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조강 생산능력 3500만t. 자본도 기술도 없던 모래밭에서 세계 최단기간 이뤄낸 기적이다. 포스코의 역사는 한국 경제 성장사와 맥을 같이한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생존 전략은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진흥이었다. 이런 국가 부흥 프로젝트는 영일만에서부터 싹텄다. 그 후 40년. 황무지에 말뚝을 박았던 포스코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회사로 우뚝 서는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거기서 쏟아진 쇳물은 우리 산업의 쌀이 됐고, 불굴의 개척정신은 대한민국 성장의 모델이 됐다. 여기 오기까지 수많은 경영자와 기술자의 땀과 혼, 피가 바다를 적셨다. 이코노미스트는 포스코 창립 40주년을 맞아 ‘포스코의 영웅들’을 끌어냈다. 역대 회장들과 전화,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포스코의 과거와 미래를 조명했다.
포스코 창립 이후 40년간 총 6명의 회장이 포스코 시대를 이끌었다. 창업자인 박태준(81) 명예회장에 이어 2대 황경로(78) 회장, 3대 정명식(77) 회장, 4대 김만제(74) 회장, 5대 유상부(66) 회장과 지금의 이구택(62) 회장으로 이어진다.
■역대 회장이 뽑은 포스코 경쟁력
박태준(1대 회장 : 68년 4월~92년 10월) -최저 비용·최고 효율·첨단 설비·최고 기술 고수 -제철보국·우향우 헌신정신
황경로(2대 회장: 92년 10월~93년 3월) -선진화된 관리·회계 전산 시스템 정착 -‘사다리’ 하나도 소홀히 안 보는 ‘원가절감 의식’
정명식(3대 회장: 93년 3월~94년 3월) -믿고 맡기는 ‘위임 결재 시스템’ 정착 -과감한 직원 복지 투자
김만제(4대 회장: 94년 3월~98년 3월) -사외이사제 등 선진기업 경영제도 도입 -선택과 집중 경영, 철강 한 분야에 매진
유상부(5대 회장: 98년 3월~2003년 3월) -노사화합 기업문화 -지배구조 투명성 유지, 전문경영인 체제 |
4대 김만제 회장을 제외하곤 모두 포스코에 청춘을 바쳤던 인물들이다. 이들에겐 나름의 공과가 있겠지만 포스코의 오늘이 있기까지 나름대로 그 시대의 소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파편적 사안에서 실착이 있었다 해도 포스코라는 신화를 쓰는 데 역할이 있었다는 얘기다. 역대 회장들은 전화와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포스코의 성장 배경엔 창업부터 이어져 내려온 독특한 포스코만의 기업문화가 있었다”고 밝혔다. 창업세대인 황경로 전 회장은 “사다리 하나를 설치할 때도 원가를 철저히 따지는 철저함이 수조원대 투자를 큰 시행착오 없이 성공시킨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정명식 전 회장은 “내가 포스코 부사장으로 있을 때 포스코 건설 부문에 관해서는 내 손 안에서 과감하게 전결할 수 있었다”며 철저한 위임 결재 시스템을 포스코 경쟁력의 하나로 꼽았다. 유상부 전 회장은 “기업이 오너와 사주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없게 만든 철저한 전문경영인 체제가 포스코가 투명경영을 할 수 있게 만든 발판이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역대 회장들은 원칙과 기본 중시, 정실인사와 연고주의를 배제한 엄정한 인사관리, 낙하산 인사를 배제한 경영진의 내부 승계주의, 경영 성과 배분제, 4조 3교대 같은 선진형 근무제도와 복리후생을 포스코 기업문화의 경쟁력으로 꼽았다. 그들은 “이런 포스코 DNA의 전통을 바탕으로 생산력 증대, 사업 다각화, 해외 생산기지 확대 같은 시대에 맞는 질적 성장을 이룰 때 100년 기업 포스코를 향한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박태준의 창업 시대(1968년 4월~1992년 10월)  | ▶1968년 포항종합제철 사장 1981~92년 포항종합제철 회장 2003년~현재 포스코 비상임고문 | |
‘박태준’은 포스코의 브랜드다. ‘제철보국’ ‘우향우 정신’ 등 박태준(81) 명예회장이 만들어 놓은 창업정신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포스코의 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육군사관학교 6기 졸업생인 박 명예회장은 1964~68년 대한중석 사장을 거쳐 68~81년까지 포항제철 대표이사 사장, 81~92년까지 포철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창업기부터 광양 건설기까지 포스코 역사 40년 중 절반이 넘는 24년간 포스코를 이끌었던 셈이다. 1968년 포항제철소 창업, 90년대 초반 광양제철소 3기 설비 준공으로 조강연산 2100만t 체제를 구축하기까지 포스코의 뼈대를 세웠다. 그는 지난 3월 28일 이코노미스트와 e-메일 인터뷰를 통해 포스코 40년 경쟁력을 두 가지로 답변했다. 첫째는 ‘최저 비용’ ‘최고 효율’의 제철소 건설, 둘째는 ‘제철보국’ ‘우향우 정신’이었다. <인터뷰 상자기사 참조>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라는 사명을 확정하고 유네스코회관에서 창립식을 개최할 때 박 명예회장이 주문처럼 외운 말이다. 그는 1970년 4월 1일 포철 제1기 착공식에서 ‘첫 조업부터 우리 손으로 가동하자’는 포부를 제시한다. 박태준의 원대한 목표는 십수 년 후 광양제철소에 집대성되고, 1992년 파이넥스 공법의 상용화 연구에 도전하는 것으로 거듭났다. 2007년 세계 최초로 파이넥스 공법 개발이라는 기적을 낳은 것도 기술개발을 최우선 목표로 한 결과였다.
황경로의 경영혁신 시대(1992년 10월~1993년 3월)  | ▶1968년 포항제철 관리부 부장 1990년 포항제철 부회장 1992~93년 포항제철 회장 현재 철강협회 철강홍보위원회 위원장 | |
“창업에는 회계질서가 곧 회사질서로 직결됩니다. 박태준 당시 사장에게 건의했죠. 장부를 없애고 코드로 관리하자고요.” 황경로 전 회장은 포스코 경쟁력을 묻는 기자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회계 장부의 전산 시스템화’를 꼽았다. 그는 창업 멤버다. 68년 기획관리부장으로 입사해 포스코의 전산 회계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가 회장 재임 시절 이야기보다 창업 시대의 통합관리 시스템 얘기를 먼저 꺼낸 것도 그 이유에서다. “시커먼 장부가 없어지고 타자기로 한 번 두들기면 예산 전표가 나오는 전산 시스템이 만들어진 겁니다. 포스코의 공장과 부서마다 빠짐없이 주민등록번호처럼 고유한 코드번호가 매겨졌죠. 모든 비용이 당연히 코드번호를 통해 지출되고 결산됐습니다.” 황 전 회장은 “통합 시스템 도입 이후 경영진은 한 달 성과를 그 다음달 5일이면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며 “회사 원가와 이익, 생산시설 전부를 빠르게 파악한 것이 훗날 포스코의 과감한 투자 결정과 오차 없는 예산 책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말했다. 황 전 회장은 1977년 상무이사로 퇴임한 이후 삼성물산 상무이사, 삼척산업 사장, 동부산업 회장, 제철엔지니어링(PEC) 회장, 포항제철 상임고문 등을 거쳐 1990년 3월 6일 다시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포스코로 돌아왔다. 부회장 시절 박 명예회장을 보좌하며 빈틈없는 경영관리 능력을 발휘해 온 결과 창업 멤버 출신 포스코 2대 회장이 됐다. 그는 “24년간 포스코의 CEO로 있었던 박태준 회장을 지켜본 결과 단 한 번도 전략 판단을 잘못한 적이 없다고 확신한다”며 “창업 초기부터 지켜왔던 계획과 준비, 선진 통합 시스템은 포스코만의 경쟁력”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재임 시기인 92년 말부터 93년 초반까지는 전 세계적인 철강 시황 침체로 철강 판매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창업자의 든든한 울타리도 사라져 전 직원의 단합이 무엇보다 필요할 때였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1992년 1월부터 광양 1·2·3고로에서 시범 적용해 온 4조 3교대 중심의 신근무체제를 11월부터 전사에 확대 적용한 것. 철저한 관리파트 출신 회장의 준비된 경영 노하우는 1992년 생산·판매·손익 등 전 부문에서 당초 목표를 초과한 매출액 6조1821억원, 순이익 1852억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정명식의 조직정비 시대(1993년 3월~1994년 3월)  | ▶정명식(왼쪽) 회장이 현장시찰을 하고 있다. 1970년 포항종합제철 조사역 1987년 포항종합제철 사장 1993~94년 포항종합제철 회장 현재 과학기술포럼 창립회원 | |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믿고 맡기지 못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점검해야 합니다. 포스코 같은 철강회사는 신기술 개발과 엄청난 단위의 투자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데 신속한 판단력은 필수죠. 포스코가 제대로 한 것 중 하나가 위임 결재 시스템입니다.” 정명식 전 회장은 1970년 2월 입사해 토건부장, 건설본부장, 상무이사, 부사장, 사장을 역임하고 1992년 10월 부회장, 93년 3월 3대 회장을 맡았다. 창업시대가 물러난 후 발생할 수 있는 경영 공백을 최소화하고 경영 체제를 조속히 안정시키는 것이 그에게 떨어진 1차 숙제였다. 그는 회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1993년 3월 31일 조직개편을 단행, 종전 85부였던 조직 중 본사 8개 부와 포항제철소 1개 부를 통폐합해 76부로 축소했다. 349개였던 실·과 단위는 335개로 축소 조정했다. 임원과 간부사원의 슬림화도 추진했다. 회사 임원(촉탁 포함)을 49명에서 40명으로 줄였고, 출자사 임원을 158명에서 145명으로 줄였다. 내부 조직개편 재정비와 함께 하드웨어 성장도 이어졌다. 1993년 11월 1일 포항제철소에서 용융환원 제철 방법인 연산 60만t 규모의 코렉스(COREX) 설비를 착공한 것. 전 세계적으로 환경 규제가 엄격해지고 품질이 우수한 철광석과 석탄이 줄어듦에 따라 1980년대 후반부터 선진 철강사는 고로 공정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제철 공정 개발을 추진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용융환원 제철법이었다. 고로 공법은 반드시 철광석을 굵은 덩어리로 만드는 소결 공정과 유연탄을 코크스로 만드는 코크스 공정이 선행돼야 하지만 철광석과 유연탄을 그대로 용광로에 넣어 쇳물을 생산하는 용융환원 제철법은 공해 방지는 물론, 설비 투자 및 생산비 절감 면에서 탁월한 기술이었다. 이 공법이 바로 2007년 가동된 파이넥스 기술의 전신이었다. 이 시기 포스코는 수평적 사업다각화의 필요성에 따라 제2 이동통신 주도 사업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만제의 선진경영 시대(1994년 3월~1998년 3월)  | ▶1994년 뉴욕증시 상장 조인식에 서명하고 있는 김만제 회장(오른쪽). 1983년 재무부장관 1986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94~97년 포항종합제철 회장 현재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 |
“당시 세계적 철강업 추세는 규모 축소와 아웃소싱이었습니다. 구조조정은 포스코가 또 한번의 도약을 위해 결정한 최선의 선택이었죠.” 1994년 3월 외부인사 출신으론 최초로 포스코 회장이 된 김만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그는 경제학 박사로 서강대 교수,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금융통화위원, 재무부 장관, 민정당 국책평가위원 등을 역임한 경제 전문가였다. 그는 포스코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내부 반발도 없지 않았지만 취임 이후 2만5000여 명에 달하는 직원들을 2만 명 미만으로 줄이면서 조직 혁신을 위한 행보에 나섰다. 97년 3월 14일에는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했다.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책임경영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9명인 사내이사보다 1명이 더 많은 10명의 사외이사를 선임해 사외이사제의 실효성을 높였다. 지난 3월 27일 전화 인터뷰를 통해 김 전 회장은 “국내 기업 대부분은 외환위기 이후 사외이사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97년 포스코의 사외이사제 도입은 파격적인 선택이었다”고 회상했다. 1994년 초 경영환경은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하던 70~80년대 고도 성장시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함께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이 국제화되면서 개방이 급속히 진행됐고 세계적으로 철강산업이 크게 둔화되고 있었던 것. 포스코도 과거 성장시대의 체질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세계적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위크가 97년 11월 당시 2주 동안 연속으로 대한민국의 포항제철을 보도했어요. 철강 한 분야에만 집중 투자해 단기간에 신화를 이뤄낸 주목할 철강기업이라고요.” 그는 “당시 국내 일간지에 나온 기사를 지금도 오려두고 있다”며 통화 도중 신문 기사 내용 일부를 기자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포스코는 94년 국내 기업 최초로 뉴욕증시 상장, 95년 런던증시에 상장했다. 해외투자도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확대됐다. 94년부터 중국을 시작으로 베트남, 브라질 등 해외시장에 진출한 것. 96년엔 김만제 회장이 포스코 회장 최초로 세계철강협회 회장을 맡으며 포스코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유상부의 민영화 시대(1998년 3월~2003년 3월)  | ▶2001년 전략적 제휴 1주년에 자리를 함께한 유상부 회장(오른쪽)과 신일본제철의 지하야 아키라 사장. 1970년 포항종합제철 입사 1992년 포항종합제철 부사장 1998년~2003년 포항종합제철 회장 현재 포스코 상임고문 | |
“외환위기 직후 포스코 경영을 맡았죠. 이전까지의 포스코와 경영환경은 180도 달랐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국가 경제가 부도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은행 이자율이 하루가 다르게 눈덩이처럼 불어났죠. 기술 투자를 하는 건 나중 일이고 거대한 조직을 효율화하는 일이 급선무였죠.” 처음 비서를 통해 e-메일로 답변을 보내온 유상부 전 회장. 그는 결국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포스코 경쟁력에 대한 답변이 미진하다는 의견을 비서를 통해 전달하자 결국 수화기를 들었던 것. “포스코 경쟁력은 창업시대부터 이어져 온 신속한 의사전달 체계와 CEO의 과감한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98년 당시엔 이 전통적 내부 문화만 가지고는 벅찬 절체절명의 변화가 필요했어요.” 유 전 회장은 1970년 3월에 입사해 설비계획 1부장, 건설 1부장, 상무이사와 전무이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건설·생산기술·설비계획 등을 담당해 온 엔지니어 출신이다. 1993년 6월 퇴임한 이후 삼성중공업과 삼성재팬의 사장으로 재임하다 98년 5대 회장으로 회사에 복귀했다. 정통 포스코맨인 그가 느꼈을 위기감은 더욱 절박했을 것이다. 그가 택한 선택은 구조조정과 포스코 민영화였다. “철강산업은 제조업이기 때문에 경쟁력을 잃으면 안 됐죠. 의사결정을 기동성 있고 탄력성 있게 해야 했습니다. 공기업이나 정부출자기업은 마케팅을 의욕적으로 펼치려고 해도 정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포스코가 살아남기 위해선 민영화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98년 12월 14일 정부지분 3.14% 전량과 한국산업은행 지분 23.57% 중 2.73%를 주식예탁증서(DR) 발행을 통해 매각하는 것을 시작으로 포스코 민영화는 2000년 마무리됐다. 1972년 조업 개시 이후 처음으로 감산체제에 돌입했던 것도 이 시기였다. 국내 수요 감소와 해외의 수입규제가 겹치자 냉연공장 가동률을 포항 92%, 광양 88% 수준으로 조정한 것. 포스코는 외환위기로 촉발된 국내외 경영환경의 악조건을 수출 증대, 고부가가치 제품 판매 확대, 극한적 원가절감 등을 통해 창립 이후 처음으로 98년 2557만t으로 세계 1위의 조강생산 회사로 올라섰다. 2002년엔 글로벌 기업에 걸맞게 ‘포항제철주식회사’라는 사명 대신 초기부터 해외 브랜드로 사용해 온 ‘주식회사 포스코(POSCO)’를 공식 사명으로 정했다.
이구택의 글로벌 시대(2003년 3월~현재)  | ▶2005년 6월 이구택 회장이 나빈 파트나익 오리사주 총리와 인도 일관제철소 MOU 체결을 하고 있다. 1969년 포항제철 입사 1998년 포스코 사장 2003~현재 포스코 회장 한국철강협회장 | |
정작 이야기를 들어야 할 사람은 현재 포스코를 이끌어 가고 있는 이구택 회장이다. 하지만 끝내 직접 대답은 듣지 못했다. 이 회장은 요즘 창립 40주년 행사 준비로 포항과 서울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1969년 공채 1기로 입사해 수출부장, 경영정책부장, 상무이사, 전무이사, 부사장(포항제철소장)으로 재임하며 수출, 경영정책, 신사업 등 경영 전반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포스코에서만 39년을 있었으니 포스코와 인생을 같이한 셈이다. 2003년 포스코 6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지난해 연산 150만t 규모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가 준공됐다. 무엇보다 그의 치적은 포스코의 글로벌화다. 2004년 포스코 재팬(Posco-Japen), 2005년 포스코 인디아(Posco-India) 출범과 인도 일관제철소 MOU 체결 등 포스코 세계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포스코는 세계 최초 파이넥스 기술 상용화, 중국과 인도를 넘어 베트남·멕시코·동유럽 등 글로벌 사업 무대로 확장했다”며 “올해 안에 인도제철사업 추진은 어떤 장애와 난관이 있어도 분명한 발걸음을 내딛겠다”고 밝혔다. 올해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환율 및 금융 불안 등으로 앞날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 철강산업 또한 원료가격 급등, 경쟁 격화, 통상마찰의 확산으로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 지금 이구택 회장에겐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대처할 새로운 포스코 DNA를 발굴해 내는 게 과제일지 모른다.
숫자로 본 포스코 22206600000000 포스코의 지난해 매출. 22조2066억원이다. 영업이익은 4조3082억원. 6 지금까지 포스코 회장을 지낸 사람 수. 박태준·황경로·정명식·김만제·유상부·이구택(現) 17000 포스코의 국내 종업원 수. 장치산업인 관계로 매출에 비해 종업원 수가 많은 편은 아니다. 33000000 포스코의 지난해 철강 생산량. 포항제철이 1500만t, 광양제철 1800만t을 생산했다. 3.3 포스코의 지난해 세계시장 점유율. 세계시장 점유율 10%인 아르셀로 미탈의 생산량(1억900만t)과 비교해 추산한 수치다. 세계시장 순위는 4위. 30492700000000 포스코의 총 자산. 30조4927억원이다. 7 포스코의 글로벌 네트워크 숫자. EU, 리우데자네이루, 멕시코, 쿠알라룸푸르, 두바이, 자카르타, 프라하에 7개 사무실을 두고 있다. 23340000 포스코의 공장부지다. 광양이 1440만㎡, 포항이 894만㎡다. 전체면적은 2334만㎡로 축구장 크기의 3176배다. 31 해외출자사 수. 포스코 차이나 등 11개국 31개사에 출자했다. |
e-메일 인터뷰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
“포스코의 DNA는 헌신정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이코노미스트의 질문에 간단한 e-메일 답변을 보내왔다. 다음은 박 전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 40년 전 제철소를 건설해야 했던 절체절명의 이유는? “우리나라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1960년대 상황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은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적·국가적 과제였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일관제철소가 국가기간산업이기 때문이다. 철이 있어야 건설, 선박, 자동차, 가전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관련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은 포항제철소가 좋은 후판 제품을 생산하는 것을 보고 가까운 울산에 조선소를 건설했다. 포스코 창업정신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제철보국’도 철이 국가기간산업이기에 성립되는 것이다. 만약 철이 국가기간산업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철로써 보국(報國)을 하겠다고 맹세하고 외칠 수 있었겠나?”
-미래도 중요하다. 포스코에 거는 기대는. “지난 40년 동안 포스코는 제철보국의 사명을 훌륭하게 실현했다. 포스코 40년의 우리 현대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한 시대였는데, 포스코는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의 물적 토대를 튼튼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이제 한국은 선진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 새로운 시대적 소명이 이명박 정부 5년 동안에 다 완수될 수는 없고, 앞으로 5년 뒤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계속 선진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포스코는 확고부동한 글로벌 기업의 위상을 갖춰야 하고 세계 철강산업의 리더가 돼야 한다. 포스코가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 되고 글로벌 리더가 되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선진화에 이바지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창립 50주년의 포스코에 거는 나의 기대이고, 또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스코 40년을 끌어 온 경쟁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최저 비용’ ‘최고 효율’의 제철소를 건설했다는 점, ‘제철보국’ ‘우향우’라는 헌신정신이 포스코의 전통이며 DNA다.” |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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