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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아버지가 꿈에 보이면 되는 거야”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아버지가 꿈에 보이면 되는 거야”

▶열사의 땅이지만 새벽은 춥다. 정주영 회장은 언제나 현장에서는 현대건설 작업복 차림으로 ‘나도 근로자’라고 강조했다.

정주영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숱한 영광과 좌절을 겪으며 긴 여정을 걸었지만 좀체 밝히지 않았던 일화를 소개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면서도 누구나 과학 이상으로 믿는 영적(靈的)인 인간의 심성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 꿈을 꿔요. 이상하지? 그게 나한테는 신앙 같은 거야. 어릴 때 집을 나와서 몇 번 절망을 느끼고, 이러다가 내가 죽는 게 아닌가 그럴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아버지가 살아계셨지만 꿈에 보여 뭔가 말씀해 주시면 위기를 넘기게 되고, 나중에 큰 사업이나 대형 공사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도 꿈에 보이고 그래요. 그러면 반드시 일이 되는 거야. 조상이 그래서 참 무서운 거고 잘 모셔야 돼. 주베일 산업항 할 때도 그랬던 거에요. 은행보증 때문에 제일 애를 먹고 외국 은행들을 찾아다니며 통사정을 하고 그랬는데, 아버지가 보이면 일이 됐거든. 말이 그렇지 입찰보증금이 공사금액의 2%니까 응찰가를 10억 달로로만 잡아도 무려 2000만 달러 아니에요. 그런 돈이 어디 있어. 10억 달러면 그때 국가 예산의 25%가 된다고 했단 말이야. 그런 시절이에요. 그러니 그 당시 우리 정부도 보증이 어렵고 외환을 취급하는 외환은행은 아예 외국에 보증을 해 줄 수 있는 제도 자체가 없었어. 사실대로 말하면 한국의 외환은행 정도는 신용할 수 없다 그거지.”

- 보증서는 2000만 달러지만 결국 공사 전체 규모인 10억 달러를 보증 서는 것 아닙니까. 국내 은행 어디에서도 불가능했을 텐데요.
“그러니가 외국계 대형 은행에서 보증서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얼마나 속이 타는지 말이야. 처응ㅁ에는 온갖 은행 다 찾아다녔고 나중에는 바레인 국립은행에서 우리가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을 통해 차관을 들여다가 조선소를 건설해 내더라는 것도 알고 해서 자기네가 해 주겠다 했거든? 얼마나 고마운지 말이지. 근데 다음 날 안 되겠다는 거야. 입찰 날짜는 다가오고 피가 마르는 거예요. 그런데 꿈에 아버지가 보이더니 다음 날 사우디 국립상업은행에 가니까 2000만 달러 지불 보증서를 끊어주겠다고 하잖아요. 너무 희한하잖아? 그래가지고 결국 엄청난 경쟁을 했지만 10억 달러 주베일 공사를 따낸 거예요. 그때 기분이라는 건 잊을 수가 없어. 더구나 그게 무보증이야, 하하항.” 바레인 국립은행이 현대건설과 정 회장의 신용을 믿고 담보 하나 없이 입찰보증서뿐만 아니라 낙찰을 받게 되면 수행 보증금까지 발행해 주겠다고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바레인 국립은행의 자본금이 15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아 그보다 500만 달러나 더 많은 보증서 발급은 법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2000만 달러는 컸다. 그러나 바레인 은행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우디 국립상업은행에 보증서 발급을 요청했고, 결국 사우디 국립은행이 바레인 은행 신용을 믿고 승인한 것이지만 정 회장은 위기에서 기회를 만들어낸 결과의 환희가 어떻다는 것을 꿈을 통해 얘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정회장이 주베일 산업항 수주에 얼마나 혼신의 노력을 했던가 하는 것은 당시 사우디 주재 한국대사관 홍순길 건설관의 증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사실 내가 정주영 회장하고 개인적으로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내가 건설부 국장이었기 대문에 업체 사주들하고는 늘 정부가 발주하는 공사 문제로 대립해서…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그렇지만 개인 문제는 개인 문제고, 정말 정 회장의 집념은 대단하고 그야말로 집요한 노력, 높이 평가해야 됩니다. 사우디에서 입찰 보증서를 받아냈을 때 얘긴데, 사우디가 생기고 현대건설이 첫 케이스입니다. 그걸 정 회장이 해낸 거예요. 발주처 입장에서는 회사 규모와 신용을 보는 거니까 보증하는 은행을 보겠다, 당신네가 거래하는 은행을 보겠다는 거거든요. 보증 내용은 그런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창피한 얘기지만 2000만 달러니까 정부 보증서를 내겠다고 했더니 사우디 정부에서 안 받아준다 그랬어요. 너희 나라가 부도난 나라인데 거기에 무슨 신용이 있겠느냐 이겁니다. 사우디가 안 받으면 세계에서 다 안 받아요.” 한국이 당시 사실상 국가부도였다는 것은 국민만 모르고 있었지 세계 시장에서는 이미 ‘부도난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다. 국가부도 일보직전에서 박 대통령은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할 때마다 외환 문제를 다그쳤고, 각국에 주재하고 있던 외교관들은 돈 꾸러 다니기에 급급했다. 부총리가 은행마다 다니면서 구걸하고 최대 3000만 달러를 꾸어 왔을 때는 부도를 막는 데 털어 넣어야만 했을 정도로 외환 고갈 상태였던 것이다. ”꿈 얘기 듣고 황당하다 생각” “그런 형편인데, 일개 건설회장 회장이 2000만 달러 보증서를 끊어 달라고 하니 누가 해 줍니까. 그러니까 아주 아슬아슬한 얘기고 결국은 현대건설만 볼게 아니고 나는 국운이라고 보는데, 정 회장은 계속 찾아다니면서 떼를 쓰듯이 자신을 알리고 현대에 대해 자꾸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은행 측에서 딱하다는 듯이 그래요. ‘당신이 한국에서 제일 큰 회사를 가지고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겠단 말이야. 그러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보증서를 가져와야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보증을 가져오면 어떡하라는 거냐.’ 창피한 면박을 당하는 거죠. 그런데도 정 회장은 ‘내가 영어에 능통하지 못해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이러면서 가지고 온 16mm 필름을 막 돌리는 겁니다. 옆에 통역이 있지요, 하하하. 지금은 웃지만 눈물겨운 얘깁니다 이게. 내가 볼 때는 불가능한 것을 저 양반이 자꾸 우기는구나, 그렇게 판단되는데 정 회장은 무조건 꼭 해야 되겠다 이거에요. 당신이 입찰보증만 해 주면 꼭 수주한다는 얘기까지 해요. 그래가지고 결국은 받아 냈어요. 아주 급하게 돌아가던 시점인데, 그건 장관 아니라 총리가 가도 안 될 일이었어요.”

▶거대한 산업도시 주베일의 원유필드(field)선과 동일한 철구조물을 현대중공업에서 제작했다.

정 회장은 은행에 가기 전부터 마치 보증서를 받아 놓기라도 한 것처럼 확신에 찬 얘기도 하더라고 했다. “입찰 전날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는데, 우리 집사람이 오이지에다 김치랑 해서 드리니까 밥을 물에 말아 오이지하고 다 들어요. 그 당시에 환갑이 지났다고 그럽디다. 그러면서 밥 먹을 때 들은 얘기입니다만, 자기는 인생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 꿈을 꾼다고 말이죠. 내가 이번에도 입찰 보러 오면서 아버지 꿈을 꿨다고, 그래서 반드시 된다 이겁니다. 내가 듣기엔 황당하죠. 그러면서 올라갔던 거예요. 대사관하고 발주처는 제다(Jidda)에 있고 주베일은 페르시아만 남쪽이고 은행은 리야드에 있으니까 한국으로 보면 부산에서 저 북쪽 신의주까지 가는 건데 동네 다니듯이 다니면서 지칠 줄 모르고 무조건 받아낼 수 있다고 말이죠.” 물론 정 회장의 욕심에는 10억 달러라는 공사금액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건설인으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도 동기부여가 됐겠지만 주베일 산업항은 공사의 모든 업종이 망라된 종합공사였고, 특히 산업항만 수주하면 그때까지 극소수 선진국 건설사들만 독점해 온 해양구조물의 시공기술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계산이 무엇보다 강하게 정 회장을 끌어당겼을 것이다. 당연히 해양구조물 시공기술은 국내 건설사에는 꿈도 꿀 수 없던 분야였고 무한대 자산이라 할 만큼 시장성도 좋았다. 특히 공사기간 42개월이라는 대규모 산업시설 공사라는 것도 있지만 육상과 해상에서 펼쳐지는 토목부문 공사를 포함해 건축·전기·설비 부문과 함께 30만t 유조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해상 탱커터미널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해상 탱커터미널을 건설하자면 구조물 제작에서부터 수송, 하역, 설치까지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총체적인 건설 백과사전을 마스터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규모 면에서도 그때까지 세계 건설시장에 나온 프로젝트 중에서는 단연 압도적으로 컸다. 숫자만으로는 시각적인 감이 잡히지 않겠지만 콘크리트 작업량만 2년동안 하루에 1500~2000㎥씩 타설해야 하니까 8t트럭 500대 분량이고 해상 철구조물이 10만t이나 설치되는 공사였다. 일반 적으로 굉장하다는 항만공사가 5000~2만t 정도의 철구조물이 들어간다. 그리고 주베일항에는 돌까지 400만㎥가 투입돼야 했다. 국내 최대 규모였던 부산항 건설 때도 34만㎥가 투입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한 건설업체의 수주실적이나 기술습득 같은 목표에 포인트를 맞추기에는 차원이 다른 한국 정부 전체의 관심 사안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의 시대적 상황이 검은 황금이 폭발하듯 분출하는 중동에서 대형 공사로 시장을 확보하지 못하면 다른 건설시장은 희망이 없다는 판단이 정부 분위기를 압박했고, 그런 만큼 주베일 항만공사 수주는 국운을 건 절실한 프로젝트였다는 것이 관계짜들의 공통된 기억이었다. 현대건설과 정 회장의 성취욕이나 노력만으로 성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입찰 위해 국가적으로 지원 홍순길 건설관과 유양수 당시 사우디 대사의 회고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지만 주베일 산업항을 수주하기 위한 총력전은 민관(民官)이 따로 없었고 마치 생사를 건 전쟁을 치르듯 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좌담회를 하면 그 당시 있었던 사람들이 다들 꿈같은 얘기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도 흘리고 어떤 사람들은 참 기막힌 얘기여서 말도다 하지 못할 겁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도 있고, 박 대통령의 해내야 되겠다는 그런 집념, 또 하명을 받고 현지 대사가 뛰는 모습, 물론 현대 직원들도 처절할 정도로 매달렸지만 그런 건 말로 다 못해요. 지나고 보면 나라가 운이 있었던 것 같다는 말밖에….”(홍순길) 당시 주 사우디 한국 대사는 유양수 전 장관이었다. 유 대사는 소장으로 예편했지만 월남전을 비롯해 한국이 외교적으로 곤경에 처할 때마다 현지 대사로 부임 명령을 받아 그의 외교 경력은 ‘구원투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화려하면서도 숱한 역경을 헤쳐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사우디에서도 그랬다고 했다. “내가 부임한 것이 75년 9월 말인데, 주베일 산업항 문제로 그 전까지 홍순길 건설관이 굉장히 애를 쓰고 있었어요. 사우디라는 나라가 그런(공사 관련) 문제에 대해 비밀이 없는 나라예요. 대형 공사가 나오면 와자라든가, 장관이라든가, 실무 공무원을 통해 누구나 다 아는 얘기가 돼요. 당시 우리 건설부 장관은 김재규씨였는데, 부임하면서부터 박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면서 전문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참 옛날 얘기지만 그때는 전문이 대사관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코트라로 옵니다. 그 나라가 재외공관을 홍해 연안 제다에만 두도록 해놔서 외교 사절이 모여 있는 곳인데도 통신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어요. 하여간 코트라를 통해 받아보면 모든 노력을 다해 현대건설이 공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입찰자격을 획득하도록 적극 노력해라, 이게 매일 왔어요.”

- 전문 내용에 현대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까?
“그래요. 이미 현대도 발주처 정보를 입수하고 처음에는 입찰 자격부터 얻는 게 관건이니까 정 회장이 박 대통령한테 부탁을 드렸겠지요. 우리 정부도 꼭 수주를 해얗만 한다는 게 당시엔 지상명령이었으니까. 그 당시 중동에 대한 관심은 월남전 이후 최대였고, 사실 월남전이 끝나면서 이제는 중동밖에 없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었으니까 대통령부터 대단한 관심을 가지셨지요. 그랬는데 내가 월남 대사를 끝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으니까 대통령께서 빨리 사우디로 나가라고 말이야, 나가서 보니까 그런 엄청난 프로젝트하고 전쟁을 하다시피 하고 있는 겁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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