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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어긋난 모험 - 전쟁의 명분과 진실 사이에서

미국의 어긋난 모험 - 전쟁의 명분과 진실 사이에서

부시의 ‘악의 축’ 연설문을 작성한 데이비드 프럼의 항변과 아쉬움
2002년 백악관에서 중동평화안을 발표하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왼쪽은 콜린 파월 국무장관, 오른쪽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2001년 12월 막내딸을 얻었다. 이른바 ‘워 베이비(war baby)’다. 아내는 한밤중에 딸에게 젖을 먹이면서 워싱턴 상공을 경계하는 F16기 소음을 들었다. 그 몇 주 전엔 한 저격수가 워싱턴 교외 지역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또 탄저균 공격으로 5명이 숨졌고 17명이 감염됐다. 그 다음은 또 어떤 일이 터질까?

그해 10월 백악관 브리핑에 참석했다. 경호 책임자가 생물무기 공격에서 백악관을 보호하는 계획을 설명했다. 안심이 되지 않았다. 공격을 당하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듯했다. 신임 국토안보 보좌관에게 참모들 한 브리핑은 더 불길했다. 그들은 전략적 지

점에서 동시 다발 차량폭탄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관리가 아침 신문을 가지러 현관에 나갈 때 암살을 당하거나 지하철 역에 독가스가 살포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당시의 모든 워싱턴 주민처럼 아내와 나도 지하실에 비상 물품을 준비했다. 통조림, 생수, 전등, 배터리 등. 피난 계획도 세웠다. 워싱턴에서 2시간 떨어진 곳에 만날 장소를 정했고, 몇 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면 내가 사상한 것으로 간주하라는 약속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불안과 염려가 지나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을 감행하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리면서 미국 정부는 불안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반드시 두려움 때문에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건 아니었다. 새로운 중동을 만들려는 열정도 컸다.

이라크전 발발 1~2년 전 영국 출신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아파트에서 아메드 찰라비를 처음 만났다. 찰라비는 이라크 망명인사 지도자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사담 후세인이 타도된 뒤 이라크 부총리를 지냈다. 그는 거실 한쪽 끝에 근엄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그 반대편에는 불안해 하는 이라크인들 몇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한 명씩 차례로 나와 찰라비에게 아랍어로 질문을 하거나 민원을 이야기하고는 정중히 물러나 앉았다. 이라크인들이 떠난 뒤 찰라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와 함께 이라크의 향후 민주화 가능성을 논의했다.

이라크전 발발 직전 찰라비의 런던 아파트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우리 일행은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다. 찰라비는 이슬람 신비주의파 수피교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는 1940년대 옷을 입은 7명의 흑백 사진을 보여줬다. 그의 부친이 창업한 회사의 이사들이었다.

수니파, 시아파, 기독교인, 심지어 유대인도 있었다. 찰라비는 그 사진을 찍은 시점이 유럽이 집단학살로 갈갈이 찢어질 때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국-이라크 전쟁 직후 찍은 사진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가 영국에 반란을 일으키자 영국군이 진압한 전쟁이다. 하지만 바그다드의 유대인 학살은 막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찰라비를 높이 평가했지만 난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그를 칭찬한 인사 중 한 명이 딕 체니 부통령이었기 때문에 내 생각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02년 찰라비는 콜로라도주 베일 부근에서 열린 미국 신보수주의(네오콘, neocon) 싱크탱크인 미국기업연구소(AEI) 하계 연수에 참가했다. 그와 체니는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서방 지향적인 이라크를 만들 수 있는지 논의했다. 불안해 보이는 사우디아라비아 대신 이라크의 석유에 의존하려는 생각이었다.

자의적인 전쟁을 치르려는 행정부는 명분을 두고 신중한 토론을 벌여야 마땅하다. 이라크전은 사실 문제가 많았다. 우선 1991년 제1차 걸프전과 달리 긴급 대응을 요구하는 임박한 위기가 없었고, 베트남과 달리 미국은 처음부터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공격을 감행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신중한 논의는 없었다. 이라크전은 부시 행정부 안에서 오랫동안 언젠가 결정해야 할 문제로 논의돼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미 오래 전에 내려진 결정처럼 이야기됐다.

2002년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이라크 부분을 작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원래 나는 ‘증오의 축(axis of hatred)’라는 표현을 썼다]. 그 연설은 테러 후원국이 테러단을 지원했다는 주장으로, 또 이라크·이란·북한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려고 무장을 한다는 경고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비판자들은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이 수니파인 하마스를 지원하는 것이나 이슬람 국가인 이란이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북한과 기술을 공유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일이 사실이라는 점을 우리가 안다. 실제로 파키스탄 핵 프로그램의 설계자가 알카에다에게 폭탄제조 기술을 팔아 넘기려 했다. 또 북한은 시리아에 핵시설 부품을 팔았다(2007년 이스라엘이 그 시설을 파괴했다).

일부 비판자들은 그 연설이 미국의 이란 정책을 망쳤다고 주장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2009년 이후 미국의 이란 정책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보고 난 뒤에는 특히 그렇다. 당시 미국이 직면한 전략적 도전을 묘사한 ‘악의 축’ 연설은 그후 실제 일어난 사건들로 입증됐다. 그 부분에서는 내가 사과할 일이 없다.

물론 행정부 안에서 논의가 몇 달간 더 계속됐지만 그 연설은 이라크전으로 가는 길에서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이 됐다. 2002 7월까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부도 미국의 의도를 반신반의했다는 점이 그 유명한 영국 총리실 메모에서 드러났다.

미국 의회와 국민이 부시의 이라크전 결정을 지지하도록 하려면 상당한 홍보가 필요했다. 몇몇 행정부 관리는 사담 후세인이 9·11 음모에 직접 연루됐을지 모른다는 모호한 증거에 매달렸다. 특히 체니 부통령은 모하메드 아타가 이라크 정보 장교들과 프라하에서 만났을지 모른다는 점에 집착했다. 곧바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밝혀졌지만 체니가 그런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믿기는 어렵다.

폴 울포위츠 국방차관은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국민을 대상으로 자행하는 끔찍한 범죄를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를 위해 그토록 비싼 전쟁을 치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관건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확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증거가 얼마나 믿을 만했을까? 보안 등급이 낮은 우리 같은사람으로서는 진실을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기대야 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이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2003년 1월 10일 이렇게 경고했다.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얼마나 빨리 손에 넣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총구에서 나오는 연기가 버섯구름이 되는 일을 우린 원치 않는다.”

부시 행정부 주요 인사들의 그런 확신에 찬 언급은 미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보수파만이 아니라 의회와 언론계의 ‘진보적 매파’도 지지했다. 또 미국만이 아니라 거의 전세계도 한마음이 됐다. 이라크전은 미국의 단독 전쟁이 아니었다. 적용 기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49개국이 이라크에 파병했다. 폴란드, 한국, 덴마크, 호주, 뉴질랜드, 스페인, 그루지야 등이 지상군을 보냈고, 캐나다는 교관을 파견했으며, 독일은 자금을 지원했다. 물론 영국이 가장 많은 병력을 보냈다. 영국에서 이라크전 논쟁은 미국보다 더 뜨거웠다.

블레어 총리는 시에라리온과 코소보에 인도적 차원에서 파병한 적이 있었다. 그는 대량살상무기보다 이라크 국민의 해방을 더 강조했다. 사실 블레어의 논거가 경고로 받아들여져야 마땅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확보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블레어가 말한 인도적 차원의 전쟁 주장이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 차원의 전쟁 주장을 강화해주었다.

영국인들은 이라크전 개시에서 블레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가끔 의문을 갖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미국 의회의 민주당과 언론의 진보적 매파를 움직인 것은 부시가 아니라 블레어였다. 블레어가 없었다면 이라크전은 미국 의회에서 민주당의원들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을 듯하다.

부시는 전쟁을 둘러싼 논쟁의 막바지에 가서야 마지못한 듯이 블레어의 논거를 채택했다. 2002년 2월 26일 AEI 연설에서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이라크의 현 정권은 폭정의 힘을 과시해 중동 전체에 불화와 폭력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해방된 이라크는 자유의 힘을 과시해 수많은 중동 사람들에게 희망과 발전을 가져다 줌으로써 그 중요한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미국은 안보를 중시하고 자유를 믿습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이라크를 말합니다.”

민주주의 전파를 바탕으로 한 원대한 외교정책은 국가안보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명분이 무색해진 뒤에 나왔다. 부시는 2005년이 돼서야 이렇게 말했다. “모든 나라와 문화에서 민주화 운동과 민주적 제도의 성장을 추진하고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세계에서 독재를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원래 이라크전은 번개작전으로 구상됐다. 독재자를 몰아내고 그의 무기를 파괴한 다음 곧바로 빠져나온 뒤 이라크인들이 국가를 재건하고 유럽인들이 그 비용을 대도록 한다는 전략이었다. 전쟁의 명분을 대량살상무기에서 민주주의로 바꾸었을 땐 이미 이라크 국가재건을 무시한 전략이 한참 추진된 상태였다.

이라크전의 가장 암울한 시점(2005년께였던 듯하다)에 스위스의 한 언론인이 나를 찾아와 이라크에서 잘못된 모든 일을 두고 반 시간이 넘도록 성토했다. 그는 스위스에서 이라크전을 적극 지지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전쟁이 제대로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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