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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가뭄에 명동 사채시장만 붐빈다

돈 가뭄에 명동 사채시장만 붐빈다

정부가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다며 관리에 나서는 마당에, 중소기업은 돈 구할 데가 없다고 난리다. 은행 문턱은 높아지고, 증시 조달도 여의치 않다. 회사채 발행도 하늘의 별 따기다. 돈줄이 꽉 막혀버렸다. 기업 자금조달 시스템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얘기다. 하루 이틀 얘기도 아닌데,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이코노미스트가 중소기업 ‘돈 맥’을 뚫을 솔루션을 알아봤다.




#1.야박해진 은행 ‘중소기업 어쩌나’

최근 3년간 평균 120억원대 매출을 올렸던 중소보일러 제조업체인 D사. 이 회사는 올해 잇따른 수주 실패와 저가 출혈 경쟁으로 창사(1970년 설립) 이래 가장 혹독한 한 해를 보냈다.

원자재값 상승으로 수익성도 대폭 악화됐다. 이 회사 임원은 “매출이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반으로 줄었다”며 “올 연말에 만기가 돌아오는 단기 차입금 24억원(중소기업자금대출)을 갚을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최근 경기도 오산에 있는 공장부지와 아파트형 공장을 처분했다”고 밝혔다.

시중은행과 제2 금융권 문을 두드려 봤지만, 자산이 이미 담보로 잡혀 있었고, 신용등급이 떨어져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 이 임원의 얘기다.

은행의 대출 장벽이 점점 높아지면서 자금난에 빠진 중소기업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경쟁적으로 기업대출에 나섰던 시중은행들이 최근 대출을 꺼리고 있는 것은 경기 침체로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중은행들은 올 상반기 덩치는 커졌지만 총자산이익률(ROA), 자기자본이익률(ROE), 순이자마진(NIM) 등 수익성은 크게 나빠졌다. ROA와 ROE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0.62%P, 7.51%P 떨어졌고, 핵심 수익성 지표인 NIM도 0.20%P 하락했다.

또 본질적인 수익창출 능력을 나타내는 구조적 이익 증가율 역시 전년 동기 대비 0.18%P 하락해 1.29%로 추락했다. 이에 반해 연체율은 높아지고 있어 은행마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대출억제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이 대출억제에 나서면서 신용등급이 낮거나 담보가 부족한 중소기업은 신규 대출을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존 대출 역시 기업별 신용등급에 따라 규모를 축소하거나 만기 연장을 안 해줘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여신담당자는 “경기침체로 은행의 수익성만 나빠진 것이 아니라 기업들의 현금 흐름까지 악화되면서 연체율이 높아지고 있다”며 “하반기부터 은행마다 대출심사를 강화하고 전체 대출 규모도 줄여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올해 말까지 보수적인 대출심사를 통해 하반기 기업대출 증가폭을 상반기보다 줄여 나가기로 했다. 특히 건설업 및 부동산업 등은 ‘관리대상 업종’으로 선정해 영업점 전결권까지 제한하고 있는 상태다.

신한은행·하나은행 등도 대출심사를 강화해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은 높은 금리를 적용하거나 대출 연장도 까다롭게 하고 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뺏지 않겠다’던 은행들이 막상 경기가 흐려지자 동시 다발적으로 돈줄을 죄고 있는 것이다.

은행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진 점과 감독당국의 대출감독 강화도 기업대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금이탈로 운용자금이 부족해진 은행들이 은행채 및 CD 발행 등 고금리 자금조달에 나서면서 기업대출 금리도 덩달아 뛰고 있다.

4월 평균 7.09%였던 신규 기업대출 금리는 최근 7.4%로 올랐다. 이마저도 신용등급이 우량한 기업에나 해당되는 얘기다. 감독당국이 은행 건전성 강화를 이유로 지난 7월부터 대출감독 창구지도에 나서면서 고금리 기업대출도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중소기업의 한 CEO는 “운전자금 대출을 위해 은행에 갔더니 감독당국이 창구지도를 나와 (대출이) 어렵다는 이야기만 듣고 왔다”며 “하필 지금 시기에 대출감독을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분위기는 연례행사인 ‘추석 특별자금 대출 시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지난해만 해도 시중은행 및 지방은행은 일제히 중소기업 자금난 해소를 위해 특별자금을 풀었다. 우리·국민·신한은행이 각각 5000억원을 운용했고, 하나은행과 기업은행은 3000억원, 씨티은행이 1500억원 정도를 중소기업에 대출해줬다.

올해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추석이 코앞인데 추석 특별자금을 운용한다고 발표한 곳은 기업은행(3000억원)뿐이다. 한국은행도 지난해에는 금융기관을 통해 3550억원의 추석 운전자금을 지원했지만, 올해는 2000억원대로 줄였다.

그나마 부산은행(3000억원), 대구은행(3000억원), 경남은행(2000억원), 광주은행(1000억원) 등 지방은행들이 나서 지방 중소기업의 숨통을 터주고 있는 상태다. 경남은행 관계자는 “8월 중순부터 대출이 시행됐기 때문에 아직까지 집행이 많이 되지 않았지만, 중소기업들의 문의가 많아 9월 초가 되면 대부분 집행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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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증시침체 여파 ‘공모·증자 무산 잇따라’

상장회사인 Y사는 최근 신규사업 진출을 위한 생산시설을 짓기 위해 한 달 전 경매로 낙찰받은 30억원 상당의 토지와 건물을 매각했다. 낙찰 잔금을 구할 수 없을 만큼 돈줄이 말랐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여러 차례 증자와 사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시장 신뢰를 잃으면서, 주가도 하락세다. 회사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복잡한 사정도 있었지만, 개인 돈을 꾸는 것 외에는 돈을 구할 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단기차입금은 100억원이 넘는다. 곧 상환이 돌아온다. 생존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증시 침체로 주식시장에서의 자금조달도 힘든 상태다. 올 초 1800선에서 시작했던 주식시장은 미국발 신용경색 등의 영향으로 최근 1400선까지 밀렸다. 더욱이 투자심리마저 얼어붙으면서 기업공개(IPO)·유상증자 등 증시의 자금공급 기능은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실제로 최근 주식시장에선 기업들의 기업공개와 유상증자 계획이 실패하거나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전기전자 부품업체 LG이노텍은 최근 일반공모 청약을 실시했지만 청약경쟁률이 0.66 대 1로 미달됐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액과 순이익이 1조3214억원, 252억원에 달할 정도로 우량한 기업이었다. 청약미달로 남은 주식은 기업공개 주간사로 참여한 증권회사들이 모두 인수해야 했다. 이 같은 청약미달 사태는 올 들어 벌써 다섯 번이나 발생했다.

상장 포기도 잇따르고 있다. 외국기업으로는 두 번째로 국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될 예정이었던 중국계 연합과기공고유한공사는 최근 금융감독원에 상장 철회 신고서를 제출했다. 주식시장이 악화돼 회사 가치를 적절히 평가받기 어려워졌다는 게 이유였다.

또 코스닥시장 상장을 추진하던 중장비 전문기업인 흥국도 같은 이유로 상장 계획을 연기했다. 올 들어 상장을 포기한 업체는 6곳에 이른다. 김희주 대우증권 팀장은 “주식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은 그 특성상 증시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증시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증시의 자금공급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조달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증권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상장사의 유상증자 규모는 8조5388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 줄었다. 유상증자 물량도 12% 감소한 21억3800만 주에 그쳤다.

유상증자 방식도 제3자 배정이 6조2174억원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에 반해 주주 우선 공모와 주주 배정은 각각 4439억원, 1조2305억원에 머물렀다. 증시가 침체되자 기존 주주들마저 추가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미분양 건설사들이 담보 들고 명동에 찾아들 오는데, 아예 받지를 않아요.
누가 그런 회사에 돈을 대준답니까?” (J 어음중계업체 임원)

“신용이 괜찮은 편이라 신용보증기금 보증받고 은행에서 겨우 대출을 받았어요.
그래도 자금압박은 있어요. 회사 경영 20년 동안 사채는 한 번도 안 써봤는데,
돈 들어갈 곳이 많아 요즘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D 자동차부품사 부사장)

“명동 사채시장 분위기로 본다면, 중소기업들 자금난은 걱정스러운 수준입니다.
정부는 곧 괜찮아진다고 하는데, 이러다 중소업체들 다 죽습니다.”(I 대부업체 관계자)

“증자 안 되고, BW(신주인수권부사채) 안 되면, 방법이 있습니까?
빚 상환하려면 부동산이라도 팔아야죠.”(D 상장사 홍보팀장)

“금융감독원에서 대출 창구지도가 알게 모르게 있었어요.
추석 특별자금 한번 보세요. 지난해에 비해 얼마나 많이 줄었는지.”(지방은행 관계자)

“현재 시장의 자금순환을 보면 심장(시중 유동성)과 정맥(자금 수급)은 제대로
작동하는데 동맥(자금 공급)이 막혀 있는 상황입니다.”(김형오 아이투신운용 상무)




#3. 얼어붙은 회사채 시장 ‘명동 사채 기웃’

촉망받는 바이오기업이었던 J사(코스닥)는 지난 5월, 2007년 발행한 해외전환사채 110억원을 상환했다. 같은 달에 유상증자(96억원)에 성공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동안 제약사 인수와 공장 부지 매입 등 공격적 경영에 나섰던 J사는 지난해부터 매출 등 수익성이 크게 악화하면서 현금 자산이 대폭 축소됐다.

결국 지난 7월 무보증사채 신용등급이 ‘B’에서 ‘B-’로 하향됐다. 회사 관계자는 “연구개발 및 투자가 늘어가는 시점인데, 회사채 발행이 어렵게 됐다”며 “회사채 발행에 실패한 다른 기업 얘기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벤처협회 관계자는 “상장·비상장 할 것 없이 회사채는 엄두도 못 내고, 사채시장 쪽을 기웃거리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대출이나 주식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중소기업들이 상장 여부와 상관없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회사채 시장은 개점휴업 상태다. 경기 침체와 금리 상승으로 주요 투자자인 기관투자가(국민연금·펀드 등)들이 채권 투자를 줄이고,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는 기피하면서 채권 발행 자체가 올스톱된 상황이다.

최근에는 신용등급이 투자적격(BBB-) 이상인 중견기업들도 채권 발행에 애를 먹고 있다. 특히 부동산 침체로 재무상태가 악화된 건설사의 경우 리파이낸싱(차환용 채권 발행)마저 막혀 자금운용이 힘든 상태다.

김형호 아이투신운용 상무는 “최근에는 신용등급이 A 이하인 기업도 채권을 받아줄 데가 없어 발행이 힘든 상태”라며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채권 수요마저 급감하면서 시장은 그야말로 꽁꽁 얼어붙었다”고 전했다.

그나마 회사채 발행이 가능한 기업은 금리 급등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은행들이 자금조달을 위해 고금리 은행채를 대거 발행하면서 이보다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 금리가 껑충 뛰어오르고 있다. 실제 연초 8%대였던 회사채(BBB-, 3년) 금리는 최근 10%에 육박하고 있다.

기업대출, 유가증권 발행 등 제도권 자금조달이 힘들어지자 한계상황에 놓인 중소기업들은 사채시장으로 몰려가고 있다. ‘돈 빌리려면 번호표를 뽑아야 할 정도’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어음중계업체의 한 임원은 “명동(사채시장) 쪽은 지금 난리다”며 “어음할인 한도 조정이 있는 목요일이면 중소기업 임직원들이 줄을 서고, 이마저도 선착순으로 처리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분양 아파트를 담보로 가져오는 건설사 문의가 많은데 그런 곳은 명동에서도 안 받는다”며 “이쪽 분위기로 본다면 중소기업 자금난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시중에 돈은 넘친다는데…

중소기업 자금난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반면 시중에는 돈이 넘쳐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시중 유동성을 나타내는 광의통화(M2·평균잔액 기준)는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15.1% 늘었다.

9년 만에 최대 상승률을 기록했던 5월의 15.8%보다는 다소 낮지만 평균 4~11%대를 유지했던 지난 5년간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풍요 속의 빈곤’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시중 유동성이 넘쳐나고 있는데도 중소기업 자금난이 심화되는 것은 경기 침체에 따른 투자심리 위축과 현금 선호현상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금융권의 기업금융시스템의 문제도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중소기업의 ‘돈 맥’ 역할을 해야 할 기업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형호 상무는 “현재 시장의 자금순환을 보면 심장(시중 유동성)과 정맥(자금 수급)은 제대로 작동하는데 동맥(자금 공급)이 막혀 있는 상황”이라며 “돈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 자금난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기업금융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선진화하지 못한다면 작금의 중소기업 자금난은 매번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기업금융 시스템 중에서도 대출 시스템 개선이 가장 시급하다고 설명한다.

은행의 기업대출과 정책금융은 중소기업의 가장 큰 ‘돈 맥’이기 때문. 이를 위해 은행이나 정책당국은 단순히 재무제표만 살피는 정량적 대출심사에서 벗어나 기술력과 성장성 등 정성적인 부분까지 함께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충고다.

이 같은 선진화한 대출시스템을 갖추지 못할 경우 중소기업 자금난은 물론 투자금융 활성화 등 금융 선진화도 힘들다는 경고다. 정남기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은행의 기업여신은 정량적 평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정책금융도 회수율을 높이는 데 목매고 있다”며 “이런 대출시스템의 고질적 병폐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갈수록 작아지고 있는 회사채 시장을 살리는 것도 시급하다. 중소기업 입장에서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은 가장 안전한 장기자금 조달 수단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회사채 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채권발행, 유통개선, 수요확대 등 총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만큼 정부 주도의 지속 가능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필규 증권업협회 연구원은 “회사채 시장이 갈수록 위축되는 것은 신용평가에서부터 채권발행, 유통 등 채권시장 전반의 기능적 결함 때문”이라며 “시장 참가자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의지를 갖고 시장 활성화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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