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개 왕조의 수도인 시안의 명물 … 맑고 차며 향기로워 남문 위에서 바라본 서안성곽과 성벽 앞 수로. 서안성곽은 중국 대도시에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은 고대 성벽이다.
1974년 3월 어느 날 중국 산시성 린퉁현의 한 작은 마을 시양촌. 양페이옌·양원슈에 등 일곱 명의 농민이 땅을 파 내려갔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메말라가자 마을회의에서 관개용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마을 남쪽 감나무 숲에서 땅을 파내려가던 중 곡괭이 끝에 사람 몸통 모양의 도용이 걸려 나왔다. 오늘날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리는 진시황 병마용이 지하 속에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2200여년 동안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 보물의 출현이었다.
중국 정부는 곧바로 1년여의 기초 조사에 들어갔다. 지하에 막대한 유물이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1976년 전시관을 시공했다. 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은 1만4260㎡에 달하는 병마용 1호갱이었다. 1호갱 주변에서 2호갱부터 4호갱까지 잇따라 발견됐다. 2호갱과 3호갱의 규모는 1호갱보다 작지만, 군대 편제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고대 군대의 좌·중·우 3군에서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에 해당한다. 3군을 보급·지원하는 4호갱도 있으나 완성되진 못했다.
진시황의 지하군단인 병마용의 1호갱. 전체 면적 1만4260㎡ 중 절반이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진시황은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13살에 왕위에 올랐다. 진시황은 통일제국이 만세(萬歲)토록 영원할 것이라 확신했다. 진시황은 죽은 뒤에도 대륙을 호령코자 했다. 사후에 잠들 자신의 능묘를 무려 70만명을 동원해 37년 동안 건설했다. 능원에는 죽은 진시황을 모시기 위해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묘군, 평소에 타던 청동거마 등이 묻혔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부속시설 중 하나로, 통일사업을 완수한 진시황의 군대를 재현했다.
불멸의 통일제국은 헛된 꿈병마용은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1987년 12월 유네스코는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만리장성·자금성·막고굴과 더불어 중국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병마용은 머리와 몸통, 팔, 다리 등을 따로 빚은 뒤 구워 조합해 완성했다. 병사용은 키 175~195㎝의 늠름한 체격으로 실제 사람과 흡사하다. 놀랍게도 병사용의 외모는 단 한 개도 같질 않다. 중국 정부는 병마용 발굴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발굴이 종료된 3호갱 외에 1호갱의 절반과 2호갱 전체는 실체만 확인했을 뿐 본격적인 발굴을 미루고 있다.
병마용에서 1.5㎞ 떨어진 진시황릉은 지난 2000여년 동안 도굴꾼의 로망이었다. 완공 당시 전체 부지는 50㎢, 봉분 높이는 120m에 달했던 세계 최대의 황제 능원이다. 진시황릉 지하궁전에는 수를 헤아리기 힘든 금은보화와 부장품이 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수많은 도굴꾼들이 진시황릉의 보물을 노렸다. 하지만 지하궁전으로 이르는 길은 미로와 같고,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부비트랩이 있어 약탈을 면했다.
진시황의 도시 시안은 우리에게 장안으로 잘 알려졌다. 중국에서 농경이 먼저 시작된 황허 중류에 위치해 신석기 유적이 많다. 도시 동쪽에 있는 반포유적이 대표적으로, 앙소문화의 진귀한 유물이 보존돼 있다. 시안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13개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시안은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의 로마, 터키의 이스탄불과 함께 세계 4대의 고도(古都)로 손꼽힌다.
시펑주가 숙성되는 특별난 항아리 ‘주하이’. 싸리나무 가지를 촘촘히 엮어 만든 바구니다.시내 남단에는 시안의 상징물인 다옌타가 있다. 다옌타는 사찰 쯔언쓰 내의 석탑이다. 쯔언쓰는 648년 당나라 고종이 일찍 사망한 어머니 문덕황후의 명복을 빌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창건했다. 당대 말기 전란에 의해 사찰은 불타 없어지고 다옌타만 남게 됐다.
다옌타는 당대 저명한 승려인 현장이 652년에 건립했다.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경전 번역본을 보관하기 위해 쌓은 탑이다. 시안의 또 다른 상징물은 명주 시펑주다. 시펑주는 엄밀히 따지면 시안과 무관하다. 생산지는 시안에서 1시간 떨어진 펑샹현 류린진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시펑주 하면 으레 시안을 떠올린다. 시펑주가 진나라의 어주(御酒)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원전 600여년 전 춘추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섯 패왕 중 하나인 진목공이 다스리던 펑샹현 일대인 옹성에서 300여명의 야인이 말 여러 필을 잡아먹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말들은 진목공이 아끼던 것이었기에, 현지 관원들은 야인들을 붙잡아 도성으로 압송했다. 사형을 앞둔 야인들을 진목공이 나서서 사면하고 ‘진주(秦酒)’를 하사했다.
몇 년 뒤 진나라는 이웃 진과 한원에서 전쟁을 벌였다. 진목공은 진혜공이 이끄는 군사들에 의해 포위를 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렸다. 이 때 일단의 병사들이 몰려와 진혜공의 군대를 물리치고 진목공을 구해냈다. 바로 진목공이 풀어주고 진주까지 하사했던 야인들이었다.
진주가 중국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21년 5월이다. 연과 조를 잇따라 멸망시킨 진시황은 승전을 기념해 성대한 술잔치를 벌였다. 문무백관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모두 진주를 마시며 축하했다. 같은 해 7월 제나라마저 무너뜨려 천하통일을 이루자, 더 큰 술잔치를 벌였다. 이때부터 진주는 진황실의 어주가 됐고, 진시황이 황위에 오를 때도 진주로 의식을 거행했다. 진주는 진나라 멸망 뒤 이름이 ‘류린주’로 불렸다가, 명나라 때 지금의 시펑주로 바뀌었다.
시인 소동파도 격찬시펑주는 농향(濃香)형 바이주로, 사용되는 원료나 양조기술은 여타 술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증류과정을 거친 뒤 얻은 술을 ‘주하이(酒海)’라는 독특한 용기에 사용해 숙성시킨다. 주하이는 싸리나무 가지로 짠 거대한 바구니다. 이 싸리나무는 멀리 친링산맥에서 베어온 것이다. 용기의 높이는 사람 키보다 높고 크기는 장정 서넛이 팔을 뻗어 둘러싸야 할 정도다. 오늘날에는 5~8t의 술을 한 번에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시펑주의 맛은 당나라 때부터 ‘맑고 차며 향기롭다’는 명성을 얻었다. 북송의 시인 소동파는 “둥후의 버드나무와 류린의 술은 아낙네의 손처럼 깨끗하다”고 격찬했다. 현대에 들어서 시펑주는 1952년 1회 전국 술품평회에서 마오타이·펀주·루저우다취와 함께 4대 명주로 등극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속보]李 대통령 “노동·중소기업 공정한 경제 생태계 구성도 중요”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팜이데일리
염경엽vs김경문 맞대결..너를 꺾어야 내가 산다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이스라엘, 이란 혁명수비대 본부 공습…총사령관 사망”(상보)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마켓인]엠플러스자산운용 매각 결국 불발…"수의계약 전환 고려"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HLB테라퓨틱스, 3상 결과 기대로 상승…애드바이오텍 연속 上 종료 [바이오맥짚기]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