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 LG전자 부회장 - ‘독한 경영’ 1년, 승부는 이제부터다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 ‘독한 경영’ 1년, 승부는 이제부터다
올해 1월7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이 취임 후 처음으로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실적 부진을 이유로 물러난 남용 전 부회장을 대신해 작년 10월1일 LG전자 사령탑에 오른 구 부회장은 취임 이후 100일 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 회사의 위기상황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란 판단에서다. 때문에 그가 100일간의 고민 끝에 내놓을 위기극복 해법에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날 그의 발언 수위는 무척 강했다. 또한 솔직했다. 그는 “LG전자는 제조업 경쟁력의 기본 요소가 모두 무너졌다”며 “지금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다”고 말했다. 회사의 미래에 대해서도 결코 장밋빛 비전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항공모함의 방향은 돛배를 바꾸는 것처럼 빨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CEO 한 사람 왔다고 큰 회사가 하루 아침에 뭔가 고쳐질 것으로 기대했다면 이 자리에 잘못 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주창한 게 ‘독한 LG’다.
그로부터 11개월이 지났다. 취임 1년을 넘긴 지금 그가 이끄는 LG전자는 과연 어떤 변화를 맞았을까. 그는 쇠락의 길로 가던 LG전자란 거대 항공모함의 방향을 얼마나 바꿔놨을까. LG전자는 과연 독해졌을까.
위기의 순간 등판한 구원투수구 부회장 취임 직전 LG전자는 ‘난파선’과도 같았다. TV와 함께 회사의 주력사업인 휴대전화 분야에서 경쟁사들에 급격히 밀렸다. 작년 3분기에만 1852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더 큰 문제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란 새로운 IT기업들간 전쟁터에서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경쟁력이 쇠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구 부회장이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된 게 바로 이 시기다. 어찌 보면 창사 이래 최대 위기의 순간이었다.
등판 첫날인 작년 10월1일. 구 부회장의 첫 번째 조치는 인사였다. 사업본부장 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TV사업을 담당하는 HE(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장에 권희원 부사장을, 휴대전화를 맡는 MC(모바일커뮤니케이션즈) 사업본부장에 박종석 부사장을 전진 배치했다. 전사 차원의 마케팅을 총괄하는 글로벌 마케팅 담당을 신설해 강신익 사장을 임명했고 안승권 사장을 R&D를 총괄하는 최고기술책임자(CTO)에 앉혔다.
인사를 통해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부진한 사업을 하루 빨리 정상화하고, 조직에 스피드를 배가하겠다는 의지였다. LG그룹 관계자는 “과거 남용 부회장 시절 R&D를 등한시한 채 외국 기업 출신을 무분별하게 ‘C레벌’(각 부문 최고책임자)에 앉히는 등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인사”라고 평가했다.
인사 다음으로 그가 착수한 건 ‘현장경영’이다. LG전자는 구미와 창원, 평택, 서울 가산동에 사업장을 두고 있다. 그는 매달 이들 사업장을 돌면서 현장 임원들과 만나 LG전자의 문제점을 경청했다. 해가 바뀐 지금도 이 일정에는 변함이 없다. LG 관계자는 “과거 구 부회장은 보고 자리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임직원들에겐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며 “그런데 현장 방문에선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고 말했다.
서서히 색깔을 드러내다LG전자는 작년 4분기 2457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연간 기준 영업이익은 1765억원으로 2009년 2조6807억원 대비 15분의 1로 줄었다.
항공모함의 방향을 바꾸기 쉽지 않다던 구회장의 말처럼 LG전자의 변화는 서서히 진행됐다. 구 부회장은 먼저 TV 쪽부터 ‘독한 근성’을 강조했다. 세계 TV시장 1위인 삼성전자를 상대로 3차원(3D) TV로 맞불 작전을 놓았다. 삼성전자의 셔터글라스 방식 3D TV가 LG전자의 편광필름 방식 3D TV에 비해 화질, 기술력이 뒤쳐진다는 점을 물고 늘어졌다. 비교 광고도 불사했다. 휴대전화 사업도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경쟁기업들보다 늦었지만 스마트폰 기술과 4세대 이동통신으로 꼽히는 LTE(롱텀에볼루션)제품을 시장에 내놨다.
성과는 조금씩 나타났다. 1분기 영업이익은 1308억원으로 세 분기 만에 흑자 전환을 이뤘다. 2분기에도 1582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물론 3분기엔 다시 319억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휴대전화 부문 부진이 주된 원인이다. 3분기에 새 스마트폰을 내놓지 못해 휴대전화 부문 매출이 2조6892억원으로 전 분기보다 16% 감소했다. 영업손실도 1388억원으로 지난 2분기에 비해 적자 폭이 1.5배 이상 커졌다.
구 부회장이 2단계 체질 개선을 시작한 건 이 즈음이다. 먼저 해외 법인에 대한 인력 재조정을 시작했다. 국내 사업본부와 해외 법인들이 중복해서 뒀던 인력과 업무를 줄이는 ‘군살빼기’에 나선 것이다. LG전자 고위 임원은 “인위적인 인력 감축은 없다. 적재적소에 필요 인력을 배치하고 불요불급한 업무를 줄이는 과정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LG전자가 해외법인에 이어 국내법인에 대한 인력 구조조정에 착수했고 연말 이후 내년까지 계속 추진할 것이란 게 시장의 대체적 관측이다.
내년을 대비한 ‘실탄’도 확보했다. LG전자는 11월3일 이사회를 열어 1조621억원 규모의 유상 증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증자로 유입되는 자금 가운데 절반 이상인 6109억원은 휴대전화 사업 경쟁력 강화에 투입하기로 했다.
4세대 이동통신인 LTE 시장에서 반전의 계기를 찾아 적자에 빠진 휴대전화 사업을 흑자로 되돌리기 위해서다. 나머지 5430억원은 가전과 TV 등 개별 사업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에 쓴다.
구 부회장이 구상 중인 세부 사업 전략도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다. 핵심 분야는 역시 휴대전화와 TV다. 먼저 휴대전화 쪽에서는 내년에 전략 스마트폰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를 위해 주력 제품 수를 현재 10개 정도에서 내년 3∼5개로 줄일 방침이다. 2007년 LG전자 휴대전화 사업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프라다폰 신화’도 재현한다는 계획이다. 내년 초 프라다와 함께 신형 스마트폰을 출시해 고급화 전략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타고난 싸움꾼, 구본준이 그릴 LG는TV사업에서는 내년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 전시회에서 구글과 함께 차세대 TV로 꼽히는 스마트TV 신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구글2.0’으로 불리는 이 TV는 동영상 웹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방대한 양의 동영상 콘텐트를 즐길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시장에선 휴대전화에 이어 TV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구글과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LG전자의 결함이란 점에서 구글2.0 TV의 파급력이 꽤 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업계는 구 부회장의 새로운 사업 전략이 나오는 내년이 LG전자의 깜짝 부활이냐, 계속된 쇠락이냐를 좌우할 중대 시점이라고 본다. LG그룹 관계자는 “구 부회장의 경영 성과가 나타나는 건 아마도 내년 초부터 일 것”이라고 말했다.
LG그룹 안에서도 구 부회장 특유의 승부수가 내년에 나올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과거 사업을 할 때마다 불도저 같은 ‘뚝심’을 발휘했던 구 부회장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다. 이와 관련해 구 부회장에 대한 외부 평가는 ‘독설가’ ‘싸움꾼’이다. 경쟁사를 이기기 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고, 또 지지 않으려는 그의 독특한 경영 스타일 때문에 나온 얘기다. LG 내부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 사장 시절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2003년 구본준 당시 LG필립스LCD 사장은 일본 도쿄에서 열린 디스플레이 전문 전시회 ‘EDEX 2003’에서 기자들과 만나 “삼성전자가 1등을 빼앗긴 것은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패배와 비슷한 것으로 5년 연속 세계 1위에 자만해 양산기술 습득을 게을리한 탓”이라고 말했다.
LG필립스LCD가 그 해 글로벌 LCD패널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처음으로 추월한 성과를 두고 한 말이다. 당시 그의 발언은 삼성그룹 수뇌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반대로 LG필립스LCD를 비롯한 LG그룹 임직원들에게는 ‘일등 LG’란 자부심을 갖게 해준 사건이었다.
위기의 순간, 구원투수로 나선 구본준은 과연 LG전자의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내년 LG전자는 화려한 부활에 성공할 수 있을까. 글로벌 IT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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