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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불량 배전설비 정기검사 없었다

노후·불량 배전설비 정기검사 없었다



퀴즈 하나.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송·변전소에서 가정, 빌딩,공장으로 이어주는 배전설비(전신주, 변압기 등)는 정기적으로 검사할까. 터무니없는 질문 같지만, 정답은 ‘안 한다’이다. 43만km에 달하는 배전 전선, 199만대의 변압기, 830만 주의 전신주 등 배전설비는 검사제도 자체가 없다. 사용중인 배전설비는 물론이고, 처음 설치할 때도 사용 전 검사를 하지 않는다. 가정과 산업 현장에 직접 전기를 공급하는 배전 설비가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이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매년 1만 건 안팎의 정전사고가 발생한다. 이 중 배전선로에서 약 8000여 건이 발생한다. 8월 1일 새벽 일어난 서울 행운동 주택가 정전 사태는 배전선로에 설치된 낙뢰방지설비가 파손돼 일어났다. 폭염으로 인한 전력 수요와는 상관이없었다. 7월 27일 서울 거여동, 경기도 김포시 북변동 아파트 단지 정전 사고도 배전 설비가 문제였다.


한전 노조 “대 국회 활동으로 법 개정 막았다”한국전력에 따르면 전국 폭염특보가 발효된 7월 24일부터 8월 7일까지 22건의 아파트 정전사고가 발생했다. 피해를 입은 가구는 1만3000여 세대에 달한다. 정전 원인은 대부분 배전설비 노후·불량이었다. 올 2월 2900여 가구가 불편을 겪었던 서울 등촌동 정전 사고 역시 배전설비인 주상개폐기 불량이 원인이었고, 지난해 말 서울 화곡동에서는 전신주가 쓰러져 인근 4000여 가구가 1시간 동안 추위에 떨어야 했다.

한국전기안전공사 관계자는 “매년 발생하는 정전사고 중 자체 유지·관리 부실 등 인재성 안전사고는 전체의 23.5%에 달한다”고 밝혔다. 소방방재청은 최근 “도심 내 배전설비 안전 점검을 한 결과 전력설비 안전관리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며 “배전선로의 구조적 안전성을 판단하기 위해 구체적인 점검·측정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발표했다.

배전설비만 불안한 것은 아니다. 송전선로나 변전설비도 처음 설치할 때만 검사를 하고, 사용 중에는 정기검사 제도가 없다. 현재 송전선로는 20만 볼트 이상 철탑·송전선로를 설치할 때 사용 전 검사만 실시한다. 20만 볼트 미만일 경우는 선로 길이 10km 이상만 검사

대상이다. 이런 기준 때문에 지난 5년간 설치된 송전선로 중 54%는 검사 대상에서 제외됐다. 변전소도 마찬가지다. 변압기나 차단기 등주요 변전 시설은 일단 설치하면 정기 검사를 하지 않는다.

차단기를 교체할 때도 20만 볼트 이상만 검사 대상이다. 때문에 전체 변전소 731개 중 87%는 정기 검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해 노후설비를재사용하다 정전 사고로 1000억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낸 울산 용연전소도 검사 제외 대상이었다. 물론 전력 설비 고장으로 정전이 돼 국민·기업이 피해를 입어도 정부가 배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난 10년 동안 발전·송전·변전 설비로 인한 정전 피해에 대해 정부가 배상한 사례는 없었다. 배전 설비로 인한 배상액은 10년간 약 2억원이 전부다. 이 문제는 2001년 감사원 감사, 16~17대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그때마다 정부는 한국전력이 설치·관리하는 전력 설비를 제3 외부 기관이 정기검사 하는 제도를 추진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왜일까.

전력산업을 총괄하는 지식경제부는 산업자원부 시절부터 여러차례 전력설비 외부 정기검사제도를 도입하고, 한전과 전기안전공사로 나눠진 검사 업무를 일원화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2009년에도 공공기관 선진화 차원에서 추진했다가 무산됐다. 당시 정부는 연구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배전설비 정기검사 제도 도입을 결정하고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 지식경제위원회에서 부결됐다.

업계 관계자는 “한전이 국회에 로비한 결과”라고 말했다. 한전 측도이를 부정하지 못한다. 한전 노동조합이 발행하는 2009년 2월 28일자 전력노보를 보자. 헤드라인은 ‘대 국회활동으로 전기사업법 개정안 통과 저지’다.‘전력노조의 적극적인 대국회 정치활동으로 정부가 추진하려던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폐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현행 한전이 자체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배전설비 검사업무를 법제화하여 정기검사제도로 강제화하고, 전기안전공사와 한전으로 이원화돼 있는 일반용 전기설비 사용 전 검사 업무를 전기안전공사로 일원화하는 것이다. …(중략) … 평상시 조합의 꾸준한 정치활동 결과로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노영민, 이종혁, 이명규, 최연희, 주승용, 김재균, 최철국 의원 등이 적극적으로 법률 개정을 반대하였기에 정부의 전기사업법 개정안이 폐기될 수 있었다’.




정기검사에 연 5500억’ 근거로 반대노보에는 이 법안을 막는 데 회사(사측)의 협조 요청이 있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왜 한전은 이토록 반대하는 것일까. 노보의 한 대목에서 한가지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한전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려는 일체의 시도가 다시 있을 경우 노조본부는 조합원 생존권 사수 차원에서 또다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투쟁해 저지해 나갈 것이다’. 익명을 원한 한 대학교수는 “한전이 관리하는 배설설비를 감히 전기안전공사가 감시하려 한다는 감정적인 면도 깔려 있는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기득권과 밥그릇 문제라는 얘기다.물론 한전과 일부 국회의원들은 다른 반대 논리를 내세운다. 한전이 자체점검을 잘하고 있다, 외부검사 제도를 도입하면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소요된다, 검사의 실효성이 없다, 전기요금이 대폭 오른다 등이다. 하나 하나 따져보자. 2006년 민주통합당 노영민 의원은 국정감사장에서 이 제도 도입에 반대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한전 책임이라 할 수 있는 배전선로 사고가 나는 것은 1년에 아주 극소수로 적다.” 하지만 이 극소수 사고가 치명적일 수도 있다. 2005년 6월에는 배전설비 감전사고로 2명이 사망했고, 2001년 7월에는 불량 가로등 감전 사고로 19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ㄴ한 업계 관계자는 “전기공사업체를 운영했던 노영민 의원이 전문성을 내세워 전력설비 외부감사제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해왔다”고 말했다. 3선인 노 의원은 국회에 입성하기 전 충북 청주에서 한전과 거래하던 전기공사업체인 금강전기를 설립·운영했었다. 그는 국회에 들어와 줄곧 전력산업과 관계된 지경위에서 활동했다.

노영민 의원실 관계자는 “금강전기 지분을 모두 매각했기 때문에 현재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이 제도가 실효성도 없이 예산만 낭비할 것이라는 점도 반대 명분중 하나다. 한전 관계자는 “배전설비를 전기안전공사에 위탁해 정기검사를 할 경우 1년에 5480억원의 예산이 더 들어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말했다. 옛 산자부 연구 용역 보고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배전 선로를 1년 안에 모두 검사할 경우, 연간5480억원이 소요되고, 전기료가 2.2% 인상되는 효과가 있다. 당시 기준으로 한 가구당 연 3만1900원이 전기료가 오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에는 맹점이 있다는 게 전기 분야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업계 한 관계자는 “한전이 이미 예산을 들여 자체 또는 민간에 위탁해 배전설비를 관리하고 있는데, 이를 외부 공공기관이 검사한다고 전기료 인상 요인으로 전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지경부와 함께 이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전기안전공사 측은 다른 계산을 내놨다. 전기안전공사 홍귀석 미래전략실장은 “3~4년에 한 번 정도 정기검사를 하면 1년에 670억~700억원의 비용이 든다”며 “이를 굳이 전기료 인상에 적용한다 해도 연 0.16% 오르는 정도”라고 말했다. 홍 실장은 “전력 설비 사고는 전기사업자가 대외비로 관리하고 공시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전력설비 사고가 국민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제도 도입에 따른 편익 계산도 한전과 전기안전공사 간 큰 차이를 보인다. 한전은 2013~2016년 4년 동안 이 제도 도입에 따른 비용을 1조172억원으로 계산하고, 전기공사는 2692억원으로 셈한다. 이에 따른 순편익(편익-비용)은 4조3820억~5조4002억원이다. 국민안전과 전력설비 안전관리 체계 선진화라는 명분을 제외하더라도 손실보다는 이익이 많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외부기관이 전력설비를 검사함으로써 고질적인 부패고리도 끊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업계 관계자는 “제3자 공공기관이 개입하면 전력 분야에 만연한 부패를 줄이고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전 공사 관련 비리 사건은 잊을 만 하면 터졌다. 올 2월에는 한전 배전부 소속 과장이 공사 관련 청탁을 받고 뇌물을 챙긴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받았다. 5월에는 전력업체들로부터 매달 100만~200만원씩 월급 형태로 뇌물을 받은 한전 1~2급간부 4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전력설비 외부검사제도가 도입될 경우 이를 맡게 될 전기안전공사 관계자는 “배전 검사를 담당할 전문성있는 내부 인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민간업체에 위탁하지 않고 자체 검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련 업계 한 전문가는 “한전이 배전설비 외부검사를 한사코 반대하는 것은 밥그릇 문제도 있지만, 만연한 비리가 드러날 것이 두려운 면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경부 입장 ‘미적 미적’그동안 수 차례 이 제도 도입을 추진해 온 지경부는 올해도 관련 입안을 마치고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권과 한전 눈치를 보고 있는 듯 하다. 지경부 전력진흥팀 김헌태 사무관은 “에너지 관리팀을 중심으로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이고 검토가 완료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다른 지경부 관계자는 “배전설비 외부검사제에 대한 정부 입장 정리가 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폭염은 잦아들겠지만, 노후하고 불량한 배전설비로 인한 정전사고는 이어질 게 뻔하다. 한 업계 관계자는 “그래서는 안되지만, 그동안의 관례로 볼 때 대형 전기 사고가 터진 후에야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될 것 같다”며 “사고를 미리 예방하는 정책은 티는 나지않더라도 뒷북 정책보다 훨씬 박수 받을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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