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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큰 경영자’ 재계 구심점 적역

‘귀 큰 경영자’ 재계 구심점 적역

2월 24일 오전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정기총회에서 허창수 신임 회장이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

회장 교체 시기마다 적임자를 찾지 못해 우여곡절을 겪었던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허창수(63·GS그룹 회장) 회장 체제로 새롭게 출범했다. 전경련은 2월 24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정기총회를 열어 허 회장을 제33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전경련은 24∼25대 회장을 지낸 김우중 회장(당시 대우 회장) 이후 12년 만에 10대 그룹 총수를 사령탑으로 맞게 됐다.

GS는 자산 기준으로 재계 서열 7위다. GS칼텍스를 비롯해 에너지와 석유화학, 유통 사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계열분리 당시 18조7000억원이었던 자산 규모는 2009년 말 기준 43조원으로 130% 증가했다. 매출 규모도 23조1000억원에서 52조원으로 125% 불어났다. 현재 70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허 회장은 고(故) 구인회 LG 창업회장의 동업자였던 고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GS칼텍스 허동수 회장과는 사촌형제지간이다.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훤칠한 용모와 온화한 성품, 신중한 언행으로 경제계에서 신망과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로열 패밀리의 일원이지만 계열사들을 두루 거치며 실무경험을 쌓아 현업에도 밝은 편이다.

경남 진주 태생으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경남고와 고려대 경영학과(67학번)를 졸업하고 미국 세인트루이스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이명박 대통령(61학번)의 고려대 경영학과 6년 후배이기도 하다. 1977년 LG그룹 기조실로 입사해 LG상사·LG화학·LG산전·LG전선 등 계열 분리 전 LG그룹 내 계열사를 두루 돌며 일을 배웠다. LG상사 재직 시절 홍콩과 도쿄 지사 등에서 근무해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하다. 하지만 LG그룹 시절에는 동업자인 구씨 경영자들에 비해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로 불리기도 했다.



계열사 두루 거쳐 현업에도 밝아1995년 구자경 명예회장의 퇴임에 맞춰 구-허씨 양가의 창업세대 경영진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남에 따라 허준구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LG전선 회장에 선임됐으며 2004년 GS그룹이 LG그룹에서 분할되면서 지주회사인 GS홀딩스 회장으로 취임했다. 지금도 월스트리트 저널과 비즈니스 위크 등 해외 유수의 경제전문지를 탐독하며 국제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으며 새로운 경영의 트렌드와 관련한 서적을 즐겨 읽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일이 업무에 간섭하기보다는 전문경영인에게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다. 사장단 회의에서도 참석자들의 의견을 모두 경청한 다음에야 입을 떼 중요 사안에 대해서만 방향을 제시해 ‘선이 굵은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입보다 귀가 큰 CEO’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GS그룹 관계자는 “회장님은 성격이 소탈하면서도 스스로 나서거나 자신을 겉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해 주는 스타일”이라며 “GS그룹의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이 같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허 회장에게는 비서실은 물론 비서 팀도 따로 없다. 과장급 수행비서 한 명이 스케줄을 챙길 뿐이다. 출장도 수행비서 없이 혼자 훌쩍 떠나는 경우가 많다. 오페라와 첨단 디지털 기기에 관심이 많은 감성 경영인이란 얘기도 듣는다. 국내에서 열리는 유명한 오페라 공연은 꼭 챙겨 본다. 휴대전화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전통의 팝그룹 ‘아바’의 노래가 가득하다.

허 회장은 이번에 만장일치로 추대를 받았다. 전경련에 큰 지분(?)을 갖고 있는 이건희 삼성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그를 지지한 데다 다른 중견그룹 총수들은 저마다 회장직으로 고사할 만한 사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 회장도 처음엔 고사했지만 전체의 뜻을 알고는 선선히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전경련은 최근 10여 년 동안 이번 추대-수락 과정만큼 수월하고 성공적으로 바통 터치를 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열린 대기업 총수 초청 조찬 간담회에서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참석자 대표로 인사말을 하고 있다(왼쪽부터 GS 허창수 회장, 이 회장, 이명박 대통령,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

사실 전경련 회장 선출 과정은 매번 난항이었다. 회장단의 의견이 일치한 적이 많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많은 총수가 정부와의 관계설정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경련 회장직은 원한다고 할 수도 없고, 싫다고 물리칠 수도 없다”는 말이 재계에 회자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23대 회장이었던 최종현 SK그룹 전 회장이 폐암으로 별세한 1998년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조석래 회장 등이 자천타천으로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회장단의 선택은 김우중 전 회장이었다. 그룹 규모나 총수 지명도 면에서 김 전 회장은 조 회장을 압도했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대우 사태로 조기에 낙마한 이후 전경련은 차기 회장을 선출하는 데 본격적인 진통을 겪기 시작한다.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어수선했던 상황에서 선뜻 회장직을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최연장자 우선’ 전통에 따라 김각중 회장이 김우중 회장의 잔여 임기와 새로운 임기를 모두 채워야 했다. 당시 정몽구 회장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지만 현대그룹의 계열분리 사태 등으로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한다고 할 수 없고 싫다고 물리칠 수 없다 회장 선임은 외부 환경이 불확실할수록 더 어려웠다. 김각중 회장의 후임자는 손길승 SK 전 회장이었다. 그가 이례적으로 전문경영인으로 전경련 회장 자리에 올랐다. 모든 오너 총수가 전경련 회장을 맡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불투명해진 기업 환경은 오너 총수들의 운신의 폭을 극도로 제약했다.

하지만 손 회장의 임기는 길지 않았다. 그는 SK 사태로 취임 8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 손 회장의 후임자를 찾는 작업도 쉽지 않았다. 전경련 수장이 불명예 퇴진한 상황에서 섣불리 나서서는 안 된다는 기류가 재계 내에 팽배해 있던 시절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전가의 보도’인 최연장자 원칙이 적용돼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강 회장은 임기 말 후임자로 이건희 회장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승지원을 직접 찾아가 후임을 맡아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다. 하지만 삼성 특검 사태 등으로 시련을 겪고 있던 이 회장도 불편한 대정부 관계 등을 감안해 끝내 고사했다.

강신호 회장의 후임자는 최근까지 전경련을 이끈 조석래 회장이다. 조 회장 선출은 전경련 안팎에 누적돼 있던 경제계의 불만이 폭발하는 과정을 거쳤다. 당시 회장단은 강신호 회장의 연임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조석래 회장 쪽으로 분위기가 기운 것은 이준용 대림 회장이 공개석상에서 ‘70대 회장 용퇴론’을 들고 나오면서다.

하지만 이번 허 회장의 추대 과정은 재계가 모처럼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관철시킨 스토리로 오랫동안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허 회장과 경쟁관계를 형성할 만한 특정인이 없었으며 비토하는 목소리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애초 전경련이 추대 1순위로 꼽은 인물은 ‘영원한 후보’ 이건희 회장이었다. 회장단은 지난해 여름 조석래 회장이 신병치료를 이유로 전경련 회장직 사퇴 의사를 밝히자 두 차례나 이 회장을 찾아가 회장직 수락을 강하게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경영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아이폰-아이패드를 앞세운 애플의 진격에 강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이 회장으로선 다른 곳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다만 이 회장은 허창수 회장을 포함해 3∼4명의 후보(?) 명단을 제시했다는 후문이다.

2월 24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정기총회에서 신임 허창수 회장(왼쪽)이 취임사를 한 뒤 조석래 전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전경련 다시 힘 받을까이건희 회장을 설득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가자 회장단은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 회장은 부친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과거 전경련 회장직을 10년이나 맡았다는 이유로 이건희 회장만큼이나 자주 거론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 회장 역시 자동차 사업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고사하고 말았다.

이때 정 회장도 이 회장처럼 차기 전경련 회장에 대한 나름의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연륜을 갖춘 60대 연령의 회장 중 기업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것. 허 회장은 이런 기준으로 보더라도 적임자로 평가할 수 있다. 4대 그룹의 일원인 구본무 LG 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은 별도의 조건 없이 “새 회장이 누가 되든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혀온 터였다.

조양호 한진 회장과 박용현 두산 회장도 한때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지만 본인들이 워낙 강력하게 고사하는 바람에 추대에 이르지는 못했다.

허 회장은 만장일치 추대를 받은 데다 과거 10여 년간 전경련을 이끌었던 중견그룹 총수들과 달리 재계 내부에 갖는 무게감이 달라 향후 전경련의 위상강화와 함께 경제계의 목소리를 적극 개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전경련의 존립 가치는 자유시장 경제의 창달과 국민경제의 발전”이라며 “이를 실현하는 데 회장으로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허 회장은 전경련의 비전 실현을 위한 방법으로 범경제계의 미래 비전 공유와 경제의 글로벌화 촉진, 국민과의 소통강화 등을 언급했다. 또 최근 ‘협력사와 초과 이익 공유’를 앞세워 재계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에 대해서도 “만나면 우리 의견을 충분히 전달하겠다”고 밝혀 향후 정부와 적극 대화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허 회장 체제가 부담스러운 경제계의 여러 현안과 해묵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나가며 순항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유동적이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적 경제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게 가장 부담스럽다.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초과이익을 공유해야 한다”는 정부 측의 압박은 난제 중의 난제다. 반시장적이라고 정면으로 반발하자니 향후 대정부 관계가 껄끄러울 것 같고, 수용하기엔 전경련 회원사들의 불만이 너무 크다. 정부가 물가를 잡기 위해 소비재뿐 아니라 생산재에 대한 가격통제까지 하면서 가뜩이나 기업들의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전경련이 거의 맹목적으로 정부에 협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재계 내부의 비판적인 시각을 어떤 형태로 걸러낼지도 관심사다. 실제 일부 회원사는 “전경련이 회원들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정부 눈치만 본다”며 불만을 늘어놓고 있다.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을 갖고 있는 허 회장이 이런 기류를 재계 전체의 목소리로 결집하는 데 성공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그는 일단 강공보다는 ‘귀가 큰 경영자’라는 평가처럼 다양한 의견과 처방을 수렴해 정부와 적극적인 대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역대 10년간의 전경련 회장들에 비해 대표성이 가장 큰 인물이다. 허 회장에게 거는 기대도, 재계의 기대도 높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단기적으론 허 회장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겠지만 경제계 전체에는 새로운 활력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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