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맥주의 도시
시와 맥주의 도시
네덜란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그가 살던 레이던으로 가서 지내기로 합의를 봤다. 막상 가려니 덜컥 겁이 났다. 나로선 두 번째 이민이었다. 다섯 살 때 우리 가족은 홍콩에서 뉴욕으로 건너가 브루클린 빈민가에 정착했다. 방과 후 매일 차이나타운의 봉제공장에서 가족과 함께 일했다. 그런 까닭에 이민이라면 더는 환상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됐다.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어쨌든내겐 하버드대 졸업장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진짜 두려움은 타지에 동화하는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나는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었지만 키152㎝의 자그마한 중국 여성을 네덜란드 사람들이 받아줄까?
레이던은 키 큰 백인들로 가득해 보였다. 나무가 늘어선 운하 둑을 걸으면서 왜가리를 봤다. 왜가리라니! 나는 지하철을 타며 자란 도시소녀였다. 도시 생활의 잔인함과 삭막함에도 나는 뉴욕의 익명성과 거리를 가득 채운 다양성을 좋아했다. 내가 아는 동물이라곤 비둘기와 다람쥐 정도였다.
남자친구는 중고 자전거의 짐 싣는 자리에 나를 태우고 자갈길을 달리며 레이던을 구경시켜주었다. 렘브란트의 생가를 보며 그는 “아주 오래 됐다”고 설명했다.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살았던 클로크스테그 골목과 성베드로 교회 앞에서도 그는 “이곳 역시 아주 오래됐다”고 말했다. 많은 박물관, 성채, 식물원도 역사가 깊었다. ‘오래됐다’는 표현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길모퉁이를 돌자 기울어진 17세기 가옥 정면에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E E 커밍스의 시가 손으로 크게 쓰여져 있었다. 그야말로‘오랜’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나는 레이던의 벽에 쓰여진 시와 사랑에 빠졌다. 셰익스피어, 릴케, 네루다 등의 시가 여러 집의 벽면을 장식했다.네덜란드 사람들은 분주한 쇼핑가를 거닐면서 간식을 즐겼다. 나도 그 맛을 알게 됐다. 파라핀 종이 고깔에 가득 찬 두꺼운 감자튀김.옥외 시장에서 갓 구워낸 커다란 웨이퍼(사이사이에 카라멜이 들어있었다).
특히 나는 자동판매기 식당을 좋아했다. 슬롯에 동전을 넣은 뒤 유리 뚜껑을 열어 뜨끈뜨끈한 스낵을 꺼내 먹었다. 두툼한 쇠고기나 송아지고기 라구에 빵가루를 묻혀 튀긴 크로케트, 네덜란드식 소시지, 튀긴 치즈 페이스트리 등.레이던은 내 생각만큼 동질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레이던대학교의 영향이 큰 듯했다. 레이던이 스페인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을 때 그곳을 지켜낸 시민들의 공적을 기리려고 1575년 설립된 대학이었다.
다양한 국가 출신의 학생들은 주민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다. 양쪽 모두 파티를 좋아하기 때문인 듯했다. 10월3일(스페인군이 레이던 포위를 푼 날)이나 여왕의 날(4월 30일) 같은 축제일에는 모두가 거리로 나가 마시고 흥청댔다.하지만 나의 작은 키는 늘 신경이 쓰였다. 내 정수리는 화장실 거울의 아래쪽에 겨우 닿았다.붐비는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머리를 거의 보지 못하고 몸통들 사이를 헤쳐가야 했다. 그러나 자전거에 올라타면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종종 식료품, 애완동물, 보행보조기를 자전거에 싣고 한 손으로 사과를 먹으며 달린다. 자전거 실력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듯 그들은 속도를 내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면 내가 피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건물도 들이박고 교수님들도 치었다.한번은 장난감 가게의 선반도 들이받았다. 남자친구는 나를 ‘레이던의 공포’라고 불렀다.마침내 레이던과 나는 서로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시와 맥주의 도시, 전통을 끈질기게 고집하면서도 미래를 지향하는 도시. 미국 대통령 여러 명이 레이던 청교도의 후손이었다. 렘브란트가 태어나고 처음 작업했던 도시다. 나에게도 레이던은 재탄생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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