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EO essay] 중년 친구 넷의 추억여행

얼마 전 어렵게 시간을 맞춰 친구 세 명과 보길도를 다녀왔다. 어부사시사의 무대인 그 보길도다. 그런데 그곳 여행이 처음은 아니었다. 함께 간 친구들도. 우리는 딱 30년 전 대학 시절 겨울방학에 보길도를 간 적이 있다. 네 명의 중년은 당시 추억을 되짚기로 의기투합했다. 굳이 다시 찾은 데는 조그만 추억이랄까, 사연이 있다.
30년 전 남원과 구례를 거쳐 완도 선착장에 다다랐을 때에는 돈이 바닥나 여행을 계속하기 곤란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돌아가자, 아니다 갈 때까지 가보자” 논란 끝에 뻔한 결론이 났다. 갈 때까지 가는 걸로 하고 배를 탔다. 그 때만 해도 우리는 방랑의 자유인이었다. 노화도라는 섬에서 통통배로 갈아타고 가는데 우리 일행만 빼고는 거의 보길도 주민이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이 신기한지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남은 돈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자 이구동성으로 김모씨 댁에 가서 재워달라고 부탁하라고 했다. 마을의 유지였다. 밑져야 본전인 우리는 일러준 대로 김씨 댁을 찾아갔다. 찾기 어렵지도 않았다. 먼발치에서도 늠름한 기와집 한 채가 다른 집과 확실히 구별됐다.
대문을 두드려 사정 얘기를 하니 일하는 사람이 알아본 후에 우리를 안내했다. 들어가 보니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나뉘어 있고 정원도 기품이 있었다. 사랑채를 통째로 내주고 장작 한 짐도 내놓았다. 불 조절을 잘 못해 밤새 엄청 뜨거웠던 기억이 난다. 저녁상을 받아서 포식하고 있는데 항아리에 막걸리까지 담아오니 더 바랄게 없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안채로 건너오라고 했다. 건너 가니 바깥양반은 서울로 출타 중이고 안주인이 우리 일행에게 잘 차려진 아침상을 대접했다. 단정한 한복차림이었는데 지금의 내 나이쯤이었던 것 같다. 서울의 명문 여학교를 졸업한 서울댁이었다. 배불리 먹고 나니 이 아주머니가 돌아가는 여비에 보태라며 노란 봉투를 내놓았다. 시골 인심이라고 해도 생면부지인 우리에게 너무나 따뜻하고 과분한 대접이었다. 무엇보다 기억나는 건 이 신세를 어떻게 갚겠냐는 인사 치레에 아주머니가 던진 말이다. “나에게 갚지 않더라도 학생들이 앞으로 누군가에게 베풀면 갚는 거지요.”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찾은 보길도는 많이 변해 있었다. 자동차가 없던 섬이었는데 도로가 깔리고 전복이 수입원이 되어 바다 곳곳이 양식장이었다. 포구의 위치도 바뀌어 고택으로 가는 길은 옛날보다 훨씬 멀었다. 30분을 걸으니 그 한옥이 나타났다.
집 안은 다행히 옛 기품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듯해 보이는 할머니가 예의 그 안주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시 찾은 사연을 얘기했더니 자세한 기억은 없었지만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옛 신세의 일부나마 갚는다며 드린 용돈도 기쁘게 받아줬다. 여든이 넘은 연세에도 정정했다. 사진 꼭 보내라며 e메일 주소까지 알려줬다. 우리가 예전에 묵었던 사랑채에 들어가 앉아보고 정원도 둘러보고 마루에 있던 풍금도 눌러봤다. 빛 바랜 어릴 적 앨범을 들춰보는 것 같은 마법의 시간이었다.
30년의 추억을 되돌려 친구들과 떠났던 따뜻한 여행에서 돌아왔다. 또 다른 30년을 살아갈 양분이 될 듯하다. 늦가을의 끝자락이다.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내년 계획을 세우느라 다들 정신이 없겠지만 여유를 갖고 일상을 잠시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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