔갑한다. 교수도 모른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래서 김씨는 영어의 단점을 극복하는 요령을 생각해 냈다. 핵심 아이디어를 제시해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말로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광고업계에서 스스로 위축되면 절대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음에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일단 아이디어만 좋으면 설명이 서툴러도 사람들이 다시 한번 얘기해보라는 식으로 관심을 보인다.” 김씨가 Y&R사에 취직하게 된 계기는 어느 광고회사 부사장 겸 카피라이터인 한 교수가 강의시간에 “참 다재다능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김씨는 학생 광고제에서 이미 세 차례 수상했다). 그 후 그 교수가 한때 자기 밑에서 일했고 지금은 광고회사의 제작책임자로 일하는 사람들의 e-메일 주소를 여럿 알려주며 한번 연락해보라고 했다(김씨는 “미국 회사 채용 과정은 인사 담당자에게 e-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하고, 그가 좋다고 하면 인터뷰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특정 정보 없이 무턱대고 채용 지원서를 여러 e-메일 주소로 마구잡이로 보내면 연락이 잘 안 온다”고 말했다). 미국의 광고전문 대학원에서 교수의 인정을 받은 그는 운이 좋았다. 교수가 알려준 e-메일 주소로 그동안 만들었던 광고를 보냈더니 다음날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인터뷰에서 면접관은 대뜸 “당신의 광고가 무척 마음에 들긴 하지만 ‘숨가쁘게(quick, quick)’ 돌아가는 광고계에서 영어를 제대로 못하면 일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다그쳤다. 그때 김씨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러면 ‘빠르고 빠르게(quick quick)’ 되물어보겠다”고.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던 지난 5월 Y&R에 지원해 인터뷰와 최종심사를 통과했다. 6월부터 시작된 10주간의 수습기간이 끝나고, Y&R 뉴욕 본사의 정규직원으로 근무 중이다. 급여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신입직원의 경우 연봉이 4만5000~5만 달러다(그 후 성과에 따라 6만~10만 달러까지 올라가며 교통비는 따로 받는다). 그러나 광고업계 분위기는 ‘살벌’하다. “내가 만든 광고가 광고제에서 상을 받으면 연봉이 오르지만 광고 제작을 맡긴 고객을 하나만 잃어도 즉각 해고되기도 한다”고 그는 말했다. 김씨는 해외 광고회사 취업시 세 가지(work, place, timing)를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첫째, 지원할 회사의 전문분야를 알아라(회사가 인쇄광고를 다루는 곳인지, TV광고를 다루는 곳인지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나서면 낭패를 본다). 둘째, 회사의 위치도 중요하다(보통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의 광고회사는 신입 광고제작자를 많이 뽑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선 경력자 위주로 뽑는 경향이 있어 그런 곳엔 계속 지원서를 내도 채용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셋째, 지원 시기에 신경 써라(예컨대 광고회사가 대기업 광고 제작을 의뢰받은 경우 더 많은 직원이 필요하므로 이때 지원하면 채용 가능성이 높아진다). 미국의 광고 주간지 ‘애드 위크(AD week)’나 마케팅, 미디어 정보를 제공하는 ‘애드버타이징 에이지(Advertising Age)’ 같은 전문지도 양질의 채용정보를 제공한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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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을 누비는 국제공무원 적도의 열대 왕모기는 오늘도 그녀를 공격한다. 지난 1월부터 동티모르 유엔 통합대표단(UNMIT)에서 정무담당관(Political Affairs Advisor)으로 일해온 김보람(26)씨의 팔다리엔 울퉁불퉁 ‘영광의 상처’가 아물 날 없다. “수십 명이 함께 있어도 어떻게 알고 나만 공격하는지 모르겠다.” 전기도 자주 끊기고, 급수난도 심각하다. 하지만 그 대신 노벨 평화상 수상자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동티모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과정을 지켜봤고, 21세기 최초의 신생독립국이 제 힘으로 민주선거를 치르는 역사적 순간을 함께했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다. UNMIT의 주 임무는 동티모르 현지에 파견된 각종 유엔 관련 기구의 역할 통합과 조정이다. 김씨가 일하는 정무부서는 동티모르 정부기관의 자문역할은 물론, 선거준비·치안 등의 지원 업무도 맡는다.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동티모르는 곧 인도네시아에 합병됐다가 유엔 감시 아래 실시된 국민투표로 2002년에야 공식 독립했다(한국도 한때 유엔평화유지군으로 상록수부대를 파견했다). 김씨는 현재 UNMIT의 민간 인력 중 유일한 한국인이다. 김씨가 동티모르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고교 때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을 다룬 기사를 읽고 국제문제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관심은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국제대학원까지 진학하게 했다. 학부 때는 한일학생교류(KJSE)라는 연합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교환학생으로 미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근교 대학에서 1년을 보냈다. 대학원 때는 여성부의 국제전문 여성인력으로 선발돼 1년간 학업과 병행했다. 여성부의 지원으로 대학원 2학기 때 유엔본부 인턴으로 6개월간 뉴욕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김씨의 요즘 기상 시간은 오전 6시30분. 출근 준비를 하고, 차로 수도 딜리에 있는 UNMIT 단지에 들어서면 7시40분이다. 제일 먼저 컴퓨터를 켜고 e-메일부터 확인한 뒤 전날 저녁 뉴욕으로 보낸 일일 상황보고서를 토대로 하루 일정을 짠다. 오전 9시쯤 정무부서 책임자와 전체 직원이 모여 회의를 한다. 정보를 공유하고, 향후 계획을 논의하는 자리다. 점심은 12시30분에서 1시 사이. 점심은 대개 대표단 단지 내 파키스탄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3달러를 내고 먹는다. 김씨는 “6월 30일 총선 직후까진 하루 평균 12시간씩 일했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올해 4월 1차 대선 때는 정시에 투표를 시작하지 못한 투표소도 많았고, 일부 투표소에선 투표용지가 동나기도 했다. 투표소 직원의 미숙으로 실수도 많았다. 그러나 2차 대선과 6월 총선 때는 이런 점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 “동티모르에 파견된 국제사회 일원 모두가 뿌듯함을 느꼈다. 신생국가에선 자립 능력배양(capability building)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거 당일 한 표를 행사하려고 뜨거운 땡볕 아래에서 두세 시간을 불평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동티모르의 미래를 위한 작지만 긍정적인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녀는 밝혔다. 김씨가 뜨거운 섬나라에서 일하는 처지에 감사할 때는 형형색색의 산호초와 물고기를 보며 수영하거나, 멋진 석양을 바라보며 신선한 코코넛을 통째로 마실 때다. “직장에서 때때로 스트레스 받고 울적해질 때가 있더라도 넓고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진다”고 김씨는 말했다. 분명 그녀는 그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다. 김씨의 현 소속은 UN Volunteer다. 그래서 월급이 아니라 활동비를 받는다. 한 달에 미화 2000달러 남짓이다. 연차휴가 말고 두 달에 열흘 정도의 휴가가 더 주어진다. UNMIT는 임무가 끝나면 해체되는 한시적인 일자리다. 그러나 UNV에 소속되면 보통 2년간 일한다. 김씨는 내년 말이나 여름까지 일할 생각이다. 2006년 스페인에서 1년여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안락한 일자리가 주어졌지만 고민 끝에 고사했다. UNV에서 일정기간 일하고 나면 다른 유엔 기구의 정식 직원으로 지원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김씨는 “앞으로 유엔 조직에서 더욱 경력을 쌓아 개발관련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유엔에 진출하고 싶은 사람은 국제기구초급전문가(JPO)뿐 아니라 UNV제도도 활용하라고 권했다. 한국인 수요는 늘 있으므로 신청 명단에 등록해 두면 어느날, 또 다른 역사의 현장에서 초대장이 날아들지 모른다(국제공무원에 관심이 있는 독자는 한국판 2006년 9월 6일자 표지 기사 참조). 프랑스에서 가는 요리사의 칼 윤화영(30)씨는 매일 칼이나 뜨거운 불과 싸운다. “어떤 직업이 아무 보호장비도 없이 200도의 기름을 만지고 칼을 쓸까?” 그 직업은 바로 파리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사다. 실제 주방의 평균기온은 겨울에 30도, 여름엔 40도를 훌쩍 넘는다. 파리의 유명 셰프(식당 경영까지 총괄하는 주방장) 피에르 갸네흐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윤씨는 “해외 취업은 해외 여행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하루 하루가 전투니까”라고 잘라 말한다. 새벽 6시 반에 일어나 14시간을 꼬박 주방에서 보내다 보니 주중에는 개인생활이 없다. 주말에나 청소, 빨래, 장보기, 관공서 방문 등을 처리한다. 좋은 숫돌을 골라 매주 두 시간씩 칼을 가는 것도 큰일이다. 그래도 보람차다. 전 직장인 파리의 고급 호텔 크리용의 셰프 프랑수아 피에주와 일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녀석을 잡아야 돼. 그 녀석은 최고야”라는 평을 들었고, 이 시대 천재 요리사로 평가 받는 그의 ‘음식 검사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또 셰프의 요리법을 수정할 권한까지 부여 받았다. “내가 만든 요리법 중 몇 가지는 지금도 손님들 식탁에 나간다.” 프랑스 요리계는 “자신의 비법을 숨기기보다는 완전히 공개함으로써 후진을 양성해 새로운 기술을 계속 개발해 나가는 풍토”라고 윤씨는 설명했다. 한국외국어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던 윤씨는 원래 사진 유학을 가려고 식당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히려 학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요리의 매력에 반해 2000년 2월 파리로 떠났다. 우선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입학이 되는 르 코르동 블루를 1년간 다니면서 줄곧 프랑스 최고요리학교(ESCF) 진학을 준비했다. 2002년 ESCF에 입학해 수석 졸업했다. 그 덕분에 프랑스 요리계의 거물들을 만나게 됐다. 1990년대 프랑스 요리계를 좌지우지하던 조엘 호뷔숑과 많은 원로들, 호텔 플라자 아네테의 세계적 스타 셰프 알랭 뒤카스와 앞서 말한 피에주 등이 그들이다. 동세대 요리사로서는 매우 드문 이력이다. 윤씨에 따르면 프랑스 요리업계는 크게 3등급(cafe/cantine, brasserie/bistro, gastro)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엔 카페, 구내식당, 프랜차이즈 식당 등이 속하며 대부분 아르바이트제여서 구인 요청은 많다. 두 번째 부류는 축구나 야구의 마이너리그와 같다. 업무 환경이 열악해 언제나 구인 요청이 많다. 세 번째는 ‘미슐랭 스타급’ 레스토랑으로 마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같다. 엄청나게 폐쇄적이며 철저히 ‘누구 아래 있었던 누구’가 중시된다. 구직자는 많지만 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다. 프랑스 요리사는 ‘서류상 연봉’은 좋다. 대신 사회보장 비용(노후보장 국민연금+4대 보험)으로 월급의 50% 이상이 원천 징수되고, 모든 물건에 부가세 19.6%가 붙는다. 그래도“의료비가 전액 무료고, 사교육비가 없는 사회구조여서 비록 풍족하진 않아도 나름대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 만하다”고 윤씨는 말했다. 물론 실업자가 많은 프랑스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일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프랑스의 고용계약은 크게 단기계약직(CDD)과 종신계약직(CDI)으로 나뉘는데 정년이 보장되는 CDI는 사회보장비 부담이 크기 때문에 업주 측에서 계약을 꺼린다. 윤씨는 “운 좋게도 그동안의 네 직장 모두 CDI 계약을 했다.” 많은 사람이 그가 정년을 보장 받고도 세 번이나 이직한 이유를 궁금해 한다. “요리사가 사계절을 보내고 나면 그 레스토랑의 주방을 알게 된다. 이때 ‘자리를 원하면 남고, 새로운 기술을 원하면 떠나라’는 게 내 원칙이다. 타성에 젖은 음식은 쉰 냄새가 난다.” 윤씨는 현재 프랑스 체류증(cart?de s?our)의 ‘취업자(salarie)’ 자격으로 거주한다. 프랑스 본국과 국외령에서 모두 유효하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근무가 가능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1단계는 9개월짜리 ‘임시노동직 체류증’(travailleur temporaire)으로 직장 변경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 ‘취업자’ 자격으로 바뀌면, 2단계로 ‘임시노동직 체류증’이 발급된 시(市)에서, 3단계로 도(道)에서 1년간 자유로운 전직이 가능한 체류증이 나온다. 그리고 4단계로서 프랑스 전국에서 일할 자격이 생긴다. 2003년 12월 인턴을 시작하면서 취업비자로 전환했다. 언어문제는 어떨까. “유창하고 좋은 발음보다 자기 분야의 전문어에 능숙해야 한다”고 윤씨는 말했다. “발음이 안 좋아도 말하는 내용이 좋으면 상대방이 경청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열린 자세다. ‘우리나라는 이런데, 여기는 왜 그래’라고 하기보다는 ‘아, 여기는 그렇구나’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윤화영씨에게 파리는 종착역이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뉴욕이든, 서울이든, 상하이든 장소가 문제는 아니다.” 업종 특성상 직장을 옮길 때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음식 맛을 알기 전에 돈 맛을 알아 버린 요리사는 이미 요리사가 아니다.” 구글에서 키우는 야망의 첨단기술 정기현(34)씨는 얼마 전 구글 코리아의 초기화면을 ‘바꾸는’ 작업을 총지휘했다. 검색창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초기화면에 구글 대표 기능들을 색색의 이모티콘과 함께 가지런히 정렬했다. 종합 포털에 익숙한 한국 이용자를 위한 배려였다. 이 프로젝트는 구글 창업 이래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사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겼다. “구글처럼 큰 기업에서 한국시장을 겨냥한 특화된 전략을 기획하고 실행했다는 점에서 무척 뿌듯했다. 얼핏 단순한 작업처럼 보여도 기본에 충실한 구글의 정신이 이번 홈페이지 개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과정에서 ‘실직’ 위기에 몰릴 뻔했다. 수십 가지 디자인 안(案) 중 하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최종 의사결정자와 몇 주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거의 매일 부사장실을 들락거렸고, 때론 퇴근길까지 쫓아가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하루는 부사장이 “당신을 죽여버려야 하나(I may have to kill you)”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주장이 먹혀 들었고, 회사 내부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정씨는 오전 8시30분쯤이면 어김없이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 위치한 구글 본사로 출근한다. 그리곤 유기농 과일주스와 오믈렛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다. 9시까진 주로 사내 카페에서 신문 기사를 훑어본다. 오전엔 e-메일로 주요 안건을 챙기고 팀들과의 회의 일정을 점검한다. 오후 일과는 정신 없이 흘러간다(많은 사람이 구글 하면 자유스러운 환경에 예쁜 캠퍼스, 맛있는 음식만 생각하지만 “일도 열심히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주로 다른 팀을 만나 문제를 이해시키고, 조언을 구하고, 자신이 수행하는 프로젝트의 결과를 공유하며 나아갈 방향을 논의한다. 간간이 ‘테크 토크(Tech Talk)’에도 참여한다. 엔지니어링·마케팅·제품관리 분야의 석학들이 와서 강연하는 자리다. 대가들의 통찰력을 접할 기회다 보니 강연엔 빠짐없이 참석하려 애쓴다. 팀장급 제품매니저(product manager)로 한국시장을 관리하는 바쁜 와중에도 매주 금요일 오후 4시엔 어김없이 달콤한 ‘여유’가 찾아온다. 한 주간 있었던 주요 안건들을 창업자(세르게이 브린·래리 페이지)가 전 직원에게 발표하고, 카페엔 맥주와 간단한 다과가 준비된다. 직원들은 밴드 음악에 맞춰 간간이 발을 흔들거나, 황당한 질문을 창업자에게 던지는 동료를 보면서 한 주를 마무리한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92학번인 정씨는 국내에서 학·석사를 마치고 보스턴 컨설팅과 액센추어의 한국지사에 근무하다 미국으로 건너와 2006년 캘리포니아대(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재학 도중 2005년 하계 인턴십을 구글에서 했다. 당시 구글은 공식적인 인턴십 프로그램이 없었지만 하스 경영대학원의 동창 명부를 샅샅이 뒤져 모든 선후배를 접촉해가며 집요하게 인턴십을 따냈다. 그 과정에서 즐겁게 일하는 직원들과, 혁신을 장려하고 실패에 책임을 묻기보다 얼마나 배울 점을 얻었는가를 강조하는 경영진의 모습에 큰 호감을 느꼈다. 특히 ‘Don’t be evil(단기적 이익에 집착해 장기적인 브랜드 이미지와 경쟁력을 해치지 말라는 구글의 모토)’ 정책으로 사업하는 경영진의 모습에 매료됐다. 아직도 기술용어가 난무하는 회의에 들어가면 “sorry”를 연발하지만, 그런 포기를 모르는 한국인의 뚝심이야말로 정씨가 세계적인 기업에 안착한 비결인 듯하다. 하늘에 펼치는 하얀 날개 꿈과 목표를 향한 노력이라면 아랍에미리트 항공에서 승무원으로 일하는 이화용(27)씨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2005년 외대 아랍어과를 졸업한 그녀는 사실 대학 때부터 그 항공사를 ‘찜’해두었다. 전공인 아랍어를 살릴 수 있다는 점, 100여 개국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 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원 절차는 결코 만만찮은 과정이었다. 온라인 서류 심사를 거쳐 1,2차 면접을 본 뒤 3차 그룹토의와 4차 에세이, 그리고 토익 형식의 필답시험을 본 뒤 한 번 더 그룹토의를 치렀다. 특히 3,4차는 당일 합격 여부가 가려지는 ‘서바이벌’ 형식이어서 많이 긴장됐다. 하지만 최종 면접 후 두바이에서 합격을 알려주는 전화가 왔다. 학부때부터 여러 번 지원한 경험과 영어 스터디, 모의 면접 연습이 주효했다. “말할 수 없이 기뻤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럴 만도 하다. 에미리트항공은 1985년 10월 25일 처음 정기항로를 개통했을 때만 해도 임차 항공기인 보잉 737과 에어버스300 B4 두 대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103대의 항공기가 59개국의 90개 노선을 누빈다. 명실공히 여행이나 관광을 전문으로 하는 거대기업으로 발전했다. 에미리트항공의 저력을 나타내는 단적인 지표가 있다. 정부 소유임에도 당국으로부터 전혀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에미리트항공의 여러 사업부가 300여 개의 굵직굵직한 상을 받았다. 이씨는 그 비결을 “혁신과 미래지향적 사고”라고 말했다. 에미리트항공에 지원한 또 다른 이유는 “직장 내 상사와의 관계가 한국에 비해 상하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로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생복지도 후하다. 주택·세금·전기·수도·가스요금·시내전화·교통비가 모두 무료다(쉬는 날엔 두바이에 있는 여러 호텔의 고급 헬스장과 스파시설도 무료 이용). 스케줄 조정도 자유로워 자신이 원하는 날에 비번을 정한다. 게다가 1년에 30일간의 휴가가 주어져 그달의 비번 시간을 잘 조정하면 보다 여유로운 여행이 가능하다. 본인뿐만 아니라 직계가족에게도 티켓 할인 특혜가 있어 부모 동반 여행도 가능하다. 지난 2월 부모와 함께 일본을 여행했고, 다음 휴가도 친척이 사는 뉴질랜드를 방문하거나 유럽 여행을 할 생각이다(에미리트항공은 가족 할인율이 부모의 경우 90%에 이른다). 현재 전체 승무원 8000명 중 한국인은 약 530명으로 영국인 다음으로 많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보니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에겐 해결책이 있다. “내 실수로 룸메이트가 화나면 건강식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한국 음식을 요리해줘서 푼다.” 그러면 룸메이트도 보답으로 이씨에게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어주고, 그렇게 해서 다시 사이 좋게 지낸다. 3년 거주비자(residence visa)로 현재 3명이 함께 쓰는 회사 아파트에서 사는 이씨는 “모두 국적도 다르고 모국어도 다르지만 친자매처럼 서로 보듬고 챙겨주면서 사이가 돈독해졌다”고 말했다. “왜냐고? 우리는 세계 시민이니까.” 항공사와 3년 계약이 끝난 뒤 이씨는 어떤 미래를 계획할까. “또 다른 도전을 위해 계속 두바이에 머물지는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이슬람적인 표현으로 인샬라… 미래 일은 아무도 모른다.” 블룸버그에서 이룬 기자의 대망 싱가포르에서 블룸버그 통신 기자로 일하는 이유림(37)씨는 오늘도 시간과의 싸움을 벌인다. 싱가포르 근무는 1996년 서울 블룸버그 입사 이후 두 번째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지자 1999 ~2000년 혼자 싱가포르로 건너가 동남아 담당 경제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 후 2003년까지 서울 지국장으로 근무한 뒤 2004년부터 다시 싱가포르 지국에서 근무 중이다.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금융 전문 월간지인 블룸버그 마케츠(Bloomberg Markets)의 싱가포르 주재 수석기자로 일한다. 블룸버그 마케츠는 블룸버그가 발행하는 월간지로 전 세계에서 18명의 기자가 활동한다. 싱가포르 뉴스룸은 국제사회의 축소판이다. 60명가량의 기자와 에디터 등 모두 250명이 일한다. 싱가포르 출신을 포함해 영국·호주·미국·뉴질랜드·대만·남아공 등 다양한 국적의 직원이 일한다. 이런 모습은 블룸버그의 다른 지국을 가봐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싱가포르지국에서 일하면서 힘든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한다.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해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을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작성하는데 월급까지 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1993년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부전공 영어교육)를 졸업한 이씨는 서강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중학교 2학년에서 고1까지 부모님을 따라 미국 뉴저지주에서 살았던 몇 년과 싱가포르에서 지낸 5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다. 이씨의 경제전문 기자로서의 소신은 확고하다. “흔히 경제가 딱딱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경제를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인생사가 녹아 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곡물 가격·원유 가격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친다.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고 시장을 움직이는 사람, 그리고 때로는 그 주변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그 이야기를 정확하게 써 세계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을 통해 기자들은 사회 흐름을 빨리 배운다.” 그녀가 해외 언론사, 그것도 블룸버그 통신사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그곳에선 남녀차별도 없고, 열심히 일하면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아버지 조언이 한몫했다. 아버지는 일간지 기자로 20년 가까이 일했다. 물론 보다 구체적인 이유도 있다. 첫째, 모두가 능력대로 평가 받는다. 둘째, 최고의 언론을 지향한다(블룸버그의 모토는 ‘5F’로 First Word, Factual word, Fastest Word, Future Word, Final Word다). 셋째, 직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그녀는 “사규상 어쩔 수 없다”며 급여 수준은 밝히지 않았다). 이씨는 “정보와 통신의 발달로 지구촌은 점점 작아진다”며 “한국에 머물지 말고 더 큰 무대에서 일할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상은 크게 갖되 현실을 직시하면서 말이다. 그러려면 언어(영어와 중국어)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19세기가 영국의 시대였고, 20세기가 미국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중국의 시대다. 중국어는 분명 해외취업에 도움이 된다.” 그녀는 자신의 해외취업 3대 원칙을 알려주었다. 첫째,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라(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결국 불행해진다). 둘째, 처음부터 완벽한 직장을 찾기보다 일단 그 업계에 발을 들여 놓아라(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경력을 쌓다 보면 가끔 길이 열린다). 셋째, 일단 취업이 되면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며 즐겨라(즐겁게 일하면 항상 더 좋은 성과가 나온다). 이씨는 무엇보다 다른 배경을 가진 기자들과 같은 목적(‘가장 정확하고, 가장 빠르고,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기사를 쓴다’)으로 함께 일하며 보람을 느낀다. 이곳에서 지내며 자신을 특별히 한국사람으로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지구촌 사람’이랄까. 우리는 그렇게 지구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가장 뿌듯할 때는 물론 특종할 때죠.” 캘리포니아에서 펼치는 전문 간호사의 꿈 지구촌 사람들이 모인 곳에선 ‘갈등’도 생긴다. 한혜선(27)씨는 미국 정부에 등록된 정식 간호사(Registered Nurse)다. 2005년 5월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비타 병원의 내외과 병동에 배치돼 일하다 8개월 후 준중환자실로 옮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일 외에도 혈액투석 간호사(Dialysis RN)로 일한다. 투석 간호사 일은 간호사가 환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투석을 도와주기 때문에 병원에서만 근무할 때와 달리 독립적 근무가 가능하다. 그런데 얼마 전 한국인 간호사 2~3명이 새로 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병동에 새로 온 한국 간호사에게 다른 한국인 간호사가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하자 필리핀 출신 간호사들이 이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출신 간호사들도 자기들끼리는 모국어를 사용한다. 한씨가 일하는 병원의 간호사를 출신국별로 보면 필리핀 40%, 중국 20%, 미국 20%, 그리고 인도·베트남·한국을 합해 20%다(미국에서 간호사는 공급이 부족해 외국인 간호사 수요가 많다). “현실적으로 미국 간호대학에서 공급하는 간호사론 도저히 병원에 필요한 간호사를 충당하지 못해 간호사 중 거의 60%가 아시아 출신 간호사”라고 그녀는 말했다(다비타 병원은 미국의 모든 주에 산재한 신장전문 병원으로 한국 출신 간호사가 곳곳에서 일한다. 특히 캘리포니아와 뉴욕주에 한국 간호사가 많이 몰려 있다). 한씨는 2002년 2월 대학 졸업 후 한국의 한 병원에서 약 6개월간 간호사로 일했다. 그 후 미국 간호사시험 준비를 시작했고, 필리핀으로 어학 연수를 다녀왔다. 2004년 미국 간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2005년 1월 캘리포니아주로 가 3~4개월 정도 적응기간(운전면허 취득 등)을 거친 뒤 현재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채용 절차는 서류 심사와 한 차례 인터뷰였다. 그러나 서류 준비에만 1년 걸렸다. 미국으로부터 각종 증명·확인을 받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미국 간호사시험을 못 보기 때문에 미국 간호사 지원자는 괌이나 사이판에서 시험을 봐야 한다. 간호사 수요가 있는 미국 병원 정보를 한국에서 개인이 직접 구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한국에 있는 여러 취업 알선기관을 통해 채용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한씨는 “개중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어 기관을 잘 선택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한국과 미국 간호사의 업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에선 간호사 한 팀이 환자 10~15명을 함께 관리하지만 미국에선 간호사 1명이 환자 4~5명의 병원 차트 관리와 간병을 모두 맡는다. 간호사 한 명당 담당 환자 수가 정해져 있다 보니 간호사의 책임도 더 커진다. 또 병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미국에선 아침마다 의사와 간호사가 함께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치료 계획도 짠다. 게다가 한국에선 간호사가 인턴·레지던트를 돕지만 미국에선 대학병원이 아닌 이상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간호사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환자를 치료한다는 소명감도 더욱 크다”고 한씨는 말했다. 미국 간호사의 연봉이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시간당 계산이 대부분이어서 근무 일수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지만 주 3일을 기준으로 신입은 시간당 약 28~30달러선(연봉 약 5만 달러)이다. 한씨는 현재 영주권 비자를 얻었다. 그녀는 “간호사는 후원자만 잘 두면 다른 어떤 직종보다 쉽게 영주권 비자를 받을 수 있다”며 “영주권이 나오기까진 근로허가증(Work Permit)을 매년 갱신하면서 근무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막상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문제를 추상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간다면 한국 간호사의 미국 진출은 문제가 없다고 믿는다. “이국땅에서 이민와 살면 어려움과 시련을 겪지만 모두가 나중을 위한 밑거름이다. 내게도 그런 생각이 밑바탕이 됐다. 목표와 꿈을 절대 버리지 말라. 항상 노력하는 자의 모습이 아름다우니까.” 뉴욕에서 아이디어와 싸움하는 광고인 뉴욕 매디슨 애버뉴는 세계 굴지의 광고 회사가 즐비하다. 그중 하나 Y&R 광고대행사는 그랜드 센트럴역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본사를 두었다. Y&R은 82개국에 180여 개 사무실을 둔 세계적 광고 대행사다. 이곳에서 김형진(33)씨의 일과는 비교적 자유롭다. 우선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다. 언제든 나와서 7~8시간만 채우면 된다. 동료들은 보통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6시쯤 퇴근한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학사·석사 과정을 마친 김씨는 미국의 일반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가고 싶은 대학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2004년 여름 미국 최고의 예술대학인 Academy of Art University(AAU)의 광고대학원(3년제)에 진학했다. 100% 실무 중심 대학원이다. 처음엔 대학 교수들이, 나중엔 미국에서 유명한 광고제작 책임자(creative director)들이 가르친다. 따라서 일반 회사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광고는 ‘그룹 프로젝트’다. 한국 학생들이 다른 나라 학생들보다 더 똑똑해도 부족한 영어 실력이 늘 문제였다. “한국 학생 아이디어로 시작한 프로젝트라도 영어 실력이 쟁쟁한 다른 나라 학생이 적극 의견을 제시하면 그 프로젝트는 그 학생의 아이디어로 둔갑한다. 교수도 모른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래서 김씨는 영어의 단점을 극복하는 요령을 생각해 냈다. 핵심 아이디어를 제시해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말로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광고업계에서 스스로 위축되면 절대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음에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일단 아이디어만 좋으면 설명이 서툴러도 사람들이 다시 한번 얘기해보라는 식으로 관심을 보인다.” 김씨가 Y&R사에 취직하게 된 계기는 어느 광고회사 부사장 겸 카피라이터인 한 교수가 강의시간에 “참 다재다능하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김씨는 학생 광고제에서 이미 세 차례 수상했다). 그 후 그 교수가 한때 자기 밑에서 일했고 지금은 광고회사의 제작책임자로 일하는 사람들의 e-메일 주소를 여럿 알려주며 한번 연락해보라고 했다(김씨는 “미국 회사 채용 과정은 인사 담당자에게 e-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하고, 그가 좋다고 하면 인터뷰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특정 정보 없이 무턱대고 채용 지원서를 여러 e-메일 주소로 마구잡이로 보내면 연락이 잘 안 온다”고 말했다). 미국의 광고전문 대학원에서 교수의 인정을 받은 그는 운이 좋았다. 교수가 알려준 e-메일 주소로 그동안 만들었던 광고를 보냈더니 다음날 인터뷰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인터뷰에서 면접관은 대뜸 “당신의 광고가 무척 마음에 들긴 하지만 ‘숨가쁘게(quick, quick)’ 돌아가는 광고계에서 영어를 제대로 못하면 일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다그쳤다. 그때 김씨는 이렇게 맞받아쳤다. “그러면 ‘빠르고 빠르게(quick quick)’ 되물어보겠다”고. 그는 대학원을 졸업하던 지난 5월 Y&R에 지원해 인터뷰와 최종심사를 통과했다. 6월부터 시작된 10주간의 수습기간이 끝나고, Y&R 뉴욕 본사의 정규직원으로 근무 중이다. 급여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신입직원의 경우 연봉이 4만5000~5만 달러다(그 후 성과에 따라 6만~10만 달러까지 올라가며 교통비는 따로 받는다). 그러나 광고업계 분위기는 ‘살벌’하다. “내가 만든 광고가 광고제에서 상을 받으면 연봉이 오르지만 광고 제작을 맡긴 고객을 하나만 잃어도 즉각 해고되기도 한다”고 그는 말했다. 김씨는 해외 광고회사 취업시 세 가지(work, place, timing)를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첫째, 지원할 회사의 전문분야를 알아라(회사가 인쇄광고를 다루는 곳인지, TV광고를 다루는 곳인지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나서면 낭패를 본다). 둘째, 회사의 위치도 중요하다(보통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의 광고회사는 신입 광고제작자를 많이 뽑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선 경력자 위주로 뽑는 경향이 있어 그런 곳엔 계속 지원서를 내도 채용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셋째, 지원 시기에 신경 써라(예컨대 광고회사가 대기업 광고 제작을 의뢰받은 경우 더 많은 직원이 필요하므로 이때 지원하면 채용 가능성이 높아진다). 미국의 광고 주간지 ‘애드 위크(AD week)’나 마케팅, 미디어 정보를 제공하는 ‘애드버타이징 에이지(Advertising Age)’ 같은 전문지도 양질의 채용정보를 제공한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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