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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풀어라, 사람 써라” … 기업이 봉인가?

“돈 풀어라, 사람 써라” … 기업이 봉인가?

요즘 정치인이나 관료들을 보면, 대기업이 돈뭉치를 금고에 쌓아두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돈은 많이 벌면서 투자는 하지 않는다’고 닦달이다. 요구 강도는 점차 세진다. 기업은 괴롭기만 하다.

얼마 전 여당 대표는 대기업을 향해 “여러분의 금고에는 100조원에 달하는 현금성 자산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늘 즉시 금고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한 국회의원은 “사내 유보금의 지퍼를 꼭 채워 놓고 열지 않으면 나중에 지탄을 어떻게 받으려고 하느냐”고도 한다. 요즘은 아예 당정 합작 분위기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1일 위기관리대책회의 도중 “재계가 고통분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윤 장관은 “불확실한 시대에 적절한 투자 모델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위기 극복을 위해 기업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적극 동참해 달라”고 했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은 지난달부터 그룹사 총수를 잇따라 만나고 있다. 지경부 관계자는 “현장 얘기를 듣기 위한 경제 주무부처 장관과 기업인들 간의 만남”이라고 하지만, 투자와 일자리를 독려(또는 압박)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 장관은 지난 2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12개 대기업(LG, SK, 두산, STX, GS, CJ, 한진, 코오롱, 한화, 삼성, 현대차, LS) CEO를 만났다고 한다. 일자리를 늘리라는 압박도 이어졌다. 이윤호 장관은 지난 12일 경제5단체장과 만난 자리에서 “기업들이 조속히 신규 채용계획을 발표해 달라”고 했다.

정부 권고에 따라 ‘잡 셰어링(일자리 나누기)’ 동참을 발표했다가 ‘임금깎기’ ‘청년 차별’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는 기업에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모 대기업 인사담당 중견간부는 “오래 기획했던 채용계획이 어느 날 갑자기 뒤바뀌고 다소 즉흥적인 오너 결정이 나온다”며 “황당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지난 한 달간 정부 관료와 정치권이 기업을 향해 던진 메시지를 종합하면 “사회의 일원으로서 지탄받지 않으려면, 돈 많은 기업이 투자에 나서고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에 현금이 넘친다고?
그렇게 기업 사정을 모를까?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10일 발표한 ‘2009년 시설투자계획’에 따르면, 국내 600대 기업이 올해 잡은 투자 규모는 86조8000억원이다. 전년 대비 2.5% 감소했다. 2001년 이후 8년 만의 감소다. 투자를 줄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수·수출 모두 어렵고, 돈을 조달하는 것도 힘들며, 기존 사업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도 속속 쓰러져 가는 세계 경제위기 속에 지난해와 비슷한 87조원 투자가 적은 액수인가? 87조원은 불확실 속에서도 많은 기업이 미래 성장을 위해 선택한 어려운 결심이 녹아든 돈이다.‘100조원 현금’도 정치가에게만 보이는 돈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의 현금성 자산은 43조원 정도다.

국내 상장사 전체의 사내 유보금은 390조원. 이 중 현금성 자산은 71조원가량이다. 이 돈은 정치가들 얘기처럼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이 돈은 원료와 부품을 사오고 수입대금 갚고 월급 주고 생산설비를 운영하는 운전자금이다. 더구나 국내 상장사가 빌린 돈은 87조원이다.


현금성 자산보다 많다. 이 중 51조원은 1년 내에 갚아야 할 돈(단기차입금)이다. 이런 사정을 몰랐건 알면서도 모른 척했건, 분명한 것은 투자와 고용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기업의 몫이자 판단이다.

투자는 기업의 경험과 감각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은 어려워도 된다 싶으면 투자하는 것이 기업이고, 케인스는 그것을 ‘동물적 본능’이라 불렀다.

그 본능을 깨우는 것이 당정의 압박이어서는 안 된다. 고용도 마찬가지다. 고용은 전형적인 후행지표다. 기업이 돈을 잘 벌면 더 뽑고, 못 벌면 덜 뽑는 것이 기초 경제고 경영 원리다.


산업금융 시스템부터 개선하라

“제조업 체감지수가 2월에 43이었다. 외환위기 수준이다. 경기가 언제 회복될 것이라는 명확한 진단도 없는 상태다. 지난 하반기도 안 좋았지만 올 상반기는 더 걱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 사내 유보금 가지고 그것도 100조원이라고 딱 찍어 풀라고 하면 일반 국민은 100조원나 있는데 꽁꽁 묶어두고 있다고 볼 것 아니냐. 요즘 기업들 회사채 발행하려고 난리다. 돈이 넘쳐나는데 왜 또 부채를 지겠는가?”

전경련 관계자의 얘기다. 실제로 지난달 기업의 회사채 순발행 규모는 6조1000억원이었다. 월간 기준 사상 최대치다. 회사채를 발행한 곳은 대부분 대기업이다. 특히 1~2월에 집중적으로 회사채를 내놨다. 시장에선 운영자금 성격보다는 선제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한다. 그만큼 향후 경기전망과 신용흐름을 어둡게 보고 있다는 얘기다.

30조~50조원에 달하는 ‘수퍼추경’으로 국채가 풀리면서 회사채가 외면 받으면, 가뜩이나 은행 대출, 해외증권 발행도 어려운 마당에 돈을 구하기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판단도 배경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시장에 돈이 정상적으로 돌지 않는 상황에서 재무 리스크를 최소한 줄이기 위해 이자를 주고 돈을 빌리는 기업에 ‘돈 풀라’는 요구는 스트레스 그 자체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2일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 직후 “작년 11월과 12월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경기하강이 조금 더 깊고 길어질 것”이라며 “앞으로 우리 경제를 보면, 고용사정이 좋지 않고 투자심리도 위축돼 있기 때문에 내수가 당분간 좋지 않을 것이다. 수출도 상당한 폭의 감소가 계속될 것으로 보여 경제성장률이 낮아질 위험이 상당히 크다”고 말했다.

지금은 기업이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할 수밖에 없는 때다. 성장을 위한 투자가 멈추는 것도 곤란하지만 당정과 사회 분위기에 끌려 기부성 투자를 하는 것은 더 곤란하다. 5대 그룹에 속하는 한 대기업 임원은 “작년 초에 세운 경영계획을 하반기에 수정했고, 올해 다시 고치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경기가 놀랄 만큼 급속히 나빠지는데, 새로운 투자계획을 내라는 정치권의 요구는 무리”라고 말했다.

정병철 전경련 부회장은 지난 12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신입 직원 및 인턴 채용 확대 사업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면서 “올해 600대 기업의 투자계획은 작년과 거의 같은 수준인 87조원이며, 이를 차질 없이 집행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투자 확대 요구에 일단 수긍할 수 없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다만 정 부회장은 “그룹 총수들이 기자회견에서 반드시 하라고 한 말은 롤오버(만기연장)였다”며 “정부가 대기업에 롤오버 혜택을 주면 투자를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행간에서 고육지책이 읽힌다. 이번 신용경색 전에도 기업은 돈 구하기가 어려웠다. 오직 금융을 위한 금융산업 육성에 정부가 몰두하면서, 산업현장으로 돈이 흘러가는 수로는 말라버렸다.

증시는 기업으로 들어가는 돈보다, 빠져나가는 돈이 더 많은 구조다. 오래전부터 회사채 시장은 제 기능을 못하고, 은행도 대출 이벤트 시즌을 제외하곤 기업에 돈 빌려주는 것에 인색했다. 그 와중에 산업은행·기업은행 민영화도 추진됐다. 대기업도 돈 걱정인데,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에 투자하라, 일자리 더 늘리라고 요구하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산업금융 시스템에 대해 고민해 봤다면 이토록 기업에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지난 외환위기 때 정부와 정치권이 ‘국민’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면, 이번에는 기업에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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