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식 개혁·개방 바람 부나
김정은식 개혁·개방 바람 부나
김정은식 ‘마이웨이(My way) 정치’가 시작된 것일까. 최고지도자로 등극한지 7개월을 넘기면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파격적인 통치스타일이 눈길을 끌고 있다. 대개가 아버지 김정일 시대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던 조치다.
김정일이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으로 최고 권력을 거머쥔 직후 “나의 사상은 붉다. 나에게서 변화를 기대 말라”고 했던 것과 대비되는 변화다. 압권은 자신의 부인 이설주를 실명과 함께 공개석상에 등장시킨 대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 때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를 혼자 맞았다. 그만큼 북한 체제에서는 퍼스트레이디를 공개석상에 드러내는 걸 꺼렸다.
김정은은 달랐다. 7월 초 음악공연에 전격적으로 이설주를 등장시켜 함께 관람하더니, 얼마 뒤 곧바로 그가 부인이란 사실과 이름을 관영매체를 통해 알렸다. 이설주가 2005년 8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북측 응원단으로 인천을 방문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극히 이례적인 남한 방문에 중국 유학(성악전공) 경험까지 있는 23세의 퍼스트레이디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김정은이 스위스 베른에서 조기유학 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해외유학파 커플이란 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일찌감치 해외 문물에 눈뜨고 자본주의와 서구사회에 대한 거부감도 적어 개혁·개방 노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 섞인 전망도 나왔다. 김정은이 부인과 함께 본 첫 공연인 모란봉악단의 시범공연도 전례 없는 장면을 연출했다.
미국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이랄 수 있는 미키마우스 인형이 등장하고 애니메이션 영화 백설공주의 장면과 영화 록키의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짧은 스커트에 가슴 위 어깨선을 다 드러낸 의상은 북한의 공연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렵던 모습이다. 이런 공연을 김정은이 관람하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만족감을 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김정은의 실용적 리더십은 김정일 장례를 치르고 본격적인 독자행보를 시작한 1월 이후 곳곳에서 드러났다. 5월 평양 만경대유희장을 찾았을 때의 일화는 대표 사례다. 그는 공원 보도블럭 사이로 자라난 잡초를 보고는 “관리실태가 한심하다”고 질타했다. 그러고는 스스로 허리를 숙여 풀을 뽑았다. 절대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이런 모습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옆을 따르던 노동당과 군부의 고위간부들이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해하는 게 드러났다.
김정은은 격한 어조로 “시설이야 그렇다 치고 잡초는 신경 쓰면 제거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일꾼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경종을 울려야 겠다”고 말했다. 이런 소동은 이튿날 노동신문에 그대로 소개됐다. 공장이나 건설현장, 군부대 등을 찾는 이른바 현지지도에서도 김일성,김정일 시대와 다른 지도자의 모습을 선보였다.
설날 특수학교인 만경대혁명학원에 들려서는 식당을 일일이 헤집고 다니며 원아들의 식사를 직접 챙겼다. 식탁 위 간장병을 기울여 손가락에 묻힌 뒤 맛을 보기도 했다.
농구장에서는 바닥을 손으로 만져보고 공을 드리블해 보는 모습도 포착됐다. 학교 관계자가 아이들이 준비한 공연을 볼 것을 제안하자 “설날 명절인데 쉬도록 하라”며 그냥 넘겼다. 다른 현지지도 때는 기념식수를 하려다가 “삽질 몇 번 하는 건 형식주의”라며 물을 준 뒤 자신이 직접 흙을 덮고 다지기를 하는 바람에 구두에 진흙이 가득묻어나기도 했다.
신축한 극장에 가서는 당 간부를 앞자리에 앉게 하고는 자신이 바로 뒷자리를 잡아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는“극장을 앞사람 때문에 안보이게 지으면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원에서 판매할 햄버거를 직접 살펴보고, 미니골프장 건설을 지시한 것도 눈에 띈다.
이런 그의 통치스타일을 놓고 무엇보다 경제부문에서 실용적인 노선이 도입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다. 북한이 공개한 김정은의 4월 6일자 노동당 간부들과의 담화엔 이런 징후가 잘 드러난다. 김정은은“내각은 나라 경제를 책임질 경제사령부”라며 “경제 사업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는 내각의 통일적 지휘에 따라 풀어가라”며 힘을 실어줬다. 오랜 기간 군부가 장악했던 외화벌이 돈줄을 내각 쪽을 돌려 정상화하겠다는 의미다.
4월 15일 20분 간의 첫 공개연설 때 군간부들을 겨냥해 “신발창이 닳도록 뛰고 또 뛰는 것을 체질화 하라”고 촉구한 것도 군부에 대한 경고였다. 김정은이 휴일인 7월 15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열어 이영호 총참모장을 전격적으로 숙청한 것도 군부의 저항이나 반발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게 정부 당국의 평가다.
국가정보원이 7월 26일 국회 정보위에서 “이영호의 전격 경질은 김정은이 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이영호가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데 따른 문책성 인사”라고 보고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 당국자는 “김정은과 그 후견세력인 고모 김경희 노동당 비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최용해 총정치국장 등이 수차례 경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영호의 신군부 세력은 권력에 도취해 이를 듣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시행 10년째경제부문의 개혁·개방 조치에 대한 청사진은 7월 초 다양한 경로로 윤곽이 드러났다. 김정일이 경제개혁 차원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7·1경제관리 개선조치가 시행된 지 꼭 10년째 되는 시기를 계기로 한 것이었다. 북한이 검토 중인 방안은 기업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독립채산제와 대외 개방정책을 확대하는 게 골자로 알려진다.
정부 당국자들은 김정은이 내놓은 것으로 알려진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 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6·28 방침’이 사실인지 여부를 놓고 면밀한 분석 작업을 벌였다. 주된 내용은 생산물 처분권을 각 공장과 기업, 협동농장에 넘겨주고 국가는 시장 가격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를 위해 이미 올 초부터 경공업과 중공업, 협동농장 등 분야별로 시범 단위를 정해 적용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고 한다. 생산능력이 부족했던 시범단위들에 대해 국가가 생산 원료와 시설을 투자해 생산력을 높였고, 생산물에 대해서는 국가가 시장가격으로 구매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정은이 경제 부문의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에 착수했다는 사실은 국정원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국정원 측이 7월 26일 국회 정보위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김정은은 경제관리방식 개편 TF를 조직해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첫째 당과 군의 경제 사업을 내각으로 이관하고, 둘째 기업의 자율경영권을 확대하는 한편, 셋째 협동농장의 분조 인원을 축소하고, 넷째 근로자의 임금인상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특히 김정은이 신경 쓰는 군부의 돈줄차단은 힘이 부쩍 실리고 있다.
최영림 총리는 요즘 공장이나 기업소 등을 부지런히 누비고 있다. 김정일과 김정은의 ‘현지지도’와 차별화되는 총리의 현장점검인 ‘현지요해’다. 최영림이 올 들어 7월 말까지 50회의 현지요해를 한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가 김정은 시대 들어 실세총리로 부상하고 있는 것도 이런 움직임에서 감지할 수 있다.
김정은의 실험이 성공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대외팀장은 “북한은 경제개혁과 체제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기로에 섰다”며 “5월 이후 경제분야에 집중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노동신문 등에 경제 관련 기사가 지난해보다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정은이 풀어야 할 경제부문 과제 가장 기본적인 건 선군 프레임에서 경제를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른바 ‘2경(제2경제)’으로 통칭되는 국방경제를 앞세우다보니 자원배분의 한계가 나타났다. 북한의 국민총소득(명목 GNI)은 2009년 들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여기에 다 20%대로 떨어진 공장가동률과 3난(難)으로 일컬어지는 식량·달러·에너지 부족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식량의 경우 2010년 기준 460만~540만t이 필요하지만 적게는 50만t에서 130만t까지 부족한 실정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올 초 북한에서 70만t의 식량부족이 생기면 주민 600만명이 굶주릴 수 있다는 추정치를 내놓기도 했다. 여기에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대북지원의 부족,외자유치 프로그램의 실패 등이 더해져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경제개혁과 체제강화 두 가지 숙제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도발에 이은 잇단 대남위협과 강경책으로 이명박 정부와의 관계가 꼬인 것도 부담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으로 달러벌이에 인공호흡기 역할을 해주던 관광대가가 끊긴 건 물론이고 교역과 투자 등 경협사업도 직격탄을 맞았다. 천안함 폭침도발로 인한 5·24 대북 제재조치로 대북 시설투자와 방북, 물자의 반출입이 사실상 전면 중단됐다.
221개 기업이 569억원의 남북협력기금대출을 받았고 174개 업체가 대출금 365억원을 상환유예 받은 점을 살펴봐도 경협중단의 여파가 우리 기업을 넘어 북한에 큰 파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남북관계 경색 속에서도 중단위기를 넘긴 개성공단의 경우는 123개 입주업체에 북한 근로자 5만명이 일하며 그나마 정상가동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꼬인 남북관계 속에 대북식량 차관 상환일이 도래했지만 북한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부터 노무현 정부 말인 2007년까지 북한에 준 식량차관은 260만t으로 모두 8억7532만 달러다.10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에 따라 6월 7일 첫 상환일이 닥쳤다. 6월 갚았어야 할 북한의 상환분은 583만 달러였다.
앞으로도 북한은 식량차관 외에 철도·도로 건설자재장비 1억3000만 달러, 경공업 원자재 8000만 달러 등의 대북 차관을 상환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북한이 차관 상환 문제에 긍정적으로 호응해 나올 가능성이 작다. 깐깐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접근 방식을 감안하면 북한이 식량차관 문제에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지 않고서는 향후 남측으로부터의 식량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건 북한이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접점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북한은 내년 2월 출범할 차기 정부와의 대면을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산적한 내부 경제문제 때문에 김정은의 개혁·개방 구상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란 비관적 견해가 적지 않다. 국정원은 “김정은이 사회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어 근본적인 개혁·개방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김정은은 후계자 시절 야심차게 화폐개혁을 준비했다.
권력을 거머쥔 후 자신의 경제 살리기 업적으로 삼으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2009년 11월 전격 단행한 화폐개혁은 공급물량의 부족과 시장상인들의 반발 등으로 완전 실패했다.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희생양 삼아 공개처형했지만 상처는 남았다. 경제부문의 리더십에 큰 멍이 들고 자신감을 잃은 것이다.
김정은이 4월 공개연설에서 “더 이상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미덥지 않다는 지적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다. 그동안 김정은의 경제관련 행보가 말뿐이거나 초보적인 진단에 그치고 처방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경제난 해결에 팔을 걷어부치고 수술에 나서야 하는데도 한발짝 떨어져서 망설이는 형국이란 얘기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대외팀장은 “북한이 선군(先軍)에서 선경(先經)의 길로 나설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남북 경협의 새로운 판짜기를 포함한 보다 면밀한 대북정책을 수립해 적극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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